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30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서진의 역사를 다시 쓰자

서진의 역사를 다시 쓰자


우리를 포함한 일본, 중국은 서로 인접해 있으면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국가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얽고 있는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 때문에 ‘멀고도 가까운’ 관계 속에서 서로를 향한 반목과 질시에 지배되고 있다. 그래서 툭하면 서로를 향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심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이는 아주 묘한 관계로 설정돼 있는 나라들이다. 특히 자국의 자존심이 문제다. 이로 인해 역사적 사안 마다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하기 일쑤다.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반목과 갈등의 연속선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다. 합리적인 규칙에 근거하기보다 호전적 자기과시를 앞세운 억지쓰기가 동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전인수 격인 해석이 역사왜곡으로 이어져 서로의 국격을 깎아내리며 상처를 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각국이 저마다의 입장으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동북공정이나 임나일본부설, 독도문제 등이 상호불신의 예가 되겠다.





대한민국이 남아공 월드컵 8강 진출에 좌절했을 때만 해도 상대국 우루과이 못지않게, 반기고 안도한 나라가 중국과 일본이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실제로 이들이 자국의 몇 몇 유명사이트를 통해 우리의 불운을 통쾌해하는 게시 내용이 언론보도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월드컵에 나가보지도 못한 중국이나 아시아에서 우리를 가장 큰 걸림돌로 생각하고 있는 일본의 시샘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네티즌들이 그런 걸 가지고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주를 이루는 네티즌들이 그 나라의 여론을 형성하는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들의 무례함이 주는 불쾌감보다 걱정이 앞섰다. 이런 감성적 대응이 21세기 아시아의 미래에 어떤 식으로 작용될까를 생각하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합리적인 서구의 사고방식은 뒤늦게 출발한 서양이 문명에 앞선 동양을 제칠 수 있게 한 결정적 승부 요인이다. 반면 동양으로선 일찍 우위를 점해놓고도 밀려나는 수모를 겪게한 치명적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영국의 경우를 보자. 호주의 식민지 시대를 개척한 당사자는 감옥 부족과 노동력을 이유로 보내진 영국의 죄수들이었다. 미국은 영국사회의 부적응자였던 청교도들이 개척한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영연방을 구성해서 한 가족임을 과시하고 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연고에도 불구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는 우리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정서와는 너무 달라서 부럽기까지 하다. 어떻게 보면 한국과 일본, 중국 사이의 관계는 물론 아시아권 국가들에게도 더 통용될 수 있는 덧셈의 정치인데도 동양권에서는 선뜻 덤비기 힘든 정서라는 게 문제다.


남양 홍씨‘인 나의 가계만 해도 중국 당나라 시대 안휘성을 본으로 정리하고 있지만(고려 초기에 당나라의 문화 사절로 입국했다가 귀화하여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가 된 홍은열(洪殷悅)님이 시조) 그 이전 본은 몽고였고 원뿌리까지 거슬러 가면 아프리카가 본이라는 소리도 듣고 있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서로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형태의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메이지시대 계몽사상가이며 자유민권운동가, 게이요 대학 설립자인 후쿠자와 유기찌는 일찍이 서양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권의 단결을 주장했는데 일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약간의 불순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나쁘지 않은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이왕이면 동양적 이념을 하나로 묶어 아시아가 세계 역사를 견인하는 시너지의 단초로 활용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꿈보다 해몽이 앞서는 격인지 몰라도 이왕이면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범아시아적 결실을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런 차원에서 역사학자 토인비는 문명권이 서쪽으로 이동해간다는 ‘문명서천설(文明西遷說)’은 매우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한국·중국·일본이 주축이 된 동양 문화권을 기준으로 할 때 미국문명권이 동양으로 서천하며 환태평양 문명권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면 기회적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서진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적기가 아닐까 싶다.


한중일 삼국이 협조와 세력균형을 통해 동아시아 블록을 만들어 공존과 평화, 경제적 분업을 이끌어가도록 노력해봄직 하다는 생각이다.


결국 대한민국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관련된 일을 위해 단결하듯 아시아 일은 아시아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지혜를 모을 때 그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의미없는 우리끼리의 싸움이나 삿대질은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가 먼저, 일본을 위해 그리고 중국을 위해 박수를 쳐주고 격려해주자. 위로도 해주자.


그리고 말해주자. 이번엔 비록 8강에 오르지 못했지만 다음 번 월드컵에서는 모두 힘을 키워서 8강에도 가고 4강, 결승에도 함께 가자고 말해주자.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샘내지 말고 힘을 합해 환태평양 문명의 결실을 함께 거두어 들이자고 독려해 보자. 그렇게 함께 , 희망으로 서진의 역사를 다시 써 보자.


참으로 멋진 일이 펼쳐질 것 같은 예감이다.

아, 그렇다고 끼리끼리의 문화를 조장하자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2010.6.30)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28일 월요일

홍문종생각- 자주냐 안보냐

자주냐 안보냐



오는 2012년 4월 17일 예정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작업이 한미 정상의 합의로 2015년 12월 1일로 연기됐다는 소식이다. 이번 정상간 합의는 전작권 이양 시기를 늦춰달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공식 요청을 오바마 대통령이 수용하는 식으로 진행됐다는 후문이다.

이로 인해 벌집을 쑤신 것처럼 정국이 요동을 치고 있다. 이번 합의로 안보불안이 해소됐다며 반기는 정부여당이나 보수 진영의 환영 입장과 달리 야당이나 진보 진영은 군사주권 포기, 밀실 외교라며 뒷거래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어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 측에서 주장하는 대로 전작권 환수 연기로 얻어지는 효과, 즉 미군의 전쟁 억지력으로 인한 불안해소, 경제적 실익 등 다 인정할 수 있다. 그 우국충정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국민의 자존의식과 직결된 전작권 환수 문제에 대해 국민적 협의 과정을 생략하고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국회동의를 구하는 당연한 절차까지도 무시해서 불필요한 오해를 자초한 측면은 지적받아 마땅하다.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전작권 환수 연기를 위한 대통령의 노력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깜짝쇼’로 평가절하 되는 건 어떤 면에서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툭하면 국가 정책이 갖가지 의혹에 발목을 잡히게 되는 것도 잦은 번복과 신중하지 못한 정부 대응이 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우선 당장 양국 국방부 장관 합의로도 충분했을 사안을 대통령이 직접 개입하는 바람에 우리 측 출혈을 키웠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앞서 국방장관도 (전작권 이양문제를) 없었던 것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가 상당히 많은 것을 내놓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며 전환권 전환시기 조정에 따른 (우리 측의)대가 지불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한미 FTA 재협상이 불가피 할 것이란 우려가 잇따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외에도 방위비 추가 분담, 평택기지 이전비의 추가부담, 아프간 파병 확대 가능성 역시 전작권 환수 연기에 따른 대가성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사안들이다.



정책의 신뢰성 확보는 국론분열을 막고 정부에 대한 국민신뢰를 이끌어내는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더 없이 중요하다. 이번 양 정상 간 합의 과정만 해도 국민과 야당 등에 세세히 공개하고 설명해서 이해를 구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설득력 있는 구체적 설명으로 믿음을 주어야 의혹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주 국방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북한에 대한 노예근성이니 뭐니 격한 말로 대립각을 세울 게 아니라 순차적으로 풀어나갈 문제임을 설득해야 한다. 그것이 정부와 여당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권국으로서 전작권 독립을 요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권리행사다. 이를 매도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건 절대로 적절하지 않다. 분열과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설사 국민에게 돌팔매질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옳은 건 옳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인의 용기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국민 입맛에 맞추려는 일부 정치인들의 포플리즘식 접근 방식은 근절돼야 한다. 전작권 문제에 대해서도 국민에게 솔직히 고백할 게 있으면 고백하고 동의를 구해야할 일이 있으면 동의를 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천안함 사건만 해도 일시적으로 한나라당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효과를 봤는지 모르지만 정치적으로 미숙하게 접근하는 바람에 결국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말았다.

바야흐로 설득과 쌍방향 소통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나와 다른 생각은 무조건 배척하고 적대시 할 대상으로 구분하는 관성은 여전하니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포용하자. 그것이 이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자. 그리고 또 한 가지, 국제사회를 지배하는 정의는 늘 국가 간 신의보다 자국의 이익이 우선 기준으로 작용된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되겠다.

어쨌거나 전작권 문제가 사대강, 세종시에 이은 또 다른 국론 분란의 불씨가 되어 시대적 불행을 키우는 사태로 번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수상하고 불행한 이 시절을 국민 저력을 모아 슬기롭게 지나도록 하자.
(2010. 6. 29)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27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준비하자

준비하자

우루과이전에서의 석패로 월드컵 8강 진입의 꿈이 좌절됐다.

심판이 좀 더 중립적이었으면, 박주영의 첫 골이 성공했다면, 이동국의 발길질이 좀 더 정교했더라면 하는 미련은 남지만 장대비 속에서 우루과이와 대등한 경기를 펼친 것만으로도 우리 선수들은 대단했다. 무엇보다도 선수들의 최선이 녹아든 경기였기에 더 큰 가치로 평가받을 수 있는 한 판 승부였다고 생각한다.

욕심이 커져서 그렇지 해외 원정 사상 첫 16강 실적도 우리에게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아쉽지만 다음 4년 후의 승리를 기약할 수 있는 희망의 저력을 확인한 셈이다.




