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30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강원도 단상

강원도 단상

교수 연수 차 강원도에 다녀왔다.
애초엔 구제역으로 어려운 지역상황을 감안해서 연수일정을 다음으로 미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많이 찾아주는 게 지역민들을 위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아 결정된 일정이었다.
매번 갈 때마다 강원도 특유의 에너지로 충만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많이 다른 분위기였다. 오는 7월 동계올림픽 개최지 결정을 앞두고 IOC의 현지실사가 평창에서 진행된다는데 민망할 정도로 착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하긴 구제역 파동이나 도지사의 도중하차, 불투명한 지역경제의 불안 등의 우환들이 겹쳤으니 신명날 일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당장 도지사 공백이 가져올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지역민들의 한숨을 깊게 만들고 있었다. 특히 도지사의 도중하차로 알펜시아 리조트의 활로 모색에 제동이 걸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지역민들을 풀 죽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어쩌다 보니 알펜시아리조트에서 이번 일정의 여정을 풀게 됐다.
강원도정의 뜨거운 감자로 부각돼 있는 문제의 그 알펜시아 리조트에 말이다.
이용 소감부터 말하자면 실망 그 자체였다.
막대한 건설비용에도 불구하고 외형만 그럴 듯 했지 설비나 규모면에서 지나치게 부실했다. 동계올림픽 시설물로 사용하기에는 미흡하고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슬로프가 짧았고 설질은 평균치 이하였다. 20도가 넘는 강추위 속에서 보드를 타기엔 형편없는 여건 때문에 엄청나게 어려움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새 건물이었는데 마감재는 지나치게 부실했다.
적어도 동계 올림픽을 제대로 치르려면 상당한 재정비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였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빛 좋은 개살구였다고나 할까.

알펜시아는 ‘세계적 명품’ 최고급 리조트를 지향하는 대관령 일대 4.91km²(약 148만 평)에 공사비 1조6836억원을 쏟아 부어 펼쳐낸 강원도의 야심작이었다. 지방자치단체 역사상 단일 규모로는 최대 사업의 중심체였다.
강원도는 동계올림픽 유치에 대비해 스키점프 경기장과 크로스컨트리 및 바이애슬론 경기장 등을 최신 시설로 지었다. 세계적인 호텔 그룹 인터컨티넨탈호텔과 홀리데이인리조트가 참여했고, 회원제 골프 코스 운영은 골프 매니지먼트회사 트룬골프가 맡았다. 퍼블릭(대중) 골프 코스인 알펜시아700 골프장은 전 세계 유명 코스를 본떠서 만들었다. 2540명을 수용하는 컨벤션센터, 630석 콘서트홀, 3200명 수용 규모의 워터파크 운영은 커닝햄그룹의 조언을 받아 이뤄졌다. 커닝햄은 드림웍스,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워너브러더스 테마파크 등을 만든 회사로서 알펜시아 리조트 명성에 힘을 보탰다.
그렇게 화려한 명성으로 출범했던 리조트였다. 아시아 최대 최고 최상이 되겠다는 포부와 함께 탄생한 리조트였다.
그러던 것이 이자와 운영적자를 합해 연간 600억원의 손실을 안기는 시한폭탄이 되고 말았다.
오늘 날 강원도재정파탄의 원흉으로 지목받는 신세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화려한 출발이 무색할 만큼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알펜시아 리조트는 지금 백척간두에 놓인 신세가 됐다. 재기 가능성도 그다지 커 보이지도 않는다.
이 모두가 위정자의 부실한 정책판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순간의 판단착오가 전 도민의 고통과 한숨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암울한 현실은 이 땅의 모든 위정자들이 타산지석으로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위정자들이 정책 하나하나를 결정할 때마다 얼마나 많이 공들이고 심사숙고해야 할지,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왜 이 모든 일들을 명심해야 하는지를 가슴 깊이 새겨야하겠다.

보드를 타면서 깨닫게 된 귀한 사실 한 가지가 더 있다.
보드타기엔 조금 늙은 나이임에도 프로의 경지에 올라있던 스키대신 보드를 선택한지 어언 5년여다. 이제 비로소 보드타기에서 자유를 얻은 것 같다. 그동안 뇌진탕 정도의 충격은 예사로이 감수하며 부단히 노력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씩 스키에 대한 미련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정형화된 귀족형태의 스키보다는 청년 같은 자유분망함과 넘치는 스릴이 주는 보드의 매력이 훨씬 큰 것 같다.
이번에도 다리가 뻐근해질 때까지 보드를 즐기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너무 추운 날씨였다. 답답한 것이 싫어 평소처럼 고글과 마스크를 준비하지 않았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찬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고글없이는 눈을 뜰 수 없었고 마스크 없이는 얼굴이 얼어붙어서 도저히 보드를 계속 탈 수 없었다. 별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장비들이 거센 찬바람 속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똑똑히 알게 된 셈이다.
마찬가지로 작고 사소한 관심이 정말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들에게는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도 있었다. 한 사람의 작은 정성이 사회 전체를 따뜻하고 살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 소중히 담는 계기가 됐다.

일탈을 접고 돌아온 일상은 역시나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빼곡한 업무 목록이 잠시 마음을 누르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니만큼 지혜롭게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으리라.
강원도 역시 지금의 어려움을 딛고 주어진 난제들을 술술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금 펄펄나는 강원도의 힘으로 우리를 맞아 주는 환한 미소를 조만간 만날 수 있겠지.

(2011.1.30)
...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27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의인의 시대

의인의 시대

며칠 전 언덕을 구르는 통학버스를 몸으로 막다가 참변을 당한 한 기사님의 의로운 선행이 있었다. 그의 희생으로 20여명의 인명은 무사했으나 정작 자신은 목숨을 잃고 만 안타까운 사건이다. 그의 의로운 행적이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많은 이들이 추모의 염으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하고 있는 분위기다.
앞서 일본에서 유명을 달리한 아름다운 청년 故이수현군의 삶도 비슷하다.
2001년 1월 26일 일본 유학 중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역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만 故 이수현군의 안타까운 사연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술이 취해 전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해내다 참변을 당했는데 그 때 그는 스물여섯 나이에 불과했다.
그의 희생은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삶에 익숙해있던 당시 일본사회를 각성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감사의 눈물로 그의 삶을 기렸다. 일본 내에 ‘이수현 장학회’가 설립되는 가하면 그의 삶을 조명한 영화 ‘너를 잊지 않을거야’가 한일 합작 영화로 제작되는 등 그를 추모하는 각종 행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살신성인하는 모든 의로움은 우리에게 있어 시공간을 초월한 기운을 품은 영원불멸의 아우라의 흔적이다.
무엇보다도 희망의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 귀한 가치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하고 기록해서 후대에 계승하고 기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제 명을 다하지 못했지만 결코 짧다고 할 수 없을 이들의 의로운 삶이 새삼스럽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명제를 되짚어보게 한다.
톨스토이는 동명의 소설집을 통해 인간의 지위나 부, 권력의 덧없음을 말하는 대신 절대절명적인 ‘사랑’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그들의 삶을 어우르며 절대적 구심체가 되고 있는 사랑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 사랑에 의해 살아가되 개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된 동력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
그는 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고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라는 조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건 무엇이고 죽는 건 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는 삶이 되는 건지 하루종일 내 머리 속을 맴돌며 혼란스럽게 하는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있다.
결국 언젠가 죽게 돼 있다면 그 기간이 30년이든 40년이든 아니면 100년이든 영겹의 세월로 흘러온 인류의 역사성을 생각한다면 굳이 아등바등 거릴 필요도 없지 않을까, 정말 그렇다면 의미있는 삶이나 죽음의 명제에 무슨 무게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론에 골머리가 썩히고 있는 중이다.
내 자신 스스로의 세계이기에 내 삶의 의미를 찾아야한다는 결론을 깨달으면서도 그런들 영겁의 시간 속에 한 점 티끌의 존재로 소멸되어질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은 체념이 빠르게 교차하는 갈등의 연속이다.
아무리 좋은 집이나 옷, 음식이 있다한들, 금력, 권력, 명예가 넘친다 한들, '수명‘의 한계 앞에서 모든 게 신기루가 되고 만다는 사실 역시 그러한 정황을 부축이고 있다.
문득 ‘온 세상을 얻고도 내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 내가 바로 우주이고 세계가 내 안에 있다’는 성경의 의미가 좀 더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의문투성이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 뭔가 실행되는 그 순간, 의인의 필요충분조건만큼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규명돼야 하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왜 그랬는지가 중요하다기 보다 그 순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일을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무릅쓰고 주저함 없이 해냈다는 사실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설정이다.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의인을 기리고 존경하며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존재할 때 삶의 길이와 상관없이 더불어 살만한 세상이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어제가 10주기 추모일이었는데 10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뜨거운 마음으로 이수현님의 선행을 기리는 분위기였다는 소식이다. 특히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에서 그 열기가 더 뜨거웠다는 후문이다.
한 사회나 국가적 삶의 품격은 그에 속한 구성원들이 선하고 의로운 일에 어떤 식의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높은 점수로 격려의 박수를 보낼 수 있는 마음가짐이 삶의 품격을 평가하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우리보다 더 열성적으로 이수현님에 대한 추모열기를 이어가는 일본의 저력에 다시한번 놀라게 된다.
선진국민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데 우리가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부의 척도보다 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작은 일이라도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일을 한 한사람 한사람을 잘 기억해 내고 감사하고 롤 모델로 삼고 하는 일들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의인이 관리되는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해보자는 소리다.

선진사회일수록 의인이 대접받는다.
우리 사회에 의롭고 선한 일들을 확산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이들의 삶이 부디 쓸쓸하지 않게 되길 .

( 2011. 1. 27 )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25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나의 가장 나종 지닌 것'

'나의 가장 나종 지닌 것'

박완서 선생께서 영면하셨다.
많은 이들의 아쉽고 그립고 안타까운 동동거림을 뒤로 한 채 홀연히 떠나 가셨다. 이 땅의 강퍅한 가슴들까지도 뜨겁게 울리는 위력을 발휘하면서 그렇게 이승과의 인연을 접으셨다.
역시나 선생은 마지막 가는 길도 남다른 흔적을 남기셨다.
소박하게 마지막 길을 가겠다는 고인의 유지에 따라 조사나 추모사 낭독 등 일체의 격식이 배제된 채 진행된 영결식도 그렇고 병마와 싸우면서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현역이고자 했던 노작가의 ‘직업근성’도 그랬다. 가난한 문인들에게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신신당부 할 정도로 타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잊지 않았던 어른의 모습으로도 그랬다.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런 건가 싶기도 하다.

