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31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해법을 찾자면

 
해법을 찾자면
일본 사람들, 참 대단하다. 
지진과 쓰나미, 핵 방사능 유출로 쑥대밭이 된 이 와중에도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해프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2011년 중학교 검인정 교과서에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아예 못을 박고 나선 것이다.
파렴치한 작태다. 안면몰수 실력도  경쟁력이 되는 세상이라면  일본이야말로  세계 제일의 수준으로 평가받을 만하다는 생각이다.  일본과의 구원에도 불구하고 의연금 모금이다 구호지원이다 어느 나라보다 먼저 그들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우리로서는 그야말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꼴이 됐다.  
역시나 개꼬리는 3년 묵어도 황모가 될 수 없는 것을.
만고의 이 진리를 무시하고 일본의 개과천선을 기대했던 우리가 잘못이다. 그렇다고 의연금을 내지 말자는 따위의 옹졸한 생각을 하게하고 싶지는 않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일본인의  이중성 때문에  난감했던  경험담을 접할 기회가 많다.   
어른들이 많은  이번  모임 자리에서도 일본인들의 불가사의한 기질이 화제가 됐다.
우리들의 허를 찌른 ‘교과서 파동’은 평소의 그들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는 중론이었다.
호의를 보여준다고 해서 자신들이 정해놓은 노선을 변경할 그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정에 끌리길 좋아하는 우리와는 달리 냉철하고 이해타산적인 반응이 몸에 밴 철저함으로 무장돼 있는  국민성  탓도 있다.  일본의 사회적 특성을 대변하고 있는 ‘황혼이혼’에서도 철두철미한 그들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일본인 특유의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사례라 하겠다. 평소에는 아무 불만 없는 얼굴로 살뜰한 내조를 아끼지 않던 아내들이 남편의 퇴직금이 정산되는 순간, 비로소 표정을 드러내며 이혼을 요구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모습인가.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도 국가적 아젠다나 개인의 미래를 위해 정신 줄을 놓지 않는 강인한 민족성은 오늘날 일본을 있게 한 저력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일본 상황이   낙관하기  어려울 정도로 피폐해진 게 사실이지만  왠지 그들은 무서운  정신력으로  재기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런 시각으로 재보궐 선거를 앞둔 정치판을 보면 우리는 한참 멀었다.
특히 한나라당 상황을 보면 자괴감이 들 정도로  자중지란에 빠져있는 모습이다. 
분당 을은 한나라당에게 있어 ‘천당 위 선거구’로 통칭되는 지역이다. ‘질래야 질 수 없는’ 정치적 텃밭으로 인식돼 있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그런 분당을 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분위기로 흐르고 있는 현실이다.  심지어 분당을 패배를 기정사실로 하고 내년 총선과 대선 전략 구도를  걱정하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돌고 있는 실정이다.
야당은 이미 당대표를 후보로 내세우고 표밭을 다지기 시작했고 일부이긴 하지만 분당을 지역에서  민주당  신승을 점치는 언론보도까지 나오고 있는 마당이다. 
한나라당은 여태 공천 가닥도 잡지 못한 채 표류 중이다.  특별히 필승카드를 믿고 있는 건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별 뚜렷한 대안이 감지되는 것도 아니다.  시대착오적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레임덕과 폭주하는 국정에 대한 국민반감 때문에라도 이번 재보궐 선거판은  한나라당에게 유리한 국면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이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지 못하는 분위기여서 안타깝다.
 사분오열 되어 눈앞의 작은 이익에 급급해 하는 모습 뿐이다. 
 
어릴 때부터  ‘정신 줄 놓으면 하늘에서 주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들으며 자랐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며  자식들에게 늘 깨어있기를 권면하셨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는 쪽이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논지였다.    精神一到何事不成을  독도 해결이나 분당을 선거 승리를 위한 과정에 필요한  주문으로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결국 우리가 얄밉게 보건 의리 없게 보건 일본은 세계 슈퍼국의 면모를 당분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갈수록 동력을 상실할 테지만 버틸 수 있는 여력이 아직 상당한 시간을 남겨두고 있음을 알겠다. 특히 분당을 후보로 누굴 공천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한나라당이 패배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는 정황도 감지 된다.  
좀 더 겸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할 상황에 대한 현실 인식이 요구되는 시점이 아닐까 싶다. 
 
이후로도 복잡다기한 사회에서 수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 중에서 국가의 명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일들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옥석을 구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목이 더 없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정신 차리지 못하면 손에 쥔  도 놓칠 수 있음을 명심하자.
그것이 이 수상한 시절을 살아낼  해법이   아닐까 싶다.
                                                               (2011. 3. 31)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30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젊게 살자

젊게 살자
일본 원전 사고는 급기야 플루토늄까지 유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시각각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무엇보다 이 무서운 현실이 일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게 문제다.
전 세계가 방사능 피폭 걱정으로 초긴장 모드다.   가공할 만한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일본에서 유출된 핵 방사능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러시아, 미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속속 감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야말로  바람이 닿는 곳이면  그 어느 곳도  안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지진이나 쓰나미 걱정만 할 때가 차라리 행복했다.
천재지변으로 망가진 상황을 복구만하면   되는  단순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전사고로 이어지면서는 더 이상 의 낙관이 허락되지 않는 정황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피를 말리고 있다.
이렇게까지 사태를 키운 건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의  무능하고 이기적인 대응 때문이라는 힐난이 쏟아지고 있다.  
무리는 아니다.  원전사고 초기,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사고수습을 위한 기술 지원 제안을 거부한 도쿄전력의 안일한 대응이  만든 인재라는 비난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다. 
도쿄전력으로선 원자로 폐기나 거액의 비용 지출을 염두에 둔 망설임이었겠지만  그러는 사이 일본국민은 물론 전세계인의 안위까지  핵 불안의 인질이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시대착오적 패착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악수를 둔 셈이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으니 오죽할까 싶다. 
실제로 후쿠시마 원전 위기가 2년간 지속될 경우 도쿄전력의 배상액은 11조엔(1320억달러)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악의 경우 감자와 대출금 출자전환에도 불구하고 배상 비용을 감당하지 못할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그들의  우매한 얍삽함이 한심하다. (독도 문제로 우리의 속을 긁고 있는  밉상스러움이라니)   

항명이니 아니니  화제를 낳고 있는  우리의 예비역 장성의 집단 반발에서도  낡은 사고의 전형적  퇴행현상을 보게 된다.  
합참의장의 권한을 크게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MB정부의 군 개혁 의지에 일부 영관급 현역과 성우회 등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합참의장 1인에게 군령권(전투지휘권)에 각 군 총장에 대한 군정권(일반 지휘권)까지 몰아주는 식의 지휘체계 개편은 문민통제 원칙에 어긋나는 잘못된 방향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나치와 일제, 러시아ㆍ중국ㆍ북한의 방식으로 1인에게 무력이 집중되는 ‘통합군제’로   정치가 군의 눈치를 보게 되는 폐단을 야기한다는 그들의 우려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대응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낡은 사고로  치부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고작해야   기득권에 연연해 하는 집단 이기주의로  비춰질  가능성 마저 있다.   그 무엇도 국가 이익보다 앞서는  가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대통령의 통치행위 전부가 바람직하고 긍정적일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 대한 절대복종은 (군 조직에서)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가 되어있는 우리의 처지다. 
성우회 등의 이번 처사가 국가의 자존심을 최우선시해야 할 국가와 군의 사명을 저버린   이기심의 발로는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위기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일본을 바라보며  이것이 일본의 실체일까 생각한다. 
운기를 다한 노쇠한 노인의 마지막처럼 스산한 그 모습에서 우리의 현실은 어떤지 뜨끔한  자극을 받는다.   
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던  당당함은 간곳 없고   위기 앞에서 속수무책  찌그러들고 있던  그 무기력은 가히 충격이었다.    3위, 4위, 5위... 갈수록  전락해가는  일본의 미래를 예측하게 되는 건   이번 사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무능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낡은 사고다.
시대상황에 맞는 열정과 관심으로 '젊음'을  지키고  인생을 주도해야 하는데  일본은 그렇지 못했다. 기력을 잃은 노쇠함만 있을 뿐  미래의 가능성을  설계할 수 있고   진취적 사고로 뚫고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군 개혁에 어른스럽지 못한 대응으로 구설에 오른   우리의  예비역 장성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국가 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낡은 사고는 과감히 퇴출시켜야 할 불청객이다.
누구나 미래를 잘 지켜내고 거듭나는 삶을 잘 펼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주위에서도 젊은이 같은 노인과  노인 같은 젊은이를 흔히  만나게 된다.  그들의 확연히 구분된  삶의 형태가  우리에게 충분한 자극거리가 되는 건 물론이다.  
부러워만 할 게 아니라 우리도 지금부터  젊은  미래를  함께 향유하도록 하자. 
젊은 오빠, 젊은 언니의 삶을 살도록 하자.  
 어렵지도 않다.  '젊은 사고'를 하면 되니까.
                                                                 (2011.3. 30)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28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동키호테


