2011년 12월 30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나도 왕따였다

나도 왕따였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어린 영혼의 자살 소식이 음울함의 두께를 더하는 세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은 많은 이들을 마음의 감옥에 가두고 있다.
지옥이 따로 없다.
중학생들의 행위라고 하기엔 그 수법이 너무도 잔인하다.
폭행은 기본이고 심지어 전기선으로 목을 묶고 끌고 다니면서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게 하거나 물고문을 가하는 등 상상도 못할 짓으로 피해자를 괴롭힌 사실이 수사결과 밝혀지고 있다.
그렇게 석 달여 동안 진행된 33차례에 걸친 폭행과 174건의 협박 문자가 어린 영혼을 극단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해지던 위해는 고통 받던 피해자가 지옥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스스로의 삶을 지우는 선택을 하고나서 비로소 멈췄다.
무엇보다 끔찍한 건 덫에 걸린 어린 영혼이 발버둥 치던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그의 절망을 알아채지 못한 현실이다. 교육 당국은 물론 학교도 선생도 부모도 친구도 그 누구도 아이의 고통을 품어주지 못하고 방조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는 초중고생 규모가 3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는 언론 보도다.
예사롭지 않은 정황이다.
만일이라는 가정은 늘 후회스럽기 마련이지만 아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가 무관심 때문에 무너진 상황이 가슴을 치게 만든다. 그렇게 아플 수가 없다.
만일 선생님이 교실에서 혼자 울고 있던 아이를 발견했던 그 순간, 그의 고통을 살피겠다는 의지를 조금만 더 키웠더라면 이 가슴 아픈 현실을 피할 수 있었을까 묻게 된다. 아무리 직장생활이 바쁘더라도 자식과 소통하고자 하는 부모의 관심이 중심을 잡고 있었다면 미래 희망에 들뜬 아이의 환한 표정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회적 책무 역시 마찬가지다. 툭하면 요즘 아이들 타령을 하면서도 그들의 굴절된 행위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비중을 두고 다루었던 가를 따져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국가도 결코 가볍지 않은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는지 살필 일이다.
파행으로 치닫는 일선 교육의 폐단에도 불구하고 피멍이 들고 죽어 넘어가도 속수무책인 국가가 무슨 신뢰로 국민들에게 출산을 장려하고 교육정책을 논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가 어린 생명을 해친 공범인 것이다.
자기 일 외에는 관심이 없는 이기적 풍토가 벼랑 끝에 매달린 아이의 절박한 외침을 가로막았다.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우리의 죄가 크다 할 것이다.
특히 무한책임을 져야 할 교육 현장에 있는 나로서는 더 없이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이다.
마음의 감옥에 갇히는 것만으로 면피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하겠다.

어릴 적 경험으로 왕따의 고통을 익히 알고 있다.
일찍이 적지 않게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던 내가 감내해야 했던 의례적인 절차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가, 용산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수송초등학교로 전학을 간 적이 있다.
명문 중학교에 진학시키려던 부모님의 노력을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내게는 쓴 추억으로 남아있는 인생의 한 페이지다. 학교를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공백기를 거쳐야 했는데 막상 학교 생활이 시작되자 사정없이 성적이 추락하는 복병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예상못한 후유증이었다.
그 전까지 우등생이었던 나로서는 실로 견디기 힘든 충격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왕따의 유탄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우등생이라는 프라이드를 잃은 상처를 쓰다듬을 틈도 없이 아직은 낯 설기만 한 친구들의 냉대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선생님이고 친구들이고 내가 중심이었던 전 학교와는 너무나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왕따로서의 나의 삶은 차라리 지옥이었다.
존재감 없는 전학생에서 왕따로 이어진 내 삶은 힘들어진 상황 빼고는 흥미없는 현실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그 때 마음 붙일 데 없이 겉돌면서 거의 날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자칫 했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숨통을 열어주고 흔쾌히 피난처가 되어준 가족이나 만화책, 그리고 교회와 동네 친구들의 존재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친구나 동생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만화책을 보면서 아니면 어린이 주일학교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다독거릴 여유를 챙길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나마 치유할 기회를 실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 긴 어둠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피해 학생 부모가 학교 당국과 가해학생 부모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모양이다.
미국의 지방정부가 비슷한 사례로 26억여원을 지급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만큼 어떤 형태로든 손해배상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도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해마다 적지 않은 청춘들이 같은 이유로 유명을 달리하고 있건만 이를 수수방관해 온 국가의 배상 책임은 지극히 당연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피해자 부모라고 예외를 둘 수 없다. 긴 세월동안 아들의 고통을 짚어내지 못한 죄가 결코 적지 않다.

가해 학생들을 괴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모든 일탈이 어른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예전처럼 형제자매가 많은 것도 아니고 일하는 어머니가 늘다 보니 아이들을 거두는 손길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로 볼 때 무조건 매도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다. 고민을 듣거나 위로해 줄 대상도 없는 요즘 아이들의 불운을 물질적 풍요가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아이들이 인터넷 게임에 매달리게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초래되는 갖가지 경고들은 무신경하게 처리되는 경향이 있다.
보호막 없이 방치된 아이들의 안위를 챙길 염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겠다.
특히 대화채널 부재가 사회적 문제로 야기된 지 이미 오래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사후 약방문이긴 하지만 향후 재발되지 않도록 적절한 사회적 장치를 배려했으면 좋겠다.
학생들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안전장치로 대한민국의 21세기를 채워나가자.

"왕따 없는 그곳에선 행복한거니?"
어린 영혼의 명복을 빈다.

(2011. 12.30)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28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어느 날


어느 날

                                                                         홍문종


오는 날은 모르고
어느 날은 눈오고
지난 날은 비오고
아주 먼 날은 해쬐고

하루는 특별한 날
누군가 세상에 날
사람들 모두의 날
기쁘고 또 즐거울 날

하루는 그러한 날
누구도 버려진 날
아무도 모르는 날
아프고 또 우울할 날

에헤라 세상사람들아
한백년 살고지고라아
어느날 기뻐살고라아
어느날 또 슬퍼지고라아

어느 날 가버린 날
어느 날 오오는 날
어느 날 신나는 날
어느 날 또 소침한 날

새로운 태양이 어느날
새하얀 눈발이 어느날
새파란 구름이 어느날
새빨간 쎈 우박이 어느날

기다리는 어느날
보내주는 어느날
참아주는 어느날
기약없는 또 어느날

(2011.12.28)

2011년 12월 23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어떤 인연

어떤 인연


언제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아 마주하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지인이 있다.
오늘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할 얘기가 있다고 차 한 잔 나누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인연’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는 군 복무 3년 동안 단 한 번의 휴가도 나가지 않을 정도로 군 생활에 열심을 다했다.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국가에 최선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단다.
그런 그를 눈여겨보던 상관이 같은 부대 육군 대위였던 박지만씨에게 소개를 했고 그 인연으로 모 건설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는데 그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감사함을 가슴에 품는 계기가 됐다.
그러던 중 10년 전 우연히 박지만 씨의 누나인 박근혜 전 대표가 큰 뜻을 두고 있는 정황을 알게 되면서 동전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적지 않은 액수가 됐다.
그는 그 돈을 이번에 박 전 대표를 돕는데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비록 조그만 성공이지만 자신의 ‘오늘 날’은 좋은 인연을 맺은 좋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은 덕분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고 나 역시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는 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결론이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의 진심을 받아들였는데 에너지가 잔뜩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의정부중학교 동창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사람사이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같은 동창 중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나쁜 영향을 주는 친구가 있다. 좋은 친구들이 모이면 좋은 결과가 배로 쌓이지만 나쁜 인연은 정 반대로 상처를 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 의정부중학교 동창들은 수십 년 째 무탈하게 좋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는 자부심이 주를 이루는 대화였다.
무엇보다 친구의 정겨운 표정이 세상을 살아가는 뒷심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일전에도 밝힌 적이 있지만 나는 의정부 중학교를 입학해서 서울 대광중학교를 졸업했다. 도중에 서울로 전학을 간 나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동창회에서 성골(?)성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도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는 친구들이 고맙다.
해가 갈수록 그들의 존재가 소중해지는 걸 보면 우리가 좋은 인연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숱한 인연을 접하게 된다.
선한 인연도 만나고 악한 인연도 만난다. 좋은 인연인 것 같으면서도 나쁜 인연이 되고 나쁜 인연인 줄 알았는데 좋은 인연으로 매듭짓게 되는 경우도 많다. 마음먹은 대로 조절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다만 좋은 인연 나쁜 인연 가리기에 앞서 저마다 상대방에게 소중한 인연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스스로의 노력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우리에게 어떤 인연일까를 생각해 본다.
남한에서 본 북한과 북한에서 본 남한은 늘 상반된 시각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다.
물론 남한은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북한은 김정일 왕당파냐, 일반 주민이냐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조문’ 행위 하나도 같은 마음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서로 간에 얼마나 깊은 골을 형성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비단 조문 건 뿐만이 아니다. 사사건건 남한이 북한을, 북한이 남한을 수용하지 못하는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그만큼 남과 북은 서로에게 특수한 상황이고 까다로운 상대일 수 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외세와 손잡았던 역사의 불유쾌한 흔적이 적지 않다.
신라는 삼국 통일을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였고 백제는 일본을, 고구려는 만주를 끌어들였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게 된 우리의 서글픈 운명도 그런 식으로 이뤄졌다.
우리가 미국을, 북한이 중국을 등에 업고 그어놓은 38선이 60년 세월이 훌쩍 넘도록 두 동강이 난 한반도를 혈육을 그리워하는 애끓는 한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이나 중국과의 관계가 아무리 중요한 들 남북한의 인연만큼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인연이 존재할까 싶다.
이제는 긍정적인 인연이 되기 위한 남북의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적극적인 역할이 남북간 경색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1년이 또 지나가고 있다.
흰 눈까지 더하니 저무는 한 해가 더 실감나게 느껴지는 이 밤이다.
돌아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인연을 맺었다.
그 중에는 좋은 인연도 있고 아쉬운 인연도 있다. 모두가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좋은 인연들에게는 깊은 감사를, 아쉬운 인연들에게는 좀 더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을 날리는 눈발 속에 새겨본다.

(2011. 12. 23)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20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엄이도종(掩耳盜鐘)

엄이도종(掩耳盜鐘)

어렸을 때 ‘김일성’은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인이 됐고 이제 그의 뒤를 이은 아들 ‘김정일’의 돌연사가 지구촌을 달구고 있다.
허를 찔린 기분으로 '김정일' 사망소식을 접했다.
죽음 앞에서 왜소한 실체를 드러낸 본연의 모습이 주는 순간적인 당혹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지만 70도 못 넘기고 이렇게 일찍 삶을 마감할 줄은 몰랐다.
저녁 자리에서도 당연히 김정일 사망이 중심 화두가 됐다.
그의 사후 펼쳐질 한반도의 대 격랑, 통일한국의 미래, 김정일 사망을 둘러싼 음모 설, 김정은, 김정남 등 형제들의 갈등 기류 등 예상 가능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결국은 죽게 돼 있는 삶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애써 죽음을 인식하지 않으려 담담한 눈빛을 위장하는 허세도 의외로 많이 만나게 된다.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이틀을 살면 이틀만큼 가까워지는 죽음의 종착역, 그것이 인생인데 우매한 인간은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한치 앞도 못 내다 보고 탐욕을 부린다.
어찌 보면 인간의 서글픈 숙명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주어진 삶의 시간을 다 소진하면 종착지에 도달하게 돼 있으니 죽음만큼 공평한 게 없는 것 같다.
왕후장상의 삶이나 촌부의 무지렁이 삶이나 예외 없이 죽음과 마주하는 현실은 우리가 일상으로 목도하는 결론이다.

