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31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투표로 말하라

투표로 말하라



지방선거가 코 앞이다.

유권자 한 사람이 8명의 후보(각 지역의 기초단체장이나 교육감을 비롯한 지방의원 등 )를 선택하는 '1인 8표제'가 우리의 선거 역사상 최초로 실행되는 만큼 건국 이래 가장 복잡하게 치르는 선거가 될 전망이다.

규모면에서도 역대 최대다. 실제로 유권자 3880만 명 가운데 예상 후보자가 1만6000여명에 달하고 투표용지도 3억 여장에 이른다고 한다.

정당도 많은데 기호도 '1,2,3,4..'로 나가다 '가나다..'는 또 뭔지 모르겠다며 하나같이 어리둥절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8명이나 되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는 자체에 부담을 느끼는 표정이 역력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에서 반드시 국민으로서의 권리행사가 충실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투표 불참은 단순한 권리 포기의 개념이 아니라 책임이 요구되는 직무유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문제고 투표 참여야말로 양질의 국가를 만드는 데 있어 빠져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요건이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투표를 하지 않거나 무관심 속에서 대충 땜질 하듯 선거에 임했던 사람들은 잘못 선출된 후보로 인한 후유증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성실하지 못한 선택으로 잘못된 결과가 나왔다면 마땅히 유권자도 함께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

현실이 그다지 녹록한 건 아니지만 국민 저마다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의식으로 투표에 임해야 할것이다.



투표를 하자.

유권자의 선택은 민주정치의 가장 경력한 권력이고 가장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20대 젊은이들의 투표참여는 미래의 새로운 가치와 정치비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희망을 꿈꾸는 미래의 화두를 ‘투표를 하라’로 정하는 건 어떨까 싶다.

투표 자체가 스스로의 권익을 지켜주는 금과옥조의 가치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스스로의 노력과 참여로 자칫 훼손될 지도 모를 가치를 지켜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바로 투표이기 때문이다.

간혹 투표를 안하는 것도 선택이라는 주장을 펴는 사람이 있는가 본데 넌센스에 불과하다. 정책이나 제안에 대한 찬반이나 가부를 묻는 투표라면 몰라도 선거 외면은 민의왜곡에 치명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운신의 폭이 좁을 수 밖에 없다.

반드시 투표를 해야 한다. 스스로의 권리행사에 소극적 행보를 보이면 보일수록 권력이나 재산을 무기로 하는 기득권층의 횡포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힘을 잃게 된다는 냉엄한 현실을 하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대로 된 후보를 선택하는 것은 선거 참여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 다고 했듯 난립한 후보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다고 해도 각 후보에 대한 정보는 꼼꼼히 살펴야 한다. 학창 시절 입시 공부 하듯 선관위 인쇄물을 통해 우리 지역에 필요한 일꾼의 면모를 낱낱이 살펴보는 것도 당연한 의무 사항 중 하나다. 지역을 위해 필요한 일꾼을 고르기 위해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 심사숙고해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의무사항이기도 하다.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 위주로 기억하려는 습성이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같은 특성을 이용하려는 무리들이 반드시 존재한다. 따라서 거짓 정보를 흘려 유권자들의 판단을 특정집단에 유리하도록 호도하려는 의도에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이들에 대한 경계심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국가 미래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있어 자신의 한 표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인식하고 투표장을 찾기 바란다. 대한민국의 21세기가 어찌 보면 민초들의 ‘사소한 선택’에 따라 결정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결국 민초의 선택은 사소한 선택이 아닌 위대한 선택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여러 번 있었다. 특히 박빙의 승부를 다투던 선거를 생각해 보면 유권자의 결정에 따라 우리의 근현대사는 또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 개연성을 생각하면 개개인의 선거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지 저절로 깨달아질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세계사적인 도약은 바로 나의 한 표로부터 시작된다는 사명감으로 투표에 임했으면 한다.

투표로 말하자. 그리고 그 결과에 당당히 책임질 각오도 세우자.

현명한 판단으로 깨끗하고 편안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 보자.
(2010. 5. 31)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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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30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31년 만의 외출

31년 만의 외출



오늘은 조금 특별한 콘서트에 다녀왔다.

연극인 윤석화씨가 운영하는 ‘정미소’에서 ‘31년 만의 외출’이라는 부제로 진행된 가수(미대 교수이신데 내게는 이 호칭이 더 정겹다) 정미조씨의 공연을 관람한 것이다.

1,2 층을 가득 메운 관객 대부분이 희끗한 머리, 주름진 얼굴, 두꺼운 안경 등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연배들이었다. 나처럼 31년 만에 다시 가수로 무대에 선 정미조씨를 통해 추억 속의 노래를 듣고 싶은 설레임이 역력한 얼굴들이었다. 나를 기준으로 생각해본다면 그녀의 31년 만에 외출에 편승해 추억에 묻히고 싶은 은근한 기대감도 있지 않을까 싶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미로웠다.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등 귀에 익은 그녀의 히트곡이 지나간 우리의 청춘을 되살아나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 무대의상, 현란하지 않은 무대, 그러면서도 잘 정리되고 절제된 조그만 콘서트가 우리를 통째로 들어 과거의 한복판에 옮겨다 주었다. 충분한 신명으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녀는 노래하는 중간 중간 원래 미술학도였는데 노래를 좋아해서 졸업 직후부터 가수로 외도하다가 뒤늦게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그림공부를 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했다. 평소 예술가로서 음악과 미술의 통합한 퓨전 장르를 통해 자기를 보여주고 꿈을 키워왔는데 이번 무대를 통해 어느 정도 이룰 수 있게 된 것 같아 정말 기쁘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예전보다 훨씬 푸근해 보이는 모습이 참으로 좋아 보였다. 쟈니기타를 원어로 부르다가 순간 가사를 잊어버리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며 사과하는 넉넉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정감을 더해 주는 것 같았다.

그녀의 무대에 빠져있다 보니 2시간여 되는 공연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행복했던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30여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로로서 손색이 없는 기량을 발휘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 인생의 지평을 넓혀준 의미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앞으로도 뭔가 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 아직은 넉넉하다는 새로운 각성이라고나 할까..

공연이 끝나고 대학로의 한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지나간 나의 30년은 무엇이었을까 의미를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무 빠르게 지나간 시간들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창 밖을 통해 내다보니 덩달아 에너지가 솟는 것 같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말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앞으로 다가올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일깨워주었다.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들처럼 미래의 공간 역시 아름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함께 엮어나갈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이 또 다른 기쁨과 설레임으로 나의 행복 지수지수를 마구마구 높여주는 밤이다.
(201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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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9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막말 STOP!!

막말 STOP!!

6.2 지방선거가 막바지를 치닫고 있다.
선거열기가 가열되면서 더 거칠어지는 정치판의 막말 퍼레이드가 금도를 넘고 있는 느낌이다. 독설과 막말이 난무하고, 폭로 고발이 줄을 잇는 선거 현장이 우리의 정치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급기야 정치가 최소한 게임의 룰조차 갖추지 못할 정도가 되었나 싶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전부가 아니면 전무'인 제로섬 게임인 선거의 특성을 감안할 때 그 다급함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특히나 선거판에 있어서 막말이 일시적으로 지지층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박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현 정치권의 막말 수위는 위기감마저 들게 하는 게 사실이다.
지난 92년 14대 대선 당시 법무장관을 비롯한 부산의 기관장들이 부산시내 복집에서 특정후보를 돕기 위해 모였다가 위기에 처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현장을 도청한 테입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그 때 궁지에 몰린 후보를 구해내고 대선 결과에도 영향을 주었던 말이 ‘우리가 남이가’였다. 이후 국론분열의 주범인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대표적 유행어로 조금은 불명예스러운 선례로 회자되고 됐지만 차라리 이 정도는 그래도 요즘의 질 낮은 막말에 비하면 수준있는 정치선동이 아닐까 싶다.

막말은 단시간 내에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집단의식에 빠지게 하는 등 극적인 선동효과가 있는 대신 그 후유증 또한 만만하지 않다. 언어폭력으로 인한 상흔이 꽤 오랜 기간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대중을 달아오르게 선동할 수 있는 막말의 효과를 알고 있을수록 유혹의 강도는 더 심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순간의 감정으로 본다면 마약에 빠지는 중독자의 심정이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다수의 선거를 치렀던 나 역시 유세현장에 설 때마다 막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있는 사회지도층 인사일수록 자신의 말이 가져올 사회적 파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막말로 선동가나 독설가로서 자리매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인 진로에 치명타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실제로 잘못 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면서 우리사회를 이끌어 지도층 인사로서의 역할을 제지당한 정치인 사례가 적지 않다.

정치가 존재하는 한 국민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동은 불가피하다.
막말 또한 우리 선거판에서 쉽게 사라지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막말은 순화돼야 마땅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생산적인 소통이 가능하도록 역량을 길러내는 노력은 지속돼야 한다.
장기적으로 분열을 치유할 수 있는 정치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정치권의 막말은 저마다의 지지층을 설득할 수 있고 소통를 가능하게 하고 결집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나 그 뿐이다. 그 힘이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는 순간 반발과 노여움을 촉발시키는 분열의 가치로서만 존재하게 돼 있다. 방어심리는 또 상대 진영을 겨냥한 또 다른 막말을 탄생시키고 치명타를 날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게 되는 악순환의 반복을 초래하게 돼 있다.

