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30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이제 그만

이제 그만




최진영씨의 자살 소식이 또 다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누나 최진실씨를 잃은 상실감과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 그의 극단적 선택의 원인이었다는 소식이 안타까움을 더 해주는 것 같다. 세상에서 둘도 없이 의지하던 누나의 부재가 그의 삶에 가했을 압박을 생각하니 애잔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누나를 대신해 누나가 못다 이룬 꿈이나 남겨진 어머니와 어린 조카에 대한 책임감으로 좀 더 적극적인 삶의 방향을 설정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가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삶과의 정면승부를 선택했더라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졌을거라는 생각에 아쉽기 짝이 없다.

세상을 향해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환경도 그를 코너로 몰고 간 원인이 된 것 같다. 유일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일 수 있었던 누나의 부재가 가져다 준 소통의 단절...



나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3번 정도 ‘죽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경험이 있다.

지금 돌아보면 싱겁다는 생각이 없지 않지만 그 당시엔 나름 절박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첫 자살충동은 초등학교 시절에 경험한 셈이다. 어느 날 ‘신주단지’처럼 아끼던 딱지와 구슬을 하루아침에 몽땅 잃어버렸을 때였다. 동네 제일이라는 엄청난 물량만으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며 긍지를 채워주던 보물창고를 ‘털린’ 충격은 나로 하여금 더 이상 세상을 살아야 할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는 중학교 때였던 것 같다. 당시의 정확한 정황은 기억에 가물거리지만 어떤 일인가 내가 하지 않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어머니께서 믿어주지 않으셨을 때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 번째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내 인생이 정체되고 있다고 느끼던 시기였다. 이렇게 저렇게 꼬이다 보니 박사학위 취득 과정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고 포기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그 때, 죽는 길만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이때는 앞서와 달리 조금은 심각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나지만 그렇다고 (자살 충동을) 실행에 옮길 만큼 진지했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툭하면 힘들어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덥고 추워 죽겠다는 푸념을 입에 달고 살고 있는 나다.



근래 들어 현대인의 우울증과 스트레스가 자살이라는 사회적 병리현상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우울증과 스트레스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위에 안면이 있는 명망가 중에서도 정도가 심한 증세를 보이며 우려의 경지에 이른 경우도 많다. 심지어 초등학생조차 우울증과 스트레스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황이고 보면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증후군이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삭막한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건물, 컴퓨터, 자동차, 로봇 등으로 대변되는 인간미 제로의 주변 환경도 한 원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주위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 우정 등으로 연대된 유대감일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존엄성을 갖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소한 일상처럼 보이는 그런 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의욕을 충만하게 채우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자살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더 없이 소중하다. 우선은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우울증에 체포되지 않도록 자신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이웃과의 긴밀한 유대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가족이든 이웃이든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 약간의 의무가 강요되기는 하지만 이해와 배려로 다가서고자 하는 기본자세만으로도 만병의 근원이라는 우울증 해결에 즉방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상비약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술, 마약, 도박, 섹스 등 감각적이고 표피적인 중독성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노력이다. 모든 게 다 그렇듯 적당한 자극은 삶의 활력이 되지만 문제는 대부분 중독현상이 타당한 선에서 마무리되지 않는 현실이다. 자신은 물론 주위의 삶까지 파멸시키는 중독의 폐해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특정 인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같은 중독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일테면 테니스, 조깅, 골프, 바둑 등 적당한 심신운동에 관심을 갖는 것도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삶의 목표의식도 건전한 삶에 기능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똑같이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해도 극복할 수 있을지 여부는 꿈과 희망의 존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김연아나 박태환이 아니어도 저마다의 인생에 목표를 세울 수 있다. 그 목표가 반드시 타인과의 경쟁구도에 놓여질 필요도 없다. 스스로와의 약속을 통한 목표도 좋고 신과의 소통을 통한 약속도 좋다. 꿈과 희망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긍정의 힘은 생각보다 강한 것 같다. (사회 보장 제도가 잘 구축된 핀란드에서 높은 자살율을 보이고 있는 현상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노력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은 보장된 삶이 인간의 살고자 하는 욕망을 빼앗는 폐해로 작용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정황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울증 퇴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노하우로 신앙생활을 말하고 싶다. 나 자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스트레스는 물론이고 스스로의 존재감을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제동을 걸어준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최진영 남매도 신앙인이었다. 인간이기 때문에 신앙만으로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주위에서 신앙의 힘으로 재기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더 이상의 자살 소식은 이제 그만 멈췄으면 좋겠다.

어떤 형태로든 OECD 자살률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불상사가 더 이상 일어나지 말아야할텐데 걱정이다. 개똥 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을 당분간 화두 삼아 가슴에 품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아볼 가치가 있는 세상살이 이치를 새기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탈 많은 3월의 마지막 날이다.

새 봄의 기운에서 상서로운 기운 한자락 건져올려 나눠야겠다.
(2010. 3.31)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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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9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비운의 백령도

비운의 백령도




백령도 인근 초계함 '천안함' 침몰 사고로 연일 뒤숭숭하다. 오늘은 민간 어선에 의해 함미의 침몰위치가 발견된 이후 실종자 구조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낭보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시간 경과에 따라 희박해지는 생존 가능성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는 상황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실종된 청춘들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사건에 대해 각양각색으로 내놓는 저마다의 이해와 해석이 어수선함을 부채질하고 있다. 실제로 사건 직후부터 북한의 침략 가능성에서부터 심지어 자작극이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진단이 쏟아졌던 게 사실이다. 모두들 단편적인 지식을 끌어다가 목소리를 높이고 침을 튀기며 전문가를 자처하다 급기야 자기 의견에 스스로 도취되는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동의하는 건 침몰된 채 침묵하고 있는 함미의 내부처럼 모든 게 불확실하고 아무도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정확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될 가능성마저 배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피해자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게 슬픔이 아닌 분노인 현실이 개탄스럽다.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정확한 맥조차 짚어내지 못하는 관계 당국의 미숙한 대응이 피해가족의 절망을 키우고 있는 정황이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들과 남편의 생사를 추적하는 그들의 타버린 가슴을 위로하기는커녕 불신만 키우고 있는 것이다. 누굴 붙잡고 매달려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그들에게 소음일 뿐인 관계 군 당국의 앞뒤 다른 브리핑이 또 다른 의혹의 단초가 되고 있는 현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당국의 모습에서 피해자 가족이 양치기 소년의 표정을 보게 되는 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자칫 이번 사건을 빌미로 뭔가 얻어내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의구심을 사고 있는 정부의 어정쩡한 태도 역시 지적 받아 마땅하다. 만에 하나 나름의 결론을 바탕으로 접근하는 식의 꼼수라면 앞으로 더 큰 불행한 국면을 부르게 되는 건 물론이고 앞으로 스스로의 설자리는 좁히게 하는 결과라는 사실을 직시하길 바란다. 급기야 대통령까지 나서서 한 점 의혹 없는 진상 규명을 언급할 정도가 됐으니 기우는 아니지 싶다.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각은 이해를 보는 집단과 손해를 보는 집단의 이해득실을 기준으로 이분화 되는 분위기다. 어느 쪽이건 예전에 비해 명확하게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말이다. 마치 작품의 평가에 있어 작가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감상자들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가중치를 둘 수 있는 것처럼 이 사건의 방향도 비슷하게 흐를 가능성마저 엿보인다.

행여 아무런 노력도 없이 힘에 의해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되는 불상사가 시도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솔직히 있다. 총풍이나 북풍 동원을 통해 재미를 봤던 역대 정권의 추억이 오판의 재료가 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다.

그래서다. 이해에 따른 관점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비관론적 측면에 선 사람들은 ‘불신 시대의 불행’를 말하고 있다.

기왕의 정치권은 물론 신문, 방송을 비롯한 각종 언론조차 불신의 딱지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고 정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 상황이다. 불신이 전 국민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확산돼 있는 현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모든 것들이 실시간으로 국민들에게 간파당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더 이상 우민정치가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됐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조금의 능력만 가동해도 순식간에 세계 각지의 정보들을 금방 끌어다 놓고 비교분석할 수 있게 된 시대적 상황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진실이 최대의 무기라고 했다. 정부는 최대한 진실을 규명해서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주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진상 규명을 최대한 정확히 하는 것이 이번 천안함 침몰 사건의 가장 좋은 해결법이라고 생각한다. 혹여 이번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해서 이득을 취하려는 의도들이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다른 대안이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당국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에서 점점 실기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져 안타깝다.




우민정치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전략도 아니다. 오히려 자칫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뇌관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숨겨진 의도로 뭔가를 해보려다 실패했던 과거지사를 돌이켜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북한을 국내사정에 활용하려는 꼼수는 소탐대실일 뿐이다. 우선 당장 단기적인 성과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종국에는 큰 손실을 부르게 되는 건 불을 보듯 환한 일이다. 진정으로 남북통일을 바라고 그 후유증을 최소화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더 이상 북한을 코너로 모는 일은 지양돼야 마땅하다.