얼마 전 호암 이병철 회장이 타계 한 달 전, 정의채 신부에게 종교와 관련해 ‘24개 항목의 질의’를 던진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정작 질문을 던진 당사자는 듣지 못한 답변이 36년이 지난 지금 한권의 책으로 나오게 됐다는 언론 보도를 통해서다. 당시 고인이 소폐암 폐암 투병 막바지였던 정황을 감안해 볼 때 그의 의문은 ‘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천착’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이 품었음직한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의 표출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총수조차도 죽음 앞에서는 범부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 죽음 앞에선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

일행과 함께 하던 스님 한 분이 무심히 던진 말이 화두가 됐다.
인간이 자신의 죽는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삶의 마무리를 조금은 다르게, 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이었는데 사람들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긴 것이다.
포악한 독재자, 실패한 전제군주의 이미지 때문인지 김정일의 죽음이 섭섭하거나 애잔한 정서로 다가오지 않는다. 다만 그가 자신의 죽음을 얼마나 예견하고 있었는지, 살아생전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충분히 성찰했는지, 자신의 행위에 따른 시시비비를 가려본 적이 있는지, 무엇보다도 정작 본인은 역사와 민족 앞에서 성군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또 그럴 자신감은 있었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할 뿐이다.

김정일 자신은 절대권력을 행사하면서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참담한 생활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 실태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대로다. 아사한 북한 주민 수가 3,4백만 명에 이르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재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주민들이 넘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문득 궁금해진다. 김정일이 이토록 허망하게 세상 무대에서 사라질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다면 북한사회는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까?
그가 조국에 대한 뜨거운 마음으로 현실을 안타까워했던 지도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벤츠나 양주, 그리고 기쁨조에 미쳐 권력 유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극단적 패륜아로 보이지만 결국 역사가 기록해야 할 텐데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는 현실이 더 없이 아쉽다.

어느 정권이나 소통 부재가 문제시 되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교수신문이 집어낸 올해의 사자성어, 엄이도종'(掩耳盜鐘ㆍ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통의 불합리함을 개선하려는 의지 없이 따로국밥으로 가고 있는 정권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작년 사자성어는 장두노미'(藏頭露尾)였다. 경고해도 개선점을 보이지 않는 정부의 불통에 올해엔 더 강력한 메시지로 질타를 가한 셈이다.
그나저나 내년 이맘때에는 좀 더 긍정적이고 모두에게 행복감을 안겨주는 사자성어가 선정되었으면 좋겠다.

PS: 김정일 조문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나 본데 개인적으로는 조문에 신중한 찬성표를 던진다. 대대적이거나 공식적인 방법이 아니라도 조문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누가 됐건 어떤 상황에서라도 망자는 망자이다.

(2011.12.20.)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17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물안개


無爛凱


미소띤 당신은
수줍음 먹음고
물가의 안개는
가슴 떨리는 연정

은빛깔 딩신은
내마음 흔들고
촉촉한 안개는
맑은 눈망울 호소

애틋한 당신은
어울려 춤추며
잡힐듯 안개는
작은 어깨춤 흥취

청초한 당신은
남몰래 간질고
숨어진 안개는
나의 사랑의 노래

(2011.12.17)

****無爛凱(무란개).... 물안개를 소리나는 대로 표기해 보았음.
        현란하지 않고 개선장군의 오만함도 없는.

2011년 12월 16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살해된 국권

살해된 국권


불법 조업을 단속하던 우리 해경이 중국 어민에 살해당하는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진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사건 발생 이후 중국 여론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으로 우리의 심기를 자극했다.
(뭘 잘했다고) 해커들이 몰려와 한국 사이트를 공격하는 가하면 주중 한국대사관에 쇠구슬이 날아들어 유리창이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언론도 안하무인격인 여론과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중국 내 유력 매체인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살해 증거가 없다’며 발뺌하는 건 물론 이번 사건의 책임이 마치 우리 측에 있는 것처럼 공격적인 논조로 일관했다. (한국이) ‘별거 아닌 죽음’으로 부화뇌동 한다는 식의 주장으로 우리국민을 부글거리게 했다.

그러다 달라지기 시작한 건 중국 외교부의 ‘뒤늦은’ 유감이 표명되면서부터다.
자성론을 촉구하는 중국사회 여론이 강경하던 언론의 논조를 누그러뜨리며 견인하는 양상이다.
강경 일변도이던 환구시보도 확연히 달라진 논조를 들고 나왔다.
한국에 대한 불법조업이 근절되지 않는 배경과 관련해 중국어민의 불우한 환경을 설명하는 읍소(?)로 이해를 구하는 가하면 한국인에 비해 가난하고 평균교육 수준도 크게 떨어지는 중국 어민의 불법 조업을, 오만함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차원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이 한국을 존중하니까 약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강경책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며 자제를 당부하기도 했다. 한국 축구나 한국 문화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아부도 잊지 않았다.

외교부의 안일한 대응도 논란을 자초했다.
외교부의 적절하지 못한 처신이 발단이 된 것이다. 외교부는 이번 사건의 대응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중국이 일본과의 어로분쟁에서 압승한 ‘희토류 사건’을 해외 사례로 내놓았다. 희토류 사건이 나오토 내각 총사퇴의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일본의 대표적인 대중국 굴욕외교 사건으로 낙인찍혀있는 만큼 적절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외교부가 중국의 힘 앞에 지레 굴복, 패배주의적 사고에 빠졌다는 여론의 비난이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건 직후 중국대사를 불러놓고도 ‘유감 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여론의 반발을 샀었다. 물론 복잡한 셈법을 적용해야 하는 외교의 애로를 모르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여론을 의식한 외교부의 몇몇 선택들은 유감일 수먼저 헤아려야 할 절차를 생략해서 국민적 자존심에 손상을 줬다.

중국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관계를 이어왔다.
서로의 역사적 고비마다 함께 했던 순간이 적지 않다. 지금도 6자 회담 테이블에 같이 앉아 대한민국 미래를 논의할 정도로 오래 묵은 파트너십을 공유하는 사이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가 그렇듯 중국과도 우호적이고 생산적인 관계는 분명 아니다.
중국의 동북공정만 해도 사사건건 억지논리로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장벽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스포츠 경기라도 맞붙게 되는 날이면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다. 그 어떤 상대국 보다 더 승부에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기가 어렵지 않다.
우리 형편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 멀었다는 판단이다.
1000번이나 집회를 갖고 사과를 요구하는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를 외면하는 일본의 오만한 태도만 해도 그렇다. 사과는커녕 오히려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억지를 쓰고 있다. 중국 역시 우리가 강자였다면 이번 사건 과정에서 방약무도한 태도로 우리의 국권을 조롱하는 몰염치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다가 이를 제지하는 경찰을 죽여놓고도, 가장을 잃고 오열하는 가족의 아픔에 위로를 전하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저버리는 무례함을 범했다. 우리의 국권을 유린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번 사건이 개인에 대한 살인이 아닌 대한민국 국권의 살해 사건으로 해석돼야 하는 이유다.

반면 인접한 이웃끼리 생산적인 코드로 상생에너지로 서로를 키워가는 국가도 있다.
나라마다 속사정은 있겠지만 상대방을 하대하거나 속이는 일로 얼굴을 붉힐 일이 없고 해묵은 감정이 서로의 진로를 막는 일도 없다.
미국과 케나다의 경우, 월드 시리즈를 함께 하고 전화번호도 공유하는 등 거의 한나라처럼 우의를 다지고 있다. 그런 나라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미국은 멕시코와도 합리적인 관계다. 밀입국 문제도 야기될 수 있고 마약 밀수 역시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지만 우호적이고 선의의 상생을 유도하는 교류가 양국 사이에 시너지로 작용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나마 이 정도로 중국이나 일본에 대접을 받고 있는 건 우리의 국력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는 아무래도 약육강식의 법칙이 가장 민감하게 작용하는 안테나가 되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결국 우리에게는 남북통일과 국력 신장이 답이다.
세상을 주도하고 바꾸겠다는 계획을 실천하려면 힘과 능력부터 길러야겠다는 각오를 다져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언감생심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 자체를 던져버리겠다는 절박함으로 매달리자.
우리끼리 싸우며 국력을 소진하는 어리석음은 버리자. 스스로를 무장해제하는 어리석은 짓은 피하도록 하자. 올해 안으로 싸움을 멈추고 양보와 타협으로 재무장의 토대를 만들수 있도록 하자.
그것이 무시무시한 나라들 틈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

도대체 무엇에 기인한 문제인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해결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자.
그렇게 저마다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2012년은 용처럼 승천하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어디 한 번 신명나게 어울려보도록 하자. 

(2011.12.16.)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15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나누면 커진다

나누면 커진다


12월이 깊어가고 있다.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추위가 마지막 장으로 남은 달력의 황량함을 보태는 겨울이다.
이웃의 남루함이 유난히 아프게 다가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거리 곳곳에서 자선냄비를 채우는 손길들이 분주하다. 나눔과 배려로 불우한 이웃을 품고자 하는 반갑고 귀한 발걸음도 줄을 잇고 있다.
나누면 커지는 인생의 비밀을 실천하는 그곳에서 희망의 불꽃을 본다.
이웃의 고통에 마음을 여는 이들이 있는 한 세상은 여전히 살만하다는 생각이다.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출사표가 줄을 잇는 요즈음 국가와 민족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다짐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선거현장에서 남발되는 봉사 약속은 대부분 유권자 구애를 위한 미끼 용도에 그쳤다. 말로만 하는 봉사가 제일 나쁘다는데 바로 그런 행태를 보인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칭찬거리가 변변치 않은 정치판에서 정치 입문을 꿈꾸는 사람들조차 구태를 답습하고 있어 큰일이다. 말로만 하는 구태를 청산하지 못한다면 사회적 분열은 물론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 혐오감을 자극할 계기가 된다는 측면에서 좀 더 신중한 처신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정치가 진정성을 가지고 운영됐다면 대한민국 정치 풍경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혹시 유권자 선택을 받고자 하는 이들의 봉사 마인드와 실행 평가가 선거에 일정정도 반영되도록 (학교현장의 봉사점수처럼) 한다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적어도 정치가 국민에게 ‘찬밥’ 대우받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봉사는 타인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전제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가를 바라거나 보여주기 위한 봉사는 진정성 측면에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신이 아닌 이상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봉사(헌신, 희생)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봉사에 거래나 이해타산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보여주기 위한 봉사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없지 않지만 얄팍한 계산을 감추지 못한 봉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더 나아가 비애를 주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故이태석 신부의 이타적 삶은 귀감이 될 만하다.
그는 보장된 삶을 뒤로 한 채 자청해 찾아간 불모지에서 사랑을 꽃 피우는 기적을 일으켰다. 생면부지의 이국인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바쳤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그들을 사랑했다. 또 아낌없는 사랑을 받기도 했다. 남을 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 알려주다가 하늘의 별이 됐다. 그는 비록 떠나갔지만 오로지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뜨거운 진심이 만든 그의 삶은 오래도록 많을 이들을 변화시키고 또 기억될 것이다.

요즘 세태 풍자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개그 콘서트를 즐겨 보고 있는데 촌철살인의 감동으로 놀라게 하는 내용이 많다. 특히 사마귀 유치원 코너의 ‘애정남’은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다.
애정남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 봉사의 질적 차이를 정리해 본다면 ‘시혜라도 베풀 듯 자신의 잉여지분을 (시간, 재물, 노동력 기타 등등) 나누는 것이 하위 개념의 봉사라면 정말로 소중하고 꼭 필요한 것 중에서 콩 한쪽 나누는 의리가 참다운 봉사’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부자의 두둑한 기부보다 과부의 동전 두 닢을 더 크게 평가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남을 위해 내 것을 나눠주는 봉사자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수혜를 받는 순환구조가 상식선이 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봉사도 해 본 사람이 더 많은 노하우를 갖기 마련이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봉사의 생활화는 아무리 권장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눔의 정도가 한 나라의 사회적 가치나 구성원의 질적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기억하자. 선진국일수록 약자에 대한 나눔과 배려가 섬세하다는 사실 또한 명심할 일이다.

우리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자신을 하층민이라고 생각하고  2년 전에 비해 자신을 상류층이나 중산층으로 평가하는 비율도 줄었다. 일생동안 노력하면 지위가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감 역시 많이 줄었다는 소식이다. 정치권 잘못 때문이라는 지레 짐작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60년 만에 맞게 될 흑룡을 생각하며 다잡아본다. 흑룡을 희망삼아 나누면서 커지는 신년 설계가 위축된 국민 마음에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말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격려, 희생과 봉사를 통해 2011년 마무리도 잘 해야겠지.
우리 대한민국이, 우리 국민 저마다 욱일승천의 기회를 거머쥘 수 있는 내년이 되기를.