정치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정의돼 있다.
현실 정치의 문제점은 국민의 인간다운 삶과 상호이해 조정, 사회질서 바로잡는 역할보다는 권력획득과 유지에 방점을 두기 때문에 발생하는 부작용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오로지 이겨야한다는 다급함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못할 지경에 이르다 보니 정치 수준이 점점 막가파로 전락되고 있는 것이다.
권력에 눈이 멀어 말조차 다스리지 못하고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정치판에서 애꿎은 국민들만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가관인 것은 가히 막말의 본산지라고 해도 좋을 정치인들이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에서 비속어를 남발했다고 특정 연예인을 지목해서 공개적으로 퇴출을 요구한 일이다. 가히 자기 눈의 들보를 두고 남의 티끌을 지목하는 격이어서 여론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정치인 스스로도 같은 잣대로 ‘수신’할 기회를 갖는다면 정치권 정화에 엄청난 도움이 될 텐데.

혹여 막말이 지나친 과신과 자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다.
분서갱유의 진시황이나 역발산기개세의 항우가 왜 초라한 최후를 맞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최소한 국민을 두려워하는 의식만큼은 저버리지 말자.
국민의 희망을 담는 정치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2010. 5.29)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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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7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우리 게 아니다

우리 게 아니다



쾌청한 날씨가 쪽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 청명한 하늘로 우리를 온통 설레게 했던 하루였다.

13년 만에 가장 맑은 날씨였다고 해서 화제가 만발하기도 했다.

중요한 점심약속을 끝내고 앞산을 바라보다가 하늘의 구름이 너무 멋지다는 메시지에 이끌려 도봉산에 뛰어 올랐다.

2시간 남짓한 등산 내내 파란 하늘과 흰구름 그리고 나무들이 쏟아내는 녹색 향연에 취해 너무나 행복했다. 오늘처럼 도봉산 자락에 사는 것을 감사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산에 오르니 나처럼 푸른 하늘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행복한 표정으로 일년내내 이런 풍광을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주고 받았다. 나도 물론 같은 심정이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도봉산은 어릴 때부터 자주 오르던 산이다. 그 때는 이 정도의 맑은 시계는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어서 특별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조차 없겠지만 가다가 목이 마르면 개울물에 갈증을 해결할 정도로 안전한 마실거리였다. 산소 공급을 받는 것처럼 코를 벌름거리게 하는 맑은 공기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모처럼 보게 된 맑은 하늘이 화제가 될 만큼 우리의 주변 환경이 정말로 많이 변했다. 각박해진 우리의 삶만큼이나 황폐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자연호흡도 옛이야기 속에서나 찾아보게 될 지도 모른다. 대기 중 공기 오염으로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산소마스크를 상용하게 되는 재앙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기 때문이다.

끔찍한 상상이지만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공포다.



그동안 누누이 강조했지만 환경은 우리 것이 아니다.

후대에게 잠시 빌려쓰고 있을 뿐이다. 소중하게 다루다가 돌려줘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그런 의미에서 4대강 문제를 생각하면 답답함부터 밀려온다.

솔직히 전문성이 없기에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환경은 될 수 있으면 손대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보호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이 환경 파괴를 우려하면서 4대강 개발을 반대하고 있다. 환경단체는 물론 천주교, 기독교, 불교를 총망라한 종교단체들까지 이구동성으로 정부의 제고를 요구하고 있는 마당이다. 급기야 오늘은 이례적으로 산중 선원에 묻혀 참선 수행에만 정진해 온 스님들까지 4대강 사업을 질타하고 나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목사님과 신부님들이 단식농성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다수의 국민 여론이 반대하고 있다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텐데 정부는 이들의 반대 목소리에 귀를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격다짐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지 싶다. 아무리 훌륭한 정책이라도 국민이 그토록 반대한다면 한번쯤 민심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설득부터 하는 게 우선순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정부가 아무리 4대강 사업이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친환경사업이라고 홍보해도 제대로 먹히지 않는 것도 선결해야 할 문제를 외면한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인간의 개발이 자연환경과 생태 파괴를 초래할 가능성은 상수로 존재한다. 그런 측면에서 4대강 개발에 대한 신중한 접근은 아무리 세심해도 부족하지 않다. 만에 하나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다시 살펴야 한다. 일시적 안위에 연연할 범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녁 산책길에 달을 보니 너무나도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서 처연한 느낌마저 든다.

오늘 보는 이 달을 우리 후대들도 똑같은 여건에서 바라볼 수 있을까....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천년만년 보호하고 싶다는 바람은 나만의 뜻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강산을 잘 지키고 보존해서 후대에 떳떳한 입장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로 오늘 하루를 마감한다.
(201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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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6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심금을 울려라

심금을 울려라



기질은 어쩔 수 없나보다.

정치현장에서 비껴서 있으면서도 거의 정당 선거대책본부장 수준으로 선거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선거 분위기는 좀처럼 달아오르는 것 같지 않다. 선거에 출마하는 지인들 때문에 수도권 일대의 다양한 지역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어느 지역이라고 할 것 없이 후보들만 일방적으로 분주할 뿐 정작 유권자의 관심이나 호응은 싸늘함 그 자체였다. 거리마다 그물망처럼 얽혀있는 현수막 행렬과 마이크의 떠들썩한 소음이 무색할 정도로 가라앉는 분위기여서 안타까움마저 자아낸다.




일단은 박물관에 전시해도 서운하지 않을 구태의연한 선거운동 방식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다.

벽보건 현수막이건 선거운동원이건 유세차량이건 심지어 후보자 당사자까지도 천편일률적인 동작과 구호만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빈약한 선거운동으로 유권자의 관심을 얻을 리 만무라는 생각이다. 누가 누군지 구분도 되지 않을뿐더러 뻔한 속셈을 꿰뚫고 있을 유권자에게 어필은커녕 짜증을 유발할 게 너무나 뻔해 실망스러웠다.



내가 경험했던 미국의 선거문화는 지상 최고의 쇼였다.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그들의 선거운동 방식은 호기심과 흥미를 미끼로 유권자의 관심을 주도하는 식으로 운영됐다. 이어지는 프로그램은 어떤 기발한 이벤트로 전개될까 하는 기대감이 선거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전개됐다.

우리에게도 선거가 유권자에게 스트레스의 주범이 아닌 카타르시스의 순기능으로 환영받을 때가 과연 오기나 할까 싶다. 툭하면 할 수 없고 안되는 이유 투성이인 우리의 선거법이나 경찰, 검찰, 법원이 선거판을 주도하는 우리로서는 고비용이고 돈 많은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미국식 선거문화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정체된 우리의 선거현장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선거를 축제로 만들지 못하게 막는 규제일변도인 현행 선거법부터 바꿔야 한다 . 출마자나 유권자 모두가 최대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축제처럼 즐길 수 있는 선거풍토를 정착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정치 미래는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일반적인 법 상식과 유리된 선거법이 주도하는 한 국민을 볼모로 한 음모가 활개 치는 혹세무민의 절망만 난무하게 될 것이다. 정치에 대한 혐오는 국민 불신을 초래하게 돼 있다. 의혹에 가득 찬 현실은 출마자에게도 국민들에게도 희망을 앗아가 버린다.

개인적으로도 정치 중심에 서게 된다면 가장 먼저 이 문제부터 해결하고 싶다.



이번 선거를 국민과 함께 하고 싶다면 입후보자 저마다 국민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감동 선거 전략을 모색할 것을 주문하고 싶다.

잦은 충격에 시달리다보니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래도 이보다 더 효과적인 선거운동은 없을 것이다. 리어커나 오토바이 등 저마다의 형편에 맞는 이동수단으로 천편일률적인 유세차량 수요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유권자의 눈길을 끌어당길 수 있는 훌륭한 선거전략이 될 수 있다. 똑같이 반복되는 확성기 소음과 흥미를 끌지 못하는 율동 보다는 유권자의 호감을 이끌어 낼 방도라고 나는 확신한다.

실제로 역대 선거 국면에서 순전히 목욕탕 가서 노인 등을 밀어서 당선된 후보가 있는 가하면 좀 더 오래 전에는 노인잔치로 노인표를 공략하는 전략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정치인이 있다. 선거 기간 내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유세로 국회에 입성한 정치인도 국민에게 다가가는 감동의 노하우를 일찌감치 간파한 케이스다.



사소하지만 거대한 성공의 지름길을 보장하는 선거전략의 키워드는 누가 뭐래도 ‘감동’이다.

지난 16대 대선이 끝나고 정치평론가와 홍보전문가들이 각 후보 진영의 홍보전략 효과를 분석한 바 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기타를 치면서 눈물을 흘리는 당시 노무현 후보의 감동 전략이 뻣뻣한 왕손 이회창의 엘리트 전략을 무너뜨렸다고 평가했다. .

15대 대선에서도 비슷한 예가 있었다.

이인제 . 이회창, 김대중 세 후보가 참석한 텔레비전 토론회 말미에 마지막 심정을 말하는 자리에서 " 두사람은 달리 기회가 있지만 저는 마지막입니다"라는 당시 김대중 후보의 호소가 최소한 수십만표를 움직였다고 평가된 바 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력 정당후보 틈새에 끼여 선거운동을 하던 한 군소정당 후보의 경우 비오는 합동 유세현장에서 연단에 올라 "여당 후보A는 낙선해도 사장이 될 수 있고 야당 후보 B는 부자집 아들이 될 수 있지만 군소정당 저 C는 떨어지면 죽습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라고 읍소했다. 박빙의 승부였지만 C가 당선되었다.

감동은 연출해 낼 수도 있고 잠시의 눈속임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가짜는 조만간 그 실체를 드러내게 돼 있다. 오래동안 큰 울림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지배할 수 있는 건 진정성 있는 감동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유권자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의 선거전략을 펴라.

특히나 피 말리는 접전의 귀로에 서 있는 후보에게는 금과옥조 같은 당부가 될 것이다.
(2010 .5.26)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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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4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사랑

사랑



어제는 어머니 사랑 때문에 온종일 구름에라도 올라탄 양 행복했었단 이야기를 블로그를 통해 자랑했었다. 그 때문이었나? 오늘 아침 어머니는 예고도 없이 어제보다 더 거한 식탁을 차려놓고 이 아들을 부르셨다. 어머니 성화에 다이어트고 뭐고 다 팽개치고 포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건 평소 아침밥을 먹지 않는 습관을 가진 내가 전날 밤 늦은 귀가로 인한 피곤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호출 한 방에 단걸음에 달려가 엄청난 양의 아침 식사를 한 사실이다.