비운의 백령도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한계가 더 없이 괴로운 이 밤이다.

이번 사고로 목숨을 잃은 꽃다운 청춘 앞에 삼가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한다.
(2010.3.29)
. .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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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7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아! 안중근 의사

아! 안중근 의사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고 조국이 주권을 회복했을 때 고국으로 이장하라.
나는 천국에 들어가서도 다시금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생각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올해로 순국 100주년을 맞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추모 열기가 봇물처럼 이어지고 있는 요즈음이다. 만주 하얼삔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중국 뤼순감옥에서 사형으로 마감된 31세의 짧은 생이 짧지 않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는 건 안 의사가 보여준 참된 용기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주독립의 선각자로서 그리고 시대에 드물게 문무를 겸한 민족의 지도자로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얘기는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이토 히로부미.
그가 누구인가. 이완용 등 친일파를 조종해서 을사늑약을 강제체결 했고 초대 통감이 되어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등 우리의 자주독립을 능멸한 당사자로서 대한민국 역사가 존재하는 한 부정적인 인물로 기록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일본에서는 ‘동양의 비스마르크’로 찬사와 함께 일본 근대화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다. 명치유신의 주역, 일본 지폐 인물로 꼽히거나 또는 자신을 기리는 기념우표의 주인공이 되는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그다.

문득 진짜 지도자에 대해 생각해본다.
특히 민족의 지도자는 국운이 융성할 때보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진위 구분이 확실해지는 것 같다. 회복 가능성이 없어 보일 때 나라사랑의 진수를 통해 진가를 발휘했던 모습이야말로 우리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지도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일제 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상황에 적당히 안주했던 지도층의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 그때마다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어정쩡했던 흔적을 부인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달랐다. 결정적인 순간 자기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짐으로써 시대의 어른이 되신 분이다. 자주독립의 의지를 의연하게 실천함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안겨줬다.

지금까지 무탈하게 사용해 오던 ‘의사’ 호칭 때문에 국론이 분열되는 느낌이다.
안 의사 본인이 독립의군 참모중장이라는 직함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체포된 후 자신이 독립의군 참모중장임을 밝히고 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했으니 장군으로 호칭하는 게 맞다는 국방부의 주장이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보다는 우리의 아이들이 부실한 역사 교육 때문에 안중근 義士를 醫師로 오인하는 불행을 막는 일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요즘 10대들이 안중근 의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한다. 심지어 병원에 있는 의사로 알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니.
그런데도 내년부터 당장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두고 있는 정황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가뜩이나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 왜곡으로 상처를 입는 상황이고 보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호칭 문제 말고도 안중근 의사와 관련해 굴절된 역사의 흔적을 많이 만나게 된다.
조국이 주권을 찾으면 고국 땅에 묻어달라는 안 의사의 유언은 100년이 넘도록 지켜지지 않고 있다. 유해 발굴의 단초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고 보니 덧붙일 말이 없다.
안 의사 가문은 11명의 국가 유공자를 비롯 40여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명문가이면서도 거의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없는 가족들이 사방팔방 흩어져 평지풍파에 시달리거나 꺾였다.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사회적 책무에 속하는 문제이건만 오히려 피해를 자처하고 있다.
누구도 안 의사의 아들 준생 딸 현생의 친일행각에 돌을 던져 단죄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 모두가 공동의 책임으로 끌어안고 풀어내야 할 화두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걸림돌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일단은 자기 역할을 몸소 실행한 다음이어야 시대적 과제를 언급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문제점을 직시하고 그것에 대해 사회적 경종을 울릴 수 있을 정도의 기초준비는 있어야겠다.
썩어빠진 교육 문제가 우선인지 청년실업 해결이 급한 건지 사회적 문제를 몸으로 막고 나서야 하는건지 이도 저도 아니면 세종시나 사대강 때문인지 심각하게 고민한 다음 판단에 들어가야 하는 게 낫겠다.
그것의 일의 순서다.
젊음과 열정을 근원 삼아 매사 선각자 정신에 입각해서 안 의사의 유지를 받들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그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번 마음에 바로 새기자.
(2010.3.28)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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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5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문제는 설득의 방법이다

문제는 설득의 방법이다



100년 만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된 미국의 건강보험제도 개혁이 연일 화제다.

그에 못지않게 설득의 묘미를 보여준 오바마의 탁월한 정치행보도 주목을 받고 있다. 건보개혁에 대한 열정과 사태에 대한 정확한 분석, 그리고 적절한 대응책으로 의회를 설득하고 국민들에게 다가서는 하버드 출신 대통령의 정치 역량이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51세의 젊은 나이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어머니 얘기로 국민들에게 건보개혁의 당위성을 설득하는 대목은 오바마 정치역량의 백미로 꼽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미국의 대의정치에서 우리가 배울 게 있다면 자기 소신을 폭넓게 펼 수 있는 장이 마련돼 있고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인내하며 들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당론에 따라야 하는 우리와 달리 소신과 민심의 향배에 따라 언제든지 크로스보팅이 가능한 미국의회의 정치환경이 몹시 부럽다. 정치적 딜 역시 정치적 노림수일 뿐 금품수수 논란이나 권력남용 같은 파렴치한 주제로 평가되지 않는다. 미국 정치가 썩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기본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비슷한 사안으로 종종 정국이 뒤집어지기도 하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갑자기 서글퍼진다.

비무장지대라도 놓여진 듯 전운이 감도는 여야의 냉랭함 속에서 ‘소신’ 운운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개인감정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받아들일 여유는 고사하고 일말의 고려조차 같은 당 의원들의 눈치와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가 되기도 하는 상황이고 보니 오죽할까 싶다.



이명박 대통령의 ‘화요일 호통’이 화제다.

직접 주재한 청와대 회의에서 4대강을 비롯한 정부정책의 홍보부족을 질타하고 보다 더 적극적인 설득과 대응을 요구하고 나선 모습이 언론에 보도됐다.

최근 정부 정책의 정체현상이 설득의 양적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어떻게 설득하느냐 하는 방법론에 무게를 둬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설득은 일방적인 호령 등 수직 체계 안에서 다뤄질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의 성사 과정에 있어 통일된 의견으로 일사분란하게 진행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더구나 힘 있는 사람이 강경하게 밀어붙이면 반대의견은 물밑으로 잠수하게 돼 있다. 별 탈 없이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해결되지 않은 채 내재되는 형태라면 자칫 암적 요인이 될 수도 있는 게 문제다.

반대의견을 설득하기 위해 진지하게 다가가는 노력은 현안을 더욱 건강하게 다지게 된다는 측면에서 그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오바마의 건보개혁 과정을 보더라도 꾸준한 인내심을 전제로 한 치열한 토론과 논의의 반복이 설득과정에 얼마나 중요한 작용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진정성 있는 호소력으로 마음을 여는 일에서 설득이 시작된다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어차피 각종 미디어의 발달로 비밀이 없는 세상이 된 지 오래다. 밀어붙이는 식으로 반대자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해외 언론까지 완벽하게 오픈된 상황에서 우격다짐으로 통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의 건보개혁 과정에서 보여준 오바마의 정치적 리더십은 여러 의미에서 관심을 가질만하다.

적절한 오바마 리더십의 벤치마킹을 통해 지금 우리의 숨통을 누르고 있는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묘수를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꽉 막혀있는 물꼬가 단숨에 트였으면 좋겠다.
(2010.3.26)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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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3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한명숙, 검찰' 그리고 '명진, 안상수'

'한명숙, 검찰' 그리고 '명진, 안상수'



지금 대한민국은 진실게임으로 혼미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를 향한 진실 공방이 대한민국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하는 형국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전직 총리가 뇌물을 받았느냐 여부를 두고 지리한 법정 공방이 안방에 연일 실황중계 되고 있는 와중에 이번에는 여당 원내대표가 강남 봉은사 주지 인사에 외압을 행사했다는 폭로전이 터졌다. 이로 인해 관련 인사들의 진실게임 릴레이가 점입가경 수준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진실 공방은 각자의 주장만 난무할 뿐 이를 입증할 만한 실체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공방은 공평하지 않다. 늘 어느 한 편은 손해를 보게 돼 있고 대부분 힘 있는 쪽이 그 대상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만일 고위직 공무원과 하위직 공무원이 갈등으로 진실공방 국면에 놓이게 된다면 대부분 하위직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진실 여부나 개인의 신뢰지수와 상관없이 약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건 오죽하면 그럴까 하는 인지상정이 작동하는 까닭이다.