(2011.12.15.)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13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거인을 기리며


거인을 기리며



철강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별세소식에 대한민국 전역이 애도의 물결로 출렁인다.
아까운 분이 돌아가셨다며 거인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분위기다.
그와는 국회에서 함께 활동한 인연이 있다. 특별한 교분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깡마르고 어눌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철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특히 포철에 관한 얘기를 자주하셨는데 그 때마다 뜨거운 열정을 온 몸으로 뿜어내곤 했다.
기업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정말 잘 살았다. 포항제철 건립으로 철강 볼모지였던 우리나라를 세계 최강의 철강 산업국으로 끌어올린 공로 하나만으로도 평가받을 만한 인생을 살았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는 국내는 물론 세계가 존경하고 탐내는 철강인이었다. 흉막 섬유종도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다 얻은 병이다. 80% 공정이 끝난 구조물을 기준미달이라고 폭파해 포철에 부실공사를 근절시킨 일화가 신화처럼 남아있는데 하바드 비지니스 스쿨의 교재로까지 채택될 정도로 탁월한 리더십이었다. 일찍이 철강의 노벨상 격인 베세머 금상이나 윌리코프 상의 주인공으로 등극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리라.

그러나 그의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말년에 족쇄가 되어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 정치 인생 때문이다.
정치는 그를 4선의 국회의원과 총리까지 만들어 줬지만 그의 찬란한 철강인생을 모욕하고 폄훼해서 나락으로 밀어낸 것 역시 정치였다. 정치 인생만 따로 생각한다면 그는 행복이나 성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산 셈이다.
그런 선례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일까?
근래 들어 아들의 정치 인생 때문에 아버지의 시름이 부쩍 깊어지신 기색이다.
제일 적극적으로 내 인생을 정치로 이끄셨으면서도 내 정치적 안위에 우려를 표명하시는 아버지의 의중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는 비정하다 못해 비열하기까지 한 정치풍토가 마음에 걸리시는 것이다.
정치의 속성이 그렇다.
남을 딛고 올라서야 자기 영역 확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어지간한 맷집으로는 상대를 헐뜯고 비방하는 건 기본이고 정치적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정적들 사이에서 생존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또 떠나야 할 때 미련 없이 그만 두지 못하는 일종의 증독 증세도 정치를 어렵게 하는 독소다.
용퇴에 대한 결단만 제대로 해도 별 문제가 없을 텐데 정치를 그만 둘 시점을 찾지 못해 패가망신에 이른 선배 정치인이 한 둘이 아니다. 정치가 아니었다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을 인생을 정치에 바치고 비참한 노후로 보내고 있는 경우도 주위에 흔하다.

두렵다고 정치를 삶의 로드맵으로부터 떼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기피하고 외면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소신있고 합리적인 정치가 가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게 현명한 대처방식이다.
우선은 정치인에게 제대로 된 연금시스템을 제공하는 등 복지후생에 대한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좀 더 폭 넓고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한 정치자금법 운영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도 정치를 좀 더 순리적으로 풀어낼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 의회의 경우, 의원 임기가 끝나면 연금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의회 시설을 이용하는 데 있어 현직과 차별을 두지 않는 배려가 돋보인다. 그런 자긍심에 대한 디테일한 배려들이 정치인으로 하여금 뇌물이나 정치자금으로부터 자유롭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또 지나치게 엄격한 규제로 인한 강박감이 돈의 유혹을 더 느끼게 하는 역효과의 고리로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정치수준을 높이려면 무엇보다 우리의 정치 후진성을 부채질하는 심각한 정치보복 현실의 개선이 시급하다. 성공한 정치인을 배출해내지 못하는 원인도 크다할 것이다.
왕조시대 승자가 패자의 삼대를 멸하고 그 식솔들을 노비로 만들어 취하던 조악하고 야만적인 형태의 정치 보복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식의 패악을 21세기 대한민국 정치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건 너무나 부끄러운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고인과 YS와의 악연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YS는 자신에게 등을 돌린 고인을 철저히 응징했다. 대통령의 권력으로 전 세계가 인정하던 철강인생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몽니를 부렸다. 졸지에 그는 뇌물을 수뢰한 파렴치범이 되어 4년여의 적지 않은 세월 동안 해외에서 부랑자처럼 떠돌며 살아야 했다. 나 역시 같은 고통을 당한 경험이 있기에 그 당시 고인이 느꼈을 외로움을 비롯한 그 복잡다단한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는 이 땅에 비정한 정치 보복이 되풀이 되지 않으려면 제도적 장치를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 곁을 떠나간 거인을 기리며 큰 절 올리는 심정으로 이 글을 맺는다.
부디 영면하소서.

(2011. 12 .13)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11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임기를 보장하자

임기를 보장하자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대한민국은 축구 역사를 새롭게 쓰기 시작했다.
온 국민이 축구 전문가고 축구 감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축구에 대한 관심과 식견이 높아졌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자부심이 일으킨 변화다.
단 축구팬이 많아진 만큼 ‘시어머니 참견’을 감수해야 하는 부담도 늘어났다.
축구에 관한한 사회적 합의를 도외시한 결정은 반드시 뒤탈이 이어진 기억이 있다.
실제로 후유증에 시달린 사례가 적지 않다.

조광래 국가대표 감독 경질을 두고 며칠 째 시끄러운 것도 축구에 대한 우리사회의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라 할 것이다. 그의 경질 소식이 전해지자 대중은 일단 ‘이상한 해고’로 규정짓고 의혹을 쏟아내는 분위기다. 협회 측이 설명한 해고 과정이 석연치 않은 게 가장 큰 이유다.
나 역시도 평소 조 감독의 역량에 만족했던 입장이 아니었던 만큼 무척대고 조감독 사임에 반대할 의사가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조 감독 경질 절차에 아쉬움이 많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명색이 현직 국가대표 감독 신상에 관한 일인데 최소한 국민 공감을 구하는 절차부터 챙겼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안의 옳고 그른 판단에 앞서 국가대표 감독에 걸 맞는 예우를 갖춰 당사자는 물론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진행됐다면 분명 그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
협회 측의 서투른 처신이 화를 자초한 셈이다.

선진 사회일수록 구성원들에 대한 충격요법은 자제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사회가 발전될수록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설득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임기 보장이야말로 신뢰 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 가장 기본 요소라는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리더의 철학이 반영된 정책이 꾸준히 추진될 수 있어야 나름의 개성이 가미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일정한 과정을 거치지않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어느 날 갑자기 공정사회가 완성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 일정한 임기를 주고 특별한 탄핵사유가 아니면 그 임기를 보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임기 보장 필요는 축구계라고 다르지 않다.
선진 축구를 원한다면 이번 기회에 축구 감독도 임기를 보장해주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정치권처럼 탄핵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한 축구 감독도 장기적인 전략으로 팀을 운영할 수 있도록 운신의 폭을 넓혀야 한다. 물론 감독의 독선을 제한할 수 있는 탄핵 제도를 도입하되, 민주적인 절차를 보장할 수 있는 재심요구나 선수 인터뷰의 기능 등을 강화시키는 것도 합리적인 축구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라 하겠다.
예전 차범근 감독의 경질 과정도 지금 생각해보면 문제가 많았다는 생각이다.
차 감독 개인은 물론, 한국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결정이 아니었다는데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을 터다. 그 때 차 감독 경질을 주관했던 구성원들이 현재 축구 협회 임원들이다. 차 감독 때도 역지사지하는 세심함을 보여주지 못했던 그들이 이번 조감독 때도 비슷한 처신으로 화를 자초하고 있다는 불신을 지울 수 없다.
기술위원회 등 축구의 강화를 위해 존재하는 기구들이 지금처럼 경직된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축구 미래는 없다. 축구가 국민으로부터 외면받는 신세로 전락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끝내 개선되지 못하면 스스로를 경질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FTA가 통과되던 날, 미국, 일본 등지에 있는 외국인 친구들로부터 한국 국회에 무슨 큰일이 있느냐는 전화를 받으면서 더 이상 우리만의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지구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여다보고 있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의 처신이 좀 더 신중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계 리더를 꿈꾸고 있는 만큼 정치도 스포츠도 그에 걸 맞는 반듯하고 세련된 솜씨로 운용할 수 있는 품격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도록 하자.

(2011. 12.11)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10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홍준표 대표의원님께

홍준표 대표의원님께


홍의원님.
의원님의 당 대표직 사퇴 소식으로 정치권이 떠들썩하던 날, 온종일 답답한 기분이었어요.
오래 공들여 온 의원님의 꿈이 피기도 전에 저버리는 건가 싶은 아쉬움에 맥이 풀리기까지 했어요.
무엇보다 당사를 떠나는 의원님의 뒷모습이 어찌도 그리 쓸쓸해 보이던지요.
그리고 하루가 지난 오늘, 이번에는 의원님이 남긴 트윗글이 뭉클, 저를 울리는 군요.
‘자유인 첫날 이젠 가슴 두근대며 신문보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동병상린이랄까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지요.
지난 시간동안의 맘고생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해서 마음이 아팠어요.

의원님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네요.
15대 총선을 앞둔 1995년 무렵, 국회의원 후보로 처음 만날 때도 의원님은 이미 모래시계 검사라는 닉네임으로 유명세를 치루는 스타였지요.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나란히 의원회관 1층에 사무실을 이웃해 있으면서 입담이 좋았던 의원님에게 친근감을 느꼈던 기억이 나네요. 비슷한 경로로 정계에 입문했고 고대 동문에 남양 홍씨 종친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더 돈독한 관계가 됐던 것 같기도 하고요. 아, 선거법 재판 동기(?)로 고민을 함께 나눈 인연도 있었네요.
무슨 착각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처음 두어 달 동안은 제가 의원님에게 대학선배로 대접받는 일도 있었지요. 나중에 황당해하던 의원님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끔 웃음이 나요. 학연에서 1년 선배가 가장 무서운 법인데 말입니다.
지금의 김문수 지사 등과, 당의 대표적 젊은 피(그 때는 그랬지요)라는 자부심으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를 찾아가 열변을 토하던 열정의 순간에도 우리가 함께 했던 걸 보면 , 가까운 사이였던 건 틀림없는 것 같아요.
선거법 위반에 발목을 잡혀 어려운 시절을 보내던 의원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다 동대문 보궐 선거에 나오셨을 때 기쁜 마음으로 찾아갔던 기억도 새롭네요. 또 어느 핸가는 최고위원에 출마한 의원님이 의정부를 방문하는 일도 있었지요. 매월 모이는 일가 친선회도 우리 두 사람의 끈을 이어주던 곳이지요. 고문단 모임에서 막내였던 우리 둘이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었지요.

그러나 의원님이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많은 부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지요.
국회의원 아들로 해외 유학을 거쳐 하버드 박사 타이틀을 딴 내 인생과 가난한 경비원의 아들로 단돈 18000원을 쥐고 시작한 서울생활에서 순전히 자수성가로 사법고시의 꿈을 이룬 의원님의 인생은 다를 수 밖에 없 었겠지요. 치밀하지 못하고 무른 성정 탓에 세상이 만만하게 보이던 내 눈에도 대립과 도전 그리고 극복의 인생을 점철했던 의원님의 인생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으니까요.
의원님이 어느 순간 벽이 됐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동경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겠지요.

평소 의원님은 장점이 많은 분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재치있는 말투, 치고나가는 추진력, 정확한 상황분석, 명쾌한 대안제시 등으로 주변을 정리하는 능력도 보기 좋았고요. 물론 관점에 따라 이런 저런 해석이 달라지면 단점처럼 지적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차이가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단절의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누구도 완벽하게 다르지 않고 또 같을 수 없으니까요, 또 배울 만한 강점과 치명적인 단점 역시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어요.
인간이잖아요.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평당원으로 되돌아 간 의원님.
당 발전에 기여하는 밀알이 되겠다는 결기를 보이셨더군요.
역시 의원님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얼마나 다행이던지요.
집권당 대표로 나서던 의원님을 보며 박수치던 그 마음으로 다시 한번 감히 부탁드립니다.
초심을 잃지 마세요. 치열한 변방정신을 앞세워 척당불기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 의욕 그대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의원님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세요. 조만간 새로운 모습의 기회가 의원님 찾을 때까지 서두르지 말고 한걸음 한걸음 떼어 보세요.
그렇게 함께 가시자고요.

ps: 신년 1월 30일, 102차 일가 종친회 모임이 열릴 예정입니다. 홍사덕의원님이 스폰서하실 순서이구요, 홍석우 지경부 장관도 옵저버로 오셔달라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날은 반드시 의원님을 뵐 수 있었으면 해요. 많은 종친 어른들이 의원님의 안부를 궁금해 하고 있으니 부디 나와서 의원님의 건재함을 보여주세요.
제가 연락책을 맡은 이후부터 한번도 의원님을 뵙지 못해 섭섭함이 커요.
바쁜 일정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혹여 특별히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겠죠?

