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31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악연

악연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
이로 인해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저축은행과 투자의 연을 맺은 이들은 평생 모아온 재산을 떼이게 된 울분으로, 대주주와 그 주변인들은 투자자 돈을 자기 주머니 돈처럼 흥청망청 탕진해 버린 죄상으로, 권력 주변부 사람들은 뇌물을 받고  구명에 발 벗고 나선 혐의로 좌불안석에 놓여있는 등 연을 맺은 동기는 각기 다르지만 ‘부산저축은행’이라는 공통분모에 저마다의 인생이 함몰돼 있는 정황만큼은 다르지 않다. 
실제로 이들 중 전 감사위원은 억대의 금품과 물방울 다이아 등을 뇌물로 수수하고 부산저축은행 구명을 로비한  혐의로 이미 구속됐고 그로부터 구명 청탁을 받은 혐의로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있는 전 금융감독원장은 부산저축은행에 투자한 회사를 설립했던 사실까지  확인된 마당이다.
이번 사건을 지켜보면서 관련 인사들을 관통하고 있는 인연의 묘한 섭리를 생각하게 된다.
사건 연루자들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평소 친분이 작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뇌물과 권력이 서로에게 상호보완재 역할로 작용할 때만 해도 이들은 서로를 귀한 인연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달콤함 이후 감당해야 할 형극의 길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눈치다.
결과적으로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을 터인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 긴밀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기에 인연은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명제다. 살아가면서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 한갓 어부에서 그의 수제자가 되어 구원의 사표로 거듭날 수 있었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들은 남강 이승훈 선생은 그 감명을 오산학원 설립을 통해 인재배출하는 에너지로 승화시켰다. 또 클린턴을 미국의 대통령으로 이끈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 만난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이들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특별한 인연이 한 사람의 인생을 크게 바꾸는 ‘이적의 현장’을 목격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내 경우만 해도  삶을 이끌어 주는  선한 인연의  덕을 많이  본 유형이다.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심신을 푸근히 감싸주는 무형의 기운에서 위로를 받곤 하는데 인연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분들의 과분한 칭찬과 관심은 어릴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던 내게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참을 줄 아는 인내심을 길러준 자양분이었음을 고백한다. 미국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도, 대학총장의 임무를 무난히 수행해나가는데 있어서도, 정치현장에서 국회의원이 되어 국민대표로서의 기능을 다하는 삶의 과정에서 그 때마다 내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응원으로 에너지를 제공해 준 근원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렇다고 내게  따뜻한 인연만  존재했다는 뜻은 아니다. 
가슴 저미는 슬픔을 남기거나 울분과 고뇌로 밤잠을 설치게 만든 악연도 있었다.
악연은 특히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생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대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좋은 인연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악연의 파장을 줄이는 일 또한 인간의 삶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나라당 도당 위원장 시절, 공직 후보 공천에 관여하게 되면서 수많은 인연을 맺은 바 있다. 그 때의 인연들이 지금까지 내 삶에 뚜렷한 음영을 남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말로 좋은 인연으로든 특별히 나쁜 악연으로든. (한나라당 인기가 하늘을 찌를듯 하던 기세라 공천으로 당선이 보장되던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지금 한창 언론에서 뉴스메이커가 되고 있는 A씨 역시 공천 때문에 악연을 맺게 된 사람 중 하나다. 보궐 선거 당시 일인데 그는  자신의 낙천 배경을  나라고 몰아가면서   나를 성토하는 것으로 자신의 울분을 표현했다. 도당위원장이긴 했지만 공천과정의 모든 것을 책임지기엔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고 항변하진 않았지만 잘못된 정보로  오해받는 상황이 아팠던 건 사실이다. 
최근 경기도 지역 선거에서 분루를 삼킨 바 있는 B씨는 거꾸로 나를 섭섭하게 만들었던 사람이다. 
당사자인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그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 그를 용서(?)했다. 그의 입장에서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이해하면서다. 
그를 용서하고 나니 오히려 내가 자유를 얻은 기분이었다. 큰 그릇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위안을 주기도 했다.
 
우리 모두 본의 아니게 악연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그 책임에 갇히기도 한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악연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면서도 미운 상대를 보면 속을 끓이게 되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지 싶다.
내게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악연이  있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그의 행태와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으니 질긴 악연인 셈이다.
그동안 철저히 무시하는 것으로 상대에게 복수(!!)하고 있지만 요 며칠 동안 그로 인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요 며칠 번민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새로운 힘과 용기도 충전할 수 있었으니 결과적으로는 해피앤딩인 셈이다.

악플이나 헛소문에 우울증을 앓다가 목숨을 끊는 연예인들 소식이 잦은 요즈음이다.
어린 그들의 막다른 선택이 안타깝다.
어려움이 있지만 꿋꿋하게 잘 버텨나가라고 다독여주고 싶다.
 마음먹기 따라 오늘의 고통쯤은 금방 소멸되기도 하는 인생의 비밀을 말해주고 싶다.
이 밤, 비록 천지를 울리는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의 광폭한  지배를 받고 있지만   내일은 반드시 또 다른 아침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으면 싶다. 
앞으로  남은 세상을 더  밝고 행복한 시간으로  채울 수 있다는  '복음'을  큰 소리로  알려주고 싶다.
                                                   (2011. 5.31)                   
                                  .....홍문종 생각                  

2011년 5월 30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공연장에서


공연장에서


일요일 오후, 지인들과 예술의 전당에서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를 관람했다.
이탈리아 출신 세계적 소프라노 ‘마리엘라 데비아’가 비련의 여주인공 ‘비올레타’ 역을 맡아 열연하는 전막공연인데 그녀 특유의 벨칸토 창법을 접할 수 있는 모처럼 만의 기회라며 다들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역시나 비싼 관람료가 괜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만큼 기대치 이상의 감동을 주는 공연이었다. 심금을 울리는 감동은 뭐니 뭐니 해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이었을 때 그 효과가 가장 크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의외의 보너스가 있었는데 하버드 동창들을 비롯, 오랫동안 격조했던 몇몇 얼굴들과 조우할 수 있어 기쁘고 반가웠다.
 