판사로 있는 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실의 허망한 실체에 황망해 하던 기억이 있다.

재판과정에 있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명확한 판단이 서지 않을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면 주로 사실이 판명됐을 때 피해가 큰 사람 쪽 주장이 거짓일 경향이 높다는 기준으로 판결을 내리게 된다는 고백이었다.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때로는 위험한 도박이 될 수도 있는 게 진실의 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말이 1+1=2 라는 명확한 수치의 결론이 아닌 한 모든 진실의 실체엔 망설임과 모호함이 전제돼야 한다는 타협의 제안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A 전 국회의장이 들려줬던 선거 후일담을 통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A 전의장은 우스개로 말씀하셨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가벼운 마음으로 웃어넘겨지지 않던 ‘유머’였다.

피스톨 B이라는 별명을 가진 B 비서실장을 상대로 한 어느 선거 때의 일이다. 유세기간 중 우연히 술자리를 함께 했다가 실수로 A의장 이마에 상처가 생겼는데 황의장은 그 즉시 이마에 붕대를 동여매고 박종규가 자신을 해치려 했다는 흑색선전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고. 물론 A의장이 이겼다. 불쌍한 B실장은 아무리 무고를 해명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많이 개선됐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선량을 선택하는 선거 마당에서 통하던 수법이었다)



한명숙 전 총리와 검찰 그리고 명진스님과 안상수 원내대표 사이의 진실게임 국면도 마찬가지다. 일단은 검찰과 안상수 원내대표 측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심지어 검찰이 서울시장 예비후보 주자인 한 전 총리의 가장 확실한 선거운동원이라는 비아냥이 흘러나오고 있다.

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기에 연이은 악재에 속이 터진다는 여당의원의 하소연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것도 무리는 아니다. 특별히 여론의 향방이 중요한 지금 같은 시점에서 하루도 무사히 넘기는 날이 없는 것 같다.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대상이 아닌 종교와 연관된 문제다. 인간의 신앙심을 바탕으로 설명되는 존재이기에 쉽사리 규명하기도 판단하기도 어려운 대상일 수 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명진’과 ‘안상수’ 사이의 진실공방은 처음 시작과 다르게 사찰탄압, 종교내정 간섭 등의 확전된 오류로 각인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자칫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감당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한명숙’ 건도 ‘명진’ 건도 앞으로 영원히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여론은 이미 진실공방에 판가름을 냈을 뿐 아니라 관련 당사자들로 하여금 더욱 많은 피해를 요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손해 본다고 생각되는 쪽이 진실을 규명하고 파헤치는 나서면 최소한 여론상으로 더 큰 손해를 초래할 가능성이 많다.

봉은사를 가운데 둔 진실공방이 선거 국면에서 어떤 형태로든 치명적 빌미로 작용될 조짐이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지지기반이 취약한 불교계가 이번 일로 한나라당에서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일단은 한시라도 빨리 봉합하고 함구하는 쪽이 그나마 손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 지금은 그저 겸허한 마음으로 침묵할 때다.
(2010.3.23)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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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1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문제는 선택이다

문제는 선택이다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현역은 현역대로 도전자는 도전자대로 이번 선거를 겨냥한 선량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개인적으로 선거에 직접 출마하거나 정당 공천을 주도한 경험이 있는 입장에서 우리의 정당정치와 선거제도의 부실함에 대한 우려를 지울 수 없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지방선거 후보 공천이 지역 당원 정서와 동떨어진 당 지도부의 야합으로 진행돼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지역 지자체 일꾼은 지역당원들 주도하에 선택되는 게 바람직하다. 그것이 책임정치를 지향하는 정당정치가 충족시켜야 할 가장 기초적인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중앙당에서 낙점한 낙하산 공천은 자칫 지역이나 지역민에 대한 배려보다는 정당충성도가 우선시 되는 기형적 공천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곱지 않은 시선을 모으고 있는 정당정치가 더 굴절될 수 밖에 없다. 정당정치 발전과 민주주의 건전한 육성을 저해하는 폐단도 더 커지게 돼 있다.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나 역시도 이런 정당구조의 구성원 중 하나였기에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백한다).



한 집안을 운영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무능한 손길은 살림을 거덜내고 야무진 손길은 집안을 부흥시키게 돼 있다. 하물며 국가 운영은 더하며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IMF 경험은 물론 얼마 전 부도사태에 직면해 망신살이 뻗친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정부나 최근의 그리스 정부 등도 나라 살림을 제대로 못해 국민을 크게 불행하게 한 케이스다.

과도한 남용으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지자체 재정현황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난 2년 새 각 지자제 부채현황이 17배로 늘어났다고 하니 사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재정운용을 어떻게 했기에 지방재정을 그토록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지 의문이다. 언제까지 이 정부와 지자체가 그런 낭비와 비효율을 견뎌낼 수 있는 건지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다.



이 모든 게 선심행정, 전시행정에 급급한 방만한 경영의 후유증이다. 판단하고 조정했어야 할 각 지자체 장의 자질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예산이 바닥나면 무분별한 지방채 발행으로 부족분을 메우려는 안일한 발상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무사통과되기 일쑤고 지방재정 건전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 따위는 애초부터 안중에 없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지방행정의 실상이다.

주민 혈세를 주머니 쌈지돈으로 오인(?)한 지자체 장들의 무분별도 지방재정 위기를 재촉한 주범이다. 하다못해 열 명도 되지 않는 기초의원으로 구성된 지역단위 의회에조차 의장실과 부의장실, 운전기사, 비서 등이 배정되는 게 현실 역시 지방재정을 좀먹는 고질적 병폐가 아닐 수 없다.



당초 풀뿌리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지방자치제도를 시작한 것은 지역민심이 제대로 반영된 지역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폐해만 크게 부각된 상태다. 각 지역마다 마치 소통령이나 되는 것처럼 권력을 휘두르며 지방재정을 멋대로 망가뜨리는 선출직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제대로 된 일꾼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실감하게 만드는 방만함이 만연돼 있다.

제대로 일 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서툰 이들의 시행착오가 얼마나 엄청난 후폭풍으로 우리에게 해가 되는지 톡톡히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문제 해결은 사람에 달려있다.

일꾼으로 뽑힌 이들의 자질과 책임을 논하기에 앞서 유권자 스스로 자기 책무에 대한 깊은 자성과 각오가 필요하다. 지방재정이 파탄나면 거기에 따른 책임과 고통은 각 개인의 부채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마치 내 통장을 맡긴다는 심정으로 선택에 임해야 한다. 개인 재산 못지않게 공공의 재산 역시 개인의 행복과 직결된 현실을 직시하라는 뜻이다.



분별없는 묻지마 투표는 자해행위가 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내 지역에서 일꾼을 자처하고 나선 각 후보들의 면면을 꼼꼼히 따져보고 선택할 수 있는 유권자의 역량이 있어야겠다. 후보자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인생을 꾸려왔는지, 신뢰할 수 있는지 여부를 사위감 고르듯 며느리 고르듯 정말로 정말로 잘 살펴야겠다.

그것이 진정한 유권자의 권리행사다. 저마다의 행,불행과 무관하지 않은 절차이기에 결코 무심해서는 안될 민주주의의 현장이다.
(20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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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종 생각 - 광풍이 아닌 미풍이더라

광풍이 아닌 미풍이더라



이번 미국 방문은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궈 먹는 식으로 진행된 일정이었다.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틀 밤, 현지에서 이틀 밤을 지내는 식이었으니 얼마나 빠듯한 일정이었는지 가히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다녀오긴 했지만 곳곳에서 달라진 세계 속의 대한민국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전자여권 사용 이후 무비자로는 첫 미국 방문이었는데 LA공항에서부터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눈에 띄는 변화는 훨씬 수월해진 통관수속 절차였다. 뭔지 모르게 우리를 대하는 공항 직원들의 태도가 상당히 우호적으로 느껴지는 것 역시 변화라면 변화였다. 출국 검색대를 지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처럼 신발 벗고 혁대 푸는 과정은 같았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되다 보니 우선 소요되는 시간 자체가 달라졌다. 지금껏 미국을 드나들면서 이렇게 편한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그동안의 익숙함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뿌듯했다.

우리나라 항공기의 한층 업그레이드 된 내부시설도 나를 놀라게 했다(자주 비행기를 타는 관계로 항공사의 VIP 고객이다). 오래 전 처음 미국에 갈 당시만 해도 위험해서 어떻게 우리 항공사를 이용하느냐는 주위의 걱정에 마음이 흔들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설이나 기술력이나 모든 게 미흡해서 자국민에게 조차 불신을 받으며 기피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진 나라의 위상만큼이나 세계적인 항공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며 비상 중이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자부심은 미국 현지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들어가는 호텔 로비마다 삼성, 엘지, 현대자동차 등 우리 기업 로고가 지천이어서 우리의 자부심을 충족시켜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일본 브랜드 파워 탓인지 현지에서는 삼성이나 엘지를 일본제품으로 인식하는 분위기여서 아쉬웠다)




그러나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아니다.