지구촌 축제인 월드컵 덕분에 생소한 국가이름이나 발음하기도 어려운 외국 축구선수들 이름을 입에 올릴 기회를 접하고 있다. 특히 대진표가 나오면 경기를 치를 상대국은 물론 감독, 선수들에 대한 기량이나 신상, 심지어 개인적인 습관이나 가족관계까지 분석해 가며 정보 입수를 위해 공을 들이는데 그 노력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토록 상대방 파악에 열을 올리는 것은 상대를 제대로 아는 것이야말로 승리의 기본적 요체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우리 뿐 아니라 지구촌 모든 국가가 월드컵 승리를 목표로 몇 년간에 걸쳐 피나는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 현장은 대단하다. 실제로 손자는 그 병법서를 통해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부지피이지기 일승일부 (적을 모르되 나를 충분히 알면 승부의 기회가 각각 반반씩이다)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 상대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싸움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다)' 라는 가르침을 남긴 바 있다.



축구경기 하나를 위해서도 상대방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그토록 온갖 것을 동원하는데 국가의 명운에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는 너무 안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멀고도 가깝다는 존재감 외에 우리가 북한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은 극히 제한적인 게 사실이다. (가끔씩 북한 내 민감한 사건에 대해 대형 오보로 호들갑을 떨기 일쑤인 언론 보도만 봐도 그런 생각이 든다)

북한은 월드컵 축구에 견준다면 최고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상대다. 거기다 까다롭기까지 하다. 특히 민족의 대명제인 통일 과정에서 협상 파트너가 된다는 측면에서 더할 나위없이 중요한 존재다.

월드컵 축구는 그토록 섬세하게 준비할 수 있는 우리인데 정작 국가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필수 노정이 될 북한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한 준비로 임하고 있다면 문제 삼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그대로 말하자면 심각하다.

북한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너무 무지한 상태인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축구에서도 지나치게 잦은 감독이나 코치의 경질은 전략의 일관성 측면에서 혼란이 불가피하다. 우왕좌왕하면서 어려움을 피할 수 없게 돼 있다. .

지금 우리의 통일정책의 기저가 겪고 있는 혼란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뿐 아니라 북한 까지도 일관성 없는 정책 때문에 혼선을 빚고 있는 것 같아 그 어려움의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다. 그야말로 축구를 하려는 건지 농구를 하려는 건지 감조차 못 잡는 형국인 것 같아 안타깝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북한의 고위층 인사가 사석에서 “한국 정부가 내용이야 어떻게 됐든 정책의 일관성을 가지고 밀어붙여야 줄건 주고 받을 건 받으며 국제사회 공조의 빌미를 끌어낼 수 있는데 도대체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남한 당국 때문에 우린 더 죽을 맛”이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다.

사실이라면 큰일이다.



어제는 60주기를 맞는 6.25 기념행사로 분주하게 보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나치게 미국의 입장에서 미국을 대변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기념사가 주는 당혹감 때문이다.

미국이 우리에게 고마운 우방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전작권 문제등을 처리 하는 것을 보면 사대주의의 망령이 활개를 치며 대한민국 미래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기우이길 바라면서도 자칫하면 우리의 통일 전략에 큰 사단이 날 수도 있다는 조바심에 이 글을 쓴다.

전체 국민의 참여는 아니더라도 다수 국민의 합의가 담긴 통일정책이 한시라도 빨리 만들어져야 한다. 모든 국민이 한 목소리로 지지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정책을 수립해서 정권에 구애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추동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정치권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국가차원의 절대적 통일동력을 만들자는 말이다. 우리가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더해진다면 통일 추진체의 첫 단계를 건설하게 되는 셈이다.



대한민국은 자주 독립국임을 잊지 말자.
(2010 .6. 26)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방자전' 유감

'방자전' 유감



신문을 보니 백용호 국세청장이 청와대 참모들은 사고가 유연해야 한다며 영화 ‘방자전’을 보라고 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젊은이들의 트랜드를 이해하는데 그만이라는 얘기도 덧붙여져 있었다.

청와대 참모는 아니지만 높으신 분의 ‘추천사’에 귀가 솔깃해져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자전을 보러갔다. 솔직히 ‘어떤 영화길래...’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2시간 내내 ‘숨은그림’ 찾는 기분으로 스크린에 집중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방자전은 평년작 수준도 못 된다는 생각이다. 심오한 기대를 가지고 봤다간 본전 생각나기 딱 좋은 영화였다. 그냥 생각을 출장 보내고 가볍게 웃고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19금 ‘성인용’ 오락영화였다.

물론 영화사에서 홍보카피를 통해 주구장창 주장했듯, 기존의 춘향전을 완전히 뒤집어 통상적인 관점을 탈피한 시도였다는 점은 높이 살만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미숙한 손길이 그나마 신선한 아이디어를 개발의 편자로 만들고 말았다. 감독의 의도는 알겠지만 의욕이 앞선 나머지 일관성 없는 돌출과 억지의 연속인 설정 등으로 수습이 안되는 영화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음담패설이나 뜬금없는 정사신, 어설픈 멜로로 대충 얼버무리려 한 혐의가 짙다.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완성도가 떨어지는 내용이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훈장의 고리타분한 잔소리 정도로 받아들여질까 봐 살짝 걱정된다.)




왜 하필 ‘방자전’이었을까?

영화가 다 끝나도록 백 청장이 청와대 참모들을 위해 조언했던 ‘실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이 영화의 무엇이 유연한 사고를 기르고 젊은이들의 트랜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건지 답이 안 나왔다. 처음엔 내게 문제가 있나 싶었다. 나의 과문함이 백 청장의 심미안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 말고도 영화를 보면서 숨은그림찾기를 한 사람들이 또 있었다는 사실을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알게 됐다. 옆자리의 앉아있던 관객들이 백청장의 인터뷰 내용을 화제삼아 나누는 대화가 들렸던 것이다.

“그 국세청장, 영화 제작자 중에 아는 사람 있는 거 같아. 영화 ‘흥행 도우미'를 자처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 딴 영화를 청와대 참모들한테 보라고 할 수 있겠어?”



그들의 대화로 숨은 그림을 못 찾은 원인을 내 쪽에서 찾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부진한 한국영화산업을 도우려고 일부러 ‘방자전’ 얘기를 꺼냈나 싶었다.

이런 혐의를 받게 된 건 순전히 본인 잘못이다.

방자전의 부실함을 염두에 뒀다면 언론에서 방자전을 거론하는 과정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방자전을 통해 요즘 젊은이들의 트랜드를 이해하라는 주문 역시 사려 깊지 못한 측면이 많다. 예술적 완성도는커녕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막장 영화가 요즘 젊은이들의 트랜드를 대체한다고 단정짓는 건 자칫 그들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불쾌해졌다. 그의 방자전 추천이 마치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들렸다.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는 ‘실적주의’가 우리사회에서 여러가지 불합리함을 낳는 주범이 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정제되지 않은 공인의 ‘자기현시욕’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는 늘 명심해야 한다. 사회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공직자 신분에 대한 더 큰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현실인식도 잊지 말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스스로도 모르는 가운데 ‘악의 축’으로 전락하는 지독한 악몽을 꾸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그는 영화를 제대로 보지 않은 게 틀림없다.

어쨌든 방자전은 유감이다.
(2010 .6.25)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23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자,이제는 8강이다

자,이제는 8강이다




태극전사 파이팅이다.

우리의 태극전사가 드디어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지난 밤부터 손에 땀을 쥐면서 새벽을 밝혔던 고단함이 일시에 해소될 정도로 기쁜 소식이다.

특히나 최전방 공격수로 선발 출전한 박주영의 눈부신 활약은 기대이상이었다. 16강의 드라마가 박주영의 발끝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림 같은 그의 오른발 프리킥 골이 나이지리아 골문을 가를 때 흥분 때문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박주영은 역시 자신을 믿어주고 기다린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결정적인 보은의 역전골로 대한민국을 16강 대열에 밀어올리는 수훈을 세운 것이다.



관용은 모두에게 감동과 기쁨의 보고가 된다는 사실을 역사의 흔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중국 춘추 시대 초나라 장왕이 신하들과 잔치를 벌였다. 잔치 중에 촛불이 꺼져 잠시 암흑세계가 되었는데 한 신하가 왕의 애첩에 입을 맞추는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졌다. 깜짝 놀란 애첩은 자신에게 무례를 범한 자의 갓끈을 잡아떼 왕에게 내밀며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왕은 의외의 방향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연회장에 불을 켜기 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갓끈을 떼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실수한 신하를 용서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초나라가 진 나라의 공격을 받아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위기에 처한 왕을 구해주는 한 신하가 있었다. 장왕의 애첩을 희롱했던 바로 그 신하였다. 그는 장왕의 너그러움에 감동되어 어느 때고 보은하겠다는 마음으로 따로 용병을 기르고 있다가 왕이 위기에 처하자 달려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두리, 김남일을 탓해선 안된다.

나 역시 한참 경기가 진행 중일 때는 순간적으로 울컥했는데 그동안 우리를 기쁘게 하던 그들의 활약을 떠올리니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벌써부터 김남일 선수의 부인인 김보민 아나운서 개인 홈피에 악플들이 등장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지 말자. 이미 상처입은 그들을 몰아부칠 일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직무에 태만했던 게 아니고 악착같이 혼신의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다가 실수를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박주영에게 그랬던 것처럼 차두리, 김남일을 구박하지 말자. 그들도 대한민국 축구가 월드컵 최정상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응원해주자.



한번 실수하면 영구히 매장하기보다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들여 웅지를 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사회적 풍토가 아쉽다.

선수 양성이 다른 게 아니다. 실수하더라도 그 실수 위에 자신은 물론 자기가 속해있는 팀이나 국가를 위한 새로운 드라마를 쓸 수 있도록 지켜봐 줄 수 있는 아량과 인내가 최고의 트레이닝 코치다.

