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30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사전 준비 효과

사전 준비 효과

청와대 만찬에 다녀왔다.
방한 중인 멜라스 에티오피아 총리와 아프리카 문화예술계에 관계하는 국내외 인사들을 위한 자리였는데 나는 ‘아프리카 예술박물관’을 운영하는 인연으로 초청대상이 됐다. 그동안 정치적 동기로 청와대를 방문하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문화예술 관련해서는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약간은 색다른 기분이었다.
대통령도 만났다.
그런데 할 말이 많아 보였고 실제로 많은 말을 했던 YS나 DJ 등 두 역대 대통령과는 많이 달라보였다. (YS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열심히 일하는 대통령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국민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뭔가 많이 지치고 피곤해 보여 왠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내 느낌이 전달됐던 걸까? 때마침 테이블에 동석한 대변인이나 수석 등 보좌진들이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 항상 주빈으로 처세해야 하는 대통령의 피곤한 일상을 화제로 삼았다. 대통령의 고독한 뒷모습을 들여다 본 듯해서 나도 모르게 측은지심이 발동됐다.

때가 때인지라 어디를 가도 차기 대선 주자들에 대한 하마평이 넘친다.
다음엔 과연 누가 대통령이 될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인사는 단연 안철수 씨다.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듯 안철수 현상은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의 산물로 기존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 염원이 만들어 낸 로망이다. 그 중심에 안철수 씨가 서 있는 것이다.
숱한 갑론을박이 ‘안철수’ 언저리를 맴도는 가운데 그의 행보에 많은 이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안철수 식 정치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다. 그의 멘토 그룹조차도 안철수 정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관측대로라면 그의 대선 출마는 기정사실이 될 것 같다. 조만간 그의 입장이 구체화 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실체도 없는 안철수 씨를 관련짓지 말라는 일부 친박 인사들의 과민한 반응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피선거권을 제한받지 않는 한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대표나 손학규 민주당 대표, 또 그 밖의 잠룡 누구라도 대선 경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마당이다.

중요한 건 제대로 된 인물을 가려낼 수 있는 현명하고 올바른 국민적 안목이다.
그러나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면 대통령 직무를 보좌하는 참모진들의 역량이다.
그동안의 대선 후보군 면면을 살펴보면 대통령이 되기 위한 준비가 미흡했던 안타까움이 있다.
개인의 기량 때문이라기보다 국가적 여건이 대통령이 되기 전 부터 제왕학 훈련을 통해 ‘대통령감’을 양산해낼 정도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대통령 직무수행을 돕는 인재 확보가 그 괴리를 메울 수 있는 또 다른 최선이라는 생각이다.
워낙 비밀에 싸여있고 의사결정이 단순하지 않은, 그래서 매 사안마다 어렵고 고독한 결단이 요구되는 대통령 직무의 특성 상 준비된 인재는 생각 이상의 능력과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호흡이 맞는다면 대통령 업무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직항로가 될 수 있다.
인재확보를 위한 사전 노력은 아무리 챙겨도 부족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량 참모가 국정을 농단하거나 대통령을, 그리고 국민을 어려움에 빠뜨린 경험이 적지않은 우리다.

따라서 내년 대선을 통해 꿈을 이루고자 한다면 ‘어떻게 유권자의 마음을 끌까, 어떻게 해야 표를 많이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 못지않게 어떤 인재를 국정운영 파트너로 삼을까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개인적으로 마냥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닌 만큼, 현실을 미리 파악하고 이에 따른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안목도 인재의 사전 확보를 통해 거둘 수 있는 효과다.
이른 바 창살 없는 감옥을 소화할 수 있는 내공의 단련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유리한 차별요소를 가지고 있다.
유일하게 직간접적으로 대통령 수업을 받은 측면은 남다른 경쟁력을 갖췄다 할 수 있다.

어찌됐든 대한민국 21세기를 이끌 중요한 선택이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길 바란다.
좋은 대통령을 모시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다보면 언젠가는 우리 역사의 위대한 대통령을 남기게 될 날이 올 것이다.

(2011. 11. 30)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9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여검사, 너 마저?

여검사, 너 마저?


최근 검찰을 떠난 두 전직 여검사의 엇갈린 행보가 화제다.
벤츠와 법인카드, 샤넬가방 등을 대가로 한 부당거래로 물의를 빚은 李모씨와 검찰이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키지 못해 검사로서의 자긍심이 무너졌다는 쓴 소리로 주목을 받은 白모씨가 그 당사자다.
특히 대가성 뇌물과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와의 부적절한 처신 등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李모씨의 경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검찰조직에 또 다른 상처를 안겨주는 핵폭탄이 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금품 로비 리스트가 담긴 ‘이국철 비망록’에 11명에 달하는 검사장급 이상 고위직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곤혹스러운 검찰 입장이 더 난감하게 됐다.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로 대변되는 오명과 비리의 악몽이 되살아나게 될까 전전긍긍하는 초조함이 역력하다.

이대로 영원히 검찰의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건 검찰의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검찰이 국민 눈 밖에 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검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 역시 대부분 검찰의 설자리를 축소시키는 악재들뿐인 현실이니 답답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절대적인 국민 성원이 검찰을 받쳐주던 때가 있었다.
참여정부 당시 대선자금을 수사하면서 성역없이 칼을 들이대는 검찰에 가장 먼저 환호하고 힘을 실어준 건 국민이었다. 검찰이 본연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자 국민이 먼저 알아보고 나선 것이다. 송광수 검찰 총장은 대번에 국민 영웅으로 부상하고 ‘국민의 검찰’이라는 이름의 팬클럽이 결성됐다. 팬을 자처하는 이들이 소임을 다해 일하라고 검찰에 보약을 보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일장춘몽으로 끝나긴 했지만 결국 환대도 멸시도 스스로 하기에 달려있다는 걸 입증한 사례다.

진실로 검찰이 개혁되기를 원한다면, 진실로 검찰이 국민이 사랑받는 기구로 거듭나길 바란다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해야 한다.
이 제안은 새삼스럽지 않다. 현실적 대안이라는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빛을 보지 못한 오래된 정책이다. 거듭되는 탈락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끊임없이 그 필요성이 제기되는 건 효율성에 대한 확신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이다.
검찰이나 국회의원 등 고위공직자의 지나친 권력은 제한해야 한다.
대통령 직속기구로 두고 검찰 총장이 아닌 대통령의 직속기구로 운영한다면 방만한 권력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검찰이나 국회가 대통령에 예속되는 어려움이 없지 않지만 지금으로선 과도기적이기는 하지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본다.

검사 임용제도에 대해 좀 더 세심한 보안도 검찰의 신뢰회복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고시성적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현재의 임용제도는 제고돼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좋은 검사가 되기 위한 일정한 트레이닝 과정을 거쳐야하는 건 물론이지만 그보다 앞서 검사로서 마땅한 자질과 인성을 검증하는 것도 임용조건에 주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법을 전공하지 않은 입장에서 검찰의 생리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가 될지 모르지만 일반 기업 채용과정에서도 면접이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한 현실에 비하면 대한민국 최고 기관인 검찰의 인재 채용과정에서 이런 측면이 등한시 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다. 공정성의 담보가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최소한 임용대상자의 생활환경이나 자질을 체크하는 과정이 경시된 채 그저 지식 위주의 평가 기준은 심각한 후유증이 예상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풍토가 불합리함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는 만큼 이 역시 하루빨리 개선점을 찾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절대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게 돼 있다는 건 역사가 입증한 바다.
약일 수도 있지만 독이 되기도 하는 권력의 속성을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절대권력의 유일한 성지를 꼽는다면 아마도 검찰이 아닐까 싶다.
끊길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검찰의 뒤틀린 행태가 개선되지 않는 건 절대권력의 아우라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실제로 그 절대권력이 국민으로 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검찰을 만들어냈다. 검찰총장이 바뀔 때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신뢰받고 깨끗한 검찰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보이지만 현실이 늘 그 나물에 그 밥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검찰 자신은 스스로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는 지 궁금하다.
설마 부패의 온상이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권력만 손에 쥐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자족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결국 조직의 정화는 스스로의 용단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맞다.
그래야 결정적 힘이 발휘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국철 비망록에서 로비대상자로 거론되는 11명 검찰 고위인사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2011.11.29.)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8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매 맞는 공권력

매 맞는 공권력


지난 주말 FTA 반대 시위현장에서 발생한 종로 경찰서장 폭행 사건을 둘러싸고 진영논리가 뜨겁다.
정부 여당과 경찰은 공권력 침해라며 강경 대응방침을 천명하고 나서는 가하면 야당과 집회관계자들은 시위대를 자극해서 폭력을 유도한 경찰에 책임이 있다며 반발하는 모습이다.
특별히 어느 한 쪽을 두둔하거나 폄훼할 의도로 이 문제를 거론하는 건 아니다. 어느 쪽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될지는 결국 시간이 해결할 일이 아닐까 싶다.
다만 공권력에 대한 폭력문제 만큼은 다른 각도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본다.
이번 폭행사건은 시위현장의 특성 상 흥분이 고조될 수 있고 군중심리 등으로 부풀려진 감정의 과잉현상이 초래한 부정적 결과물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매맞는 공권력이라니 어이가 없다.