(2011. 12. 10)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8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올듯 말듯한 눈


올듯 말듯한 눈

                                                     -홍문종-

짐칫 놀라 새벽을 여니
올듯 올듯 말듯한 눈이
뿌연 안개 포개여 피니
알듯 말듯 내님의 눈이

가시면 오신다 손짓을 하소
손짓을 하실땐 눈짓도 하고
눈짓을 하실땐 마음도 여소
오실듯 마실듯 애닯게 말고

새벽허리 부여앉고 님 불러보아도
허이허이 산모퉁이 님 메아리일뿐
애타는듯 불타는듯 님 찾아보아도
어느곳에 무엇할까 님 애타는일뿐

저녁
초저녁
한밤중
새아침
아침

올듯 말듯한 님


(2011. 12 .9)


2011년 12월 7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천형

천형


어느 날 유난히 스스로가 낯설어지는 느낌은 특정한 경험이 아니다.
오늘의 나도 그랬다. 나뭇잎 떨어지고 찬바람 가득한 겨울이 되도록 여전히 고독의 볼모가 되어 있는 내 모습이 그렇게 생경할 수가 없었다.
지난 가을부터 비명을 지르게 하던 고독의 횡포가 갈수록 그 압력의 무게를 더해가는 형국이다. 계절이 바뀌어도 수그러들기는 커녕 더 삭막해진 표정이 되어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독한 말 화살을 날리고 있다.
그나마 끽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가슴 속에 피울음을 가두며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는 격이다.
어떻게든 이 무거운 고독의 옷을 훨훨 벗어던지고 싶은데 언제일까 아득하다.

지하철은 군중 속 고독을 키우는 최적의 공간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하철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최소한 한 달에 두 번은 세상 공부삼아 지하철을 타기로 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의지다.
어디론가 가고자 하는 수많은 무리들이 저마다 바쁜 발걸음으로 떼 지어 옮겨 다니는 그 분주한 일상 속에 외로움이 도사리고 있는 건 아이러니다. 지하철 카드를 단말기에 접촉하는 순간까지는 그런대로 괜찮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지하철 승객으로 신분을 달리하면서부터 마주해야 하는 고독 바이러스 주의 경보는 장난이 아니다. 엄청난 인파에 섞여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면서부터 엄습하는 외로움은 주늑든 어깨를 잔뜩 긴장시킨다. 굉음을 내며 플렛홈을 진입하는 쇳덩어리의 무심한 위용부터가 개인적인 통사정이 통하리라는 기대를 저버리게 한다.
저마다 분주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배려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럴 겨를이 없다. 모두가 1인극 주인공 되어 스스로 섬이 되고 다른 사람도 섬으로 만든다. 그래서 또 외로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목적지에 도착해 지하철을 벗어났다고 외로움의 그림자를 벗어난 건 아니다.
습관처럼 달라붙는 고독을 떼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걸어서 귀가하기로 마음 먹고 오랜만에 천변을 따라 걷는데 한 둘을 빼고는 전부가 잰걸음이다.
PC방, 노래방. 술집, 커피숍 그리고 교회 십자가와 점집의 만장, 법당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치면서도 자신을 내려놓을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걸음들도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며 집으로 향하는 나 역시도 끊임없는 대화에도 불구하고 외롭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하루 일과만 둘러봐도 정말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특별히 즐거웠던 순간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구태여 따지자면 고독보다는 행복함에 젖어 있어야 할 이 순간 고독에 짓눌려 헤매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왜 나와 생각이 다를까?
나는 왜 아이들을 더 많이 이해하지 못할까?
왜 나는 벤츠 여검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나라당 현실에 절망하게 되는 걸까?
가족과는? 친구와는? 동료와는?
무엇보다 나는 왜 생각이 달라지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독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천형' 밖에 없을 듯 하다. 지금으로선 노력하다보면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만이 위안이 될 뿐이다.

오늘도 외롭다를 반복하며 하루를 접는다.
다독거려주고 따뜻하게 품어줄 수 연결고리를 찾는 날, 비로소 이 하소연의 순례가 멈춰질 것 같다.
PS: 지혜를 주셨는데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을 회개합니다.

  (2011.12.7.)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6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선정성 유감

선정성 유감


요즘 들어 부쩍 낯 뜨거운 사건 사고들이 주요 이슈로 다뤄지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벤츠 여검사, 우리들 병원 부부 괌 공항 육탄전, 육군 준장과 보험설계사, 방송인 A의 동영상, 그리고 배우 신성일씨의 연애 후일담에 이르기까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내용들이 인터넷 메인 화면을 독차지하는 현상이 그것이다.
실제로 컴퓨터 켜기가 겁날 정도로 온 천지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뉴스들로 넘쳐나고 있다.

신성일 씨의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출간 소식만 해도 그렇다. 반세기를 영화인으로 산 원로배우(15대 국회에서 그와 의정활동을 함께 한 인연이 있다)인 만큼 그의 회고록은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고인이 된 김모 여인과의 사적 연애사를 자신의 75년 인생을 정리한 자서전의 최정점으로 꼽으면서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는 우를 범했다. 기자간담회를 그녀와의 연애 후일담으로 채웠다. 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 낙태한 사실까지도 거리낌없이 밝혔다. 앞뒤 없는 중언부언으로 대중의 조롱을 자처했다.
판매고를 올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는지 모르지만 명백하게 실패한 전략이었다.

그런데 언론은 그런 신씨의 연애담을 대단한 뉴스거리라도 되는 양 온종일 인터넷 메인 화면에 내 걸었다. 보험설계사가 육군 준장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들키자 한강에 뛰어들었다는 기사도 그렇게 얼굴마담이 되어 자극적인 문구와 함께 장시간 언론사 사이트 대문을 지켰다.
기사가치에 대한 고민없이 오로지 네티즌 눈길을 끌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대한 것이다.
독약이건 마약이건 사회적 파장 따위는 처음부터 고려되지 않은 천박함이 주관하는 이 발상이 대한민국 언론의 현주소다.
아무래도 종편이 출범하면서 가열된 경쟁이 초래한 부작용이지 싶다.

텔레비전 채널이 많아지고 언론이 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까지 기사화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 저것 시시콜콜한 정보가 늘어나는 것까지는 좋은데 우려되는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광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중소기업, 대기업 할 거 없이 광고압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푸념들이다. 예전에는 언론사 영역구분이 확실해서 절도있는 광고 집행이 가능했는데 종편이 끼어들면서 기업마다 언론 눈치를 살피느라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걱정도 들린다.

그것으로 끝나면 다행이겠는데 인기에 영합해서 자극과 흥미위주로 시청자 입맛에 맞추려는 방송 시도가 늘고 있다고 한다.  이대로 가다간 선정성 경쟁이 언론사 경쟁력의 척도가 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생각이다. 선정성 경쟁으로 혼탁해진 언론시장의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 몫으로 되돌려질 것을 생각하면 시청율 1% 짜리 종편 방송의 과잉 의욕(?)은 어떤 식으로든 제동이 걸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흙탕물을 만드는 건 미꾸라지 한마리다.
결국 비정상적인 소비 수요가 언론의 비정상적인 경쟁구도를 부축인 책임이 크다 할 것이다. 실제로 어지간한 자극에 미동도 않는 입맛이 비정상적인 경쟁구도를 경쟁력으로 착각하게 만든 주범일 수도 있다. 시청자가 됐건 독자가 됐건 선정적인 화면이나 기사에 대한 선호를 줄이지 않는 한 묘안이 없다는 생각이다.

세상에는 잿빛만 존재하는 양 암울한 타이틀이 넘치고 있다.
본질을 흐리고 과장하고 더 나아가 호도까지 하면서 무감각한 사회적 풍토를 조장하고 있다.
뒷거래 야합이 진리인양 양지로 나서 목청을 높이며 판을 주도하는 형국이다.
그런 것들이 합리적인 희망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으니 걱정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는 일, 정신 차리고 다시 일어서야지.

(2011. 12. 6)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4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송년모임에서


송년모임에서

하버드 동문회 송년모임이 있었다.
모처럼 그리운 이들을 만나 회포를 풀며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즐거웠다. 동문회장을 맡고 있는 박진의원의 성실한 준비 덕분이라는 생각이다.
연말이면 갖가지 송년 모임이 홍수를 이루지만 동문모임만큼은 빠지지 않고 챙기는 편이다. 추억의 힘이라고 해야 할지 동문 모임은 여타의 것들과 구분되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추억의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반가움 때문은 아닐까 싶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날짜가 겹친 스탠포드 모임엔 못 갔다. 하버드 행정대학원 동문회장을 맡고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많이 아쉽다)


                   단과대학별 동창회장들과 건배제의


이번에 새로 지식경제부 장관이 된 홍석우 동문이 나서 축사를 했다.
홍장관은 오는 11일이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수출 1조 달러를 달성하게 된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계장 과장이었던 시절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에 회의적이었는데 오늘 날 우리 자동차가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우리의 자동차산업을 보면 감회가 남다르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IT 산업 분야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동차나 IT처럼 다른 분야도 철저한 준비와 진행 과정으로 의지를 갖는다면 충분히 경쟁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동문들이 쏟아내는 보스톤과 케임브리지에서의 여러 추억담들은 타임머신이 되어 우리를 과거의 시간으로 데려갔다. 휴교를 결정할 정도로 엄청났던 폭설, 생전의 케네디 방문, 민주당 대통령 후보 두카키스와의 대면, 보스톤 차이나타운의 우도수교(만두국 종류인데 맛이 있어서 인기를 누렸다), 보스톤 비치에서의 여러 티파티, 햄버거 집 등이 화제에 올라 공감대와 향수를 자극했다. 특별히 매력적인 연주로 우리들의 흥을 돋궈준 동문의 10인조 밴드 연주 또한 압권이었다.
              이승만대통령 아들 이인수박사 부부와 함께


그러나 FTA 반대시위가 한창인 밖의 사정이 마음에 걸렸다.
모임 장소인 조선호텔을 향할 때도 시위 때문에 복잡한 교통상황을 목격했던 우리다.
편안하게 호텔에 모여 동문회나 하면서 덕담이나 나눌 때가 아니라는 생각은 나만 했던 게 아닌 듯했다.
미안함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서였을까? 밴드에 맞춰 기차놀이까지 한 다음 그럭저럭 마감 무렵이 되자 누군가가 시위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는데 다들 한마디씩 거들고 나서는 분위기였다.


이승우 총장, 최홍건 회장, 홍석우 장관, 박진의원부부와 함께 건배 제의

정리하자면 이제는 FTA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인데 자동차와 반도체를 불가능에서 가능성의 세계로 창출해냈듯 FTA 역시 새롭게 도전하는 시각에서 출발점을 찾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FTA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보다 주도면밀하게 따지고 분석해서 국익이 손상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는 게 기본 정서였다.
그 자리에는 국가 장학금이 됐건 사적 지원이 됐건 혜택 받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저마다 자신의 몫을 사회에 돌려줄 용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충분하진 않겠지만 어려운 이들을 배려할 수 있고 전체적인 파이도 키울 수 있지 않겠다는 의견이었다. 큰 배려가 아니더라도 희망의 끈을 놓은 사람들에게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용기를 심어줄 수 있기를 바라는 간곡한 마음들이 전해졌다.
기회가 된다면 동문회 차원에서 좀 더 적극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제 실천 기회를 모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송년 모임의 가장 큰 결실이 아닐까 싶다.