문화의 향취를 만끽하며 실속있게 보낸 휴일 풍경을 자랑하려고 오페라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다. 그 보다는 오늘 공연장에서 내 바로 앞줄 좌석(정확히 말하면 A구역 5,6번 좌석)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한 젊은이에 관해 얘기하고자 한다.
내 앞자리에 젊은 커플이 앉아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들에 처음 느낌은 뭐랄까, 잘 생긴 외모와 옷매무새도 그렇고 교양있는 집에서 교육을 잘 받아 품격이 몸에 밴 ‘훈남훈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해프닝이 ‘훈남’에 대한 나의 환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막이 내려가고 중간 휴식을 알리는 장내 아나운서의 코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앞자리 ‘훈남’이 다짜고짜 사탕을 먹어 자기 관람을 방해한 범인으로 나를 지목하며 따지고 든 것이다. 졸지의 봉변에 기가 막힌 내가 사탕을 먹지 않았다고 항변하자, 그러면 껌을 씹지 않았느냐며 다시 태클을 걸었다. 또 다시 그런 적이 없다는 나의 답변을 듣고서도 씩씩거리며 대들듯 더 무엇인가 따지려 들었는데 옆에 부인인듯한 여성의 저지로 끝이난 꼴이 되고 말았다. 창졸지간에 나는 봉변을 당한 꼴이 되고 말았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한참이나 고생을 했었다. 
일행들은 젊은 사람이 예의가 없다며 공연이 끝난 뒤에라도 사과를 받아내겠다고 흥분했다. 좋은 공연을 왔는데 너무 기분이 나쁘다며 화를 참지 못하는 그들을 오히려 내가 달래는 처지였다.
 
공연장에서 사소한 부주의로 다른 사람의 몰입을 방해하는 몰염치한 이웃을 만나는 건 확실히 불운이다. 이 날만 해도 VIP석 누군가의 휴대폰이 울렸는가 하면 뒷좌석에 앉은 두명의 중년 여성들은 바스락 거리는 소리로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좋은 공연이었기 때문에 관람을 방해하는 소음이 유난히 더 거슬리는 기분이었다.
내 경우 약간의 인기척으로 경고의 뜻을 전하는 방식을 통해 중년여성들의 소음을 해결할 수 있었다. 최대한 상대방이 무안하지 않도록 배려를 담아 제지했더니 다행히 그녀들이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소리를 멈춰준 것이다.
앞자리 훈남도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에 아쉬웠다. 내게 혐의를 뒀더라도 최소한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다면 불확실한 청각을 맹신한 나머지 단지 뒤에 앉아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무례를 저지르는 경솔함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가 취한 행동이 더 문제라는 생각이다. 최소한 결례를 범한 자신의 행위를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연을 보는 내내 이 해프닝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의 무례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안고 있는 공통적 문제일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어떻게든 바로잡아주는 것이 어른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 들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면 내려오게 돼 있고 올라가는 계단이 있으면 내려가는 계단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들에게도 그들처럼 사회적 정의감과 책임감에 불타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으면서 무기력해진 기성세대의 구태를 성토하던 열정 또한 갖고 있었다.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하거나 효율을 앞세워 준법정신을 도외시하던 어른들의 불합리한 가치관을 목청 높여 지적하며 우리가 바뀐 세대의 전령사임을 알리려 했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의 지난 생각들이 다 옳았던 건 아니었다.
세상 이치라는 게 책에서 배운 것처럼 늘 단순명확하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 있어 사느냐를 우선시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기성세대를 무조건 폄훼하려 했던 건 분명 오류였다.
계층 간, 동서 간 갈등이 걸림돌이 되는 녹록치 않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위상은 날로 그 격을 높여가는 현실이다.
외형적 신장 못지않게 구성원의 합리적 마인드가 선진국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젊은이들의 올바른 사고야말로 한 나라의 위상을 평가하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부당한 것을 지적하거나 수정을 요구하고 나서는 젊은이들의 높은 정의감은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공연장에서의 훈남처럼 스스로의 오류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반성할 줄 모르는 편향된 사고는  치명적 결격사유라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트라비아타 공연은 좋았다.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한 감동을 전해줬다. 
그 진한 감동을 함께 나누느라 얼얼해진 손바닥을 어루만지는 이 순간,  행복한 기운이 온 마음을 휘감는 느낌이다.
                                   (2011. 5. 30)                     
                                  ....홍문종 생각                 