오랜 만에 반가운 얼굴을 뵙는 모임 자리에서도 온통 타계한 박완서 작가 얘기뿐이다. 연로하신 분들이 많은 모임인데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박완서 작가를 잘 알고 계셨다. 뿐만 아니라 서로의 집을 왕래할 정도의 친분으로 개인적인 삶의 공간을 깊숙이 알고 계시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남편과 아들을 앞세운 비극적인 개인사를 비롯해서 남들에게 언제나 상냥하고 다정했지만 어딘가 짙은 어두움이 배여 있는 듯한 표정, 쓰라린 가정사를 승화시킨 듯한 주옥같은 작품에 이르기까지 고인에 관한 많은 후일담들이 쏟아졌는데 대부분 수긍이 가는 이야기들이었다. 살을 에는 고통 속에서 진주가 만들어지듯 인생에서의 아름다운 결과물도 숱한 어려움과 역경을 딛고 난 후에야 손에 넣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고나 할까.

고인의 사인으로 알려진 담낭암이 화제거리로 대두되는 가운데 비교적 건강했던 고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방사선 치료의 위험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동병상련의 심정이었을까? 수술 경과가 좋아 거의 완치단계였는데, 본인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방사선 치료가 강행되는 바람에 연로하고 병약한 환자가 이를 이기지 못해 명을 재촉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들이 터져 나왔다.
그 다음에는 이구동성으로 우리나라 병원과 의료진들의 문제점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의 불친절과 환자에 대한 무관심, 더 나아가 지나친 의료수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 전반에 관한 성토가 이어졌다. 미국이나 일본의 진료를 받아본 경험을 들어 우리보다 더 값싸고 친절하고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철저히 이행하는 외국 의사들의 투철한 직업의식을 예로 들어가며 성토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러다 결국은 우리가 나름대로 세계사에 족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고매한 인품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인격을 조성하는 풍토가 필요하다는 얘기로 끝을 맺었다.

어떤 상황에서건, 어떤 인간관계에서건 갑과 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때 그 때 입장에 따라 갑이 되기도 하고 을이 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갑의 입장에서 내가 했던 처신이 을의 입장에 처한 내 몫으로 고스란히 되돌려지는 게 아닐까 싶다. 특정 상황에서 내가 받은 대접이 섭섭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섭섭함에 방점을 두기보다 내가 남들을 서운하게 하지 않았나부터 돌아보는 자세가 우선돼야 하는 이유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박완서 선생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것도 결국은 그녀가 세상에 뿌린대로 거두는 결과에 다름 아닐 것이다.

모임에서 돌아오면서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나는 얼마나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남의 입장을 얼마나 존중하고 또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 어르신들에게 성토대상이 된 의료진처럼 시간에 쫓긴다는 이유만 내세워 그저 하고 싶은 대로 또는 판단하는 대로 주변인(학생이 됐건 지역구민이 됐건)들을 일방통행식으로 밀어붙이지지는 않았나.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은 결론은 우리가 미래사회의 희망을 이야기하려면 각 개인마다 완성된 인격체로서 성숙한 시민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독약도 되고 구명약도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 자신은 물론 주변의 지인들과 함께 한번쯤 주제삼아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봐야겠다는 결심으로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잡아본다.
세상을 살면서 이왕이면 좋은 종자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나 역시 많은 이들의 아쉬움 속에서 내 생의 마지막을 맞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 인생을 가치있게 만들기 위해 '나의 가장 나종 지닌 것'을 늘 갈고 닦는 노력의 끈을 놓지 말아야겠지.

그나저나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들과 남편 곁으로 가셨으니 선생님, 많이 행복하시겠지요?

(2011. 1. 25)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23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머피의 법칙

머피의 법칙

한국 축구가 그동안의 슬럼프를 딛고 신년 벽두부터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강호 이란을 상대로 연장 승부 끝에, 드디어 아시안컵 4강 진출 티켓을 거머쥔 것이다.
대표 팀의 쾌거가 국민들에게 크나큰 위안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축구 이야기에 모두들 행복해하는 모습이다. 이 기세를 몰아 25일 일본과의 결전은 물론 결승전까지 휩쓸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인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기대감에 들떠있는 분위기다.

새벽 1시 훨씬 이전부터 축구 경기를 보려고 텔레비전 앞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경기 과정을 꼼꼼히 지켜보진 못했다. 경기가 중계되는 내내 비몽사몽 졸다 깨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골이 터지는 결정적 장면도 놓치고 말았다.
졸다가 “윤빛가람 선수가 한골을 넣었습니다” 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버린 후였다.
아쉬워 하며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재방영 중이었다.
‘이번만큼은’ 하면서 텔레비전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교회 갈 시간이 임박해져서 준비하다가 또 다시 윤빛가람 선수가 골을 넣는 장면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인생을 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순간을 놓친 경험이 상당히 많다.
이상하게도 더 중요한 일일수록 그 순간을 놓치고 발을 동동 구르던 경우가 적지 않다.
큰 아들의 출산 순간을 놓쳤고 인생의 스승으로 모셨던 장인어른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과 그 부친의 장례일정을 함께 하지 못했다.
이루고자하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놓쳐 버렸던 인연의 순간들은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크다.

축구를 제대로 못 봤다고 하자 “앞으로 재방영을 수십 번 하게 될 텐데 대수냐”는 주변의 반응이다.
하긴 지금까지 살면서도 생방송 보다는 재방송에 더 익숙해 있었다. 그랬으면서 난색을 보인 내가 새삼스러웠다. 그저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인데.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들을 놓친 경험에는 인간의 한계를 돌아보게 하는 덤이 준비돼 있다. 인생의 어떤 부분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나 저마다의 삶이 개인의 주관보다는 거대하고 절대적인 무엇인가에 끌려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그것이다.
인간에게 삶의 균형을 찾아주고자 하는 신의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생의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고 자신감을 갖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
그것은 바로 겸손함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인생의 속성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혜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을 놓쳤을 때 찾아드는 허탈감과 무력감의 압박으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다. 벗어나는 노력없이 그 정도에서 멈추게 된다면 스스로의 가능성에 빗장을 거는 무지와 다를 바 없다. 소중한 가치를 간과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 접할 때마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감정을 조절하는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염원한 대로 살지도 못하는 인생이다.
생애를 그르치지 않으면서 다시 도약하려는 가능성을 만드느냐가 더 없이 중요하다.
실체 없는 추측에 지배받는 일이 없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앞으로의 삶도 거기에 초점을 두고 살겠다. .

이번 일본전에서만큼은 우리선수들의 선전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2011. 1. 23)
....홍문종 생각

홍문종 생각 - 눈이 나린다



눈이 나린다


홍 문 종




눈이 나린다


추억 속의 눈도 내린다
눈 사람
눈 싸움
눈 사랑
눈 이별
그리고
눈 이슬



하얀 눈이 나린다

추억 속의 하얀도 내린다
하얀 수건
하얀 칼라
하얀 치아
하얀 입김
그리고
하얀 기억

이름모를 추억이 내린다

추억 속에 모두가 내린다
흙색 장대
회색 안개
홍색 낙엽
갈색 폭풍
그리고
검정 가슴

덧없이 흘러버린 세월에

속절없이 가버린 세월에
눈이 내린다
비가 내린다
낙엽이 구른다
상념도 따라 구른다
그리고
그리고.....



(2011.1.23)

2011년 1월 22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카라

카라


여성 그룹 ‘카라’가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해체 위기에 처해있다.
5명의 멤버 중 3명이 소속사에 계약해지를 전격 통보하면서 활동중단 사태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일본 언론은 연일 이들의 불화설을 대서특필하며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들이 돈 문제로 해체될 지도 모른다는 등 관련 소식을 주요이슈로 다루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가창력을 바탕으로 한 특유의 엉덩이춤으로 인기몰이를 하며 일본 내 신한류 열풍의 주역으로 자리를 굳힌 카라의 위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아이돌 그룹이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활동을 중단한 예가 적지 않다. 얼마 전 한류열풍 속에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동방신기도 소속사와의 불화로 해체된 바 있다. 카라 역시 이들의 전철을 밟게 될까 걱정이다. 이를 빌미로 신한류 열풍을 방해하는 기류가 형성될 가능성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카라와 소녀시대 등 한국 걸 그룹의 일본 내 활약을 시기하는 일본 내 움직임이 신경쓰이던 차였다. 이들 걸그룹을 폄하하는 만화까지 등장할 정도로 한류열풍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이 고조되는 와중이었다.
심지어 이번 카라 사태가 한류 열풍에 악영향을 줄 거라고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일본 언론의 속보이는 행태도 있었다. 동방신기에 이어 카라도 소속사와 전속계약 해지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는 기사에는 '한국 연예계에서 걸핏하면 전속 계약을 둘러싸고 갈등이 불거지는 이유가 뭐냐'고 비판하는 일본 네티즌의 댓글이 100여 건씩 달리기도 했다.

