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28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눈(雪)


눈(雪)




ㅡ홍문종ㅡ



겨울의 애가
이별과 질투

회색 눈


봄의 찬가
기쁨과 만남

하얀 눈


2월
3월
내리는 눈
오르는 눈


이월
삼월
검 붉은 눈
밝고 흰 눈


겨울

누르는 눈
안기는 눈


삼월 하얀 눈
나, 환희, 찬가
이월의 회색 눈
너, 아쉬움, 애가


기쁨도 슬픔도
아랑곳 않고
온천지에 눈
내 마음에도 눈


어제
내린 슬픈 눈
지금
오는 기쁜 눈


어제
이월의 마지막
오늘
삼월의 시작



(2011.3.1)

2011년 2월 27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말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또 말에 있어 책임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나 신중함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우리의 말은 한번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하고 특별히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하는 말은 더더욱 신중할 수 밖에 없다.
직업상 단상 연설이 일상이 되다시피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소재에 대한 고민이 늘 머릿 속을 맴돌고 있다. 왠만큼 반복하면 경지에 오를 만하건만 아무리 많이 반복해도 결코 만만해지지 않는 현실이기도 하다.
주로 공적인 견해를 밝혀야 하는 정치인의 경우, 말에 대해 책임을 묻는 정도가 간단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맹자는 말이 쉬운 것은 결국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그의 말이 백번 옳다. 특히 직업상 하루에도 몇 번씩 축사나 격려사를 해야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예사롭지 않게 들리지 않는다.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순간의 ‘말실수’로 정치생명을 잃는 불운을 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16대 국회가 끝나갈 무렵, 국회의장단 일원으로 북 구라파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 때 함께 갔던 선배 정치인 모씨가 대중을 향해 연설을 하다가 구체적인 생각이나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대충 아무 이름이나 둘러대고 넘어가는 게 현명하다는 조언을 내게 해 준 적이 있다. 연설을 듣는 대중에게 중요한 건 사람 이름 등 개인 인적 사항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는 인식의 발로였다.
그런데 서생 출신인 나는 그 선배 정치인과는 다른 생각을 적용하며 살고 있다. 직업적 특성 때문인지 주요 사안의 ‘팩트여부’를 상당히 세심하게 따지는 편이고 또 확신이 서지 않을 경우 사용하지도 않는다.
오늘 축사자로 참석한 방송통신 대학 입학식장에서 있었던 해프닝에도 이 같은 나의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됐다고 볼 수 있다.
문제의 발단은 나보다 먼저 축사에 나선 분이 통신대 신입생들에게 오바마 관련 에피소드를 인용하면서 오바마가 하버드 대학을 나왔고 예일 법대에서 법학박사를 학위를 받았다고 잘못된 (하버드가 아닌 콜럼비아대 출신이었고 예일대가 아닌 하버드 로스쿨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에피소드를 인용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 것이 그냥 넘길 수 있는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서 나를 딜레마(이를 바로 잡을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한)에 빠뜨린 것이다.
고민이 시작됐다. 무엇보다 그 자리가 방통대 신입생들의 입학식이었기 때문에 교육의 연장선 차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더구나 당사자가 다른 곳에서도 반응이 좋았다며 앞으로 계속 이 소재를 인용하겠다는 뜻을 밝힌 점도 나의 초조함을 자극했다.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이 자리에 참석한 학생들은 물론 축사 당사자도 계속해서 오류를 정정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는 위기감(?) 같은 게 순간적으로 내 마음을 급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오바마는 컬럼비아 대학 출신이고 예일 대는 간적이 없고 하버드에서 법학박사를 받았다고 오류를 정정했다.
그러나 막상 오류를 정정하고 나니 마음이 불편했다. 평소 다른 사람과의 대립각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 파격적인 결행이 부담을 주는 건 너무나 당연할 터였다.
분위기가 싸해지지 않도록 무형의 노력으로 나름 최선을 다했고 예의로 배려한다고 애를 썼지만 혹시 받아들이는 쪽에서 언짢게 생각하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평소 내가 알고 있는 바대로라면 화를 낼 인품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생각의 단초를 제공하고 빠르게 공감대를 형성시키는 에피소드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번 잘못된 인용이나 해석이 제2, 제3의 오류를 범하게 할 수 있는 전파력을 생각할 때 특별히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바로잡는 건 옳은 행동이었다는 결론으로 오늘의 찜찜함을 털어냈다.

나 자신 역시 지금까지 혹여 허언에 불과한 말의 성찬으로 다른 이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는지 스스로를 점검했다.
과유불급이라고 잘못 인용된 에피소드가 본뜻을 왜곡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말의 중요성이다.


(2011. 2.26)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26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전통의가치


전통의 가치

요 며칠 평소보다 더 분주한 일상을 보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 무렵이면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척사대회 때문이다.
올해는 여기저기에서 척사대회 참석을 요청하는 부름이 유난히 많은 것 같다.
유서와 전통을 자랑하는 마을 축제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척사대회는 온 동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정월대보름 맞이 전통세시풍속을 기리는 가운데 서로 정을 나누며 단합과 안녕을 기원한다는 데 그 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특별한 오락이 없었던 시대적 상황에서 마을 구성원들에게 있어 얼마나 크고 깊은 의미를 가진 놀이마당이 됐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갈수록 그 규모나 흥취가 축소되고 있는 조짐이다.
처음 선거판에 뛰어들 때만 해도 확실히 지금과는 많이 다른 위용이 있었다.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당당히 해냈었다. 그러던 것이 이런 저런 영향 때문에 본래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구제역 사태도 일조하긴 했다. 실제로 구제역 파동 때문에 척사대회 계획을 축소하거나 취소한 일정이 적지 않았다는 후문을 듣고 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에게는 아직까지 척사대회가 흥겹고 정겨운 어우러짐의 한마당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마저도 머잖아 옛 추억거리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이 있어 걱정이다. 앞으로 풍악과 함께 어우러지는 보름달, 윷놀이, 연 날리기, 쥐불놀이 등에 막결리등 토속음식이 어울어지는 정월대보름 풍광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상실감이 크게 다가온다.

이런 것들을 이대로 소멸시키기보다 우리 만의 문화관광 상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자꾸 두리번거리게 된다.
발렌타인 데이나 할로윈 데이 등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서양 축제들은 내용 면에서 따지자면 우리의 전통문화가 가지고 있는 가치에 비해 일천하다는 생각이다. 최근 춘천이나 제주도 등지에 한류 스타들의 족적을 문화상품으로 띄워서 선보이고 있는 프로그램도 내용이 취약하기는 마찬가지다. 깊이도 없고 내용도 빈약해서 얼마나 오래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솔직히 걱정이 될 정도다.
알려지다시피 수백년 전통을 이어오면서 동네 축제들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관광 문화로 상품화 된 경우가 많다. 전통이 그 나라와 마을을 전 세계에 알리는 훌륭한 자원으로 활용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전통 문화는 주시할 만하다.
문화가 국가 경쟁력이 되고 있는 21세기에 전통문화가 가지고 있는 무형자산의 가치만 놓고 보더라도 말이다.

우리의 전통 축제에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이 많다.
정월 대보름 축제만 하더라도 윷놀이나 쥐불놀이 등 보름달과 함께 어우러지는 전통방식의 놀이문화들이 월등한 상품가치와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만만치 않은 내공을 바탕으로 기획만 제대로 해도 성공을 기약하는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관광 자원이 고갈된 한겨울에 서양은 물론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을 대상으로 한 흥미로운 겨울 축제로 부각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전 세계에 나가있는 교민을 대상으로 한 척사대회를 기획할 수도 있다. 지역별 예선전을 거치는 챔피언 선발대회를 여는 것도 한 일환이 될 수 있다. 시청이나 남산 등 특정 장소에서 개최되는 ‘한민족 척사대회’ 타이틀의 이벤트는 생각만해도 신나는 일이 될 것이다. 특별히 의외성이 많이 있기 때문에 무슨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니 크게 부담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제기차기나 엿날리기 등 전통놀이를 덧붙이고 스토리텔링까지 더해진다면 둥근 보름달 아래서 뭔가 그럴 듯한 작품이 하나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아이디어가 많고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분이 계시다면 시도해보기를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더불어 사라져가는 전통방식에 관심의 끈을 놓지 말자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다.
전통의 가치는 묵은 장맛 같은 거 아닐까?

