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6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표현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터넷 발달은 정보격차 해소로 대중의 수준을 높였다.   
덕분에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자유를 얻었고  표현의 자유 영역을 확대할 수 있게 됐다.   
다만  빈번해진 인권침해 때문에  평지풍파에 시달리는 날도 그만큼 늘게 된 건  흠이지만.        
보수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일베’를 둘러싸고 촉발된 ‘표현의 자유’ 적정선 논쟁에서도 비슷한 우려가 감지된다.  특히 민주당이 5.18 유족과 故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명예를 훼손했다며 법적대응 방침을 밝히고 나서면서 그 같은 걱정이 커지는 모양새다.  
이번 기회에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마련해야 한다거나 명확한 처벌규정이  없이 적용하면 ‘표현의 자유’를 축소하는 부메랑이 된다는 백가쟁명 식 조언이 줄을 잇지만 딱 떨어지는 정답은 쉽지 않다.
모두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 같고 또 다양한 입장만큼이나 복잡다단해 보이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 ‘미네르바’ 박대성 사건 등에 대해 연이어 무죄를 선고했던 대법원 판결은 상당한 의미를 시사한다. 트위터 등 온라인 선거운동 규제 조항에 위헌을 결정한 헌재도 마찬가지다.  대법원은 일련의 판결에서 “정부 또는 국가기관의 정책 결정이나 업무 수행과 관련한 사항은 국민의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라며 “공공적·사회적 사안에 있어선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돼야 한다”고 제시했다. 헌재 위헌 결정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존립과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기본권이자 헌법적 가치”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양대 사법기관의 판결·결정은 정치적 의사표현을 형사처벌이나 사전적·포괄적 그물망으로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읽힌다. 정치적 의사 표현에 과도하게 개입하거나 불명확하고 추상적인 ‘공익’의 잣대로 재단하는 공권력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국제엠네스티 측이 해마다 발표하는 대한민국 인권 점수는  여전히 박하다.  엊그제 발표된 내용도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여전히 낮은 성적이었다.  우리나라처럼 표현의 자유가 광범위하게 인정되는 국가는 드물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리저리  혼자서 그 이유를 추론할 뿐이다. 
실제 이명박 정권초기 광우병 파동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적지 않은 희생과 비용을 초래했다.  마치 지구의 종말이라도 맞은 것처럼 나라 전체가 흔들렸다는 건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사실과 다르다는 결론이 나와 있는 마당이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반성하거나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다.  미친듯 부추기던 언론도, 부화뇌동 하던 사람들도  꿀이라도 먹은 듯 침묵모드니  어이없다.   
그렇게 반성하는 언론사도, 정치적으로 책임지는 사람도 없이 슬그머니 넘어가면  그만이라는 말인지.    

무책임한  상황은  광우병 사태만이 아니었다.  
46명의 꽃다운 젊음을 앗아간 천안함 피격 사태도 마찬가지다. 5개국 전문가 24명의 전문가들이 모여 2개여월의 조사기간을 거쳐 북한의 어뢰공격이라는 천안함 침몰 결과를 밝혀냈지만 믿으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UN을 비롯한 전 세계가 한목소리로 북한을 비난하고 나섰는데도 굳이 ‘천안함 침몰’이라는 표현을 고집하면서 ‘천안함 프로젝트’라는 영화까지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 의중엔 분명 또다른 목적이 또아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지난 대선 당시 여당 후보를 시리즈로 (글로 옮기기조차 민망한 내용으로) 비방하던 각종 패러디물은 또 어땠는가.  예술이라는 허울로 법망을 피해 후보의 명예를 훼손하던 당사자와 야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것 역시  ‘표현의 자유’였다.
그런가 하면 팝 아티스트를 자처하는  여성도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찾아가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지명도도 올리는 일타쌍피의 가공할 홍보전략으로 세인의 이목을 모은 바 있다. (아직까지 법적으로 처벌 받았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상당히 성공적인 프로젝트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 신 경민 의원의 발언은 지극히 유감스럽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무기처럼 사용하고 있지만 최소한의 기본은 어겨서는 안된다”며 일베에 사이트운영금지 가처분신청이나 집단불매운동 조치 등으로 응징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문제해결을 위한 진정성보다는 진영논리에 기댄 이중잣대로 편협한 상황인식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결국 ‘내가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베 처벌의 당위성을 위해 그가 제시한  근거들이  설득력을 얻지 못한 건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그보다 더 큰 실망은  이명박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 패러디물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앞세워 압박했던  자신들의 과거 발언에 대해  해명조차 없다는  점이다.    
상대진영을 논리적 경쟁을 통해 제압하기보다 권위적 발상으로 통제하려는 허영심이 가져온 불운이었다.  그래도 차라리 그들 스스로의 주장처럼 집단적 지성의 자정효과를 기대했다면  좀 더 긍정적인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었다.      