미국의 데모 현장을 보면 우리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많다.
일단 법을 어기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성역없이 공권력의 엄격한 제제가 가해지는 모습부터가 낯설다. 미국사회에는 원칙적인 법 집행을 능가할 그 어떤 권력이나 여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시위현장에서 국회의원이 체포되거나 대통령 자녀들이 질질 끌려 나가는 모습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2011년도 연방 정부 예산 통과를 항의하던 워싱톤 DC 시장이 수갑이 채워진 채 체포됐는데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불법 시위 및 통행방해죄’였다. 수단 정부의 인권탄압을 항의하던 하원의원들도 불법시위를 벌인 혐의로 무더기로 잡혀갔다. 역시나 수갑이 채워진 채였는데 그들 중엔 서열 10위권 내의 여당실세도 포함돼 있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보면 살벌할 수도 있을 미국의 시위문화에서 고급스런 안정감이 감지되는 건 그다지 생경한 일이 아니다. 수갑을 채우는 경찰이나 체포돼 끌려 나가는 시위대 사이에 상당히 안정적인 교감이 이뤄지고 있기에 가능한 정서이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스스로의 불만을 표출하다 체포되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이는 법을 준수하면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의 역할을 다하고 불법적이면 준엄한 법의 집행자로 바뀌는 룰을 정확히 알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그 범주 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서로의 방식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시위 문화는 상당히 감정적이다.
서로의 뜻이 어우러지고 하나가 될 경우 폭발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풍부한 감성은 우리 국민이 갖고 있는 정서적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냉정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정서에 치우치게 되면 이번처럼 경찰서장 폭행이라는 부정적인 에너지로 표출될 때도 있다.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로 상징되는 대한민국의 응원문화는 우리의 국민적 열정이 집단 에너지로 산화돼 이뤄낸 쾌거다. 전 세계가 경이로움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때의 감격이 지금도 생생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뜨거운 국민적 기질이 또 다른 차원으로 세계를 놀라게 할까봐 걱정이다. 특히나 외국에 ‘치안이 잘돼 있는 나라’ 이미지로 호감도를 올리는 우리의 관광 홍보 전략을 감안한다면 단순한 기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하기야 국회의원들이 망치를 들고 국회 기물을 부수거나 본회의장 안에서 최루탄까지 터뜨리는 마당에 시위문화가 무슨 의미일까 싶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다.

정부와 국민의 관계가 존속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시위문화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민주사회에서 다수의 의견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자리잡은 이상 이런 식의 불상사는 항존하게 돼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시위문화 정착을 위해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시위를 통해 의견을 표출하는 방법이나 시위현장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금도를 비롯한 각종 룰에 대한 교육도 그 일환이 될 것이다. 준법 투쟁 등 구체적인 시위 관련 사안을 사회 교과서의 한 부분으로 넣어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의사를 표현하는데 있어 통제되지 못해 과격해진 감정이 허용되는 사회라면 그로인한 혼란은 불을 보듯 환하다.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일등 대한민국의 길도 요원해 질 수 있다.
혹여 시위하는 입장에서 배부른 자들의 지나치게 통속적이고 일방적인 잣대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정말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할 상황인데도 계속 강자의 논리만 부각되고 존중받는 사회가 정상적이냐며 상황인식 부재라는 우려와 반박이 쏟아질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 불만을 혁명적 상황으로 몰고 가려는 시도가 최선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국가 사이의 분쟁을 전투로 해결하는 게 능사가 아니듯이 말이다.
항상 주장하듯 위대한 나라는 위대한 국민이 만들었다.
위대한 국민, 위대한 나라가 되기 위해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아직은 많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꿋꿋하게 해낼 수 있다. 해결할 수 있는 자신감과 역량이 있다.
다만 매맞는 공권력 문제가 우리의 '위대한' 프로젝트를 가로막는 불상사가 되는 일은 없어야겠다.

(2011. 11. 28)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7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문화 경쟁력

문화 경쟁력


크라운 해태제과 윤영달 회장님의 초대로 모처럼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양주 아트벨리에서 ‘양주풍류악회’ (은퇴한 국악 명인으로 구성된) 공연을 통해 궁중음악 향연에 동참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국악계에서 내로라하는 명성답게 문외한인 내게도 상당한 내공이 느껴지는 수준높은 공연이었다. (공연이라기보다 명인들의 리허설 장면 관람을 허락받았다는 표현이 더 옳을 듯하다)

궁중음악엔 지휘자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서양음악과는 달리 당김과 받침만으로도 끌어주고 치워나가면서 가슴 속 내밀한 부분까지 헤집어 포착한 흥과 가락을 일사분란하게 표출하는 감동이 있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조화로움이었다. 설움인지 통한인지 모를 감정들이 어깨춤에 실려 배출되면서 오래 묵은 체증이 해소되는 이 느낌도 우연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뒷 줄 왼쪽부터 해금 이기설, 강사준, 정수년, 대금 홍종진,
피리 곽태규, 정재국, 장고(회장) 김정수, 해설 황준연
앞 줄 왼쪽에서 세번째 크라운해태 윤영달 회장님



공연에 대한 감회 못지않게 윤영달 회장과 나눈 대화가 유의미했다.
윤회장은 ‘한국의 21세기는 아트’라는 지론으로 문화 후원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이는 분이다. 양주 아트벨리는 크라운 해태제과에서 인근의 모텔 대여섯개를 매입해서 조성한 문화공간으로 그의 열정이 토대가 된 구체적 결과물 중 하나라 하겠다. 얼마 전에는 국악에 대한 열정으로 국악인 활동을 꾸준히 후원한 공로로 20번째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제품들은 똑같은 기계와 기술로 생산된다. 각국의 제품들이 더 이상 변별력을 갖기 어려운 이유다. 제품에 문화나 예술혼을 불어넣는 식의 새로운 시도만이 차별화에 성공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에게 예술을 배우게 하고 체험시키는 과정에 공들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술적 감각이야말로 21세기 경쟁력에 있어 가장 확실한 승부수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란다.

윤회장의 주장은 상당부분 일리가 있다. 21세기를 주도하고 싶다면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의 말마따나 평범한 제품에 예술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면 사람들의 욕구나 취향을 더 반영한 제품 생산이 가능해지고 이것이 21세기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비슷한 내용을 접한 기억이 있다.
일본 제품이 한국 제품과의 경쟁에서 뒤지는 이유에 대한 전 주한 일본대사의 설명을 통해서다.
그는 지나치게 질적 가치를 강조하는 일본제품이 고급화에는 성공했지만 경쟁력이 취약하다며 실용성 문제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반면 현실성에서 우위를 점한 한국 제품들은 21세기가 요구하는 감각과 흥취를 잘 표현할 수 있어서 경쟁력에서 앞섰다고 했다.

그와 더불어 아트벨리와 아프리카 예술박물관 발전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이 더없이 즐거웠다. 좋은 이웃을 만난 것 같아 행복했다. 무엇보다 문화 전령사로서 뚝심을 보이시는 윤회장에게 맏형같은 듬직함이 느껴져 좋았다. 쌈박질하는 정치판 때문에 깊어진 한숨 속에서 문화의 향취로 세상을 정화시키려는 윤회장 같은 이의 열정이 있어 그나마 세상이 살만하다는 생각이다.
특별한 관심으로 궁중음악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해 준 그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린다.

(2011.11.26.)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감사의 힘

감사의 힘

연일 끔찍한 사건의 연속이다.
사소한 이유로 자식이 부모를, 남편이, 아내가 배우자를 죽이는 극단의 사건이 줄을 잇는다. 악연의 퍼레이드에 더 이상 놀랄 가슴도 남아있지 않다.
눈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 충격적인 상황들을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스스로가 놀랍다. 우리가 지금 엄청나게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반증인 것 같아 씁쓸하다.

이번에는 고3 아들이 어머니를 죽였다.
8개월 동안이나 시신을 방치한 채 집에서 함께 지내다가 발각됐다.
전국 1등을 강요하는 ‘엄마’의 폭력이 무서웠다는 게 살해 동기란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요구한 건 오로지 1등이었다. 공부만이 아들의 성공적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확신했던 것 같다. 지나치리만큼 아들의 공부에 집착했다. 어머니는 ‘밥을 굶기고 잠을 안 재우고 골프채로 때리는’ 식의 체벌로 아들의 선전을 독려했다. 아들의 성공을 바라는 나름의 사랑법이었을 것이다. 아들 역시 그런 어머니의 명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국 1등이 아닌 성적으로 어머니를 설득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아들의 이성을 앗아갔다. 이들 모자의 엇갈린 사랑법이 좋은 결말을 내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는 차디찬 시신으로, 아들은 어머니를 살해한 패륜아로, 서로의 운명을 구겨버리는 존재가 되었다.
복잡해진 사회적 상황만 탓하기엔 18세 범인의 나이테가 너무나 푸르러서 마음이 아프다.

인간은 미완의 존재다.
문제를 안고 살아야하는 운명인 만큼 더 없이 불완전하다.
해법을 찾자면 자족하면 된다.
결국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고 주어진 상황에 자족하고자 하는 마음자세에서부터 인생의 해법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똑 같은 분량의 물이 병속의 있다. 같은 분량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것밖에 안남아’ 부족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이만큼이나 남아’ 풍족한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만족과 불만족의 차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당사자의 마음 상태에 달려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앞서의 불행한 모자도 어머니가 전국 1등에 못 미치는 아들의 부족한 실력을 탓하기보다 병치레 없는 건강에 방점을 두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체벌의 형태가 아닌 부드러운 스킨십이나 상호 교감으로 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면 지금쯤 아들의 진로를 위해 가장 중요한 활약을 벌이고 있지 않을까?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 차디찬 감옥에서 인생을 포기하는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구절의 긍정적 효능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는 기사가 화제다.
화가 나고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감사한 마음이 뇌의 재설정 버튼을 누른 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어지는 건 물론이고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로 다른 사람과 활발한 교감을 나눌 수 있게 되면서 승리에 도취된 듯 감정의 선순환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놀라운 정보다.
인간의 평화를 가장 강력하게 조정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감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순기능이 아닐까 싶다.

감사는 주어진 상황에 대한 자족감과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 부모는 자식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한다면, 자식은 자신을 위해 그토록 큰 사랑과 관심을 들이붓는 부모에게 감사할 수 있다면 불만이 비집고 들어설 틈이 있을 리 없다. 작은 일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부모 자식 사이는 물론이고 부부나 형제, 친구들이 미움과 반목으로 서로에게 독화살을 날릴 이유가 없다.
돌아보니 내 삶에도 감사할 거리가 넘친다.
힘들고 어려울 때 건강한 체력을 주셔서 감사하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늘 내 뒤를 든든히 받쳐주시는 양친 부모님 건강이 허락되는 상황 역시 크게 감사드릴 일이다.

