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0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음모론

음모론

사방이 음모론으로 뒤숭숭하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있는 인간관계 특성 때문인지 살아가면서 음모론과의 조우는 불가피한 것 같다.
샹하이 스캔들도 장자연 리스트도 심지어 리비아의 카다피, 일본 원전사고까지도 세상이 온통 음모론에 휘말린 모양새다.

음모론은 사안의 전모가 밝혀지기까지 진위여부를 가리기 힘든 특성이 있다.
때론 그대로 진실이 묻혀버리기도 한다.
미국의 외교문건 등 핵폭탄급 폭로로 권력의 추악한 이면을 파헤치며 전 세계를 강타했던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샌지와 그 입을 막으려고 그를 성추행범, 마약 중독자 등의 파렴치범으로 몰아 감옥에 가두던 권력의 집요한 음해공작을 기억할 것이다. 이런 경우가 전형적인 음모론의 예로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걔 중에는 특정인을 음해할 목적으로 음모론을 들고 나왔다 스스로가 당하는 경우도 있고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음모론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샹하이’나 ‘장자연’이나 ‘카다피’ 등의 검색어로 세간의 이목을 끄는 사건에서 거론되는 음모론은 주객이 전도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진상이 밝혀지면 도둑 맞았다고 외치는 쪽이 도둑이 되는 해프닝으로 끝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그렇지만 진짜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음모의 덫에 걸려 가진 것은 물론 목숨까지 빼앗기는 억울함이 문제다.
이런 경우야 말로 진실을 가리고자 하는 사회적 관심이 집중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억울함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피를 토하고 죽고 싶다’며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싶다.
고인이 된 내 동생도 작고하기 직전까지 기록했던 (마주할 때마다 울컥하게 만드는)비망록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글을 남겼다.
형인 나와의 추억을 회고하면서 ‘그 때 없어졌던 돈은 형이 생각하기에도 나밖에 가져갈 사람이 없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정황이라는 것은 알지만 돈을 가져가지 않은 나는 너무 억울하다’라고 적어 놓은 것이다.
비록 오해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억울함이 동생을 얼마나 부담스럽게 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하물며 의도된 음모의 희생물이 된 처지라면 그 억울함의 강도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한다고 해도 대부분의 음모는 결국 그 꼬리를 드러내게 돼 있다.
음모의 실체가 밝혀지면 그로 인한 누명도 벗을 수 있게 되지만 안타까운 건 끝내 정상적인 ‘복귀’가 이뤄질 수 없는 현실이다. 억울한 사정을 풀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위안할 수 있겠지만 못할 짓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진상이 밝혀진다 한들, 음모의 주체는 물론 그 음모에 부화뇌동 했던 이들의 ‘사죄와 반성’이 이어진다 한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함에 상처받고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개인적으로 하도 많은 음모에 시달리다보니 음모에 관한 한 거의 달인의 경지를 자처하는 입장에서)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다.

진실은 승리하게 돼 있다.
무엇보다 이로 인해 주변에서 크게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아픈 시간들이 마냥 무용하기만한 건 아니라는데 위안을 얻으면 어떨까 싶다.


(2011. 3. 20)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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