(2011.12.4.)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3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욕망

욕망

어릴 때 읽었던 ‘숲속의 나무꾼’이라는 동화가 생각난다.
어느 날 나뭇꾼이 나무를 하다 호수에 도끼를 빠뜨려 슬피 울고 있었다. 산신령이 나타나 이를 찾아주려는 호의를 보의자 금도끼 은도끼 타령을 하며 욕심을 부리다가 원래의 도끼마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다.
단순한 동화지만 인간의 욕심이 스스로의 삶을 망가뜨리는 이야기를 절묘하게 대변했다는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욕구의 경계선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만나게 되는 건 비단 나뭇꾼만이 아니다. 모든 이의 삶에 해당되는 일이다.  현실에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정선을 지키며 원하는 바를 손에 넣기란 정말 쉽지 않다.
어떤 선택에서건 소탐대실과 과유불급의 경고가 따라 붙는 걸 보면 인간이 욕구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알 것 같기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지극히 평범한 상식선조차 판단이 어려워진다.  

매가톤급 위력으로 정가를 발칵 뒤집어 놓은 ‘선관위 해킹사건’만 봐도 그렇다.
여당의원의 수행비서가 지난 보궐선거 당일 디도스 공격으로 선관위 홈페이지를 마비시킨 배후로 밝혀지면서 구속됐다.
결국 패배로 끝난 선거에서 아무 소득도 거두지 못한 전형적 소탐대실의 패착이었다.  어떤 욕망이 설흔도 안 된 앳된 젊은이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했을까 싶다. 
특히 이번 소란이 내년 총선을 제물로 바치는 악재가 될까전전긍긍하는 여당의 혼란을 보면 욕심의 대가를 엄청나게 치르고 있는 것 같다.
때마침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날아온 스트로스 칸 전 IMF 총재에 관한 소식도 절제에 대해 넉넉한 가르침을 줬다.
칸 전 총재는 최근 발간된 자신의 전기를 통해 ‘쾌락의 순간을 한번도 거부하지 않은 삶이 정치적 이력을 망쳤다’고 토로했다. 육체적 쾌락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자신의 대통령 꿈을 날아가게 만든 사실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탓하며 전하는 회한의 메시지였다. 

사실이다. 과욕이 단숨에 그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상당히 매력적이고 가능성 높은 프랑스 대통령 후보였다. 그동안 상당히 균형잡힌 안목으로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 미국 일변도의 경제 질서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유로운 발상으로 접근하는 그를 관심있게 지켜봐 왔던 터다.
음모가 됐건 실수가 됐건 분명한 건 더 이상 그를 위한 파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욕이 초래한 그의 참상이 내게도 되돌아보고 음미할 수 있는 공간을 줬다.
결론은 지나친 욕심은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이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며 곳곳에서 절제의 미덕을 강조한 성경의 가르침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러 경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욕망과 분리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과욕의 끝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알면서도 과욕의 선동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모습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때때로 욕심이 인간을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드는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욕심의 순기능이 없지 않다. 어떤 형태로든 무욕의 삶보다는 강한 욕구로 스스로를 다그쳐가는 적극성이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니까.
그러나 부나비 같은 인간의 속성이 문제다.
아무리 영악한 인간이라도 일단 욕망 앞에 서면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많이 봤다.
자신이 필요한 바를 얻기 위한 대가로 목숨을 내놓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둔감해진다.
대충 얼버무릴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놓여지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만 해도 스스로의 균형감각이나 이성적 판단 기제에 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얽힌 욕망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될 때가 많다.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욕심인 줄도 모르고 집착하는 경우가 더 문제다. 

정보의 홍수가 일상을 이루고 있는 디지털 시대가 문명의 혜택으로만 다가오는 건 아니다. 아나로그적 공간 부재가 저마다의 꿈을 잘 정제하고 주도면밀하게 따져볼 기회를 차단하는 부작용이 우리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간단치 않다. 손쉬운 정보에 의한 기계적인 판단이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부르고 상황을 호도하기도 한다. 인간이 갈수록 욕심의 포로가 되어 황폐함을 자처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2011년도가 저물어가고 있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 앞에서 생각이 많다.
지난 시간 동안 가졌던 잘못된 욕심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의미에서 성취하겠다고 내세운 꿈과 목표 자체가 신기루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설사 잘 가꿔지고 있다 해도 막상 도달 해보면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낯선 존재로 우리를 황당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목표의 끈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반성은 미래를 위한 적극적인 투자의 시간이고 잘못된 과정을 거르는 정교한 여과장치다. 반성을 통해 지난 시간을 공고히 하는 건 돌아오는 2012년에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방이기도 하다.
찰나에 불과한 욕구가 평생에 걸친 비전을 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다짐으로 나의 꿈을 돌아본다.

팁 하나.
욕심을 구별하는 자가 진단법이 있다.
원래는 양심에 물으면 되는데 욕심이 커지면 양심조차 자기합리화의 덫에 갇혀 버리기 때문에 정밀한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내가 가진 ‘욕심’을 모든 이들 앞에서 떳떳이 드러낼 수 있는지 여부부터 살펴야 한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공표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욕심이 아니라 의욕이다. 

(2011.12.3.)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2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또&또

또&또

‘역사가 흐른다’는 표현은 잘못됐다.
오늘 자 뉴스 타임라인에 등장하는 소식만 봐도 역사는 확실히 반복한다.
새해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을 넘긴 국회, 쇄신 약속을 만병통치약처럼 들이미는 정치권, 전산망 장애로 먹통이 된 농협, 고물가에 허덕이는 서민 경제...
 9년째 이어지거나 작년에도, 지난달에도, 불과 얼마 전에도 접했던 소식이 대부분이니 새로울 리 없다. ‘또’ 라는 한 글자만 집어넣으면 언제고 완벽하게 ‘재활용’ 할 수 있는 패턴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후원금을 도박으로 탕진한 파렴치한 사회복지 시설장의 횡령사건도 단골메뉴다. 소말리아 해적에게 번번이 몸값 표적이 되는 선원의 안위 걱정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역시나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게 없다.
개성있는 방송을 표방하면서 일제히 ‘소문난 잔치판’을 벌였던 종편들도 애초 주장과는 달리 김빠진 모양새라는 지적이다. 야심차게 들고 나온 것이 고작해야 ‘앳된 얼굴의 강호동이 23년 전 야쿠자 모임에 참석했다는 해묵은 가십거리여서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학자 출신으로 봉황의 꿈을 꾸었던 이는 많았으나 그다지 좋은 매듭을 짓지 못한 정치판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조순 전 부총리, 이수성, 정운찬 전 총리 등의 쓸쓸한 뒷모습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잠수와 출몰(?)을 반복하는 절묘한 타이밍으로 정치적 몸피를 키우는 안철수 원장도 자칫 실속 없이 ‘소문만 큰 잔치’로 끝날 수 있다. 확고한 정치적 신념과 철학이 아닌, 노림수의 일환이라면 사람들의 눈을 오래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정치관련 동선이나 행동양식이 분석대상이 되면서 안원장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런 상태로 출마를 하니 안하니, 입당을 하니 안하니 설왕설래만 무성하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그 자신의 몫으로 남기 마련이다.
‘안철수 현상’이 정치권을 빅뱅 상태로 몰아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부정하자는 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안철수 현상’을 안 원장의 정치적 능력이나 정치적 검증 절차 면제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고비다.
정치가 총체적 위기에 빠져있다. 그렇다 한들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는 정치가 국민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정말로 크기 때문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불상사를 방지하고 상처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한 이유다.
일테면 정치를 하려는 사람은 정치판에 들어오고, 교육을 하려면 학문적 연구에 더 정진하고, 정당은 확실한 새 판으로 당 쇄신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주고, 재벌은 재벌대로 문어발 같은 탐욕을 버리고 더불어 사는 방법에 관심을 기울이면 된다. 어려운 서민경제만 해도 세계적 추세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많지만 서민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맨 분발을 강요하기보다 구체적인 자립기반을 위한 카테고리 형성에 만전을 기하면 가능하다. 소말리아 역시 적절하고 유연하게 대처했다면 한국 선원만 잡혀가는 어이없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21세기는 대한민국 사회가 도약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다.
어두운 과거를 단절하고 새로운 희망을 이정표 삼아 국운 융성을 도모해서 제2의 도약기를 준비하자.
식상한 권태로움이 아닌 청량한 자극에서 비롯된 건장한 웃음코드가 될 수 있도록 하자.
지나간 시간은 확실한 매듭으로 묶고 다가오는 미래를 두팔 벌려 활짝 껴안아보자.

(2011.12.2)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1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유권자 시대다

유권자 시대다




정치권 내홍이 심각하다.
먹을 것을 차지하기 위한 동물적 본능이 표출된 형국이다.
이리저리 포장을 하고 있지만 결국은 생존을 위한 싸움이다.
내년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교전이 안팎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는 행태를 보면 정작 당사자들은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큰일이다.
정치권을 향해 손사래를 치고 있는 국민적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보지 못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언제나처럼 적당히 눈 가리고 아웅 하면 되겠지 하는 안일함이 역력하다.
남아있는 자산도 없으면서 빈 곳간 열쇠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이 보기에 민망하다.
삿대질하고 고함까지 지르며 온갖 속을 다 내보이는 상황이 딱 한편의 개그 프로그램을 보는 듯하다


여야 구분 없이 다급한 상황인데 움켜 쥔 손을 펴지 못하는 미련스런 모습도 어찌 그리 똑같은지 모르겠다.
아무런 헌신도 없이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정치권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 의식 수준이 높아졌다.
정치권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국민을 조잡한 정치적 술수로 조종하려는 음모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제는 더 이상의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
우연히 정치권력에 기대 국회의원 뱃지를 손에 쥐던 ‘신기루의 시대’는 끝났다.


-여당.


며칠 전 연찬회에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기득권을 내던졌어야 했다.
당헌당규 개정보다 비대위 카드 선택이 더 빠른 지름길이었다.
자발적으로 기득권을 포기했다면 한나라당으로서는 자연스럽게 개혁의지에 대한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어차피 지금처럼 어려운 국면이라면 당의 미래를 밝힐 수 있는 좋은 전환점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먼저 내려놓고 불쏘시개를 자처하면 그 다음 길이 보일 텐데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기득권에 애면글면하는 동안 자신은 물론 자신이 속한 정당까지 위기에 처하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다.
독자적인 아이디어가 너무 없다보니 무책임한 인기영합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
당 개혁방안이 됐건 정책이 됐건 여론의 동조를 얻는 기색이 있으면 너 나 없이 따라 나서니 정책 간 차별화가 쉽지 않아 우리 정치가 다당제 체제로 가동되고 있는지 조차 헷갈린다. 남의 것이 아무리 좋다 해도 일단은 내게 맞는 ‘옷’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역시 조롱거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쇄신을 ‘입’으로만 해결하려는 일부 인사들이여, 제발 그 입 좀 다물라.


-야당.


복마전 양상은 이곳 역시도 예외는 아니다.
언감생심 밀약 따위로 돌파구를 열겠다는 노림수가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접는 게 낫다.
내가 야당 대표라면 누구와도 밀실대화를 추진하지 않겠다.
한 두 사람의 거래로 미래가 보일 민주당이었다면 애초부터 코마상태로 몰리는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라도 밀거래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는 효과가 없다. 누구와의 대화가 됐건 어차피 다 드러나게 돼 있기에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이다.
지금은 정공법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살다보면 정말 진실이 최대의 방책이라는 걸 절감하게 될 때가 많다. 패를 감추기보다 다 드러낸 상태에서 각 주자들의 동의를 구하거나 조언을 참고하는 식의 당 운영을 권하고 싶다.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해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통합과정은 생각보다 대단히 지루하고 힘든 여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드러낸 맨 얼굴이 힘든 짐을 덜어주지는 못해도 최소한 후퇴는 막아주는 구원군 역할을 해내지 않을까 싶다.
보수정권을 쥐락펴락하며 미국의 차기 대선 구도를 흔드는 큰 손이 있다.
보수성향의 미 풀뿌리 정치운동인 ‘티 파티’ 그룹이 그들이다. 그들은 최근 세금을 늘려 큰 정부를 만들려는 오바마 행정부의 국정운영에 반기를 들고 내년 대선은 물론 상원, 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을 위한 물량 공세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공화당 대선주자 후보들이 앞을 다퉈 세금인하 관련 공약을 내놓고 있다.
티파티에 맞서 민주당과 진보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를 진보성향 유권자 운동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 일반 유권자가 정치를 견인하는 시대가 됐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제는 국민 입장에서 국민 소리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정치여야 한다. 어느 당이건 얼마나 파격적이고 드라마틱하게 환골탈태 할 수 있느냐에 따라 내년 선거에서의 명운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만일 기득권이나 밀실거래를 대응책의 키워드로 내놓는다면 엄청난 국민 역풍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유권자 시대다.
따라하지 말고 먼저 주도하라.
진정성 있는 자신감을 무기로 과감한 변화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박수갈채가 따라오게 돼 있다. 여론 선점이 국민선택으로 이어지는 건 자명한 일이다.