감사는 역시 힘이 세다.
순식간에 동토의 왕국에 훈풍을 불어넣고 희망의 싹을 틔운다.
혼자만 알고 있기엔 이 기적같은 기능이 정말로 아깝다는 생각이다.
이 참에 감사 확산 운동이라도 펼쳐볼까 싶다.
최소한 우리 사회에 끔찍한 소식들이 판을 치지 못하도록 강력한 방어제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2011.11. 25)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4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늙은 당나귀의 기지

늙은 당나귀의 기지


공지영, 그녀는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최근 우리사회를 뒤흔든 영화 ‘도가니’의 원작자도 그녀다.
평소 공지영 작가의 소설을 즐겨 있는 편이다.
세상에 대한 신선하고 솔직한 시선이 느껴지는 그녀의 작품이 좋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다른 세 아이를 키우면서도 언제나 당당하게 스스로의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그녀에게서 작가의 무궁한 저력을 엿볼 수 있어 즐겁다. 거기다 다른 이의 삶을 보듬는 그 여유로움이라니.
근래에 접한 작품은 그녀에게 ‘이상 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맨 발로 글목을 돌다’라는 단편인데 작가의 존재감을 새롭게 각인시키는 수작이었다.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다분한 건 다른 작품과 다를 바 없지만 유난히 마음을 건드리는 여운 때문에 한참을 멍하니 있어야 했다.

그런 공지영 작가가 작품이 아닌 트위터 맨션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의가 있다.
그녀는 한미 FTA 인준안 처리와 관련된 정치적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민주당은 '민한당 이민우 총재 이후 가장 형편없는 야당'이라고 질타했고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는 ‘한나라당에서 파견 나온 거 맞냐’는 물음표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공 작가라고 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녀 자신이 그동안 스스로의 작품을 통해 누누이 비판해왔던 또 다른 의미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라고 볼멘 마음이 된다.
물론 작가 개인의 자유 영역이겠지만, 또 개인적으로 손 대표와는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는 부분이 많은 게 사실이지만 그렇게 매도당할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지않은 교류를 통해 비교적 손 대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게 그는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영국 신사 같은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런 그이기에 한나라당에 있을 때 늘 아슬아슬했다. 그리고 민주당에 온전히 적응하기에는 그의 정치적 레토릭이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한나라당에서 파견된 손학규’ 표현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적 행위에 책임을 지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단편적인 정보로 특정인의 전부를 규정지으려는 시도는 폭력과 다르지 않다.
그 고충을 본인 역시 자유롭지 않은 공인의 삶을 경험했기에 모르는 바 아닐 것이다. 여러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당사자로서 동의할 수 있는 부분보다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았던 지난 삶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나 역시 겉으로 드러난 한 두 현상으로 부당하게 평가받아 억울했던 적이 많다. 그런 동병상린이 손 대표를 위한 항변에 나서게 했는지 모르겠다.

동창들이 쓰는 싸이트에 실렸던 늙은 당나귀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느 날 늙은 당나귀가 깊은 구덩이에 빠졌다.
이에 주인은 어차피 늙은 당나귀고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 이참에 흙으로 매장하기로 하고 동네 사람들의 손을 빌려 구덩이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당나귀가 자신을 메우기 위해 던져진 흙을 털어 바닥을 다져가며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기 위해 던져진 죽음의 흙을 생환의 수단으로 활용한 기지가 당나귀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세상의 비난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한다. 포기하지 않는 의지만 있다면 어떤 비난이나 음모 조차도 생환의 발판을 채우는 성장촉진제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타인의 관심을 받고 표적이 되는 삶을 사는 이들은 남들의 비판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어야한다.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이다.

결론은 결국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건 아직도 ‘살아있다’는 증거 아닌가.
이는 여러 모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는 손 대표에게, 어쩌면 순탄하지 않은 정치 일정을 견뎌온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돌아보면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긴 정치 여정이었다. 환희에 빛나는 영광과 서러운 눈물을 담은 고난의 시간이 있었는데 내게 새로운 가능성을 심어준 것은 영광보다는 고난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다.
분명한 건 나를 몰아대던 그 숱한 비난들이 지금 생각하니 세상을 향해 단단히 버틸 수 있는 고갱이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그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2011.11.24.)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3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인분, 그리고 최루탄

인분, 그리고 최루탄


국회 본회의장에 최루탄이 터졌다.

한미 FTA 비준안 표결처리로 긴장이 감돌던 와중의 일인데 여당의 표결 강행에 야당 의원이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 45년 전 6대 국회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이 그것이다.
1966년 정부가 ‘삼성 계열사의 ’사카린 원료 밀수사건’을 미온하게 처리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김두한 의원이 싸들고 온 인분을 국무위원 석을 향해 날린 것이다.
‘인분 투척’은 본인을 포함한 관련자들이 옷을 벗거나 사법처리 되는 성과를 보인 반면, ‘최루탄 투척’은 FTA 저지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고 미완의 소동으로 끝날 조짐이다. (당사자 처벌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두 사건의 결과가 달리 나온 건 인분과 최루탄의 효과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까?)

초선의원 시절, 노동법을 통과시키던 때의 과정들이 데자뷰처럼 스쳐 지나간다. 새벽 시간, 야당 의원들의 눈을 피해 국회 뒷문으로 들어와 표결에 참여하고 안도의 숨을 쉬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당은 강행하고 야당은 거부하고....그 때도 야당은 의회 일정을 거부하고 장외로 뛰쳐나갔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전혀 낯설지 않은 국회의 현주소다.
‘인분’에서 ‘최루탄’으로 바뀌었을 뿐, 여야공수 상황만 뒤집혀 있을 뿐, 본질은 그대로인 채 정치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어찌 그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국회가 바뀌지 못했나하는 아쉬움이 있다.

너무 빤하게 의중을 드러내는 정치인들의 작위적인 작태를 보고 싶지 않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들이 내 안의 어떤 것들이 툭툭 건드리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였을까?
FTA 비준안이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비감스러운 감정에 휩싸이는 경험을 했다.
그래도 국회하면 명색이 대한민국 사회의 최고 엘리트들이 모인 곳이고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망가들이 넘치는 지성의 집산지다. 그런 국회에서 들이미는 자화상이 지나치게 보잘 것 없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민망하고 부끄러운 느낌이 울컥 서글픔으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눈 감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미 FTA 건만 해도 그렇다.
솔직히 정치인은 물론 대부분의 국민 모두, 또 다른 형태의 FTA 결말을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두가 어차피 통과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면서 시치미를 떼고 저마다의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했다. 이미 이런 식의 수순을 밟기 위해 서로가 명분쌓기에 급급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이미 나와 있는 답안대로 찬성 배역은 찬성을 위해, 반대 배역은 처절한 연기로 더 적나라한 비통함을 표현해내기 위해 올인했다. 저마다 자기 말만 해대는 상황극에서 정치인들은 정치 대신 연기를 했다.
이 역시 암묵적인 합의사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그렇게 마냥 느릿거리더니 이제와서는 다른 사람만 문제있다고 손가락질 해대기에 바쁜 모습이다.
참내, 반칙도 이런 반칙이 없다.
FTA가 합의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처리되면 국회의원에 불출마하겠다고 결기를 보이던 초선의원들은 다 어디로 갔나 싶다. 참여정부 시절 그렇게 열렬히 국익을 이야기하며 FTA 처리의 당위성을 역설하던 의원들이 지금에 와서는 단지 야당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변심을 합리화하는 모습은 또 어떻고.
무엇이 최루탄을 동원할 만큼 절박하게 했는지를 논의와 토론으로 설득하려는 노력대신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 놓고서야 결론을 내는 악습을 반복하고 있다.
고쳐보려는 의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불합리한 요소가 국회 무용론을 외치며 새로운 정치 창출을 주장하는 장외 세력의 인기를 일정한 검증절차 없이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솔직히 걱정된다.

개인적으로 한미 FTA를 찬성한다.
국익을 위해 반드시 시행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FTA 처리 과정에서 몰아붙여야 하는 한나라당의 안타까움도 백번 이해할 수 있고 반대할 수 밖에 없는 민주당의 고충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고함치고 아우성치고 밤새 토론하고 또 토론할 지언정 국회에서 단상을 점거하고 기물을 부수고 경호권 발동하고 급기야 최루탄까지 터뜨리는 폭력은 어느 이유에서건 안된다. 반대만을 위한 반대 찬성만을 위한 찬성은 없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정치적 쇼로 연명하려는 꼼수를 더 이상 선례로 남겨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최소한 흑백 텔레비전, 아날로그 시대에나 통하던 방식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현실 인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정치를 정화해 나가는 건 바로 국민의 몫이다.

(2011. 11. 23)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1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신종 망국병