선수로 하여금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팬의 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일희일비 하지 않는 성숙한 팬 문화의 정착이 더 없이 필요한 시점이다. 16강으로 진출한 선수들 기량 못지않게 팬 수준도 그만큼 끌어올리자. 우리 몫이다.



자, 이제는 8강이다.
(2010. 6. 23)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22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새벽등산

새벽등산



평소보다 일찍(자정을 30분쯤 넘긴 시간)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깨어보니 새벽(3시 30분)이었다. 더 이상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달콤한 생수라도 마신 듯 진한 여운을 남기는 꿈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잠깐의 새벽기도를 마치고 뒷산에 올랐다.

아직 잠이 덜 깬 미명의 뒷산은 독특한 분위기로 나를 맞았다.

조금 올라가니 항상 미안함만 가득한 동생의 유택이 보였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아름다운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마지막까지 동생을 사랑했던 한 여인의 흔적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 해졌다. 병마와 싸우고 가족의 편견과 싸웠던 동생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주던 여인이었다. 몇 해 전 한 통의 편지로 동생에 대한 사랑을 절절히 풀어놓던 그녀의 통한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역시 사랑보다 인간을 더 감동시킬 수 있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동생을 위한 기도로 내 마음을 다독였다.

다시 발길을 재촉하니 잠시 후 내게 극진한 사랑을 주시던 분들이 잠들어 계신 곳이 나타났다. 그분들께도 생전의 연을 떠올리며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곳에서 몇 걸음 더 옮기자 통정대부를 지냈다는 세도가 부부의 봉분이 보였다. 그 옛날 이 시골에 이 정도 크기의 무덤을 쓸 정도였으면 꽤나 권세를 누리던 집안이었을 텐데 불과 100년도 채 못돼 무성한 잡초와 어지럽게 흩어진 상석들 때문에 폐허가 되어 있는 인생무상이 절로 느껴졌다.

평소 지나치며 자주 보는 무덤이기도 해서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아주며 고인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의 무덤을 아무런 관심없이 지나쳤는데 당신처럼 안부를 묻기는 처음“이라며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 인생, 생각처럼 그렇게 길지도 않으니 너무 아등바등거리며 살지 말라“고 충고했다.

나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저 산책길에 자주 만나는 인연을 생각해 내일 인부들을 시켜 벌초를 해드리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이내 다시 산을 올랐다.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대한민국 굴지의 언론재벌가의 호화스런 가족묘지들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정상 언저리다. 호화분묘 단지 앞을 지나며 뭐라고 한마디 남길까 망설이는데 쏟아지는 땀방울이 얼굴을 적시기 시작해했다.

발 아래로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며 부산한 아침을 준비하는 시가지 정경이 야트막한 높이 때문인지 정겹게 눈 안에 들어왔다. 아직 잠이 덜 깬 산짐승들과 함께 도시의 새벽을 훔쳐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도 했다.

몸을 돌려 하산을 시작하는데 제 몸집의 수 십배 면적으로 거미줄을 쳐 놓은 거미가 내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문득 제 속을 다 드러내놓고 있는 거미가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사람아, 이 치열한 21세기 생존경쟁 구도 속에서 이렇게 번거로운 몸집으로 전략을 다 드러내고 있으면 어떻게 먹고 살겠는가”라고 하자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양반 아저씨, 이 세상에는 고작 하루살기에 급급해하며 나처럼 헐떡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효용성이니 21세기 전략이니 사치를 부리는 거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그만하고 가던 길이나 가슈, 나는 여태 아침도 못 먹었수다”라는 거미의 퉁명스런 일갈이 나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1시간여 넘게 산을 타다 돌아오는 길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이제 막 등산길에 오르시는 어머니를 만났다.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아들을 만난 어머니는 온 몸으로 나를 반기시더니 엊그제 만난 자리에서 어머니께 주름살이 많다고 "얘 너는 왜 화장도 안하고 다니니"했다는 나도 아는 한 여고 동창 얘기를 꺼내셨다. 그리고는 못내 못마땅하신 어투로 “아무리 쳐 발라도 지가 더 쭈글쭈글 하고만” 하셨다.

아직도 청춘인 우리 어머니.

몇 발자국 더 가다가 만난 아버지는 함께 계시던 목사님들께 나를 소개하시면서 “나는 이제 다 됐지만 우리 아들은 저보다 훨씬 목사님들을 잘 모실 겁니다.”라고 하셨다.

매일 야단치시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아들을 칭찬하시는 건지 당신을 자랑하시는 건지 늘 애매모호한 화법을 사용하시는 아버지시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아침 새벽 등산이 끝났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가슴 부푼 만남 속에 사라져가는 것 같다.

산 밑으로 떨어지는 달과 함께 잔뜩 부른 배를 식히기 위해 1시간 넘게 걸으며 정리해 본 오늘 아침 새벽의 전모다.

여러분 어떠셨나요?
(2010 6. 22)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21일 월요일

양천경찰서, 그리고 이효리

양천경찰서, 그리고 이효리



같은 시기에 터진 두 사건이 비슷한 양상으로 내 시선을 끌고 있다.

양천경찰서 피의자 고문의혹과 이효리의 신작앨범 표절사건이 그것이다.

절제되지 않은 명예욕과 ‘과유불급’으로 ‘패가망신’을 자초한 상황이 연일 논란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다. 과정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결과에 조급증을 보이던 욕구가 불러온 치명적인 부작용이랄까.

알고 보니 양천경찰서 강력계는 전국 1위의 실적을 자랑하는 베테랑 팀이었다. 이번 사건은 어떻게 해서든 명성과 실적을 유지하려는 의욕과잉이 화근이 된 것 같다.

14개의 수록곡 중 6곡이 표절로 밝혀진 가수 이효리의 신곡앨범 역시 남의 곡을 훔쳐서라도 인정받고 싶었던 작곡가의 탐욕에 '정상'에 갈급한 여가수의 초조함이 허를 찔린 결과에 다름 아니었다. 목표에 급급한 나머지 신중하고 세심한 검증 절차를 외면하는 바람에 멀쩡한 남의 노래를 신곡이라고 발표하는 '촌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실적 좋은 양천경찰서 강력계와 최고 인기를 누리는 가수 이효리가 나름 선두를 지키고자 기울인 노력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그 정도의 노력 없이 거저 얻어지는 진전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왕의 타이틀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 부풀다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될 공산이 커지고 그 결과 지금의 양천서나 이효리 같은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 경우, 블로그 하나만 가지고도 방문객 숫자에 민감해 하면서 조금이라도 방문수가 저조해진다 싶으면 제목을 자극적으로 바꿔야 하나, 주제를 좀 더 현란하게 설정해야 하나 하면서 고민할 때가 적지 않은 것만 봐도 욕망의 절제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알 것 같다.




특히 사회적 물의에도 불구하고 사건 당사자들의 도덕 불감증세는 돌이킬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섬뜩해지기 까지 한다.

현재 양천서 사건 관련자들은 명확한 증언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석연치 않은 CC - TV 오작동 시기도 관련자들에 대한 의혹을 증가시키지만 물증이 없단다.

이효리의 음반 역시 표절 확인 과정에서 너무나 뻔뻔했던 표절 당사자의 반응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그는 표절 논란이 제기되자 ‘사전에 유출된 음원’이라며 끝까지 자신의 곡이라고 우겨 주위를 속였다. 자신의 거짓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서류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반성의 여지가 없는 모습이었다.



유학시절, MIT 교수 한 분은 사소한 표절행위로 지탄을 받자 자살을 해버렸다.(자살행위를 미화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미국의 심리학회 회장인 한 하버드대학 교수 역시 20년 전 표절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학계에서 영원히 제명되는 불명예를 감당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철저히 당사자의 책임을 묻는 미국사회의 ‘원칙적인 처리’를 지켜봐서인지 신상필벌에 예민해지는 것 같다.

인권을 유린하면서까지 일등'을 했어야 할까? 표절을 해서라도 차트 순위의 일위를 지키는 게 능력으로 평가되는 우리의 현실이 무섭고 서글퍼진다. 언제부터인지 정치인은 당선만 되면 된다는 생각, 경제인은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 공무원은 실적만 올리면 된다는 생각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만연돼 있다.

이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죽은 사회다.

이제 우리 사회도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정의를 지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 잘못했다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일벌백계로 다스려져지는 풍토를 정착시켜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정부 당국부터 문제다. 대학 간의 취업률 경쟁만 해도 관계당국이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각 학교마다 취업률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별 별 이상한 짓을 다한다는 소문은 여전히 대학가를 맴돌고 있다.

이제는 자유로워질 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같은 시행착오로 뱅뱅 돌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결국 결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과정이고 단기적 성공보다는 오래 오래 기억되는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 연속과정을 잘 견뎌내고 승리하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 삶에서 과유불급의 절제를 보여주는 '계영배의 가르침'이 금과옥조로 받들어져야 할 이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됐는지 궁금하다.
(2010. 6. 21)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19일 토요일

홍문종생각-실패도 자원이다

실패도 자원이다



자책골, 4:1의 대패 등 이번 아르헨티나전은 여러 모로 아쉬움을 남기는 건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박주영에게 자책골의 책임을 추궁하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최선을 다하기 위해 문전에서 상대선수와 뒤엉켜 있다가 당한 불운인데 무엇으로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이런 차에 '자책골은 박주영의 잘못이 아니'라며 박주영의 불운을 위로한 홍명보 감독의 격려 글이 눈길을 끈다. 그는 자신의 후배이기도 한 선수들에게 ‘세계 최강 팀과 경기하려면 한국은 투지를 갖고 싸워야 한다’며 ‘투지가 이들과의 격차를 좁힐 수 있는 한국팀의 유력한 무기라는 조언과 함께 이제부터 시작이니 실망하지 말고 평상심을 찾아 16강 진출 기회를 당부했는데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국 출장길에서 외국인들과 함께 아르헨티나 전을 지켜보았다. 나도 모르게 상대진영의 세계적인 선수 메시나 왕년의 스타이자 '신의 손'이라 불리우는 마라도나 감독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그들의 플레이는 전 세계 축구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충분히 멋졌고 막강했다.