2011년 5월 29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승부조작

승부조작

K리그가  조직적으로 승부를 조작해 온 정황이 포착돼 뒤숭숭하다. 
국가대표 선수와 선수출신 브로커가 연봉이 적은 초년생 선수들을  거액으로 매수하는 방법 등으로 게임의 승률을 조작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조직폭력배가  배후로  개입한 정황이 밝혀지면서 축구계가 누란지위(累卵之危)로 치닫는 형국이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각종 ‘설’들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팀 자체조사를 통해 문제 선수들을 정리하고  일부 구단의 경우 블랙리스트를 교환하거나 공유했고 몸값을 받기 위해 이름을 빼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심지어  리스트에  올라있던  한 유명선수는 한번만 봐달라며 무릎을 꿇고 읍소 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기왕에도 승부 조작 사건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제일 먼저 기록된 승부조작 사건은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발생한 블랙삭스 사건(Black Sox Scaldal)이다. 시카고 화이트 삭스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서 당시 도박사들에게 돈을 받은 화이트 삭스 팀이 고의적으로 졌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법정 다툼 끝에 화이트삭스 소속 8명의 선수들을 야구계로부터 영구제명 됐다.
이 밖에도 우리의 올림픽 태권도, FBI 동계올림픽, 이탈리아 축구협회, 그리고 대만의 야구계 등 스포츠 분야는 물론  게임 업계도  탐욕을 진원으로 하는 추문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정황이다. 
그런 걸 보면   승부조작은  확실히  인간의 정서적  차원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닐까 싶다 .    
  
국내 6개의 스포츠 로또 시장규모는 2조원대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시장까지 합하면 거의 3조원 대에 달하는 자금이 시중을 돌고 있는  셈이다.
돈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프로의 세계에서 적지 않은 규모의  자금이 검은 세력의 타킷이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심지어 승부 조작이 당연하다는 반응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  마당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염불보다 젯밥에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결국은 탐욕이 화근이다.
룰에 따른 원칙과 신뢰. 수칙이 실종된 대한민국 축구계의 부끄러운 단면이 고스란히 노출되면서 절제되지 않은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허망한 말로를 야기하는가를  보고 있다.  그라운드를 누벼야 할 선수들이 줄줄이 범죄자의 신분으로 수사 기관에 소환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그저 딱할 뿐이다.
  
단언컨대 이번 승부조작 사태가 축구계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덕분에 씨름 야구 농구 등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 조차   안심지대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재발방지를 바라는 마음이  크지만    인간의 자율의지로 해결될 일도 아니어서  그저 마음만  조급해지는 것 같다.
관계 당국이 뒤늦게 축구 토토를 중단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서는 모양이지만 미흡하다는 불만이다.
좀 더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민의 기본적 휴식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대책을 의미할텐데 우리의 경우 어느 곳이  그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을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국가존립 철학에 기초한  독특한 문화적 특성이 가미된다면   금상첨화라 하겠다. 
일테면 그 자유로운 미국에서 라스베가스와 아틀란타 시티 두 도시에서만 도박을 허용한다거나 새벽 2시 이후에는 주류 판매를 금지하는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은  오래 눈길을 끌만하다.  
그런 모습이야말로 오늘의 미국을 존립시키는 가치이고 신뢰라  할 것이다. 
 
스포츠 로또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전 세계 지역에서  선수들의 복지 향상이나 스포츠 활성화를 위한  종자돈으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순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태는 많은 우려를  남겼다. 출처가 불분명한 지하 자본이 1조원에 달하고 또 이 때문에 수많은 선수와 조폭 세력이 얽혀  탐욕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현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 땅에서  로또를  없애버리자는  극단적 입장이 낯설지 않다. 
국민들이  땀 흘려 버는 돈의 가치를   알게하고  또  이를 인정할 수 있는  개념을 가르쳐 주는 게 훨씬 생산적이라는 판단이 든다. 실제로 국가의 정체성을 좀먹고 국민의 정신 건강을 해치는 이런 식의  로또 운영은  백해무익이라는  정황이   좀 더 명백해졌다고 볼 수 있다.  요행수에 기대기 보다 정직한 땀이 대우 받는  건전한 사회적 풍토를 조성하는  차원으로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스포츠 토토 등이  그동안 우리의 축구발전이나 선수들에게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기회에 영구퇴진 쪽으로 가닥을 잡아보는 건 어떨까 싶다.  
페어플레이를 향한  스포츠 정신의  부활을 위하여.
                                            (2011. 5. 28)                            
                                     .....홍문종 생각                           