신종 망국병

어려웠던 시절, 외국의 장학금으로 해외유학 기회를 얻어 인재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 적지 않다.
그런 식으로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받은 선진교육을 접목한 결과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궈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6년부터 시행된 미국의 풀브라이트 장학금이 대표적 케이스로 꼽을 만 하다.
미국이 외국에 판매한 잉여농산물 수익금을 현지 적립했다가 해당국가와의 교육문화 교류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는 차원의 장학금이었는데 지금까지 약 120개국 10만 여명의 인재들이 혜택을 받았고 2차 세계대전이후부터 대상국이 된 우리나라는 1000여명이 그 기회를 얻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 장학금이 대부분의 수혜자 인생에 결정적인 기회가 된 것은 불문가지다.
공부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간 장학생들은 저마다의 나라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인적 자원으로 크게 쓰였다. 개인에게만 기회가 된 게 아니다.
미국 역시 이들 못지않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잉여농산물 판매 수익금보다 더 많이 남는 거래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풀브라이트 장학금 인연들이 유력 인사가 되어 세계 곳곳에서 '친미파'나 '지미파'로 활약하고 있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간단하게 답이 나올 것이다.
이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제도를 만든 미국의 본래 의도가 거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 외국인 유학에 대한 장학금이 국제사회 지식인들을 위한 ‘은전’ 개념 정도의 단순한 해석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먹고 사느라 겨를이 없었던 시절에는 생각지 못했지만 우리도 몇 년 전부터 해외유학생 유치를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선 상태다. 그들의 외교적 가치를 수확(?)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2년까지 국내 대학에 외국인 유학생 10만 명을 유치해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내용의 ‘스터디 코리아 프로젝트’가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인지 2011년 9월 현재, 양적 목표치인 10만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외국인 유학생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인 대학가 풍토가 우려를 낳고 있다.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자행되는 인종차별, 특히 중국이나 동남아 출신을 비하하거나 왕따시키는 현실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국익이 뭔지 인식하지 못하는 대학생들이 애써 불러들인 유학생들을 '친한파'는 커녕 ‘혐한파’로 만드는 주범이 되고 있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다.
여론의 질타를 받을 만한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 모른다고 우리 대학생들의 근거없는 이 오만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당혹스럽다.
생각해 보라. 불과 얼마 전까지의 우리 모습을.
그 때 우리도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미국으로, 미국으로 몰려갔었다.
지금 우리가 곱지 않은 눈길을 치켜뜨며 함부로 대하는 이들처럼 가난한 나라 출신으로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기꺼이 낯선 나라를 향하는 선배들이 있었다. 고픈 배를 움켜쥐며 향학열을 태운 결과 마침내 꿈을 이루고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그들이 현존하고 있는 작금이다.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오래 전 자화상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를 찾아온 손님이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만 손님인 게 아니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유색인종도 비전을 품고 우리 대한민국 땅을 찾은 똑같은 손님이다. 양국관계에 도움을 주는 메신저로 활약하게 될 미래상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미래 자원이다.
외국인 학생들 개개인을 보면 국적과 상관없이 나름대로 뛰어난 점이 많다. 그들의 성장을 막고 있었던 낙후된 교육 시스템이 문제가 될 뿐이다.
이제 그들은 한국 유학을 통해 자기 앞에 가로놓인 장애물 치우기에 나선 셈이다. 예전에 우리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머지않아 무한한 잠재능력을 폭발시키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은 그들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와의 관계가 아닌) 다른 나라와 미국이 상충된 이해관계가 될 경우 미국 편을 들게 된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의 작용이 클 것이다.
그런 것이 외국인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자원이 아닐까 싶다.
우리 경민대학에도 외국인 유학생들이 와 있는데 머지않아 대한민국을 위해 전문외교 사절단 못지않은 역할을 발휘해 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그들을 각별하게 대하게 된다. 분기별로 식사자리를 마련하고 대화를 통해 그들의 고충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의 하나다. 정말 기회가 될 때마다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한다. 공부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공항,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까지 대한민국과 경민대학에 대해 좋은 기억을 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을 들이는 편이다.

학교 성적과 취업실적만이 대학생활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더불어 함께 사는 지혜와 덕성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말이 서툴고 낯선 타국에 와 있는 외국 유학생들에게 조금 희생해서라도 다 같이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여유가 개인의 인격은 물론 국격을 높이는 큰 가치라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인간의 희망을 말할 수 있기에 정말로 잊지 말고 챙겨야 할 진짜 과제물이다.

정신적 쇄국주의, 신종 망국병이다.
절대로 피할 일이다.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유학생 99%를 전부 친한주의자로 만들어버리자.

(2011. 11.21)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0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청소년 범죄

청소년 범죄

청소년 범죄가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다.
성인 범죄를 능가할 정도로 흉악의 극단을 치닫는 현상이다.
교육 일선에 있는 입장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게 지독한 개인주의뿐인 가 싶어 자괴감이 앞선다.
치유를 위한 온갖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지 않다.
우리 사회의 동량이어야 할 청소년들의 피폐한 현실이 대한민국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황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경쟁에서의 우위만이 최대의 가치로 인정하는 사회적 폐단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나만 만족하면 공동체 형편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식의 이기심이 질서의식 실종을 빌미로 범죄를 양산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소년 범죄가 기득권층이나 상류층의 여유를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얻어냈다는 가정하에 혹여 그들의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적개심을 자극한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른들의 진지한 반성이 요구된다.
청소년들의 왜곡된 가치관이라고 몰아붙이기엔 기성세대인 우리들의 혐의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지혜롭지 못한 처신이 이제 막 사회로 진출한 새내기들을 백수로 묶어버린 부인못할 현장도 있음이다.

간혹 청소년기의 왜곡된 가치관이 범죄행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습관적으로 남의 것을 훔치는 한국 유학생 동기가 있었다.
그의 거처에 가 보면 도벽이 인연(?)을 맺어준 공항의 기념품 같은 소소한 ‘장물’들이 적지 않은 규모로 진열돼 있었다. 종류도 다양했는데 정작 당사자에게 쓸모있어 보이는 물건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중에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의외의 답변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미국 등 선진국들의 경제발전이 자력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희생을 발판 삼은 것이라는 굳은 신념이 그를 도둑으로 만든 주범이었다. 그의 이론대로라면 도둑질은 복수를 위한 전리품의 일환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구차한 변명으로 들리지 않았던 건 나 역시 청소년기에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들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복잡한 심정으로 선진문명을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선진국 지위를 얻지 못했을 거라는 근거없는 적개심이었다. 심지어 법이 허락하는 범주 안에서 복수하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국내에 있을 때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아주 생소한 정서였다.

청소년 범죄는 분명 교육의 위기에서 비롯됐다.
결자해지 차원에서 청소년을 대한민국 사회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어른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겠다. 효 교육을 중심으로 인성을 배양하는 과정은 그 어떤 교육보다 우선한 가치이고 청소년 범죄를 퇴치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인간의 기본을 구축하는 인성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왜 더불어 사는 교육이어야 하는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특히 더불어 살려면 지극히 당연한 스스로의 몫을 선뜻 포기하는 용기부터 갖출 일이다.
개인의 독창성이나 창조성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완성된 이후의 가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범죄 해소를 위한 접점을 찾아내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협동과 단결을 강조하다 보면 평준화가 만들어 낸 수월성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반대로 학생들의 창의력이나 독창성 등에 방점을 찍다보면 지나친 이기주의다.
따라서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로 정하기 어려운 만큼 결론 자체가 유보적일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건 빠르게 늘고 있는 청소년 범죄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수수방관하지 말고 보다 빠른 진단과 해결책으로 청소년을 지켜냄으로써 사회적 책무를 다하자.
모두의 합일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2011.11. 19)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17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제자리가 제일이다

제자리가 제일이다

요즘 들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주요 이슈는 단연 ‘한미 FTA 협상과 안철수 현상’이다.
하나는 ‘국익’을, 또 다른 하나는 ‘대통령 선거’를 모토로 한 의제인데 대한민국 사회의 관심이 온통 이 둘에 쏠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FTA 샅바싸움으로 일촉즉발 전운이 감도는 정치권은 안철수 변수로 요동치는 가운데 선거정국을 시계제로로 밀어붙이는 형국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논란의 와중에 FTA와 안철수를 잇는 ‘끈’ 하나가 생각의 고리를 끊고 튀어 나온다.
반가운 마음에 블로그 주제로 잽싸게 건져 올린다.

한미 FTA는 개혁개방의 관점에서 해석돼야 마땅하다.
역사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선진의 힘으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그만 협상에 종지부를 찍고 또 다른 아젠다 발굴에 관심을 돌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 흐름을 막는 걸림돌로 인구에 회자되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요소도 있다. 우리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개방의 기회를 놓쳐 정지돼 있는 동안 일본은 문호를 열고 선진문명을 선점했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우열의 간극이 생성된 것이다.

지금으로선 FTA 협상이 우리에게 어떤 대차대조표를 가져다 줄 지 알 수 없다. 다만 이익과 불이익의 경계가 최대한 공평해지도록 배려하는 독려는 있어야겠다. 이익이 나는 쪽은 불이익 측이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도록 살펴야할 책무를 지는 것도 좋겠다.
같은 맥락으로 안철수의 역할론을 짚어본다.

그는 자신에게 의미 있고, 재미있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불확실한 21세기를 살아나가는 키워드라고 했다. 그늘지고 힘든 이들을 위해 돈을 쾌척하고 자신의 기량 껏 봉사하는 것을 자신의 사회적 채무로 규정하기도 했다. 세상은 그런 그를 각종 여론조사에서 경쟁력 있는 대선주자로 올려놓고 기대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일련의 행보로 짐작컨대 그 자신의 속뜻과 얼추 맞아떨어지는 진로같다.
그런데 나는 안철수가 자신에게 맞지 않은 길을 선택하고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4선 국회의원으로 정치판에서 영욕의 길을 걸었던 이태섭 전 국회의원은 미국 MIT에서 촉망받던 과학도였다. 그가 만일 정치가 아닌 과학도의 길을 택했다면 대한민국의 스티브잡스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한 때 인터넷 대통령으로 추앙받던 문국현 전 유한캠벌리 사장은 국회의원으로서의 꿈을 채 피우기도 전에 범법자의 신분이 됐다.
이왕 얘기 나온 김에 성공한 학자였지만 정치권에서는 별 재미를 보지 못한 이수성,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등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인물들이다.

안철수 식으로 따진다면 미국의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가 대통령 후보 0순위로 나섰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현실을 존중하고 지켰다.
정치를 하고 싶었던 스티브 잡스에게 “애플의 스티브 잡스지 정치인 스티브 잡스는 아니라고 만류하며 정치권에 발 들이지 않은 일이 스티브 잡스가 제일 잘한 일이라고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물론 로스페로나 도널드 캠프 같은 미국 재벌들이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배경으로 남자들의 질투심을 지목하기도 한다. 돈 있으면 됐지 무슨 정치권력까지 넘보냐는 식의 시기심이 있단다.
우리의 현실이라고 다른 것 같지 않다. 실제로 FTA 등 주요 정치현안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에게 대중이 짜증 섞인 질타와 의혹의 눈초리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날카롭고 집요한 질문이 이어질 텐데 그 때마다 침묵이나 미소로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가혹한 채찍질로 그의 말문을 열기 위한 노력들이 시도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지도자로서의 소신이나 철학을 밝히라는 요구를 외면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대중은 더 이상 그를 연호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타인을 행복하게 하고 스스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 특히 여태까지 잘 해왔던 일이면 금상첨화다.
내가 만일 안철수의 친구라면 그에게 망설임 없이 권하겠다.
지금껏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가야할 길이라 생각하면 스스럼없이 도전했던 것처럼 그의 길을 가라고. 아무래도 정치보다는 기존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더구나 FTA 정국에서 대한민국 IT 업계는 5천년 역사 이래 최고의 기회를 맞고 있다. IT의 성공이 대한민국 미래를 결정짓게 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엄청난 경쟁력과 함께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선택은 돋보인다.
내 알기로 반기문 총장이 대통령 적임 후보로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 대상이 됐던 건 지난 정권 때부터의 일이다. 그러나 그는 쇄도하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사무총장 연임을 위해 분주하던 올해에도 그의 대통령 출마설이 꼬리를 물었다. 당시 방한 중이던 그는 자리를 함께 한 우리들에게 (사무총장)연임에 방해가 되니 제발 국내 선거에서 거론되지 않게 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지나놓고 보니 그의 유엔사무총장 연임은 본인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나 정말 탁월했다. 그가 지금 유엔을 무대로 보여주는 활약상은 한국의 대통령은 물론 그 어떤 정치 지도자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그의 부친은 교수들이 정치판에 들어가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며 지금까지 존경을 받고 살아온 아들이 정치판에 잘못 들어가 욕을 먹게 될까 노심초사하는 심정을 토로했다. 아들의 성격 자체가 정치판 보다는 공부하고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 맞는데 그런 아들을 정치판에서 난리를 쳐서 끌어들여 고민하게 만드는 게 안타깝다는 취지의 발언도 남기셨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순진무구(?)하고 창조적 아이디어가 많은 이들에게 무덤이 되고 자긍심이나 자존심 따위는 아랑곳 없는 곳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분명 그의 역할이 있지만 정치권 진입은 좀 더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직은 설익은 과즙을 맛보는 어설픈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결국은 시행돼야 할 FTA를 잘 추슬러서 우리 사회에 그늘진 곳까지 잘 비춰지도록 노력하는 것처럼 안철수 역시 뭔가 해야한다면 제일 잘 할 수 있는 최적의 자기자리를 찾으라는 조언을 남기고 싶다.