동키호테

 
일요일 오후, 연일 팽글팽글 돌아가던  일정을 접고 망중한의  여유를   택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유니버셜 발레단의 ‘동키호테’를 관람했는데   이제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는 우리 문화의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이번 공연은 생각보다 여러 면에서 좋은 성과를 냈다는 생각이다.
우선  남다르게  들인  공력이    돋보이는 공연이었다.   특히 발레공연을 처음 접하는 관람객을 배려한 문훈숙 단장의 공연 전 작품 해설시간이 인상적이었다. 좋은 예술작품이 인간의 삶의 질을 얼마나 향상시킬 수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화려한 열정이 넘치는 무대는 흥겨움 그 자체였다. 백색으로 고정된 기존 발레에 대한 선입견을 무너뜨린 창조력이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오케스트라 라이브가 경쾌한 음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무대 위에 힘차고 우아한 몸짓들이 별처럼 쏟아지는 멋진 무대 공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화충전 기회를 온전히 사용하진 못했다)
 
“야, 대단하다. 어떻게 손과 발이 1초 동안 열대번씩이나 움직일 수 있다니 놀랍다”(수학자)
“연설이나 공약 발표가 아니어도 저렇게 열광적으로 박수를 받을 수도 있는 거구나”(정치인)
 “인간이 저런 포즈를 취하고도 목뼈, 팔뼈, 다리뼈가 온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의사)
“아니, 이 많은 사람들이 낸 관람료는 관련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수익배분이 이뤄지는 걸까?”(기업가)
 “쳇, 똑 같은 인간인데 예술가들의 춤사위에는 환호와 함께 큰돈이 따르고 생존을 위한 우리들의 처절한 몸짓엔 경멸과 푼돈 밖에 없군”(노숙자)
1부 공연이 끝나고 잠시 쉬고 있는데   공연에  대한  감상이 아닌   엉뚱한 상상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빈부격차의 간극이 존재하는  공연장  모습이  '수학자는 수학자대로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또 의사나 기업가, 노숙인  역시  저마다 처한 위치에서 자기만의  평가 방식으로 그 상황을 해석하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게 했다.   실제로 오페라 하우스 내 3개 층 객석을 꽉 채우고 문화체험에 열중인 관객들을 보고 있자니 지하도 벽에 몸을 붙인 채 줄지어 앉아있던 노숙인 행렬이 자꾸 겹쳐 떠올랐고 그 모습들이 나의 공연 몰입을 방해했다. 

그 좋은 공연을 보면서 나는  왜 하필 그런 식의  상상력 밖에 동원하지 못하는 걸까?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에   굳이 답을 찾자면   ‘내 안의 정치 DNA ’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오늘의 발레 공연처럼 우아하고 멋있고 즐거운 삶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런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간절함의 발로라고나 할까.
문득 이런 오페라 하우스에 비싼 관람료를 내고 들어와 좋은 공연에 박수치며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은 과연 전체에서 몇 %나 될까 궁금해졌고  화려한 옷으로 성장하고 예의와 품격이 넘치는 문화 언어로 충만한 이 공연장에 들어있지 못한 사람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하는 원초적인 질문에 지배받을 수 밖에 없는 나의 한계를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동키호테 공연을 볼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편차와 이로 인한 갈등 양상까지 생각한다면 사회적 격차는 상당히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판단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생각보다 훨씬 큰  파장을 일으키며   소통과 교감의 불능 상태를  확산시키고 있었다.
갈등과 분열을 부축이는 진원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저녁 시간 찾아갔던  의정부의  한 상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 가서  동키호테 공연  얘기를 꺼냈더니  예술의 전당이 어디에 있느냐(의정부시에 있는 동명의 공연장 밖에 모르는 이도 적지 않았다)부터 시작해서 (문화생활을 하는 걸 보니 ) 너만 사람답게 산다는  반응까지,  떄로는 무지로 때로는 질시로  뒤섞인  복잡한 심경들이  상가를 지키고 있던 이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이해를 구하기 어려운 불통의 벽이 거기 버티고 있었다.

국민사이에 퍼져있는 이념 성향의 편차를 줄일 수 있는 선정이야말로 이 시대 지도자가  갖춰야 할 불요불급의 리더십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   지나친 극우나 극좌에 치우치기보다  좌우를 아우를 수 있는 융통성과  설득력 그리고   신뢰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의 리더십으로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환경에서 동일한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그 간극을 좁힐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내가 됐건 당신이 됐건 누군가는 반드시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발레공연을 보다가 너무 엉뚱한 생각으로 비약한 것 같아 미안하긴 한데  정치의 계절이 가까이 와서 인지 자꾸   그쪽으로만 치우쳐지는 생각의 덜미가 잘 잡히질 않는다.                   (2011.3.28)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27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전환기엔

전환기엔

변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해왔던 사회적 가치관이 끊임없이 진일보하는 모습이다. 변화의 방향이 바람직한 지 여부와 무관하게 눈에 보이는 변화가 빠르게 이어지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건 젊은이들의 사랑방식과 결혼관의 변화다. 수명을 다한 기존의 가치관 대신 새로운 유형의 의식구조가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형국이다. 새로운 것이 반드시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필연적이라는 생각이다.

결혼제도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바뀌어 왔고 지금의 일부일처제 도입도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남성 중심 사고의 산물이지만 옛날에는 일부다처는 물론 축첩까지도 조건없이 허용되는 범주였다. 기득권 계층의 남성들의 특별할 것 없는 권리이기도 했다. 심지어 삼국시대에는 중혼제도가 성행했던 기록도 남아있다. 일부일처제도가 정착된 지금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건 결혼의 틀을 깨는 것을 금기시하는 분위기다. 그 틀 안에서의 온갖 기형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성역 개념의 결혼관이 상식이고 관행으로 우리의 의식구조를 지배해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과 권력이 결혼의 공적기능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상황이 완전히 차단된 건 아니다. 3천 궁녀를 거느렸던 의자왕이나 1천명의 처첩을 둔 솔로몬 왕의 호사(?)가 현재 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
모순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결혼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 아무래도 성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직업상 교육현장에서 젊은이들의 성 풍속을 지켜볼 기회가 많은데 지나치게 과감하고 개방적인 그들의 결혼관이나 연애관에 놀라는 일이 많다. 성은 그 은밀성 때문에 지금까지 남들과의 공유가 불허되는 ‘절대적 사적영역’으로 다뤄진 측면이 있다. 고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말로 남녀 간의 접촉을 터부시하던 관행도 있다. 실제로 남녀가 한 방에 들었다면 반드시 결혼으로 책임을 져야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게 불과 얼마 전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요즘 젊은이들은 남녀 구분 없이 적극적인 구애의 주체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성교제를 시작하고 친밀해지면 망설임 없이 곧바로 동거에 들어가는 풍경도 낯설지 않다. 만남에서 동거에 이르기까지 그다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피드를 선호하는 젊은이들답다.
관계의 유한성을 대전제로 하는 출발부터 얽매임이 없다. 물론 현재의 관계가 영원으로 이어지길 바라기야 하겠지만 서로에게 다른 상대가 나타나면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는 부담없는 전제가 이들의 성적 관념을 더 자유분망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행들이 결혼에 대한 절박함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헤어지면 또 다른 이성을 파트너로 만드는 과정이 어렵지 않게 반복되다보니 결혼이 불필요한 에너지를 유발하는 불편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결혼으로 파생되는 가족관계에 부과되는 책임감들도 부담으로 받아들여지는 형국이다. 둘 사이에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자식조차도 인생을 가볍게 살고 싶은 젊은이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장애 요인이 된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교제는 좋지만 그 주변부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은 반갑지 않다는 식이다. 그런 의식이야말로 젊은이들의 결혼 기피를 부축이면서 결혼의 결속력을 떨어뜨리는 주범이 아닐까 싶다. 50% 대를 육박하는 이혼율로 OECD 1위가 된 우리의 현실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대로라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결혼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해진다는 중론이 지배적인데 결코 무리한 추론은 아닐 것이다.
세대에 따라 사고의 유형이 달라짐에 따라 이혼에 대한 개념도 관점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진공관 세대가 이혼을 사회적 낙오와 지탄의 대상으로 지목한 반면, 아날로그 세대는 이유가 타당하면 언제든 가능하다는 식으로 진화했고 급기야 디지털 세대인 지금은 이혼을 결혼의 필수 상황으로까지 받아들이는 추세다.
당분간은 이 트랜드가 지속될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성 스캔들로 우리 사회의 뉴스메이커가 된 ‘신정아나 등신명’이 울리는 전주곡은 새로운 가족형태로 탈바꿈하면서 겪을 수 밖에 없는 진통이 아닐까 싶다.