어머니와 나 사이를 잇는 사랑의 힘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는 ‘체험’이다.



모처럼 유유자적하게 보낸 휴일은 색다른 경험을 줬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케이블 방송의 영화를 봤는데 각각 다른 특성을 가진 남녀 간 사랑의 형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변심해서 유부녀가 된 첫사랑과 재회한 남자가 부모의 만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치열한 사랑(#1), 천진난만하고 알콩달콩한 신혼부부의 순수하고 싱그러운 사랑(#2), 오랜 외도로 방황하다 돌아온 병들고 나이든 남편을 받아들이는 관용과 포용의 미가 돋보이는 노부부의 사랑(#3), 처음엔 뜨악한 관계였는데 공동의 목표물을 향해 어려움을 함께 뚫고 나가는 동안 싹트게 된 사랑을 투쟁을 통해 지켜나가는 연인의 사랑(#4), 외부에 장애요인이 생겼을 때 뿌리 째 흔들리는 취약한 부부의 사랑 (#5) 등 무려 다섯 종류의 서로 다른 형편의 사랑을 하루 동안 간접 경험한 셈이다.

그렇게 우연히 접하긴 했지만 그동안 사랑에 대해 특히 남녀 간 사랑의 정서에 무심했던 나의 무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사랑이 뭘까?

솔직히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부모와 자식, 신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는 달리 남녀사이를 지배하는 사랑의 개념은 특별히 복잡하다. 사랑의 자극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떤 경로를 거치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애매한 것도 사실이다. 주위에 사랑이 널려있고 늘 사랑을 말하는 우리의 일상이지만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다양한 수단을 통해 숱하게 사랑을 얘기해 왔으면서 정작 이토록 헤메고 있는 상황이라니.


흔히 말하듯 남녀 간의 사랑은 광풍에 불과한 것이고 영원히 지속되기 어려운 존재인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인지 등에 대한 궁금증들이 공허해진 머릿 속을 온통 헤집어 놓는다. 생각에 빠져들수록 해답을 구하고 싶은 조급증이 일었다. 이번 기회에 사랑을 제대로 정리해두지 않으면 왠지 시대에 뒤떨어질 것 같은 위기감이 나의 노력을 독촉했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시인이라도 된 양 폼을 잡고 촛불을 켜거나 섹소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선인장 가시에 손가락을 찔려 자극해 보기도 했다. 펜도 만져보고 초코렛까지 입에 넣어가며 용을 썼으나 어렴픗 미동만 전달될 뿐이었다.

정작 사랑의 구체적 실체를 얻어낸 건 다른 시도를 통해서였다. 설레임, 기다림, 희열, 포용 등의 단어들을 퍼즐삼아 조합하다가 비로소 사랑의 개념을 손안에 쥘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분야의 프로가 아닌 입장이기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사랑은 개인의 적극적인 의지가 가장 강력하게 작동되는 상황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서로의 교감을 통해 간격과 차등을 없애고 진정성을 확보해서 동일한 자아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각각 개인의 공간을 유지한 채 서로의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서로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력이 작동되는 배경도 사랑의 시작으로 얻을 수 있는 부수적 산물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동안 대한민국 수많은 사람들을 붙잡고 있던 ‘사랑타령’을 웃기는 얘기라고 일축했던 나의 무지함을 반성하고자 한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때 느끼는 안정감과 만족감이 행복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둘 사이를 관통하는 떨림의 순간, 가슴 깊숙한 울림으로 절정에 이르는 사랑의 화음은 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심이라고 생각한다.

사랑 하자.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사랑의 힘에 의지해서 어두운 터널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랑을 꿈꾸면서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며 사는 삶도 기대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날로 척박해져 가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으뜸 단어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자.



깊은 밤, 어둠을 가르는 빗줄기를 우산으로 막으며 생각한다. 오늘 수확한 이 깨달음을 블로그 독자께 아낌없이 드리겠다고. 그것도 사랑이다. 내 사랑을 받아주시라.
(2010. 5.24)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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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3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어머니의 축제

어머니의 축제


주말이면 대체로 어머니를 찾아 간다. 어머니께서 준비하신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주인공은 나다. 일주일에 한번 꼴로 개최되는 이 주말 페스티벌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메뉴는 단연코 ‘엄마표 식탁’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간장게장과 알이 꽉 찬 조기구이가 눈에 확 들어오는 식탁에서 밥 한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 순간 그 어떤 보약의 효능에 견줄 수 없는 ‘영양’을 공급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 역시 빠질 수 없는 이 축제의 메인 메뉴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늘 느끼는 바이지만 어머니가 관심을 보이는 대화 주제는 팔순이 넘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밀하고 총기가 넘친다. 특히 아들의 정치적 성장을 염원하시는 어머니는 평소 신문의 정치면은 물론 사설까지 섭렵하는 모니터링 실력으로 해박한 정치적 감각을 보이신다. 거의 정치 평론가 수준의 견해를 피력하실 때가 많아 듣는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어머니 걱정의 태반은 거의 다 아들인 나와 관련된 문제다. 실제로 내 문제가 어머니 관심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도 내 얼굴에 드리운 주름살과 건강문제에 관심을 보이셨다. 그 밖에도 손녀 딸 결혼문제 등 일상적인 얘기부터 천안함 사태로 인한 정치적인 상황에 이르기기까지 총체적인 주제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눴다.



본가를 다녀오면 어김없이 에너지 충전소에 들렀다 나온 기분이 든다. 오늘도 어머니의 사랑을 온 몸에 채우고 나오니 마치 천하라도 다스릴 것 같은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가 느껴진다.

언제나 변함없는 후원자로 아낌없이 부어주시는 어머니 사랑에 힘입은 결과다.


언젠가 야구장에서 사랑에 빠진 청춘남녀가 관중석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공중파를 통해 알리고 싶은 욕구로 ‘00과 @@는 서로 사랑한다’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 사랑하거나 (부모 자식간이든 연인간이든) 종교에 헌신하게 될 때 특정한 대상을 향한 자발적인 사랑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과 기침은 감출 수 없다고 하던데 사랑을 드러내고 또 자랑하고 싶은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인 듯 싶다. 나 역시 어머니 때문에 행복해진 이 마음을 온 천하에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지는 충동을 느끼면서 사랑에 빠진 감정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감동을 전달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감정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의 근원을 감지하게 되는 것 같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들뜬 마음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하듯 사랑이나 종교를 통해 얻게 된 감동도 많은 이들에게 광고하고 싶어하고 전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하고 강력한 에너지의 근원이 된다.

우선 스스로를 움직이고 주변을 움직일 수 있는 자발적인 영향력을 담고 있는 막강한 에너지의 놀라운 힘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자발성이 갖는 강력한 에너지의 새로운 발견이기도 하다.



선거 국면에 있어서도 가장 확실한 당선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건 자발성이다.

예수가 열두제자에게 심어준 신앙적인 확신이 바탕이 되어-열두제자의 목숨 건 포교활동에 힘입어- 오늘 날 기독교가 완성되었듯 선거에서도 후보의 정치적 확신을 심장에 담은 선거운동원들이 자발적인 움직임이 유권자의 표심을 자극하는 가장 파괴력 있는 선거운동이 된다.

뭐가 됐든 조건으로 움직이는 사회적 풍토를 감안할 때 자발적 동기로 움직인다는 건 그만큼 귀한 가치를 내포한다. 실제로 한걸음 간격에도 본래의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목적을 뛰어넘는 조건행렬이 지뢰밭처럼 널려있으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나마 아직은 어머니의 사랑이나 남녀 간의 사랑이나 종교의 신앙 등으로 인한 감동에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파동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하는 그 힘이 세상을 바꾸고 희망을 품게 해주는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랑의 힘’이다.
(2010.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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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2일 토요일

홍문종생각 - 태국사태

태국 사태

태국사태가 반정부 시위 지도자들의 항복선언으로 심각한 내상을 남긴 채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시위대가 해산한 이후 방콕 일원에 내려졌던 야간 통행금지가 22일 새벽 5시를 기해 해제됐는가 하면 버스 및 지상철, 지하철 등 대중교통도 정상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태국 각지에서 강경파들의 산발적인 저항 때문에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사회건 각기 다른 주장이 있기 마련이고 원만한 타협점을 찾아 갈등을 최소화 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다.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수단이 대화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이거나 폭력적인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그 결과가 심각한 폐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 역시 지난 민주화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바다.
그런 측면에서 평화적 타협이 아니라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미봉책에 그치고 만 이번 태국 사태의 종결 과정은 여전히 걱정스럽다. 여전한 불씨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병폐는 인간의 탐욕에서 출발한다. 제어되지 못할 경지에 이른 욕심이 인간을 추락시키는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결국 그 욕심이 욕심을 부린 집단이나 인간을 집어삼키게 되는데 잠식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욕심의 향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번 태국 사태의 시발점은 기득권을 대변하는 정부정책에 대한 태국 민중의 봉기라고 할 수 있다. 유산계급과 무산계급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비극에 다름 아니다.
빈부의 갈등과 대립은 종교분쟁만큼이나 심각하고 언제든 재발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측면에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특히나 자본을 무기의 개념으로 본다면 원래부터 본인의 몫이 존재하지 않는 무산 계층은 순교적 투쟁을 자본대신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무기개념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요소들이 그렇지 않아도 물과 기름처럼 겉돌 수 밖에 없는 두 집단을 화해시키지 못하는 근본 이유로 작용하게 되는 게 아닌 가 싶다.
특히 빈부간의 분쟁은 있는 사람 쪽에 선 사람들이 실리는 있을지 모르되 명분이 없기에 싸움 자체가 곤혹스럽고 힘들다는 것도 미리 귀띔해 두겠다.