(2011. 2. 26)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24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청년에게 희망을

청년에게 희망을

사상 최대의 청년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현실이다.
청년 실업이 금기의 선을 넘어선 후유증을 체감하고 있다.
도처에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 무리들이 널려있다.
그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시대의 우울을 더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선배 세대로서 그들에게 좀 더 희망찬 출발을 마련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마음이 무겁다.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서는 제자들에게 건네는 축하 인사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다.
졸업이 풍찬노숙의 사지로 내모는 또 다른 음모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솔직히 있다.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취업 현장의 경쟁률도 가슴을 덜컥 내려않게 만든다.
9급 공무원 공채 경쟁률이 93:1을 기록했다는데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예사롭지 않게 들렸을 것이다. 정년 보장의 틀이 무너진 취업환경이 상대적으로 남녀차별이 적고 신분이 보장되는 공무원 직종을 선호하게 만들었을 테지만 그만큼 심각한 청년 실업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반증일 것이다. 교육 일선에 있는 입장으로서는 젊은이들이 하고 있는 고민의 일단을 보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지구촌 곳곳이 청년 실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형국이다.
주지하다시피 이집트의 30년 독재를 무너뜨린 촉발점은 일자리를 얻지 못한 한 청년의 절박한 구호에서 시작됐다. 청년 실업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점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청년 실업 자체보다는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병폐부터 해결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할 수만 있다면 빈부격차부터 해소하는 게 왕도다.
가장 무서운 절망은 빈곤의 악순환 앞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꿈을 포기하고 무릎을 꿇게 되는 일이다. 젊은이들을 좌절에 빠뜨리고 의욕을 떨어뜨리는 빈부격차부터 바로 잡아야한다. 따라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고 본다.
도대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평생 집하나 제대로 장만할 수 없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자식하나 제대로 교육시킬 여건이 안된다면, 그 어떤 최선의 노력으로도 낙오 대열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면 무엇으로 꿈을 세울 수 있겠는가.
결국 결혼문제가 됐건 자식문제가 됐건 취업문제가 됐건 인생의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게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 좌절로 인한 깊은 상처가 한 인간의 삶 전부를 망가뜨릴 수 있는 치명적 독성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럴 진데 아무리 세계는 넓고 할 일이 많다고 외쳐본 들 약발이 먹힐 리 없다.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젊은이들의 현실이 안쓰럽다.
경기불황과 청년실업도 모자라 사회적 부양책임도 이들 세대에 떠넘긴 꼴이 됐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이 그들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직격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가볍게 시작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후원과 따뜻한 격려로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줘야 하는데 출발도 하기 전, 무거운 짐부터 지워준 꼴이 됐다.
안팎으로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이 넘치고 있다.
다른 나라와의 생존 경쟁이 즉각적인 현실로 반영되는 이 시점에서 차세대를 책임질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미래를 위한 가장 적극적인 투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은 대한민국 전체가 ‘청년 프랜들리’ 정신으로 그들을 돌봐야 할 때다.
젊은 세대들이 창업 등 새로운 시도를 통해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이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나 여건을 만들어 주도록 관심을 가져야겠다.
그들의 고충에 귀를 기울이고 짐을 덜어주자.
우리 모두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자기 포부를 펼칠 수 있는 든든한 뒷배가 되도록 하자.
무엇보다 계층 간 격차를 줄이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젊은이들이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하는 큰 지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땅의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도록 하자.

(2011.2.25)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23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카다피 다음은?

카다피 다음은?

카다피의 오판으로 리비아 사태가 참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수부대와 외국인 용병, 그리고 전투기를 동원한 카다피의 폭압적 대응에 시민 혁명군의 희생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렇더라도 카다피의 독재행각은 이제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역사는 결국 민중의 편에 서게 될 것이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이 나름대로의 속도로 길을 내듯 결국 신의 섭리가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위대의 민주화를 향한 갈망을 해소시켜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대부분 앞서의 독재자들과 비슷한 카다피의 말로를 당연시 하는 분위기 속에서 다음 차례는 누가 될 것인가에 관심이 쏠려있는 형국이다.

역사의 화살이 북아프리카를 넘어 북한을 겨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엄밀하게 말하면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도 아니다. 단지 공산당을 3대를 이어 충성하는 ‘교도들’을 주축으로 퇴락한 독재주의의 명맥을 이어왔을 뿐이다.
그렇게 김일성에서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 온 ‘세습 왕조’가 이제 그 명운을 다한 시점에 이른 듯하다.
실제로 북한 내부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들이 감지되고 있는 것 같다. 북한 정보에 가장 정확한 위치에 근접해 있는 중국도 이미 북한 붕괴를 기정사실화 하는 분위기라는 전언이다. (중국과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현지 소식통들을 통한 것이니만큼 신뢰할 만한 정보다) 중국 언론도 북한에서 정변이 발생할 경우 중국에 미칠 파급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국 당국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중동의 반독재 민주화 시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초조해하는 북한 김정일의 근황도 듣고 있다. 김정일이 특수기동대 창설을 직접 지시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하는데 군과 보안부를 주축으로 한 내부통제 방식으로 운영하던 북한이 별도의 진압 기동대를 창설한 자체가 상당히 이례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북한의 붕괴에 대비해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다.
어쨌든 북한의 붕괴가 기정사실이라면 책임있는 국정 운영자들의 주도면밀한 대비책 마련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중국의 민주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정보 채널들이 모두 같은 생각이었는데 단지 어떤 형태로 바뀔 것인가에 대한 견해만 조금씩 달랐다. 중국 공산당 내에 여야가 생기는 정도의 소극적 변화를 추측하는 반면, 미국의 연방공화제 방식 같은 파격적인 변화를 예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중국 당국이 이민족들의 상황 변화에 민감해 하고 있는 개연성에 정보원 모두가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중동의 민주화 바람이 테벳을 비롯한 몽골, 동북삼성, 신장 위그르 등 중국 내 이민족 문제의 뇌관을 건드리게 될까봐 전전긍긍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는 것이었다. 중국 내부의 갈등이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부담으로 남아있는 정황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의 민주화 동향은 북한의 상황 변화를 예측하는 판단 기준이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중국에 대한 걱정보다는 중국 상황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력의 향배를 더 중요시 여기게 된다.
중국이 북한이나 우리와의 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설정하게 될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자국의 이익을 철저하게 대변할 괴뢰정권 개념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설정할 수도 있다. 또 자국의 상황 때문에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되거나 적극적인 개입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 된다면 우리는 어떤 외교적 스탠스를 취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다. 경우에 따라 중국에 빗장을 거는 정책도 해답이 될 수 있겠다.

도도히 흐르는 세계사적 조류를 인간의 머리나 힘으로 막아내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니 난맥상으로 얽혀있는 현실을 조금은 더 겸허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럼에도 머리는 여전히 복잡하다. 대통령 선거와 북한의 김정은 등극 등 2012년 한반도를 무대로 예고되는 여러 정황들이 나의 고민 게이지를 쑥쑥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시대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내 몫의 분량은 스스로 해결해 낼 생각이다.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겠다.

(2011. 2. 23)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22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부패가 문제야

부패가 문제야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튀니지 국화 이름을 따서 민중봉기에 붙은 이름) 여파가 생각보다 강력하지 싶다.
급기야 중국 땅에까지 그 파동이 전해지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소규모의 '재스민 시위'가 있었다는데 중국 당국이 긴장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뒤숭숭한 중국 상황이 걱정스러웠다. 자식이 머물고 있는 곳의 일인지라 민감해질 수 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사태가 어느 정도인지 중국 권력 주변부에 있는 지인을 찾아 알아보다가 부패로 위기에 놓인 중국 공산당의 실상에 대한 깊이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 공산당의 부패가 문제였다.
지인은 ‘과연 시진핑이 주석 자리에 오를 수 있겠는가’라는 의구심으로 중국의 현 상황을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지금의 중국 공직사회는 예전 장개석 시절의 국민당처럼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썩을 대로 썩어 결국 부패로 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결론이었다. 백만명 정도 부패한 사람들을 솎아낼 수 있으면 몰라도 중국 공산당의 미래는 없다는 아주 간단명료한 진단이었다.