갈수록 결혼의 의미가 축소될 공산이 크다.
결혼으로 만들어진 친가나 처가 등의 가족 관계도 선택적이고 제한적인 관계로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둘 사이를 방해하거나 생각이 다른 가족은 갈수록 소외되거나 타인의 존재로 전락되어가는 조짐이다.
자식문제조차도 종족번식 개념이나 사랑의 징표가 아닌 반지를 주고받는 개념 정도로 일반화되는 추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설적인 가정을 꾸리거나 2세 계획, 가족 관계 형성에 대한 고민은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더할 수 없이 귀한 인간의 사회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들 이전의 결혼형태와 비교하며 부모나 가족에 대한 부양책임을 추궁하거나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채근, 그리고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의 부부해로를 강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오히려 그런 고정관념부터 깨버려야 한다는 것이 평소 나의 지론이다.

섹스에 대한 관념이 달라지고 있는 현상을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남녀 간의 성적 결합이 단순히 즐기기 위한 쾌락 용도로만 존재하게 되거나 성문란 현상을 부채질 하게 될까 걱정이다. 대한민국 미래가 달려있는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섹스는 스포츠 처럼 단순 쾌락을 추구하는 용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책임과 사랑 그리고 진실을 수반한 인간의 감정이 함께 했을 때 비로소 본연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다음세대에 가르쳐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모든 게 변하고 있는 21세기다.
이런 전환기일수록 기성세대의 중심을 잡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변화도 좋지만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손길 만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2011. 3. 27 )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24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신정아


신정아

그녀가 돌아왔다.
책 한권을 들고 보란 듯이 세상의 중심으로 나왔다.
이번에도 저자거리에서 화제가 되고 있으니 화려한(?) 복귀라고 할 수 있다.
고해성사인지 복수혈전인지 저술 의도가 애매한 그녀의 자서전이 출간 하루 만에 2만부가 동이 날 만큼 대박을 치고 있다는 소식이다. 앞으로 20만부 판매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한다.
그녀가 책에서 총리, 기자가 전직인 남자들이 자신에게 가한 부적절한 행위를 적나라하게 까발린 덕분이다. 그녀의 책장사에 잘 나가던 남자 몇 명이 재물로 받쳐진 셈이다.

세상이 온통 그녀 얘기로 가득하다.
노이즈 마케팅이 됐든 뭐가 됐든 노련함으로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데 일단은 성공한 것 같다.
누구든 글을 쓸 자격이 있고 자유롭게 말 할 수 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지켜내야 할 소중한 가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자유가 남의 자유나 행복을 추구의 권리까지 침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역시 어떤 경우에서도 배제될 수 없는 중요한 사회적 가늠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해도 그녀의 행위가 선의로 해석되지 않는다.
‘누구든 죄 없는 자가 돌로 쳐 보라’고 하셨던 예수의 가르침을 떠올려도 같은 기분이다.
솔직히 ‘신정아 신드롬’에 매몰돼 있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 불쾌하다.
신데렐라의 신기루를 갈구하는 그녀의 욕망에 들러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완강함이 내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피해자를 자처하지만 그녀는 이미 반사회적 범법행위로 법원 판결을 받은 당사자다.
그런데도 피해자인양 일방적 한풀이에 신명을 내며 억대의 수익까지 올리고 있는 그녀다.
자신의 과거로 인해 상처 받았을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그 이기심이 역겹다.
그래서 그녀의 의도에 말려 또 다른 피해자 양산을 거들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기자회견장에 들고 나온 명품 백에 대한 문의가 폭주하고 있단다.
어느 땐가는 신창원이 입었던 티셔츠도 한 시기를 풍미한 적이 있다.
그녀의 책이 대박을 치고 있는 현상과 다르지 않다.
그녀를 걸어 다니는 광고판으로 만들다니 대중의 심리는 참으로 묘하다.
관대한 건지 우매한 건지.
여기에는 언론도 자유롭지 않다.
지극히 사적이고 자극적인 낮은 가치의 뉴스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기까지 부화뇌동한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벌떼처럼 달라붙어 후래쉬를 터뜨리며 뉴스가치가 그다지 높을 것 같지 않는 그녀의 사소한 신변까지도 미주알 고주알 안방으로 퍼 나르며 부각시킨 주역이 언론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녀에게 사감은 없다. 그렇더라도 그녀에게 더 이상의 대중적 호기심은 독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식의 성공사례는 당사자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좋지 않은 선례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옥석을 가리지 말자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무엇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폭로 한 방이면 인생 성공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그릇된 인식이 만연될까 못내 두렵다.
천박하고 선정적인 책 쓰기가 인생역전의 도구가 되는 걸 허용한다면 그것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으로 되돌려지게 돼 있다. 냉엄한 사회적 가치 판단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사회적 수준을 보여줄 때가 아닌가 싶다.

PS:지나친 상상일지 모르나 첫날 매진이 출판사나 신정아 쪽의 마케팅 전략이 투입된 결과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뒤숭숭하다.

(2011. 3. 25)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22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비상의 순간

비상의 순간

경칩도 춘분도 다 지나갔는데 느닷없이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설악산을 눈으로 접수하는 것도 모자라 내일 아침엔 영하 6도의 강추위로 출근길 장악에 나선다는 예고다.
며칠 간 화사하게 피어오르던 봄기운을 언제 그랬냐싶게 저만치 밀어내 버리고 도로 겨울을 불러들이는 모양새다.
갑작스런 한파에 곳곳에 감기환자가 속출하고 있다. 봄날의 꽃들을 시샘해 심술을 부린다는 꽃샘추위에 사람들까지 고생인 형국이다.
어린 시절의 꽃샘추위는 유난히 매웠던 기억이다. 긴 겨울 동안 묶여 있다가 따뜻한 봄 햇살 아래에서 뛰어 놀 생각에 부풀어 오르던 우리들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곤 했다.
어머니께서 꽃샘추위를 ‘미운추위’라고 하시던 것도 생각난다. 추운 겨울 동안 꽁꽁 싸매 지켜낸 자식들이 방심하다가 행여 감기라도 걸리게 될까 노심초사하던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어머니의 모습이 아스라하다.

인간사에서도 종종 꽃샘추위를 만나게 된다.
시기와 질투로 뭉쳐진 공격이 그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괜한 게 아니다.
남이 잘되면 이를 시샘하고 방해해서 어떻게 해서든 망치고 싶어하는 부류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살아가면서 그런 악연은 피해야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 것 역시 자연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는 모함이 따른다. 일종의 패키지 상품 같다. 인간사이의 ‘관계’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시샘이나 모함을 당하는 입장이 문제다. 치명적이어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될 가능성 때문이다.
봄기운에 싹을 틔우거나 꽃망울을 터뜨리며 화려한 꿈을 펼치려다가 꽃샘추위의 습격을 받고 움츠러들거나 시들어버리는 봄꽃의 신세가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들의 삶에도 春來 不似春의 지혜를 새겨야 할 순간들이 존재한다.
갑작스런 추위에 이제 막 동면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 개구리가 동사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꽃샘추위의 횡포를 탓해 봤자다.
물론 경칩이 지나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개구리 잘못은 아니다.
그렇지만 추위에 취약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개구리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는 게 세상 이치 아닐까 싶다.
그래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활약할 순서라는 확신이 있어도 반대하거나 시샘할 주변의 가능성을 점검하고 이에 대비하는 철저함이 말이다. 방심은 금물이다. 자칫 봄을 맞기 위해 겨우내내 준비하고 노력한 결과물들을 일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봄의 출몰을 예고하는 전주곡일 뿐 꽃샘추위에 그 이상의 의미나 역할은 없다.
그래서 저마다 마음 속에 희망을 담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봄을 맞겠다는 성급함 보다는 겸허함과 여유로움으로 때를 기다려야 한다.
더 큰 비상을 위해 그 순간 맛보게 될 환희와 설레임을 잠시 유보하면 된다.
어차피 지금까지 인내하며 잘 익혀온 시간들인데 그 정도의 기다림을 참지 못할 바 없다.

때가 되면 만물은 소생하게 돼 있고 개나리와 진달래도 그 꽃망울들을 힘차게 터뜨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
아무도 비발디의 화려한 음색을 반주삼아 세상을 깨우는 대지의 합창을 막지 못할 테니까.
비상하는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2011. 3. 22)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20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음모론

음모론

사방이 음모론으로 뒤숭숭하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있는 인간관계 특성 때문인지 살아가면서 음모론과의 조우는 불가피한 것 같다.
샹하이 스캔들도 장자연 리스트도 심지어 리비아의 카다피, 일본 원전사고까지도 세상이 온통 음모론에 휘말린 모양새다.