“전 인류가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고 한 사람만이 그것에 반대 의견을 갖고 있는 경우,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을 침묵시킬 권리가 없다. 그것은 만일 그 한 사람이 인류를 침묵시킬 힘을 갖고 있더라도 그에게 인류를 침묵시킬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충고를 조금 더 깊이 천착했더라면 조금은  더 나은 상황이 될 수 있었을까?    
돌아보면 역사는 늘 그렇게 아쉬움 투성이인 상태에서 미완으로 끝나곤 했다. 그럼에도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국민적 공감대를 토대로 표현의 자유가 정착되길  바라는  꿈을 버리고 싶지 않다.                          


 (2013. 5. 25)  
 ...홍문종 생각

2013년 5월 23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도발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도발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후한무치한 도발행태가 ‘점입가경’이다.  
총리를 필두로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막말을 쏟아내니 하는 말이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모든 전쟁터에 존재했던 불가피한 현상’으로 밀어붙이는가 싶더니 급기야 A급 전범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와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가 동급이라는 우김질도 서슴지 않는다. 특히나 일본 전역에 한국인 매춘부가 우글거린다는 비하발언은 우리 가슴에 치명적인 대못 하나를 박아놓았다.
하다못해 유엔까지 나서서 ‘위안부 모욕을 막기 위한 국민교육을 시행하라’고 권고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정작 당사자격인 일본은 꿈쩍도 안하는 모습이다.
역사의 숱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작과 왜곡을 일삼는 버릇을 놓지 못하는 이 질 나쁜 '이웃’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온종일 머릿속을 맴돌더니 화두가 되어 버렸다.  

선거를 앞두고 당선에 모든 걸 걸어야 정치적 애로를 모르지 않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다.
열정, 균형적 감각과 함께  정치인이 갖춰야 할 3대 기본 자질로 '책임감'을 강조했던 막스베버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정치인의 책무의식이  가치영역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그러나  아베가 됐건 하시모토가 됐건 이시하라가 됐건  이들의  발언에서는 최소한의 책임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천박한  포플리즘만 난무할 뿐이다. 
결말도 뻔하다. 이런  불편한 배설물들이  종국엔  나치즘, 파시즘으로 진화를 거듭해가며 일본은 물론 지구촌 전체의 미래를 위협하는  귀결로 이어질게 너무도  너무도 명약관화하니 걱정이다.   
특히  개인의 입신양명을 목적으로 한 망언이라면  단언컨대 이들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셈이다.  조만간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서서  분신처럼 새겨진 주홍글씨를 부여잡고 통탄의 눈물로 일그러질 자신들의 미래를 짐작이나 하고 이러는 거냐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인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중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강국인 미국 앞에서는 충직하게 우방의 도리를 다하는  척  얄팍한 처세에 익숙한 그들을 보면   철저한 약육강식 지배구조에 길들여진 한 마리 충견을 보는 듯하다.
이는 일본인 의식 저변에 깔려있는 ‘black ship’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인에게는 미국의 DNA야말로 범접할 수 없는 숭배대상이라고 믿는 신드롬이 생겼다. 메이지 유신을 촉발시킨 ‘검은함대'의 위력도  미국을 대표로 하는 서방세력 앞에 무조건 굴종해야 한다는 일본의 생각을 굳히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듯 싶다. 
강력한 '매질효과'라고나 할까.   