때 마침 우리 언론에서도 중국 공직사회의 부패 관련 조사결과를 보도했는데 가공할 뇌물 수법과 관리내용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줄줄이 구속되는 규모도 무척이나 방대했다. 뇌물로 수십억채의 주택을 구입하거나 60여개의 예금통장 운용, 심지어 고리대금업자가 되어 사채놀이도 서슴지 않을만큼 엽기적이었던 그들의 부패 행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었다.
부패 때문에 중국의 G2 위상도 영 말이 아니게 됐다.
대부분의 중국민들은 G2로 격상된 국가적 위상으로 여건이 좋아졌다는 생각을 하는 않았다. 공산당이나 특정 계층만의 관심사안에 그치고 있었다. 오히려 갈수록 간극을 벌리고 있는 심리적 경제적 계층간 격차가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가난한 시절엔 모두가 한 마음으로 공동의 문제를 대처하면서 서로를 북돋아주는 에너지가 있어 더 좋았다는 회고가 나오기까지 했다.

늘 그렇듯 부패한 권력의 처신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연이어 그가 들려주는 북한 공산당 부패는 중국의 실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심지어 중국에서 북한주민을 위해 보내는 구호물품까지 공산당 간부에 의해 빼돌려지고 있었다. 고스란히 1/3 가격으로 중국 시장에 되팔리는 경우가 다반사라니 개탄스러운 현실이었다.
중국은 공산당만 망하면 되지만 북한은 나라 전체가 결딴나게 생겼다는 그의 판단을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부패 권력에 의해 통제되고 밀폐됐던 사회가 불행한 뒷모습을 남기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던 기록이 적지 않다. 튀니지의 민중 봉기가 나비의 날개 짓이 되어 지구 저편의 후폭풍으로 증폭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런 저런 징후들이 튀니지의 재스민 향기가 지구촌 전역을 휘감을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순간, 부패권력의 횡포와 억압에 숨죽이던 민중의 외침이 들풀에 옮겨 붙은 불길의 기세로 확산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튀니지, 이집트에 이어 리비아, 알제리로.... 그렇게 중국이라고 예외를 보장받을 수 없는 분위기로 몰리고 있다.

일찍이 땅투기 이권매매 탈세 등으로 재산을 불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나라 전체가 부패하게 된다고 경고한 간디의 망국론이 섬뜩하게 되살려지는 요즈음이다.
근심스럽다.
우리 주변에서 감지되고 있는 심상치 않은 일련의 징후들 때문이다.
그동안 간간이 권력 주변부에서 각종 비리가 터져 나오긴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을 잘 비켜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실적 만능주의와 결과 지상주의 등의 천민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이 판을 손 안에 틀어쥐고 우리의 운명을 거대한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사에는 비밀이 존재할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동안 하나 둘 은밀한 그림자에 감춰졌던 일들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 임계점에 이른 분노 게이지의 폭발은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높아질 대로 높아진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을 생각한다면 결코 안심할 상황이 아닌 점만은 분명하다.
위기의식을 갖고 긴장을 풀지 말아야겠다.

그 어떤 선한 동기의 시스템도 부패 앞에서는 맥을 못추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각성과 반성으로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다는 데 격조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인간만의 차별성이다.
자정 과정을 거치지 않은 단순한 외적 팽창만으로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중국의 현실이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변화하는 세태에 따라 혁신하는 일이 물리적인 노력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탐심을 버리고 부패의 늪을 경계하자.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국격을 갖출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방도가 아닐까 싶다.

'북경에도 언젠가는 봄이 오겠지....'
이대로 진짜 봄이 오기는 오는 걸까?를 묻던 그 지인에게 전한 나의 생각이다.

(2011.2.22)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21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봄이다!!

봄이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차고 매서운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해서 봄이 온다는 생각보다는 어떡하든지 동장군의 손길을 피해야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으로 이 겨울을 보냈다. 그 순간들이 생애 전부라도 되는 양 이대로 다시는 벗어날 길이 없을 것 같은 절박감으로 고립무원의 고독에 짓눌려 지나온 시간들이었다. 그 무엇도 염두에 둘 여유조차 없이 동토의 세상을 산 셈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세상이 달라졌다.
맹위를 떨치던 추위는 간 곳 없고 완연해진 봄기운이 노래하듯 온 천지를 감싸고 있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봄이 오는 소리가 온 천하를 울리고 있었다.

인간의 속성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특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특정 이슈 앞에서 함몰돼 버리고 마는 내 모습을 본다. 매 순간마다 다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몰입할 수 있는 그 집중력과 단순성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평생 군인으로 살기라도 할 것처럼, 평생 학생의 신분으로 살아갈 것처럼. 평생 젊은이로 살 수 있을 것처럼 고정된 레퍼토리에 얽매여 있는 모습 일색이다.
저마다의 인생을 통과하게 돼 있는 순례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마다 신열 속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인간의 그 미욱한 한계가 안타깝다.
찰나에 지나지 않을 특정 순간을 항구적인 상황으로 규정짓고 싶은 욕망이 착각을 불러오는 것 같다. 더군다나 자신이 현재 속해있는 ‘상황’을 압박하면 압박할수록 개인이 확보할 수 있는 미래의 자유 영역을 그만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관관계를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임에랴.

인간이 처한 그 어떤 상황도 일시적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인간사의 모든 희로애락은 연극 무대의 설정이 전환되듯 바뀌게 돼 있는 삶의 질서를 미처 알지 못해 벌어지는 돌발적 해프닝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새벽이 오고, 아무리 혹독한 추위도 봄을 몰고 오게 돼 있으며 아무리 끝 간 데 없는 질곡의 나락이라 해도 종국엔 환희와 기쁨의 새날이 오게 돼 있다.
그것이 인생의 비밀이 아닐까 싶다.

요즘 들어 자신을 돌아보면서도 생각이 많다.
참 힘겨운 날들을 잘 이겨냈다는 안도감이 있는 반면, 그래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꿈을 가진 사람치고는 그저 현실을 대처하는데 급급해 세월을 흘려보낸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솔직히 있다. 세월을 낚는 동안 미래를 좀 더 적극적으로 설계하지 못했다는 미련에 뒷덜미를 잡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 될 건 없다. 지금 시작해도 괜찮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전진의 시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 아침,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나와 우리의 미래를 위해 더 적극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는 각성으로 마음을 다 잡아 본다.

봄이다!!
뚜벅 뚜벅, 저기 봄이 오고 있다.

(2011. 2. 21)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20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


미국의 한 타블로이드 잡지 보도로 촉발된 스티브 잡스의 건강상태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인콰이어러지’는 최근 머리숱이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충격적인 보도사진(정작 얼굴은 확인되지 않은)과 함께 스티브 잡스가 ‘6주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주장으로 파장을 일으켰지만 곧 바로 이를 뒤집는 이런 저런 정황이 제기되고 있어서 진위 여부를 가리기 가 쉽지 않게 됐다.
더구나 최근 잡스가 정보기술업계 최고 경영자들과 함께 백악관 간담회에 참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는 잡스의 ‘절박한’ 근황보도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추론이 대세인 분위기로 반전되고 있는 것 같다.