(2011. 12. 1.)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30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사전 준비 효과

사전 준비 효과

청와대 만찬에 다녀왔다.
방한 중인 멜라스 에티오피아 총리와 아프리카 문화예술계에 관계하는 국내외 인사들을 위한 자리였는데 나는 ‘아프리카 예술박물관’을 운영하는 인연으로 초청대상이 됐다. 그동안 정치적 동기로 청와대를 방문하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문화예술 관련해서는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약간은 색다른 기분이었다.
대통령도 만났다.
그런데 할 말이 많아 보였고 실제로 많은 말을 했던 YS나 DJ 등 두 역대 대통령과는 많이 달라보였다. (YS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열심히 일하는 대통령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국민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뭔가 많이 지치고 피곤해 보여 왠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내 느낌이 전달됐던 걸까? 때마침 테이블에 동석한 대변인이나 수석 등 보좌진들이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 항상 주빈으로 처세해야 하는 대통령의 피곤한 일상을 화제로 삼았다. 대통령의 고독한 뒷모습을 들여다 본 듯해서 나도 모르게 측은지심이 발동됐다.

때가 때인지라 어디를 가도 차기 대선 주자들에 대한 하마평이 넘친다.
다음엔 과연 누가 대통령이 될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인사는 단연 안철수 씨다.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듯 안철수 현상은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의 산물로 기존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 염원이 만들어 낸 로망이다. 그 중심에 안철수 씨가 서 있는 것이다.
숱한 갑론을박이 ‘안철수’ 언저리를 맴도는 가운데 그의 행보에 많은 이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안철수 식 정치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다. 그의 멘토 그룹조차도 안철수 정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관측대로라면 그의 대선 출마는 기정사실이 될 것 같다. 조만간 그의 입장이 구체화 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실체도 없는 안철수 씨를 관련짓지 말라는 일부 친박 인사들의 과민한 반응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피선거권을 제한받지 않는 한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대표나 손학규 민주당 대표, 또 그 밖의 잠룡 누구라도 대선 경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마당이다.

중요한 건 제대로 된 인물을 가려낼 수 있는 현명하고 올바른 국민적 안목이다.
그러나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면 대통령 직무를 보좌하는 참모진들의 역량이다.
그동안의 대선 후보군 면면을 살펴보면 대통령이 되기 위한 준비가 미흡했던 안타까움이 있다.
개인의 기량 때문이라기보다 국가적 여건이 대통령이 되기 전 부터 제왕학 훈련을 통해 ‘대통령감’을 양산해낼 정도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대통령 직무수행을 돕는 인재 확보가 그 괴리를 메울 수 있는 또 다른 최선이라는 생각이다.
워낙 비밀에 싸여있고 의사결정이 단순하지 않은, 그래서 매 사안마다 어렵고 고독한 결단이 요구되는 대통령 직무의 특성 상 준비된 인재는 생각 이상의 능력과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호흡이 맞는다면 대통령 업무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직항로가 될 수 있다.
인재확보를 위한 사전 노력은 아무리 챙겨도 부족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량 참모가 국정을 농단하거나 대통령을, 그리고 국민을 어려움에 빠뜨린 경험이 적지않은 우리다.

따라서 내년 대선을 통해 꿈을 이루고자 한다면 ‘어떻게 유권자의 마음을 끌까, 어떻게 해야 표를 많이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 못지않게 어떤 인재를 국정운영 파트너로 삼을까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개인적으로 마냥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닌 만큼, 현실을 미리 파악하고 이에 따른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안목도 인재의 사전 확보를 통해 거둘 수 있는 효과다.
이른 바 창살 없는 감옥을 소화할 수 있는 내공의 단련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유리한 차별요소를 가지고 있다.
유일하게 직간접적으로 대통령 수업을 받은 측면은 남다른 경쟁력을 갖췄다 할 수 있다.

어찌됐든 대한민국 21세기를 이끌 중요한 선택이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길 바란다.
좋은 대통령을 모시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다보면 언젠가는 우리 역사의 위대한 대통령을 남기게 될 날이 올 것이다.

(2011. 11. 30)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9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여검사, 너 마저?

여검사, 너 마저?


최근 검찰을 떠난 두 전직 여검사의 엇갈린 행보가 화제다.
벤츠와 법인카드, 샤넬가방 등을 대가로 한 부당거래로 물의를 빚은 李모씨와 검찰이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키지 못해 검사로서의 자긍심이 무너졌다는 쓴 소리로 주목을 받은 白모씨가 그 당사자다.
특히 대가성 뇌물과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와의 부적절한 처신 등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李모씨의 경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검찰조직에 또 다른 상처를 안겨주는 핵폭탄이 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금품 로비 리스트가 담긴 ‘이국철 비망록’에 11명에 달하는 검사장급 이상 고위직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곤혹스러운 검찰 입장이 더 난감하게 됐다.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로 대변되는 오명과 비리의 악몽이 되살아나게 될까 전전긍긍하는 초조함이 역력하다.

이대로 영원히 검찰의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건 검찰의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검찰이 국민 눈 밖에 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검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 역시 대부분 검찰의 설자리를 축소시키는 악재들뿐인 현실이니 답답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절대적인 국민 성원이 검찰을 받쳐주던 때가 있었다.
참여정부 당시 대선자금을 수사하면서 성역없이 칼을 들이대는 검찰에 가장 먼저 환호하고 힘을 실어준 건 국민이었다. 검찰이 본연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자 국민이 먼저 알아보고 나선 것이다. 송광수 검찰 총장은 대번에 국민 영웅으로 부상하고 ‘국민의 검찰’이라는 이름의 팬클럽이 결성됐다. 팬을 자처하는 이들이 소임을 다해 일하라고 검찰에 보약을 보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일장춘몽으로 끝나긴 했지만 결국 환대도 멸시도 스스로 하기에 달려있다는 걸 입증한 사례다.

진실로 검찰이 개혁되기를 원한다면, 진실로 검찰이 국민이 사랑받는 기구로 거듭나길 바란다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해야 한다.
이 제안은 새삼스럽지 않다. 현실적 대안이라는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빛을 보지 못한 오래된 정책이다. 거듭되는 탈락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끊임없이 그 필요성이 제기되는 건 효율성에 대한 확신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이다.
검찰이나 국회의원 등 고위공직자의 지나친 권력은 제한해야 한다.
대통령 직속기구로 두고 검찰 총장이 아닌 대통령의 직속기구로 운영한다면 방만한 권력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검찰이나 국회가 대통령에 예속되는 어려움이 없지 않지만 지금으로선 과도기적이기는 하지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본다.

검사 임용제도에 대해 좀 더 세심한 보안도 검찰의 신뢰회복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고시성적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현재의 임용제도는 제고돼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좋은 검사가 되기 위한 일정한 트레이닝 과정을 거쳐야하는 건 물론이지만 그보다 앞서 검사로서 마땅한 자질과 인성을 검증하는 것도 임용조건에 주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법을 전공하지 않은 입장에서 검찰의 생리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가 될지 모르지만 일반 기업 채용과정에서도 면접이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한 현실에 비하면 대한민국 최고 기관인 검찰의 인재 채용과정에서 이런 측면이 등한시 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다. 공정성의 담보가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최소한 임용대상자의 생활환경이나 자질을 체크하는 과정이 경시된 채 그저 지식 위주의 평가 기준은 심각한 후유증이 예상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풍토가 불합리함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는 만큼 이 역시 하루빨리 개선점을 찾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절대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게 돼 있다는 건 역사가 입증한 바다.
약일 수도 있지만 독이 되기도 하는 권력의 속성을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절대권력의 유일한 성지를 꼽는다면 아마도 검찰이 아닐까 싶다.
끊길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검찰의 뒤틀린 행태가 개선되지 않는 건 절대권력의 아우라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실제로 그 절대권력이 국민으로 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검찰을 만들어냈다. 검찰총장이 바뀔 때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신뢰받고 깨끗한 검찰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보이지만 현실이 늘 그 나물에 그 밥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검찰 자신은 스스로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는 지 궁금하다.
설마 부패의 온상이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권력만 손에 쥐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자족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결국 조직의 정화는 스스로의 용단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맞다.
그래야 결정적 힘이 발휘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국철 비망록에서 로비대상자로 거론되는 11명 검찰 고위인사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2011.11.29.)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8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매 맞는 공권력

매 맞는 공권력


지난 주말 FTA 반대 시위현장에서 발생한 종로 경찰서장 폭행 사건을 둘러싸고 진영논리가 뜨겁다.
정부 여당과 경찰은 공권력 침해라며 강경 대응방침을 천명하고 나서는 가하면 야당과 집회관계자들은 시위대를 자극해서 폭력을 유도한 경찰에 책임이 있다며 반발하는 모습이다.
특별히 어느 한 쪽을 두둔하거나 폄훼할 의도로 이 문제를 거론하는 건 아니다. 어느 쪽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될지는 결국 시간이 해결할 일이 아닐까 싶다.
다만 공권력에 대한 폭력문제 만큼은 다른 각도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본다.
이번 폭행사건은 시위현장의 특성 상 흥분이 고조될 수 있고 군중심리 등으로 부풀려진 감정의 과잉현상이 초래한 부정적 결과물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매맞는 공권력이라니 어이가 없다.

미국의 데모 현장을 보면 우리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많다.
일단 법을 어기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성역없이 공권력의 엄격한 제제가 가해지는 모습부터가 낯설다. 미국사회에는 원칙적인 법 집행을 능가할 그 어떤 권력이나 여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시위현장에서 국회의원이 체포되거나 대통령 자녀들이 질질 끌려 나가는 모습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2011년도 연방 정부 예산 통과를 항의하던 워싱톤 DC 시장이 수갑이 채워진 채 체포됐는데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불법 시위 및 통행방해죄’였다. 수단 정부의 인권탄압을 항의하던 하원의원들도 불법시위를 벌인 혐의로 무더기로 잡혀갔다. 역시나 수갑이 채워진 채였는데 그들 중엔 서열 10위권 내의 여당실세도 포함돼 있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보면 살벌할 수도 있을 미국의 시위문화에서 고급스런 안정감이 감지되는 건 그다지 생경한 일이 아니다. 수갑을 채우는 경찰이나 체포돼 끌려 나가는 시위대 사이에 상당히 안정적인 교감이 이뤄지고 있기에 가능한 정서이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스스로의 불만을 표출하다 체포되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이는 법을 준수하면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의 역할을 다하고 불법적이면 준엄한 법의 집행자로 바뀌는 룰을 정확히 알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그 범주 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서로의 방식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시위 문화는 상당히 감정적이다.
서로의 뜻이 어우러지고 하나가 될 경우 폭발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풍부한 감성은 우리 국민이 갖고 있는 정서적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냉정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정서에 치우치게 되면 이번처럼 경찰서장 폭행이라는 부정적인 에너지로 표출될 때도 있다.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로 상징되는 대한민국의 응원문화는 우리의 국민적 열정이 집단 에너지로 산화돼 이뤄낸 쾌거다. 전 세계가 경이로움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때의 감격이 지금도 생생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뜨거운 국민적 기질이 또 다른 차원으로 세계를 놀라게 할까봐 걱정이다. 특히나 외국에 ‘치안이 잘돼 있는 나라’ 이미지로 호감도를 올리는 우리의 관광 홍보 전략을 감안한다면 단순한 기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하기야 국회의원들이 망치를 들고 국회 기물을 부수거나 본회의장 안에서 최루탄까지 터뜨리는 마당에 시위문화가 무슨 의미일까 싶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다.