연예인과 매니지먼트 소속사 사이의 갈등과 분란이 우리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우리보다 매니지먼트 문화가 먼저 도입된 미국에서도 지극히 흔히 접할 수 있는 광경의 하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틀즈나 아바는 물론 사이먼 앤 카펑클, 비지스 등 거의 모든 그룹들이 해체와 재결합 과정을 거쳤다. 그렇다고 해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연예계 자체의 특성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놀랄 대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 우리에게 있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상당히 취약한 분야였다. 지금도 몇 개 그룹을 빼고는 열악한 가운데 운영되는 매니지먼트 회사가 수두룩하다. 노예계약이나 성추문 등의 스캔들로 여론의 불신을 자초하는 경우도 유난히 많았다. 그럴 때마다 메니지먼트 문화의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비등해지곤 했지만 특별한 변화 없이 지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지먼트 필요성은 날로 증가하는 추세다. 한류 열풍의 세계화 정착을 위해서도 좀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매니지먼트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민감하고 독특한 특성을 보이는 연예인의 직업세계를 감안할 때 서로가 충족할 수 있는 메니지먼트가 되기 위해서는 난이도 높은 현실을 감내하겠다는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특별히 개개인의 사적 영역에서도 매니지먼트의 필요성이 절실해지고 있다.
갈수록 개인주의가 굳어져 가는 조짐이다. 누구에게도 간섭받기 싫어하고 누구도 존경하기 싫어하는 풍토가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추세다. 그렇게 개인적 삶만 조명되다보니 ‘우리’라는 공동체 개념은 점점 본래의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다. 가족의 순혈주의가 형성하는 끈끈한 유대감도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물론 개인의 개성이 전문성 강화 측면으로 보면 강점으로 작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인적 인격이나 사회성 결여는 인간의 삶을 그만큼 각박하게 고립시킨다는 면에서는 마냥 환영할 수만도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균형감각을 갖춘 매니지먼트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연예인처럼 전문적인 매니지먼트가 아니더라도 현명하고 성실하게 조언해주는 조력자의 존재가 한 개인의 삶에 미치는 순기능은 생각보다 크다. 스승이 됐건 친구가 됐건 그 때 그 때마다 함께 포커스를 맞추고 점검하고 돕는 우군 개념의 멘토링은 인간의 삶을 바꾸는 참으로 소중한 기회가 된다.
해가 더해질수록 허둥거림이 늘어나고 인생의 무상함이 절감된다.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 적응하려다 보면 우리 같은 사람들도 상당히 난감한 경우가 많다.
급기야 혼자서 살 수 없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은 시간 문제다. 결국 누군가 자기가 속한 영역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멘토링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노예계약, 전격해체, 배후설, 영구퇴출 등 서로를 향한 독한 말로 치닫는 카라와 소속사 간의 갈등국면이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소속사의 부실관리가 잘못인지 멤버 부모들의 과욕이 문제인지 아니면 경쟁업체의 ‘빼내기’가 문제인지 원인을 둘러싼 각종 예측들이 넘치고 있지만 지금으로서 파악 할 수 있는 정확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한류를 저지하려는 보이지 않는 집단의 음모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우물쭈물 하고 있는 사이에 한류는 퇴조하고 카라그룹의 주가 역시 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제2 제3의 카라에 의해서 뒷전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많다.
어차피 요즘처럼 아이돌 그룹의 짧은 유효기간을 감안하게 되면 그런 상황은 상당한 구체성을 띄고 반복될 수도 있다. 새로운 가능성이 밀고 올라오고 또 그들만의 새로운 가능성에 열광하는 지금까지의 패턴을 보면 말이다.
문제는 얼마나 정확한 현실인식을 갖고 있느냐에 미래가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뢰와 배려도 사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잘 재정비된 카라의 모습을 보고싶다. 한류열풍 전도사로서 왕성한 그들의 활동을 기대한다.


지나친 탐욕이 꿩도 매도 다 놓쳤던 과거지사가 많다.
타산지석, 반면교사의 계기로 삼기 바란다.

(2011. 1. 22)
....홍문종 생각

홍문종 생각 - 눈이 왔어요


눈이 왔어요



- 홍문종 -



눈이 왔어요
장독대 위에


눈이 왔어요
도봉산 위에



하이얀 눈은
하늘의 마음
태양의 마음



눈부신 사랑은
하얗게 빛나고



사랑의 노래는
온천지를 덮고



밤새 오신 눈은
내 마음에 내린 눈은
당신 마음에 내린 눈은



가없는 수평선은
순결의 아름다움



기쁨의 축복은
너의 마음 나의 마음



눈이 왔어요
나의 마음에



눈이 왔어요
너의 마음에도


(2011.01.22)

2011년 1월 20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양지로

양지로

도박의 기원은 인류역사와 근간을 함께 해 왔다.
그리스 신화의 천지창조 과정을 보면 신들이 주사위 내기로 각자 관장할 구역을 나눴고 성경에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옷을 주사위 던지기로 나눠 가진 로마병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심지어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국경은 양국의 왕이 주사위 게임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우리도 경주 안압지 부근에서 정6면체 주사위가 발견된 적이 있는데 이를 통해 1400년 전 통일신라시대 당시에도 지금과 같은 형태의 주사위로 도박을 한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매국노 이완용과 이지용이 ‘희대의 화투대왕’들로 불릴 정도로 화투에 열중했고 특히 이지용의 저택은 ‘조선에서 가장 거대한 판돈이 오가는 도박장’으로 유명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혹시 나라 판 죄책감으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차원은 아니었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투 자체가 우리의 저항의식을 약화시키기 위한 일본의 술수 차원이었던 만큼 매국노들의 적극적인 친일행위일 가능성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도박은 그동안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생활 속 경험으로 익숙해진 유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던 것을 새삼스레 불법, 합법의 잣대로 가르려 하니 모호한 부분도 있다.

원정도박 혐의로 물의를 빚고 해외를 떠돌던 신정환의 귀국으로 또 다시 난리법석이다.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다.
졸지에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범법자로 전락한 그의 모습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연신 허리를 굽히며 많이 혼나겠다고 했지만 상황을 돌이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같은 날 감사원은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최근 3년간 평일에 60차례 이상 출입하며 상습 도박을 해 온 370여명의 공직자 명단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조만간 3000만원 이상을 써 VIP 회원이 된 이들과 각 기관 회계 담당자나 고위직을 중심으로 자금 출처에 대한 정밀 조사에 들어갈 예정이란다. 그동안 도박에 연루된 연예인이나 공무원 문제가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에는 또 무슨 일로 놀라게 될지 모르겠다.

통상적으로 도박을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흥분과 자극,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타인과의 사회화, 돈 등을 들고 있다. 스스로 결정하고 권한을 행사하려는 욕구의 실현 차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다른 이유를 찾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동물도 도박이 주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영국발 기사다. 비둘기 실험을 통해 동물들도 커다란 보상에 유혹을 느끼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심장박동수가 최고조로 올라갈 때의 ‘가슴떨림’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도박에 대한 관념을 새롭게 정리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고독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실제로 사람들이 더 많이 외롭고 쓸쓸해 하는 것 같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갈수록 복잡다기해지는 사회적 환경이 도박중독을 양산하는 직접적 원인이 아닐까 싶다. 여러 사람이 공통적으로 함께 모여서 일했던 과거와는 달리 동등한 위치에서 독자적으로 저마다 독립된 영역을 처리하는 환경이 늘어나면서 본의 아니게 고립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도박중독, 역시 무섭다.
인기 절정에서 아쉬울 것 없던 젊은 연예인의 인생을 단숨에 삼켜버릴 정도의 위력이니 가히 놀라운 독성이다.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렵고 그 오랜 시간을 통해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텨온 저력(?)으로 봐서 앞으로 도박이 근절될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어차피 공존할 수 밖에 없다면 도박을 없애는 것 보다는 운영의 묘미를 살리는 게 더 현명하다는 생각이다. 폐단을 최소화 하는 노하우를 생각해 내는 게 중요하고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음성적인 사행사업 근절을 위해 사회전체가 감시자로 나서야 한다.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의 활성화가 부작용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도박을 목표로 한 게임과 일반 게임을 별도의 기준으로 관리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를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도박을 양지로 끌어올리려는 정부의 의지와 역할이 중요하다.
도박장 출입회수나 베팅액수를 적당히 조절하는 데 있어 철저한 기준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관리한다면 도박을 기존과는 많이 다른 개념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국내 도박 환경을 국민오락과 건강, 스트래스 해소라는 관점에 맞춰 접근하면 해외원정도박은 물론 국부 유출을 방지에도 상당부분 도움이 될 수 있다. 감정이나 심리상태, 사회적․ 재정적여건, 신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행동이나 상황을 피하면서 도박을 레크리에이션의 일환으로 허용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문화예술 공간을 넓히는 등의 방법으로 외롭고 지친 사람들에게 탈출구를 만들어주는 배려도 국민을 도박중독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 적극적인 대처가 될 수 있다.

불법행위를 단죄하고 책임을 묻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최소한 국민들이 지금 무엇 때문에 지쳐있는 건지 알아보기 위해 고민하고, 달래주기 위해 노력하는 정부의 성의가 더 필요할 때다. 관민이 마음을 합해 더 이상 이 땅에서 도박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보자.
도박의 양성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양지로 끌어내는 노력을 시도해보자.


(2011. 1. 20)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19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탯줄을 끊자

탯줄을 끊자


일명 ‘맥도널드 할머니’로 불리는 70대 노숙자의 인생유전이 화제가 되고 있다.
노숙 신세이면서도 영자신문을 읽고 고급호텔 사우나나 고급 커피숍과 식당만 선호하는 그녀의 우아한(?) 취향이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한 결과다. 더구나 유명대학 메이퀸 출신으로 외교부에 근무한 재원이었던 전력도 유명세를 거들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지독한 비극이다.
제대로 된 잠자리도 없이 떠도는 칠순의 그녀는 조만간 백마 탄 왕자가 자신의 배우자로 나타날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경악케 만드는 건 오늘 날 그녀의 현실이 순전히 어머니의 과잉보호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공주처럼 딸을 받들었던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이 딸의 인생을 나락에 빠뜨리게 된 것이다. 
분별없는 어머니의 헌신이 자식을 얼마나 끔찍하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 사례라 할 것이다.