평소 스티브 잡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스티브 잡스와 관련한 국내의 언론 보도를 바라보는 심경은 영 불편하다. 특히 애플사와 경쟁관계에 놓여있는 ‘삼성’이 그 배경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다.
잡스의 ‘6주 시한부’ 논란만 해도 그렇다.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뉴욕 타임즈 등 외신에 비하면 우리 언론은 지나치게 논란을 부추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백악관에서 배포한 자료사진을 두고서도 ‘오바마, 투병 중인 스티브 잡스와 마지막 인사?’라거나 ‘스티브 잡스, 죽기 전 마지막 인사?’라는 제목까지 등장했다. 선정성도 선정성이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 측면으로도 결례가 되는 셈이다.
참으로 엄청난 창의성(?)이 발휘된 결과물이라 하겠다.
사실을 파악하려는 노력보다는 선정적인 억측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역력한 이런 제목이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문득 부끄러웠다. 그 어이없는 상황이 대한민국 국민 정서의 일단으로 비춰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마저 일었다.

언론 보도 문제는 비단 스티브 잡스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국내 사레만 해도 지명도 있는 인물들이 그릇된 언론보도로 인한 구설수로 치명타를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결코 간단하지 않은 폐해로 당사자가 당하는 피해규모는 상상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심할 경우 하루아침에 한 인간의 인생항로를 뒤바꾸는 일도 부지기수니 하는 말이다.
그 여파 때문인지 왜곡, 오도 등으로 대표되는 황색저널리즘의 참을 수 없는 천박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 현실이다. 건전한 매스미디어까지 혐오 대상으로 전락될 만큼 언론에 대한 기피의식이 날로 심각해져가고 있다.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론 간 경쟁이 문제다. 경쟁이 과열되면서 특종에 대한 조바심이 생기고 이로 인해 광고시장의 압박 등을 이유로 언론이 사회의 흉기로 변질되는 현실을 목격하게 되는 일이 비등해지고 있다. 심각한 양상이 아닐 수 없다.

평소 친분이 있는 판사 한 분이 100건의 사건 중 99건을 명판결하고 나머지 한 건을 실수하기보다는 99건을 평범하게 판결하더라도 단 한 건의 실수를 막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언론에도 고스란히 적용시켜야 할 불문율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많은 특종으로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해도 한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는 오보를 냈다면, 특히 의도적으로 행해진 결과라면 언론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깊은 사고가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인명을 대상으로 한 보도 접근은 아무리 신중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작은 탐욕이 돌이킬 수 없는 패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자기 편의만 충족되면 남이야 어찌되던 알 바 없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바로 서고자 깨어있는 언론의 역할이 더 없이 소중해지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병가에 들어가 있는 그의 쾌유를 빌고 있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그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하루 빨리 병마를 이기고 자신의 일터로 되돌아오길 바란다.

아이폰(애플사)과 갤럭시폰(삼성)의 대결 양상이 대한민국 언론의 국제적 ‘망신살’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노파심에서 이 글을 썼는데 기우였으면 좋겠다.

(2011. 2. 20)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18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졸업, 그 시작의 의미

졸업, 그 시작의 의미

바야흐로 졸업시즌이다.
대한민국 전역이 장사진을 이룬 졸업식 물결로 가득 채워진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도 덩달아 바빠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졸업식장을 넘나들며 소화해야 할 살인적인 ‘축사’ 일정이 어느 결에 정기적인 연례행사가 되고 말았다.
경민학원만 해도 10여개가 넘는 학교기관이 있다. 거기다 인근 학교 졸업식에 까지 불려 다니는 일정을 생각하면 얼마나 숨 가쁜 스케줄을 감당하고 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졸업식 풍경은 거의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진부하고 또 여전히 새로운 기운이 넘치는 절묘한 조화로움이 졸업식을 떠 받치고 있다.
가장 진부함을 드러내는 건 아무래도 축사 부분이다.
대부분 고정된 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로 시작해서 희망, 미래, 비전, 포기하지 않는 삶의 목표 설정 등으로 이어지다가, ‘인생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많이 벌었나, 얼마나 큰 권력을 쌓았나, 얼마나 명예를 높였나가 아니라 얼마나 인간다운 삶을 살았느냐에 달려있다’(내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다)로 마무리되기 일쑤인데 오래 전과 비교해서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느낌이다.
반면 졸업식마다 매번 주인공이 바뀌고 주변 환경과 여건의 변화로 생동감 넘치는 졸업현장은 신선도 높은 새로움을 제공한다. 개인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달라지고 그런 만큼 세상을 향해 첫걸음을 떼는 졸업생들에게 사회에 대한 합리적인 관심기준을 주문하는 합리적인 현실을 만나는 반가움을 맛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진부와 참신이 공존하는 아이러닉한 공간이라고나 할까.

진부함을 벗지 못한 축사로는 졸업생들에게 구체적이고 확실한 목표의식을 심어주기에 역부족이지 싶다. 유행이 지나쳐 상투적이 된,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독창성이니 창조성이니 하는 언급들만으로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알게 하기는커녕 무지개만 쫓는 오류를 부축일 수도 있다는 걱정이 있다.
그래서 졸업식 축사에 나설 때마다 많이 고민하게 된다.
짧은 시간 동안 전하고자 하는 나의 의도가 (졸업생들에게)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건지,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가능성과 미래를 준비하는 그들에게 아주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있는 건지 명확한 가늠이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씩 내 자신의 졸업식을 돌이켜보기도 한다.
초중고 시절의 교장선생님들과 담임선생님들의 당부 말씀들을 떠올리다 보면 우리를 바르게 가르치시고자 했던 은사님들의 노심초사를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대학과 대학원 졸업식 축사 중에서 각별한 기억이 되어 내 삶의 고비마다 큰 힘을 발휘하는 당부 말씀들이 있다.
김상협 총장님의 '지성과 야성론’도 있고 88년 美 대선 당시 하버드 출신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듀카키스의 ‘unbelievable people' 등도 특별히 여운을 남기는 축사다. 하버드 졸업시장에서 ’세상에 던져진 여러분들에게 뭔가 확실하고 분명한 방향타를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잘해만 달라고 부탁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이해해 달라‘는 취지로 심금을 울렸던 총장님 말씀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는 나만의 '명 축사'다.

지금은 나 자신 역시 대학 총장 직함으로 졸업식을 치르고 있는 입장이다. 그래서인지 오래 전에는 철없이 놓치고 말았던 은사님의 ‘속울음’이 내포하는 깊은 뜻이 헤아려지는 것 같다.
특별히 세상 일이 더 어려워진 요즈음이고 보니 제자들에게 확실하고 분명한 방향타를 제시해주지 못하고 일방통행식 단어 몇 마디로 눙치고 있다는 자괴감이 적지 않다.
졸업식을 마치고 학교를 떠나는 제자들이 물가에 내놓는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예전에 내 은사님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제자들을 위한 기도 제목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간절히 간구한다. 한발은 과거에, 나머지 한발은 미래에 의지하고 과거와 미래를 잘 조율하면서 현명함으로 이 어려운 현실을 잘 헤쳐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매달려보지만 선생의 도리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내려놓기엔 미흡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인생은 어차피 기차길 처럼 두 개의 레일 위에서 존재하는 과정인 것을.
한 쪽 레일에서는 세상 밖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일들을 지켜보고 또 다른 레일에서는 깨우치고 배려하고 지탱하고 붙잡는 인간 내면의 존립기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만으로는 그 누구도 도리 없음을 받아들이고 삶의 질서에 순응해야한다는 생각이다.

사랑하는 제군들이여,
이제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걸음마를 시작한 그대들의 졸업을 축하한다.
그러나 푸른 그대들이여,
세속적인 성공 개념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 일이다.
자신의 삶을 운용하는 이는 스스로 밖에 없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용맹스러운 실천과 우주를 품는 지혜로 이 넓디넓은 세계를 한 가슴에 받아 안길 바란다.
자, 시작이다.


(2011. 2. 18)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16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지구촌 시대

지구촌 시대

호주 브리즈번 시를 방문 중이다.
브리즈번 시 명예대사 직분을 인연으로 campbell newman 브리즈번 시장의 초청을 받아들이면서 생긴 일정이다.