정부와 국민의 관계가 존속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시위문화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민주사회에서 다수의 의견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자리잡은 이상 이런 식의 불상사는 항존하게 돼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시위문화 정착을 위해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시위를 통해 의견을 표출하는 방법이나 시위현장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금도를 비롯한 각종 룰에 대한 교육도 그 일환이 될 것이다. 준법 투쟁 등 구체적인 시위 관련 사안을 사회 교과서의 한 부분으로 넣어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의사를 표현하는데 있어 통제되지 못해 과격해진 감정이 허용되는 사회라면 그로인한 혼란은 불을 보듯 환하다.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일등 대한민국의 길도 요원해 질 수 있다.
혹여 시위하는 입장에서 배부른 자들의 지나치게 통속적이고 일방적인 잣대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정말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할 상황인데도 계속 강자의 논리만 부각되고 존중받는 사회가 정상적이냐며 상황인식 부재라는 우려와 반박이 쏟아질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 불만을 혁명적 상황으로 몰고 가려는 시도가 최선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국가 사이의 분쟁을 전투로 해결하는 게 능사가 아니듯이 말이다.
항상 주장하듯 위대한 나라는 위대한 국민이 만들었다.
위대한 국민, 위대한 나라가 되기 위해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아직은 많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꿋꿋하게 해낼 수 있다. 해결할 수 있는 자신감과 역량이 있다.
다만 매맞는 공권력 문제가 우리의 '위대한' 프로젝트를 가로막는 불상사가 되는 일은 없어야겠다.

(2011. 11. 28)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7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문화 경쟁력

문화 경쟁력


크라운 해태제과 윤영달 회장님의 초대로 모처럼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양주 아트벨리에서 ‘양주풍류악회’ (은퇴한 국악 명인으로 구성된) 공연을 통해 궁중음악 향연에 동참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국악계에서 내로라하는 명성답게 문외한인 내게도 상당한 내공이 느껴지는 수준높은 공연이었다. (공연이라기보다 명인들의 리허설 장면 관람을 허락받았다는 표현이 더 옳을 듯하다)

궁중음악엔 지휘자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서양음악과는 달리 당김과 받침만으로도 끌어주고 치워나가면서 가슴 속 내밀한 부분까지 헤집어 포착한 흥과 가락을 일사분란하게 표출하는 감동이 있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조화로움이었다. 설움인지 통한인지 모를 감정들이 어깨춤에 실려 배출되면서 오래 묵은 체증이 해소되는 이 느낌도 우연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뒷 줄 왼쪽부터 해금 이기설, 강사준, 정수년, 대금 홍종진,
피리 곽태규, 정재국, 장고(회장) 김정수, 해설 황준연
앞 줄 왼쪽에서 세번째 크라운해태 윤영달 회장님



공연에 대한 감회 못지않게 윤영달 회장과 나눈 대화가 유의미했다.
윤회장은 ‘한국의 21세기는 아트’라는 지론으로 문화 후원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이는 분이다. 양주 아트벨리는 크라운 해태제과에서 인근의 모텔 대여섯개를 매입해서 조성한 문화공간으로 그의 열정이 토대가 된 구체적 결과물 중 하나라 하겠다. 얼마 전에는 국악에 대한 열정으로 국악인 활동을 꾸준히 후원한 공로로 20번째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제품들은 똑같은 기계와 기술로 생산된다. 각국의 제품들이 더 이상 변별력을 갖기 어려운 이유다. 제품에 문화나 예술혼을 불어넣는 식의 새로운 시도만이 차별화에 성공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에게 예술을 배우게 하고 체험시키는 과정에 공들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술적 감각이야말로 21세기 경쟁력에 있어 가장 확실한 승부수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란다.

윤회장의 주장은 상당부분 일리가 있다. 21세기를 주도하고 싶다면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의 말마따나 평범한 제품에 예술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면 사람들의 욕구나 취향을 더 반영한 제품 생산이 가능해지고 이것이 21세기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비슷한 내용을 접한 기억이 있다.
일본 제품이 한국 제품과의 경쟁에서 뒤지는 이유에 대한 전 주한 일본대사의 설명을 통해서다.
그는 지나치게 질적 가치를 강조하는 일본제품이 고급화에는 성공했지만 경쟁력이 취약하다며 실용성 문제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반면 현실성에서 우위를 점한 한국 제품들은 21세기가 요구하는 감각과 흥취를 잘 표현할 수 있어서 경쟁력에서 앞섰다고 했다.

그와 더불어 아트벨리와 아프리카 예술박물관 발전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이 더없이 즐거웠다. 좋은 이웃을 만난 것 같아 행복했다. 무엇보다 문화 전령사로서 뚝심을 보이시는 윤회장에게 맏형같은 듬직함이 느껴져 좋았다. 쌈박질하는 정치판 때문에 깊어진 한숨 속에서 문화의 향취로 세상을 정화시키려는 윤회장 같은 이의 열정이 있어 그나마 세상이 살만하다는 생각이다.
특별한 관심으로 궁중음악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해 준 그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린다.

(2011.11.26.)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감사의 힘

감사의 힘

연일 끔찍한 사건의 연속이다.
사소한 이유로 자식이 부모를, 남편이, 아내가 배우자를 죽이는 극단의 사건이 줄을 잇는다. 악연의 퍼레이드에 더 이상 놀랄 가슴도 남아있지 않다.
눈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 충격적인 상황들을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스스로가 놀랍다. 우리가 지금 엄청나게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반증인 것 같아 씁쓸하다.

이번에는 고3 아들이 어머니를 죽였다.
8개월 동안이나 시신을 방치한 채 집에서 함께 지내다가 발각됐다.
전국 1등을 강요하는 ‘엄마’의 폭력이 무서웠다는 게 살해 동기란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요구한 건 오로지 1등이었다. 공부만이 아들의 성공적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확신했던 것 같다. 지나치리만큼 아들의 공부에 집착했다. 어머니는 ‘밥을 굶기고 잠을 안 재우고 골프채로 때리는’ 식의 체벌로 아들의 선전을 독려했다. 아들의 성공을 바라는 나름의 사랑법이었을 것이다. 아들 역시 그런 어머니의 명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국 1등이 아닌 성적으로 어머니를 설득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아들의 이성을 앗아갔다. 이들 모자의 엇갈린 사랑법이 좋은 결말을 내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는 차디찬 시신으로, 아들은 어머니를 살해한 패륜아로, 서로의 운명을 구겨버리는 존재가 되었다.
복잡해진 사회적 상황만 탓하기엔 18세 범인의 나이테가 너무나 푸르러서 마음이 아프다.

인간은 미완의 존재다.
문제를 안고 살아야하는 운명인 만큼 더 없이 불완전하다.
해법을 찾자면 자족하면 된다.
결국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고 주어진 상황에 자족하고자 하는 마음자세에서부터 인생의 해법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똑 같은 분량의 물이 병속의 있다. 같은 분량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것밖에 안남아’ 부족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이만큼이나 남아’ 풍족한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만족과 불만족의 차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당사자의 마음 상태에 달려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앞서의 불행한 모자도 어머니가 전국 1등에 못 미치는 아들의 부족한 실력을 탓하기보다 병치레 없는 건강에 방점을 두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체벌의 형태가 아닌 부드러운 스킨십이나 상호 교감으로 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면 지금쯤 아들의 진로를 위해 가장 중요한 활약을 벌이고 있지 않을까?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 차디찬 감옥에서 인생을 포기하는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구절의 긍정적 효능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는 기사가 화제다.
화가 나고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감사한 마음이 뇌의 재설정 버튼을 누른 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어지는 건 물론이고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로 다른 사람과 활발한 교감을 나눌 수 있게 되면서 승리에 도취된 듯 감정의 선순환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놀라운 정보다.
인간의 평화를 가장 강력하게 조정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감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순기능이 아닐까 싶다.

감사는 주어진 상황에 대한 자족감과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 부모는 자식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한다면, 자식은 자신을 위해 그토록 큰 사랑과 관심을 들이붓는 부모에게 감사할 수 있다면 불만이 비집고 들어설 틈이 있을 리 없다. 작은 일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부모 자식 사이는 물론이고 부부나 형제, 친구들이 미움과 반목으로 서로에게 독화살을 날릴 이유가 없다.
돌아보니 내 삶에도 감사할 거리가 넘친다.
힘들고 어려울 때 건강한 체력을 주셔서 감사하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늘 내 뒤를 든든히 받쳐주시는 양친 부모님 건강이 허락되는 상황 역시 크게 감사드릴 일이다.

감사는 역시 힘이 세다.
순식간에 동토의 왕국에 훈풍을 불어넣고 희망의 싹을 틔운다.
혼자만 알고 있기엔 이 기적같은 기능이 정말로 아깝다는 생각이다.
이 참에 감사 확산 운동이라도 펼쳐볼까 싶다.
최소한 우리 사회에 끔찍한 소식들이 판을 치지 못하도록 강력한 방어제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2011.11. 25)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4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늙은 당나귀의 기지

늙은 당나귀의 기지


공지영, 그녀는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최근 우리사회를 뒤흔든 영화 ‘도가니’의 원작자도 그녀다.
평소 공지영 작가의 소설을 즐겨 있는 편이다.
세상에 대한 신선하고 솔직한 시선이 느껴지는 그녀의 작품이 좋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다른 세 아이를 키우면서도 언제나 당당하게 스스로의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그녀에게서 작가의 무궁한 저력을 엿볼 수 있어 즐겁다. 거기다 다른 이의 삶을 보듬는 그 여유로움이라니.
근래에 접한 작품은 그녀에게 ‘이상 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맨 발로 글목을 돌다’라는 단편인데 작가의 존재감을 새롭게 각인시키는 수작이었다.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다분한 건 다른 작품과 다를 바 없지만 유난히 마음을 건드리는 여운 때문에 한참을 멍하니 있어야 했다.

그런 공지영 작가가 작품이 아닌 트위터 맨션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의가 있다.
그녀는 한미 FTA 인준안 처리와 관련된 정치적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민주당은 '민한당 이민우 총재 이후 가장 형편없는 야당'이라고 질타했고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는 ‘한나라당에서 파견 나온 거 맞냐’는 물음표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공 작가라고 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녀 자신이 그동안 스스로의 작품을 통해 누누이 비판해왔던 또 다른 의미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라고 볼멘 마음이 된다.
물론 작가 개인의 자유 영역이겠지만, 또 개인적으로 손 대표와는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는 부분이 많은 게 사실이지만 그렇게 매도당할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지않은 교류를 통해 비교적 손 대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게 그는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영국 신사 같은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런 그이기에 한나라당에 있을 때 늘 아슬아슬했다. 그리고 민주당에 온전히 적응하기에는 그의 정치적 레토릭이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한나라당에서 파견된 손학규’ 표현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적 행위에 책임을 지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단편적인 정보로 특정인의 전부를 규정지으려는 시도는 폭력과 다르지 않다.
그 고충을 본인 역시 자유롭지 않은 공인의 삶을 경험했기에 모르는 바 아닐 것이다. 여러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당사자로서 동의할 수 있는 부분보다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았던 지난 삶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나 역시 겉으로 드러난 한 두 현상으로 부당하게 평가받아 억울했던 적이 많다. 그런 동병상린이 손 대표를 위한 항변에 나서게 했는지 모르겠다.

동창들이 쓰는 싸이트에 실렸던 늙은 당나귀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느 날 늙은 당나귀가 깊은 구덩이에 빠졌다.
이에 주인은 어차피 늙은 당나귀고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 이참에 흙으로 매장하기로 하고 동네 사람들의 손을 빌려 구덩이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당나귀가 자신을 메우기 위해 던져진 흙을 털어 바닥을 다져가며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기 위해 던져진 죽음의 흙을 생환의 수단으로 활용한 기지가 당나귀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세상의 비난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한다. 포기하지 않는 의지만 있다면 어떤 비난이나 음모 조차도 생환의 발판을 채우는 성장촉진제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타인의 관심을 받고 표적이 되는 삶을 사는 이들은 남들의 비판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어야한다.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이다.

결론은 결국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건 아직도 ‘살아있다’는 증거 아닌가.
이는 여러 모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는 손 대표에게, 어쩌면 순탄하지 않은 정치 일정을 견뎌온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돌아보면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긴 정치 여정이었다. 환희에 빛나는 영광과 서러운 눈물을 담은 고난의 시간이 있었는데 내게 새로운 가능성을 심어준 것은 영광보다는 고난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다.
분명한 건 나를 몰아대던 그 숱한 비난들이 지금 생각하니 세상을 향해 단단히 버틸 수 있는 고갱이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그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2011.11.24.)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3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인분, 그리고 최루탄

인분, 그리고 최루탄


국회 본회의장에 최루탄이 터졌다.