(2011.11.17.)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15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타인능해(他人能解)

타인능해(他人能解)

타인능해(他人能解, '다른 사람도 쌀 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라는 글이 붙어있는 뒤주 이야기를 들어봤는가. 조선 영조 당시 전남 구례지방에서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 가문의 쌀 뒤주인데 더불어 사는 세상을 실천한 선조들의 아름다운 이웃배려의 단면을 보여주는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류씨 가문은 쌀 2가마 정도가 들어 갈 수 있는 나무 뒤주에 늘 쌀을 채워두고 누구라도 필요하면 마음놓고 쌀을 가져가도록 했다. 특히 뒤주가 있는 부엌에 출입문 하나를 더 달아내 쌀을 가져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배려한 흔적은 감동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삶을 일상화 했던 선조들의 나눔 문화 현장을 생생이 보여주고 있다.
자랑스러워할만한 유산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 원장의 통 큰 기부가 화제다.
안철수 연구소 주식의 소유 지분 절반인 1500억 정도의 거금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결단인데 그 신선함 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솔선수범해서 이 땅의 폐쇄적 기부문화를 바꾸고자 나섰으니 뜨거운 관심을 한 몸에 받을 만하다.
그는 대단한 일을 시작한 셈이다.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 기부문화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있는 그의 행보는 칭송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도 반갑다. 무엇보다 그의 이번 쾌척이 대한민국 부자들의 순수한 재산환원 문화를 여는 기폭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기왕에도 사회지도층의 기부행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기부천사 김장훈씨의 경우는 예외지만) 대부분 강제적이거나 징벌적 의미로 진행된 기부 절차가 도마 위에 오르기 일쑤였던 환경에서 충분히 그럴 만 했다. 특히 재벌가의 경우는 더 그랬다. 공교로운 재산환원 시점으로 구설을 자초했다. 실제 검찰 수사 등으로 위기 국면에 처할 때마다 재벌가가 면피를 위해 재산환원을 처방한 사실은 공개된 비밀이라 할 수 있다.
안원장의 재산 환원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배경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돼야 한다.

안 원장의 행보가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가운데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진정성에 대한 갑론을박이 교차하고 있다. 그의 정치권 진입여부를 두고 많은 이들의 '평론'이 줄을 잇고 있다. 대권행보를 염두에 둔 꼼수라는 지적도 있고 하필이면 지금이냐는 시비도 일고 있다.
이 모든 게 그가 누리고 있는 인기의 무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절정의 인기, 그거 별 거 아니다. 최대로 부풀려진 상태에서 특별한 대책이 수급되지 않는다면 하강 국면에 접어드는 건 눈 깜짝할 사이다. 정치적 야심과 맞물린다면 더더욱 약간의 어긋남에조차 단번에 평가절하되고 마는 안타까움이 있다.
인기의 허망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에 하나 정치적 목적을 염두에 둔 이벤트라면 대중의 독설에 제물이 될 각오를 단단히 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절대로 꼼수가 통할 수 없는 세상이고 호락호락하지도 않은 정치판이다. 선거법 시비나 자기기만이라는 비난에 시달리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재산 헌납 약속과 관련, 꼼수를 부렸다며 호응은 커녕 비난을 받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청계 재단' 이 좋은 반면교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생각을 다지게 된다.
특별히 큰일을 하고자 한다면 더더욱 꼼수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야겠다고.

(2011. 11. 15)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14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화학적 변화라야 한다

화학적 변화라야 한다


신당설이 무성하다.
안철수 신당이니 박세일 신당이니 여야를 막론하고 실체도 불분명한 각종 설들이 그야말로 ‘설설’ 끓고 있는 정국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치열한 경쟁 국면이 펼쳐지는 정치의 계절이 임박해졌음을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하다. 선거 국면에 출마를 원하는 사람들이 넘치다 보니 기존 정당 외의 수요가 요구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거기에 국민 신뢰를 잃어버린 현 정치권에 대한 물갈이 요구가 높아진 점도 그 어느 때보다 신당 창당 명분을 뒷받침하고 있는 분위기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정치상황에 다당제가 적합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어차피 국민에 의한 상향식 공천이 어렵다면 다당제야 말로 정당공천의 폐해를 어느 정도 줄 일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유권자로서는 선택의 폭이 늘거나 다양한 욕구를 반영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정치인에게도 좀 더 명확하게 개인적 소신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는 점에서 다당제에 긍정적 측면이 많다.

물론 경계해야 할 폐단이 없지는 않다.
다당제로 인해 국론분열이 심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조선 멸망을 초래한 주범으로 지목되는 조선시대 당파 분쟁이 그 좋은 본보기다.
우리 역사를 폄하하기 위한 일본의 의도가 깔려있긴 해도 조선 사회를 피로 물들인 각종 사화의 배경이 되었던 사색당파의 치열한 기싸움은 확실히 문제였다. 건전하지 못한 경쟁심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뿐 아니라 조선의 멸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자리를 놓고 싸울 때 그 싸움은 치열해질 수 밖에 없고 결국 그 치열함이 사람들의 이합집산을 이끄는 동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지난 역사를 통해서도 분열이 집단이나 개인을 파멸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통감할 수 있다. 그런데도 패착의 결과를 피하지 못하는 불운이 지금껏 반복되고 있으니 정말 아이러니다.

대권을 꿈꾸는 이들을 둘러싼 암중모색도 갈수록 치열해지는 기색이다.
후보 흔들기도 본격화되는 조짐이다. 이는 내년에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설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 모두에게 적용될 일종의 통과의례가 될 것이다.
이회창 전 총재의 실패가 주는 교훈도 챙겨둘 가치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대선 가도에서 이 전 총재가 다 된 밥을 먹지 못한 데는 IJ와 JP 영입 불발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JP를 영입하라는 조언은 충정도 출신인 내가 왜 그를 데려와야 하느냐는 스스로의 과신 때문에, IJ 포용론은 결국 찻잔 속 미풍에 그칠 것이라는 잘못된 참모들의 전략이 막아버렸다. 그 결과 이 전 총재는 두 번씩이나 다 된 선거를 놓친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반면, YS 집권이 3당 통합이고 DJ 집권은 DJP 연합의 산물이었다. 이보다 앞서 민주화 물결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집권이 가능했던 건 야권 분열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이 같은 역사적 정황은 2012년,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 불신이 하늘을 찌르는 형국이다.
때만 되면 쇄신과 개혁이라는 화두를 들이밀고도 여전히 쇄신과 개혁을 당면과제로 내세우고 있는 한나라당이나 내부분열로 동력을 상실하고도 통합을 앞세운 정치적 수사로 사분오열로 찢긴 약점을 해소하지 못한 민주당이나 국민 앞에서 궁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이 새 인물에 대한 갈증을 자극하는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성급한 반가움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했고 그 결과 ‘열광적 등장과 실망스러운 퇴장’이 반복됐다. 박찬종 변호사나 문국현 유한킴벌리 전 사장의 좌절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안철수 신당도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비슷한 과정의 산물이라는 생각이다.

오죽하면 실체 없는 신당에 기대게 됐을까를 헤아리면 국민 앞에 한없이 죄스러워지는 마음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정치권의 시대착오적 인식이 안타깝다.
신당 창당이나 명망가 위주의 신진 수혈로 면피하려는 의도로 화를 자초하는 형국이다.
겉모습이 아니라 정신상태가 문제인데 무조건 껍데기만 바꾸려고 한다. 국민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 있는 정치를 원하고 있는데 인기몰이식 땜방질로 얼렁뚱땅 위기 국면을 넘겨보고자 하는 꼼수가 역력하다.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다.

지금은 인물영입보다는 유능한 인재들이 관심을 갖는 정당으로의 환골탈태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화학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비장함으로 2012년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2011.11.14.)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12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야간산행

야간산행


야간 산행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 운영방식이 조금은 독특하다.
매월 1회, ‘月, 日, 時, 分, 秒’가 같은 숫자로 겹치는 특정한 순간, 정상에 도착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예를 들어 1월이면 ‘1월 1일 1시 1분 1초’, 2월이면 ‘2월 2일 2시 2분 2초‘에 정상을 찍는 식이다.