이곳에 와 보니 오나가나 자연재해가 문제시 되는 현실을 절감하게 된다.
유례없는 한파에 이어 때 아닌 폭설 등 이상 기후 현상으로 난감해져있는 우리나라 못지않게 홍수가 쓸고 간 브리즈번 시가지의 충격 역시 간단치 않은 분위기였다.
채 가시지 않은 홍수피해 여파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시가지 곳곳에 남아있는 당시의 참화 흔적들이 이상기후로 인한 자연재해가 더 이상 특정 지역에만 국한된 현실이 아님을 실감케 했다. 강들의 범람으로 12,000여채의 집들과 2,500개소의 일터가 완전 침수 됐고 15,000채의 집들과 2,500개소의 일터가 부분 침수 되는 등 후유증으로 인한 여파가 확연한 피해의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60억 달러를 상회하는 재산 피해에 비해 인명피해는 20여명 정도에 그쳤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뉴먼시장은 만나자마자 타이페이나 고베 등 각 도시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관심이 별로 없다며 서운함을 내비쳤다. 한국동란 16개 참전국 중 하나라는 과거의 역사를 은근히 상기 시키기도 했다. 사상 최악의 구제역 파동으로 온 나라가 근심에 빠져있는 대한민국 사정을 알 바 없으니 서운할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분하게 여러 모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우리 국내 사정을 전하고 이해를 구했더니 금방 알아듣는 눈치였다.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다.
독불장군 식의 셈법으로는 버틸 재간이 없다. 서로 돕고 살아야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기회의 땅인 호주는 눈여겨 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천연자원이나 발전 가능성만으로도 호주와의 관계 설정은 굉장히 중요한 당면과제다.
서호주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제2의 광산개발 붐' 등에 힘입어 연 3%대의 경제성장을 하는 등 호황을 맞고 있는 호주 경제 사정도 호주의 가치를 높여주는 정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민 도 호주와의 적극적 유대형성의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 등 주변국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호주를 상대로 강력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반해 아직도 미흡한 실정인 우리로서는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100만을 육박하는 중국인 이민자에 비해 한국의 이민자 규모는 이제 겨우 10만 문턱을 넘었을 뿐이다)
백호주의로 폐쇄적 이민정책을 견지해왔던 호주가 문호를 개방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1000만명을 육박(그래봤자 우리 수도권 인구 정도에 불과하다. 남한 면적의 80배에 달하는 호주 전체 면적을 생각하면 인구밀도 차이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하는 호주의 인구 증가율이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게 된 것도 적극적인 문호개방 효과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는 집권 노동당을 중심으로 ‘인구를 빨리 늘려 경제발전을 도모’하겠다는 러드 전 총리의 ‘빅 오스트레일리아’ 정책 대신 이민자수를 제한하기도 했는데 인구감소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이후 숙련공 위주의 이민자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기조를 바꿨다.
호주와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긍정적 사인이다.

켐벨 뉴먼 시장은 엔지니어 전문의 군인 출신으로 특유의 꼼꼼함과 겸손함을 강점으로 하는 동양식 사고를 소유했는데 유연한 사고력 못지않은 적극적 시정 운영 스타일로 눈길을 끌었다. 특히 거침없는 소신으로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리더십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런 켐벨 뉴먼 브리즈번 시장으로부터 열정의 리더십을 발견하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 다. 이번 홍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열정적으로 일처리에 임하는 그의 리더십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다. 홍수가 도시 전체를 불행에 빠뜨리긴 했지만 뉴먼 시장 개인에게는 결과적으로 호재가 된 셈이다. 그 덕분에 성공적인 홍수관리 치적에 대한 긍정적 평판이 그의 재선 가도에 청신호로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브리즈번 시의회에서 리더십을 주제로 강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켐벨 뉴먼 시장의 리더십을 모델로 스피치 자료를 정리했다. 강연에서 서로가 어렵고 힘들 때 도움을 줘야 하고 위기관리 국면에서 리더십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는 세상 이치를 새삼 강조했는데 참석자들도 크게 호응하는 분위기였다.

브리즈번 시는 오는 6월, 아시아태평양지역 지방도시 정상회의(Asia Pacific Cities Summit)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2년마다 열리는데 2009년도에는 우리의 인천광역시가 주관해서 화제를 모았던 기억이 난다.
내게도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는데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호주와 무역교류에 관심 있는 아시아태평양 전역의 기업들을 위해서 상업성장, 무역 파트너십 및 경제적 성과를 내겠다는 그의 의욕과 각오가 대단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 지자체와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했다.
브리즈번 시는 대전시와, 퀸즈랜드 주정부는 경기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생각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대전시장의 경우 소속 정당이 바뀌고 나니 예전보다 더 소통에 애로점이 많아졌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명예대사로서 나의 역할이 필요한 대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와의 교류를 통해 대한민국 역량을 커질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양국 도시를 잇는 원만한 완충 역할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이 아닌가 싶다.
지구촌 시대의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멋지게 해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2011.2.14)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8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출사표

When I Born, I Black

When I Grow up, I Black

When I Go in Sun, I Black

When I Scared, I Black

When I Sick, I Black

And When I Die, I Still Black



And You, White Fellow

When You Born, You Pink

When You Grow up, You White

When You in Sun, You Red

When You Cold, You Blue

When You Scared, You Yellow

When You Sick, You Green

And When You Die, You Gray

And You Calling Me Colored?


UN이 선정한 올해 최고의 동시
아프리카의 한 어린이가 쓴 동시입니다.



출사표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문화가 겹쳐서 빚어내는 하모니’
아프리카 문화를 접하는 개인적 소회다.
박물관에 소속된 아니카 공연단원들을 통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들의 검은 순박함도 내 마음을 매료시키는 강력한 힘 중 하나다.
그렇게 검은 대륙의 매력에 빠져있는 요즈음이다.
새롭게 눈 떠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생각보다 다양한 국가들이 나름의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형성한 문화가 독특한 개성을 표출하고 있어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다.
아프리카예술박물관(포천시 소홀읍 무림리 소재) 이사장직을 맡게 된 인연 덕분이다.
아시아 다음으로 넒은 면적에 54개의 국가와 세계 인구 14.8%에 달하는 10억여 명의 인구가 어우러진 아프리카.
여전한 궁핍과 굶주림이 지배하는 현실이지만 희망이 넘치는 아이러니의 현장이다.
전 세계 석유의 1/10, 광물자원의 1/3분을 품은 '자원의 보물 창고'로 세계 각국의 자원개발경쟁의 각축장이 된 지 오래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기회의 땅으로 각광을 받으며 다원주의(혹은 탈식민주의) 부흥의 기대주로 급부상 중이다. 흑심(?)을 품은 세계 각 국의 치열한 지원 경쟁이 줄을 잇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곳도 바로 아프리카다.
아프리카 예술이 우리에게 소개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인류학자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19세기 전까지는 아프리카는 문화의 간판조차 부여받지 못한 처지였다.
20세기 초반 무렵 유럽에서 아프리카 조각의 특이한 조형에 주목하면서 비로소 관심을 받기 시작했는데 짐바브웨이가 그 원류다. 그 중에서도 이 나라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쇼나 부족의 조각 작품이 최고의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할 것이다. (우리 아프리카예술 박물관에서도 상당수의 쇼나 조각품 소장하고 있으니 구경들 오세요) 무엇보다 정이나 망치 등 전통적 도구만을 사용한 ‘수작업’이어서 기계 가공 과정이 주를 이루는 서구의 조각과는 느낌부터가 많이 다르다.
이 밖에도 아프리카의 문화 예술을 대변하는 다양한 자원들이 새로운 기회를 엿보며 미래의 가능성으로 재탄생 되고 있는 중이다.