아르헨티나 팀은 세계적인 강팀이다. 아무리 자책골이 있었어도 아르헨티나가 우리에게 버거운 상대가 아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4:1이라는 스코어는 어쩌면 우리가 넘을 수 없는 아르헨티나의 장벽이 숫자로 구체화된 현실인지 모른다.


우리보다 강팀을 만나 대등한 경기를 펼쳤던 우리 팀의 이전 경과들을 비교해보면 이번 아르헨티나전은 아무래도 승부욕,오기, 투지, 열정 등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내공부족이 문제였다는 생각이다. 강팀에 대한 강박감이 수비위주의 소극적 플레이로 연결되는 바람에 선수들의 기량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건 아니었는지.



역사에서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다윗과 골리앗’의 승부에서 다윗이 이기는 경우가 있었는데 약체 진영이 거대한 장벽과도 같은 상대에게 아무 두려움 없이 최선을 다해 싸움에 임하는 투지를 보였을 때였던 것 같다. 이번 강호 브라질과의 예선전에서 2:1로 석패한 북한 팀에 지구촌 축구팬들이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생의 한 시점에서 지옥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실패없이 성공만으로 자신의 인생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 와튼스쿨의 아르닉 교수가 우리에게 주는 충고는 충분히 새겨들을 만 하다는 생각이다.


아르닉 교수는 한국의 미래는 벤처가 중요한데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게 문제인데 우리에게 실패를 격려하는 문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실패한 사람을 패배자로 간주하지 않고 격려해야 더 많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고 누군가 먼저 실패한 것은 비슷한 시도를 하는 사람에게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주는 방패막이가 된다는 의미에서도 실패는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었다.


아르닉 교수가 지적한 우리의 문제점이 박주영에 대한 자책골 비난심리에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그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박주영의 축구 인생에서 이번 아르헨티나 전은 그렇지 않아도 최악의 기억 일 것이다. 그런 그에게 위로는 커녕 모든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건 횡포다.


일하다 보면 접시 깨뜨릴 수 있다. 접시 깼다고 나무라는 풍토라면 우리에게 더 이상의 미래는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다음 발전은 자신의 취약점을 알고 그 문제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기대할 수 있다. 단점을 보완해야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르헨티나전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건 실력 부족때문이다.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실력이 부족해서 진 경기를 자꾸만 다른 이유를 대면서 이리저리 걸고 넘어지는 건 성숙하지 못한 태도다.


응원 열기가 부족한 팀 실력을 채워주는 건 아니다. 월드컵 축구 경기가 팀 실력과 상관없이 승패를 가르기나 하는 것처럼 비이성적 행태를 계속하다간 우리의 미래는 좌절되고 말 것이다.


박주영의 자책골이 없었다면 이길 수 있는 게임을 놓치기라도 한 것처럼 몰아가는 억지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세상사 모든 게 마음대로 안된다고 해도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장애물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해도 끊임없이 도전하면 반드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세계사 속에 한 단계 더 전진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히 청년세대에 필요한 것은 열정과 투지다. 그것만 있으면 지금의 패배는 결코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으로 오늘의 패배마저도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혜안이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실패를 귀하게 받아들이는 훈련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나이지리아 전에서의 화이팅을 기대하며 박주영을 비롯한 우리의 태극 전사들에게 열과 성을 다한 성원을 보낸다.


......'대한민국~ 짝짜짝 짝짝"
(2010. 6. 19)


....홍문종 생각

홍문종생각-운수 좋은 날

운수 좋은 날


하루를 보내고 돌아보니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집무실에서 베드민턴 연합회 임원들과의 환담을 시작으로 과천 정부종합청사, 여의도 국회, 국립대학교, 강남 한정식집, 호텔 커피숍, 강북 일식집의 저녁식사에 이르기까지 서울 전역을 숨 가쁘게 누비고 다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말 그대로 번개 불에 콩 구어 먹듯 기민한 기동력 덕을 톡톡히 본 일과였다.

점심을 약속한 상대는 주차타워에 문제가 생겼다며 30여분을 대로에서 기다리게 했다.

(평범한 국산 메이커를 찾기 힘든 강남의 차량행렬 구경과 지나가는 사람들의 생각을 지레짐작해서 정리해보는 나만의 게임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인지) 늦어서 미안해하는 상대에게 ‘땡볕에서 기다렸다는 생각보다 무사히 나타나 주었다는 기쁨 때문에 얼굴만 봐도 즐겁다’고 말하는 여유를 보일 수 있었다. (설마 이 말이 다음 번에 또 늦어도 된다는 소리로 들리는 건 아니겠지?...홍문종 속 생각)



정부청사에서 만난 사람이나 국회에서 만난 사람이나 대학 교정에서 만난 사람이나 오늘 만난 면면이 최소한의 신뢰가 서로 깔려있는 사이라고 생각하니 대화 자체도 즐겁고 내용도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눈 사람도 국가와 서로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같이 힘을 모아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세분화된 일정의 순환 속에서 각각의 만남들마다 의미있는 시간을 기대하기란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인데 오늘은 확실히 달랐다. 각 일정을 충실한 대화와 만족할만한 결과로 이어갈 수 있었다는 포만감이 하루를 마감하는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만나야 할 상대를 임의대로 정할 수 없는 우리 같은 처지에게는 이런 종류의 만족감이 유난히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다.

결재하는 과정에 불거진 문제로 목청을 높여야 했던 아침만 해도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인지 마치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인간은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 모든 과정이나 결과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처럼 그런 대로 잘 진행된 하루를 마감하면서 나름의 행복감을 느끼는 일조차 평범하지 않은 행운에 속하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다.



빽빽한 스케쥴이 일상화 되어 있는 나로서는 만남 자체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님에도 굳이 블로그에 오늘의 기억을 전하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다.

만남이 인생의 노정에서 피할 수 없는 명제이고 보면 어렵고 힘든 만남일수록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만남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열릴 수도 있고 닫힐 수도 있다는 현실 인식과 함께 떠올리게 된 생각이다.

천안함 사건 이후 뒤숭숭해져가는 대북 관계가 걱정스러운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피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는 그렇다고 마냥 방치할 수도 없는 북한과의 만남은 우리 민족에게 부여된 숙명적인 숙제다. 앞으로 얼마만큼의 세월이 지난 뒤가 될 지 모르지만 후세 사가들로부터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이 어떤 식으로 평가 받게 될지 궁금하다.

북한과의 문제를 풀기 위해 지혜롭게 처신했는지 아니면 서로의 탐욕과 아집 때문에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몽매함을 보였는지 판단기준이 되는 중대기로에 놓여있음을 우리는 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결국 상대에 대한 신뢰와 민족애를 바탕으로 만남을 이어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 방식이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해법이 아닐까 싶다. 작금의 강경일변도나 예전의 선심일변도 등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공세는 적절한 대응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더군다나 남남 갈등은 본의 아니게 북한의 고도 전략을 돕는 불쏘시개 로 전락하는 전례가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보다 더 신중한 처신이 요구된다. 그것은 상대 진영의 움직임을 아무 것도 간파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기 패만 홀라당 다 까 보인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 무엇보다 시급한 건 남북간 관계 설정에 대한 남쪽의 국민적인 합의 도출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신뢰성 있는 대응전략이 꾸준하게 유지 노력되는 일도 이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통일이 되어도 북한 주민의 두려움이 최소화 될 수 있도록, 언제 어디서 만나도 북한 주민들이 솔선에서 손을 내밀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더 노력하고 배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만남의 행복한 경험을 통해 남북간의 안타까운 관계가 진일보 할 수 있는 방도는 없을까 요행수를 바라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
(2010. 6. 16)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월드컵의 꿈

월드컵의 꿈



다시 월드컵이다.

‘대~한 민국! 짝짝짝 짝짝!!’ 대지를 울리는 구호가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의 뜨거운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려놓는다. 월드컵 사상 첫 4강 진출의 신화를 쓴 태극전사들의 활약으로 그 여름 우리 모두 함께 행복했었다.

대륙을 누비는 우리 태극전사들의 겁 없는 질주, 정말 자랑스럽다.

주눅들지 않는 그들의 당당함이 대한민국 전역에 희망폭탄을 터뜨리고 있다.

FIFA 랭킹 13위(우리는 47위)짜리 그리스를 2:0으로 가볍게 접수한 우리다.

그 저력과 기세라면 아르헨티나도 나이지리아도 가뿐히 제치고 우리의 월드컵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게 될 것 같은 기대감을 지울 수 없다. 그만큼 우리 축구의 국제적 위상이 커진 것이다.



월드컵 축구에서 우리가 이런 기대감을 갖게 되기까지 그동안 우리 축구가 걸어왔던 역사를 돌아보면 눈물겹다.