일본의 추락 전망에 너무 솔깃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음을 전하고 싶어 이 글을 쓰고 있다.

우연히 미국 내 일본통 교수·학생들과 함께 하게 됐는데 (개인적으로 일본을 조금 공부한 입장이어서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일본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들은 이번 토요타 사태에 대해 미국인들이 그동안 당해온 것에 대한 일종의 복수전 정도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번 토요타 사태는 일시적인 수모일 뿐, 일본의 견고한 아성에 미치는 영향력은 극히 미미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토요타 사태가 광풍이 아닌 미풍으로 그치게 되는 자체가 일본의 견고한 영향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일본의 일본의 파워는 여전히 막강하기 때문에 우습게 볼 수 없다는 평가를 그들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미국 서부의 특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산 자동차는 여전히 거리를 휩쓸고 있었고 일본 관광객은 여전히 선호되고 있었다. 심지어 다 망했다는 JAL 비행기 조차 미국의 공항 터미널 중 가장 노른자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마치 일본시대 마감을 저지하고자 사력을 다하는 일본의 몸부림처럼 보였다. 세계무대에서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읽혀졌다.

일본은 여전히 우리를 버겁게 하고 있었다. 우리가 벤치마킹 상대로 삼아야 할 나라가 실상 미국이나 중국보다는 일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일본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연구해야 할 나라다. 중국의 부상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그 영향력 역시 간과할 수 없지만 일본이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는 현실을 도외시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청년실업 현실도 문제지만 다음 세대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

대한민국 미래의 경쟁력이 젊은이들에게 달려있음을 생각할 때 실업문제 못지않은 발등의 불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 정부가 젊은이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뚜렷한 대책 없이 허송세월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솔직히 불안하다.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미리 준비하고 노력하는 과정 없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미래 경쟁력은 우리 기성세대부터 깊이 각성해야 할 명제다. 앞선 세대의 노력으로 우리가 지금 달라진 국가위상을 느끼고 있듯 우리 역시 양질의 국위를 후대에 물려줘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종래에는 우리가 일본을 능가하고 세계무대를 주름잡는 그 날이 오게 된다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멀고도 험한 역경의 과제는 현실적으로 그다지 녹록하지 않다.

더구나 뭔가 잘 되어가는 조짐이 보일 때가 더 위험한 게 세상사다. 한시라도 긴장을 늦추고 방심해서는 안된다. 그야말로 정글이 따로 없으니 어찌 아니겠는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지만 우리의 라이벌들이 고삐를 늦추지 않고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음을 주지하자. 우리의 확실한 미래를 향해 분골쇄신의 자세를 견지하자.
(201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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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8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진짜 교육은

진짜 교육은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된 몇 가지 통계 수치가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진학률 85%라는 경이로운 수치와 함께 307만 명(지난해 기준)을 돌파했다는 국내 대학생 인구와 10년 이래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10% 대의 청년실업률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범죄자의 20%가 대졸 이상의 고학력층이라는 통계치가 그것이다.

결론적으로 취직도 어렵고 사람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교육에 너나 없이 목을 메고 있는 셈인데 무능한 교육의 실체를 드러낸 것 같아 민망하기 짝이 없다.



대한민국 4,50대 가장들은 자녀 교육비 조달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라 전체가 ‘교육을 통한 입신양명’을 맹신하며 올인하고 있는 느낌이다. 실제로 우리의 교육열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다.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유학생 수까지 감안한다면 엄청난 교육열의 실체가 실감되기도 한다. 생활비의 절반 가까이를 자녀의 교육비로 지출하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나 자신, 교육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교육의 혜택을 톡톡히 본 입장인 만큼 우리 사회의 남다른 교육열을 비판할 의도는 없다. 다만 교육의 효율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짚고 싶은 생각은 있다. 앞서의 통계치가 대변하는 실상이 아니더라도 우리 교육의 효율성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청난 규모로 투자되는 교육비와 열성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 교육의 성적표는 지나치게 초라하다. 개인의 특성에 맞는 맞춤식 교육과 전인교육 부재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실제로 대부분의 학교교육이 입신출세를 동기로 할 뿐 개개인의 자질을 배려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어차피 세계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마당이다. 교육기관의 명성이나 브랜드에 의존하는 교육 형태는 그 수명이 다 됐다고 봐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게 된 만큼 이제는 교육을 통해 무엇을 배웠느냐가 중요한 변별력의 기준이 되는 세상이 됐다. 따라서 교육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외고나 과학고 그리고 강남 학군 등 대학 진학률 위주의 교육에만 치중할 게 아니라 각자의 개성과 능력에 맞는 교육을 세분화하는 작업이 하루라도 빨리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학시절 만났던 유학생 A는 한국에서는 4년제 대학도 제대로 못 갈 실력이라고 주눅이 들어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MIT에 진학,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고 세계의 천재들과 당당히 겨루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미래를 열어갔다. 또 다른 유학생 B는 한국에서는 음악대학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발견한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줄리어드에서 전액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고 지금은 미국에서 유명작곡가로 활동하며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

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성적순으로 인생의 성공 서열을 매기는 것은 무의미를 넘어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무대에 대한민국을 과시한 김연아나 박태환의 선전을 통해서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활약은 우리 모두를 감동의 도가니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한들 얼음판이나 수영장에 몰려간다고 해서 너도 나도 피겨스케이트 선수나 수영선수로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교육풍토는 모든 가치기준을 시험 성적 하나에 종속시키려는 의도가 지나치게 강하다. 각각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기 보다 퇴화시킬 공산이 크기 때문에 우려된다.

세상사가 시험 성적 하나로만 지탱될 수 없는 현실적 여건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다.

마땅히 바뀌어야 한다. 누군가는 공부로 쌓은 내공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동안, 온전한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운동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비행기를 운전하거나 집을 짓거나 옷을 만들거나 기타 등등 수없이 많은 분야의 일들이 저마다 맡은 역할을 통해 끊임없이 가동되며 맞물려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아쉬움 투성이다. 게도 구럭도 다 놓친다고 필요한 데는 사람이 없고 필요없는 곳은 사람이 넘친다. 무슨 의대, 법대는 그리도 많고 인재들은 왜 그곳으로만 몰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법과 의술만 있으면 세상이 저절로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후유증의 폐해로 인한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편식으로 영양실조에 걸리면 그 고통이 공동의 몫이 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세상이 기형으로 변질되는 건 안중에도 없으니 딱할 노릇이다.

균형을 위해 기초과학의 길도 열어줘야 하고 역사,철학,문학 등 모든 분야도 덩달아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스팩트럼 속에서의 활동이 보장되도록 젊은이들의 미래를 예단하는 횡포는 배격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국가 교육의 진정한 역할이 아닐까 싶다.



자기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 그것이 진짜 교육의 시작이다.



ps:미래를 위해 외로이 장도를 떠난 아들과 잠시 함께 한 이국 땅에서 이 글을 쓴다. 산타모니카비치의 넓디넓은 해변에 한데 엉킨 인파를 보며 점점 하나가 되어가는 지구촌의 실체를 실감하게 된다. 아들과 함께 하는 동안 오히려 내가 더 많이 위로받고 더 많은 것을 얻게 된 것 같다. 사랑한다, 아들!!

(2010.3.17)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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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5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개명천지

개명천지


밤의 사나이로 불릴 만큼 밤을 좋아했던 나였다.

해만 떨어지면 나만의 은밀한 사적 영역이 열렸다. 어둠의 익명에 몸을 맡기면 그렇게 아늑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발자국 소리를 벗 삼아 밤의 세계를 섭렵하는 동안은 도량에서 정진하는 수도승이 된 것처럼 차분해졌다. 그렇게 밤이 주는 위안을 통해 고립된 자아의 상처를 다독이며 지내왔던 것 같다.

세상만사 모든 걸 대번에 가리고 침묵 너머로 밀어 넣는 어둠의 카리스마가 좋았는지 모른다. 그저 보고 싶은 것에만 집중해도 되고 보고 싶지 않으면 외면할 수 있는 선택을 열어 놓은 어둠의 배려가 좋았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 없고 어둠이 주는 희열이 빛의 그것을 능가할 수 없는 현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개명천지의 체험’이라고 할까.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이내 눈을 뜰 수 밖에 없었다. 열려진 창문 틈새로 쏟아지는 햇살의 강렬함이 시야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눈부심이 아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미묘한 힘의 기운이었다.