엊저녁, 우리 박물관에서 주한 아프리카 16개국 대사를 위한 만찬 행사를 열었는데 호응이 좋았다. 생각의 틀을 확인 하는 등 여러 모로 유익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아프리카 문화예술 발전 방향에 대한 의견이 교환되는 가운데 아프리카 출신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경민대학과 아프리카예술박물관 전시공간을 활용한)나 퍼포머들의 한국 방문 및 교환 프로그램, 경민대학과의 학생교류 등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모국의 문화예술에 대해 갖고 있는 아프리카 대사들의 자부심은 엄청났다.
자연음악에 대한 자긍심이 특히 더 했다. 전자음을 중심으로 한 문명음악이 발달을 거듭하고 있지만 아프리카의 자연음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논리였다. 종국엔 아프리카 자연음으로 되돌아오게 돼 있다는 결론이었다.
피카소와 마티스 등 대가들의 예술이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자랑도 잊지 않았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예술적 감성이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피카소가 걸작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아프리카 마스크 이미지를 접목시킨 것을 비롯해 야수파, 입체파, 다다이스트,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이 아프리카 이미지를 즐겨 사용했거나 아프리카 조각의 양감을 도입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세네갈 대사 등 일부 대사들은 각 나라 별로 아프리카예술박물관과의 개별 회합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각국의 특성에 맞는 심화 프로그램 등을 논의해보자는 적극적인 제안이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어 3월 경 다시 한 번 모임을 갖고 구체적인 일정을 논의하기로 했다.

만찬을 끝내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이런 기회를 갖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아프리카 대사들도 아프리카예술박물관과의 교류를 통한 자국 발전 방안에 기대감을 갖는 듯 했다.
미국이나 중국 등의 아프리카 투자가 인도주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프리카의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둔 자국의 선점을 노린 선투자일 뿐이다.
우리도 아프리카의 엄청난 자원 개발을 외면할 게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는 투자 행보를 보여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의 만남이 지금은 비록 민간외교 차원의 적은 출발에 불과하지만 대한민국 아프리카 외교 자원의 교두보 역할은 물론 그보다 더 한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 아프리카 예술 박물관의 임무가 막중해진 것 같다.

열심히 해보겠다는 다짐을 담다 보니 이 글이 아프리카 예술박물관 이사장으로서의 약식 출사표 처럼 돼 버렸다.
정말 잘 해보고 싶은 생각이다. 많은 지도 편달을 부탁드린다.

(2011. 2 .8)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6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개헌, 지금은 아니다

개헌, 지금은 아니다

대통령에 이어 여당 내 주류 진영이 본격적인 개헌 세몰이에 나서는 모습이다.
35명의 여당 의원들이 모여 개헌 추진의 뜻을 함께 하는 간담회를 열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주체가 누가 됐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한 정치적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 라는 개헌의지를 반박할 생각은 없다. 그 역시 국가와 국민을 위한 충정에서 비롯됐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녹록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 개헌 적기를 놓쳤다는 생각이다.
싸늘한 민심도 어두운 전망에 일조하는 분위기다.

대통령 자신의 임기를 줄이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정권 초기에 개헌을 추진했다면 혹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의 개헌 언급은 정부와 여당의 흑심으로 의심받을 수 밖에 없는 불리한 정황이다.
1948년 첫 헌법이 제정된 이래 9차례에 걸친 개정 과정에서 단 한차례만 빼고는 전부 정략적인 의도로 개정되는 과정을 지금껏 지켜본 셈이니 오죽할까 싶다. 더구나 구제역 피해, 물가폭등, 전세대란 등에 짓눌려 있는 국민들이다. 그런 국민들 귀에 정치권의 개헌 논의가 제대로 들어올 리 만무다.
늘 그렇듯 기득권 다툼을 위한 이전투구로 싸잡혀 욕먹기 딱 좋은 구조다.
이 같은 정황은 개헌을 찬성하는 의원들이 안고 있는 고민거리일 것이다. 설 연휴 동안 지역 민심을 체감했다면 그 공포심(?)은 더 할 것이다. 대부분의 민심이 개헌과 동떨어져 있을 텐데 조만간 선거를 앞두고 있는 입장으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터일테니 말이다. 국민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행위에 뭐라고 마땅히 변명할 거리도 별로 없을 것이다.
정치권에 대한 깊은 불신도 만만치 않은 장벽 중 하나일 것이다. 국민에게 불신을 받는 의원들이 권력과 관련된 개헌을 이야기하면 외면당하기 쉬울 거라는 한숨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문제는 정치권이 국민으로부터 얼마나 신뢰를 받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신뢰를 잃어버린 정권을 향한 국민의 냉담함이 얼마나 매몰찬지 앞서의 여러 정권들을 통해 익히 경험한 바다. 그런데도 실패의 역사는 늘 똑같이 반복되기 일쑤니 모를 일이다.
이번에도 익숙한 풍경이 개헌 정국을 둘러싸고 펼쳐지고 있다. 일련의 개헌 주장 논거를 보면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개헌 실패를 '반면교사'가 아닌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는 우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참여정부 때도 원포인트 개헌 제안이 실패한 적이 있다. 결정적 이유는 노 전 대통령을 신뢰하지 않고 등을 돌렸던 민심에 있었다. 당시 청와대나 대통령이 수없이 진정성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개헌 추진 배경에 뭔가 있을 거라며 정략적 노림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게 되기까지 정계개편 논의에 개입하는 등 정파적으로 비칠 수 있는 행보를 보였던 노 전대통령의 자업자득인 측면도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개헌 정국을 주도하는 듯한 언급 보다는 조금 다른 각도로 지난 반 방송 좌담회 기회를 활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대통령께서 진정으로 개헌을 국익을 위한 기회로 생각하신다면 이런 내용으로 국민적 동의를 구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 개헌이 국익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아젠다임에도 취임 초에는 다른 일들이 많아서 손댈 수 없었다. 그런데 굉장히 민감한 주제가 되다보니 지금의 내게 굉장히 벅찬 과제가 되어버렸고 자칫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는 환경에 처하게 됐다. 그래서 다음 정권이 개헌문제를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다음 정권의 개헌 작업에 일조하는 의미로 개헌에 대한 모든 가능성과 찬반 논리 등을 집대성해서 개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침서를 만들어 보겠다"
만약 이런 식의 처세를 보이셨다면 대통령을 향한 정략적이거나 정파적이라는 의구심도 불식시킬 수 있고 또한 마무리할 일들 많은 임기말을 다른 전임 대통령들 보다 훨씬 알차게 보낼 방법이라고 본다. 특히 임기 말 과제를 마무리 못하고 물러나는 불행한 결과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가장 획기적인 안전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개헌의 당위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그 진정성에 신뢰가 실리지 못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진정성을 평가받고 싶다면 다음 정권에서 개헌 추진이 용이할 수 있도록 지금은 필요한 여건을 미리 준비해 놓는 정도로 방향을 재 설정하는 게 현명하다. 혹여라도 전략적인 접근으로 개헌 정국을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무모함에 불과하다.
파국을 각오한다면 모를까.
개헌 정국으로 가뜩이나 지쳐있는 국민들을 흔드는 불행한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2011. 2. 7)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5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그래도 희망이다

그래도 희망이다


화려한 귀환이었다.
통기타 하나로 70년대를 풍미했던 노장 가수들(음악다방 세시봉의 대표가수 그룹이었던 이장희,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이 여전히 녹슬지 않은 솜씨로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현장은 놀라웠다. 설날 연휴 방송가를 강타한 ‘세시봉 콘서트’ 얘기다.
나 역시 공연이 방영되는 텔레비전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나로 하여금 40년 이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젊은 날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했기 때문이다. 통기타와 청바지. 더벅머리. 생맥주 등으로 대변되는 젊음의 상징들을 통제하던 기성세대에 맞서 그나마 숨 쉬고자 안간힘을 쓰던 그 때는 세상 전부가 암울하게만 보였다. 그 무엇도 내 청춘을 구원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에 짓눌려 있었다.
그런데 ‘세시봉 콘서트’의 감흥이 아프고 즐겁고 했던 그 시절을 아련한 그리움의 모습으로 되살아나게 했다. 추억의 이름이 역시나 힘이 세다.