음모론은 사안의 전모가 밝혀지기까지 진위여부를 가리기 힘든 특성이 있다.
때론 그대로 진실이 묻혀버리기도 한다.
미국의 외교문건 등 핵폭탄급 폭로로 권력의 추악한 이면을 파헤치며 전 세계를 강타했던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샌지와 그 입을 막으려고 그를 성추행범, 마약 중독자 등의 파렴치범으로 몰아 감옥에 가두던 권력의 집요한 음해공작을 기억할 것이다. 이런 경우가 전형적인 음모론의 예로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걔 중에는 특정인을 음해할 목적으로 음모론을 들고 나왔다 스스로가 당하는 경우도 있고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음모론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샹하이’나 ‘장자연’이나 ‘카다피’ 등의 검색어로 세간의 이목을 끄는 사건에서 거론되는 음모론은 주객이 전도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진상이 밝혀지면 도둑 맞았다고 외치는 쪽이 도둑이 되는 해프닝으로 끝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그렇지만 진짜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음모의 덫에 걸려 가진 것은 물론 목숨까지 빼앗기는 억울함이 문제다.
이런 경우야 말로 진실을 가리고자 하는 사회적 관심이 집중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억울함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피를 토하고 죽고 싶다’며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싶다.
고인이 된 내 동생도 작고하기 직전까지 기록했던 (마주할 때마다 울컥하게 만드는)비망록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글을 남겼다.
형인 나와의 추억을 회고하면서 ‘그 때 없어졌던 돈은 형이 생각하기에도 나밖에 가져갈 사람이 없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정황이라는 것은 알지만 돈을 가져가지 않은 나는 너무 억울하다’라고 적어 놓은 것이다.
비록 오해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억울함이 동생을 얼마나 부담스럽게 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하물며 의도된 음모의 희생물이 된 처지라면 그 억울함의 강도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한다고 해도 대부분의 음모는 결국 그 꼬리를 드러내게 돼 있다.
음모의 실체가 밝혀지면 그로 인한 누명도 벗을 수 있게 되지만 안타까운 건 끝내 정상적인 ‘복귀’가 이뤄질 수 없는 현실이다. 억울한 사정을 풀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위안할 수 있겠지만 못할 짓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진상이 밝혀진다 한들, 음모의 주체는 물론 그 음모에 부화뇌동 했던 이들의 ‘사죄와 반성’이 이어진다 한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함에 상처받고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개인적으로 하도 많은 음모에 시달리다보니 음모에 관한 한 거의 달인의 경지를 자처하는 입장에서)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다.

진실은 승리하게 돼 있다.
무엇보다 이로 인해 주변에서 크게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아픈 시간들이 마냥 무용하기만한 건 아니라는데 위안을 얻으면 어떨까 싶다.


(2011. 3. 20)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19일 토요일

홍문종생각 - 세계화


세계화

-산에 쥐 한 마리를 풀어놓고 잡아오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미국은 생태학자, 과학자를 총동원해 쥐의 습성, 서식지, 먹이 등의 특성을 조사해서 24시간 만에 쥐를 잡아냈다. 중국은 짝퉁 전문가를 데려다 즉석에서 그 쥐와 똑같이 생긴 가짜 쥐를 만들어냈다. 구소련은 KGB를 시켜 곰에게 고문을 가한 끝에 “저, 쥐 맞아요”라는 곰의 자백을 받아내는 쾌거를 올렸다. 일본은 쥐를 잡긴 잡았는데 절대 자기가 쥐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도록 함구 시켰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했을까? 족집게 과외선생을 동원해서 쥐를 잡아냈다고 한다. -
똑같은 상황을 서로 다르게 대처하는 각국의 특성을 표현한 조크지만 실제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하기야 우리만 해도 남과 북이 다르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다르고 한 솥밥을 먹는 식구들끼리도 저마다 생각이 다르니 오죽할까 싶다.
미국 유학과 중국, 일본에서 객원교수로 지낸 경험을 통해 제각각인 3국의 국민성을 체감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의 시행착오로 터득하게 된 지혜는 외국인과의 교류에서 자의적인 판단에만 기대다가는 아무리 선의적인 의도라도 낭패를 보기 쉽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궁금증에 빠지게 되는 두 이국 친구와의 절연과정도 비슷한 경험이다.
미국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몇 년이 걸려서야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됐던 일본인 교수는 평소 일본의 식민지배를 비판하는 내 주장을 들어줬다. 그런데 어느 날 더 이상 인연을 이을 수 없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다. 동경 대형 은행 부행장이셨던 그의 부친이 강력한 우익인사였다는데 혹시 서로 다른 ‘식민사관’의 가치관이 원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중국 북경대 교수와의 마지막은 지금도 미스테리다.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평소 친하게 지냈는데 세미나를 함께 하고 난 이후로 그와의 관계가 끊어졌다. 뭔가 나한테 섭섭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무엇이 잘못됐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서 답답하다. 당시 세미나 답례 차원으로 보낸 무선전화기와 자전거 선물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일까? (지금이라도 한번쯤 이유를 들어보고 싶은데 연락이 되질 않는다)
세계화 과정에서 각국의 특성에 대한 세밀한 조사를 대충하거나 알고 싶은 사항에만 관심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걸 강조하고 싶어 꺼낸 얘기다. 자기가 믿는 것만 확신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가문이나 종교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 남의 것을 무시하거나 무관심으로 이어진다면 때로 돌이킬 수 없는 과오의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경고 차원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바야흐로 가파르게 세계화를 향해 치닫고 있는 21세기다.
국가 간 치열한 경쟁을 통한 경제력으로 국제질서의 룰이 결정되고 있다.
어차피 우리나라처럼 자원이 없는 나라는 수출전략에 승부수를 걸어야 할 운명이다.
중요한 것은 상대국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준비하고 연구하고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는가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각국의 요즘 사태를 바라보며 해보는 생각들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는데 세계화에 대비한 우리의 노력들은 미약한 것 같아 솔직히 불안하다. 무엇보다 자라나는 세대들에 대한 준비과정에서 특별한 계획을 담은 움직임을 별로 볼 수 없어 안타깝고 걱정되는 게 사실이다.
미국 현지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학생들이 ‘우수하고 똑똑한데 자기 일에만 열심이고 미국에 온 지 오래됐어도 미국을 알고자 하는 의욕은 물론 공동체 생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평가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걱정해야 할 문제 아닌가 싶다.

세계화에 대한 기대감과 우려가 도처에 넘치고 있다.
그렇다고 세계화의 흐름이 거역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이상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대처해야 할 도전 역시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다. 처방을 찾는다면 세계에 대한 직간접적인 경험을 늘리고,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다국적 다문화 사회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 강화라 하겠다.
국민통합을 원동력으로 삼아 국가 경쟁력을 높이도록 하자.
그것이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돼야 할 국가발전 전략이 아닐까 싶다.

(2011 .3. 19)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18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성선설? 성악설?


성선설? 성악설?

“사람을 믿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황으로까지 몰고가면서 믿음을 요구하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셨으며 나의 맨토이셨던 고 이용남이사장님의 가르치심인데 솔직히 지금껏 그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한 채 가슴에 품고 있다. 그렇지만 한해 두해 세월의 무게를 더할수록 은사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진의에 점점 근접해 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더라도 ‘성선설, 성악설’에 관한 갈등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선과 악을 근거로 한 인간본성에 관한 철학적 고찰은 그래서 늘 의문부호가 따라붙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딱 떨어진 규정이 쉽지 않기에 시대를 막론하고 치열한 논쟁으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맹자, 순자(루소, 홉스)를 동원해도 별 차이가 없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는 당연히 성악설 편이어야 하지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만드셨을 당시엔 성선설이 맞지만 선악과로 죄를 지은 이후부터는 성악설을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블로그에서 천재지변의 공포 속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은 일본 국민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얘기한 바 있다.
질서정연하게 정부의 재난대처 주문에 따르는 일본국민의 인상적인 모습을 전 세계가 격찬했는데 간 나오토 총리의 오판으로 상황이 악화되된 사실이 알려지자 그들 역시 달라지는 것 같다.
부실 대응과 정보 은폐로 국민을 방사성 오염 위험에 빠뜨렸다며 정부에 대한 비판과 성토가 이어지고 있고 간 나오토 총리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까지 일어났다는 전언이다. (일부에선 사재기 현상도 있다고 한다)
日 국민의 변화는 무엇보다 정부의 신뢰상실이 주요인이라는 판단이다. 국민들이 더 이상 정부를 믿지 못하게 됐다는 생각에 이제부터는 스스로를 믿어야겠다고 생각한 결과라고 본다.
이 역시 한계점에 이르러 상황을 극복하기 어려울 때 드러나기 마련인 인간의 한 속성이라는 결론이다.
배고픔 때문에 절도범이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작동되는 차원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의 생존이 위협받을 때 자기 생존을 위해 다른 동물에 해를 끼치는 행위에 도덕적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은 입장이다.