1954년 첫 출전한 월드컵 예선전에서는 미군 군용기를 얻어 타고 가느라 개막식도 보지 못했다. 헝가리, 터키를 상대해서 치룬 예선은 각각 9:0. 7:0으로 대패해 월드컵 사상 최다골 허용 기록을 보유하게 된 우리다. 그나마 서독과의 경기는 체류비 때문에 기권했고 그 다음 1958년 월드컵에는 FIFA의 거절로 예선 참가조차 좌절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 후 22년 만인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처음 본선에 진출했고 2002년 주최국으로 세계 4위에 오르는 파란의 주인공이 됐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축구가 지금에 이르는 동안 보이지 않은 많은 이들의 땀과 열정이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고단한 그 먼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올 수 있도록 다독이며 뒷받침 해 준 인내와 자원의 손길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일에 기적 같은 공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축구 하나를 키우는 데도 혹독한 훈련과정을 참아낼 수 있는 승부근성과 역량있는 사령탑, 뛰어난 경기운용 전략, 화수분처럼 소요되는 재화, 끝없는 기다림의 세월 등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사연들이 쌓이는데 하물며 국가 차원의 일들은 오죽하랴 싶은 생각이 든다.



모든 일이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다는 현실을 한국 축구의 노정을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된다.

오늘 날 우리 축구가 월드컵 무대에 써 올린 신화처럼 우리의 국격도 세계무대에서 그렇게 당당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치는 물론 각 분야의 업그레이드 문제부터 선결돼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 히딩크 감독처럼 한국사회 어느 곳에도 빚진 바 없고 사심없는 제안이 가능하며 실천할 수 있는 뚝심과 저력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세계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우리의 인재를 발굴하고 그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일도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과정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을 총괄 할 수 있는 좀 더 거시적이고 합리적인 안목도 아쉽다.



각 나라의 명성이나 국익을 대변하는 기능에 있어 축구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렇더라도 축구가 우리의 모든 것이라도 되는 양 축구에 목숨걸고 축구에 일희일비하는, 균형감각을 잃은 모양새는 생각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실제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축구경기가 전쟁으로 비화된 일도 있고 보면 기우로 넘길 일만은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로 볼 때 축구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벤트인 건 맞다. 그러나 축구는 축구일 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핵심사안은 될 수 없다는 평상심으로 축구경기를 즐기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한참 축구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는 시점에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새겨듣길 바란다.



우리의 붉은 악마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그 세가 100만 여명에 달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좀 더 긍정적인 에너지로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자신들의 처음 동력이었던 순수한 열정을 잃는 순간, 약속시간을 넘긴 신데렐라 마차처럼 될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조언하는 바다. 그나저나 일부 정치권이나 기업들이 붉은 악마의 결집력을 저마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쓰려고 철없는 입질을 멈추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다.



내일 모레, 아르헨티나와의 격돌을 앞두고 있다.

당연히 아르헨티나의 장벽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은 근거없는 기대감에 충만해 있는 요즈음이다.

날마다 우리의 태극전사들에게 이겨달라는 응원 에너지를 보내며 떨리는 가슴을 가다듬는다.

내 생전에 우리가 월드컵 무대에서 세계를 제패하는 영광의 순간을 볼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2010. 6.15)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13일 일요일

홍문종생각 -學歷 no, 學力 ok

學歷 no, 學力 ok

사회적 파장이 컸던 신정아의 학력 위조 사건 이후 연예인을 비롯한 사회 저명인사들의 학력 시비가 한동안 도마 위에 오르내리는 현상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한 것 같더니 다시금 에픽하이의 리더 타블로의 스탠포드대 학력이 시비거리로 등장했다. 결국은 당사자가 스탠포드 성적표 등 입증 자료를 공개하면서 막을 내리게 됐지만 이 역시 학벌에 유난히 과민한 한국사회의 일단을 보여준 해프닝이라고 생각한다. (유명 연예인이나 타블로의 학력시비는 가수로서 주목받는 과정에 명문대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이 후광으로 작용했다면 문제 삼을 여지는 있다고 본다)
내게도 학력시비로 곤욕을 치렀던 경험이 있다. 국회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했을 때의 일이다. 상대후보가 사람을 미국으로까지 보내서 뒷조사를 하는 등 북새통을 떨더니 내 하버드 박사학력이 허위라고 선관위에 고발을 한 것이다.
종국엔 상대가 미국의 학위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로 끝나긴 했지만 막바지 선거운동에 피치를 올려야 하는 무렵이어서 대응하느라 고충을 겪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만큼 학벌의식이 강한 나라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학연을 매개로 한 집단의 동맹의식이 지나친 측면이 많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례가 많이 노출된다.
물론 학력이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제는 학벌이 평생을 보장하는 밥그릇으로 통용되던 시대가 지난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차원의 가치가 미래 비전을 주도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학벌주의의 완고한 벽에 대해 할 말이 많다.
학벌주의 조장의 실체는 ‘끼리’ 문화의 뒤틀린 이기심이다. 자기들만의 리그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집단적 횡포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집단의 ‘일원’이 되는 길이 험난한 것은 아니다. ‘학연’의 동질성만 충족되면 개인적 자질은 크게 문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들끼리 감싸주고 보살피고 이끌어 주는 단결력으로 타인의 진입을 철저히 견제하고 배척하고 차단한다. 대신 집단 이익에는 절대적이다. 집단을 위한 충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오늘 날 우리사회의 학벌주의의 참 모습이다.

미국의 좋은 대학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대학의 졸업장이 한 인간의 인생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지 못한다는 건 다양한 연구 보고서를 통해 널리 알려진 바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학자를 중심으로 학교 무용론이 제기되거나 명문학교 폐지가 주장되기도 한다. 또 각 대학상황에 따라 지원의 폭을 조절하는 정부의 차별적 지원제도에 대해 신랄한 비판이 쏟아지기도 한다.
학력보다는 실력 위주로 인재를 평가하는 미국사회에서는 학별이 한 개인의 성공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단적인 예로 미국 NBC-TV 프라임 타임 뉴스의 간판 앵커로 연봉1000만달러를 받는 ‘브라이언 윌리엄스’는 대학졸업장이 없다.
우리사회에서도 학력이 성공적인 인생과 무관하다는 것을 몸소 입증한 사례가 많다.
경제계의 정주영 회장을 비롯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 영화계의 임권택 감독, 가요계의 서태지 등 학벌의 우산을 쓰지 않고도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일궈낸 사람들의 성공사례는 부지기수다.

학벌은 포장지일 뿐이다.
때로 좋은 포장지 속 좋은 실력은 금상첨화일 경우가 없지 않겠지만 포장지만으로 한 인간의 가능성 유무를 결정짓는 척도로 삼는다는 건 '폭력'이다. 한 번 학력이 잘못되면 영원히 그 멍에와 굴레 속에 꼼짝없이 인생을 저당 잡히고 살아야 할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한숨을 생각하면 우리사회의 학벌주의는 한시라도 빨리 축출돼야 마땅하다.
학벌주의에 조종당하거나 음모를 돕는 동업자이기를 거부하는 사회적 각성이 필요한 때다.
무엇보다도 學歷이 아닌 學力으로 인재를 골라내는 안목을 키울 일이다. (2010 .6.14)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12일 토요일

홍문종생각-꿈을 낚는 進化

꿈을 낚는 進化


우연히 보수와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논객으로 알려진 인사들이 출연한 TV 토론을 시청했다. 하지만 토론이라기보다 싸움을 방불케 하는 공방의 연속이어서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물론 전통성을 옹호하고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와 사회적 변화와 발전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진보와의 가치충돌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적당한 경쟁이 국가 발전에 미치는 시너지 효과를 감안한다면 보혁 갈등을 비관적 관점으로만 판단할 일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때로는 이념 간 갈등이 건강한 사회적 담론을 견인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 못할 바도 없다.

다만 그 가치가 왜곡되거나 변질되는 상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념의 대립구도가 국가나 공동체를 위한 가치실현보다 특정세력을 대변하는 차원이라면 자칫 국민이 특정세력을 위한 소도구로 전락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삼성경제연구소 최근 작성한 ‘지표로 본 한국의 선진화 수준’ 보고서에 따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나 ‘사회안전망’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OECD 30개 국가 중 30위, 즉 꼴찌를 기록했다. 보수가 자신들의 밑천이라고 할 정통성도 명분도 깡그리 외면한 채 ‘깡통계좌’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셈이다.

오만함으로 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이 정황....국민에게 아무런 감동이나 흥미도 주지 못한 보수가 그나마 자신들의 사회적 책무인 도덕적 우월성마저 방기해 버렸다.

천안함 사건만 해도 보수진영은 정부의 바람잡이를 자처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정부가 내놓는 일방적인 자료로 스스로의 입맛에 맞게 가공 활용하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기도 했으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됐다.

보수의 시대착오적 발상이 문제다. 이대로 계속 정체된 낡은 가치에 천착하다간 조만간 국민에게 버림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될까 싶은 두려움도 솔직히 있다. 아무래도 보수진영엔 어지간해서는 진정성을 전달하지 못하는 무감각, 무감동의 DNA가 퍼져있는 것 같다.

보수(더 정확히 진보적 보수)의 일원으로서 전통적인 보수의 가치만 주장해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갈수록 입지를 좁히고 있는 대한민국 보수의 미래가 걱정된다 . 진보주의적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보수의 가치는 발 붙일 곳을 찾기 어렵게 될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진화하는 보수가 돼야 한다. 그것이 시대정신이다.