과유불급의 자식사랑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맥도널드 할머니의 사연을 접하면서 가슴 한쪽이 뜨끔했을 대한민국 어머니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점점 더 광폭(!)해지는 엄마들의 치마폭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극성스런 모정에 짓눌려 갈수록 판단 능력을 상실해가는 젊은 세대에 대한 고민은 사회적 파장이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 뒷바라지에 익숙해지는 바람에 대학생이 되어도 학점관리나 이성교제 부분까지 부모의 관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사회에 진출해서도 이직이나 연봉협상을 부모 결정에 맡기는 ‘애어른’이 양산되고 있다.
부모의 리모콘 스케쥴 조종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그저 정신없이 바쁘기만 하다. 너무 바빠서 스스로를 돌아볼 볼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고민이나 반항은 물론 자기 소신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오로지 점수 벌레로만 양육된 학생들이 어떻게 인생을 알 것이며 지혜를 늘릴 수 있겠느냐는 걱정이 넘치는 배경이다.
특히 이른 바 ‘엄친아’들이 몰려 있는 법조계는 그 폐해가 심각하다는 걱정이다. 조금만 민감해져도 문제해결을 어려워하는 젊은 판검사들이 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실제로 사법부 판검사10명 가운데 4명은 일명 엄마들 치마폭에 쌓여 외고나 특목고 등 강남의 과열 입시경쟁을 뚫고 대학을 가거나 사법고시를 통과한 ‘엄친아’로 알려진 만큼 근거없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 엄친아들에게 우리 사회의 갈등 해결을 맡기고 판단을 구하는 자체가 넌센스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교육현장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일찌감치 예상했던 대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학생도 있지만 뜻밖의 학생이 부각되거나 반면, 성공을 확신했어도 실패로 끝나기도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결국은 그 어떤 것도 성공을 확실하게 담보할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의 반영인 셈이다. 그만큼 다양한 가능성의 세계를 인정해야 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부모의 지나친 개입이 과유불급의 후유증을 남길 수 있는 개연성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돼야 할 것이다. 부모의 과잉보호 속에서 성장한 자녀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불안이나 우울증을 겪을 확률이 3배나 높다는 학계의 보고도 예사롭게 넘길 부분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스팩만 강요하는 교육구조와 부모의 과잉보호가 자식들을 허깨비로 만들고 있는 무서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판단내리기를 두려워하고 정해진 길 외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온실 속 젊은이들로는 대한민국 미래를 만들 수 없다.
자식을 겁쟁이로 만드는 건 어느 이유로도 사랑이 될 수 없다.
지금으로선 고민과 좌절, 그리고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성교육과 아이들의 움켜쥔 숨통을 놓겠다는 부모의 결단만이 위기에 처한 현실을 구하는 처방이 아닐까 싶다.

특별히 대한민국 엄친아의 모친들은 각오를 달리해야 할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새끼를 언덕위에서 굴려 단련시키는 사자의 양육법을 배우는 것도 방법이다.
자식이 귀하면 귀할 수록 모진 세상을 몸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강단을 길러주는 현명함을 보여주길 바란다.
평생 함께 지켜주지도 못할텐데 최소한 자식을 맥도널드 할머니로 만들지 싶지 않다면 순응하라.


탯줄 부터 끊어야 한다.
많이 아프더라도 그게 진정 자식을 위한 길이다.

(2011. 1. 19)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18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마약, 그 붉은 덫

마약, 그 붉은 덫


마약으로 인한 연예계의 잔혹사가 끊이질 않는다.
이번에는 탤런트 김성민이다.
그는 현재 수차에 걸쳐 마약을 직접 밀반입하고 투약한 혐의로 구속된 상태다.
무너져버린 현실을 붙들고 후회하는 모습이지만 너무 늦었지 싶다.
그의 근황이 전해질 때마다 안타까움으로, 질타와 비난으로 인터넷 공간이 뜨거워진다.
그만큼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구속되기 한 달 전만 해도 ‘남자의 자격’ 방송을 통해 한국 연예인 최초로 전투기를 탑승하는 당당함을 보여줬던 그이기에 팬들이 느끼는 충격과 배신감이 그만큼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호감도 높은 프로그램의 고정 배역으로 주가를 올리던 와중에 일어난 일인 만큼 뭐가 아쉬워서 그러느냐는 질타가 쏟아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김성민처럼 잘나가던 연예인들이 마약으로 패가망신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관련된 뉴스 화면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김성민의 해맑은(?) 모습이 넘치고 있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현실을 실감나게 한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성이 있는데 부질없는 야심이나 쾌락에 몰입하고 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좋은 악상이나 활기찬 연기, 무대 위의 열정을 구한다는 명목도 그렇지만 막연한 쾌락에 자신의 전부를 던져버리는 경우도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마약의 폐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인위적으로 단절하기도 어렵지만 퇴폐적이고 비생산적인 환각상태의 치명성 때문에라도 금기시 할 대상이다.
돈이나 권력, 쾌락을 지향하는 욕구가 우리 삶의 근간을 위협할 개연성은 크다. 딱히 마약이 아니어도 그에 버금가는 폐해와 독성만큼은 뒤지지 않는다. 물론 적당히 잘 조절한다면 생의 활력이나 의미를 더할 수 있다는 계산이 통한다는 측면에서 마약과 차별성을 둘 수도 있지만 과도할 경우, 이 역시 파멸을 이끄는 결론으로는 마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약 연예인의 선배 격인 부활의 김태원은 마약을 끊을 수 있는 2가지 방법으로 감옥에 가거나 몸에 이상이 생기는 상황을 들었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일 텐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치를 그만두려면 감옥에 가거나 죽는 수밖에 없다고 자조하던 정치인 A의 모습이 떠올랐다. 일단 빠져들면 못 말리는 상황이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치는 마약과 같다’는 말이 정치권 안팎으로 공공연히 떠돌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자신의 전부를 갉아 먹혀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만큼 영혼이 마비되는 그 치명적 독성으로 치자면 마약이나 정치나 다를 바 없는 속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하고 황홀한 경지를 동경해오면서 우리는 스스로의 근원을 잃어버렸다.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던 순수성이나 소박함을 버리고 과장과 허황된 삶에 매몰돼버리고 만 것이다. 마약 같은 보조물에 의지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과대포장하고 싶은 욕구가 지뢰밭으로 남아있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조차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은 개인의 능력이나 한계를 뛰어넘는 영역에 대한 지나친 동경이 문제였다.
다행인 것은 인간이 쾌락만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드는 나약한 존재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얼마든지 억압의 사슬을 풀고 독립된 삶의 영역을 재건해 낼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약, 그 붉은 덫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자.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소박한 삶의 원형을 복구하는 데 그 답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의식주가 됐건 정신, 문화가 됐건 허황된 욕심부터 배제시키는 정지작업이 필요하다.
그 다음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면 된다.
자기절제의 힘을 믿고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되, 스스로의 각성이나 주변의 충고 또는 강압적인 제도적 장치를 이용한 브레이크 장착은 필수 사항이니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블로그는 마약에 빠진 연예인 뿐 아니라 정치권 인사들을 향한 충정을 담은 만큼 한번쯤 귀 기울여 들어주시길 당부하고 싶다.

(2011. 1. 18)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16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무상복지에 관한 고찰

무상복지에 관한 고찰


정치권의 복지논쟁이 뜨겁다.
무상급식에 이어 의료, 보육분야에 이르기까지 보편적 무상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민주당과,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할 무책임한 포퓰리즘 공약에 불과하다는 한나라당 반발이 맞서는 형국이다.
민주당의 '무상시리즈‘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일이라면 그 때는 정치권이 초당적으로 협조하는 게 도리일 것이다. 국민 모두가 골고루 행복해질 수 있다는데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일 테니 말이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식비, 교육비, 의료비를 무상으로 다 해결해주는 국가 정책을 마다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때 마침 저녁 시간에 TV에 덴마크의 유럽식 복지시스템을 소개하는 다큐프로가 방영됐다. 확실히 차원이 다른 복지개념이었는데 우리 현실과 맞물려서인지 해당 프로그램이 대번에 장안의 화제로 부상하는 분위기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는 물론 65세 이상 전국민을 대상으로 연금지급이 실행되고 있는 덴마크에서는 교육현장에 성적 서열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고 적성에 따라 직업을 정할 수 있기 때문에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그 어느나라보다 높다. 입시지옥과 각졸 사회적 차별과 격차에 시달리는 우리 국민들에게는 가히 꿈의 나라로 느껴질 만한 환경이다.
하지만 덴마크의 환상적(?) 복지 환경이 우리에게 그림의 떡으로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러 측면에서 양 국 사이에 단순한 벤치마킹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구조적 차이가 분명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조세부담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소득의 50%가 세금) 덴마크는 인구도 적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나 세금의 투명성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반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난제로 남아있다. 전형적 자본주의인 우리와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강점일 수도 있겠지만 명백하게 다른 상황이다.
무엇보다 근래 들어 덴마크의 사회복지시스템이 전반적인 개편 요구에 직면해 있는 현실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복지비용의 추가 부담이나 국제경쟁력, 노동력 확보 등을 위한 자구책을 보완해야 하는 현실적 문제에 봉착해 있는 자체가 항구적인 무상복지의 허구를 입증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결국 핵심이 ‘무상’의 현실성에 있음을 감안한다면 무상복지가 안고 있는 현실적 한계를 드러내는 또 다른 반증인 셈이다.


교육현장에 있으면서 또 다른 측면의 복지수요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여건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학생들 이야기다. 그들의 고충을 모두 해결해주고 거둬주고 싶지만 개인이 나서기엔 역부족이다.
무상복지도 좋지만 이들에 대한 관심을 확대시키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무상의 의미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겠다. 적어도 어려운 환경 때문에 가능성 있는 인재가 좌절하도록 버려지는 일만은 막을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우선 당장 효율적 측면으로만 보자면 마이너스인 결과는 정책을 입안하거나 수행해야 하는 입장에서 고민거리다. 장기적으로도 끝까지 존속될 수 없는 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나치게 정책의 효율성만 따지는 것도 국민적 합의, 특별히 사회적 빈곤 층이나 약자 층의 동의를 얻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예상된다.
그렇다면 절충이 최고의 전략이 될 수 있겠다. 기득권은 효율성보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입각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폭을 넓히고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회적 효용성이 떨어지면 가정이나 국가 경쟁력 기반이 취약해지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공감대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결국 세상일엔 공짜는 없다는 명제에 보다 충실해질 필요가 있다.