그 힘이 오래 동안 닫혀있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 제치고 어둠 속에 은둔해 있던 나를 단숨에 들어 올려 세상에 내놓았다. 햇살의 공략이 완강한 나의 자아를 뚫고 들어와 순식간에 무장해제 시켜버린 셈이다. 그동안 신세진 밤에게 죄책감(?)이 들만큼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었다.



떠오르는 태양의 서기를 느꼈던 게 얼마만의 일인가 싶다. 그 상서로운 기운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있자니 모든 게 즐거워졌다. 세상에 용서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지난 시간 동안의 불쾌했던 기억들도 다 지워줬다.

새살이 채워지듯 나의 내면이 빠르게 원상복구 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강력한 복원력은 태양에너지의 또 다른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나 자신과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어둠의 칩거를 풀고 하루 빨리 태양의 강렬함을 마주해 보라고, 어떤 문제이건 차별없이 공평함으로 모든 이들을 위한 훌륭한 해결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세상 어떤 기도보다 강렬한 열망의 에너지로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를 허락해 주니 걱정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도 함께 전하고 싶었다.



이제 그만 어둠을 벗고

우리 모두 태양 아래서 만나자구요.
(2010.3.16)
....홍문종 생각

* 그래도 밤의 매력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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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4일 일요일

홍문종생각-법정스님과 김길태

법정스님과 김길태


인간의 영역에서 神性과 獸性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요즈음 매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세간의 이목을 모으고 있는 법정스님, 김태길 두 사람의 대조적인 삶을 바라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다.

법정스님의 입적이 종교를 초월한 상태에서 전 국민의 애도 속에 진행되고 있던 시간대에, 어린 소녀를 불귀의 혼으로 떠돌게 하고도 일말의 뉘우침조차 보이지 않는 김길태를 향한 국민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사형제도를 폐지하자는 쪽으로 기울던 민심이 사형제도 유지 여론으로 확 기울어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뻔뻔하다 못해 혐오스럽기까지 한 그의 인면수심 때문이다. 같은 인간의 형상을 한 두 사람이 가장 높은 곳으로 경건한 추앙의 대상으로 자리매김 되는가 하면 낮고 비천한 곳에서 같은 인간이라는 동류의식에서 조차 거부 당한 채 철저히 외면되고 있는 현실이다.

극단의 자기 절제를 통해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신성의 최대영역을 보여준 삶과 잔악함으로 그리고 몰염치성으로 인간이 가진 수성의 한계가 끝간데 없는 무한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 두 사람 다 인간의 이름을 갖고 있다. 다만 각자 다른 인생의 설정을 통해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근본원인은 뭔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처럼 인간의 삶 역시 파종되는 씨앗에 따라 결정되는 거라면 오히려 간단히 풀릴 문제다. 그러나 근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태어난 이후 형성된 인성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한다면 그저 남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좀 더 근원적인 점에서부터 책임의식을 가지고 분석해 볼 과제로 접할 일이다.

알려진 것처럼 김길태는 길거리에 버려진 삶으로 시작, 양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부터 소년원을 제 집 드나들 듯 한 전력을 가진 서른 셋 나이의 청년이다. 법정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하다가 대학 재학 중 입산 출가를 실행, 평생을 정진수행하는 삶으로 일관하신 고승이다.

범죄와 수행, 평범한 일상에 그칠 수도 있었을 인생의 서로 다른 과정이 두 사람의 인생을 끔찍한 범죄자와 고매한 고승의 삶으로 가르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평범한 삶을 보내던 김길태가 뒤틀린 인생을 살기 것도 ‘버려진’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중학생 때부터라고 했다. 부모로부터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된 그 역시 어쩌면 가혹한 운명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김길태 사건에서 자녀의 양육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게 해 주는 사례다. 설사 부모가 자식을 유기하지 않았더라도 버린 것과 다름없는, 방치된 양육환경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 양산의 동기가 될 수 있는지 웅변해 주는 대목이다.

유명무실한 우리의 교도행정도 근원적인 문제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다.

사람을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심화시킨다는 비난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정황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해준다. 특히 소년원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청소년 범죄에 개과천선의 기회를 제공하기보다 더 교묘한 범죄의 수렁에 빠뜨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96년 폭행혐의로 발을 딛게 된 소년심사분류원을 시작으로 33년 인생 중 11년을 교도소에서 보낸 김길태의 삶을 보면 교도행정의 덕에 힘입어 교화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점점 중죄인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등 더 큰 문제의 심연으로 내몰렸을 뿐이다. 이번 기회에 청소년 범죄 대책에 대해서도 새로운 고민과 대책을 마련하는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뒤늦게 범행을 시인하기 시작했지만 사악한 태도로 일관하던 그를 보면 어이가 없다. 타락한 인간이 짐승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짐승은 단지 생존본능을 위한 순간 상대에 위해를 가하는 반면 인간은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광범위한 영역을 통해 해악을 행하니 그 죄의 깊이를 헤아릴 도리가 없다.

이에 대한 해법은 교육밖에 없는 것 같다. 교육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만큼 중요한 영역임에 틀림없다. 이번 사건으로 제대로 된 인성교육이 한 사람의 삶의 가치를 얼마나 천양지차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건지 실감하는 계기가 됐으리라 생각한다.

김길태 같은 불가사의한 인간은 우리의 교육 기준이 명예나 권력, 재화 등 너무 세속적인 대상에만 포커스가 맞춰지면서 인간 양성에 실패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이런 교육이 수정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제2, 제3의 김길태가 안나온다고 보장할 수 없다.



법정스님의 '마무리'가 세인들에게 아쉬움을 남기는 것은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다간 생전의 흔적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 정진을 통해 제대로 살다가는 인생의 전형을 보여주신 이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일선 교육 현장에 있어서도 면벽수행까지는 어렵더라도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만큼은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근본적인 사유를 화두로 삼는 교육의 실천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포화상태가 될 만큼 종교도 넘치고 성직자도 넘치는데 왜 법정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을 많이 만날 수 없는 걸까...그런 투정이 저절로 나오는 한심한 세태다. (이 참에 종교계의 통렬한 자기 성찰과 반성을 촉구하는 바이다).



어차피 잠시 들렸다 가는 세상인데 이왕이면 인간다운 삶의 한계를 넘는 일은 없어야겠다. 최소한 개, 돼지 보다 못한 삶을 살아서야 되겠는가.

지금부터라도 주위의 인연에 대해 좀 더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겠다고 새삼 다짐을 하게 된다. 모두가 귀하고 귀한 존재인 것을.

법정스님의 향기가 마감된 오늘, 인생의 화두 하나를 새롭게 건져 올린다.
(2010.3.14)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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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2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떠오르는 태양




떠오르는 태양

-홍문종-



얼마나 기다렸던가

찬란한 아침의 햇살을



초조히

얼마나 걱정 했던가

떠오를 태양을



함박 웃음을 머금고

온 대지를 품는 당신은

하나님의 손길

천사의 노래



가슴 터질듯 고통

한 없는 어둠을

산산히 흩어버린

승리의 빛이여

영광의 심포니여



기억하라

영광의 햇살을

비오고 바람 불어

흩어지고 숨 죽일때

절망의 칼 끝이

경각을 다툴때



의지하라

변치않는 태양을

절망의 심연

헤어짐의 고독

버려진 듯 외로움

자기 상실의 포기에서



아침의 햇살은

우리의 인생을

항상 거기서

저 높은 곳에서

아우르고 버티고

................

항상 있음을 온 마음으로 송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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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1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무소유의 공명

무소유의 공명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에 가슴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다.

일체의 장례의식도 관과 수의, 심지어 다비식마저도 ‘번거롭고 부질없는’ 일이라며 거부할 정도로 철저했던 ‘무소유’의 행적을 뒤로한 채 또 한 분의 큰 스승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성자의 ‘맑은 가난’이 깊은 울림으로 가슴을 친다. 시간과 공간을 버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소유의 명징함을 잃지 않았던 청빈한 삶이 숙연함으로 다가온다. 그의 삶에 대해 뭔가를 더하거나 빼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다.

주옥같던 생전의 말씀들이 어지러운 世情을 깊은 성찰의 골로 이끄는 이 밤이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도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일기일회' 中



헌신과 봉사의 철학으로 고귀한 가치와 진리를 추구해 온 종교의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 속에서 종교의 타락상은 항수로 존재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종교 갈등이 전쟁으로 확대된 경우도 많았다. 부패한 종교가 혹세무민하면 그것보다 더 큰 폐해가 없다.