논란의 쟁점을 양비론으로 우왕좌왕 하는 정도가 아닌 고리타분한 보수와 철없는 진보가 확실하게 환골탈태하는 수준으로 진화돼야 한다. 진보의 존재를 묵살하거나 날마다 분화하면서 새로워지는 진보의 열정을 살피지 않고서는 세상의 흐름을 간파할 수 없다. 세상을 리드할 자격도 없다. (이 대목은 미국 보수의 영원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레이건의 소련붕괴 전략에서 입증된 바 있다. 레이건은 재집권 이후 강경일변도로 대했던 대소련 전략을 평화공세로 바꿨다. 그리고 그의 전략은 훗날 소련 붕괴를 이끌어낸 ‘70년 공산당사의 실험을 막을 내리게 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진보를 배척하고 도원 제패를 꿈꾸는 보수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불과하다.

진정 시대정신이 보수의 가치 위에 세워야겠다고 확신한다면 진보에 대한 과감한 포용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보수의 안정된 영감으로 피끓는 진보의 열정을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리더십을 획득할 수 있다.

혹시 변절이니 기회주의자니 하는 무책임한 매도로 그나마 보수의 원대한 꿈이 붙인 희망의 불씨를 꺼버리는 일은 삼가길 바란다. 진보나 보수. 어느 한 쪽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 역시 지양하도록 하자. 자칫 선명성을 앞세워 민중을 혼란의 와중으로 몰아넣는 분열의 단초가 될까 걱정된다. 마땅히 경계해야 할 상황이다.

차분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이 진화의 끈을 거머쥐도록 하자...



PS : 내 이념의 정체성을 진보적 보수로 정립하기까지 여러 스승과 책의 도움이 있었지만 특별히 고인이 되신 이수인 전의원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오늘은 그의 10주기 추모일이다. 직접 찾지 못하고 조화로 애도의 마음을 대신했지만 온 종일 생전의 그와 나눴던 대화들이 그리웠다. 이 혼란한 시기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던 같다.
(2010 .6.12)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10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나로호에서 길을 찾다

나로호에서 길을 찾다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의 2차 발사가 실패로 끝났다.

지난 해 1차 발사 실패에 이은 두 번째 좌절이다.

나로호의 성공이 대한민국을 우주 강국의 반열에 올려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지라 국민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닌 것 같다.

나로호의 성공을 가로막는 기술적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이번 실패에서 실질적으로 우리가 반성할 부분은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실적에 급급한 나머지 정말로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다가 초래하게 된 실패가 아닌지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일본의 교육학자들은 학생들에게 인간의 기본적 도리와 공중도덕을 가르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으로 폐허가 된 일본을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렸다고 자랑한다.

세계 속의 강국으로 부상하려면 기본적인 공부에 더 치중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우리의 교육 현실과는 대조적이다. 실제로 수학이니 물리니 기초학문 분야에 비해 돈이 되는 의학이나 전자공학에 치우쳐 있는 우리의 학문 환경이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이대로 간과할 수 없다는 위기감도 있다. 학창시절을 어떤 식으로 보냈건 좋은 대학에 가면 그만이라는 의식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 달성만 하면 된다는 왜곡된 가치관으로 진화하는 바람에 남의 업적이나 성공을 가로채 수천억짜리 기술을 단독 몇 십억에 팔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강심장들이라니.

조금 지난 얘기긴 하지만 노벨상 커뮤니티에서 한국은 다른 사람의 기술을 모방하는 데는 비상한 재주가 있지만 독창적이거나 창의적 창조 능력은 부족한 편이어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기 어렵다고 했다는 소리 역시 우리 교육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홍콩의 가전제품 매장에서 중국제품이 삼성이나 엘지 못지않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의외의 장면을 목격했다. 어찌된 일이냐고 화교인 주인에게 물었더니 중국은 한국에서 못하고 있는 우주선도 쏘아올리고 원자폭탄도 있는 나라라고 오히려 나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은 이미 수많은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고, 2008년에는 중국과 인도가 각각 세계에서 세 번째로 우주 유영에 성공했거나 달 궤도선을 발사에 성공한 바 있다.



세계적인 IT강국이고 자동차 건설 등의 기술이 세계 탑클래스에 속한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의 실질적 현실의 일단을 경험한 사건이 뼈 아픈 현실인식으로 다가왔다.

그나마 자체 기술도 아니고 러시아의 감수와 지도를 받아가며 만든 나로호다. 나로호 나로호를 연호하던 국민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날아오르지 못한 미완의 도전이 과학적으로 우리보다 후진국이라고 생각하는 중국이나 인도 등에 웃음거리로 전락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나로호 실패가 완벽하고 끈기있는 철저함과 기본을 중시하는 가치들이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국민정신이 될 수 있도록 그 중요성을 다시한번 되짚게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정말 사소하게 생각하고 간과했던 일들 때문에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 결과로 되돌아오는지에 대해 깊은 성찰도 반드시 필요하다. 과학 뿐 아니라 도덕이든 사회정책이든 그 어떤 분야에서도 더 이상 주먹구구식, 전시행정식, 단기이익 창출식의 접근법은 지양되도록 해야겠다. 대한민국의 21세기 도약을 위해서라도 필히 정착시켜야 할 사회적 약속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자, 다시 힘을 내어 길 잃은 나로호에서 다시 길을 찾아 나서자.
(2010 .6.9)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9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고독 헤는 밤

고독 헤는 밤



알 수 없는 지독한 우울함에 시달리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더 이상 잘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좌절감에 갇혀 버렸다는 호소였다. 아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상실감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절박한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지 알 것 같았다.


당사자로선 죽을 것 같지만 정작 병명조차 제대로 부여받을 수 없어 가중처벌의 혹독함이 더해지는 고독증후군의 증세가 새삼 상기됐다.


고독의 마수에 걸린 그의 현실이 몇 마디 어설픈 위로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침묵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고독이 동반되지 않은 삶은 개 돼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며 고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사상가나 철학가가 있었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고통 앞에서 무슨 힘이 될까 싶었다.





내게 있어 고독은 오래 묵은 친구 같은 존재다.


보통 하루면 기십명을 만나야 하는 나의 일상을 염두에 둔다면 군중 속 고독인 셈이다.


사람들과의 어울림도 좋은 편이고 친구관계도 원만한데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들 때가 많으니 가히 병이라면 병이라고 하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전학을 많이 다니다 보니 홀로 있던 시간이 많아서 생긴 습성일까 싶었는데 결국 나의 의식 밑바닥에 꽁꽁 매어놓은 강력한 자아가 나를 고독의 세계로 떠다미는 결정적 인자라는 선에서 결론을 지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심야를 좋아하고 그 동반자인 고독을 즐긴다. 유학준비를 하던 5년과 10년의 유학생활 동안 집중하기 쉽다는 이유로 밤새우기를 일상화하면서 생긴 습성과 무관하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고쳐보려고 노력을 안 해 본 것도 아닌데 결국은 원점이어서 습관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다.





고독하다는 건 아직도 스스로에게 희망이 남아있는 징조라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어쩌면 그 자신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끝에 얻을 수 있었던 '득도의 현장'일 수도 있다. 실제로 고독이 우리에게 인생 전반에 대해 돌이켜 성찰 시키고 현실인식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하는 순기능으로 작용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굳이 고독을 좌절의 끝으로 몰고가서는 안되는 정황에 다름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절한 대응이 가능하다면 고독은 고통을 주는 '가해자'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고독을 컨트롤 하는 힘이 있다면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이 입증된 바 있다. 이 시대를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나나 철학자들이 고독의 극한 상황을 뛰어넘어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걸어간 정황은 수두룩하다. 그들의 선례가 고독을 더 이상 기피 대상으로만 삼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독이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르게 돼 있다.


고독해서 너무 외로워서 우울의 늪에 빠져 죽을 것 처럼 고통스럽다는 친구에게 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달뜬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행여 해가 사라질까 봐 근심하거나 단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말해주고 고독을 매개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엄청난 힘의 배경도 설명해줘야겠다. 우리가 가진 이 내면의 보석이 얼마나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존재인지도 열심히 공들여 알려야겠다.


고독을 희망의 키워드 삼아 헤아리는 이 밤, 가슴에 들어와 박히는 총총한 기운이 새롭다.

( 2010. 6. 9)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8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정치권에 告함

정치권에 告함



선거는 끝났는데 정부 여당의 선거참패 여진은 심각한 양상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당내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 저자거리까지 들릴 정도로 격앙된 분위기다. 공천 파행에 따른 후유증도 선거 패배의 핵심 요인으로 지목되어 논란을 빚고 있다. 여기저기서 잘못된 공천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는 가 하면 공천을 사유물인양 전횡한 몇 몇 국회의원들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도 공정하지도 타당하지도 않은 공천의 문제점을 성토하는 열띤 분위기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당초 정당 공천권이 도입된 배경은 정당의 공신력을 담보로 책임정치를 실현하고 유권자의 선택을 돕는다는 좋은 취지였다. 최소한 원래 취지대로 운영됐다면 순기능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정당공천의 현실은 오염 그 자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크게 망가졌다. 음모와 협잡에 둘러싸여 무기력을 남발하고 있다. 공천이라는 용어 자체가 무색할 만큼 각종 전횡으로 선거 후유증을 양산하는 주범으로 전락됐다.

밀실에서, 힘으로 밀어붙이는 '사천‘이 활개를 치면서 그만큼 퇴행하고 있는 정치현실이 안타깝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 없지만 심지어 대통령이 공천 반장이라는 소문까지 나도는 판이다.



약관의 나이 대에 정치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공천제도에 대한 회의를 품었던 나다. 지구당위원장에 임명되던 취임 연설에서도 ‘내가 윗선에서 점지하는 마지막 위원장이 될 거라며 상향식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을 겁 없이 쏟아냈던 기억이 난다.