정치권의 복지경쟁은 복지수요에 대한 요구에 관심이 확대되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당리당략을 위한 정치적 공세로 활용하려는 의도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거센 역풍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음이다.
어떤 수준의 복지체계를 세울 것인지, 어떤 정책적 대안들이 필요할 것인지에 대한 정치권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다. 세계무대에서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무상복지의 적정 수위와 책임지겠다는 마음의 준비까지 총체적인 마침표를 찍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솔직히 정치권의 무상복지 논란을 지켜보면서 편치 않은 심정이다.
정치권의 그릇된 경쟁이 국민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지난 지방 선거에서 무상급식에 대한 개인 의지와 상관없이 반대 입장을 표명할 수 없었다는 고백을 수없이 들었다. 주변 기세에 눌려 찬성하건 반대하건 무상급식을 반대할 수 없었다는 토로들이 입맛을 쓰게 했다.


무상복지의 주체는 누가 뭐라고 해도 국민이다.
더 이상 대책없는 무상지지로 표계산만 해대는 정치인에 휘둘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건 국민 몫이다. 헛공약으로 국회의원 자리를 꿰차는 불상사가 없도록 국민 저마다 납세자의 권리를 강화할 일이다.
혜안을 넓힐 일이다.


(2011. 1. 16)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15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역사의 선택

역사의 선택

요 며칠 몇 권의 역사책에 꽂혀 지냈다.
역사에는 만약에’라는 가정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역사적 정황을 재구성해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터득한 바 있다. 그런 식의 역사 들여다보기로 망중한의 긴장을 푸는 건 나만의 휴식 노하우이기도 하다. 실제로 역사 기록을 살피다 상상한 것 이상의 영감을 전달받을 때도 많다.
인생은 끝없는 선택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삶인 것이다.
그 반향이 미치는 영향력 때문에 결코 소홀해질 수 없는 원천적 부담이 역사의 물꼬를 틀어쥐고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안의 경중이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역사의 노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순간의 선택’이 적지 않다. 작게는 개인의 소소한 삶에서부터 크게는 인류전체의 명운이 바꾸는 선택에 이르기까지 숱한 ‘선택의 순간’이 반복되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꽤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국산 전자제품 광고 카피다. 그런데 역사의 현장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절박하게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선택의 딜레마가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싶다. 살아가면서 숱한 선택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는 인생의 본질을 떠올리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단종복위 운동을 꾀하다 세조에게 목숨을 잃은 ‘사육신 사건’만 해도 그렇다.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집현전 학자들의 충절은 거사가 사전에 실패하는 바람에 집현전 학자들은 물론 단종의 명운까지 재촉하는 불행을 초래했다. (뜻을 같이했던 ‘김질’이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장인 정창손에게) 토설하는 바람에 발각되고 말았다)
애초부터 거사에 김질을 가담시키지 않았다면, 아니 김질이 좀 더 책임감 있고 담대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김질보다는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지 못한 안목의 부재부터 탓해야 하지 않을까? 여러 궁금증들이 꼬리를 물지만 모르긴 몰라도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성으로 역사의 물줄기가 흘러가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히틀러가 자신의 재능을 살려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면 그의 말로는? 마리 앙뜨와네뜨가 철없는 사치대신 국민의 아픔을 품을 수 있는 왕비의 역량을 갖춘 존재였다면 프랑스 혁명의 기로는? 장개석이 모택동을 이길 수 있었다면 오늘 날 중국의 운명은? 신라대신 고구려나 백제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구한말, 대원군이 쇄국정책 대신 개방책을 선택하고 이완용 등이 매국노가 아닌 애국자의 길을 선택했다면 우리의 일제강점기는? 6.25사변이 남북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역사 현장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아쉬움이 너무 많다. 세계사는 물론 우리 역사에서도 예외가 없다. 과거 뿐 아니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안 중에서도 훗날 아쉬움의 역사로 평가될 일들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다.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 여론에 귀를 기울이려는 위정자의 노력이 역사의 아쉬움을 줄이는 한 방안이 아닐까 싶다.
특히 4대강 사업이나 무상 급식 등 국민적 합의가 도출되지 않은 사안들에 대해서는 더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겠다. 매 사안마다 후대의 평가에 무게를 두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고 싶지 않다.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있는 중요한 시점이다.
각양각색의 아이디어와 출마자들의 핑크빛 공약 등이 2011년을 특별히 백가쟁명시대로 만들 것 같은 예감이다.
더 이상 역사를 거스르는 어리석음을 자초하는 일이 없어야 할텐데 무방비상태로 휩쓸리게 될까봐 걱정이다. 걔 중에는 분명 이틈을 타고 역사의 흐름을 유린할 불순세력들이 들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시대 낡은 사고의 포퓰리즘적 산물이 역사의 행간을 어지럽히면서 활개를 치는 무리에 속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도 선거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인 의미를 담은 선택인지를 인식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이미 저질러놓고 뒤늦게 후회해봤자 인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지금까지 경험한 학습효과로 충분하다.
옥석을 구분하는 지혜로운 안목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지에 대해서도 깊이 명심할 일이다.

더 이상 구차한 후회와 반성에 매달리는 과거를 양산해서는 안되겠다.
후회를 줄일수록 밝은 미래는 당연히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하자.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용기를 가지고 역사를 직면한다면 되돌릴 필요가 없게 된다고 한 마야 안펠로우의 조언을 모두의 가슴에 담자.
그렇게 2011년을 국운 상승의 기회로 삼고 그 여세를 몰아 2012년을 대한민국이 거듭나는 원년으로 만들어 버리자.
우리의 힘으로.

(2011. 1. 15)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10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다잉 메시지

다잉 메시지


때 아닌 ‘다잉 메시지’ 논란이 신년 벽두를 달구고 있다.
살해된 피해자가 범인에 대한 정보를 살인현장에 남겨놓는다는 통상적 의미가 아닌, 이유를 알 수 없는 동물들의 떼죽음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향방.....지구촌 곳곳에서 동물들의 집단 의문사 사태가 이어지면서 그 원인과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십만, 수천, 수백 단위의 새 떼의 주검이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수백만 마리의 각종 물고기떼의 집단폐사가 지구촌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수만 마리의 꽃게들과 찌르레기, 그리고 꿀벌들이 대량으로 집단폐사 됐다는 소식도 들린다. 심지어 중국 광저우에서는 수천마리의 지렁이들이 연일 아스팔트 위로 기어오르는 기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형편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의문사 정황은 아니지만 지난해 여름, 괴질 바이러스로 인한 토종벌 90%의 집단 폐사로 토종벌 농가를 도탄에 빠뜨리더니 이번에는 구제역과 AI 조류독감이 쓰나미처럼 전국의 축산 농가를 휩쓸고 있다.
공상과학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현실로 말이다.
동물들의 떼죽음이 우리들에게 뭘 전하고자 하는지 답을 얻기가 쉽지 않다.
비밀정부의 실험 때문이라는 식의 음모론도 있고 사라진 마야문명이 예고했던 2012년 지구 종말론이 대두되기도 한다.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나 강력한 지구자기장, 방사능 성분의 중성자 별 출몰 등 갖가지 억측도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떠돌고 있다.
그렇게 동물들의 ‘다잉 메시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동물의 수난이 인간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는 전문가의 경고가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 먹이사슬 최정점에 서 있는 인간이 다음 표적이 될 거라는 관측이 근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문득 인간이 지구의 주인을 자처하지만 실상 인간보다 3억년 먼저 지구를 접수한 개미를 부각시키던 언론보도가 떠오른다.따지고 보면 인간은 그동안 대책없이 무모했고 지나치게 오만했고 또 몰염치했던 것 같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허명아래 자연의 희생을 많이도 착취했다. 자연은 손을 내밀기만 하면 그저 속절없이 주고 또 주는 존재라는 근거없는 믿음은 무슨 자신감에서였는지.
그러다 인간의 이기심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자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내리고 있는 형국이다. 자연의 본격적인 반격에 허를 찔린 채 쩔쩔매는 그 나약함이 인간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사랑해’를 생각한다.
‘사랑해’는 집에서 기르고 있는 강아지 이름이다. 맨 처음 아들의 손에 들려 들어올 때만 해도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랑해는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당당한 가족구성의 일원이 됐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랑해의 영특함이 계속 탄복하게 만든다. 눈치가 너무나 빤해서 자기가 발 벗고 누울 장소를 기가 막히게 알아낸다. 집안 전체를 돌아다니길 좋아하면서도 제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일체 나오지도 않고 짖지도 않는 모습을 보면 인간보다 못하지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나만 해도 녀석의 배변 뒤치닥거리를 기꺼이 해 줄 정도로 친밀한 존재다. 심지어 잠자리에 찾아와 내 곁에 살포시 기대고 자는 모습을 보면 개와 인간이라기 보다 동등한 생명체로서의 진한 교감이 느껴질 때가 많다. 혹여 이번 사태가 동물들이 그런 영특함으로 우리에게 지금 지구와 인간의 위기를 전하고자 하는 의리의 발로라면 대단히 무서운 일이다. 필경 굉장히 좋지않은 징후임에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좌절은 금물이다.
위기를 호기로 바꾸는 것은 각자의 역량에 달려있다.
이제부터라도 자연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기심을 버리고 새로운 관계로 거듭나면 된다. 일종의 경외심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 개념으로 그들을 새롭게 받아들이자는 말이다. 심지어 그들을 위해 기꺼이 방패막이가 되겠다는 각오까지도 블사할 필요가 있다.
자연의 위기를 최소화 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통해 그동안 무모하게 훼손시킨 자연 앞에 성의를 표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다잉 메시지를 리빙 메시지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갖자.
그것이 지금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절실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2011. 1. 10)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9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별판소동