시위 진압에 있어 강경 대응은 가장 하수에 속하는 정치력이다. 강경 대응은 국민적 희생이나 유혈사태를 불러오게 돼 있기 때문에 사태 해결에서 점점 멀어지게 돼 있다. 만일 상황이 발생했을 때 무력 진압을 요구하는 인사가 득세하거나 다수가 된다면 그 정부는 엄청난 경고등이 켜진 것으로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떤 상황이어도 강경파가 정부를 주도해서는 안된다. 우리만 해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확실히 경험한 바 있다.
특히나 칼집에 들어있는 칼이 칼집을 벗어난 칼보다 훨씬 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막강한 권력은 결코 남발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민심의 후원야말로 정권이 가장 강력해질 수 있는 지지기반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늘 민심을 살펴야 한다. 민심이 등 돌린 정부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어느 상황이 됐건 독재정권의 말로는 거의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대부분 민중봉기- 강경진압- 유혈사태- 그리고 독재자 축출로 이어지는 순서다. 대부분 강경진압이 성공한 끝에 정권이 끝나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강경진압을 성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민심이 떠났기 때문에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국민의 지지와 성원이 정권을 유지시키는 가장 확실한 힘의 근원이라는 반증이다.
민심을 얻기 위한 정권의 고민이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태국의 사태를 보건데 어떤 형태로든 조기총선이나 그에 상응하는 대국민 약속
등 획기적인 후속책을 마련하지 않고는 현 정권이 축출되는 것으로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패한 재벌인사인 탁신 전총리와 빈민 계층과의 연대는 아이러니컬하지만 어느 나라건 또 어느 정권이건 힘들고 가난한 국민을 껴안지 않고는 존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번 태국사태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2010 . 5.22) ..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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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1일 금요일

홍문종생각 - 당신 뜻대로

당신 뜻대로

나의 귀한 이웃인 A와의 인연은 내가 선거에 처음 출마했던 1995년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까지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함께 해 왔다.
약점 없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는 확실히 장점이 많은 사람이다.
남을 배려하거나 낙천적인 삶의 태도가 남다른 그는 늘 웃는 얼굴로 상대를 편안하게 해 준다. 특히 무슨 일이든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적극적으로 임하는 모습은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에너지를 전해준다.

그런 A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병원 두 곳에서 체크를 했는데 위암이랍니다. 위의 3/4을 잘라내고 항암치료 하면 된다는 데... 뭐 별 일 없겠지요”
6월 초, 함께 하기로 한 프로젝트에 동참할 수 없게 됐다는 서두로 운을 뗀 그는 ‘위암진단’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것도 별 일 아니라는 듯 웃음까지 섞어가며 말이다. 오히려 듣는 내가 더 당혹스러워 할 정도로 담담했다. 오후에 다른 일 때문에 마주친 자리에서도 예의 명랑하고 유쾌한 그의 목소리엔 여전히 힘이 실려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평정심이었다.
“그래. 이젠 위암은 암도 아니래. 수술하고 항암치료 받으면 금방 좋아지겠지”
걱정스런 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어 위로의 말로 바꿔 전했지만 속이 편하지 않았다.
만약에 똑같은 어려움이 닥친다면 나도 그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강의를 통해 숱하게 생자필멸의 법칙을 얘기하며 죽음을 정의해 왔던 나다. 인간은 늘 죽음을 준비해야 하고 언제가 됐든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막상 내 문제가 된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흔히들 그런다.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다고.
솔직히 일상 속에서 ‘죽음’을 접할 기회가 많지만 누구나 자신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염두에 두지는 않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속성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이 죽음의 대명제 앞에서 동등하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그 어떤 몸부림으로 피하려 해도 누구나 맞이하게 돼 있는 운명이다. 불로초를 찾아 헤매던 진시황제도 결국은 흙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생명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하루를 사는 것은 여분의 생명에서 하루 분량의 삶이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멀리 있을 때는 온갖 미사여구로 미화하던 사람들이 정작 자기 문제로 직면하게 되면 소심해지고 비관적인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 것 같다.
삶에 대한 애착이 일정 수위를 넘어 ‘집착’으로까지 이어질 경우 그 파장은 심각해지기도 한다.
비관적이고 초조하게 형성된 우리의 캐릭터가 후대에 어떤 식으로 남게 될지 고민해 보는 것이 그나마 자신의 삶의 질을 보살필 여유를 잃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언제 다가올지는 모르지만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인생에 닥칠 뜻하지 않는 재앙에 대해서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존재하는 그것들을 어떻게 현명하게 내 삶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뜻하지 않는 횡액은 시간이나 대상을 예고할 만큼 친절하지 않다. 언제든 누구에게든 찾아들 가능성이 열려있는 거부할 수 없는 불청객이다. 또 대부분 시간이 해결하게 돼 있다.
인생을 가장 잘 살아내는 노하우.
그렇기 때문에 그 무게에 지쳐 삶의 근간이 흔들리지 않도록 인내로 견디는 게 최상의 방책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 죽음이 내 삶의 문턱을 가로막고 나선다면 그 때는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알고 겸손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마치면 되지 않을까...

돌발상황 앞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는 A로부터 전해지는 자극이 내 삶을 돌아보게 했다.
신에 대한 경외감이 지나치게 인간적인 생각의 고리를 끊어버린다. 운명의 순응을 위한 스스로와의 타협이 이뤄졌다고나 할까.
'당신 뜻대로 하시옵소서'
결국 내 운명은 내 자의적인 몫이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신의 영역에 속해져 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이 밤이다.
A의 완쾌를 빈다.

(2010.5.21)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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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0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꿈을 이루는 방법

꿈을 이루는 방법



일전에도 한번 언급한 바 있지만 나는 한 때 배우가 되고 싶었다.

지금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직접 연기해 보고 싶은 로망은 여전한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다.

그 영향 때문인지 현역배우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한 귀퉁이에는 늘 동경과 부러움이 교차하는 것 같다.

며칠 전 배우 임현식, 박은수씨를 만나 함께 할 기회가 있었는데 참으로 좋은 시간이었다.

브라운관 연기로만 접했던 두 배우가 배꼽을 잡을 만큼 재미있는 일화들을 연기가 아닌 육성으로 풀어놓는 귀한 자리였다. 더구나 연기 경륜만으로도 국민배우 반열의 역량을 보이는 분들이니 (배우가 로망인 내게)오죽 하겠는가.

저녁식사를 나누는 그 자리가 몇 배나 즐겁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닐 수 밖에.



이 두 배우가 MBC 탤런트 공채 1기로 함께 배우생활을 시작한 이래 40년 넘는 우정을 나누는 사이이고 극과 극이라 할 만큼 개성이 다르고 배우로서의 노정 역시 확연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당사자들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됐다.

박은수씨는 전원일기 일용이 역으로 시청자에게 각인되기 이전에 본 적이 있다. 1975년 윤석화씨와 공연한 ‘꿀맛(a taste of honey)’이라는 연극무대에서였다.

임현식씨는 ‘암행어사’의 갑봉역으로 분한 코믹한 모습이 첫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이전 작품인 롱런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라는 작품이 더 유명한 프로였다고 하는데 그 무렵 나는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라 잘 알지 못한다.



마침 전원일기 캐스팅 관련 이야기가 화제로 올랐다.

애초 임현식씨가 일용이 역에 애착을 갖고 있었는데 정작 배역은 박은수씨에게 돌아가 실망이 컸다는 얘기였다.

이 때의 결과가 두 사람의 배우 인생을 확연하게 갈라놓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일용이 역은 결과적으로 박은수씨를 국민배우로 사랑받게 한 배역이지만 배우에 대한 이상이 컸던 그에게 마냥 행운만 안겨준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고착된 일용이 배역 때문에 박은수씨는 배우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미지 변신의 기회를 얻지 못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탤런트가 되기 전 연극을 통해 탄탄히 다져진 연기로 쇼업이 잘 돼 있던 그는 여전히 ‘양촌리 일용이’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실정이다.



박은수씨는 지금은 정체돼 있지만 나름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중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는 ‘제임스딘의 열정’으로 자신의 이상을 채워주지 않는 우리 영화의 현실을 바꾸고 싶어한다. 조만간 진짜 한국영화를 만들겠다는 그의 꿈이 이뤄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반면 전원일기 캐스팅에서 고배를 마신 임현식씨는 그 이듬해 맡게 된 암행어사 갑봉역으로 해학적 캐릭터의 독보적인 존재로 우뚝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원일기의 불운(?)이 그의 배우인생에 있어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결정적 인연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갑봉역의 성공이후 원로배우 소리를 듣는 지금까지 한참 때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임현식 본인의 우스개에 따르면 폭넓은 연기도 하게 됐고 수입도 더 좋은 ‘박은수보다 더 성공한 배우로 살고 있다.





실제로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은 자신의 바람대로 연기자의 삶을 살고 있는 임현식씨의 인생은 확실히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를 통해 끝까지 자기영역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기회가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점이다.

세상을 사는 모습은 다양하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인자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겠지만 결정적인 건 얼마나 끊임없는 의지로 열정을 다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정황을 그가 확인시켜 셈이다.


내가 품은 꿈과 세상이 다시 초록빛으로 싱싱하게 되살아나는 듯하다.