우리 역시 갈수록 비대해지는 종교권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적지 않은 상황이다. 영혼을 담보로 한 각 종교단체의 횡포가 횡행하는 것도 사실이다. 문질문명의 발달이 황금만능주의를 양산, 영혼이나 무소유의 가치를 강조해야 할 종교기관이 물신을 섬기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든 탓도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 와중에 법정스님은 종교를 초월한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故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우리에게 구도자의 길은 무엇이고 어떻게 인생을 정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지에 대해 보여주셨다. 그런 그가 대중에게(종교 구분없이)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존경과 감사의 사표로 자리매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소유로 일관했던 스님의 생애는 평범한 우리들에게도 제대로 된 삶의 마무리를 일깨우셨다. 향을 싼 종이가 주위를 향내로 진동시키듯 물욕의 허망함을 가르치신 셈이다.

우선은 자식들에게 물질로 유산을 남기는 일을 제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이 자식 농사를 망쳤던 사례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만큼 진정으로 자식을 유형의 유산에 집착하기보다 무형의 유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사회적으로 유산 안 물려주기 운동이 시작됐지만 지금까지는 적극적으로 경영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약간의 사회적 저항의 조짐까지 보이는 안타까운 현실도 문제다.

하지만 혈혈단신 홀연히 빈손으로 떠난 법정 스님의 삶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빈손으로도 아름다운 빛이 되어 대중을 개안시키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 그의 삶이 살아있는 증거가 되어 우리의 닫힌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가족이나 자식을 위해서도 무언가 좀 더 남기려고 무리수를 두지 않는 삶이야말로 성공적인 인생이 될 수 있음을 유창한 웅변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남긴 무소유의 흔적이 유산 안남기기 캠페인에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새로운 기폭제가 됐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의 발전과 국격을 높이는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거인의 공명을 따라 마음을 얹으면 될 일이다.
(2010.3.12 )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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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0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하얀 천지

하얀 천지

홍문종


신의 축복

인간을 용서한 하얀눈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의 예술




나무

오솔길

전보상대

모든 지붕

도봉산 봉우리

너와 나의 마음속속


골고루 편안하게

행복하고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의 마음을 열게하고



놀라운 그리고 고마운 세상

오늘 살아 신의 메센저 만나나니

두 손을 높이 들고, 목 소리를 크게 올려,

인생을 사랑 하기를 세상을 사랑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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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9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650만 개인정보 무단유출

650만 개인정보 무단유출



국내 유명 백화점 등에 등록된 개인정보가 대량으로 유출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는 물론 ID와 비밀번호 심지어 집 주소에 이르기까지 650만 명의 개인 신상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의 손에 넘어가 있는 정황은 실로 놀랍다.

인터넷 해킹 하나로 인터넷 전체 사용자의 20%에 달하는 개인의 사적 영역이 순식간에 침범당할 수 있는 현실은 거의 재난 수준의 돌발상황이다. 도대체 IT 강국으로 핸드폰의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나라에서 이 무슨 창피하고 황당한 일인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보안의 사가지대에 놓인 나의 ‘바코드’가 타인의 시선에 벌거벗겨진 채 읽히고 있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불쾌하다.

기왕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2008년 당시 인터넷 쇼핑몰 옥션의 회원 정보 유출사건이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엄청난 규모의 피해자가 속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노에 들끓는 여론 앞에서 해당 업체가 재발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머리를 조아렸던 것 같은데 비슷한 사건이 또 터졌다.



날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스팸메일과 메시지 횡포에 울화통을 터트린 경험을 대부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스팸들의 근원도 따지고 보면 개인정보의 불법유출에서 비롯됐을 터다. 결코 간단하게 넘길 수 없는 비슷한 징후들이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만연돼 있는 현실의 일단이다. 개인 정보의 무단유출로 인한 후유증도 후유증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걱정스럽다. 그 공포(?)스러움에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다.

인공 두뇌를 가진 컴퓨터가 인간의 뇌에 일정한 데이터를 입력시켜 인간을 가축처럼 통제하고 지배하는 가상세계를 그린 영화, 메트릭스에서 받았던 강렬한 충격을 기억할 것이다. 죠지오웰의 동물 농장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에서도 비슷한 징조를 강조했던 것 같다.

지진이나 해일 등의 공세로 우리의 목을 죄어오는 자연의 역습도 비슷한 국면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예민함일까? 인간 스스로의 입지를 좁혀나가는 이런 저런 정황을 고려해볼 때 스스로 자유를 반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간의 자유와 독창성이 말살돼 가는 암울한 미래가 예지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보이지 않는 손길의 조종으로 조금씩 스스로의 영역을 내주며 뒷걸음질 치고 있는 인간의 또 다른 한계점이 노출된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급기야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줄 수 없는 부실한 국가 공권력에도 공격의 화살이 날아갈 판이다. 인간의 기본적 권리 영역에 속하는 개인 존중을 보장하지 못하는 사회가 21세기 국가 경쟁력 창출을 꿈꾸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이번 정보 유출 사태를 정부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다.

회원정보의 부실 관리가 백화점 등의 실수였다면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이 강구돼야 하지만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노린 고의적인 범행이었다면 그에 걸 맞는 처벌로 강력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악의적 충동을 억제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측면에서라도 강경책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연속된 오류로 인해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러지고 극복하는 삶의 과정을 통해 쓸 만한 인격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는데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왕성한 삶의 복원력이 인간으로 하여금 삶이 살만하다고 느끼게 해 주는 덕분이다. 신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인간의 한계에 대한 신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사이버의 탐욕과 무질서도 무사히 평정될 수 있기를 바란다.
(2010.3.10)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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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8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동혁이 형

동혁이 형


TV 시청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내 관심사는 주로 국내 뉴스나 CNN, BBC, NHK, CCTV 등 외신에 쏠려 있는 편이다. 그러나 코미디 프로인데도 유독 챙겨 보게 되는 ‘개그콘서트’는 예외다. 그 중 ‘봉숭아 학당’ 코너의 ‘동혁이 형(개그맨 장동혁 분)’ 캐릭터에 상당한 재미를 느끼고 있다. 실제로 '동혁이 형'은 매주 정치 사회 분야의 핫 이슈에 대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 대사로 ‘촌철살인의 풍자’라는 평가 속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오늘 이 프로그램이 세인의 이목을 모았다. 방송개혁시민연대(이하 방개련)에서 ‘포퓰리즘을 기반으로 한 선동적 개그“라며 문제를 삼고 나서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기 때문이다. 파격적 직설화법을 거침없이 날리고 있는 극 중 ‘동혁이 형’ 대사가 타겟이 됐다. 방개련의 반발이 일면 수긍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10여년 미국 생활을 하면서 이보다 훨씬 노골적인 풍자 코미디를 많이 봐 왔던 터라 방개련의 우려가 도를 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 닉슨이나 클린턴, 부시 등 역대 대통령은 물론 현 오바마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정치 풍자의 소재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다. 게다가 단순한 해학이나 풍자로 넘기기에는 민망하거나 저질스럽기까지 해서 상당히 곤혹스러운 내용 일색이었지만 그런 프로들이 문제시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The Daily Show나 Saturday Night Live 같은 프로는 현실 정치나 사회현상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블랙 코미디로 미국민들의 사랑 속에 건재하게 연륜을 쌓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어쨌든 방개련의 문제제기에 힘입어 ‘동혁이 형’은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됐다. 방개련 관련 보도가 나가자 마자 ‘동혁이 형’ 검색어가 대번에 인터넷 검색 순위 1,2위를 달리게 됐으니 하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방개혁이 당초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동혁이 형’의 주가를 올려준 셈이 됐다.

‘동혁이 형’ 사건에서 얼마 전 경험했던 김제동 파동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무엇인가가 문제시 되어 프로그램을 하차하게 된 김제동의 인기가 오히려 급상승하게 되면서 보궐선거에 직접적 역풍으로 작용(이는 여당 내부에서도 인정했던 바다)했던 상황을 떠올리게 되는 건 기우일까?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결코 승산이 없는 가장 기초적인 상황이 배제되는 건 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자충수가 될 확률이 크다.



대학 총장을 하면서 학생들의 요구를 듣기 위해 만나야 하는 일이 많다. 오늘도 만났다. 그들의 요구가 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 마음에 안 드는 요구사항도 대면하게 된다. 그럴 때면 될수 있는 한 자율에 맡겨두는 편이 가장 좋은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섣불리 설득논리로 접근하다간 극심한 대립 양상을 초래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학생들의 관심이 옮겨가게 돼 있고 생각보다 손 쉽게 실마리를 풀어냈던 경험이 있다.


힘 있는 쪽은 이기려 하기보다 져주는 모습으로 접근하는 게 지혜로운 처신이다. 더구나 상대가 이미 이쪽이 가진 힘의 무게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적당히 힘을 빼고 주는 타협점을 찾다보면 길이 열리게 돼 있다. 힘 있는 쪽이 힘을 과시하는 방식은 해결점을 찾기 어렵게 하고 작은 일도 크게 확대시키는 잘못된 선택이다. 예전에 지방선거 공천심사위원장으로 활동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공천후보경쟁이 첨예한 곳일수록 거의 방치 수준으로 버려두면 처음에는 정신없는 분쟁국면으로 치닫더라도 종국엔 스스로들 마음을 비우고 중립지대로 나오는 모습을 몇 차례 목도한 바도 있다.



