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2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비상의 순간

비상의 순간

경칩도 춘분도 다 지나갔는데 느닷없이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설악산을 눈으로 접수하는 것도 모자라 내일 아침엔 영하 6도의 강추위로 출근길 장악에 나선다는 예고다.
며칠 간 화사하게 피어오르던 봄기운을 언제 그랬냐싶게 저만치 밀어내 버리고 도로 겨울을 불러들이는 모양새다.
갑작스런 한파에 곳곳에 감기환자가 속출하고 있다. 봄날의 꽃들을 시샘해 심술을 부린다는 꽃샘추위에 사람들까지 고생인 형국이다.
어린 시절의 꽃샘추위는 유난히 매웠던 기억이다. 긴 겨울 동안 묶여 있다가 따뜻한 봄 햇살 아래에서 뛰어 놀 생각에 부풀어 오르던 우리들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곤 했다.
어머니께서 꽃샘추위를 ‘미운추위’라고 하시던 것도 생각난다. 추운 겨울 동안 꽁꽁 싸매 지켜낸 자식들이 방심하다가 행여 감기라도 걸리게 될까 노심초사하던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어머니의 모습이 아스라하다.

인간사에서도 종종 꽃샘추위를 만나게 된다.
시기와 질투로 뭉쳐진 공격이 그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괜한 게 아니다.
남이 잘되면 이를 시샘하고 방해해서 어떻게 해서든 망치고 싶어하는 부류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살아가면서 그런 악연은 피해야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 것 역시 자연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는 모함이 따른다. 일종의 패키지 상품 같다. 인간사이의 ‘관계’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시샘이나 모함을 당하는 입장이 문제다. 치명적이어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될 가능성 때문이다.
봄기운에 싹을 틔우거나 꽃망울을 터뜨리며 화려한 꿈을 펼치려다가 꽃샘추위의 습격을 받고 움츠러들거나 시들어버리는 봄꽃의 신세가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들의 삶에도 春來 不似春의 지혜를 새겨야 할 순간들이 존재한다.
갑작스런 추위에 이제 막 동면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 개구리가 동사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꽃샘추위의 횡포를 탓해 봤자다.
물론 경칩이 지나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개구리 잘못은 아니다.
그렇지만 추위에 취약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개구리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는 게 세상 이치 아닐까 싶다.
그래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활약할 순서라는 확신이 있어도 반대하거나 시샘할 주변의 가능성을 점검하고 이에 대비하는 철저함이 말이다. 방심은 금물이다. 자칫 봄을 맞기 위해 겨우내내 준비하고 노력한 결과물들을 일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봄의 출몰을 예고하는 전주곡일 뿐 꽃샘추위에 그 이상의 의미나 역할은 없다.
그래서 저마다 마음 속에 희망을 담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봄을 맞겠다는 성급함 보다는 겸허함과 여유로움으로 때를 기다려야 한다.
더 큰 비상을 위해 그 순간 맛보게 될 환희와 설레임을 잠시 유보하면 된다.
어차피 지금까지 인내하며 잘 익혀온 시간들인데 그 정도의 기다림을 참지 못할 바 없다.

때가 되면 만물은 소생하게 돼 있고 개나리와 진달래도 그 꽃망울들을 힘차게 터뜨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
아무도 비발디의 화려한 음색을 반주삼아 세상을 깨우는 대지의 합창을 막지 못할 테니까.
비상하는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2011. 3. 22)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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