오래동안 소원해왔던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한다면 나 역시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새로운 자신감으로 불끈 솟아 오른다.
(2010 .5. 20)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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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9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패륜녀

패륜녀

서울의 중견 대학인 K대학이 달갑지 않은 '유명세‘로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재학 중인 한 여학생이 엄마뻘인 교내 미화원 아주머니께 입에 담지 못할 폭언으로 패악을 부렸다가 이른 바 ‘00대 패륜녀’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 등극(?)했기 때문이다.
학교도 학교지만 해당 여학생도 큰일이다. 신중치 못한 발언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인터넷 속성에 힘입어 천하의 패륜녀로 매장될 위기에 처한 이 여학생 사례는 말이 갖는 폭력성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든다.
일찍이 선인들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거나 침묵은 금이고 명언은 은이라며 특별히 언어사용의 신중함을 강조했던 것도 엇나간 말의 후유증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번 사건만 해도 애당초 예의를 갖추고 부탁했더라면 별 문제 없이 지나갔을 사소한 발단이 한 여학생을 사회적 공분 대상으로까지 몰고 갔다. 만만치 않은 말의 파괴력을 간접 체험인 셈이다. 새삼 어휘선택에 신중해져야겠다는 각성과 재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본질적인 고민은 제대로 된 ‘인간’을 길러내지 못한 우리 사회 전체의 책무의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땅의 동량들을 ‘인간’으로 만들어야 할 당사자 중 한사람으로서 크나큰 책임감에 통감하고 있다. 아무래도 가장 직접적인 문제는 훈육이 사라진 우리의 ‘교육현장’에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못해도 좋으니 그저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부축임이 우리들의 미래 세대를 훼손시킨 주범임에 틀림없다. 권력이나 재물, 명예 이전에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치기는커녕 기능과 능력만 강요하는 속살 없는 교육이 우리의 젊은 동량들을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 사회 전체가 그 부작용에 상당부분 시달리고 있는 중인 것도 사실이다.
재난이나 사소한 손실에는 민감하면서도 정작 그 보다 훨씬 더 큰 재앙에는 발등의 불이 떨어져도 무감각해 있는 허망한 현실에 대한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

괴물이 주도하는 대한민국 사회- 그 끔찍한 결과는 생각하기도 싫다.
학력수준의 인플레로 온 국민의 고학력화에도 불구하고 인성 부재로 ‘후유증’이 돌출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학력’이 ‘참 인간’을 충족하는 우선 조건이 아닌 건 틀림없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경제를 비롯한 전반적인 분야의 업그레이드만으로 대한민국 위상이 높아지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구성원의 질적 수준이 따라줘야 가능한 일이다.
이를 높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사제지간의 인성 교류가 아닐까 싶다. 훈육과 교육이 함께 하는 인성교류를 통해 올바른 가치관이나 긍정적 사고가 정착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구성원의 자질을 높일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는 이제부터라도 인성과 훈육에 초점을 맞춘 교육으로 개선되지 않으면 ‘든 사람’ ‘난 사람’ 양성에는 성공할지 몰라도 ‘된사람’ 교육은 요원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하는 요인이다.
어찌됐건 된사람을 만들지 못하는 교육은 죽은 교육이다. 죽은 교육을 가지고는 대한민국의 21세기를 결코 장담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이번 ‘패륜녀’ 사태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하는 이유인 것 같다.

어쩌면 이를 계기로 인성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우리의 교육현장이 진일보 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정성과 관심이 필요한 때다.
힘있고 능력있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사회를 이런 식으로 이끌어 간다면 반목과 갈등은 더 커질 수 밖에 없고 대한민국의 핑크빛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사회 전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어떤 지위에 있건 소득이 얼마건 누구나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 중요한 시대적 요구다.
외면하지 말자.
(2010 .5.19)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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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7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골프

골프



박세리 선수가 3년만에 벨 마이크로 LPGA 클래식 연장전에서 수잔 페테르센(노르웨이), 브리타니 린시컴(미국)을 따돌리고 통산 25승을 기록, 19만 5000달러의 우승 상금을 받았다는 외신을 접했다.

이제는 노장 소리를 들을 박세리의 오랫만의 쾌거에 박수를 보낸다.



국내 골프인구 500만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이 단순한 통계치 하나만으로도 이젠 더 이상 골프가 특권층만을 위한 ‘귀족 스포츠’라는 이미지로 눈총을 받을 이유가 없게 됐다고 생각한다.

97년 박세리의 맨발 투혼을 기점으로 김미현, 미쉘 위, 신지애, 최경주, 위청수, (골프 황제 타이거우즈를 꺾어 파란을 일으키며 급부상한)양용은 등 프로골퍼들이 눈부신 기량으로 국제무대를 휘어잡게 되면서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 골프의 현주소를 감안해도 그렇다. 특히 미국의 LPGA는 한국의 낭자군이 없으면 흥행이 안될 정도가 된 현실만 보아도 우리의 골프가 국제무대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비롯 최근 은퇴한 스웨덴 골프여제 소렌스탐, 멕시코의 오초아나 호주의 그렉노만, 일본의 아오끼, 미야자토 아이 등 각 골퍼들의 명성이 그대로 출신국의 위상으로 이어지는 상황이다.

박세리를 위시로 한 골퍼들의 성공신화가 대한민국 골프 꿈나무들을 무럭무럭 키우고 있는 만큼 골프에 대한 우리의 국민인식도 이제는 세계적인 골프 강국답게 달라져야 할 때다.



툭하면 대중 스포츠로 자리잡은 지 오래된 골프를 공직자 기강해이 단골 메뉴로 써먹는 발상은 시대착오적이다.

골프를 더 이상 만만한 동네북 취급하지 말라. 국위 선양의 첨병이 되어 국민적 희망과 비전으로 떠오르고 있는 골프를 쓸데없이 죄악시하는 분위기로 몰아가는 건 국가적 손실로 직결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더구나 2016년, 브라질(리오 데자이로) 올림픽에서부터 정식 종목으로 활약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국민들 사이에 골프의 존재감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돼 있음에랴. 선수들의 선전이 올림픽 메달 획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국민적 기대감이 골프의 위상을 높여주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요 며칠동안 천안함 애도기간에 골프를 자제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골프장을 찾은 공직자들의 기강해이가 도마 위 메뉴가 되어 북새통이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대학 및 교육자치단체 10곳, 국회 5곳, 법원 2곳, 중앙행정기관 4곳, 지방자치단체 6곳, 공직유관단체 3곳 등의 소속 차량이 골프장 주차장들에서 발견된 조사 결과를 밝히면서 시작된 파동이다. 차량번호까지 다 적어놓았으니 부인해도 소용없다는 식의 으름장까지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 색출 의욕은 없어 보이니 이상하다.

21세기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이고 각각의 개성이 사회를 병들게 하거나 망하게 만들지 않는 한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는 건 기본 권리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남과 다른 점이 창조적 경쟁력으로 평가되는 세상 아닌가.

골프를 공직자 기강해이 주범으로 몰아가는 건 지극히 의도적인 기교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의도’는 일정한 잣대와 형평성이 전제됐을 때 비로소 그 진정성을 평가받을 수 있다.

선진국민이라는 국민적 자부심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면 어떤 형태로라도 의도된 ‘올가미’나 ‘압박’이 ‘좌절’이나 ‘복지부동’을 생산해내는 ‘불의’가 허용되는 사회를 두고 봐서는 안된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천안함 조문기간이 현충일처럼 기존의 국가 애도일정이라면 몰라도 갑자기 정해진 만큼 사전 골프 약속의 경우 선택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일테면 조문 후 골프장을 찾거나 골프 후 조문을 할 수 있는 선택 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대한민국 국민 중 몇이나 ‘애도 불경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다.)

물론 스폰서 도움으로 골프를 친 공직자에게까지 면죄부를 주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별 문제가 없는데도 골프를 불순한 정치적 목적 달성의 소도구 삼아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분위기 조성이나 국면 전환을 위한 마녀사냥 식 ‘매도’에 그치는 기존의 과정을 되풀이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 진정성을 의심받게 될 게 뻔하다. 게다가 일정한 룰도 없이 ‘사용자 위주의 고무줄 잣대’로 재단한 ‘여론몰이’는 비양심적 사회적 횡포를 용납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치권 음모 때문에 우리의 골프 전망이 훼손되는 일은 없어야겠다.



2가지 의문이 있다.

골프 역시 김연아 휘겨 스케이팅을 향한 국민적 열기 못지않은데 김연아가 천안함 애도기간에 스케이트를 타면 문제가 될까 안될까?

애도기간에 골프장에 출입한 공직자 파악을 위한 인원 동원은 어떤 법적 근거가 뒷받침 된건지 ...

생뚱맞기는 하지만 그것이 못내 궁금하다
.(2010 .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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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6일 일요일

홍문종생각 - 지하철에서

지하철에서

1974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 최초로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날이다.
하도 오래 전 일이라 가물가물해졌지만 당시 신기하고 놀라운 기분으로 첫 운행에 들어간 1호선을 시승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외국에서 생활하고 귀국해서는 주로 자동차를 이용하다 보니 정작 1호선을 이용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선거 때 출근길 전철역 앞에서 유세를 하거나 명함을 뿌리는 정도가 그나마 1호선과의 인연을 상기시키는 기억인 것 같다.
오늘 서울에 나가 좋은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귀가 길엔 전철을 탔다. 잠실에서 의정부까지 오는 동안 3번이나 (9호선 타고 고속터미날역, 7호선 타고 도봉산역, 그리고 1호선 타고 의정부역까지) 노선을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수확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나름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지하철 안 풍경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은 기분이다.