11월 11일인 어제가 그 D-day였고 행선지는 백운대 정상이었다.
(백운대가 행선지로 낙점된 배경엔 지난 달 산행의 아픈 기억이 작용한 바 크다)
이번에도 아침부터 빗방울이 흩뿌리는 등 심상치 않은 일기가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지난번과는 달리 산행 내내 신중하고 겸손한 모드를 유지했다.
그리고 드디어 11시 11분 11초에 무사히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사실 등산이라면 나름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멤버들에게 ‘백운대 정상’ 정도를 고지탈환 운운하는 이 글이 결례가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패로 끝났던 지난 10월의 경험에 비추면 그리 과도한 오류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지난 10월 산행 목표는 10일 밤 10시 10분 10초 백운대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북한산을 출발해서 백운대 정상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는데 워낙 많이 다녀 익숙한 곳이고 등산에는 모두들 한가락 한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안개 낀 일기 정도는 간단히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 문제없다며 감행한 등산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선두에 나선 사람이 알아서 안내하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무신경하게 따라가다가 길을 놓친 것이다. 4시간여를 헤맸지만 끝내 정상(그리도 쉽게 생각했던)을 포기하는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길을 잃게 된 이유를 생각해 봤더니 몇 가지 반성의 여지가 있었다.
나친 자신감이 화근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과신이 어이없는 실패를 부른 주범이었다.
실제로 사전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안개 등 등반에 적합지 않은 주변 징후를 무시했다. 백운대 정도야 했던 안일함이 초래한 불명예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의 능력이었다.
무리를 인솔 통제하는 리더의 지휘능력이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 지를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됐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우리의 정치 상황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보고 있다.
리더가 길을 잃자,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북한산을 헤매고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던 것처럼 국가의 운명 역시 지도자의 역량에 달려있다. 국민의 장래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도자에 따라 국민 개개인이 실패할 수도 성공할 수도 있는 기막힌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특히나 대선을 앞두고 있는 우리로서는 지도자 선택에 더 없이 깊은 고민을 해야 할 중차대한 시기다. 이 난국에 대한민국을 세계 지도자 국가 반열에 올려놓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더구나 쉽지 않은 정치상황을 감안한다면 그 어느 때보다 역량있는 지도자의 출현이 갈급한 상황이다.

때 마침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사임이 결정됐다는 소식이다. 앞서 그리스 총리의 사퇴도 세계인의 주목을 끈 바 있다. 남의 나라 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이탈리아나 그리스가 세계 경제 위기의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리더의 교체가 악화일로에 있던 이탈리아 상황을 소생시키는 전환점으로 작용하기를 바라고 있다. 총리가 바뀌고 정치가 바뀐다면 새로운 가능성이 높아질 거라는 기대감이 상승하고 있는 분위기다.
이 역시 지도자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11월 11일 11시 11분 11시.
그 시각 우리는 백운대 꼭대기 있었다.
그곳에서 기도를 통해 저마다의 소망을 간구했다.
지도자 역할의 중요성에 공감하며 꿈과 희망을 함께 다졌다.
10월의 실패를 털어내고 하산하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우리의 미래를 축복이라도 하는 듯 머리 위를 비추는 밝고 명료한 달빛은 더 없는 반가움이었다.

(2011. 11. 12)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10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주먹을 펴자

주먹을 펴자

정치권이 갑자기 과감하고 담대해졌다.
청와대 사과와 당 쇄신 요구에 목청을 높이는 정치적 소신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그토록 이름을 올리고 싶어하던 감투에도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초연한 모습들이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선거의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수명을 다해가는 권력의 끝자락이면 의례껏 출몰하는 선상탈출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다.

사분오열하는 정치판을 을 바라보는 심정이 조마조마하다.
선수들이 오월동주와 동상이몽으로 활로를 모색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건만 4년마다 반복되는 똑같은 레퍼토리에 식상한 탓일까?
이를 지켜보는 국민 눈총이 그 어느 때보다 험악하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렇지 않아도 보기 싫은 정치판을 더 혐오스럽게 만들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위기 국면을 맞은 정치권을 질타하는 말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가히 백가쟁명의 시대라 할 만하다.
그러나 대부분 대안 없는 비판에 그치고 마는 아쉬움이 있다.
정치권이 국민적 공감과 호응을 얻는 집단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구체적인 대안과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정치 당사자의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텐데 눈 앞의 현실은 요원하기만 하다. 쇼맨십만 남발하는 정치인들에게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자신들의 속내를 꿰뚫고 있는 국민이 보일 리 없다.

기득권을 버리고자 하는 진정성 차원의 문제 해결이 진척을 보지 못하는 게 오늘 날 정치추락의 근본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탐욕을 배제한 진정성만이 위기에 빠진 정치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정치인들에게서 진정성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니 걱정이다.
정치판을 구하려면 당 후보를 선택하는 공천권을 당원과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 급선무다.
가장 비민주적 행태의 공천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는 우리의 정치 환경이 가장 선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정당의 공천권 행사가 정당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명제라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보 선택은 당 대표나 당의 유력 주자의 의중에 따라 좌우되는 지금과 같은 체제로는 국민 관심을 끌어낼 수 없다. 이는 오래 전부터 품어온 개인적 소신이다.
기득권이 얼마나 큰 권력이고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포기’만이 유일한 답이라는 주장을 접고 싶지 않다. 그 거대한 권력을 포기하는 순간, 정치판이 확실히 바뀔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분명 엄청난 카타르시스와 함께 하는 국민적 공감대는 물론 정치권에 신선한 활로를 열어주는 위대한 작업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고령자 물갈이론’이 등장했다.
쇄신 운동의 단골 메뉴인 만큼 새삼스럽지 않지만 정치발전을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충분한 논의를 거쳐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한 접근이 아니라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겨냥한 일방적이고 인위적인 기준에 의해 급조된 혐의가 짙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설득력 있는 기준을 만드는 데 실패한 정황이 역력하다. 해당자들의 반발로 당내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데도 선뜻 나서서 이를 설득하거나 반박하는 움직임 자체가 전무하다.
가장 큰 이유는 정당성을 뒷받침할만한 이론 작업이 부실한 탓이 아닐까 싶다.
미국의 경우, 오바마나 클린턴, 그보다 훨씬 앞선 세대의 케네디 등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어 미국 전역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사람들이 물론 있다. 하지만 70세에 대통령이 된 레이건 등 고령의 나이에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는 사례들이 더 많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역시 죽는 순간까지 상원의원으로서의 소임을 다했고 국방장관을 지냈던 서먼드는 100살까지 상원의원을 했다.
저마다의 특성과 강점이 한데 어우러질 때 효과가 가장 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정치는 노장청의 어울림이 집단적 시너지로 작동하는 특성이 더 강한 분야다.
노인세대에는 젊음과 패기만으로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경륜의 에너지가 있고 노익장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역동성은 청년세대가 보유하고 있는 나름의 강점이다. 저마다의 영역에서 나름의 기량을 인정받은 이들이 국민과 당원의 지지를 받아 투입된다면 정치판이 지금처럼 국민에게 외면 받는 수모를 겪지 않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정치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해결책으로 ‘정부통령제와 4년 중임제’를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대통령 1인에 몰려있는 권력 체계가 정치발전의 걸림돌이 되는 현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정치 환경에서 권한을 나누거나 보완할 수 있는 부통령제를 도입한다면 완충지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솔직히 있다. 부통령이 보완재나 대체재로 대통령의 통치영역을 보조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 역할이 더 많다고 본다. 물론 선출직인 부통령에 대해 대통령처럼 탄핵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파면되지 않는 지위의 보장이 있어야겠다.
부통령제가 정착된다면 4년 중임제에 대한 부담은 자동으로 해소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책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4년 중임제 역시 빠른 시일 내에 결론을 내야 할 의제라고 생각한다.
이밖에도 내각제는 정부통령제 체제에서 대통령과 부통령 사이의 갈등으로 나라가 크게 혼란스러워 질 수 있다는 걱정을 해소할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각제가 실시될 경우 재벌 기업 등의 자본이 의회를 장악하거나 파벌 보스의 영향력이 확대 등 또 다른 우려를 낳을 수 있다. 후보선출 과정에서 국민에 의한 공천과 정치자금의 투명성 확보에 만전을 기한다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치는 분명 변해야 한다.
그러나 어영부영 제스처로 넘기려는 꼼수는 처음부터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국민들에게 줬던 실망과 혐오감을 상쇄시킬 만큼 강력한 매력이 담은 쇄신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때만 되면 선상탈출의 일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에 잠시 고민해 봤다.
누군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한마음이 된다면 이루지 못할 바도 아닐 터, 나부터라도 움켜 쥔 주먹을 펴겠다.

(2011. 11. 10)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8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권위를 회복해야

 권위를 회복해야


중국 당국이 산업화로 야기된 사회적 부작용에 적극 대응하는 모습이다.
5년 안에 효자 100만 명 만들기 운동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각종 패륜 범죄를 퇴치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인데 오죽하면 그런 방안까지 내놓게 됐을까 싶다.
중국의 고심이 단순한 남의 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 역시 비슷한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주변에도 패륜범죄가 그 검은 뿌리를 내린 지 오래다.
부모를 때리고 심지어 살해까지 하는 충격적인 극단의 패륜행각이 드물지 않다. 노인공경의 미풍양속도 빠른 속도로 그 당위성을 상실해가는 모습이다. 더 충격적인 건 붕괴된 교권이 목도되는 교육현장이다. 학생이 교사를 폭행과 희롱의 대상으로 삼는 사건이 더 이상 놀랍지 않을 만큼 만연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며칠 전만 해도 여중생이 교사의 머리채를 잡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물질만능주의와 지나친 경쟁 환경이 초래한 우리시대의 슬프고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됐을까 참담한 심정이다.
부모에 대한 효가 최대의 가치로 존중받고 스승이 무한한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었던, 장유유서의 사회적 규범이 소통의 통로가 되어 중심을 잡아주던 시절에는 꿈에도 생각 못할 사건 사고들이 날마다 넘치고 있다. 풍요로운 물질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인간을 성마르게 몰아간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 부모에게 자식이, 스승에게 제자가, 어른에게 어린 사람들이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믿기지 않는 현실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서 어른의 가르침이 사라지고 있는 건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봉변이 두려워 부당한 행실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야 할 훈육이 그 역할을 포기하면서 기존 규범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교사를 다스리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단은 문제 학생을 피하고 보자는 처세가 대세를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식의 몫으로 당연시 되던 부모 부양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상대로 ‘생활비를 달라’고 소송을 제기하는 가슴 아픈 세태와 마주치게 되는 현실이 그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점차적으로 권위가 상실되는 사회적 역할이 컸다.
정보통신 발달은 지식이 더 이상 어른들만의 고유 영역이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웹 검색 기술이 지식의 보유량을 결정짓는 주요 수단이 되면서 어른 보다 ‘똑똑한 아이들’을 양산하는 창구가 됐다. 상대적으로 ‘무식한 어른’이 경륜의 권위에 묻어가는 무임승차가 봉쇄되기도 했다.
권위의 실종은 더 이상 존중받을 수 없다는 신뢰 상실의 판정을 의미한다. 
주변에서도 단 한 번의 실수로 추풍낙엽 신세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엄격한 잣대가 준용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인기 절정의 강호동이 탈세혐의로 정상의 자리를 내놓게 된 것도 그에게 부여된 권위를 지키지 못한 반작용의 여파라고 할 수 있다.
권위의 결벽적인 속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패륜을 비롯한 반사회적 행각들은 반드시 바로잡혀야 할 대상이다.
그 중 권위의 신뢰 회복은 빼놓을 수 없는 실천적 요소로 구성원 저마다의 책무의식에 대한 소명감이 그 해법이 아닐까 싶다. 모든 문제점을 남탓에서 출발할 게 아니라 무조건 스스로를 탓하는 관점으로 시작한다면 의외로 수월하게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어차피 서로의 관계 속에서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개성이나 창의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최소한의 질서조차 희화화하는 행위를 영웅시 하는 풍조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반면,
최대한 많은 이들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선 개인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법도나 금도의 세심한 역할이 막중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흐트러진 사회가 될 것이고 그 흐트러진 한 부분이 사회의 전체 기반을 흔드는 결정타가 될 수도 있음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인구 밀도가 높고 개인의 욕구가 다른 사람과 상충될 가능성이 많은 상황일수록 기본적인 공공질서에 대한 관심은 아무리 많아도 결코 부족하지 않다.