그러나 우리를 대하는 일본의 태도는 어떤가.
끝 간 데 없이 콧대를 세우며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고 있는 현실만 봐도  일본은 우리를 무시하고 있다.  강자 앞에서 조아리던 머리를 쳐들고 안하무인 격으로 우리를 홀대하고 있는 정황이 역력하다. 
 동네북처럼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려도 제대로 항의도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이대로 절대 간과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응징에 나서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감정적으로 대응하기엔   우리 국력이 취약하다. 
아프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결국  문제 해결의 키는 국력이 쥐고 있는 셈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참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참으면서  가슴에 피멍을 들이는  이 굴욕을 결코 후대에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뜨겁게 다져야 한다.  일본은 물론 전 세계가 대한민국 위세에 눌려 감히 말도 못 꺼내는 그 순간이 올 때까지 국력을 위해 뭉쳐야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2013. 5.22) 
....홍문종 생각  

2013년 5월 12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지도자의 새로운 덕목


지도자의 새로운 덕목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0여년 유학생활도 했으니 당연할 수도 있지만, 평소 영어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다. 심지어 ‘너처럼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은 처음 봤다’고 놀라워하는 원어민도 있었다. (덕분에 현지에서 목사님이나 선교사님 통역을 도와드릴 기회가 많았는데 ‘종교적 자유의 대부’로 유명한 故 제리 팔웰 (jerry falwell) 목사님도 그 중 한 분이셨다)
그럼에도 영어는 여전히 내게 핸디캡으로 작용하는 존재다. 강단에서 영어로 가르치거나 이국에서 연설할 기회가 적지 않은데 상황마다 천당과 지옥의 간극을 보이니 하는 소리다.  모국어가 아닌 현실적 한계라고 위안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입맛이 쓸 때가 많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주변인들의 영어실력을 눈 여겨 보게 된다.
그 중 생각나는 몇 분의 영어 실력에 대해 촌평해보겠다. (여담일 뿐이니 나무람 없이 웃고 넘겨주시기 바란다)
지금껏 만났던 사람 중에서 영어 통역을 제일 잘했던 이로 기억되는 인물은 DJ의 하버드 연설을 통역했던 최성일 교수다. 평소 호흡을 잘 맞춘 탓인지 DJ의 숨소리까지 통역하는 실력을 보여줬다.
그런데 완벽한 ‘콩글리쉬’로 좌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하면 단연 DJ다.
80년대 무렵, ‘나이트라인’이라는 미국의 유명 방송에 출연한 DJ가 라이브로 진행되는 영어를 다 알아듣는 모습에 놀란 적이 있다. 그러나 의중을 전하는 그의 영어는 옥중에서 독학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DJ의 영어실력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미국을 방문한 DJ의 영어연설을 한 상원의원 방에서 들었는데 미국인인 그도 한국인인 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 상원의원이 내용을 말하기에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미리 배포된 텍스트를 보여주었다. 상대적으로 YS의 경우, 직접 영어를 구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그의 실력을 평가하기가 애매하다.  다만 하버드에 있을 때 그곳을 방문한 YS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는데 당시 통역사가 대충대충 건성으로 통역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던 정경이 떠오른다. 
유학시절 같은 클래스에서 수업을 들었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그 당시 이미 외교관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의 영어실력을 평가하자면 영어울렁증에 시달리던 동세대에 비하면 거의 최고였다. 하지만 그 역시 그 때만해도 ‘콩글리쉬’ 반열을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동문수학했던 박진 전 의원의 영어는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리쉬에 근접한 콩글리쉬로 영어를 잘하는 외국인 정도의 평가가 적합하다는 생각이다.
현역 국회의원 중에서는 길정우 의원과 이재영(비례대표) 의원이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한 다선의원은 내가 보기에 별로인 실력인데  본인 생각은 다른 것 같다. 그래서 볼 때마다  진실을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늘 갈등하게  만든다) 전직 의원 그룹에서는 오세응, 유재건 의원이, 그리고 이홍구 전 총리가 그 세대 기준으로는 훌륭한 영어 실력을 보여주셨다.