어디까지 인간을 믿어야 하고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며 또 그로 인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의 형태에는 어떤 모습이 있을까....불행과 위기에 처한 일본인들의 심리변화를 지켜보면서 떠올린 생각이다.
명확하게 답을 내기 어려운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문제 역시 같은 시각에서 바라봐야 할 것 같다.
어느 단계까지는 선이 지배하지만 일정 단계를 지나면 인간도 인간보다는 동물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테레사 수녀같은, 신성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극소수의 예외 사항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신과 짐승의 중간지대에 놓여 있다는 말이 맞기는 맞는 것 같다.
결국 일본국민의 처세에서 보듯 양질의 교육이 한 인간을 국가나 사회에서 바람직한 구성원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만 반면, 아무리 훌륭한 트레이닝 과정을 거친 양질의 인간이라고 해도 극한상황에 처하게 되면 인간의 체면이나 신의를 고수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고 또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성공적인 리더십은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내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할 안목을 갖춘 용병술로 좌우된다는 생각이다. 바꿔 말하면 신뢰할 수 있는 이들로 하여금 자기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권한과 공간을 확보해 줄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인재활용 과정에서 특별히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체면이나 양심을 기대하는 것은 극소수의 대상을 제외하고는 무리인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리더의 과욕이 역효과를 초래하는 현실을 간 나오토 총리의 오류를 통해 목격하고 있다. 그의 무리한 욕심이 원전 방사능 수습 과정에서 일본 국민의 안위를 위기상황으로 내몬 결과가 됐다)

오늘의 고민은 이쯤에서 인간의 본질을 잘 이해할 수 있으면 선과 악의 경계에 지배받지 않고도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종결 짓도록 하겠다. 행복한 주말 되시길.

(2011. 3. 18)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15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21세기 소프트웨어

21세기 소프트웨어

우리에게 있어 늘 가깝고도 먼 나라였던 일본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지진, 쓰나미 그리고 원전폭발로 무장한 자연의 역습에 쑥대밭이 되고 만 것이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천방지축이었던 건지 왜소한 인간의 실체를 드러냈다고나 할까, 좌절감이 하늘을 덮는 부끄러움으로 밀려드는 순간이었다.
자연의 재앙 앞에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숙명을 절감한 경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극한상황 속에서도 허물을 벗고 비상하는 피조물의 위대한 저력을 목도하면서 좌절감이 조금은 희석되는 기분이었다.
위기상황 속에서 평상심을 잃지 않은 일본국민의 차분한 질서의식 덕분이었다.
놀라우리만치 차분하게 대응하는 일본 국민들이 모습이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아비규환 속에서도 남에게 부담이 될까봐 자기감정을 추스르며 타인에 대한 배려와 절제를 잃지 않는 위대한 정신력, 혼란의 와중에서 약탈이나 방화사건 한번 없이 일상의 질서를 유지하던 일본국민에게 지구촌 사람들이 마음을 뺏기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다.
문득 비슷한 정황이 일제 강점기 당시 전향했던 친일파들의 고백에도 묻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독립될 줄 몰랐고 또 일본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로 믿어졌다는 토로였는데 그들의 변명이 꼭 변명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느낌에 사로잡혔다.

일본 대사를 지냈던 지인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일본 국민 특유의 국민성을 화제로 삼은 적이 있다.
다른 이들보다는 일본을 더 깊숙이 들여다 본 경험이 있는 지인의 일성은 ‘일본을 절대 얕잡아 보지 말라’였다. 전자산업과 자동차 산업 부분에서 일본을 추월했다고 자만하다간 큰 코 다치게 될 거라는 경고였다. 일본을 이기려면 아직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면서 일본의 인성교육을 강조했다. 전후 잿더미가 된 일본이 세계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배경에는 이른바 기본적인 인성교육의 역할이 컸다는 얘기도 덧붙였는데 충분히 공감이 갔다. 유치원부터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자기 절제는 물론 철저한 질서의식을 인식시키는 교육이 오늘의 일본국민성을 정착시키는 일등공신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다수의 일본인 관광객이 목숨을 잃었던 부산 화재사건 당시에도 그들은 특유의 침착성을 보여준 바 있다. 부산 현장을 찾아온 유가족들이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고인에)신경 써달라’는 취지의 발언 외에는 별다른 요구 없이 면담을 끝냈던 것 같다.
미국의 LA폭동 당시의 혼란을 떠올리면 저절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본의 현 상황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는데도 무법천지라도 되는 양 약탈과 방화가 LA거리를 공포에 몰아넣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결국은 국격의 문제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 국민의 선진의식은 칭송받을 만 하다.
하지만 우리의 국가적 자부심 역시 일본의 저력 못지않다는 생각이다.
정신대 피해자였던 할머니까지 나서서 도움의 손길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의 일본 돕기는 내게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일본의 불행에 구원에도 불구하고 발 빠른 인류애로 대처한 대한민국 국민이 있는 한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격은 그 기치를 높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기업도 학교도 국가도 결국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 웨어의 우수성이 더 중요해진 시대를 살고 있다.
국격의 중요성도 그만큼 더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더불어 산다는 생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를 일상화 하도록 해야겠다.
그것이 선진국민에 요구되는 소프트웨어 아닐까 싶다.


(2011 . 3. 15)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14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는개


는개


- 홍문종 -



이른아침
창가에 살며시
놓고간
하늘 선물
는개


아무도
알지못하게
내려놓은
사랑 선물
는개


안개가
기쁨의 눈망울을
훔치고
말도 못하는 선물
는개


이슬비가
환희의 대지를
간지르며
기다렸다는 선물
는개


가고 오는
삶의 여정에
안개
는개
그리고 이슬비


먼 추억의
고향으로 부터
안개 사랑비
는개 사랑비
그리고 이슬비 사랑비

2011.3.15

*는개: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

2011년 3월 13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착각이 비극을 부를 수도


착각이 비극을 부를 수도

세상이 좁아졌다.
전 세계 각국의 사건 사고 소식이 실시간으로 안방에 전달되고 있다.
그만큼 신경 쓰이는 일이나 걱정거리가 느는 부작용도 있다. 지구촌 가족이라는 말이 정말로 실감나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지진과 쓰나미가 던져준 충격으로 황망해 하던 판이다.
그런데 조만간 시민군에게 항복하고 무바라크의 뒤를 이을 것으로 전망했던 카다피가 되살아나 활개를 치고 있는 전황은 반갑지 않다.
카다피 정부군이 민간인 주거지역과 이슬람 사원, 병원까지 무차별 포격을 가하는 등 일방적인 살육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 덕분에 수세에 몰려있던 카다피의 친위부대가 반격에 성공해 주요 도시를 점거하고 기세등등해 있는 모습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그동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멋대로 굴던 카다피를 떠올리면 그의 건재 자체가 공포라고 할 수 있다. 국제 사회의 기본 질서는 물론 자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도 개념을 갖추지 못하고 폭력 정치를 휘두르던 그였다.
42년을 누려온 독재의 단맛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집요한 권력욕은 생각만 해도 혐오스럽다. 국민의 존재를 권력 존속의 도구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 그의 통치관을 미뤄봤을 때 리비아 국민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불행한 상황인지 짐작이 간다.
국민을 무참하게 살육하고도 일말의 가책조차 없는 그를 보면 의식구조 자체가 온전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당연히 카다피의 어리석은 행태를 제어하는 국제사회의 제재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더 이상의 패악을 부리지 못하도록 국제사회의 단호하고도 발 빠른 대응책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가 이를 제어하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이 세상에 여러 형태의 범죄가 있지만 이렇게 무고한 국민을 살상하는 분탕질은 죄질이 더 나쁘다.
국제사회의 결집된 힘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후안무치의 독재자는 마땅히 그 활동영역을 제한하는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겠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국제질서를 어지럽히는 망발들이 용납되거나 비호를 받는 눈치이고 보니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기분이다.

국제문제는 옳고 그름의 사안을 따져 판단하기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넘겨지는 경우가 허다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리비아 사태의 경우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카다피의 만행이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단결된 의견을 모으기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경제적인 손익계산 측면에서 감수해야 할 것들을 보더라도 그렇게 손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어떤 불이익이 있더라도 그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이 문제 만큼은 국제사회의 역할이 있어야 해결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리비아 국민을 위하고 이 지구상에 온전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카다피 같은 독재자의 출몰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라도 국제사회가 나서서 결연한 의지를 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독재자로 지목되는 모든 지도자는 카다피 같은 독재의 오류를 범할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독재의 비극이 자기 자신의 치명적인 결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독재행위를 훌륭한 지도자의 덕목을 실천하고 있다고 믿어버리는 독재자의 착각이 빚는 비극도 역사 속에서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어찌됐든 카다피의 행보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
카다피를 퇴진시키지 못하면 무엇보다 비슷한 행태로 주목 받고 있는 북한의 김정일이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엉뚱한 희망을 품게 될까봐 걱정이다. 카다피 체제를 리비아의 볼리바르식 혁명이라고 칭송하며 중재를 자처하는 베네수웰라의 차베스의 자화자찬에서도 언뜻 그런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독재자 카다피에 대한 국제사회의 퇴진 압박이 이어지고 있어 다행이다.
실제로 유엔과 유럽연합 등 국제사회가 카다피 제재 움직임에 나서고 있고 리비아의 시민혁명군을 리비아 국민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거나 또 프랑스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비행금지구역을 설정, 카다피 측 공군기가 뜨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가 이뤄지기도 했다.