별판 소동

별들은 역시 위대했다.
국방부 장관의 야심찬 새해목표도 무산시킬 수 있는 가공의 위력을 보여줬다.
군 개혁의 일환으로 장군 차량의 별판과 장군 전용의 식당, 이발소 공간을 없애겠다던 국방부의 호기가 퇴직 장성들의 모임체인 ‘성우회’ 반발로 제동이 걸렸다는 소식이다.
군 개혁 의지가 쇠퇴한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별들의 기세등등한 반격에 국방부가 초반 기선을 제압당한 분위기다.
우리사회에서 별판을 단 차량이 막강한 권력의 상징으로 통용될 수 있는 배경을 설명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그런 만큼 쉽사리 찬반의 입장을 정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기존의 계급관념을 뛰어넘는 특별한 정서를 담아 바라봐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분단된 대한민국에서의 장군이 갖고 있는 특화된 존재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시에 무한 책임을 져야하는 장군의 또 다른 기능을 염두에 두더라도 그들에 대한 공고한 신분 보장은 당연하다는 게 전통적인 관례이기도하다.
결정적인 순간, 그들의 판단에 따라 국가의 명운이 좌우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기왕에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종 전쟁터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장군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역시 그들의 활동상황을 담은 전쟁 무용담도 수없이 접한 바 있다. 더구나 계급에 따른 상명하복 체계는 군 조직의 필수 덕목 중 하나로 치부되고 있다. 그런 만큼 상호간 계급에 대한 확실한 인지 기능이 갖는 의미는 생각보다 크다고 할 것이다.
군이 더 강해져야 하는 현실적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일사분란한 지휘체계 강화의 필요성이 대두됐다고 할 것이다. 특히나 전시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유지해야하는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그다지 많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번 ‘별판소동’ 과정에서 드러난 성우회의 처세는 상당히 실망스럽다. 신념보다는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안일함이 더 크게 비춰졌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장성 차량에 별판을 붙이고 안붙이고는 군개혁에 있어 그다지 중요한 관점이 아니다.
그러나 '예비역 장군들의 항의'때문에 별판을 허용하기로 방침이 바뀌는 것은 국방부 전체의 권위를 실추시킨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간단히 처리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런 성우회가 군의 명예와 예우를 들어 별판 부착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건 상당한 모순이다. 무엇보다 예의를 지켜 정중하게 대우할 대상을 선택하는 권한은 받는 쪽이 아니라 주는 쪽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예우의 대상이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순간, 본래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게 돼 있다. 강제할 수 없는 예우의 선천적 속성이 파괴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군대조직에서의 권위는 반드시 필요한 항목이다.
그러나 권위와 권위주의는 명백히 다르다. 기득권 유지를 위한 권위주의는 당연히 쇄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별판이나 달고 다니고 사병들에 비해 지나친 호의호식으로 일관하는 장군의 ‘권위주의’는 해당 장군의 미래 뿐 아니라 국가의 미래까지 망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반면 리더의 소신과 진정성으로 형성된 권위는 자발적인 복종으로 군 기강을 형성하는 지도자의 카리스마다 개념이다. 모방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일방적인 지시 일변도가 아닌 상호 교감을 통한 리더십만이 유사시 병사들이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충성심을 이끌어 낼수 있다. 그런 리더십이 진정한 의미의 ‘권위’가 아닐까 싶다. 이번 김관진 국방장관의 군 개혁 시동을 환영한다.
군 개혁의 일성으로 장군들의 특권의식을 지적한 점은 장관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박수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군 개혁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장벽이 될 수도 있을 장군들에게 스스로 거듭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의미에서 고무적이다. 하지만 상호존중이 없는 개혁은 상호분열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장관의 보다 신중한 처신이 요구된다는 생각이다. 개혁과정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이번 성우회처럼 수많은 반대와 시비가 가로막고 나설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굴복하거나 주춤거려서는 안된다. 우호적인 국민 여론을 주 무기 삼아 군 개혁에 대한 비전과 신념을 제대로 한번 펼쳐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차량에 별판 다는 건 아무래도 좋다. 우리의 군이 믿고 따르고 정성으로 이끌고 가는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국민적 열망이 용두사미가 아닌 보다 큰 결실로 매듭 지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PS: "노병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라질 뿐이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소리없이 사라져간다는 의미로 군인의 소명의식을 강조했던 맥아더 장군의 큰 가르침을 지금 이순간 우리의 장군들이 한번쯤 되새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2011 . 1. 9)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7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인과 응보를 생각하며

인과 응보를 생각하며



이 나이가 되도록 건강에 관해 크게 걱정한 경험이 없다.
그런 만큼 평소 건강관리에 상당히 무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때 마침 종합검진 통보도 있고 해서 이 참에 작심하고 내시경을 비롯해 시티촬영, MRI까지 총체적인 건강검진을 결행했는데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검진 4일 전부터 요구되는 수칙이 많았다. 절차도 생각보다 복잡했다.
첫 주문부터 무지막지(?)한 과제였다. 4리터 물통을 가득 채운 분말가루를 물에 타서, 그것도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에 다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워낙 물먹기를 좋아했던 터라 별 생각없이 덤볐다가 아주 혼났다. 야행성 체질에 새벽시간 맞추는 것도 그렇고 두 시간 꼬박 4리터 분량을 다 해결하는 일도 절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심한 메스꺼움이 고역이었다. 거기다 장세척으로 인한 설사가 계속되다보니 이건 거의 토사곽란 환자를 체험하는 듯 했다.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온갖 착잡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건강에 어려움을 겪던 친구들 얼굴부터 혹시 내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뜻밖의 심리상태가 노출되는 것 같아 당혹스러웠다. 결과적으로는 해피앤딩이었다. 일주일 후 결과가 나오게 되어있는 혈액검사를 제외하고는 검사 결과를 당일 통보받았는데 혈압(100/60), 당뇨(100), 시력(각각 1.0) 등 각 신체 기능이 나이에 비해 굉장히 건강하다는 소견이었다. 심지어 건강관리를 아주 잘했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서는데 장례식 장 건물의 영안실 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이내 검사 중간 중간 검진 담당의와 죽음에 관해 나눴던 토막 대화들이 떠올랐다.
누구도 죽음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응급실을 거쳐 영안실로 옮겨지는 사망자의 상당수가 임종 순간까지도 본인만큼은 죽음에서 예외인 것처럼 생각한다고 한다. 결국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숙명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갈망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천년만년의 삶을 보장받기라도 한 것처럼 탐욕의 극치로 치닫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목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인생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언젠가 직면하게 될 죽음을 의식한다면 좀 더 겸손하고 충실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긴다. 그야말로 죽음이 삶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게 되는 순기능 말이다.
콩 하나만 해도 뿌린대로 거두게 되는 것처럼, 죽음도 ‘인과응보’의 메커니즘이 적용될 수 있다니 흥미롭다. 사전 징후만 제대로 관찰해도 죽음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문분야 관계자들의 진지한 견해이니만큼 관심을 기울여 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건강검진 현장의 오랜 경험으로 수진자의 이력만 가지고도 병력이나 건강의 이상 유무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실제로 술 담배, 과로, 스트래스, 불규칙한 일상 등의 관련 데이터를 적용하면 수진 결과와 상당부분 일치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결국 건강의 이상은 사전에 경고되는 징후들만 잘 챙겨도 예방이 가능하다는 소리다. 비약이 될지 모르지만 여타의 정황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실패로 돌아간 동계올림픽 유치나 FIFA 부회장 선거, 지난 번 지방선거에서의 한나라당 참패도 뿌린 대로 거둔 정직한 수확물이다. 깊은 속사정까지야 알수 없지만 오래 전부터 균열이 시작된 패인의 조짐이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 요인이 수정되지 않고 방치되는 상황이라면 그 대상이 사람이 됐건, 정당이 됐건 아무런 미래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정부정책도 마찬가지다. 안일한 외교로 협상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나마 국제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될 게 뻔하다. 건강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자신감 때문에 자기 몸 살피기를 소홀히 한다면 반드시 몸에 이상이 오게 돼 있다.
누구나 성공적인 미래를 꿈꾼다.
성공적 미래는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는 명제다. 세상 일엔 공짜가 없고 원인없는 결과는 더더욱 없기에 그렇다. 모든 일은 준비하기 나름이다. 하기에 따라 미래에 대한 엄청난 프리미엄과 스스로의 인생을 조정하는 놀라운 혜택을 얻을 수도 있다. 삶이 때로 많이 번거롭고 고통스럽긴 하지만 이 역시 완숙한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다면 기꺼이 그 과정을 감수해 낼 에너지가 나오게 돼 있다. 결국 지금 이 순간이 미래의 내 모습을 반영하는 에너지의 실체인 셈이다. 건강 검진 받으면서 건져 올린 생각의 편린들이 혹여 여러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 많이 웃는 하루 되시길.



(2011. 1. 7)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6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모두가 제자리에서