이제 막 시험이라도 끝낸 듯 몹시 지쳐 보이는 학생, 역시나 비슷하게 피로에 절어있는 젊은 직장인, 연애 삼매경에 빠져있는 커플, 등산으로 체력과 부부애를 동시에 다지고 귀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중년부부, 뭔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생활고의 고통을 온 몸으로 내뿜는 초로의 남자,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남녀 무리들, 무슨 술을 그리 많이 먹었는지 계속 토해대는 아가씨 등 다양한 군상들이 저마다의 표정을 가지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은 마치 대한민국의 축소된 단면을 보는 듯 했다.
나는 오늘에서야 휴대폰에 왜 DMB가 달려있어야 하는지 화면의 크기가 문제가 되는지 알았다. 끊임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며 문자 교신에 빠져있는 학생을 보면서 휴대폰 문자 메시지 기능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전철이 역에 정차할 때마다 승객들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하는 모습 역시 흥미로웠다.
어느 역에선가는 내리는 사람이 많아 좌석에 앉을 태세를 하며 순식간에 표정이 밝아지는 가하면 또 어느 역에선가는 갈아탈 전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뛸 준비로 결연한 각오가 담긴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 나 역시 그들 틈에 끼여 열심히 뛴 덕분에 막차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중 잠자다 내릴 역을 지나쳐 황급히 전철을 내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안쓰러움을 자아내게 했다.

강남에서 의정부까지 교통비 1500원으로 참으로 많은 것을 얻은 귀가길이었다. 생존의 치열한 열기를 감지할 수 있는 현장체험을 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우리 지하철이 미국이나 일본 지하철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중국에 가서 지하철을 타봤는데 우리 것에 비하면 한참 수준이 떨어져 보였다) 생각에 흐믓함 마저 느낄 수 있었다.
한나라의 척도를 문화나 예술 등 한 두가지 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하철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느 정도 희망의 가능성을 품어도 좋을 듯 싶었다.
그동안 우리가 달려온 먼 길을 생각할 때 이제는 정말 세계를 주름잡을 중요한 모멘텀을 만들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가 더욱 더 정성을 모아 제대로 한번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불끈 생기는 것 같았다.

의정부역에서 내려 걷다가 잘 준비를 하면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노숙자들과 마주쳤다. 편치않은 그 모습들이 걸어오는 내내 눈에 밟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정치를 했던 사람으로서 정말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고 편견없는 세상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인가에 대해 책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당면한 현안으로 받아들여야 할 아픈 현실이었다
전철역 주변을 도배하고 있는 시장 후보들의 현수막과 시.도의원 후보자들의 흩날리는 명함의 퍼레이드를 지나치면서 과연 어느 후보가 이 같은 현실을 잘 해결하고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일까 생각했다.
지역과 나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적임자를 선택하기 위해선 이번 선거에 좀 더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특별한 종교나 지역, 출신 학교 등의 성분에 대한 차별로 ‘인물’을 놓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오늘의 지하철 대장정(?)은 해피엔딩으로 종결지으려 한다.
서민의 애환이 서린 그 곳에서 희망의 근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추억과 희망과 걱정이 교차되는 가운데 행복한 여운이 가슴 속을 파고드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싶다.


(2010. 5. 15)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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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3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강요, OUT!

강요, OUT!



잘못된 대학 내 음주문화가 또 사고를 쳤다.

신입생 대면식에 참여했던 여대생이 과음으로 꽃다운 나이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선배들의 강요에 못 이겨 마신 술이 화근이라고 한다.

해마다 대학가 음주사고로 아까운 젊은 목숨이 사라지고 있다. 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는 입장에서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책임을 통감하게 되지만 근절될 기미가 없으니 걱정이다.



적당한 음주는 서먹한 대면을 화기롭게 해 주는 양념이 될 수도 있다. 저마다 알아서 주량만큼 마실 수 있는 정도에서 진행되는 음주 분위기라면 논란거리가 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음주문화가 개인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분위기로 주도된다는 점이다. 막무가내로 권하는 술을 통해 서로의 일체감을 확인하려는 그릇된 사고에 길들여진 병폐 때문에 술자리의 비극이 지속되고 있다. 과음이 기분전환의 청량제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사지로 내모는 극단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는데 이를 간과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음주의 강요가 자칫 살인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앞서 여러 불운한 사건을 통해 익히 경험하면서도 여전히 같은 파행이 반복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강요’에 의한 폐단은 비단 ‘음주문화’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강요'에 잠식당한 기분이다. 1등을 위해 ‘학력’을 강요하고 취업을 위해 ‘스펙’을 강요하고 경쟁력을 위해 ‘아름다움’을 강요하고 출세를 위해 ‘인맥’을 강요하고 부귀영화를 위해 ‘황금’을 강요하고 심지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슬픔’까지도 강요하고 있는 사회가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게 학력지상주의에 매몰되고 자본 우선 논리에 지배받으며 서서히 탈색돼가고 있다. 사회 곳곳이 ‘강요’의 틀에 조종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발성이 배제된 채 강요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는 비전이 없다. 더 나아가 강요에 의한 횡포로 빚어지는 결과물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무슨 일이든 스스로 판단한 개인의 선택은 우선적으로 존중돼야 한다. 개인의 주장하는 바가 최소한 반사회적이거나 반인륜적인 범주에 들지 않는다면 배제될 이유가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획일성이나 동질성, 그리고 정통성조차도 개인의 선택 앞에서는 훼손을 감수해야 할 부차적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이유에서건 한 개인이 소신을 내세운다면 그 어떤 정황보다 우선적으로 보호되고 받아들여져야 옳다. 개인의 인격 존중보다 우선 할 수 있는 가치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같은 가치관이 기본 룰로 설정되고 작동되는 사회만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희망을 노래하고 소망을 품을 수 있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했다. 강요하지 말라.

동일성, 효율성, 하나되는 사회 등의 구호로 아무리 미화해도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특히 모범을 보여야 할 군이나 검찰, 정치권을 비롯한 지도계층에 까지도 강요문화가 여전히 건재한 현실은 구성원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구시대의 낡은 관습을 벗지 못하고 퇴행한다면 결과는 너무나 뻔할테니까 말이다.

한시라도 빨리 구시대 잔유물을 치우고 성숙한 인격 사회를 구축하는 길만이 대한민국 미래를 밝히는 길이다. 강요에 의한 횡포가 더 이상 이 땅에서 발붙이지 못하도록 단결된 힘을 발휘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2010 .5. 13)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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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1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문화의 힘

문화의 힘


일찍이 국가 경영에 있어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한 이가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시다.

선생은 우리나라를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민족 자원의 바탕으로 ‘문화의 힘’을 꼽았는가 하면 문화의 가치를 국가의 부력이나 군사력보다 우위에 두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민족의 지도자 반열에 계신 백범 선생의 ‘확신’인 만큼 문화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비중을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 측면에서 지역 단위 문화원이야말로 문화 활성화의 첨병이라 할 수 있겠다. 문화를 통한 주도로 세계를 견인하는 대한민국을 소원하셨던 백범 선생의 생전 바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가치를 담은 교두보로서 말이다.



가끔씩 찾고 있는 포천 소흘읍에 소재한 아프리카 문화원도 내게 있어 비슷한 의미의 공간이다. 지난 2006년 개관 당시부터 개인적 연고가 있는 이곳을 자주 찾았다. 갈 때마다 고향에 온 듯한 아늑함으로 반기는 이 곳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인류의 원시적 문명이 현실과 소통하며 태고의 신비를 유감없이 발산하며 흔치않은 매력으로 무한한 상상을 허용하는 곳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아프리카 대륙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생생한 아프리카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아프리카가 인류 문명의 발생지로 인류의 시조라는 인류학자의 주장을 아무 거부감 없이 수긍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건 어렵지 않다.



인간이 미래의 성공적 설계를 위해 지난 시간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것처럼 문화 발전 역시 과거를 알아야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조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문화원에서 인류의 원시적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아프리카를 만날 수 있는 건 그런 의미에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류의 태고적 모습을 통해 인간의 생물학적 속성은 물론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허상이 재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화장이나 성형을 통해 자신을 돋보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현대문명의 소산물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프리카 부족들의 풍습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아득한 과거부터 목을 늘리거나 입술면적을 넓히고 코걸이는 물론 심지어는 혓바닥에까지 고리를 걸어 자신들이 정한 미의 기준에 근접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그들 사회를 형성한 다양한 부족제도나 가족 형태 역시 오늘 날 우리의 모습을 재조명시켜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런 식이라면 지금 우리가 최상의 현실로 믿고 있는 사회 형태도 세월을 지나 후대에 이르게 됐을 때 어떤 식의 평가가 내려질지 궁금하다. 마치 촌스러운 이미지로 다가오는 옛날 사진을 들여다보는 느낌은 아닐까 하는 짐작도 오늘 아프리카 문화원을 돌아보면서 떠올린 생각이다.



오늘은 아프리카 문화원장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내게 아프리카 문화원의 미래를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이 문화원의 원장은 건축으로 자수성가한 분으로 20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다. 몇 년 전 아프리카를 방문했다가 ‘필’이 발동해 문화원을 태동시킨 당사자의 제안인 만큼 가볍게 스쳐버릴 말이 아니었다.

난데없는 그의 제안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이런 저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만들었다. 이 문화원을 매개로 대한민국의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학생들은 물론 성인들에게까지 좋은 교육장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고조됐다.


그러다 문득 상서로운 인연이 시작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0 . 5. 11)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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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0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역할 보완

역할 보완

얼마 전 첼리스트 장한나가 방송에서 오늘 날 자신의 음악적 성공을 위해 헌신한 부모님 얘기를 전하는 모습을 봤다. 어린 딸이 줄리어드 음대 예비학교 입학이 허용되자 장한나의 부모님은 한국에서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함께 도미, 딸의 뒷바라지에 올인했다는 것이다. 대기업 간부인 남편의 수입으로는 월 500만원 되는 아들딸의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어 파출부로 나선 어머니의 사연을 전하는 기사도 있었다.

이 정도의 사연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부모의 희생은 이제는 거의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가히 ‘캥거루족’(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자녀들)이나 ‘헬리콥터족’(항상 자녀의 곁을 빙빙 맴돌면서 간섭을 멈추지 않는 부모들)의 신조어를 주도하는 국가답다고나 할까.