엊그제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본 박근혜 대통령의 미 의회 영어 연설은 생각보다 뛰어난 실력이어서 놀라웠다. 확실하게 마스터한 ‘정통종합영어’로 완벽한 발음과 문장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서 평소 대통령의 성실함과 진지함이 고스란히 묻어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영어 실력이야말로  이번 방미일정  곳곳에서 빛을 발하며  기능이상의 역량을 발휘한 숨은 공신이라는 생각이다.   통역 없는 직접 대화로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박대통령의 외교현장은 우리 모두가 공중파를 통해 목격한 그대로다.  
 무엇보다 언어야말로 세밀하고 직접적인 교감을 통해 상호간 이해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소통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하는 계기가 됐다.  지도자의 덕목으로 외국어가 비중있게 다뤄져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도 새삼 주목하게 해 주었다. 
  
아무리 살펴도 당분간 세계 공용어로서 영어가 차지하는 위상에 변동이 생길 것 같지는 않다.  좋건 싫건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건만 아직도 영어 공포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무섭다고 피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니 차라리 즐기는 마음으로 정복에 나서라고 권할 수 밖에 길이 없다는 결론이다.
모두가 아시겠지만 영어엔 왕도가 없다.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그렇게 고약한 영어의 주인이 되려면 우선은 스스로가 미국인으로 빙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 다음엔 완전히 정복 될 때까지 온 몸으로 외우고 또 외우고 외우고 또 외우는 반복으로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겠다는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There is no royal road in English!!"                     

(2013. 5. 12)   
...홍문종 생각    

2013년 5월 5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아베의 굴욕


아베의 굴욕 


지역구 출신 정치인이라면 국가와 지역의 이해관계를 놓고 고민하게 되는 경험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이제 막 정치를 시작한 경우라면 그 선택이 용이하지 않은 현실을 절감하게 될 때가 많으리라 짐작한다. 정치적 선택에서 국익을 우선시해야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지만 지역구 표심에서 자유롭지 않은 현실적 한계가 주는 압박 또한 녹록치 않음이다.  일테면 각 지자체마다 빚에 시달리면서도 문화시설이나 체육시설에 과잉, 중복 투자를 멈추지 않는 현상 등을 그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게 되면서부터는 사적 이해관계 보다 광의의 목적과 가치 기준에 무게를 두게 된다.  일종의 책무 의식이랄까, 정치적 자존감이 작동되는 효과일 것이다.

연일 극단의 수위를 갱신하는 망언으로, 주변국을 자극하고 있는 아베 일본 총리의 정치적 노림수를 보고 있자니 솔직히 편치 않다.  무엇보다 세계의 우려와 지탄에도 불구하고  국수주의 퍼레이드를 중단할 기미가 없다는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아베는 일본 각료와 의원들이 집단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망동을 방조하는 것도 모자라 급기야 그 자신 ‘일왕 만세’를 연호하는 모습까지 언론에 노출시켰다.  독선도 이런 독선이 없다.  시대착오적 교만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출범 4개월을 맞는 아베 내각이 70% 국민의 지지를 얻고 있는 현상은 어떻게 해석되고 있을까?  
오랜 불황으로 추락한 국민적 사기를 추스르고 일본 경제를 재반등시키겠다는 아베의 전략이 주효한 덕분이긴 하지만   ‘아베노믹스’ 의 탄탄대로를 보장할 정도는  아니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실제 일본 언론이 조사한 결과를 보면 적지 않은 수의 국민들이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  평화헌법 96조 개정에 대한 의견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국회의원 74%가 찬성(반대 22%)한 반면 일반 국민은 54%가 반대(찬성 38%)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조사 결과는 현재의 아베 정부 인기가 평화헌법 개정이나 국회의원, 각료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등 국수주의 행보와 무관한 것임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아베의 '야망'은 지극히 위험하다.  
 정치무대에 복귀한 흥분과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집착 때문에  그는  국제사회의 문제아를 자처하는 꼴이다.   최소한 ‘1년 천하’로 그치고 만  2007년  당시의  '쓴 기억'만 되돌려도 충분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조급한 그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실제 아베는 집권 2년차로 접어들던 2007년 9월, 총리직에서 물러나야했다.  민생문제에 쏠려있는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개헌문제를 밀어붙이다 궁지에 몰린 결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수주의를 등에 업은 아베의 광폭행보에 호감을 보이지 않는다. 
 내부결집에 유용했는지  몰라도  일본의 미래에 치명적 타격이  될 거라는 우려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실제  근시안적 판단이 종국엔 일본을 돌이킬 수 없는 회한에 빠뜨리고 말거라는 걱정이 아베를 국제 사회 의 공적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정작  당사자만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현실을 잘 모르고 있는 듯 하다.