모두가 제자리에서



프랑스에서 대한민국 아이콘이 빛을 발했다.
프랑스 국영 TV가 대한민국의 잠재적 저력에 포커스를 맞춘 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프랑스 전역에 소개했는데 우리로서는 모처럼의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가 대한민국을 주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국가 전체가 무기력증에 빠져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프랑스 내부의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대한민국 사회의 역동성을 통해 자국민의 의식을 자극하고자 하는 의도도 일정 정도 담겨 있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그들의 107분짜리 다큐 동영상에 투영된 대한민국은 열정과 저력이 넘치는 가능성의 나라였다.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으로 끊임없는 위기 속에서도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은 물론 문화적으로도 주변국을 리드할 정도의 성과를 올리고 있는 비전의 땅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 사회의 갈등국면과 소모적 논쟁까지도 그들에게는 열정과 활기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이는 최근 93세의 레지스탕스 출신이 쓴 저서가 프랑스 서점가에서 상종가를 치며 신기록을 세우고 있는 현상에서도 엿보이는 정서다. 최근 석 달 동안 60만 권이 팔려나갔다는 이 책은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선대가 그랬던 것처럼 부당한 일에 항거하고 화를 내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면이 고작 30쪽인 간이책자에 불과한 이 책의 선풍적인 인기몰이 배경을 살피다보면 프랑스 사회의 깊은 고민의 일단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끼리는 날마다 지지고 볶는 형국이지만 외부에서 긍정적 평가를 듣게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러 부분의 징후들을 보면 이마저도 마냥 안심할 처지는 아닐 듯싶다.
평균 수명 상승의 여파인지 요즘 들어 나이가 점점 숫자에 불과해지는 현상을 보게 된다. 신체적으로도 월등히 젊어졌다. 61세 생일을 환갑이라는 특별 의식으로 장수를 축하하던 관습이 무색해질 정도다.
그럼에도 고정관념의 파고를 뛰어넘지 못하고 스스로를 얽매고 제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엇보다도 그런 식으로 양산되는 실업자가 적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걱정이 크다.
이제 막 50이 지난 나이에 현직에서 명퇴하거나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잉여인간군으로 전락해가는 모습은 안타깝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도양양했던 사람들이 한 순간 뒷방 노인의 행색이 되어 있는 현실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측은함을 넘어 화가 치민다. 그들의 현실이 개인이 아닌 국가나 사회적 영역 차원에서 책임져야 할 사안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하고자 하는 의욕만 있으면 되는데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듯하다.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힘과 정신력을 겸비하고도 고정관념 때문에 스스로를 포기하는 패배주의가 문제라고 본다. 사회적인 편견도 걸림돌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특별히 노령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그들의 노동력이 사회발전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기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출산 고령화 사회 영역까지도 악순환의 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당사자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야겠다.
엄격히 말한다면 젊은이들에게 투쟁하라고, 무기력에서 벗어나라고 독려하는 프랑스 형편이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나친 비관일까? 무엇보다 방황하는 청춘들의 핏기 잃은 고뇌를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학생일 때는 점수에 볼모 잡혀 푸른 꿈을 짓눌렸던 그들이 학교 문을 나서고도 굳게 닫힌 취업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모습이다.
젊은이 특유의 진취적 기상과 폭발적인 도전정신들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대한민국의 꿈나무들이다. 그들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언제까지 이들의 방황하는 발길을 지켜보고 있어야하는 건지 선뜻 답을 낼 수 없어 답답하다. 물론 정금을 얻기 위해선 까다로운 공정과 엄격하고 혹독한 단련 과정이 불가피하다. 젊은이들에게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동량이 되기까지 필요한 내공을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비판과 도전 정신 역시 젊은이들을 가장 젊은이답게 만드는 조건이다. 또 그들의 조건이 충족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할 책임은 기성세대에 있다. 경우에 따라 이들의 정당한 비판이나 도전에 대해서는 상으로 격려하는 센스가 있어야겠다.
한 나라의 과거를 보려면 박물관에 가고 현재를 보려면 시장에 가고 미래를 보려면 학교에 가보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노인은 노인답게 저마다의 역할에 충실하고 스스로의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21세기 대한민국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바른 모습이 아닐까 한다. 모두가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는 것 말이다.
모든 이들의 무운을 빈다.



(2011. 1. 6)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5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배려가 왕도다

배려가 왕도다


<블로그 독자 여러분, 기뻐해 주시라. 저, 홍문종이 인기 짱인 카운슬러가 됐다.>

직업 때문인지 개인적 특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근래 들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실제로 학업을 고민하는 학생부터 사업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성적, 진로, 직장, 결혼, 가정, 사업 등 인생의 전반적인 문제점에 대한 해결을 구하며 나를 찾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요즈음이다.

오늘만 해도 여러 명의 지인을 만나 어려워진 회사경영이나 원활하지 못한 가정 문제를 고민하는 하소연을 들었다.
그래봤자 열심히 들어주고 함께 고민하는 정도다. 그런데도 나를 찾는 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나의 주특기 덕분인 것 같다. 거기다 나름대로 진정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려는 나의 성실성이 상대방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러다 조만간 카운슬러계의 지존으로 명성을 날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여기 김치국 한사발이오!!)
상담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본의 아니게 다른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간접경험으로 오히려 세상을 배우는 덤을 챙기는 재미도 꽤나 쏠쏠하다. 그동안 우리의 사회적 패턴은 확실히 많이 변했다.

대표적인 변화는 집단적이고 물질 위주로 흐르던 기존 질서 대신 개인의 감성과 정신적 추구가 더 큰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개인의 만족도나 정신적 평화가 가족이나 집단의 안위보다 우선시 되거나 행복의 주된 주제로 설정되는 자체가 낯설지 않은 분위기다. 기존의 사회적 질서나 가치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기준으로 빠르게 전환되는 현상이 새로운 규칙으로 형성되고 있는 정황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제는 뭐든지 개인의 개성이 우선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객관적인 정황 보다는 주관적인 동의가 판단의 중요한 근거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정말로 실감난다. 아무리 완벽한 행복의 요소를 갖췄다고 해도 당사자의 용인이 없다면 그건 행복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정황에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독특하고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개인취향을 존중하다 보면 모두가 만족할만한 합의점 도출이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자칫 사공이 난립해 배가 산으로 가거나 지루한 줄다리기로 적절한 시기를 놓쳐 낭패를 볼 수도 있다.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심지어 사제지간 관계에서조차 개인 존중이 부적절한 형태로 표출되는 광경을 적지 않게 목격하게 되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무력이나 권력의 힘을 빌어 무조건 압박하고 강요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강요의 형태로는 절대 대중의 동조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특히 지도자의 리더십에 있어 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수많은 지도자가 실패한 배경도, 교실에서 좋은 교육이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대중 설득이 쉽지 않은 것은 개인의 입장이 고려되지 않은 원인이 가장 클 수 있다. 개개인의 납득과 동조를 얻어내지 못하면 한낱 빈 구호로 치부될 수 밖에 없다. 지도자가 제시하는 미래 비전이 반향을 얻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다. 결과적으로 타협과 동의가 리더십의 성공여부를 가름하는 주요 변수가 되는 셈이다.
이는 새해가 되면서 이런 저런 목적으로 2012년 선거판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진 사람들도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수많은 정책을 담은 공약들이 쏟아져 나올 테지만 개개인의 행복을 배려하지 않고는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담는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유권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결정적 하자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상대의 마음을 열고 타협과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역지사지 입장에서 상대를 헤아릴 수 있는 눈높이로 접근해야 한다.

상담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상담은 사람들의 애로사항을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만으로 소기의 목적이 달성된다. 정책이나 공약을 입안하는 과정에서도 다양한 계층을 찾아다니며 그들이 말하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수렴하고 거기에 따뜻한 배려를 덧입힌다면 그 공약이나 정책은 당연히 성공하게 돼 있다.
특히 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의 경우, 대중을 향해 귀를 열어 크게 듣겠다는 자세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 보장된다. 거기다 따뜻한 가슴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지혜로운 처신이 가능하다면 금상첨화다.
귀가 솔깃해지는 희소식일 것이다.

서로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가 사이가 틀어져 버린 '여우와 두루미'라는 이솝 우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우가 납작한 접시 대신 목이 긴 병으로 주둥이가 긴 학의 식사 방법을 배려했다면, 두루미가 목이 긴 병으로는 결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여우의 입장을 배려했다면 이들의 우정은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국민을 대하는 정치인의 마음이 이와 같다면 최소한 국민으로부터 외면 당할 걱정은 안해도 될 것이다. 실천하기까지 어려울 것도 없다. 그저 존중하고 배려하면 된다.
그렇게 한번, 굽어진 정치현실을 바로 펴는 시작을 지금 시도해 보면 어떨까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려가 왕도라는 건 만고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2010.1. 5)
....홍문종 생각

홍문종 생각 - 더불어 함께 가자

더불어 함께 가자

새해다.
어제나 오늘이나 뭐가 다른 건지 잘 모르겠지만 새해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한다.
그래도 새해가 되면 넘치는 공약들이 덤덤한 일상을 빼곡히 채운 시간표 사이를 누비고 있다. 살아 숨 쉬는 징표로써의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 실제로 금연이나 금주, 다이어트 등 일상과의 단순한 약속부터 일생일대의 목표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설계하는 결심들이 한번 쯤은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작심삼일로 반복되는 결말까지도.
인생을 아무런 목표 없이 마구잡이로 살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마주한 삶의 순간이 중차대하다. 낮은 실행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목표설정과 갱신 과정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일지 모른다.

인생의 계획은 삶의 목표점을 향하는 과정을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가고자 하는 목표점을 설정해 놓고 어떤 과정을 통해 가는 것이 좋을 지 길잡이가 되는 순기능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안내 받은대로 따르다 보면 어느 결에 목표점에 도달해 있는 것처럼 인생의 계획도 삶의 여정을 좀 더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네비게이션(계획)이 길 찾기의 모든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만능은 아니다. 완벽한 기능이었다면 모든 인생은 단 하나의 유형으로 고정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상의 결론이 해답으로 나와있는 예측가능한 삶이라면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불완정한 삶의 여정 자체가 우리 인생의 진정한 축복일 수도 있다.
목표점에 도달하기까지 각각의 경우에 맞는 방식을 얼마나 세밀하게 동원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결말을 달리하게 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삶의 묘미가 거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속도로가 빠르다고 해서 그 길이 최선인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 길을 선택하게 된다면 우선 당장 몰려든 차량으로 인해 교통체증이라는 돌발 변수가 불가피하다.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평가를 달리해야 하는 새로운 과정이 시작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가장 수월해 보이는 선택이 가장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걸어갈 수 밖에 없는 여건인데 고속도로를 거쳐야 한다거나 자동차로 좁은 오솔길 주행해야 하는 불합리한 선택에 봉착될 경우도 있다. 판단에 따라 상황이 반전되기도 한다. 과감히 상황에 맞는 재선택이 요구된다.
돌발상황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는 악순환의 덫에 갇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인생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상존한다. 지나치게 수월한 해결책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요구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도달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세상 일에는 공짜가 없다.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이 적지 않다. 정보를 전달하는 메신저의 성향도 중요한 변수 중 하나다. 교과서적인 방법은 정도를 걸을 수 있으나 고리타분한 속성으로 시대에 뒤처질 수 있다는 부담이 있다. IT 시대의 첨단 과학을 통한 정보는 검증이 덜 될 수 있어 자칫 실패에 이르기 쉽다. 적, 특히 친구로 위장한 적이 정보의 메신저가 되는 경우, 의도된 함정에 빠지게 되면 상황을 크게 악화시킬 우려가 크다. 어떤 상대로부터 정보를 취득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응하는 각각의 입장이 정리돼 있어야 한다.
비용 문제 역시 목표달성에 있어 변수로 작용하는 요소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하는 경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겠지만 4000만 국민이 대상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간이라는 특정 부분의 효율성만 고려됐을 뿐, 수용성이나 비용 측면에서 적합한 방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과는 달리 국가차원의 목표 설정시에는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다. 개인은 목표를 이루겠다는 의지가 중요하지만 국가나 사회적 차원은 다르다. 4대강 사업이나 종편 선정 과정은 물론 세종시 결론에서 볼 수 있듯 국가 사업은 목표달성에 대한 의지보다는 국민적 공감대 충족 여부가 더 중요한 선택 기준이 돼야 한다. 국민적 동의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성공시킬 생각을 언감생심 염두에 두지도 않는 '민본 정치'여야 할 것이다. 이를 무시하다간 자칫 의욕만 앞섰던 탐욕의 정권이 겪었던 전철을 답습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국가 차원의 목표 설정에는 삶에 지친 국민들에 대한 배려가 우선돼야겠다. 당리당략 보다는 국민의 좌절을 세심하고 따뜻한 관심으로 품을 수 있는 정치가 답이다.
저마다 그럴 듯한 신년 계획을 위해 에너지를 모으는 이 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꿈 한조각을함께 심어보자. 더불어 함께 사는 터전을 통해 희망을 설계해보자.


