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5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도행역시(倒行逆施)


도행역시(倒行逆施)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의미의 ‘도행역시(倒行逆施)'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택했기 때문인데 이런 저런 해석이 붙으면서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분주해진 듯하다.  특히  아전인수 격 해석으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거리로 활용하려는 이들이 반기고 있다.
하긴 생각이 다르거나 정치적 출구로 활용하려는 이들에게 이 정부의 무엇인들 곱게 보일까 싶기는 하다.
 
  
어떤 방향이든 정부정책이 다양하게 평가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개혁을 기치로 한 대통령 의중이 왜곡되는 현실은 안타깝다.
반정부 선전전의 수위가 금도를 넘는다.
다만  사심을 버리고 정도를 걸어  기득권 사수의 낡은 관행을 깨자는 의지를 말하고 있을 뿐인데  받아들이는 입장은 극과 극이다.  과거로의 회귀니 독재니 심지어 ‘정권 퇴진’까지 운운되는 현실이다.  고려해야 할 변수를 외면하고 관점이나 방식에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는 지나친 성마름의 결과다.
상황 왜곡을 기본이고  정부정책의 성패판단을  일방적 기준으로 매도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축적된 경험과 사실에 입각한 검증된 가치를 담론으로 삼는 보수진영과 경험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미지적 가치를 내세워 현실을 비판하는 진보진영의 입장이 충돌하는 현장은 참혹하다.


돌아보면 경제대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희생’이 불가피했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정치적 목표가 됐건 경제적 목표가 됐건 희생을 희망의 대체재 삼아 꿈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던 세월이었다. 그 결과 오늘 날 OECD 경제대국 반열에 올라선 대한민국 위상을 만들어 냈고 이제 더 이상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암묵이  용납되는 분위기도 아니다.   그에 더해 또 다른 도약을 모색 중이기도 하다.
상당 부분 상황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그동안의 희생을 우선 과제로 짚어 결론을 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희생을 기반으로 했던  지난 세월을 반성해야 하는 건지 격려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위로해야 하는 건지 어떤 식으로든 매듭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도록, 정리정돈을 마쳐야  다음 단계의 대한민국 도약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나름의 관점으로 들여다보니 교수들이 선택한 ‘도행역시’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지난 일 년, 온 사회가 주춧돌 마련을 위해 몸부림 친 노고 덕분에 이제 새로운 이정표를 향하고 있는 측면에서 정부정책의 자신감이 읽혀진다고나 할까.
뒤틀려 있는 남북관계만 해도 그동안 재정립되는 과정을 겪으며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국 제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다. 정치 현실 역시 삐딱하기는 남북관계 못지않지만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통해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저마다 지켜야 할 처신이나 금도의 마지노선을 극명하게 경험한 지난 일 년인 만큼 이 역시 새로운 지표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편안하지 못했던 건 경제 분야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경제민주화도 익숙하지 않은 사회적 주제를 실행하기 위해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명쾌한 답안이 즉각 제시되지 못한 측면이 크다. 그러나 실천 의지가 명백하기에 이 어수선한 과정조차  경제민주화가 제자리를 찾도록 돕고 있다는 셈법이다.
   

얼핏보면  박근혜 정부에 있어 지난 일 년은 한걸음 후퇴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이 한 번의 자리매김이 박근혜 정부를 열 걸음 전진시키는 미래지향적 전환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기설기 대충 꾸려왔던 세상을 한번쯤 총체적으로 정리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있는  걸음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되돌아 부족한 점을 살피고 채우는 기능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교수들이 제시한 사자성어에서   긍정적 측면을 찾는다면 바로 이런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 2013. 12. 23)
 ....홍문종 생각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무임승차

무임승차 


오늘 일과의 종착지는 63빌딩이었다.
모임이 파한 뒤 여의도순복음교회 인근까지 가야하는데 자동차 대신 걷기를 택했다.
(사색과 건강,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런 식의 선택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도중에 돌발상황이 생겼다.
출발 때부터 조금씩 날리던 눈발이 굵어지면서 부담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눈 때문인지 빈 택시도 보이지 않고 해서 한 정거장 거리인 목적지까지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는 금방 도착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는데 아뿔사!! 이번에는 버스비가 문제였다. 수중에 잔돈이 없었다. 엉거주춤 만 원짜리를 내밀었더니 거스름돈이 없다는 단호한 대답이 버스에서 도로 내리라는 압력이 되어 내 등을 떠밀었다.
여전히 택시는 없고 버스도 탈 수 없고... 그렇게 잠시 난감한 순간이 흐르고 또 다른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 사정을 얘기하자 이번 기사님은 잔돈이 없는 나를 도로 내리게 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무임승차를 하게된 것이다.
   