대한민국 부모들의 유별난 자식사랑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이유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건 갈수록 도를 더해가는 부모들의 자식 욕심에 따른 폐해 때문이다.

솔직히 부모의 인생전부를 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과열되는 과도한 자식사랑이 자식의 미래에 긍정적 사인으로 작용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오로지 자식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부모 자신을 위한 것인지 짚고 넘어가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자수성가로 가문을 일으키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사회적 여건을 비롯한 여러 환경들이 빈손의 젊은이들이 노력만으로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뜻과 의지만 있으면 기성세대의 큰 도움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전반적으로 모든 것이 변화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자식에게 고기를 먹이는 걸 능사로 삼지 않는 유태인의 자녀양육 방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그들은 고기 잡는 기술을 알려줌으로 해서 자녀의 자립기반 구축을 돕는 것은 물론 생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삶의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

갓 태어난 새끼를 벼랑으로 밀어뜨려 야생에서 생존하는 법을 가르치는 사자로부터 비슷한 형태의 부모사랑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나 역시도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내 자식에게 그에 상응하는 사랑을 베풀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고개를 가로저을 수 밖에 없다. 할 수 없어서라기보다 자식의 미래에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정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클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양육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부모들의 과도한 사랑이 오히려 자식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부모의 무분별한 사랑이 자식을 무능하게 만드는 사례도 수없이 많다.

그 어떤 이유에서건 사랑이 될 수 없다.

결국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자연의 섭리를 감안해도 부모가 자식의 인생을 주관하는 건 옳지 않다. 자식을 소유물로 보려는 그릇된 발상에서 비롯된 횡포에 불과하다.

부모의 삶이 마감된 후 그 빈자리를 메워 줄 대체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존경쟁을 미처 익히지 못한 자식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부모상에 스승의 역할이 더해진다면 좀 더 바람직한 형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자식을 향해 무한대로 열려있는 부모와 달리 유한한 존재로 자리매김 돼 있는 스승의 현실적 측면을 고려한 발상이다. 한없는 사랑을 무상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부모와 유한한 형태의 계약 절차가 포함된 스승과의 관계에서 스승의 인위적인 절제와 부모의 적극적인 헌신이 적절하게 교차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희망적인 관계 설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학생의 영혼을 위하거나 그들의 먼 미래를 내다보는 교육에 주력할 수 없게 돼 있는 게 오늘 날 교단의 솔직한 현실임을 감안하면 말이다.



군사부일체로 부모와 스승이 같은 입장으로 존경하고 받들던 예전을 생각하면 공부도우미로 전락한 것 같은 스승에 대한 씁쓸함이 없지 않다. 고등학교 교사가 포함된 삼인조 복면강도가 검거됐다는 소식이 이제 더 이상의 놀라움으로 다가오지 않는 심각함도 이대로 교단을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을 부축인다.

부모와 스스의 역할 보완은 기대할만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본다. 갈수록 삭막한 계약관계로 전락해가는 사제지간의 위기를 막게 될 수 있다. 대학입시나 취직 등을 위한 표피적인 가르침이나 실적에 연연하는 기계적인 입장에서 스승의 체모를 되찾는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다.

책임의 소재를 따지기 전에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가 ‘발등의 불’로 생각해야 할 시점이 됐다는 데 인식을 함께 해야 할 것 같다.



한 주를 간격으로 어버이 사랑과 스승의 사랑을 되짚어보도록 하는 것도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부모이자 스승의 입장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이 아이디어가 괜찮다고 생각되시면 지금부터라도 무단-무한 활용해 주시길 바란다.

저작권은 없다.
(2010 . 5. 10)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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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8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다시 시작하자

다시 시작하자

정치적 도반의 ‘불운’ 앞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밤이다.
어떤 식으로든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새벽 2시, 거리를 헤매고 있다.

그동안의 과정이 3D 파노라마 영상이 되어 한꺼번에 스쳐간다.
나 스스로에게도 화가 나고 그에게도 화가 난다.
사나이 중 사나이고 의리파인, 그러나 유난히 적도 많고 탈도 많은 그의 ‘분루’를 보면서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다. 난감함이 머리속을 하얗게 비우고 말문마저 닫아버리는 느낌이다.
친구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그의 속상함이 내 속상함으로 전해진다. 낙심 때문에 한없이 쓸쓸해진 그의 뒷모습이 눈에 밟혀 자꾸만 허둥거려지는 마음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숱한 삶의 자취를 남기게 된다.
걔 중에는 어느 날 불쑥 운명을 가르며 찾아드는 ‘봉변’ 때문에 삶의 지표를 바꾸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세상의 그 어떤 일도 일어나게 돼 있는데 우리는 왜 너나없이 자신의 인생만큼은 상당한 분량의 ‘불운’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믿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막상 억울하고 터무니없는 일 때문에 고통 속에 갇히게 되면 세상과 주변부터 야속해지는 게 사실이다. 팔다리가 다 잘려져 나가는 듯한 허전함에 온 몸이 떨리는 고통은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실제로 도처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발생하는지 보게 된다. 터무니없는 건 그렇다 치고 도저히 수습이 안 되는 억울함은 억장을 무너뜨리기 일쑤다.

다행인 것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인간에게 실패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의지가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새로운 도약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도 경험한 바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밀어붙이던 음해와 루머로 상심하던 불면의 와중에 손님처럼 찾아든 따뜻한 그 ‘기운’이 고통의 질곡에 빠져있는 내게 ‘용기’를 줬다. 고통을 실패로 인정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도록 내 삶을 다독이며 견인해 줬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의리도 리더십도 영향력도 패배도 아니다. 실패 앞에서 ‘용기’를 잃지 않는 의지가 우선이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중장기적인 준비는 물론 시대적 흐름까지 감안한 세심한 계획으로 시작하면 된다. 물론 도중에 생각이나 마음, 태도 등을 바꿀 수도 있다.
그렇게 포기를 거부하고 용기를 끌어 모으고 있는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일은 정말로 중요하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때부터 반석 위에 ‘뜻’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석은 또 다른 가능성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함선이 남아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이 품었던 희망의 본체에서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위안의 말을 비로소 건져 올렸다.
적지 않은 소득이다.
-친구야, 아직도 선택할 수 있는 열두가지의 가능성이 남아있다. 힘을 내자.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
친구에게 전하는 위로이자 내 자신을 향한 당부를 곱씹으며 운무에 싸인 이 새벽을 마감한다.
(2010.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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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종생각 - 천륜을 세우자

천륜을 세우자

나이 50을 넘겨 살면서 자식노릇도 부모노릇도 해볼 만큼은 해 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좋은 부모나 좋은 자식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 자신 부모역할이나 자식역할을 정말 잘 해 낼 수 있느냐에 이르면 여전히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고백을 내놓을 수 밖에 없다.
세상사를 통해 접하게 되는 부모 자식 사이의 ‘파편’을 통해서도 결코 녹록치 않은 정황을 보게 된다.
오늘 아침만 해도 남편과의 불화를 이유로 어린 자식들 앞에서 목숨을 끊은 모진 모정과 기초수급비를 받아 어렵게 생활하는 노모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폭행을 휘두른 패륜아들에 관한 소식을 인터넷에서 접했다. 돈을 안준다고 부모를 죽인 자식, 말 안 듣는다고 자식을 죽인 부모 등 천륜을 저버리는 극단적인 이야기도 드물지 않게 듣게 되는 소식이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가 됐건 자식이 됐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일이 정말로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릴 때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부모님보다 자식에게 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자식을 셋이나 두고 있는 지금의 나는 내 부모님이 얼마나 훌륭한 부모님이신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자식들을 키우며 내 자신 부모님께 얼마나 수월하지 않은 자식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고 있다. 부모님께서 느끼셨을 ‘마음의 진동’을 조금은 감지할 수 있는 역지사지를 경험하기도 한다.
혹여 부모님께 바치는 효도 보다 자식에게 받는 효도를 우선시하는 어리석음으로 부모님 마음에 누를 끼치지나 않는지 갈수록 조심스러움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뭐라고 해도 좋은 부모의 가치는 솔선수범에 있지 않을까 싶다. 부모는 ‘바담 풍’ 하면서 자식에게 ‘바람 풍’을 강요한다면 원하는 바를 절대 이룰 수 없다. 올바른 부모의 역할이 가정의 성패 여부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가르침은 가정의 안정이 우리사회의 근간을 이룬다는 방점을 찍고 있다. 갈수록 사회적 혼란이 깊어지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가정이 온전히 서지 못한 현실적 기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가족간의 소통이다. 소통의 부재는 구성원 저마다의 역할 부재로 인한 불화로 이어지게 돼 있다. 가정의 기본을 가족 간의 소통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보는 이유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구성원 간의 합의에 따른 룰에 의해 이해하고 인내하는 것도 소통을 위한 한 방안이다. 소통도 일종의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량이라는 측면에서 가족 구성원이 희생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소통의 기본 조건이라 하겠다.