추억이 상기시킨 지난 시간들이 또 다른 관점으로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 그리고 다음 세월을 위해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던져준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가장 긍정적인 측면으로 평가할 수 있는 변화는 경제력 향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개발도상국 신분으로 경제원조를 받던 과거의 대한민국을 생각해보면 보다 명백해지는 사안이다. 실제로 OECD 10위권을 넘보는 경제대국으로 거듭나 있는 위상답게 세계 시장에서 ‘made in Korea'의 깃발이 활개를 치고 있다. 욱일승천하는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모두들 박수를 치며 경이로움을 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변국들에 비해 꽤나 빠르게 진행된 민주화 속도도 국제사회 속에서의 대한민국 위상을 올려주는 지표 중 하나라는 생각이다.
잃은 것도 많다.
사회 전체가 개인주의로 치닫는 바람에 사회적 갈등이 상실감을 심화시키고 있다. 국민 상호간의 간극이 넓어지는 바람에 사회적 동질감이나 교감의 영역이 점점 황폐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소통부재로 인한 단절이 자살이나 이혼 그리고 범죄 비율의 수치를 높이는 주범이 되고 있는 현실도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식의 변화들이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던 가치 판단의 기준까지도 달라지게 만들었다.
상호간의 신뢰, 공정과 정직, 성실 등의 미덕이 한 사회의 영속적인 발전을 위해 사회적 덕목으로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무심코 넘어갔을 사안들이 사회적 빅 이슈로 부각돼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진 것도 같은 현상이다. 물질만 충족되면 별 문제 없었던 과거에 비해 미래사회로 갈수록 정신적 영역의 가치가 더 고부가가치로 평가되는 사회적 환경변화가 불가피해졌다고나 할까. 이제는 품격있는 삶의 질을 요구할 만큼 국민적 의식 수준이 달라진 것이다. 위정자에게 요구되는 도덕성 수위도 이전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대통령의 신년 좌담회가 당초 의도한 국민과의 소통을 이루지 못하고 표류되는 현상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충청권 과학벨트 공약과 관련, 선거 당시 공약 사항을 번복하는 듯한 뉘앙스의 대통령 발언은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 특히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한 의도였다는 식으로 표현한 대통령 발언은 사려깊지 못했고 논란을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다. 민심 파악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었나 싶을 정도로 민심과 괴리된 발언이 걱정스럽다.

그러면서 답을 얻은 게 있다.
21세기 대한민국 미래가 더 이상 물질의 가치척도를 기준으로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부를 어떻게 더 키워내느냐’ 거나 ‘배분되는 부의 사이즈가 얼마나 더 커질 수 있느냐’에 관심을 가질 단계가 이미 지나버릴만큼 대한민국 국민의 성숙해진 민도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봤다.
지금은 무엇보다 사회적 구심점을 모아가는 일련의 회복 운동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앞으로는 각 계층 간 간극으로 인한 갈등 해소가 무엇보다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계층 간 간극을 줄이는 것은 물론 신뢰감을 회복하고 더불어 살기 위한 기득권의 노력들이 GNP지수를 높이는 것보다 훨씬 더 절실히 필요하고 가치있는 정치적 과제로 인식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숙성시켜야겠다는 생각이다.
북한 주민의 경우 남북통일로 기아상태를 벗어나게 되고 물질적으로 조금 더 풍요로워진다한들 자존감이 훼손되거나 이류시민이 되는 느낌이라면 우리가 바라는 번영과 희망이 아닌 또 다른 갈등과 분쟁의 씨앗을 잉태한 통일이 될 게 뻔하다.

“국민들 속여서 돈 벌려는 악덕업주 정치인 사회 지도층 인사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있게 하면 안된다”
대통령 말씀대로 이제는 이익을 위한 거짓말은 물론 선의의 거짓말까지도 -그 주체가 기업가가 됐건 노동자가 됐건 정치인이 됐건 과학자가 됐건-우리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는 그런 시대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거짓말 뿐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거나 타인을 무시하는 행태 역시 선진사회로 가는 길목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야 할 구태임을 확실히 인식하자.

(2011. 2. 5)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4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공동체에 대한 단상

공동체에 대한 단상


설날 아침, 올 설은 유난히 명절 기분이 난다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께서 해 주신 설빔 덕분이었다.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명절엔 한복을 입어야 한다고 채근하시는 바람에 한복을 입었는데 착용감이나 보온성 등 여러 모로 좋은 점이 많았다. (옷고름 매는 법을 몰라 난감해 하다가 아버지께서 전수해 주신 노하우로 해결하는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무엇보다 새 옷을 입을 수 있는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던 어린시절 추억을 되살릴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세배를 올리고 세배를 받고, 모처럼 만나는 친척들과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나누는 푸짐한 아침 식사 그리고 우리 집안의 설날 공식게임인 이북식 전통 윷놀이가 펼쳐지는 명절 풍경은 예년과 다름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윷놀이를 한게임 하고나니 식구들이 전부 없어져 버렸다.
그나마 남아있는 가족들도 각각 개인일정(?)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거실에서 축구 시합을, 어머니는 안방에서 연속극 재방송을, 나는 건넌방에서 조영남, 김세환, 윤형주, 송창식 등 7080 가수들이 출연한 '세시봉‘을 보느라 각자 텔레비전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고 아들은 아들대로 쪽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문득 그런 우리 집안 풍경이 대한민국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통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저마다 단일지수로 겉도는, 요즘 명절 풍경이 우리집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촌조카들까지 모였지만 정작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내 아이들은 얼굴을 볼 수 없거나 공식일정이 끝나자 저마다의 세계에 빠져 고립을 자처하거나 제 볼일을 보러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이야말로 현대인의 고독한 초상을 대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고 ‘옛날에는...’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봤자 뜻대로 될 수도 없다. 어차피 시대적 상황이 변하고 있고 핵가족 사회의 분열이 가속화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삶이 중요시되는 사회로 변해가는 21세기에 우리가 살고 있음이다.

21세기에 걸맞는 바람직한 가족상을 생각해 보게 된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풍토가 대세이기 때문에 구성원 저마다의 개성 존중을 기본원칙으로 삼아야 하는 건 물론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개인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배려하되 가족이라는 공동체 개념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연구다.
개인보다는 공동의 힘이 확실히 크다는 점에서 개인 위주로 치닫기만 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동 아젠다와 관심사를 가진 가족 공동체의 결집된 힘이 개인의 역량을 발휘하는 데 있어 시너지를 주는 배경이 되도록 지혜를 모으는 일은 더 없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개인 존중만 앞세우다가 공동체를 배제하는 어리석은 선택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국가 공동체를 구성 과정에서도 이와 유사한 배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개인들이 저마다의 영역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며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국가의 기능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고 그것이 곧 국력의 실체가 되는 것이다.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희생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그럴 땐 개인적 희생으로 이어지더라도 감수하는 게 당연하다. 모두가 자기하고 싶은 일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국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동일한 목표를 이루고자 할 때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가 더 없이 중요한 이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국은 방어를 위해서 5천킬로의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러나 로마는 개방을 위하여 15만킬로의 도로를 만들었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중국과 로마의 운명을 단적으로 비교한 대목인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울림이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세계를 향한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하도록 하겠다던 로마의 목표는 로마를 세계의 중심국으로 잇는 ‘‘도로(道路)’가 된 반면, 기득권 수세에 급급했던 중국의 만리장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도로(徒勞)’가 되고 말았다. 합리적인 노력은 건강하고 발전 가능성 있는 가정이나 국가를 만드는 귀한 자질로 활용될 수 있지만 합리적이지 못한 노력(만리장성 축조를 위해 들어간 그 수많은 노고들을 생각해 보라)의 말로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을 짓건 도로를 만들건 저마다가 처한 위치에서 추구하는 목표점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다만 고유의 영역을 고집하기보다 소통과 대화를 통해 상황과 여건에 맞는 융통성이 일에 성패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지 알아야겠다.

신묘년 한 해 동안 개인의 발전과 독창성을 유지하면서도 가정이나 국가 공통의 지향점을 함께 채워나갈 수 있는 그런 인적자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러기 위해선 내가 잘 할 수 있는 역할부터 연구해 보면 어떨까 싶다.