지도자의 착각이 생각보다 더 큰 비극을 초래하는 빌미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개관적 평가기준이야말로 지도자가 갖춰야 할 귀한 덕목일 수도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필귀정의 진리가 이번 리비아 사태에서도 제대로 된 힘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1. 3. 13)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자연의 역습

자연의 역습


대참화다.
140년 만이라는 최악의 강진과 쓰나미가 일본을 초토화 시켰다.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혼돈으로 뒤엉키며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무섭고도 놀라운 전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재산피해도 피해지만 희생된 인명 규모가 시간이 지날수록 늘고 있으니 걱정이다.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연의 역습에 처절히 찢긴 도시의 모습이 무언의 압력이 되어 공포를 조장하는 것 같다. 상상 속에 머물러 있던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나 폼페이 최후 당시의 엄청난 공포 상황을 체감하는 기분이다.
자연 재앙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실감하면서 스스로를 되짚어 살피게 되는 마음이다.

일본의 이번 참사를 두고 여러 해석이 분분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문제는 인간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결론이다. 무지에서였건 오만에서였건 자연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던 인간의 불찰을 이번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인간이 그동안 자연에 했던 몹쓸 짓이나 하늘의 뜻을 어기고 인간 위주의 삶을 살았거나 했던 행위들에 대한 반성과 두려움을 갖게 하는 계기로 작용되는 것 같다.
교회에서 장로직분을 맡고 계신 어머니는 “패역한 세태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이번 사태를 걱정하셨다. 제각각 외국에 나가있는 아이들은 전화로 ”기도를 많이 해야 하나 봐요“라고 하거나 ”기도를 많이 해 달라“며 안위를 전해왔다. (동경에 있는 딸은 다시 통화를 시도하니 연결이 안돼 못내 불안한 심정이다) 또 누군가는 ‘말세 징조’로 못을 박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번 재난을 일본에 국한된 불행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두려움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두려움의 강도는 대상을 알 수 없는 불시의 역습일 때 극대화 되는 성향이 있다. 언제 시작될지, 어떤 과정을 거칠게 될지 어느 정도의 강도일지 더구나 해결책도 불투명한 상태에서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지난 밤 잠자리를 설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말세의 기록이 존재했던 것 같다.
누구도 말세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의 반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야의 달력이나 주역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비롯해서 심지어 성경에도 지구 최후의 모습이 기록돼 있을 정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늘의 존재에 대한 개념은 점점 더 확실해지는 것 같은데 하늘의 뜻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져있다. 공자는 나이 50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했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여전히 하늘의 뜻을 묻고 있는 나는 뭘까, 싶기도 하다. 하늘의 뜻이 헷갈릴 때가 많아질수록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하늘의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갈수록 분명해 지는 건 있다.
자기 마음에 비춰 하늘의 이해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하늘이 내 편을 들어 도와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아마도 그런 순간이 저마다에 있어서 하늘의 뜻이고 하늘의 소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갈수록 커지는 것 같다.


마구잡이로 돌아가는 세상일을 보면 정말 말세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돼 있는 인간의 숙명적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말세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거나 특별한 삶의 지침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종말론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생을 진지하게 관리해야 할 책임이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하늘의 뜻에 합당한 참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바쁜 일상을 핑계로 하늘의 뜻을 헤아릴 여유를 갖지 못하거나 그 자체를 귀찮아하는 모습을 주목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영위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경시하는 풍조로 이어진다는 측면에서 한번쯤 되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전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늘의 진노는 무섭다.
더 이상의 피해가 확산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는 경험이다.


(2011.3.12)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10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장&하이 스캔들

장&하이 스캔들

두 개의 성 스캔들이 연일 대한민국을 달구고 있다.
‘상하이 스캔들’이니 ‘장자연 리스트’니 하는 막장 드라마가 그것이다.
‘장자연 리스트’는 남자들의 그릇된 성문화에 인권을 유린당하던 여배우가 죽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알린 피맺힌 기록이라면 ‘상하이 스캔들’은 그 자신의 성을 무기 삼아 대한민국 엘리트 남자 여럿을 손아귀에 넣고 흔드는 파렴치한 행각을 들킨 이국 여성의 기록이다.
상대 남자들의 경우, 대한민국 상위 1%니 엘리트니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자신을 치장할 정도의 사람들이었지만 모두가 성적 본능 앞에서 수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실이 백방에 알려지면서 이제 명함도 못 내밀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스캔들 정국을 보면서 오래 전 들었던 한 선배 국회의원의 조언을 생각했다.
탁월한 선견지명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까지 함께 담아서.
초선 국회의원 시절, 선배 의원들로부터 조언을 듣는 기회가 많았는데 국회 부의장을 연임하셨던 C 전의원이 해주신 말씀이다. 이른 바 ‘국회의원이 되면 3가지 ’끝‘을 조심해야 한다’는 요지의 조언이었는데 말(혀끝), 뇌물(손끝), 그리고 여자(신체의 주요부분 끝)을 경계해서 낭패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이셨다.(그러면서도 세상의 절반인 여성과의 동반은 불가피한 일이고 어느 경우에는 여성의 긍정적인 특성을 감안하면 관계설정 방식에 따라 여성이 더 훌륭한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는 귀띔도 덧붙이셨다)
그 때는 웃고 넘겼지만 선배님이 당시 우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조언을 해주셨는지 알겠다. 실제로 지금 눈앞에서 그 ‘세 끝’ 중 하나를 잘못 관리하는 바람에 패가망신 위기에 전전긍긍하거나 이미 패가망신이 진행 중인 소위 잘난 남자’들의 모습을 목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성 스캔들은 인류사회와 그 궤를 같이 해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밀접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3천년 전, 에게해를 배경으로 10년동안 치러졌던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 왕비 헬레나가 벌인 불륜의 도피 행각이 발단이 됐다. 사랑 때문에 자명고를 찢어 조국을 배반하고 적진의 연인을 도운 낙랑공주의 슬픔도 일종의 성스캔들로 인해 빚어진 비극이다. 클레오파트라나 측천무후처럼 여성이 性으로 남권 사회를 지배했던 사례가 적지 않게 동서고금을 넘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인간의 본능 앞에서 성 모럴이 무기력한 존재감을 내보이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성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시대에 따라 그 가치관을 달리해 왔던 배경도 성모럴 해이를 부축인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고 보면 무조건 매도할 수만도 없다는 망설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도처가 치열한 포르노의 경쟁처처럼 되어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심히 우려스럽다.
갈수록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는 성 범죄 현황도 이런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정제되지 않은 성관련 문화의 남발이 성적문란을 부축이는 주범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강한 자극에 단련되다보니 점점 더 큰 강도의 자극이 필요한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현상과 다르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장자연 리스트를 통해 드러나는 갖가지 엽기적인 성적문란 작태도 이 같은 분위기로 인해 야기된 필연적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개인의 성적 자유를 억압하자는 고루한 주장을 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개인의 성적 자유가 사회적 가치를 흔드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생각만큼은 분명히 갖고 있다.
빠르게 급변하는 사회적 여건에 무조건 순응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금도만큼은 불문율로 지켜야한다.
그것이 인간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는 절박감을 놓지 말자.
차별화된 인간의 영역을 함부로 훼손하게 되는 결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대처했으면 한다.

구체적인 정황이야 결말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지금 나오는 내용만 가지고도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는 지경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한편으로는 리얼하게 드러나는 남자들의 뻔뻔하고 어이없는 ‘짓’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 개탄스런 현실 앞에서 분노가 치민다.
그렇다고 연일 방송과 신문 지면을 도배하며 중계되고 있는 두 사건의 전말을 나까지 나서서 전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부도덕성의 임계점을 넘은 우리 사회의 性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라는 점에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마음이다.
우선은 두 스캔들에 대한 관계 당국의 철저한 수사의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관계 당국은 관련 인사들을 어떤 형태로라도 비호할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장자연 편지에서 필체가 틀리느니 어쩌느니 하는 경찰 측 발표나 상하이 스캔들 연루자가 이러저러한 핑계를 끌어대는 모습에 행여 다른 의도가 포함돼 있지 않기 바란다. 온 국민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한 수사 결과를 기대하는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번 스캔들로 상처입은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

(2011.3.11)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8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新 손자병법

新 손자병법

며칠 전 수도권 일대에서 휴대전화와 네비게이션 등의 수신 장애로 일대 혼란에 빠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북한이 발사한 GPS 교란전파가 그 원인이어서 충격을 주고 있다. GPS 교란 전파를 발사해서 위성 장비는 물론 포병부대 계측기의 장애까지 유도할 정도라면 항공기나 금융망 사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동안 군사력에 있어 북한이 우리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자만심에 빠져있었던 우리로서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아닐 수 없다. 급기야 우리 정부가 북한의 GPS 전파 교란 행위에 대한 제재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겠다고 나선다는데 깔보던 상대에게 얻어맞고 구조를 청하는 모습이어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북한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라며 느긋하던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말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는데 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우리로서는 패배를 자초한 우를 범한 셈이다.