짧은 동안의 해프닝이었지만 생각의 여지를 크게 남기는 경험이었다.
특히 ‘과감한 실행’에 우선가치를 두는 부분 등에 대해 생각이 깊어지게 했다.
내 경우, 잔돈 때문에 근심하기보다 일단 버스에 올라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문제 해결을 앞당길 수 있었다. 눈을 피해 목적지를 가야하는 내 입장에서는 차비를 만원 내느냐 공짜로 타느냐 여부보다 버스로 한정거장 구간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기꺼이 만원을 차비로 지불할 용의가 있었는데도 버스이용에 어려움을 겪은 건 실행보다는 생각에 몰두하다 기회를 놓쳤다.
나라 일을 하면서 특별히 필요로 하는 예산규모가 명확하지 않으면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게 어떨까 갈등하거나 지레 포기하게 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될 때가 많다. 청년 창업을 돕는 프로젝트만 해도 불확실한 집행비용에 따른 불안감이 사업결정을 망설이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젊은이들에게 창조경제 참여기회를 제공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무한한 가치를 갖고 있지만 역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때로 제동을 걸게 우리를 조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저지르고 사후 수습책을 마련하는 쪽으로 방법을 찾는 쪽이 훨씬 생산적이라는 생각이다. 기왕에도 기대보다 훨씬 더 큰 보람으로 보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다른 하나는 각박해질 대로 각박해진 우리 사회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다.
처음 버스기사님은 눈 내리는 늦은 밤, 강변에서 만 원짜리를 들고 잔돈이 없어 난감해 하는 손님을 배려하지 않았다. 악의적으로 무임승차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단호하고 매몰찬 행동과 말투로 마음의 빗장을 닫아버렸다.
시혜를 베풀 입장이 아니라면 적어도 거스름돈을 포기하라는 식의 절충으로 고충을 해결해 줄 순 없었을까?
그렇게 묻고 보니 단순히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반론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마주한 건 너나 할 것없이 각박하고 여유없이 돌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었다.
물론 기사님은 버스회사 종업원 입장에서 성실하게 운행수칙을 준수해야 할 책임이 있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라 ‘배려담긴 친절’이 기업경영에 기계적인 원칙보다 더 큰 보탬을 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한 순간의 감동이 해당 버스회사의 기업 이미지 상승으로 연결된다면 그 효과는 ‘차비’와 견줄 수 없는 막대한 가치 창출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비단 산술적 계산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선한 동기는 긴요한 자원임에  틀림없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좀 더 살만한 세상의  토대가 된다는  차원에서. 

 대체로 샌치해지기 일쑤인 눈 오는 밤,  조금은  심각한 생각에  잠겨있다.  뜻하지 않은 버스 무임승차가 인간심리에 대한 고찰과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화두를 던져준 덕분이다.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마음만 있어도 이 삭막한 모래밭 풍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또 다른 희망을 부르고 있다.
감사하다.                                                           

(2013. 12. 18)     

...홍문종 생각  

2013년 12월 13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장성택 몰락

장성택 몰락   

북한의 2인자, 장성택 숙청 소식이 지구촌을 달구고 있다.  
실제  김정은은 자신의 집권을 돕던 고모부를  ‘반당·반혁명 종파행위’  죄명을 씌워 무자비하게 축출하는 냉혹함을 보였다.  김정은의  권력 강화설, 비자금 쟁취설, 장성택 쿠데타와 측근 망명설과 군부 강경파 요구설 등이  장의  또 다른 실각 이유로 따라 붙고 있는데  확인은 불가능한 상태다.



장성택의 몰락은 사실상 예견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북한이 3대 째 왕조세습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피의 숙청’은 절대권력 체제구축을 위한 필수 코스였다. 다만 그  정황이 갈수록 더 잔혹해진다는 점만 다를 뿐.
김정은의 몰락도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다.
마치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말로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다.
김정은은 아무리 뜯어봐도 ‘1대 창업, 2대 수성, 3대 멸망’의 불문율을 극복해 낼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굳이 맹자의 ‘군자지택 오세이참(君子之澤 五世而斬)’을 들추지 않아도 그는 확실히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에 비해 미흡하다.  김일성의 따뜻하고 친근한 지도자 이미지와 김정일의 냉혹한 카리스마를 모방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워낙 취약한  본바탕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얼치기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생전의 황장엽 선생이 ‘자수성가하면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어 아들인 김정일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라고 세습왕조를 창업한  김일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기억이 난다.   
김정일도 오랜 기간에 걸쳐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는 등 지도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한 편이다.  무엇보다  스스로 살벌한 권력투쟁을 통해 권력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권력을 세습하게 된 김정은과 여러모로 차별된다.   덜컥  절대권력을 쥐긴 했지만   한창 세상 경륜을 쌓을 나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찬 짐이었을 게 뻔하다.   
그런 김정은의 미래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문제는 김정은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대신 무모함으로 덤비는  작금의 현실이다.  
종횡무진 ‘총질’을 남발하는  공포정치로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는 모습은 통제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 얼마나 큰 폐해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북한사회에서나 가능한 이런 상황은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불행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민주주의 경험이 없는 북한의 폐쇄적 특성이 체제 유지를 도왔을 테지만 인터넷 등 첨단화된 과학 장비들이 북한을 더 이상 동토의 왕국으로 머물도록 방관할 수 없는 환경이니 한치 앞조차 어둡게 됐다.  
북한의 몰락이 불가피하다고 예견하게 되는 이유다.
우리로서는 대한민국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을 맞게 되는 셈이다.  
모르긴 몰라도 북한의 몰락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이자 위기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몰락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와 이에 대한 준비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다.  철부지  독재자의 오판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망치게  방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간접촉을 늘리는 한편 남한을 중심으로 이해당사국들이 모여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논의에 앞장 서야겠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지금까지 열강들이 한반도 긴장상태를 이용해왔던  국면을 감안,  이참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힘을 빌리는 방안을 모색하는 건  어떨까 싶다.  
 한반도 평화를 당길 묘안이라도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2013. 12. 11)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