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3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테러와 성전

테러와 성전
 
오사마 빈라덴이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9.11 이후 집요하게 사냥감을 추적해 오던 미국의 응징이 성공을 거둔 결과다.
하지만 미국의 복수 대장정이 해피앤딩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순식간에 미 전역이 축제의 도가니로 변해버렸다.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 나와 공적의 사망을 축배로 연호하고 있다.  빈라덴 제거작전을 주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가도에 청신호가 켜질 정도니 빈 라덴을 향한 미국민들의 원한이 어느 정도의 깊이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열화와 같이  죽음을 반기며 저마다의 깊은 恨을 풀어내고 있는 미 국민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다시 싸움이  시작되고 있다.
보복을 다짐하는 알카에다 등 이슬람 무장단체들의 선전포고가 이어지면서 테러 위협이 더 커지고 있다.
빈 라덴 의 후계를 잇는 과정에서 지도자로서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강력한 테러로 뭔가 보여주려는 영웅심이 작용한다면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대비책을 강구하는 모습이지만 테러에 대한 공포를 잠재우기엔 역부족인 실정이다.
심지어 예정된 미국 여행 일정을 놓고 고민하는 모습도  적지 않다. 

인류의 공적인가, 무슬림의 리더인가.
빈 라덴에 대한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미국은 ‘대량 살상자’의  죽음으로 ‘정의가 실현됐다’다지만  알카에다 측은 ‘미국에 맞서 성전을 이끌면서 자신의 영혼과 재산을 바친 기사’의 숭고한 희생으로 추앙하고 있다.
문제는 관점의 차이다.
이쪽에서는 골치 아픈 범죄자를 척결한 형국이지만 상대로 보면 불세출의 지도자를 잃은 것이다. 당분간은 그런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만나기가 힘들 거라는 안타까움마저  있다.  그처럼 훌륭한(?)  지도자를 무참히 살해한 미국이야말로  다른 관점에서는 공적이 되는 셈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우리의 민족적 관점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만행이지만 일본 입장으로는 세력 확장을 위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이등박문만 해도 우리에게는 침략의 원흉이고 제거해야 할 민족의 원수지만 그들에게는 일본에 새로운 지평을 제공한 불세출의 지도자였다.
마찬가지로 9.11도 미국에게는 천인공노할 테러지만 알카에다 시각으로는 포기할 수 없는 성전이다.  미국이나 서방세계 그리고 기독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알카에다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일 수도 있다. 

오사마 빈라덴은 갔지만  알카에다는 아직  건재하다. 

일시적인 평화는 올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나 당분간이다. 
지도자를 잃은 테러단들이   헛발질하다가  자칫 대형 사고를 칠 수도 있다.
안중근 의사를 교수형에 처한다고 해서 열사의 발길을 완전히 묶어 놓지 못했던 것처럼   오사마 빈 라덴 제거는 제2의 더 강한 빈 라덴 출몰을 예측하게 만든다.
결국 폭력은 폭력을 낳고 투쟁은 투쟁을 낳는 결과로 귀착될 수 있다. 
미국도 복잡한 국내 사정이 해결되지 않는 한 강공책만으로 경찰국가로서 면모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힘의 논리에 의한 세계 지배는 임시방편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항구적이고 근본적인 세계평화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깨달아야 할 것이다.



문득 정의의 절대가치는 최소한 관점의 명분이 충족되는 범주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관점의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힘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역사의 그것처럼 말이다.
미국이나 아랍 중 어느 한 영역이 사라지게 되지도 않고 기독교나 이슬람교 중 어느 한 종교가 소멸될 수도 없는, 공존이 불가피하다면 대결국면 보다는 순리적인 협의가 답이라는 생각이다.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푸는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진정한 의미의 평화와 인류공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무력을 통한 제압은 무조건 답이 될 수 없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싸우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면 비록 차선이어도 바람직하다'
무장 테러단체들이 무력항쟁을 포기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데 있어 이 손자병법의 지혜를 인용하면 어떨까.
 평화와의 공존 구도를 위해서는 상대의 승복을 이끌어 내 무력항쟁을 포기하게 만드는 게 상책이다.  
승복은 상대를 변화시키려 하기 보다   상대를 인정하고자 스스로의  생각을  바꾸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내가 먼저 바뀌어  상대를 인정해야  승복도 얻어낼 수 있다.
시기적으로 민감한 주제여서 위험한 영역을 건드리고 있다는 부담감은 있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해결책 마련의 주역은  늘 우리 자신임을 잊지 말자.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2011. 5. 3)                     
                                  ....홍문종 생각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