그 어느 때보다 안보 불안에 대한 우려가 높은 시점이어서 인지 이번 사태를 우려스럽게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 적지 않은 국민들이 북한의 전자전을 불안해하는 것도 사실이다.
자동차나 전자 시장이 우위를 점하면서 스스로의 경제력을 과신했던 점이 화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 특히 여권 내 정치권 인사들의 도를 넘는 북한 경시 의식이 내부의 문제점 해결을 간과하도록 부축인 경향이 크다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 탱크나 전투기 등 대칭전력은 몰라도 특수부대, 핵, 전자전 같은 비대칭전력 만큼은 북한이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있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해야겠다.
북한의 트레이닝 상황은 우리가 예측하거나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견고하게 트레이닝 된 상태가 아닐까 싶다.
북한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정황들만으로 북한의 '포기‘를 낙관할 수 없다는 것을 이번에 확실히 체득했다는 생각이다.

지금 전체적으로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정도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실질적인 국민 만족도나 국가에 대한 헌신도가 굉장히 떨어져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일정정도 정부의 대북전략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일방적인 퍼주기도 문제지만 무시 일변도의 강경 대응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늘에서 감 떨어지듯, 시간이 지나면 북한을 흡수통일 할 수 있게 될 거라는 계산은 시대착오적이었다는 점이 보다 명백해졌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민간단체가 구상하고 있는 많은 계획들도 다시한번 심사숙고해서 실행에 옮겨야 할 것이다.
자칫 독이 올라있는 북한을 자극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솔직히 있다. 더구나 북한 측이 이번 행사에 대해 조준사격 운운하며 반발하고 있는 만큼 자제가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무엇보다 지역주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벼랑 끝에 몰린 북한을 자극하기 보다 적당히 '치고 빠지는' 지혜로운 처신이 가능한 新 손자병법이라도 강구할 수 있었으면 한다.
미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들의 첨예하게 얽혀있는 이해관계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할 대상임을 잊지 말자.
지나친 염려일지 모르겠으나 ‘중국은 북한 편을, 미국은 남한 편을 들어 줄 것’이라는 고정된 생각조차 위험할 수 있다.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계산들로 인한 변수의 고려 없이 우리의 미래를 재단할 수 없음이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 내부의 문제들을 둘러보고 심도있게 고민해 볼 시점이다.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꼼수나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사심을 버리고 진정성 있는 자세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머리를 쥐어짜도 모자랄 판에 더 이상 몰염치한 모습으로 도탄에 빠진 국민들을 실망시키는 정치권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2011. 3. 8)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6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희망설계


희망설계

중국 전국인민대표(우리의 국회 기능) 2900여 명 중 38명이 억만장자라는 뉴스가 인터넷에 떴다. 그러려니 할 수도 있는 일이 굳이 해외 뉴스로까지 부각된 배경엔 중국 사회의 부패한 현실을 질타하는 시각이 들어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아도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다’는 중국 관가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는 ‘꽌시’ 관행은 유명하다. 인맥으로 기존의 법질서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관행이 암묵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다섯 명만 거치면 최고위층을 접촉하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부패에 찌든 특권층 부패와 빈부격차에 대한 불만으로 중국민들의 불만이 거의 폭발 직전에 놓여있는 상황이다.
이런 사정이고 보니 중국 당국이 중동의 '시민혁명' 여파를 우려하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최근 원자바오 총리가 전인대회 업무보고를 통해 지도층의 부정부패 척결의지를 표명하고 분배 정책으로 빈부 격차를 해소하는 등 민생을 챙기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나선 것도 민심수습 차원일 가능성이 크다.

부정부패의 어두운 고리에서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전방위적으로 이뤄지는 총체적인 부정부패는 갈수록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급기야 이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한 느낌이다.
흔히들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 위를 줄타기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부정부패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권력의 속성을 드러낸 단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수없이 많은 정치인들이 담장 위에서 교도소로 추락해 영어의 몸이 되었고 지금도 적지 않은 수의 전직 정치인이 수감돼 있는 현실이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직에 있을 당시 일명 ‘함바집 대형 로비 사건’에 연루돼 파문을 일으킨 한 경찰 총수의 경우,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 수뇌부들이 줄줄이 굴비 엮이듯 얼굴을 드러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아무래도 사법부 부패가 아닐까 싶다.
최근 기업회생의 고삐를 쥔 광주지법의 부장판사가 친형을 소속 관리 감사로 선임, 직권을 남용한 혐의가 알려졌는데 ‘스폰서 검사’ 사건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지만 사회적 파장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사법부의 비리는 여타 비리와는 다른 상징적 측면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많이 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정치권과 경제계에 요구하는 도덕적 잣대는 낮은 기준치인데 반해 사법부에는 확실히 현격히 다른 국민적 요구가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은 사법부가 이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의 하나라는 인식이 작용하기 때문인 것 같다.
파문의 당사자인 광주지법 부장판사의 한심한 작태는 여러 면에서 문제를 이어갈까 걱정스럽다. 지금까지 재판정에 섰던 수많은 사람들이 법원과 판사들의 부당성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거나 비난한다 해도 스스로를 해명할 방법이 없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언제부터 누구의 잘못으로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도덕 불감증이 사회악의 근원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나 연일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해서 반복하는 행태는 심각하다 할 것이다.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에 가장 유해한 것은 천민정신이라고 했는데 그의 혜안에 공감한다.
부정부패, 부와 권력의 편중, 그리고 기득권의 천박한 탐욕이 지배하는 국가가 희망의 여지를 가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시민 혁명의 시발지인 튀니지를 시작으로 알제리, 이집트 등 국민 저항에 두손을 들고 쫓겨나는 국가수반의 부패 정도가 베일을 벗길수록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바다. 부패한 권력을 향유하다 망명지인 낯선 이국 땅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필리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낙후된 필리핀 경제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현상과 같다.
중국 국민당 장제스 군대가 공산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한 것도, 세계 4위인 막강한 전력의 50만 월남군이 18만 월맹군에 일패도지한 것도 모두 지도층의 부정부패가 결정적 패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사회적 책무를 느끼는 나로서는 여러 가지가 고민스럽다.
한기총이나 조계종 내분으로 불거진 종교계의 권력 다툼이나 스스로를 면제해주는 ‘로비법안’을 통과시켜버린 몰염치한 국회의원들의 행각 등 어느 곳도 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그렇더라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부정부패의 고리를 결연히 끊어 버리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다시 시작해보는 거다.
우선은 지금까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고 문제가 있다면 혁명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의지로 새 출발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자.
각자의 분야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미래를 향해 시작해 보는 거다.
그렇게 처음부터 차근차근 백지 위에 대한민국의 희망을 설계해 보자.
마음을 모아보자.

(2011. 3. 6)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4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춘래 불사춘

춘래 불사춘

봄이 왔다.
山은 물 올리느라 수런거리는 나무들의 기척으로, 江은 따뜻한 햇살에 젖어 반짝이는 짤랑거림으로 봄을 노래하고 있다.
완연한 봄이다.
혹독했던 겨울 추위가 언제 적 기억인지 싶게 가물가물 하다.
회한과 불안에 서성거리던 그 숱한 불면의 밤들을 일방에 날려버리는 봄의 위력을 본다.
그러면서 시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현실의 무게를 덜어낼 줄 알았던 선인들의 지혜에 무릎을 치게 된다.

이렇게 봄이 오게 돼 있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그동안 거의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이는 인간사를 통해서도 흔히 하게 되는 경험이다.
사단이 난 다음에서야 뒤늦게 허겁지겁 아둔한 자신의 실책을 후회하는 패착의 역사가 어제 오늘 만의 일이 아니다.
정의와 진리가 반드시 이기게 돼 있고 민심을 거스르는 정권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순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보아 온 우리의 오랜 불문율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춘래 불사춘, 여전히 동토의 왕국이니 큰일이다.
물가대란, 전세대란 때문에 뒤숭숭한 민심이 가뜩이나 그늘진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삶에 지친 이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건만 정부 부처에서는 별다른 대처 방안을 내놓지 못하는 형국이다. 과도한 고환율,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만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경제지표 하나에 정권의 성공 여부가 달려있는 것처럼 말이다.
환율 덕분에 대기업들이 해외에서 엄청나게 벌어들이고 있다지만 따지고 보면 좋아할 일이 아니다. 주식의 50%를 해외 주주가 점유하고 있는 대기업 실상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국부 유출일 뿐이다. 과도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은 중소기업을 피폐하게 만드는 주범이 되고 있다.
엇박자 행정의 폐해를 아무리 외쳐도 귀 기울이려는 의지조차 없으니 큰일이다.
아무런 제약도 없이 활개를 치도록 방기하고 있다.