2011년 5월 27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김정일 방중

김정일  방중
 
북한 김정일의 7일 간 방중 일정이 끝났다.
한반도 정세 완화와 비핵화 목표를 고수하고 6자 회담 재개를 희망한다는 북의 입장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통해 전해지고는 있지만 폐쇄적 특성 때문에 성과에 대한 추측이 분분하다. 특히 1년 사이에 3번째 이어지고 있는 방문이라는 점에서 그 배경을 놓고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리기도 했다.
김정일의 이번 방중은 그동안 궁지에 몰려있던 북한의 처지를 감안할 때 식량난 등 경제적 난관 해소와 후계구도의 안정을 위한 돌파구 마련 차원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로 김정일과 중국의 최고 지도부가 만나 라선 특구 개발을 비롯한 북중 경제협력 활성화 방안과 김정은 후계 구도의 실질적 인준이 논의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북한의 후계체제를 안정시켰고 획기적인 경제협력 계약을 매듭짓는 수완을 보여줬다. 북한이 나선특구를 통한 중국의 동해 출해권 확보에 협조하는 대신, 중국이 압록강 하구의 북한 섬 황금평에 대한 대규모 개발에 적극 참여한다는 것이 알려진 북중 경협의 골자다. 아직은 본격적인 지역 개발 논의까지 진전된 건 아니지만 동북지역 발전의 보루인 ‘창.지.투 경제권’ 개발을 추진 중인 중국의 입장에서 동해 출해권 확보를 서두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시기가 좀 더 앞당겨지게 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북한이 중국의 곳간에서 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게 된 대신 국경에 인접한 북한 지역에 대한 사용권한을 중국이 원하는 대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중국의 외환보유고를 방패삼아 북한 경제를 살려내 한국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김정일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을 상대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북한의 선택에 느긋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중국에게 건네지는 북한의 약속이 훗날 한반도 전체를 규제하는 부메랑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북중 경협이 중국의 동북공정 음모에 힘을 실어주는 발판으로 작용하게 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티벳 지역 흡수로 서남공정을 성공시킨 중국의 왕성한 ‘식욕’을 생각한다면 위기상황을 어느정도 실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북한과 중공 사이의 핑크 빛 무드가 우리에게 치명타가 될 가능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명확한 이유다.
 
그런 차원에서 집권 이후 줄곧 북한에 강경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 기조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는 판단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그동안 북을 지원하던 5만 톤의 식량을 볼모로 묶어놓고 천안함 사태에 대한 사과 없이는 한 발자욱도 나서지 않겠다는 으름장이고 국회는 국회대로 탈북자 송금 시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강경 일변도의 흐름은 위험하다.
더구나 북한이 식량 때문에 우리에게 사과하거나 읍소할 일은 당분간 실현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우리에게 맞서는 북의 요지부동이 갈수록 힘을 더해가는 모양새다. 김일성 탄일 100주년을 맞는 내년을 대비해서 최소한 1년은 버틸 정도의 준비를 해 놓았다는 얘기도 들리는 걸 보면 핵 포기를 기대하는 서방의 압력 역시 북한의 개과천선을 유도할 정도로 강력해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핵을 포기한 카다피의 비참한 말로로 인해 오히려 핵무장 강화 의지를 다지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주변 정세에 비춰 볼 때 우리의 대북정책에 좀 더 세밀한 전략적 접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힘의 논리는 적절한 처방이 될 수 없다. 북한을 점점 중국에 밀착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한반도 통합을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다 궁지에 몰린 북한이 세습에 필요한 통치기반을 위해 중국의 위성국을 자처하게 되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이다.
독일의 예처럼 정부는 강경책을 쓰더라도 학술단체나 시민단체 또는 종교단체 등이 나름대로 북한을 접촉할 수 있는 채널을 늘리는 융통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원활한 남북 관계를 위해서는 우리의 통 큰 대북 원조를 바탕으로 북한과의 다양한 채널과 연락망 구축 방안 모색에 관심을 모아보자.
                                               (2011. 5. 27)                          
                            .....홍문종 생각                          

2011년 5월 25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망국병

망국병
무상, 반값...
날로 어려워지는 경제상황 속에서 귀가 번쩍 뜨이는 단어들이 범람하고 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에서 급식은 물론 의료 서비스와 보육을 무상으로 책임지고 대학 등록금도 반값에 해결하겠다는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약대로라면 대한민국은 금방이라도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  듯한 분위기다. 
하지만 현실까지 녹록한 것은 아니다. 
공약 실천에 필요한 재원 마련에 대한 고민없이 우선 당장 달콤한 곶감부터 들이미는 정치인의 얍삽함부터 나무랄 일이다.  상이 됐든 반값이 됐든 국민 복지의 질을 높이겠다는 데야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대부분의 공약들이 ‘선거용’에 그치고 마니 문제다.    실제로 구체적인 실천이 담보되지 않은  선심 공약은   대부분   뒷감당 못하고 空約으로 끝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권자의 환심부터 사고보자는 정치권의 무책임한 포퓰리즘으로 인한 부작용이 고스란히 국민부담이 되고 있다. 일관성 없는 정책이 남발되고 국가 정책이  1, 2년도 못 가 바뀌게 되는 혼선이 불가피하게 되는 것이다.
 
국민을 위한 복지확충에 대한 정치권 노력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그러나 복지 확충에 필요한 재원을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아야 하는 현실을 외면한 정책을 들고 나오는 정치인들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결국 국민 세금을 재원의 근간으로 삼아야 하는데 증세로 인한 사회적 파장을 염두에 두지 않은 공약은  폭탄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스웨덴이나 덴마크 등 사회보장제도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국가들의 경우도  국민 호주머니로 충당되는  50%의 재원이 없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더구나  대부분 복지혜택을 기대하면서도 세금을 비롯한 복지 부담금 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우리의 경우  증세가 쉽지 않은 현실적인 어려움도 겹친다.  부채폭등으로 인한 재정위기가 경고되는 사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2050년이면 고령화 등의 사회적 여건으로 정부 부채가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국가의 수준을 넘어설 것이라는 분석(S&P 2011년 1월 보고서)은  녹록치 않은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일단이라 하겠다.
 