대한민국 정당 구조에 있어서 제일 먼저 공천제도가 손질돼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개인적으로 정치권에 돌아간다면 제일 먼저 실현하고 싶은 일이다. 세상은 자꾸 변하고 있는데 정치권만 귀를 닫고 있는 이 부조화의 고리를 언젠가는 내 손으로 끊어버리고 말겠다는 각오를 늘 마음 속에 다지고 있다.

모든 후보는 당원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상향식 공천제도의 정착이 정치 발전의 기초가 된다는 생각이다. 이로 인해 크고 작은 부작용이 불가피하겠지만 정당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다. 제대로 정착된다면 지금의 공천제도보다는 백번 천 번 나은 제도가 될 것이다.

지금의 공천 행태의 대대적인 개선 없이는 누구도 국민으로부터 인정받는 정치인이 되기는 쉽지 않다.



이번 선거 때는 물론 4년 전 공천심사위원장직을 맡고 있었을 때도 특수한 전략지역이나 중앙당 관심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경선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내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면 최소한 이번 선거에서 경기 북부로는 파주, 고양, 의정부 경기 남부에서는 수원, 용인, 성남, 하남 등의 실패는 피할 수 있었다는 게 내 판단이다.

단순히 승패를 떠나서라도 상향식 공천은 당원들이 자기 손으로 후보를 결정하고 그 선택에 승복하는 정치 문화에 익숙해진다면 정당의 하부 구조가 단단해져서 정당의 자생력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더불어 기본적으로 상명하달에 익숙해 있는 정당의 나쁜 관행들을 척결시킬 수도 있다.

이것은 한나라당 민주당 할 것 없이 모든 정당에 공히 필요한 얘기다. 특히 정당의 하부구조가 약한 한나라당에게는 체질개선의 시작이 중요한 변화의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쏠림 현상도 덜 할 것이고 정국의 안정적인 운영도 가능하게 된다. 정례행사처럼 중간선거만 끝나면 대통령 레임덕이 오고 임기 1년여를 앞두고는 대통령이 당에서 퇴출되는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화장실 갈 때 틀리고 올 때 틀리는 사람 마음에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공천을 받는 입장이었을 때는 내 견해에 상당수 동의하는 듯 하지만 막상 공천을 주는 위치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생각을 바꾸는 정치인들을 많이 경험했다. 입장이 바뀌면 가치 척도나 개념도 덩달아 바꾸는 게 세상상식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입맛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치 은급을 주듯 공천장을 하사(?)하는 달콤한 권력행사에 휘둘려 국민으로부터 줄 세우고 주는 공천, 돈 거래로 이뤄지는 공천의 주체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는 어쩌려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다.

병 속에 갇혀 허우적 거리는 꼭두각시 인생에서 탈피하려면 반드시 빈 손이 돼야 한다는 것을, 버림으로써 무한대로 얻을 수 있는 게 존재하는 인생의 묘미를 가르쳐 주고 싶다.

우선 당장 움켜쥔 그 손을 활짝 펴고 자유를 얻자.

그 때서야 비로소 진정한 정치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2010 .6.8)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6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융통성 있는 정국운영이 필요하다

융통성 있는 정국운영이 필요하다



6.2 지방선거 패배에 대한 청와대 대응책이 논란의 중심에 놓여있다.

‘선거패배라는 상황 논리에 따른 인적쇄신이나 정부개편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쪽으로 정국운영의 해법을 내놓은 청와대의 대답이 세상에 알려지면서부터다. 세종시와 4대강 사업 등 민감한 이슈도 계획대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듯 하다.

청와대의 이 같은 반응은 선거 이후 대대적인 물갈이로 민심달래기에 나설 것이란 당초 예상을 뒤엎은 것이어서 솔직히 걱정스럽다. 특히 언론 보도를 통해 회자되고 있는 ‘‘6∙2 지방선거 패배를 통해 드러난 민심을 겸허히 받아들여야겠지만 바람을 쫓아갈 수는 없다,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 안된다, 한번 정하면 꾸준히 가야한다’는 등의 청와대 관계자 코멘트들도 가슴을 무겁게 하고 있다.

아마도 이대로 밀릴 수 없다는 강경 기류가 청와대 의중을 견인하고 있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도 국가의 위기 사안 때마다 강경론과 온건론이 충돌했지만 대부분 강경론이 판을 주도하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목소리가 크고 선명해 보이는 강경파의 주장이 더 정의롭고 충직할 것 같은 착각이 작용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강경파의 득세는 '창대한 시작’에 비해 매번 초라한 성적표를 남겼다는 점에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옛날 청나라 침입 당시에도 조정대신 중에는 목숨걸고 싸우자는 사람(척화파)이 있었고 화친을 주장하는 사람들(주화파)이 있었지만 척화파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주장이 더 충성스럽게 보인 탓이다. 그러나 척화파의 호기는 결국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로 끝나고 말았다. 그들의 무모한 주장이 국가의 운명을 풍전등화의 위기 속으로 더 몰고 갔다는 질타에도 별다른 변명의 여지를 남기지 못했다.

이 때의 일화로, 척화파가 청황제의 통첩문을 찢어버리자 주화파인 최명길이 그걸 다시 붙이며 "나라를 위해 경같이 찢어버리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저처럼 붙여야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라는 ‘최명길 어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이번 청와대 입장에도 ‘선거로 드러난 민심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소통에 주력하자는 온건파의 주장보다 중간선거는 원래 그런 거라며 (정부의 입장을)더 세게 밀고 나가야 한다는 강경파에 힘이 실린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에서 논란이 된 4대강이나 세종시 정책을 제외하면 청와대나 내각이 책임을 물을만한 잘못이 없다는 의식과 대통령이 현장 행보를 강화한다면 민심을 회복할 수 있다는 청사진이 강경논리를 뒷받침하는 배경이 되고 있는 듯 하다. 또 인적 쇄신이 자칫 '4대강 사업'과 '세종시 수정안' 등의 정책 수정으로 비춰져 집권 후반 국정 운영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설득력을 얻은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세종시나 4대강 사업 추진에 있어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이 정부의 약점이 된다는 정부의 관점은 잘못됐다고 본다. 오히려 정부의 독자적 행보가 국가차원이나 국민 입장에서도 그렇고 정부여당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는 측면에서 재고의 여지가 많다.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식의 정국운영 조언은 현 상황에 맞지 않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 싶다. 적대국과의 대치 현황이 아닌 이상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융통성을 발휘한 결단이다. 제로섬 게임으로 몰아가기 보다는 윈윈 전략으로 정국을 차분히 풀어내는 게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권력은 유한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미 끊임없이 증명된 바이기도 하지만 유한권력을 마치 무한한 것처럼 착각해서 빚어진 숱한 참사의 결론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제발 이번만큼은 무책임한 강공책으로 국사를 그르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겠다. 대북 정책에 있어서도, 여야 관계에 있어서도, 국민 설득 과정에 있어서도 서로의 의식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신중에 신중을 더하는 여유로움으로 이 어려운 국면을 무사히 탈피할 수 있는 처방을 마련하기 바란다.

지금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국정 운영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라는 인식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2010. 6. 7)

.....홍문종 생각

홍문종 생각-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고등학교 은사님 부음을 받고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대광高 시절, 우리들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셨던 이동범 선생님이 유명을 달리하신 것이다.
백병원에 차려진 빈소에서 선생님의 영정사진을 마주하니 학창시절 묵은 기억과 함께 사진 속 보다 훨씬 젊은 선생님의 옛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 시절 선생님의 수업시간은 5분 먼저 시작해서 5분 늦게 끝나기로 유명했다. 10분 늘어난 1시간의 수학 수업은 우리학교의 불문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불문률은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진행됐다. 지나고 보니 그 '10분'은 우리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었던 선생님의 사랑과 열정이었다.


채플 시간에 간절히 기도하시던 선생님의 모습도 기억에 생생하다. 기도하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학생이 어긋날 리 없다는 믿음으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던 것 같다.


기회가 될 때마다 우리들에게 진정을 담은 기도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 하셨다.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시길 게을리 하지 않았던 선생님의 모습이 마치 어머니의 모습처럼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졸업 이후 오랫동안 뵙지 못하다가 10여년전 부터 매년 은사님들을 모시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하실 때 마다 적지 않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한 사랑을 전하시던 모습도 오래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선생님은 졸업생 중에서 대광을 빛낸 제자들을 줄줄이 호명하시는 기억력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좋은 기도문이나 설교집을 가져와 나눠주시기도 하셨다.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던 학생이라면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평생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고 제자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쏟으신 선생님이시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은 귀감이 될 만한 처신으로 수학의 인수분해나 미적분 수업만으로는 도저히 습득할 수 없는 삶을 교육하셨다. 자기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며 열과 성을 다하는 생전의 선생님을 통해 우리가 얻은 참 삶의 가치는 결코 헤아릴 수 없다. 특히 교직에 종사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선생님의 가르침은 더없이 소중한 자원이 되고 있다. 교육현장에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실종됐다고 우려하고 있지만 존경심은 강압에 의해 형성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은 특별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 진지하지 못하고 도외시 하는 요즘 세태 역시 선생님을 만났다면 분명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가르침이 더욱 빛나는 것은 자기 실천을 통해 우리들을 교육하셨기 때문이다.


‘성실성'에 대한 교육만 해도 그런 식으로 이뤄졌다.