가난하고 힘없어 버려진 이웃들의 볼멘소리가 내 마음에 깊은 우물을 파 놓았다.
점점 더 극명해지는 사회적 양극화와 갈수록 그 깊이를 더하고 있는 소외계층의 결핍감은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할 문제다.
급기야 더 이상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분위기인데 당국의 대응은 지나치게 안일하기만 하다. 겨울이 봄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밀려나듯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불균형들이 나라 전체의 어려움을 초래하는 소용돌이가 될 것 같아 초조하기까지 하다.
이런 걱정들이 어설픈 예측으로 끝나게 되길 바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문제이니만큼 기우로 그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설사 적합한 해결책이 있다고 해도 자기 아집에 갇혀 자꾸 실기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민심이 이 정부를 떠나는 것 같아 걱정이다.
차기 리더들의 화끈하고 간결한 해법을 기대하면서 그 기대감으로 상실감을 달래고 있는 것 같다.
복지가 차기 대선의 화두가 된 만큼 민심이 차기 리더들에게 요구하는 가장 민감한 주문은 아무래도 지역과 계층 간 격차해소를 위한 해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달리고 싶은데 달리지 못하고 있다.
화두가 분명하고 그 화두의 해결 없이는 대한민국의 21세기는 없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고 있으면서도 미적거리고 있는 개인적 상황이 불만스럽다. 유래 없는 한파를 뛰어 넘어 우리 곁을 찾아온 봄의 실체를 보면서도 나는 지금 스스로에게 누를 끼치고 있는 셈이다.
개인적 소신과 신념을 방치하고 있는 스스로의 미욱함을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미진한 여진을 탓할 수 있으려나.

(2011.3.5)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3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용틀임 시작이다

용틀임 시작이다

오늘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행정대학원) 동문 모임에서 감투를 썼다.
이우철 동문과 최홍건 동문 등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신임회장에 피택된 것이다.
사실 이 두 분은 선임 회장인데다 하바드 재학 시 막역한 관계가 작용돼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하바드 시절 20대인 나와 30대인 이우철 회장님 그리고 최홍건 회장님은 40대였지만 세대차이 없이 매일 붙어 지내다시피 한 사이다)
회장직을 수락하는 순간 두 가지 상념이 머릿 속을 스쳐갔다.
‘이제 나도 (동문 회장을 맡을 정도로) 나이를 먹었구나’하는 현실인식과 ‘일복이 터지겠군’ 하는 책임의식의 발로가 그것이었는데 앞으로 회장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내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했다.
개인적으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치열한 경쟁 구도를 거친 건 아니지만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정도는 되는 결과라고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버드 교정을 떠난 지 어언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동문 회장으로 추대될 정도가 됐다는 건 최소한 그동안의 내 삶이 함부로 살지 않았다는 증표가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삶에 영향을 미친 몇 건의 이벤트가 있었다.
하버드와의 인연도 그 중 하나다.
1982년, 찰스강을 건너 하버드 야드로 들어설 때의 그 벅찬 감동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생생한 기억이다.
물론 그 때 말고도 크고 작은 울림으로 내 삶의 과정을 충만하게 채워주던 감동의 순간은 많았다.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라던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을 때, 그리고 한나라당 경기도당 위원장이 됐을 때도, 그리고 어릴 때로 돌아가면 선거에서 이겨 의정부시 대학생회 회장(40여년 전에는 그런 타이틀도 있었다)이 됐을 때의 감격 등이 그런 순간이다. (그런데 내 인생을 돌아보면 결과물보다 성취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과정이 감동을 극대화시키는 특이한 경우가 적지 않은데 기회가 되면 따로 피력해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드와 대면하던 그 첫 순간은 유난히 강렬한 삶의 기억이 되어 저장돼 있다. 밤을 새워 공부하던 기억조차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그 시절, 그 때처럼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청춘의 정열과 함께 했던 시기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고건 전총리 등 많은 인재들과 동문수학하며 귀한 인연을 맺었고 DJ, YS를 비롯해서 케네디, 두카키스, 아키노 등 수많은 국내외 저명인사들을 접하며 꿈을 키우던 청년 시절의 내가 있던 그곳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

지금부터 앞으로 내 삶의 15년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승패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고 또 그것이 생의 마지막 날 내가 받아들 성적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 지금부터 내 인생의 프라임 타임이 시작되고 있다는 이 느낌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용틀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열정과 진정성을 무기 삼아 이 용틀임이 확실한 방점을 찍는 모멘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문득 하버드에서 꿈을 키우던 그 시절의 ‘홍문종’으로 되돌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뛴다.

PS:뛰는 가슴을 안고 도봉산에 올라 내 남은 생애와 그리고 나와 연관된 모든 인연들을 위해 기도했다.
하느님, 도와 주세요 라고.


(2011. 3. 3)
...홍문종 생각

2011년 3월 2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同志

同志

이석제 전 감사원장의 부음을 신문 부고란을 통해 접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5.16 거사에 나서도록 설득한 인물로 알려진 그는 개인적인 친분보다는 가친께서 동향인이라는 이유로 관심을 갖는 분이어서 알고 있는 정도다.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갑자기 그의 삶이 조명되고 세간의 이목이 쏠리는 분위기다.
처음에는 초야에 묻혀 조용한 노후를 보내던 고인의 생전을 감안하면 유별나다싶을 정도여서 의아했다.
그러나 곧 의문이 풀렸다.
권력의 핵심 실세였음에도 평생을 흐트러짐 없이 살다간 그의 족적을 살피다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형적인 부와 화려함은 없었어도 향기 충만한 그의 삶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그에게 군인으로서는 물론, 고위 공직자로서도 비범한 삶을 실천한 ‘참 인간’이라는 평가가 따라 붙고 있었는데 그를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며 수긍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죽기를 각오하고 거사에 나설 혁명당시의 초심을 잃지 않고 박전대통령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가하면 청빈하고 유능한 공직자의 표본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그의 삶이 조명받는 이유인 듯했다.
실제로 그가 혁명 직후 총독부 시절 법과 군정 당시 영어로 만들어진 법 등 수천 건에 달하는 법령정비로 사법 사상 가장 중요한 개혁을 결행하거나 공무원직제, 연금법, 공무원공개채용, 승진시험 등을 도입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운 공적은 두고두고 회자될 가치가 충분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평생 자기 절제의 기조를 잃지 않았던 그의 삶은 부정부패와 무능에 찌든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혁명을 해야 한다던 자기주장의 당위성을 뒷받침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라는 생각이다.
이런 그가 있었기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5.16 혁명이 많은 공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부흥시키고 기초를 놓았다는 당위성으로 평가받을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에서 사람과의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역사의 현장에도 뜻을 이루고자 했던 모든 시도에는 죽음을 불사하는 최선의 열정과 마음을 함께 한 조력자들의 결집된 힘이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박 전대통령이 5.16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도 고인을 비롯한 동지들의 뒷받침이 있었다. 스탈린도 소련 공산당의 탁월한 이론가이자 저술가인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의 조력이 없었다면 트로츠키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기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체 게바라가 아니었다면 쿠바의 공산정권 수립은 어려웠을 것이고 오늘 날 북한의 김정일과 함께 지구상 가장 폐쇄된 국가의 독재자로 유명한 카스트로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 역시 삼봉 정도전의 천재성이 도왔기 때문에 조선 건국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정도전과의 콤비 플레이가 없었다면 그의 꿈은 한낱 물거품에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세조가 정권 찬탈에 나서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한명회를 비롯한 열렬 지지자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목숨 바쳐 뜻을 같이 하겠다는 동지의 존재가 가장 필요하고 또 중요한 것 같다. 목숨을 바칠만한 명분과 이유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건 물론이다.

21세기가 되면서 목숨 바쳐 추구해야 할 장엄한 국가적 아젠다의 명분이 희미해지면서 사람들이 승부근성을 잃고 점점 나약해지는 분위기다.
그러나 아직도 민족의 과제인 통일과업이 남아있는 우리로서는 경계해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극복해야 할 북한의 존재를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되겠다.
고인이 신념을 위해 혁명을 결행하던 그때처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분연히 떨치고 나설 수 있는 진정한 용기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런 용기와 신념을 가진 지도자의 출몰이 너무나 간절해지는 이 즈음, 진정한 지도자의 사표를 남기고 떠난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11. 3. 2)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