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30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공연장에서


공연장에서


일요일 오후, 지인들과 예술의 전당에서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를 관람했다.
이탈리아 출신 세계적 소프라노 ‘마리엘라 데비아’가 비련의 여주인공 ‘비올레타’ 역을 맡아 열연하는 전막공연인데 그녀 특유의 벨칸토 창법을 접할 수 있는 모처럼 만의 기회라며 다들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역시나 비싼 관람료가 괜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만큼 기대치 이상의 감동을 주는 공연이었다. 심금을 울리는 감동은 뭐니 뭐니 해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이었을 때 그 효과가 가장 크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의외의 보너스가 있었는데 하버드 동창들을 비롯, 오랫동안 격조했던 몇몇 얼굴들과 조우할 수 있어 기쁘고 반가웠다.
 
문화의 향취를 만끽하며 실속있게 보낸 휴일 풍경을 자랑하려고 오페라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다. 그 보다는 오늘 공연장에서 내 바로 앞줄 좌석(정확히 말하면 A구역 5,6번 좌석)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한 젊은이에 관해 얘기하고자 한다.
내 앞자리에 젊은 커플이 앉아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들에 처음 느낌은 뭐랄까, 잘 생긴 외모와 옷매무새도 그렇고 교양있는 집에서 교육을 잘 받아 품격이 몸에 밴 ‘훈남훈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해프닝이 ‘훈남’에 대한 나의 환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막이 내려가고 중간 휴식을 알리는 장내 아나운서의 코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앞자리 ‘훈남’이 다짜고짜 사탕을 먹어 자기 관람을 방해한 범인으로 나를 지목하며 따지고 든 것이다. 졸지의 봉변에 기가 막힌 내가 사탕을 먹지 않았다고 항변하자, 그러면 껌을 씹지 않았느냐며 다시 태클을 걸었다. 또 다시 그런 적이 없다는 나의 답변을 듣고서도 씩씩거리며 대들듯 더 무엇인가 따지려 들었는데 옆에 부인인듯한 여성의 저지로 끝이난 꼴이 되고 말았다. 창졸지간에 나는 봉변을 당한 꼴이 되고 말았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한참이나 고생을 했었다. 
일행들은 젊은 사람이 예의가 없다며 공연이 끝난 뒤에라도 사과를 받아내겠다고 흥분했다. 좋은 공연을 왔는데 너무 기분이 나쁘다며 화를 참지 못하는 그들을 오히려 내가 달래는 처지였다.
 
공연장에서 사소한 부주의로 다른 사람의 몰입을 방해하는 몰염치한 이웃을 만나는 건 확실히 불운이다. 이 날만 해도 VIP석 누군가의 휴대폰이 울렸는가 하면 뒷좌석에 앉은 두명의 중년 여성들은 바스락 거리는 소리로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좋은 공연이었기 때문에 관람을 방해하는 소음이 유난히 더 거슬리는 기분이었다.
내 경우 약간의 인기척으로 경고의 뜻을 전하는 방식을 통해 중년여성들의 소음을 해결할 수 있었다. 최대한 상대방이 무안하지 않도록 배려를 담아 제지했더니 다행히 그녀들이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소리를 멈춰준 것이다.
앞자리 훈남도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에 아쉬웠다. 내게 혐의를 뒀더라도 최소한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다면 불확실한 청각을 맹신한 나머지 단지 뒤에 앉아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무례를 저지르는 경솔함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가 취한 행동이 더 문제라는 생각이다. 최소한 결례를 범한 자신의 행위를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연을 보는 내내 이 해프닝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의 무례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안고 있는 공통적 문제일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어떻게든 바로잡아주는 것이 어른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 들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면 내려오게 돼 있고 올라가는 계단이 있으면 내려가는 계단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들에게도 그들처럼 사회적 정의감과 책임감에 불타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으면서 무기력해진 기성세대의 구태를 성토하던 열정 또한 갖고 있었다.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하거나 효율을 앞세워 준법정신을 도외시하던 어른들의 불합리한 가치관을 목청 높여 지적하며 우리가 바뀐 세대의 전령사임을 알리려 했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의 지난 생각들이 다 옳았던 건 아니었다.
세상 이치라는 게 책에서 배운 것처럼 늘 단순명확하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 있어 사느냐를 우선시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기성세대를 무조건 폄훼하려 했던 건 분명 오류였다.
계층 간, 동서 간 갈등이 걸림돌이 되는 녹록치 않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위상은 날로 그 격을 높여가는 현실이다.
외형적 신장 못지않게 구성원의 합리적 마인드가 선진국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젊은이들의 올바른 사고야말로 한 나라의 위상을 평가하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부당한 것을 지적하거나 수정을 요구하고 나서는 젊은이들의 높은 정의감은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공연장에서의 훈남처럼 스스로의 오류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반성할 줄 모르는 편향된 사고는  치명적 결격사유라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트라비아타 공연은 좋았다.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한 감동을 전해줬다. 
그 진한 감동을 함께 나누느라 얼얼해진 손바닥을 어루만지는 이 순간,  행복한 기운이 온 마음을 휘감는 느낌이다.
                                   (2011. 5. 30)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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