한미 FTA 비준안 표결처리로 긴장이 감돌던 와중의 일인데 여당의 표결 강행에 야당 의원이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 45년 전 6대 국회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이 그것이다.
1966년 정부가 ‘삼성 계열사의 ’사카린 원료 밀수사건’을 미온하게 처리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김두한 의원이 싸들고 온 인분을 국무위원 석을 향해 날린 것이다.
‘인분 투척’은 본인을 포함한 관련자들이 옷을 벗거나 사법처리 되는 성과를 보인 반면, ‘최루탄 투척’은 FTA 저지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고 미완의 소동으로 끝날 조짐이다. (당사자 처벌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두 사건의 결과가 달리 나온 건 인분과 최루탄의 효과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까?)

초선의원 시절, 노동법을 통과시키던 때의 과정들이 데자뷰처럼 스쳐 지나간다. 새벽 시간, 야당 의원들의 눈을 피해 국회 뒷문으로 들어와 표결에 참여하고 안도의 숨을 쉬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당은 강행하고 야당은 거부하고....그 때도 야당은 의회 일정을 거부하고 장외로 뛰쳐나갔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전혀 낯설지 않은 국회의 현주소다.
‘인분’에서 ‘최루탄’으로 바뀌었을 뿐, 여야공수 상황만 뒤집혀 있을 뿐, 본질은 그대로인 채 정치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어찌 그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국회가 바뀌지 못했나하는 아쉬움이 있다.

너무 빤하게 의중을 드러내는 정치인들의 작위적인 작태를 보고 싶지 않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들이 내 안의 어떤 것들이 툭툭 건드리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였을까?
FTA 비준안이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비감스러운 감정에 휩싸이는 경험을 했다.
그래도 국회하면 명색이 대한민국 사회의 최고 엘리트들이 모인 곳이고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망가들이 넘치는 지성의 집산지다. 그런 국회에서 들이미는 자화상이 지나치게 보잘 것 없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민망하고 부끄러운 느낌이 울컥 서글픔으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눈 감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미 FTA 건만 해도 그렇다.
솔직히 정치인은 물론 대부분의 국민 모두, 또 다른 형태의 FTA 결말을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두가 어차피 통과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면서 시치미를 떼고 저마다의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했다. 이미 이런 식의 수순을 밟기 위해 서로가 명분쌓기에 급급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이미 나와 있는 답안대로 찬성 배역은 찬성을 위해, 반대 배역은 처절한 연기로 더 적나라한 비통함을 표현해내기 위해 올인했다. 저마다 자기 말만 해대는 상황극에서 정치인들은 정치 대신 연기를 했다.
이 역시 암묵적인 합의사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그렇게 마냥 느릿거리더니 이제와서는 다른 사람만 문제있다고 손가락질 해대기에 바쁜 모습이다.
참내, 반칙도 이런 반칙이 없다.
FTA가 합의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처리되면 국회의원에 불출마하겠다고 결기를 보이던 초선의원들은 다 어디로 갔나 싶다. 참여정부 시절 그렇게 열렬히 국익을 이야기하며 FTA 처리의 당위성을 역설하던 의원들이 지금에 와서는 단지 야당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변심을 합리화하는 모습은 또 어떻고.
무엇이 최루탄을 동원할 만큼 절박하게 했는지를 논의와 토론으로 설득하려는 노력대신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 놓고서야 결론을 내는 악습을 반복하고 있다.
고쳐보려는 의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불합리한 요소가 국회 무용론을 외치며 새로운 정치 창출을 주장하는 장외 세력의 인기를 일정한 검증절차 없이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솔직히 걱정된다.

개인적으로 한미 FTA를 찬성한다.
국익을 위해 반드시 시행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FTA 처리 과정에서 몰아붙여야 하는 한나라당의 안타까움도 백번 이해할 수 있고 반대할 수 밖에 없는 민주당의 고충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고함치고 아우성치고 밤새 토론하고 또 토론할 지언정 국회에서 단상을 점거하고 기물을 부수고 경호권 발동하고 급기야 최루탄까지 터뜨리는 폭력은 어느 이유에서건 안된다. 반대만을 위한 반대 찬성만을 위한 찬성은 없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정치적 쇼로 연명하려는 꼼수를 더 이상 선례로 남겨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최소한 흑백 텔레비전, 아날로그 시대에나 통하던 방식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현실 인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정치를 정화해 나가는 건 바로 국민의 몫이다.

(2011. 11. 23)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1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신종 망국병

신종 망국병

어려웠던 시절, 외국의 장학금으로 해외유학 기회를 얻어 인재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 적지 않다.
그런 식으로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받은 선진교육을 접목한 결과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궈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6년부터 시행된 미국의 풀브라이트 장학금이 대표적 케이스로 꼽을 만 하다.
미국이 외국에 판매한 잉여농산물 수익금을 현지 적립했다가 해당국가와의 교육문화 교류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는 차원의 장학금이었는데 지금까지 약 120개국 10만 여명의 인재들이 혜택을 받았고 2차 세계대전이후부터 대상국이 된 우리나라는 1000여명이 그 기회를 얻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 장학금이 대부분의 수혜자 인생에 결정적인 기회가 된 것은 불문가지다.
공부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간 장학생들은 저마다의 나라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인적 자원으로 크게 쓰였다. 개인에게만 기회가 된 게 아니다.
미국 역시 이들 못지않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잉여농산물 판매 수익금보다 더 많이 남는 거래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풀브라이트 장학금 인연들이 유력 인사가 되어 세계 곳곳에서 '친미파'나 '지미파'로 활약하고 있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간단하게 답이 나올 것이다.
이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제도를 만든 미국의 본래 의도가 거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 외국인 유학에 대한 장학금이 국제사회 지식인들을 위한 ‘은전’ 개념 정도의 단순한 해석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먹고 사느라 겨를이 없었던 시절에는 생각지 못했지만 우리도 몇 년 전부터 해외유학생 유치를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선 상태다. 그들의 외교적 가치를 수확(?)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2년까지 국내 대학에 외국인 유학생 10만 명을 유치해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내용의 ‘스터디 코리아 프로젝트’가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인지 2011년 9월 현재, 양적 목표치인 10만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외국인 유학생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인 대학가 풍토가 우려를 낳고 있다.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자행되는 인종차별, 특히 중국이나 동남아 출신을 비하하거나 왕따시키는 현실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국익이 뭔지 인식하지 못하는 대학생들이 애써 불러들인 유학생들을 '친한파'는 커녕 ‘혐한파’로 만드는 주범이 되고 있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다.
여론의 질타를 받을 만한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 모른다고 우리 대학생들의 근거없는 이 오만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당혹스럽다.
생각해 보라. 불과 얼마 전까지의 우리 모습을.
그 때 우리도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미국으로, 미국으로 몰려갔었다.
지금 우리가 곱지 않은 눈길을 치켜뜨며 함부로 대하는 이들처럼 가난한 나라 출신으로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기꺼이 낯선 나라를 향하는 선배들이 있었다. 고픈 배를 움켜쥐며 향학열을 태운 결과 마침내 꿈을 이루고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그들이 현존하고 있는 작금이다.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오래 전 자화상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를 찾아온 손님이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만 손님인 게 아니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유색인종도 비전을 품고 우리 대한민국 땅을 찾은 똑같은 손님이다. 양국관계에 도움을 주는 메신저로 활약하게 될 미래상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미래 자원이다.
외국인 학생들 개개인을 보면 국적과 상관없이 나름대로 뛰어난 점이 많다. 그들의 성장을 막고 있었던 낙후된 교육 시스템이 문제가 될 뿐이다.
이제 그들은 한국 유학을 통해 자기 앞에 가로놓인 장애물 치우기에 나선 셈이다. 예전에 우리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머지않아 무한한 잠재능력을 폭발시키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은 그들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와의 관계가 아닌) 다른 나라와 미국이 상충된 이해관계가 될 경우 미국 편을 들게 된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의 작용이 클 것이다.
그런 것이 외국인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자원이 아닐까 싶다.
우리 경민대학에도 외국인 유학생들이 와 있는데 머지않아 대한민국을 위해 전문외교 사절단 못지않은 역할을 발휘해 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그들을 각별하게 대하게 된다. 분기별로 식사자리를 마련하고 대화를 통해 그들의 고충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의 하나다. 정말 기회가 될 때마다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한다. 공부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공항,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까지 대한민국과 경민대학에 대해 좋은 기억을 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을 들이는 편이다.

학교 성적과 취업실적만이 대학생활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더불어 함께 사는 지혜와 덕성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말이 서툴고 낯선 타국에 와 있는 외국 유학생들에게 조금 희생해서라도 다 같이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여유가 개인의 인격은 물론 국격을 높이는 큰 가치라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인간의 희망을 말할 수 있기에 정말로 잊지 말고 챙겨야 할 진짜 과제물이다.

정신적 쇄국주의, 신종 망국병이다.
절대로 피할 일이다.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유학생 99%를 전부 친한주의자로 만들어버리자.

(2011. 11.21)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0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청소년 범죄

청소년 범죄

청소년 범죄가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다.
성인 범죄를 능가할 정도로 흉악의 극단을 치닫는 현상이다.
교육 일선에 있는 입장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게 지독한 개인주의뿐인 가 싶어 자괴감이 앞선다.
치유를 위한 온갖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지 않다.
우리 사회의 동량이어야 할 청소년들의 피폐한 현실이 대한민국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황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경쟁에서의 우위만이 최대의 가치로 인정하는 사회적 폐단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나만 만족하면 공동체 형편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식의 이기심이 질서의식 실종을 빌미로 범죄를 양산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소년 범죄가 기득권층이나 상류층의 여유를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얻어냈다는 가정하에 혹여 그들의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적개심을 자극한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른들의 진지한 반성이 요구된다.
청소년들의 왜곡된 가치관이라고 몰아붙이기엔 기성세대인 우리들의 혐의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지혜롭지 못한 처신이 이제 막 사회로 진출한 새내기들을 백수로 묶어버린 부인못할 현장도 있음이다.

간혹 청소년기의 왜곡된 가치관이 범죄행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습관적으로 남의 것을 훔치는 한국 유학생 동기가 있었다.
그의 거처에 가 보면 도벽이 인연(?)을 맺어준 공항의 기념품 같은 소소한 ‘장물’들이 적지 않은 규모로 진열돼 있었다. 종류도 다양했는데 정작 당사자에게 쓸모있어 보이는 물건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중에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의외의 답변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미국 등 선진국들의 경제발전이 자력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희생을 발판 삼은 것이라는 굳은 신념이 그를 도둑으로 만든 주범이었다. 그의 이론대로라면 도둑질은 복수를 위한 전리품의 일환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구차한 변명으로 들리지 않았던 건 나 역시 청소년기에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들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복잡한 심정으로 선진문명을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선진국 지위를 얻지 못했을 거라는 근거없는 적개심이었다. 심지어 법이 허락하는 범주 안에서 복수하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국내에 있을 때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아주 생소한 정서였다.

청소년 범죄는 분명 교육의 위기에서 비롯됐다.
결자해지 차원에서 청소년을 대한민국 사회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어른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겠다. 효 교육을 중심으로 인성을 배양하는 과정은 그 어떤 교육보다 우선한 가치이고 청소년 범죄를 퇴치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인간의 기본을 구축하는 인성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왜 더불어 사는 교육이어야 하는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특히 더불어 살려면 지극히 당연한 스스로의 몫을 선뜻 포기하는 용기부터 갖출 일이다.
개인의 독창성이나 창조성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완성된 이후의 가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범죄 해소를 위한 접점을 찾아내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협동과 단결을 강조하다 보면 평준화가 만들어 낸 수월성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반대로 학생들의 창의력이나 독창성 등에 방점을 찍다보면 지나친 이기주의다.
따라서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로 정하기 어려운 만큼 결론 자체가 유보적일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건 빠르게 늘고 있는 청소년 범죄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수수방관하지 말고 보다 빠른 진단과 해결책으로 청소년을 지켜냄으로써 사회적 책무를 다하자.
모두의 합일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2011.11. 19)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