정치인의 숙명은 천형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언제나 국민의 표심을 의식해야 하는  그들의  고단한 인생 노정을 보면  절로 드는 생각이다.    중요한 시점, 특히 선거를 앞두고 국민관심을 끌기위한   그들의 노력은 집요하다 못해 처절하다. 원칙도 신뢰도 안중에 없이  오로지 당선만이 최고의 선이고 지상최대의 과제가 되는  외눈박이 인생을 살고 있다.   가끔씩 당선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선거 이후를 간과했다가 감당 못할 낭패를 초래하게 되는 경우까지 공개된 험로를 마다하지 않는다. 허풍과 위선이 난무하는 가운데 손톱만한 가능성만 있어도 침소봉대하는 낙관적 특성은 그렇다 쳐도 자기최면에 취해 신기루를 신봉하는 모습은 불굴의 의지 그 자체다.
이런 과정에서  선심성 공약은 정치 일선에 나선  이들에게  페로몬을 쏘아대는 강력한 유혹이 될 수 밖에 없다.

어떤 때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정당이나 후보의 철학과 가치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야 할 정책 공약조차 일관성없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얼마 전 보궐 선거를 통해 제도권에 귀환한 야당 대표가 그런 경우였다. 
그의 지난 저서들을 살펴보면  획일적 복지를 예산낭비로 규정하거나 지정파탄, 세금 폭탄, 포퓰리즘의 극치라고 통렬하게 비판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그런데 당적이 바뀌자   반대 노선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딱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당적을 이동한  이후 야당 대표로 나선 신년회견에서 보편적 복지를 ‘시대적 요구’로 격상시키면서 정치적 소신과 신념을 그림자로 만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치인의 포퓰리즘은 그 부정적 폐단 때문에라도 지양돼야 마땅하다.
정치인이 선동적 인기몰이 등 비정상적 수단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면 결과적으로 국민이 교묘한 세치혀와 잔머리 굴리는 재주꾼에게 자신의 주권을 맡기는 꼴이 된다. 과대망상과 허위에 찬 지도자는 국가와 민족의 미래마저 깡그리 망쳐버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불안한 선택이 될 수 밖에 없다.
독일의 히틀러와 괴벨스가 그랬고 아르헨티나의 페론과 에바 폐론 부부가 그랬다.
이들은 교묘한 편집술과 말장난 그리고 대책없는 선심행정으로 무장한 포퓰리즘으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내 편으로 만들었다. 가히 근대 포퓰리즘 정치의 대표적인 대가로 꼽을 만하다.
이런 정치인의 좌충우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능이 있다. 
바로 유권자의  선택이다. 나마 지도자의 잘못을 준엄하게 꾸짖을 수 있는 유권자의 역할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국가와 사회에 엄청난 독소로 작용하는 잘못된 포퓰리즘의 부작용을 염두에 둘 때  유권자의 안정된 안목과 판단이   사태를 바로 잡을 수 있어  든든하다. 

포퓰리즘은 망국병이다. 
망국병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국가에  의존하려는  국민  성향부터  바로잡혀야 할 터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국민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거듭나는,  새기원을 열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지금이야말로 도전해 볼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    2011. 5.25)                        
                                                         ....홍문종 생각                          

2011년 5월 23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고엽제

고엽제

미국이 또 문제를 일으켰다.
주한미군이 고엽제를 비롯한 맹독성 물질을 경북 칠곡 미군기지내에 대량으로 파묻었다는 양심선언이 나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78년 당시 고엽제 등의 독극물이 든 10만 리터 분량의 드럼통을 직접 매립했다는 미군 전역자들과 한국인 근로자의 육성 증언이 잇따르면서 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청산가리의 1만 배, 비소의 3천 배에 달하는 다이옥신을 주성분으로 하고 있는 고엽제의 맹독성은 이미 알려진 바대로다. 다이옥신 1g이면 무려 2만 여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고 용해와 분해가 어려워 오래도록 인체와 토양에 해를 끼치는 치명성을 생각할 때  분통이 터진다.  설마 미국정부가 이 일을 주도하고 은폐하고 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미국의 일부 몰지각한 관리들의 잘 못 이었다고 할지라도 너무 많이 나간 느낌이다.

무엇보다  사실로 드러날 경우  미국이 과연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게 될지 걱정이다.  
지탄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날 사안이 아니었던  여러 사례들이 구렁이 담넘어가듯 처리된 앞서의 경우를 생각하면  당연한 불안이다.   실제로 미국의 불량한 양심을 적발해내는데 성공한다 해도 피해보상을 낙관할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조만간 한미 합동 진상조사를 벌일 예정이라지만   벌써부터  권리 행사를  제한을 받고 있는 처지다.  모든 것이  혐의 당사자인 미국의 지휘 체계 아래 진행해야  하는 웃지 못할 코미디  같은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미군에게 그 어떤 환경적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돼 있는 소파협정의 불평등한 규약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포르말린 방류 사건 등  주한미군이 우리의 국토를  독극물로 오염시켰던 일이 기왕에도 수차례 있었지만  미군의 혐의를 입증해 놓고도  아무런 피해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는  우리 만의 억울함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이중적인 제국주의 행태를 정당하게 처벌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이런 식의 결말로 끝난 일들이 부지기수다.  