(2010 . 1. 4)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3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사자성어

사자성어


해마다 연말연시면 각종 사자성어들이 넘친다.
촌철살인의 현실 비판과 풍자의 대리만족이 주는 매력 때문인지 반향도 큰 편이다. 중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매년 연말과 연초에 각각 선정해서 발표하는 사자성어가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1년을 '장두노미'(藏頭露尾)로 선정, 진실을 감추려는 정부의 어리석음을 꼬집었던 이들이 이번에는 ‘민귀군경’(民貴君輕)으로 신묘년 새해 희망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했다. 백성이 제일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이 제일 가볍다'는 뜻이란다.
왜 하필 맹자의 민본 사상인지 모두가 무겁게 고민해야 할 사회적 명제가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리더격인 대학교수들이 국민존중 화두를 환기시킬 때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들어 대다수의 국민들이 편치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안보불안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관권이 인권을 경시하고 부자가 빈자 위에 군림하며 권력의 횡포가 자정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사상최대의 무역흑자와 4.5%의 경제성장, 외교적 역량이 확장되고 국격이 높아졌다는 '낭보‘를 쏟아내도 박탈감에 시달리는 국민에게는 허공의 메아리 일 뿐이다.

임기 4년차에 접어들면서 레임덕이 본격화 되는 느낌이다. 곳곳에서 권력누수 조짐이 목격되고 있다. 다른 정권과 유사한 경로를 걷고 있는듯 한데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레임덕이 본격화되면 이를 피하기 위한 권력 중심부의 무리수가 커지기 마련이다. 권력 기관들의 눈치보기도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럴수록 '민귀군경'의 충고가 절실할 테지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한 편은 아니다. 민심 위에 군림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속성 때문이다.
권력의 중심부의 있는 사람들이 권력에 취해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니 더 큰 문제다. 어차피 무위로 돌아가게 돼 있는 권력인데 그 한계점을 잊고 마치 영원무궁한 절대치를 소유한 마냥 현실을 망각하기 일쑤다. 국민을 틀어 쥐려는 권력이 성공한 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모든 것이 환타지의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게 될 때까 그 헛된 시도를 멈추지 못하니 큰일이다.

간과할 수 없는 건 훨씬 나빠진 정국 상황이다.
대학교수들이 선정한 사자성어의 변환과정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정황이다.
2009년 말엔 '방기곡경'으로 바른 길을 좇아 정당하게 일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일을 한다고 정부정책을 비판한 바 있다. 그 1년 뒤인 2010년 사자성어는 '장두노미'였다.
그러던 것이 2011년 새 사자성어는 더 강경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바로 '민귀군경'이다. 계속 그런 식의 실정이 이어진다면 사직이나 임금보다 훨씬 귀한 백성을 위해 모종의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사자성어다. 중요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임금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아주 무서운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공공연히 민란 봉기를 선동하는 움직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과거와 달라진 풍경이라 하겠다. 우리가 사자성어를 관전하는 포인트를 여기에 둬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대통령의 신년사는 민심을 읽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좋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미루지 않고 이뤄야 한다는 일기가성(一氣呵成), 뜻이야 좋다. 하지만 민심의 경고를 염두에 두지 않은 자화자찬 일색의 상황해석은 무엇에 근거를 두신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특히 ‘지난 3년간 이뤘던 모범적인 금융위기 극복 및 향상된 국격 등을 기반으로 선진 일류국가의 최종 목표를 위해 자만하지 않고 더욱 내실을 다져나가자는 의미, 국운 융성의 절호의 기회를 맞아 국민이 단합해 안팎의 도전을 극복하고 선진국의 문턱을 막힘없이 넘어가자는 염원’ 등의 의지가 담긴 신년사에서 국민이 느낄 아쉬움의 파장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현실과 유리된 대통령의 상황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철렁한 기분이었다.
자신은 권력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 임기 마지막 날까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인데 레임덕하고 무슨 관련이 있느냐며 납득할 수 없다고 강변했는데 본인으로서는 진심인 것 같았다.
권력을 쓰지 않는 대통령이라....
판단력의 오류가 문제인지 인의 장막이 문제인지 나조차 헷갈리게 되는 대목이었다.
대통령의 권력은 국가 통치의 근원점이다. 권력을 쓰지 않는 대통령의 존재는 도대체가 말이 안된다. 불행한 일이다. 5%의 소수가 국부의 95%를 쥐락펴락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국민과 정부 사이의 공감 영역이 갈수록 취약해 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산은 정상을 향해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훨씬 더 위험하다고 한다. 권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임기가 가까워질수록 역사에 남을 업적을 남기겠다는 초조함과 성급함이 일을 그르치는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통합과 소통만이 해결책인 현실직시가 있어야겠다. 노장청이 하나가 되어 화합을 이루면 못할 일이 없다는 의지와 각오로 임할 일이다. 21세기 리더십의 화두가 소통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남과 북의 가슴이 한 마음으로 꽃 피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지도자와 국민 사이에서도 똑같은 화두가 둥지를 트게 될 그 날을 고대한다. 그리하여 이 다음 사자성어에서는 태평성대의 노래들이 흘러 넘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2011. 1. 3)
...홍문종생각

2011년 1월 2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행복하려면

행복하려면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세계 경제규모 13위.
괄목할만한 대한민국 경제 지표다.
전 세계가 ‘한강의 기적’을 배우겠다며 대한민국으로 몰려드는 정황인데도 정작 당사자인 우리 국민 상당수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단다. 기회가 되면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을 만큼 국가적 자부심이 결여된 것으로 조사됐다니 아이러니다. ‘돈에 대한 집착’과 ‘안보 불안’이 낮은 행복지수의 결정적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데 국가와 정치에 대한 불신이 작용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는 2010년을 보내는 연말 송년 모임 자리에서도 자주 접하게 되는 여론이다. 과거에 비해 모든 여건들이 월등히 나아졌는데도 국민의 행복지수가 오르지 않는 데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일종의 국가적 자부심의 향방과 무관하지 않다는 중론이다. 우리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는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국민들은 스스로를 행복해 한다는 데이터가 있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저서로 우리 사회에 ‘정의 신드롬’을 몰고 온 하버드대학 마이클 샌들 교수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샌들 교수는 연평도를 공격해 온 북한에 대한 우리의 즉각적인 대응이 ‘정의’의 본질이지만 신중함과 균형을 이룬 이성적 판단 역시 정의의 또 다른 결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장기적인 안목과 큰 틀 차원의 접근이 우리의 안보불안 해소에 더 바람직한 해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이 크겠지만 침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진짜 정의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겠다. 정치지도자에게 조급하게 독촉하며 밀어붙이기보다 장기적으로 안정될 수 있다는 확신 아래 보복을 유예해보는 것도 긍정적 전략의 한 차원이 될 수도 있다는 견해였다. 그런 맥락에서 국민으로부터 불신받고 있는 정치권의 고민도 함께 진행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의 시장 중심은 결국 개인적 소비를 토대로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시장이 제기능을 잃고 급기야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 시켰다는 샐든 교수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샐든교수의 지적처럼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어있는 시장이 사회적 통합, 안보, 평등, 커뮤니티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 등 고귀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에 필요한 가치들을 훼손시켰다는 책임의식이 문제 해결의 동기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인식아래 부단히 자기 역할을 찾는 것이 시장의 기능을 긍정적으로 되돌리고 공정사회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한국의 정치 불신 역시 지나치게 경제적인 부분을 중시하면서 정의와 같은 문제를 소홀히 한 결과로 진단하기도 했는데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라고 본다.

우리에게 불행한 역사가 존재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인간 본연의 속성을 드러내기도 했고 숨 가쁜 여정을 달려오기도 했다. 아직은 그 긴 터널을 다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격려하고 다독거리면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상대적 박탈감을 배려하는 소비패턴과 공정과 정의를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을 통해 스스로가 먼저 바뀌려는 노력의 선행도 국민적 자부심을 살릴 수 있는 한 해법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누구가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증 보다는 우리 국민 스스로에 달려있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높일 수 있어야겠다. 우리가 결국 해낼 수 있다는 자긍심 같은 것이 문제해결의 최대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반세기 넘게 살아온 지난 삶을 돌아보면 덜미를 잡히는 고비가 적지 않았다.
생각자체가 복잡한 만큼 우여곡절의 상흔이 더 치명적인 아픔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그러나 단 한번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의 끈을 놓은 적이 없었던 나다.
지금 그것은 내 삶을 지탱시키는 자부심의 근원이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은, 자랑스러운 나의 신념적 구호가 되었다.

2011년 화두는 자부심 회복의 전초전 차원에서 ‘자중자애’로 삼아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송구영신의 시점에서 저마다 자기 삶에 충실했던 증거를 들어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 결과가 스스로에 대한 신념과 신뢰를 키우는 계기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말이다.
그런 변화들이 각자의 인생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나 신념은 단지 긍정적인 사고가 성공 국면에서 더 큰 의미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성공한 주변인물을 보면 대부분 자기 스스로를 믿고 소중하게 여기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성공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

자기반성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단점을 분석하고 개선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성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키워드다. 불변의 법칙이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 있다고 한다.
속도는 욕망이지만 방향은 가치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된다는 측면에서 가슴에 담아둘 의미를 찾게 된다.
행복을 지향하는 또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1. 1. 2)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