어느 나라가 됐건 더 이상의 '아베' 출몰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스스로는 물론 국가의 체면조차 아랑곳 않는  반인류적 패륜이 더 이상 지구촌을 교란하도록 놔둘 수 없음이다.  특히  국가의 명운을 담보삼아 자신의 입지를 세우과 하는 탐욕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도록 해야한다 .
아무리 생각해도 더불어 사는 국제사회의  평강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선택일 것 같다. 
             

(2013. 5. 3)

...홍문종 생각 

2013년 5월 1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갑장, 빌게이츠


갑장, 빌 게이츠


며칠 전 국회를 찾은 빌 게이츠를 만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생각보다 그는 스마트해 보이지 않았고 에너지가 넘치지도 않았다. 여행에 따른 피로감 때문인지 후줄근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른 아침부터 자신의 강연을 듣기 위해 나온 국회의원들에게도 시큰둥했고 질문도 본인이 원하는 것만 선택해서 답변하는 등 자유로운(?) 영혼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개발 국가를 위한 백신 개발로 질병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의 열정은 충분히 뜨겁고 아름다웠다.
그는 강연을 통해 적절한 백신 보급으로 최빈국 어린이들이 건강을 지켜, 빈곤극복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도록 스마트원조 체계 구축하자고 강조하면서 대한민국의 역할을 주문했다. 백신 보급을 확대한 결과 1960년대 연간 2000만 명에 이르던 5세 미만 영아 사망자 수가 2011년에는 700만 명 미만으로 줄었다는 성과도 설명했다.
백신개발을 위한 75%를 뺀 나머지 25%는 미국의 교육체계 향상을 위해 활용하겠다는 철학과 신념도 밝혔다. 언젠가 교사를 대상으로 한 동영상 강연에서도 비슷한 소신을 밝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기에 그에 대한 신뢰가 커지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50대 이후를 어떻게 살까 고민하다가 기부의 삶을 선택했다는 그의 고백은, 동년배인 내게 더 큰 자극으로 와 닿았다. ‘오늘날의 나는 미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런 환경을 조성해준 국가에 기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기부의 삶으로 이끌었다는 메시지가 특별했다. 우리에게도 자신을 만들어 준 모국을 위해 전 재산 95%를 기부한다고 나서는 ‘부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부러움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빌 게이츠가 전하는 ‘부(富)를 쓰는 방법’도 인상적이었다.
스스로를 위해 미친 듯이 다 써 버리거나 자식에게 물려주거나 사회에 환원하는 3가지 방법 밖에 없는데 앞서의 두 선택은 무의미하거나 자식을 망치게 할 수 있다는 우려에 사회 환원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내용이었다.
빌 게이츠 강연은 사람과 주변 환경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역시 가장 큰 재산은 사람이었다.
빌 게이츠가 그토록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교육받을 대상이 없다면 아무리 완벽한 교육 프로그램이라도 제 역할을 발휘할 도리가 없다. 또 미국이라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오늘 날 빌게이츠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였다면 대학을 중퇴한 빌게이츠에게 기회가 제공됐을까 솔직히 의문이다. 천재성을 발휘할 여건을 만들어 줬기에 빌 게이츠가 거둔 성공의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칫했으면 십중팔구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고 있거나 더 비관적 표현을 동원한다면 대학마저 중도 포기한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찍힌 삶을 영위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미국이 달리 ‘기회의 땅’으로 자리매김 된 게 아니었지 싶다.
대학을 중퇴했다고 한 사람의 인생을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 미국사회의 거시적 안목과 관용이 빌 게이츠 같은 거물을 배출한 일등 공신이라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과정에서 거듭되는 실패를 수용하고, 특히 성실한 실패에 대해 너그러운 사회만이 ‘인재’를 소유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노력 없이 그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건 하늘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다.

분명한 건 우리에게도 무수한 빌 게이츠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 우수한 인재들을 ‘발굴’보다는 ‘양성’에 초점을 맞춰 재목으로 만들어내자.
그렇게 대한민국 재창조의 첫걸음을 떼 보자는 얘기다.

(2013. 4. 25)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