아주 가슴이 아프고 분한 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심정일 것이다. 
갈수록 정의의 지배력이 요원해져가는 세상에 대한 회의로  ‘정의’의 개념을 짚는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포기하는 이 현실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때 그때 달라요’ 법칙이 적용되는 국제사회의  룰, 특히  상대국과의 이해타산이 일치하면 그게 바로 정의가 되는 미국과의 상관관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낯가림이 문제점으로 지목되는 분위기다.  
이익을 내지 못하는 약자는 언감생심 정의를 주도할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  무언의 압력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정의는 이기심의 산물’이라는 부가적 해석을 덧붙이는 수정 작업이 불가피할 것 같다.
무한경쟁 구도 하에 국익이 최고의 가치기준이 되어 국제사회를 주도한 지 오래이고, 그렇게 모든 국가들이 저마다의 국익을 위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는 형국이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 싶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상황이고 보니  종종 국제사회의 공분을 사는  강대국의 만행이  소리없이 묻히는 걸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해야할까?

결국 외세에 국가의 명운을 맡길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허약하고 슬픈 역사를 탓해야 할 것 같다.   
우리에게 있어 우방을 자처하는 미국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야겠다. 
‘태프트-가츠라밀약’과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일본에게 넘기고  ‘얄타회담’을 통한  신탁통치로  한반도분단을  주도한 당사국이 미국이었다. 이번 고엽제 사건도 미국의 일방주의적인 오만함의 일부가 알려진 것일 뿐이다. .
임진왜란 때도 그랬다. 원군 요청을 받고 명나라에서 파송된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이여송이나 진린 등은 젯밥에 관심이 많았다.  전쟁 보다는  일본과의 협상 카드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아프게 했다.  
그러더니  얼마 못가   명나라는  간판을  내렸다.
지금 국제사회에서 경찰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의 최후가  명나라의 그것처럼 불행하게  마감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다.  
우리에 대한 만행 여부를 떠나 미국 사회에 만연된  도덕성 해이가  미국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징조가 역력하다.  돌이킬 수 없는  영역으로까지 진입한  상태에서  미국의 명운을 재촉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번 사건은 우리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면 왜 안되는가를  깨닫게 해 줬다는 점에서 뼈아픈 경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를 지나치게 무시한 미국의 오만한  처사가 반영된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그동안  진상이  밝혀진들 지들이 뭘 아떻게 하랴 싶은  자신감을 깔고 우리를 대해왔던  미국의 부도덕한  진면목을 여지없이 드러낸 사건이다. 우리 정부의 반발이나 국제사회의 비난을 조금이라도 고민했다면, 우리가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은 물론  그 어떤 나라도 자국의 이익을 뛰어넘는 이타적 배려가  존재할 수 없는  이 생존경쟁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일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힘으로 처리할 수 밖에 없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나쁜 일은 나쁜 일대로 철저한 사전 준비와 대비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도 함께 해야겠다.
정부 역시 미국과의 관계 설정에서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살피고 이해득실을 따지고 철저한 뒷검증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겠다.   좀 더 적극적인 노력으로  더 이상  국민 권익이  상처받는  불행이 없도록   미연에 방지해주길  바란다. 
                               (2011.5.22)                         
                      ....홍문종 생각                           
결국 우리에게 달려있는 문제인 것이다.
불편하고 기막히다.

2011년 5월 20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집창촌 단상

집창촌 단상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이 세계 서열 22위로 평가됐다는 낭보다.
대한민국이 아시아의 미래를 주도하는 중심국가로서의 저력과 가능성을 보여준 ‘시작’의 징후로서도 그렇지만 26위에 그친 일본을 제친 기록이어서 뿌듯함을 더해주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의 여지를 주며 나의 눈길을 끄는 뉴스가  있었다.
회칠한 얼굴 분장과 전라에 가까운 차림으로 쇼핑몰에 난입하는 등 격렬시위를 벌이고 있는 집창촌 여성의  현실이  전파 매체를 타고 안방에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국가 정책이 자신들의 생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불만을 시위로 표출하는 그녀들을 보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유럽 등지에서 그런 시위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우리의 현실로까지 대두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의 기존 정서에 파동을 주는   문화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성매매는 여전히 불법사항으로 치부되는 현실이다.  
우리의 경우, 성매매 당사자는 물론 주선자까지 처벌 대상으로 삼을 만큼 강경한 입장이다.
급기야 집창촌 여성들이 생존권 사수를 외치며 거리로 나오는 현실에 이른 걸 보면  아직까지는 강압적 규제가  근절 효과보다는  부작용의 폐해를   더  노출시키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매매춘 금지법도 마피아 등 지하세계의 조직적 범죄를 창궐하게 한   역효과를  감안한다면  이보다 더  심각한  부작용도 각오해야 할 지도 모른다.
매춘, 도박, 마약 등에 대한 저항은 인류 문명의 시작과 그 궤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근절시키려는 수없는 시도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이후로도 별반 희망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창제 도입 등으로 매춘에 대한 입장을 달리 정리하는 게 또 다른 활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공존할 수 밖에 없는 대상이라면 배척해서 음지로 몰아가기보다 융통성을 발휘한 화해 도모가  더  건설적이라는 생각이다.  네덜란드, 독일, 뉴질랜드 등 매춘 합법화로 타협점을 찾은 일부 국가에서 이미  그 결론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금지령을 내릴 때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도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 국가가  지금 보여주고 있다.
 