서로를 존중하며 사라진 권위를 회복하자,
단 조급증은 치명적인 독약임을 명심할 일이다.

(2011. 11. 8)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6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운수 좋은 날

운수 좋은 날

살다보면 의외에 곳에서 저마다의 ‘허식’을 무너뜨리는 진리와 맞닥뜨릴 때가 있다.
아마도 오늘의 경험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세속적인 욕심을 쫓다 보면 본의 아니게 본질을 호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유권자의 표심에서 자유롭지 않은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할 수 밖에 없다. 삶의 질 차원에서 정치관련 직업군이 높은 평점을 받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삶은 ‘고품질’로 자랑할 만하다.
모처럼 횡재한 기분이 들만큼 만족스런 일과였다.
두 곳의 일정을 통해 선물처럼 받은 ‘깨달음’ 때문이다.
당초 그곳을 인도한 사람들의 의도와는 다른 결론이었지만 내 자신에게도 평화를 주는 양질의 시간이 됐다.

양로원을 찾았다.
명색은 외로운 노년의 삶을 위로해드리겠다는 것이었지만 정작 어르신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속내가 따로 있는 방문이었다.
그러나 해맑은(?)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반기는 모습을 뵙는 순간 가슴에 파동이 일었다. 세월의 굴곡을 고스란히 담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하시는 모습에 그동안 선거 때마다 표를 얻고자 어르신들을 현혹했던 지난 행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말로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궈낸 주역이라고 추켜세웠으면서 얼마나 그에 걸 맞는 대접을 해드렸나를 생각하니 부끄럽고 죄스런 마음에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순식간에 양심의 기운이 내 마음을 지배했다.
그래서 욕심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어르신들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
크게 많은 것을 해드릴 수 없었지만 천진난만한 마음으로 어르신들과 코드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분들이라는 생각을 접고 가없는 희생으로 우리의 오늘을 이룩하신 노고에 대해 진심어린 마음으로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수능을 앞두고 부모님들이 밤새워 기도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이 역시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결례를 무릅쓰고 찾게 된 곳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대낮처럼 밝은 공간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들어찬 사람들이 저마다 소원하는 바를 뇌는 소리가 산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어차피 온 거 한번 부딪혀 보자 하는 심정으로 비집고 들어섰는데 누구도 일별을 주지 않았다. 하기야 자식의 수능을 위한 기원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안중에 없는 그들 앞에서 얼쩡거리려고 했던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다.
잠시 어떻게 처신할지 몰라 멀거니 서 있다가 그들의 기도하는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이 두 일정은 세속적 관점으로 보면 들인 공에 비해 별반 효과를 내지 못한 평점 이하의 투자였다. 그러나 뭔가 가슴을 가득 채우는 듯한 뿌듯한 행복감과 해탈의 경지에라도 이른 듯한 포만감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깨달음을 안겨줬다. 모처럼 실속 있는 삶의 주인이 된 만족감까지 생각한다면 이윤이 큰 장사(?)를 한 셈이다.
자신의 이득이나 기쁨이 아닌 오로지 타인을 위한 정성은 그 상대가 국가와 민족이 됐건 자기 자식이 됐건 그 숭고하고 진지한 열정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특히 이들의 이타적인 삶은 입만 열면 이타적인 삶은 물론 국가와 민족 그리고 후대를 위한 미래를 부르짖는 정치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했다.
정치인들이 최소한 이들만큼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면 분명 세상의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정치권의 솔직한 반성이 절실해진다.
정치권의 진심어린 반성이 허공에 흩어진 수많은 약속들을 제 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다면 모든 이들의 삶도 그만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오늘 깨달은 이 진리가 잠자리에 드는 이 순간을 더 없이 행복하게 한다.
따뜻한 기운이 내 가슴에 별처럼 쏟아지는 느낌이다.

(2011. 11. 5)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싼 게 비지떡이다

싼 게 비지떡이다


의정부 발곡중학교에서 특강을 했다.
‘청소년이여 세계로 나아가라!!’을 주제로 2시간 동안 진행됐는데 학생들이 열심히 받아들이는 분위기여서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신명이 났다. 특히 강의를 하는 동안 과거 은사님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오버랩 되는 환타지 체험은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을 안겨줬다.
그 옛날 은사님들의 가르침이 강단에 선 현실의 나를 관통하거나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려져 은사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거나 또 은사님들이 나를 대신해 현재의 강의를 이끌어가는 식의 장면들이 4차원 형태의 어울림이 꿈 인듯 생시 인듯 객관화 된 현실을 잇고 있었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면서 추억을 부르고 있었다.

 














의정부 발곡중학교 전경영 교장선생님, 고혜숙 교감선생님















열심히 강의를 듣는 발곡중학교 학생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만나고 헤어졌다.
대부분 훌륭한 분들이셨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 중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하고 나의 가치를 발견해 독려하시던 몇 몇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조금은 더 특별하게 남아있다. 그 때의 선생님들이 내게 주시던 눈빛과 가르침은 아마도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다. 내 경우엔 선생님의 따뜻한 관심이 신뢰받는다는 안정감을 심어줬고 세상의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환치됐다.
과거 세대의 학교 환경은 요즘 세대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딱딱하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 천방지축이었던 나를 알아봐 주고 보듬어주는 선생님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그 끔찍하고 정형화된 어둠의 터널을 통과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숨 막히는 억압이 ‘청춘의 붉은 피’를 사정없이 짓누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과거에 비해 다양해진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교육 여건은 갈수록 험악해지는 추세다.
무한대의 감각을 소유한 요즘 세대에 뭔가를 쥐어주는 식의 교육 형태는 무리수 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생각의 빌미를 제공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게 되는 건 교육일선에 있는 대다수 선생님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교육현장도 녹록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실제로 PC 등 지식전달의 매개체나 반값 등록금, 학생 해방 등 좋은 정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정작 좋은 스승을 만나기는 더 많이 어려워졌다.
교육 문제를 뭔가 분석하고 해결하고 대책을 수립하는 데 중점을 두는 인간의 문제 해결 측면보다 사제가 하나가 되어 서로를 온전하게 수용하기 위해 노력할 때 더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 있을텐데 쉽지 않다.
우리 교육의 장래가 걱정되는 이유다.

세대를 불문하고 ‘스티브 잡스’를 외쳐대는 시대다.
그렇게 법석을 떨고 있지만 정작 우리 사회가 ‘스티브 잡스 캐릭터’에까지 포용과 관용의 여유를 보이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사생아, 문제아, 대학중퇴자, 직장 퇴출자... 이런 무시무시한 용어로 설명되는 삶이 온전하게 버텨낼 수 있기엔 넘어야 할 관습의 벽이 아직은 너무 높다.
생 전반에 걸쳐 예사롭지 않은 삶을 구가했던 그다.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둔 ‘스티브 잡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지 미완의 스티브 잡스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일은 도통의 경지에 이른 인내심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측면에서 학생 개개인의 특성을 인정해주고 저마다의 개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 주는 역할이야말로 좋은 교육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반값 등록금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교사가 공공연히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폭력을 당하는 사건이 하루건너 발생하고 있다.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그저 참담할 뿐이다.
지옥이 따로 없다.
이 지옥이 반값 등록금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더 없이 숭고해야 할 사제지간이나 학교와 학부모 사이가 반목과 오해로 얼룩지게 만드는 모종의 역할이 진행된 결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제되지 않은 편향된 시각으로 매도하는 각종 미디어의 무성의가 교수와 학생, 학부모와 학생, 그리고 학교와 정부 사이의 불신을 양산하고 이간질로 이어지는 현실이 솔직히 야속하다.
자본의 논리가 아니더라도 반값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 아닌가.

(2011. 11.4)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3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정치야 연기야?

정치야 연기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를 둘러싸고 꼼수를 부리고 있는 정치권 행태가 개탄스럽다. 입으로는 국익을 말하면서도 실상은 당리당략이나 정치적 표 계산에 급급한 움직임들 뿐이다. 중차대한 국가 대사를 명분 없는 정쟁의 수단으로 떨어뜨려 놓고도 별다른 가책도 없어 보인다. 특히 FTA 비준 반대의 선봉에 나선 야당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하다 할 것이다. 원칙도 명분도 없이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한미 FTA를 야권 통합의 지렛대로 삼고 있는 민주당 손학규 대표만 해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내가 알기로 그는 분명 ‘찬성파’였다. 그것도 당론과 다른 ‘찬성’이어서 ‘위대한 결단’ 어쩌고 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도당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도지사였던 그와 어울릴 기회가 많았는데 FTA 당위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당내 비준파를 제치고 다른 야당과 한 목소리를 내며 ‘결사항전’을 외치고 있다. 입장을 달리하게 된 그 어떤 해명도 없이 말이다.