갈수록 극심한 국론 분열이 심신을 괴롭히는 요즈음이다.

힘 가진 계층의 고민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국론분열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 싶다.

힘의 과시는 하수의 전략이다. 힘이 있어도 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의 공포는 훨씬 극대화 된다고 한다. 힘의 무기는 과시가 아니라 관용과 포용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자.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다보면 최소한 상대로 하여금 나와 다른 생각을 알고자 하는 여유로움을 안겨줄 수 있게 될 것이다. 힘센 바람은 나그네의 외투를 꽁꽁 여미게 하고 힘없는 햇빛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길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힘의 남용은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돼 있다.

힘의 미학을 다시한번 새겨 볼 일이다.
(2010. 3.8)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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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7일 일요일

홍문종생각-3 土 일


3 土 일

-홍문종


미명(未明)에 잠에서 깨어

어스렁 ㅇㅅ렁 뒷동산에 오르다

덜 깨어난 불빛들도 따라올라

미몽(迷夢)중에 희롱들 하네



전생(前生)의 그림자가

나도 모르게 내뒤에 서 있는데

내생의 손 날개 짓들이

고개길 ㄱㄱ길을 돌고돌아

환영(幻影)중에 얽히고 설키고

울고 웃으며 왁자지껄



미맹(未萌)의 풀잎들이

날 숨죽이고 눈치보다

웅크러진 허리를 펴는데

안개길 신작로엔 잔설이ㅌ

버티다 ㅂㅌ다 殘 殘

창가(唱歌)를 부르는데

애가인지 찬가인지.....



삼월의 어느 토요일

기지개할 대지와

꿈틀이는 시내물 ㅅㄴ물

미소품은 앞 풍악(豊岳)

瑞氣를 내 품으며

어제도 우리의 날이었고

오늘도 하루의 날이거늘

내일도 너의 날이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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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종 생각-사이버 딸이 뭐길래

사이버 딸이 뭐길래

인터넷 게임 중독의 심각성이 도를 넘고 있다.

인터넷 중독으로 인한 사회적 병리현상이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갈수록 사건의 정도가 엽기적이어서 걱정이다.

최근에만 해도 인터넷 게임을 빠져 생후 3개월 된 친 딸을 굶겨 죽인 비정한 부모가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자신의 딸보다 컴퓨터 게임을 통해 인터넷 공간에 생성된 ‘사이버 딸’에 더 집착한 것으로 드러나 우리 사회에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이 뿐만 아니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는 자신에게 자제를 요구하는 친모를 ‘잔소리가 듣기 싫다’는 이유로 때려죽인 패륜아 사건도, 그리고 게임에 빠져 며칠 연속 게임에 매달렸다가 사망한 30대 남자의 어이없는 돌연사도 최근 며칠 동안 인터넷 중독이 불러온 불행한 일이다. 더구나 볼썽사나운 이 사건들이 외신에까지 보도돼 전 세계 구석구석 퍼져나가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인터넷 강국 면모가 엉뚱한 방향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형국이다. 집안망신이 따로 없다.

IT 강세 덕분에 삼성이나 엘지 등 대한민국 브랜드가 세계무대에서 호평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이 같은 어두운 이면과 맞닥뜨리고 보면 IT 발전이 우리에게 행인지 불행인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게임 중독 하면 오래 전 미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팩맨’이라는 게임에 얽힌 일화들이 떠오른다.

대학 총장과 장관을 지낸 A씨는 고국에서 오랜만에 남편을 만나러 온 부인을 곁에 앉혀두고 팩맨에 매달렸다가 불화를 자초했다거나 지금은 대법관 반열에 올라가 있는 B판사는 장 보러 간다고 나가서 팩맨을 붙잡고 씨름하느라 늦어진 저녁 때문에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는 등의 팩맨 때문에 야기된 이런 저런 소문들이 우리를 심심치 않게 했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요즈음에도 미국가는 비행기 안에서 거의 4시간 연속 (예전부터 좋아하던) 테트리스 게임에 빠져 있을 때가 있음을 고백한다.

우리가 이 정도니 젊은이들의 게임중독 현상은 더 말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컴퓨터로 인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개인의 고립화 현상이다. 그 고립화가 게임중독을 양산하는 주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임 중독현상은 가족, 친구 등과의 대화 단절에서 부터 시작한 후유증에 다름 아닌 것이다. 심지어 한 집에 사는 가족 간에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각자의 방에 연결된 컴퓨터 메신저를 통해 대화가 이뤄지는 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이번 엽기 부모 사건도 가상 세계에 지나치게 길들여진 나머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상 세계에 더 집착하게 된 이상 행동에서 비롯된 결과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된 데에는 게임문화가 산업을 이끌어 가야한다는 논리로 게임산업 육성에 주력해왔던 정부 당국의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다. 문화부가 게임산업을 규제 대상이 아니라 진흥시켜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면서 이로 인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닌텐도 같은 게임기를 개발하지 못하느냐는 대통령 발언 이후 게임산업 정책과 지원 내용이 환골탈태 수준으로 바뀐 건 사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인터넷 중독자는 약 20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잠정적 폭탄인 그들을 구제하는 일이 시급하다.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우선은 가족과의 소통을 통해 건전하고 건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가족 구성원 모두가 배려하고 노력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고립환경을 개선시킬 수 있는 사회적인 여건이나 국가차원의 시스템을 조성하는 일이다. 현명하게 컴퓨터 주인이 될 수 있는 노하우를 가르치는 매뉴얼이나 활발한 사회참여를 유도하는 사회적 메카니즘도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건전한 게임문화 조성에 각별한 노고가 필요하다.

근본적 예방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쳐가는 사이버 세상을 바로잡는 일이 우리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문제라는 데 인식을 함께 하자.
(2010.3.6)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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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4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청년 실업

청년실업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모태범 포즈를 잡으며 밴쿠버 동계올림픽 대표단 선수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는 동안 ‘40만 청년백수’의 우울한 소식이 각 언론매체를 타고 흘러나왔다.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실업난을 겪고 있으며 위기에 처한 우리 청년의 현실을 걱정하는 내용일색이었다.

상반된 현실 앞에서 동계올림픽 흥취가 확 깨는 느낌이다.

졸업하자마자 백수가 되는 ‘졸백’, 백수를 피하기 위해 5년째 대학을 다니는 ‘대오족’, 실업자나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청년실신’, 아르바이트로 부족한 학자금을 충당하는 ‘알부자족’, 5000원으로 하루를 사는 ‘5천원족’ 등 최악의 청년실업 세태를 반영하는 신조어만으로도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는 박물관에서, 현실은 시장을 통해 그리고 미래를 보려면 청년을 만나라는 얘기가 있다. 온 세계가 동계 올림픽에서 선전한 우리의 청년들에게 열광하고 있지만 우리의 미래도비슷한 광도를 보장받을 수 있느냐에 대해선 확신이 서지 않는다. 지나친 비관을 탓하기에는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너무나 암울하다.

지금 당장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우리 국가적인 문제로 발전할 수 있겠다 싶어 가슴이 답답해진다.


솔직히 그동안 정부가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떠들썩했지만 청년 실업 해소에 그다지 실질적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적선하듯 일자리를 만들어 월급 몇 푼 주는 것으로 통계 수치에 치중했을 뿐 근원적인 청년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한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마치 환자가 복통을 호소하는데 환자의 배꼽에 옥도정기 발라주는 정도의 처치에 그친 돌팔이 의사의 미흡한 처방을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청년 실업에 대한 안일한 정부의 현실인식은 얼마 전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통령은 청년실업 문제에 대해 정부정책이 절박감 없이 구태의연하다고 질책하기도 했지만 정작 청년들의 자활노력과 취업 당사자들의 눈높이를 언급,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야 할 정부가 구직자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반발여론에 부딪힌 바 있다.

당장 청년실업을 해결할 대책이나 묘안이 마련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우선순위로 처리해야 할 긴급한 사안임에는 틀림없다.



이제는 모든 분야에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단계에 오른 우리다.

우리 젊은이들이 스포츠 뿐만 아니라 바둑, 예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덕분에 스포츠가 됐건 IT분야가 됐건 예술 분야가 됐던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제2, 제3의 밴쿠버 축제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 있는 것이다.

굉장히 원론적인 얘기인 것 같지만 젊은이들에게 저마다의 환경에 걸 맞는 비전을 심어주고 분발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정부정책이 시급하다.