공창제도에 반대하든 찬성하든 인간사회가 존재하는 한 매춘의 건재함은 불가피하다.  또  공권력이 됐건 도덕적 잣대가 됐건 그것을 근절 시킬 수단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이를 비호하고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범죄집단의 권력화를 조장하는 반사회적 결론이 도출되는  부담도  피할 수 없다. .
인간사회가 완벽을 지향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완벽성이 최고의 선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 보다는 구성원 전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 명제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게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완벽한 행복을 제공할 수 있는  최적의 요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불완전한 한계를  지나치게 고려한 나머지  개인의 자유의사를  존중한다는 명분하에 일정한 통제를 포기하고 방치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무질서와 타락 등으로 인해 인간의 근본까지 파괴되는 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에 대한 이상적 해석이   전부는 아니다.  위선과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면서 또 다른 측면의 상실감으로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종국에는 이 세상이 매일 매일 장례식을 집전하는 음습함에  갇혀  무덤으로 변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상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집창촌 여성들의 데모를 바라보며 착잡한 심경이다.
우선 당장 먹고 살 수가 없다는 이 아우성들은 결국 생존권 차원의 접근이기에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작용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집장촌 문제 해결은 국가 정책 입안자의 관점에 달려있다는 결론이다. 
얼마나 열린 마인드로 임하느냐에 따라  정책의  방향이 달라지는 현실을 봐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집창촌 현안의 총체적인 결론은 공창제도의 존속이다.
물론 매춘이 가지고 있는 사적 영역의 특성 때문에 공창제도의 도입으로 현실적인 어려움이 모두 해소되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평범한 일상을 살고자 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적지 않은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다.
그녀들이 길 거리로 나설 수 밖에 없는 현실과 이를 국가 차원의 보상으로 해결한다는 전제하에 개인적인 제안을 한다면 두 입장,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배금주의가 충돌하는 접점에서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는 모색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집창촌 여성들에게 매춘을 포기하는 대신 국가가 제공하는 보상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정부 정책 입안자의 관점보다는 해당 여성들의 실상이 더 적극적으로 고려된 해결책이 제시돼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치유책을 찾을 방도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말처럼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결론에 도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혜 대상자에 대한 배려는 불가피하다. 이를 외면하고서는 실타래를 풀 방도를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국가 경쟁력도 좋고 국부의 성장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계층보다는 자력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계층에 대한 배려를 외면하는 상황에서의 국가 경쟁력이나 국부 경쟁은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천민자본주의의 본산지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우리의 국격(국가적 자존심 관점으로 해석되는)을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는 자충수가 될 소지가 있다.
최소한 정부가 나서서 빈부의 간격을 조장하는 주역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점에서 선진국일수록, 국격을 지향할수록 인권의 사각지대를 살피는 정부의 세심한 손길은 그 범주를 더 넓혀야 한다는 생각이다.
집창촌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가적 차원의 정책적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보다 많이 준비하고 배려해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다. 
                                                        (2011 . 5. 20)                    
                                    ....홍문종 생각                   

2011년 5월 19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향연

향  연
               
                               
                                 -홍문종-


둥근달을 보네
둥근달이 보네
내 달이 보이네
니 달이 보이네


둥근달이 덜 차고
내마음이 덜 차고
니마음이 덜 차도
내사랑은 더 차네


구름이 달을 타네
달무리 구름 타네
별들도 하늘 타네
온하늘 내맘 타네


달빛잔치 하는밤
별빛잔치 하는밤
구름잔치 하는밤
사랑잔치 하는밤


둥근달이 나를보네
둥근달이 너를보네
내가 둥근달을 보네
니가 둥근달을 보네

   (2011.5.19) 

2011년 5월 17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달빛에 걸리다

달빛에 걸리다


대문을 열다가 우연히 바라본 하늘이었다.
늦어 힘든 내 눈에 하늘을 가득 채운 둥근 달이 스며들듯 나를 적셨다.
그리고 이내 휘영청 산마루에 올라 나를 보고 환히 웃고 있는 둥근달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달의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 그 매력에 ‘딱 걸려들어’ 그만 포로가 되고 만 것이다.
토끼와 계수나무 그리고 연자방아까지 품고 있는 달의 미소가 푸근하게 감싸주는 듯 했다.
그 넉넉한 포용력이 온 종일 과용된 심신을 위로하며 평안을 주었다.
 
돌아보니 그동안 하늘에 걸린 달 한 번 마음 놓고 바라보지 못할 만큼 정신없이 살았었다. 
매번 끝자락에 매달려 동동거려야 했던 게 내 삶의 실체였던가 싶다.
이런 식으로 사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방향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오늘만 해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많은 말들을 쏟아냈지만 그 각각의 만남에서  최선을 다했는가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바쁘다는 핑계로 불성실한 마무리를 남발했기 때문이다. 
이 밤, 그런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러워 기도하는 마음으로 달빛에 젖어있다.
내 아무리 발 벗고 뛴다 해도 밤하늘에 걸려있는 둥근달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패배를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생각이니까. 

달빛을 놓기 싫어 집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
형형한 달빛 아래 세상 만물이 고요히 엎드려 있는 형국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밤이다.
밤하늘 둥근달의 여유로운 미소에 덩달아 넉넉해지는 기분도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다.
이렇게라도 달을 볼 수 있는 나는 그나마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빌딩 숲에서 터져 나오는 조악한 불빛에 둘러싸인 사람들에 비하면 말이다.
성냥갑처럼 촘촘한 빌딩 숲에서 오글거리며 부대껴야 하는 도심에서의 삶은 달을 만날 여유조차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더구나 퇴기의 화장발처럼 퇴락의 징후가 역력한 도시의 인공 빛임에랴.
  