(2011.2.4)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2일 수요일

이집트 사태, 불구경 아니다

이집트 사태, 불구경 아니다

자유를 향한 인간의 의지 하면 ‘브레이브 하트’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주인공 맬 깁슨이 유혹에 굴하지 않고 ‘프리덤(freedom)’을 외치며 숨을 거두는 장면인데 인간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떠올릴 때마다 강렬한 여운이 여전하다.
자유를 향한 인간의 의지는 아마도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큰 선물이 아닌가 싶다.
일시적으로 억압당하고 무시될 수는 있어도 결국 자유를 향한 인간의 의지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 같다. 정치권력이나 종교권력들이 무력은 물론 감언이설까지 동원해 인간의 자유를 유린하려 들었지만 종국엔 항복하고 말았던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중동에 자유의 바람이 불고 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물결이 이집트를 넘어 중동 전체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심상치 않다.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대선 불출마 선언도 약발이 먹히지 않고 있다. 튀니지처럼 대통령의 영구퇴출을 보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경한 기세다. 이 여파로 요르단 국왕이 내각 개편을 단행하고 예멘 대통령도 임기 연장이나 권력세습은 하지 않겠다며 납작 엎드린 상태다.
중동 전체가 불안해 보이기는 하지만 가장 다급한 사정을 보이는 곳은 이집트다.
암살당한 사다트 대통령 이후 이집트를 쥐락펴락해 온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장기집권이 초라한 독재자의 말로로 마감될 조짐이 역력하다. 자유를 갈구하는 민중의 봉기 앞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등을 돌려버린 미국의 분명한 선택이 풍전등화의 기로에 놓인 이집트 운명의 향방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인근의 카다피나 북한의 김일성 왕조에 비하면 훨씬 짧고 더 철저하지도 못한 무바라크의 독재정치가 이렇게까지 참담하게 파국을 맞게 될 줄 몰랐다. 생각보다 빠른 시기와 너무도 무기력한 결말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중동의 민주화 바람도 빠르게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독특했던 그동안의 집권형태로 인해 국민의 자유를 더 많이 허용하는 쪽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의 고립에서 또 다른 독재자의 마지막을 예측하게 된다.
이제 정말 지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김일성 왕조의 마지막도 머지않은 것 같다. 이집트의 혼란과 북한정권이 오버랩 되면서 북한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과문하긴 하지만 북한에 이미 여러 번의 정변이 있었고 무수히 많은 소외계층과 불만 세력들이 분출할 구멍만 찾고 있다고 듣고 있다. 게다가 나이어린 김정은의 3대 세습이 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돼 있는 현실도 북한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소라 하겠다.
코앞으로 다가온 북한정권의 말기현상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왕조의 마지막이 어떤 식의 결말을 갖게 될지는 중동의 그것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하고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북한 붕괴가 생각보다 우리에게 예민하게 작용할 것이고 그 시기 또한 더 빠르게 앞당겨질 것이라는 걱정이 많은 게 사실이다. 사전에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분명 있다.

비관적인 전망대로라면 김정은 세습 이전에 이집트 사태 같은 혼란이 닥치게 된다는 생각이다.
온 국민이 정신을 모아서 북한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자. 반만년 역사를 함께 한 우리민족이요, 피를 나눈 형제인 북한동포를 거두는 건 분명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닥칠 역사의 파고를 순조롭게 넘을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야 한다.
결국 어떤 형태로든 북한 정권 붕괴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북한의 혼란기가 한반도의 긴장상승으로 이어지는 데 있어 최소한의 에너지가 소모되도록 모색하고 준비하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 싶다.

(2011. 2. 3)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1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입양

입양

우리나라가 중국, 이디오피아, 러시아에 이어 미국 입양 순위, 4위를 기록했다는 뉴스를 봤다.
다른 일도 아니고 인구가 남아돌아가는 중국이나 기근에 시달리는 이디오피아, 사회적 불안에 시달리는 러시아 같은 나라들과 함께 입양아 최다 수출국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니.
부끄럽고 아팠다.

해외입양을 줄이려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동 수출국’이라는 불명예를 여전히 달고 있는 우리다. 1955년 해외 입양이 처음 시행된 이래 지금까지 16만 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낯선 이국땅으로 넘겨졌다. 많이 감소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연간 평균 1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입양아라는 이름으로 수출되고 있는 현실이다.
믿고 싶지 않지만 ‘돈’이 ‘아동 수출국’ 오명의 총체적 배경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동 1인당 800만~1200만원에 달하는 해외입양 수수료 수입 때문에 입양기관들이 해외입양을 부축이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까지 나서서 돈 때문에 아이들을 팔아넘기고 있다는 비난을 퍼부어 댈 정도다.
여러 정황들도 제시되는 상황이니 괜한 음해는 아니지 싶다.
사실이라면 이대로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국가의 자존심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라고 본다.

바야흐로 인구가 경쟁력인 시대를 살고 있다.
강대국이 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인구 1억이 넘어야 한다는데 우리의 경우 남북통일을 전제한다 해도 인구 7천을 넘길 수 없다는 진단이다. 저출산 여파로 인구감소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는 우리로서는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14년이면 취학 아동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관측 역시 심각성을 더해주기는 마찬가지다.
인구 문제가 우리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이니만큼 해외입양을 우려하는 시각은 지극히 당연하다.
무엇보다 귀중한 인적자원이 외부에 유출되는 빌미가 된다는 관점에서도 해외입양을 적극 검토해야 할 이유 또한 명백해진다. 자칫 대한민국 미래에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찍이 입양의 인권침해적 요소 때문에 해외입양을 법으로 금지한 루마니아나 해외입양 중단 선언한 라이베리아, 입양 수속 신규 개시를 금지시킨 과테말라의 결단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동안 국외입양을 금지하는 입양특례법 개정안 등 해외입양 억제를 위한 일련의 노력들이 정치권이나 민간기관들을 중심으로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 대부분이 일시적 현상이나 무위에 그치기 일쑤였다.
아무런 결과물도 남아있지 않은 현실을 좀 더 직시할 필요가 있다. 좀 더 적극적인 시도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해법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차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순혈주의에 대한 반성부터 선행돼야겠다.
폐쇄적인 순혈주의가 대한민국 미래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이 더 이상 없는 현실을 깨닫는 게 순서라고 생각한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생각부터 버리자. 자식에게 물려줄 유산의 부피를 생각한다면 입양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당연시되는 외국의 경우 재물보다 더 값진 유산으로 자식의 삶의 질을 높이는 부모의 지혜로움이 돋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로 주위에서 유산 상속으로 자식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땅을 치는 부모의 후회를 목격하기도 한다. 재산 때문에 자식들이 원수지간으로 갈라진다면 재벌의 삶인들 행복할까 싶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통한 사회적 차원의 캠페인이 보다 확실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장에서 희망을 본다.가슴으로 낳은 자식을 여럿 기르며 대중들에게 참 행복의 의미를 전하고 있는 인기 연예인 차인표 신애라 부부나 션 정혜영 부부의 입양 실천이 그 사례다. 그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여러 측면에서 유익하고 유의미한 사회적 반향을 남겼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들이다 . 그들의 실천이 국내 입양 환경에 기여한 바는 참으로 지대하다 할 것이다.
그 밖에도 어차피 진행된 해외 입양아에 대해서는 각별한 관심으로 ‘뿌리의식’을 고취시키거나 ‘홈커밍 데이’ 등의 기획으로 세심하게 배려하는 후속 조치들이 이어져야겠다.
이중 국적에 대한 전향적인 발상도 인구 감소 대책을 위해 고려해 봄 직하다. 사교육비의 문제도 심각하고,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문제도 심각하게 따져 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세계 최강의 IT산업과 자동차 산업을 기반으로 삼아 경제대국으로의 비상은 공허한 구호나 수치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성숙한 의식이 기초한 자질이 있어야겠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책임감이야말로 선진국민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 자질이 아닐까 싶다.
천민 자본주의가 아닌 진정한 선진국 대열 합류를 위해 입양에 좀 더 깊은 관심을 표명해 보자.
나쁘지 않을 것 같다.

(2011. 2. 2)
...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