예를 들어 밴쿠버 쾌거만 해도 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스케이트 종목을 골라 세계적인 비전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 성공을 거둔 케이스다. 캐나다에서 빙상으로 대한민국 위상을 높였던 청년들이 수영장에서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젊은이 저마다에 맞는 비전을 펼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는 일이 우리 기성세대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기성세대가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미래인 청년들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열정을 다 할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



문제는 아직도 시험석차로 등급을 매기는 일이 횡행하는 현실이다.

성적 순위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판정하는 일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개인의 독창성이나 창의성 배려에 미진해질 수 밖에 없는 모순이 걸림돌로 작용하는 현실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40만 청년실업 현실은 예상되는 또 다른 방향의 후유증 때문에 그 심각성이 더하다.

이대로 방치되다간 사회 전반적인 생산력 저하나 청소년 무기력증이 양산될 뿐 아니라 청소년 범죄 확산도 피할 수 없다. 결국 이런 사회 문제들이 누적되다 보면 대한민국 미래의 동량이 돼야 할 청소년들이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사이에 치명적인 사회암적인 요소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하게 된다는 다급함으로 청년실업을 인식해야 한다. 청년 실업의 후유증이 국가 재난 못지 않은 아주 무서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닌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길 바라는 충정으로 이 글을 쓴다.
(2010.3.5)

....홍문종 생각


홍문종 네이버 블로그 : http://blog.naver.com/mjhong2004

2010년 3월 3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서울 꼴등?

서울 꼴등?


서울 지역 학생들의 기초학력에 켜진 경고등으로 ‘사람은 서울로 조랑말은 제주도로’라는 옛말이 무색해졌다.

2009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일부 ‘사교육 특구’를 제외하고는 서울의 중고등학생들의 국어·영어·수학·과학·사회 등 주요 과목의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강남과 비강남 간의 여전한 학력 격차도 문제점으로 지목되는 분위기다.

이번 평가에서 기초학력 미달 비율 ‘0’ 실적을 보인 강원 양구와 충북 옥천 지역의 경우 서울의 강남 수준을 능가해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옥천은 영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서울 강남을 앞섰고 5개 과목 중 사회를 뺀 4개 과목에서 기초학력 미달 학생이 전무한 양구도 수학에서 강남을 앞서거나 영어와 과학은 비슷한 실력을 보였다.



강남권의 선전은 익히 예상한 바지만 옥천과 양구의 활약은 주목해 볼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일체의 사교육 없이 부족한 교육 여건 속에서 실로 놀라운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이들이 두각을 보일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해 나름대로 분석해 봤다.

강남의 경우 사교육 등 엄청난 물량공세가 크게 작용한 데 반해 이들 학교는 교사들의 열의와 학생들의 학습의욕, 동문과 학부형 그리고 지역사회가 혼연일체가 되어 교육에 쏟은 관심에 힘 입은 바가 컸음을 알 수 있었다. (역시 교사나 학생, 사회의 주변적 요소가 교육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는 나의 평소 지론이 틀리지 않았음을 새삼 확인했다)

물론 교육하는데 있어 사교육 등 교육비용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물량공세나 사교육 등의 요소만으로는 교수능력 제고나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유도해내는데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이에 따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 보다는 교사 ,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가 얼마만큼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느냐가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 옛날 우리가 학교 다닐 때와 비교한다면 지금은 군소도시의 일반학교도 소위 서울의 명문학교 수준에 비해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교육수준이나 교육에 기울이는 관심의 정도가 높아졌다. 교사들의 교수법을 비롯 학생들의 학습동기 부여를 위한 방법론 등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번 조사에서 나타난 지역별 학력격차의 일차적 책임은 일선교사에 있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학습의욕 고취나 커뮤니티 참여 독려, 학부모의 관심을 촉구할 수 있는 최일선 당사자고 또 교육을 업으로 한다는 측면에서 교사들의 책임과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매관매직이나 하고 있었던 서울시교육청의 ‘꼴등’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교육적 성과를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게 있다. 그것은 나라 전체가 교육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공동의 지향점을 갖자는 것이다. 전인교육과 개인의 자질개발이 전제되는 건 물론이다.

경민 학원의 경우 ‘孝교육’을 전인교육의 강령으로 삼고 있다. 부모 사랑이 국가는 물론 자기 자신을 자중자애 하게 이끌어준다는 孝사상을 바탕으로 개인자질의 극대화를 위한 자기 개발 교육을 유도하고 있다. 동일한 교육이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일관되게 이뤄지는 우리의 전인교육 시스템이 교육적 효과를 높이는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해법이 없거나 몰라서 일선 교육의 문제점이 시정되지 않는 건 아닐 터다.

해답이 이미 있다. 그런데도 이를 외면하고 있는 건 더 큰 죄다.

새 학기가 시작됐다.

이번 학업성취도 평가가 교사들의 분발을 일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0.3.3)
.....홍문종 생각


홍문종 네이버 블로그 : http://blog.naver.com/mjhong2004

홍문종 생각- 일본을 품자

일본을 품자


3.1절을 맞아 한국과 일본의 네티즌들이 사이버 전쟁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뤘다는 소식이다. 한국의 네티즌들의 공격으로 한국 비방 글을 빈번하게 올리던 일본 인터넷사이트 '2ch'가 다운되자 일본 네티즌들이 사이버외교사절단인 ‘반크’ 웹사이트와 청와대 사이트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이번 싸움의 직접적인 원인은 2ch 이용자들이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김연아 선수에게 심판 매수설을 제기하는 등 한국의 네티즌들을 자극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왕에도 사안이 있을 때마다 서로의 게시판을 공격하는 사이버 전쟁이 빈번했다. 양국사이를 흐르는 감정대립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우리에게 있어 가깝고도 먼 나라다.

일본은 이미 4,5세기 경 임나일본부를 한국에 두고 우리를 통치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고 우리는 우리대로 신화 속의 일왕세대 7왕자가 김수로왕의 자손들이고 일왕이 김수로왕의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저렇게 따지다 보면 일본만큼 우리와 많은 연관성을 가진 나라도 없다. 거의 형제의 나라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만큼 유사성이 많은 양국이다. 왕인이나 아직기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백제나 신라 시대에 수많은 이주민들이 일본에 흘러들어가 우리 문화와 함께 정착한 사실이 있다. 아직도 일본 도처에 남아있는 우리의 문화유산과 가르침의 흔적이 한일 간의 긴밀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골육상쟁의 후유증 같은 양상으로 대립과 반목이 심화된 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한일 양국 심층 저변에 미처 씻어내지 못한 저간의 사정들이 묵직한 덩어리로 남아 민감한 자존심 문제가 됐는지도 모른다.



한국과 일본은 축구경기를 한 번 해도 국가간 자존심 문제로 비약돼 국민전체가 끓어오른다. 이번 밴쿠버에서의 김연아 심판 매수설 역시 그렇게 해서라도 (금메달을 따지 못해)상처난 자존심을 치유받고 싶었던 일본인들의 심리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한일 간의 치열한 경쟁의식이 두 나라를 동반상승 시키는 효과를 말하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지나친 갈등국면이 화근을 불러왔던 경험은 적지 않다.

이런 한일 관계에 비해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영국의 관계는 상당히 합리적인 양상이어서 대조적이다.

미국은 영국에서 온 청교도가 만든 나라다. 캐나다 역시 프랑스와 영국이 개척한 식민지로출발한 나라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이들 국가들은 같은 나라라는 착각을 불러올 만큼 때마다 긴밀한 공조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영국 미국 캐나다의 동맹관계는 미국이 세계 최강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고 캐나다와 영국의 발전에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미국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보스턴 티파티에서 시작된 독립전쟁 이후의 크고 많은 갈등이 이들 사이를 갈라놓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기저에 깔린 동일민족이라는 인식을 매개로 과정 속에 파생된 여러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동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 같다.



치열하고 무서우리만큼 조직적이었던 일본이 최근 들어 해이해지고 방심하는 분위기를 보이는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피로감 때문인지 게으름 탓인지 모르겠지만 일본이 뒷걸음질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반면에 우리는 토인비 말마따나 이제 동진하는 문명이 태평양을 건너 우리 손에 잡힐 듯 말 듯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요즈음이다. 우리가 욱일승천의 기개로 일본을 능가하고 있는 여러 정황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우리가 협량한 생각을 버리고 일본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면 지나친 오만함일까?

우리가 식민 상태가 있긴 하지만 일본이 망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대범한 가르침을 기억하자. 일본을 넘고 중국을 넘어 세계로 우리의 갈 곳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필요한 21세기 대한민국에 시의 적절한 조언이 아닐까 싶다.



우선은 우리가 일본을 품는 방식으로 일본과의 동반상승을 리드하는 포용의 리더십으로 치고 나가자.

삼일절 즈음에 해 본 생각이다.
(2010.3.2)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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