둥근달이 노래를 하고 있다.
 달빛 아래  축제다.   
삶에 지친 영혼을 치유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벅찬 하루 일정에 나날이 찌들어가는 군상을  모두 모두 불러 모으고 있다. 가슴을 활짝 열고  달빛을 타고 쏟아지는 정기를 받으라는 성화가 반가운 건  나만이 아니리라.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을 두 팔로 받아 안는 달의 관용에서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번뇌를 용해하는 사랑의 힘과  활력도 주고 희망도 주는 무한한 자연의  시혜가 거기 있다. 
초라한 기분이 들더라도 눈을 감지는 말자.
우리는 그저 눈을 들어 밤하늘에 걸려있는 둥근달을 마음을 담으면 된다.
 
달과 함께 부르는 노래. 
하늘의 선물을 모두가  함께 향유할 수  있었으면.....
                                               (2011 . 5. 17)                         
                               ...홍문종 생각                      

2011년 5월 15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낀 세대

 
낀 세대
스승의 날은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는 내게 남다른 감회를 선사한다.
제자들의 방문을 받고 은사님을 찾아뵈면서 스승인 동시에 제자가 되어 추억 속에 흠뻑 빠져드는 호사가 허락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만큼은 모두가 40년 세월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는다. 지금의 우리보다 더 젊은 선생님들과 까까머리 중학생인 우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추억의 공간을 채우는 꿈같은 시간이다.
안타까움이 있다면 흐르는 세월을 어쩌지 못해 유명을 달리하시는 은사님이 늘고 있는 현실이다. 십수년 전, 스승의 날을 맞아 은사님들을 처음 모실 때만 해도 제법 잔치 분위기가 나는 규모였는데 갈수록 단촐해지는 느낌이다.
한 분 두 분 그리운 얼굴들이 생과 사의 인연을  달리하며  우리 곁을 떠나시기 때문이다. 
올해만 해도 매년 모셔오던 이동범 교장선생님의 빈자리를 지켜봐야 하는 슬픔이 있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그런 이유로 올 스승의 날은 더 없이 쓸쓸하게  보내야 했다.  
김기열 선생님이 선약 때문에 불참하시니 조성복, 장신재 두 분 선생님만 모시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두 분 은사님들이  아직은 건강하고 의욕적인 모습이셔서 위안이 되긴 했지만.
특히 중3때 담임을 맡으셨던 장신재 선생님(언젠가 김한길 전 의원이 잊지 못할 스승으로 지목하던 분이다)은 칠순의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백수에 돌아가신 당신 은사님 경우를 들어 50대인 우리들은 아직 아이(?)에 불과하니 지금부터 새로운 삶을 준비해도 늦지 않았다고  격려하셨다.
무엇보다 예전부터 나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계셨다며 무한 신뢰와 사랑의  덕담을 아끼지 않으셨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오래 동안 익혀온  묵은 꿈이   '결실'로 실현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단숨에  파죽지세의 기세를 충전해준  축복이었다.
 
君師父 一體라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던 때도  있었다.
그 시절을 비교하면 지금은 스승의  위상이  말이 아닌 상황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막하고 힘겨운 일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스승의 역할은 여전히 지대하다. 
어떤 인연이냐가  한 사람의 인생에  중요한 결정이 되는 점도 별반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위대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그보다 더 위대한 스승이  인격적 감화와 사상적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 있었다.    
플라톤에게 소크라테스, 아난에게 석가, 안연에게 공자, 안연에게 퇴계선생이 스승으로 존재한 인연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번 기회에   자신의  현재를  위해  헌신하신 스승의 존재를  되돌아보는 건 어떨까 싶다. 
감사한 마음으로 은사님을 찾아뵙고   또 다른 가르침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누군가 나를 가르치고 이끄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 게 될 것이다.  
다만  좋은 스승과 제자 관계에   빠져서는 안될 덕목이 있는데  그것은 신뢰다.
스승이  제자를  잘 알고 있고  제자는 스승을 인격적, 도덕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면  그 외의  일은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제 관계 속에서 다  자동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그만큼 스승의 존재는   '슈퍼 울트라 짱'이다. 

오랫만에 만나는 제자들을 통해서도 새삼  깨닫는 바가 적지 않다.
그들의 얼굴을 점령해가고 있는 주름살을 보면서 세월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지만   세월이   바꿀 수 있는 건 외형 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아 , 원래 얘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을 만큼  '완전한 변신'으로  놀라게 하는  제자를 만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케이스에 불과하다.    
어느 형태든  '그 녀석'의 현재와 과거가 상호  연관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학교 다닐 때의 품성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걸 보면서  숱한 세월도  인간의 기본적 품성이나 성향을 어쩌지 못하는 강력한 자연의 법칙을 실감하게 된다.   
어찌보면 참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것들이 인연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스승의 날,
구구절절 옳으신 선생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건  특별한 행복이다.  
또 감사할 일이다. 특별히 나처럼 스승이기도 하고 제자이기도 한 낀 세대 입장에서는  더욱 그런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이 낀 세대의 바람을 피력하자면
1.  말씀 잘 받들어서  선생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훌륭한 제자가 되고 싶다는 것
2. 내 제자들에게도   그  가르침 대로 용기와 희망을 주는 선생이 되고 싶다는 것.      
3. 사랑을 전하는 제자이고 스승이 되고 싶다는 것.
                                               (2011.5.15)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