정치를 하는 건지 연기를 하는 건지 헷갈리게 하는 정치인들이 많다. 카메라만 돌아가면 이해 안되는 돌발행위로 온 몸을 던지며 국민에게 존재감이 알려지길 원하는 무리들이 반드시 있다.
당내 입지가 취약한 초선의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 중 하나다.
더구나 지금쯤이면 내년 총선을 앞두고 많은 정치인들이 복잡한 셈법이 시작되는 시기다.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면 지금부터 어떤 말과 행동으로 스탠스를 정해야 할지, 유권자의 표심을 사로잡으려면 어떤 퍼포먼스가 적당할지 오로지 자나 깨나 그 궁리뿐일 것이다.
그런 만큼 국익을 배려한 판단이나 거시적 안목이 고려된 결정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하지만 포퓰리즘 발상으로 준비한 선거 구호나 단상에서의 화려하고 과장된 몸짓들은 오히려 역풍을 불러올 때가 많다. 스스로를 옥죄는 족쇄가 되어 난감한 처지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단기적인 이익이나 미래 이익의 절묘한 규합을 통해 유지되는 게 정치의 기본적 속성이라면 지나친 인기영합 발언이나 과격하고 튀는 행동이 가져다 줄 이익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번 FTA 처리과정에서도 얼굴 알리기 용도로 이 방법을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사정이야 눈물겹지만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무엇보다 국가의 중대사를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한 들러리로 전락시키는 건 국회의원으로 할 짓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이를 자제하는 것이 옳다. 21세기 한국사회에 필요한 선량이 되려면 최소한 국가와 국민을 앞세우고 소중히 배려할 줄 아는 매너부터 갖춰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미 FTA 비준안의 조속한 처리가 답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의 여지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렇다 할 부전자원 없이 수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최대 교역국인 미국과의 FTA 체결을 피할 도리가 없지 않을까 싶다.
인위적이더라도 생산적인 노력으로 비준안이 원만하게 처리되길 바란다.
국회를 배려하는 청와대의 성실한 노력이 해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FTA 만큼은 반대하는 쪽이나 찬성하는 쪽이나 당당하고 떳떳하게 명분을 잃지 않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행여 지난 연말처럼 단상을 점거하고 끌어내리고 방망이를 뺏고 하는 아수라장을 전 세계에 중계하는 불상사가 재현될까 솔직히 불안하다. 이번 처리 과정에서 또 다시 정치권 구태가 반복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정당정치의 존립자체를 부정하려 드는 국민들에게 영원히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할 일이다.
FTA가 제대로 처리돼 그나마 제대로 한 일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 18대 국회의 체면을 세워주는 업적이 되길 바란다.                                                                                             

(2011. 11. 3)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1% vs 99%

1% vs 99%


3개월 넘게 계속되던 태국의 물난리 사태가 진정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국토의 절반이 물에 잠길 정도로 심각했던 만큼 수마가 남긴 후유증도 만만치 않은 분위기다.
이번 수해가 빌미가 되어 불거진 태국사회의 계층 간 갈등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다. 우연히 피해 상황을 보여주던 태국 현지의 방송화면을 접하고 난 이후부터다.
천재지변을 당한 같은 현실인데도 카메라에 비친 부자와 빈자의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여전히 화려함과 안락함을 이어가고 있는 부자동네 고급 쇼핑몰은 담 너머 홍수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건재했고 삽과 곡괭이로 둑(부자동네 안위를 위해 조성된 물길 차단용도의 둑)을 부수며 생존을 위해 나선 빈자의 일그러진 표정에는 분노가 아닌 슬픔이 묻어났다.
같은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감이 느껴지는 풍경에서 폭발 직전의 민심이 느껴졌다.
지나친 부의 편중이 사회적 화두가 되어 있는 건 때 이른 폭설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뉴욕이라고 다르지 않다. 반 월가 구호로 시작한 이들 99%의 저항이 점차적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1% 특권층의 탐욕을 위해 99% 대중의 희생을 요구하는 현실을 성토하는 이들의 주장이 공감을 얻으며 전 세계 700여 도시의 민중 봉기로 확산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 참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역할을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앞 선 세대일수록 가진 자의 책무의식이 더 선명하고 실천의지도 더 강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사의 자취를 더듬다 보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정황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 자원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건 영국 최고의 명문학교인 이튼스쿨 학생들이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개인의 목숨은 초개처럼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불문율이었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로마 시대 귀족들도 전쟁이 일어나면 가문을 이을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참전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것이 귀족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고 또 반드시 지켜야 할 책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도 만석지기 부자이면서 300년 동안 대를 이어 존경받던 명품 가문이 있다. ‘경주 최 부자집’ 문중인데 흉년에는 가뭄에 농토를 인위적으로 농토를 늘리지 말라는 가르침 등 남다른 가치관으로 후대를 훈육했다. 탐욕을 경계하고 더불어 사는 가치관을 심어준 선대의 특별한 가르침이 최부자집 명성을 이어갈 수 있게 한 비결이 아닐까 싶다.
결국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이 사회를 안정시키고 스스로에게도 엘리트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한 존재가치를 인식시키는 순기능으로 거듭난다는 결론이다.

태국사태나 뉴욕의 풍경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불과 얼마 전 우리에게도 1%의 몰염치를 질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여의도 광장에 모인 그들의 미약한 시작이 어떤 결론으로 도출될지 지금으로선 누구도 예단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 도처에 깔려있는 1%의 횡포 사례는 반성과 자숙만으로 해결점을 찾기엔 이미 금도를 넘은 느낌이다.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재벌회사들의 파렴치한 행각들만 해도 그렇다.
중소기업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근로자 노임까지 가로챘다는 혐의다.
재벌기업이 지자체 청소용역 대행 사업에 끼어든 것도 민망한 일인데 노임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니 할 말을 잃게 한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어려운 노동자들의 임금까지 착취했어야 했을까 싶어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겁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불러온 이 서글픈 현장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척결해야 할 과제다.
이런 식으로 어렵고 힘든 이들을 궁지로 몰아가면 그들의 분노가 어디로 향하게 될 지는 너무나 뻔한 일이다. 그들의 분노가 폭풍이 되어버리면 그 때는 수백배 수천배의 대가를 지불하고도 막아내지 못하게 되는 건 불문가지다.
이는 자본주의와의 대결구도에서 패배한 공산주의 몰락을 통해서도 익히 경험한 바다.
각각의 장단점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패배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결과였다는 생각이다.
기득권 계층의 탐욕을 제어할 기능을 갖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자본주의 역시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 메시지의 지침대로 스스로는 물론 국가전체를 정갈하게 운용할 수 있는 수 있는 통합의 리더십이 간절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2012년이 다가오고 있어 더욱 더 그런 생각을 하게되는 것 같다.

(2011. 11.2)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1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낙엽이 부르는 길

낙엽이 부르는 길

무심히 시작된 가을이 옛 노래 속에서 깊어지고 있다.
바바리 깃 올린 고독한 뒷모습이 아니어도 거리를 구르는 한 점 낙엽에조차 가슴이 뭉클해지는 사내의 감성이 그저 부담스럽기만 한 계절이다.
오늘도 소요학파의 맹렬 추종자답게 고독을 씹으며 낙엽이 부르는 가을 길을 걸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옷깃을 여밀 정도로 바람이 싸늘해지면 떠나버린 사랑이 그리워진다는 태고적 사연을 따라 온종일 낙엽을 몰고 다녔다. 나이도 직위도, 주어진 처지 같은 건 말끔히 잊은 채 캠퍼스를, 철둑길을, 산 중을 걸으며 낙엽 속에서 개똥철학을 건져 올렸다.
무더기를 이룬 낙엽의 면면을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그 때 처음 알았다.
그 들 중 어떤 것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색깔도 모양도 세상에 나온 시기도 소멸의 시기도 어쩜 이리도 다를 까 싶게 제각각이었다.
닮은 게 있다면 마지막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용쓰는 그 처연한 모습을 꼽을 수 있을까?.

문득 푸르고 싱싱했던 지난 기억은 까맣게 잊고 ‘추락’으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 제 운명에 순응하고 있는 낙엽의 처신이 눈물겹다는 생각이다. 냉정히 생각하면 그런 식의 마감은 나뭇잎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을 터다. 하루 이틀 시간차는 있을 지라도 절대로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 쌍둥이처럼 닮아있는 삶의 대기표로 대변할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러고 보니 가을이면 유난히 심해지는 내 센티멘탈리즘은 낙엽으로부터의 청구서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을이면 시도 때도 없이 마음 속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던 미련이 아스라한 슬픔으로 피어나는 가 싶기도 하다.

너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나.
단풍잎 하나 집어 들고 속삭였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아니지요. 더 많이 발효된 다음 산산히 분해된 분진으로 새로운 생명들이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면 소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책임이 남아있는 거지요.
파르르 생명줄을 떠는 단풍의 모습이 더 없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그 순간 눈앞의 만산홍엽이 그토록 우리 마음을 끄는 건 외형의 멋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 안에 내재된 숭고한 사명의식 덕분이라는 깨달음이 뇌리를 스쳐간다.

낙엽이 지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사라질 뿐이고 새 생명의 창조적 근원으로 환치되는 중이다.
적어도 제 한 몸을 온전히 제대로 희사하는 과정을 완성했다면 말이다.
그것은 수없는 세월을 이어온 재탄생의 위대한 작업이기도 하다.
인간도 낙엽처럼 최후가 예약돼 있는 존재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 절명의 한계다.

문득 자칫하면 한 잎 낙엽보다 못한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창조적 역할을 외면한다면 아무리 만물의 영장을 자처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한낱 우주의 쓰레기 더미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는 오명으로 남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할 일이다.
우리가 공의의 삶을 지향하는 이유는 죽지만 죽지 않기 위해서다.
영원한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기 위한 삶의 에너지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생각 없이 살다 사라질 인간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다.
......
인간은 죽는다.
인간은 죽지 않는다.
희망으로 시작하는 11월의 첫 날을 이렇게 마감한다.

(2011. 11. 1)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