교단에 서기 시작해서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의 지각이나 결석이 없는 전설을 남기신 만큼 성실성에 있어 누구도 선생님을 능가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본다. 실제로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폭설 때문에 대규모 지각사태가 벌어졌는데 유독 선생님 혼자만 지각을 하지 않으셔서 다들 그 이유를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눈이 오는 날엔 특별히 3시간 먼저 출근한다’는 선생님 답변에 모두가 뒤집어졌던 기억이 난다.








인간의 삶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사랑을 주시던 선생님과의 이별은 아쉽기만 하다. 얼마 전 스승의 날 입원 중이시던 선생님을 찾아뵐 때만 해도 또렷한 정신으로 우리 일행을 일일이 알아보셨는데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우리 이동범 선생님의 훌륭하신 모습을 꼭 전하고 싶다는 간곡함이 이 글을 기록하게 만들었다. 교단에 계신 선생님들께도 마찬가지 심정으로 우리 선생님을 전하는 바이다.


비록 거창한 유명세를 남기신 건 아니지만 '사표'가 우리 곁에 머물다 가신 흔적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지금 교단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또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우리들 가슴 속에 등불처럼 살아계실 선생님의 존재를 전하고 싶었다.





혹시 이 블로그를 접하는 독자 중에 대광의 이동범 선생님을 기억하는 분이 계시다면 잠시나마 감사의 염으로 그분의 마지막을 배웅하시길 바란다. 7일 아침 백병원에서 영락교회 장으로 영면의 길을 떠나실 예정이다.


사랑하는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2010. 6. 5)


....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3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불상사 보다 기회로

불상사 보다 기회로




거울을 바라보니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엊저녁 모처럼 자전거를 탔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여기저기 상흔을 남긴 내 모습 때문이다.

이런 저런 스케쥴에 밀려 한동안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내게 있어 자전거는 거의 신체의 일부처럼 생각될 만큼 익숙한 존재였다. 그런 만큼 솔직히 자전거를 타다 넘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사고의 발단은 가벼운 마음으로 자전거에 올라 학교운동장을 돌다가 급기야 무작정 시내로 진출한 무모함이 화근이었다. 당연히 챙겼어야 할 헬멧이나 장갑 등의 보호장구를 외면한 것도 근거없는 자신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도로가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오랜만에 달리는 재미에 빠져 있을 때만 해도 마냥 상쾌한 기분이었다. 여전히 녹슬지 않은 자신의 실력에 도취돼 도로까지 나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한적한 길을 찾아 강릉 수목원 방면으로 접어든 이후 10분이 채 안돼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자동차들이 질주하던 도로가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불러온 방심의 파장 때문이었다.

쌩쌩거리며 잘도 달리던 자전거가 노면 한 귀퉁이에 파인 웅덩이를 피하지 못하고 균형을 잃으면서 나는 순식간에 길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지는 찢어지고 얼굴에는 피가 흐르고 다리와 손까지 찰과상을 입은 것은 물론 잠시였지만 정신까지 아득해지는 난감한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번 해프닝으로 얻은 게 많다. 특히 몇 가지 사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던 건 분명 소득이었다.

그 중 내 버킷리스트 1순위의 로망이라고 할 ‘오토바이’에 대한 관심을 이제 그만 접어야겠다고 스스로 결심하게 된 것은 파격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오토바이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포기되지 않는 나의 오랜 꿈이었다. 그동안 ‘할리데이비슨' 전시장을 들락거리며 은밀한 스킨십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 내 삶의 즐거움 하나가 시원섭섭함을 남기며 사라지긴 했지만 더 이상 돌아보지 않으려고 한다.)



어떤 일이든 지나친 과신은 해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공고히 체득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잘 안다고 해서 지나치게 방심하는 것 역시 오만함이다. 정제되지 않는 자부심 역시 낭패를 초래함에 있어 오만함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야당의 선전으로 끝난 선거 결과도 (자전거 사고 때와) 비슷한 상념에 빠지게 한다.

국민은 역시 준엄했다. 이번 선거로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 오만함을 보인 정부여당의 과속질주를 확실하게 심판했다. 그 어느 때보다 높은 투표율로 그동안 묵묵히 지켜보던 눈길을 거두고 한방의 강펀치로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민의를 외면한 독주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정부 여당의 통렬한 자기반성과 국정운영의 새로운 방향설정 등으로 환골탈태 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야당 역시 여당의 참패를 그저 남의 일로 흘릴 게 아니라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면 말로만 국민의 공복을 외치기 보다 실천의 결과물을 반드시 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불상사라고 포기하기 보다 새로운 기회 창출의 가능성으로 접근할 여지가 남아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큰 수를 알려준 자전거 사고나 비록 쓴 맛이었지만 훗날을 위한 밑거름이 될 선거 결과는 나쁘지 않은 징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좋은 기회였다.



실패는 병가지상사라며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던 선인의 지혜가 새삼스러워진다.
(2010. 6. 3)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2일 수요일

홍문종생각-꼴찌에게 갈채를!!

꼴찌에게 갈채를!!

떨어지는데 나처럼 이골이 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경험으로 쌓아올린 내공으로 치자면 나를 능가할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낙방에 있어 가히 지존(?)의 경지에 올랐다 할 수 있겠다.
몇 번이나 옮겨 다닌 초등학교 때부터 낙방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막 붐이 일던 사립학교 입학을 위한 추첨에서 실패한 것이다. 중학교 시험에서도 낙방(당시 명문인 K중학을 가겠다고 하니까 엄마를 모셔오라던 담임선생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했다, 이를 필두로 학창 시절 다수의 반장, 회장 선거, 하버드 학생회장 선거(스탠포드 학생회장 선거에서는 성공했다), 박사학위 논문, 국회의원 선거 등에서 떨어진 무수한 낙방경험이 나의 이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그런만큼 낙방의 아픔이 얼마나 치명적인 스트레스로 되돌려지는지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박사학위에 실패했을 때는 하버드 대학 기숙사 앞을 흐르는 찰스 강에 빠져 죽고 싶었다. 국회의원 낙선 때는 이렇게 열심히 직무에 최선을 다한( 초선의원 당시 4시간 이상을 잔 적이 없다) 나를 외면한 국민들이 너무 야속해서 마침 외국대학에서 온 초청장을 들고 이참에 진로를 변경해 버릴까 고민할 정도로 우울에 빠져 한참을 헤매기도 했다.
그 때마다 실의에서 벗어나도록 나를 독려했던 건 내 이웃의 삶이었다. 그들의 고통과 좌절에 비하면 내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내 힘으로 그 상처를 아물게 해서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소명의식이 나를 자극했고 다시 도전할 용기를 줬다.

오늘은 내 지역을 위해 일해 줄 선량을 뽑는 투표일이다.
오늘 중으로 선거 결과가 나오면 그동안 오늘을 위해 사력을 다해 달려온 사람들이 당선과 낙선의 엇갈린 희비 속에 서게 될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당선의 기쁨을 누리게 될 사람보다 오늘 이후 자신의 인생 이력에 낙선 기록을 추가해야 할 사람들의 수가 훨씬 많을 것이다.
분명 세상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당선자들을 향해 몰리겠지만 나는 낙선한 분들에게 더 눈길이 간다. 그들의 미래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해주고 싶었다. 오늘의 쓸쓸한 귀가 길이 머지않아 화려한 재기의 레드카핏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그것이 뜬금없이 내 낙선이력을 장황하게 펼쳐놓은 이유이기도 하다.
‘고통’이야말로 인간의 완성된 삶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 아미노산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뜨거운 태양 빛이 과육의 달콤함을 빚어내는 천혜의 요소인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가치는 쓰러지고 고통받는 과정을 거친 이후 그 진정한 의미를 더하게 되는 것 같다. 나름대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사람들의 고백이나 옆에서 지켜본 실제상황을 통해 확인된 바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일등보다는 꼴찌에게 관심을 갖는 사회가 더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이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분야는 역시 정치무대다.
실제로 칠전팔기의 성공신화를 쓴 정치인들이 부지기수다.
링컨은 셀 수 없을 정도의 낙선을 기록한 정치인이었고 처질 역시 정치생명을 끝내야 할 정도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수시로 당적을 옮기는 등 지난한 역경의 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그러나 역사가 그들을 ‘성공한 정치인’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수없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신의 목표를 이뤄낸 ‘결과’에 주목한 때문일 것이다. 결국 실패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실패한 이후 어떻게 자기 자신을 추스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내 경우만 해도 지금 이 순간 남다른 정치적 굴곡으로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지만 가슴에 품은 꿈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 많은 좌절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버드 박사학위도 따냈고 재선 국회의원 경력도 얻어낼 수 있었듯 종국엔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지난 시간의 실패가 내게 남겨준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낙선자 여러분.
오늘 설사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해도 이것이 인생의 종지부가 아닌만큼 결코 실망하지 마시라.
여러분의 낙선은 분명 더 큰 출발을 위한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가슴에 신념을 잃지 않는 한 그 어떤 마지막도 존재하지 않는다.
준비하고 노력한다면 틀림없이 지금보다 더 좋은 인생의 기회가 주어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좌절을 딛고 일어설 때 주변인의 조력 여부와 상관없이 실제로 감당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는 사실 을 기억하길 바란다.
절대로 기죽지 마시라.
여러분 인생에 기필코, 반드시 새로운 세상이 전개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그것이 자연의 필연 법칙이다. 여러분도 이 낙방거사의 충언을 귀담아 듣고 그 때를 위해 자중자애 하길 바란다.

꼴찌에게 갈채를 보낸다.
(2010. 6.2)
...홍문종 생각



홍문종 네이버 블로그 : http://blog.naver.com/mjhong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