사회가 복잡하게 되면서 좋은 부모나 자녀가 되는 법을 제대로 배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때문에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같은 인위적 기회를 통해서라도 훌륭한 부모나 좋은 자식이 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사회적 국가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삼강오륜이 됐건 사서삼경이 됐건 성경이 됐건 코란이 됐건 21세기에 맞는 ‘기본’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좋은 부모와 좋은 자녀를 통해 세워진 좋은 가정이야말로 미래 사회의 또 다른 경쟁력이라는 생각으로 대책 마련에 골몰해야 할 때다.
천륜을 세우자.
가정이 붕괴가 인간의 모든 가치를 무너뜨리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절박함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다
. (2010. 5.8)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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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5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꽃들에게 희망을

꽃들에게 희망을

세계 무대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유명 비보이 그룹의 병역비리 행각이 적발됐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처럼 꾸며 병역을 면제받았다가 뒤늦게 덜미를 잡힌 것이다. 군대를 가게 되면 춤 실력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아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이들을 보니 나무람만 앞세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비보이로 통칭되는 이들의 춤은 요즘 젊은이들 뿐 아니라 나이가 꽤 든 우리들도 좋아한다. 오늘 날의 세계적인 명성도 자기들 나름대로 오로지 춤을 추고 싶은 열망 하나만 가지고 일궈낸 결과다.
이런 비보이들에게 군 입대로 인한 2년간의 공백은 치명적인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춤의 특성 상 지속적인 연습이 필요하고 평생에 걸쳐 기량을 발휘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가 범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잘못된 시각이지만 군대가 젊은이들 미래의 ‘걸림돌’로 인식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젊은이들에게 특기나 창의성을 단절시키는 죽음의 공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젊은이들 탓만 할 게 아니다.
우선은 군 당국이 시간만 낭비하고 배울 게 없는 곳이라는 등 군부대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에 따른 문제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군대가 젊은이들에게 두려운 공간이 되지 않도록 환골탈태 수준의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군대가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기왕에도 문화 예술 체육 계통의 입대자들을 위한 특별 병역 프로그램이 가동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운동선수들은 국군체육부대에서 선수 활동을 계속할 수 있고 프로 게이머들은 공군 전산병 등으로 기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제도들 말이다.
이 제도를 특별한 소양을 가진 일부에게만 적용시킬 게 아니라 전체 입대자를 대상으로 확대하는 건 어떨까 싶다. 저마다의 개성에 맞게 기량을 연마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거다. 이를 위해 다양한 병역관련 프로그램을 활성화 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이번 기회에 군 당국도 젊은이들도 서로 달라진 마음으로 만나길 바란다.
군 당국은 군대를 젊은이들에게 가능성을 길러주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준비하고 젊은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힘을 합한다면 최강의 선진군대의 면모는 저절로 갖춰지게 돼 있다.

9명의 비보이들을 더 이상 코너로 몰지 말자. 비난과 매도만이 능사가 아니다.
젊은 날 한 때의 오류로 인생 전체를 망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 스스로도 참회했듯 어리석은 판단으로 인한 철없는 행동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사회였으면 싶다. 지금이라도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또 다른 가능성으로 재기할 수 있도록 선처를 베풀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희망을 만들어 내자. 젊은 꽃들에게 희망을 주자.
(2010. 5. 5)
....홍문종 생각

2010년 5월 3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혁명 당하기 전에

혁명 당하기 전에



공기의 수용 한계를 초과했는데도 계속해서 부풀려지고 있는 풍선을 바라보는 불안감.

요즘의 정당 정치를 지켜보는 느낌이 그렇다. 언제 뻥 터질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시한폭탄 같기도 하다.

솔직히 지방선거 후보공천 과정에서 혹시나 이번만큼은 좀 다르지 않을까 기대를 걸었다. 시작 때부터 정당들마다 하도 개혁공천! 공천혁명! 구호들을 쏟아내기에 솔깃해진 탓도 있다.

그러나 결과는 꽝이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의 정당 공천은 한 마디로 정리하면 ‘엉망진창’이었다. 원칙도 없고 명분도 없는 ‘역시나’의 결론을 매듭지어 가는 공천 결과는 보기에도 민망했다. 책임정치를 구현하겠다는 정당의 의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인맥공천, 헌금공천 별별 소리가 다 들리고 있다. 지역 국회의원에게 현금 2억원을 공천 헌금으로 바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어의 몸이 된 현역 군수 이야기나 여론조사기관과 짜고 여론을 조작하다가 군 단위 지역 기초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이 피선거권을 잃는 사태는 차라리 코미디였다. 탈당과 무소속 출마 등 경선 불복 사태가 당사자를 힐난하는 것으로 다 설명이 되는건지 모르겠다.

국민을 외면하고 자기들만을 위한 행태로 정치를 퇴보시킨 책임 소재는 분명히 가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정치권은 스스로의 말로를 재촉하고 있다.

지방자치 발전을 위한 역량이 필요한 선거에 지역과 주민은 안중에 없이 중앙 권력의 공천권 횡포만 활개를 치는 형국이다. 지역과 주민을 위한 인재발굴보다는 정당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홍위병 간택의 장이 되고 말았으니 하는 말이다.

도를 넘는 오만함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믿는 구석이 없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럴 수는 없다. 유권자를 무시하고 그 권리를 왜곡시키는 정당 공천은 차라리 없애는 게 낫다.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조금이라도 걱정한다면 이렇게 무모한 공천으로 정치판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국민에게 버림받은 일본 자민련의 몰락에서 우리 정당 정치의 미래를 본다.

무소속 돌풍에 이어 군소정당 돌풍을 예고하며 유권자의 냉엄한 심판을 받고 있는 일본의 정치 현실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실제로 무소속 후보들이 판을 휩쓰는 파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오랜 여당이었던 자민련 대신 민주당이 선택되기도 했다. 유권자가 똑똑한 자기판단을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기존 정당들에게 경고장을 보낸 결과였다. 유권자의 힘으로 권력 지형을 뒤바꿔 버린 것이다.

선거 때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당공천을 얻어내려는 우리와는 다르게 일본의 경우 정당 공천은 인기가 없다. 대부분의 후보가 무소속 출마를 선호한다. 유권자가 신뢰를 잃은 정당을 외면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류는 지방의회 장악을 목표로 하는 지역 정당 창당 움직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성공 여부는 두고 봐야겠지만 지방분권, 지방주권 시대를 견인하겠다는 새로운 정치실험에 유권자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정말로 국민을 두려워하는 공천이 이뤄져야 한다.

더 이상 ’사천‘으로 얼룩진 내홍에 정치를 희생양으로 삼아선 안될 일이다.

정치권이 당리당략의 꼼수로 튕기는 속셈을 국민이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라. 국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대로는 안된다. 지금으로선 투명한 공천 시스템으로 상향식 공천을 정착시키는 일이 가장 적절한 해법이 될 듯 싶다.

국민에게 혁명 당하는 불상사를 당하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한다.(2010.5.4)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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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신뢰

신뢰

관심을 끄는 외신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웨삼 엘-하나피와 사비르한 하사노프의 이름을 갖고 있는 2명의 미국인이 예멘에서 컴퓨터기술 등으로 알-카에다를 지원한 혐의로 미 연방검찰에 의해 피소됐다는 CNN 방송을 통해 접했다. 30대의 이 두 젊은이들은 알-카에다가 테러집단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이들 대원을 접촉하거나 이들에게 전달할 디지털 시계 7개를 구매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멕시코인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아리조나 국경을 넘다가 체포되는 사건도 있다. 자동차 곳곳에 숨은 그림처럼 들어앉아 국경을 넘으려던, 목숨 건 이들의 밀입국 장면은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국이 기회의 땅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실감나게 했다.
앞서 영국의 데일리 메일 인터넷 판에서는 미 국민 70%가 가족보다 국가를 더 사랑한다는 시장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누굴 가장 사랑하느냐’는 (시장조사 전문기관) ‘입소스’ 질문에 ‘(배우자를 포함한)가족보다는 국가’라고 대답한 반응이 제일 높았다는 내용이었다.

국가가 우선이냐 개인이 우선이냐 하는 망설임은 우리에게 늘 딜레마로 상존하는 명제다. 서로에게 있어 필수불가결의 관계로 묶여있으면서도 늘 국익과 사익 사이의 갈등과 충돌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함이라고나 할까.
개인의 행복이 국가의 폐망에도 불구하고 항구적으로 보장될 수 있다거나 국민을 불행에 빠뜨린 국가가 홀로 융성한 국운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경우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개인과 국가를 따로 떼어 생각하는 자체가 무모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가까운 역사를 통해 찾을 수 있는 교훈도 적지 않다.
이완용 등 을사오적은 나라를 팔아 사익을 추구했고 안중근 의사 등 애국지사들은 국익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애국적 결단을 실행하신 분들이다.
이들에 대한 역사의 응답은 이미 보여지고 있는 그대로다.
을사오적은 매국의 댓가로 잠깐의 ‘행복’을 구가했을지 모르지만 1세기를 넘긴 지금까지도 그들의 후손은 ‘매국의 치욕’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애국지사들은 귀한 생명을 내놓기는 했지만 그들의 숭고한 자취는 후대에 길이길이 추앙되는 영예를 얻었다.

서두에 언급한 외신에서도 국가와 개인 간의 딜레마가 존재하는 미국의 현실이 보인다.
알-카에다를 지원하는 미 국민의 범죄 사건과 미국민 70%가 가족보다 국가를 우선시한다는 의식조사 결과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개인의 이익이 더 크면 나라를 배반할 수 있는 국민이 나올 수 있는 현실을 볼 때 무턱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개인의 모든 것을 희생하라는 강요가 더 이상 능사가 될 수 없게 된 현실이다.
하지만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미국내 반감과 강력한 불법 체류 규제(아리조나가 최근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목숨을 걸고 미국 땅에 진입하고 싶어하는 현상에서 미국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직은 미국이 자국민은 물론 세계로부터 신뢰를 잃지 않았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희망의 조짐 같은 것 말이다. 미국이 얻고 있는 이 신뢰가 위기와 실의의 미국을 견인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있다.
많은 인명이 희생된 천안함 사태에 대해 국가가 최고의 예우를 다하는 것 역시 국민신뢰를 이끌어 내기 위한 일환일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예우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크게 국민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건 신속한 진상규명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것도 국민 대다수가 속 시원히 받아들일 수 있는 확실한 규명이 이뤄졌을 때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도.
당국도 이 점을 중시해서 하루 빨리 국민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개인과 국가가 운명을 함께 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이음새는 바로 ‘신뢰’다.
신뢰가 중시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도 '신뢰'의 내공이 발휘되는 국력을 갖고 싶다. (2010.5.2)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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