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함께 부르자


함께 부르자


'강남스타일'  신드롬의  주인공 가수 싸이가 미국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기자회견장에서 “음악 다음으로 자신있는 것이 음주”라며 “한국의 주류문화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외국의 유명 스타들이 자신의 ‘말 춤’뿐 아니라 우리의 폭탄주 문화에도 흥미를 보여 자신감을 얻었다는  개그로  주위를 웃겼다.  술로 인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는 최근의 분위기로 볼 때, 질타가 우려되는 수준이었지만  국위 선양한 싸이에게는  언론도 여론도 관대했다. 
그러나  술로 인한 우리  사회의 어두움은 여전히 건재한 모습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갖가지 유형의 음주 사고가  폭주하는 이 현실이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술로 인한 폐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곳곳에 그 선명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태조 이성계와 연관된 인물만 해도  2명이나  술 때문에 생사를   가른 기록이 있다.   
맏아들 이방우의 사인에 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정사와 야사가  각각 다른 정황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정사는  날마다 끼니를 거르고 소주를 폭음하다 요절해버린, 실패한 알코홀릭으로서의 삶으로 이방우의 마지막을 기록했다.  반면 야사에서의 이방우는 똑같이 술에 찌든 삶이라도  고려왕조에 반기를 든 아버지 이성계를  수용하지 못하고  충절을 지키다 죽어간 인물로 그려졌다.  어느 것이   진짜 이방우의 삶인지는 그저 하늘만이 알고 있을 터다. .
태조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의 사인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세자 책봉 싸움에서의 패배로 삶을 마감했다고 알려졌는가 하면 사실은 술로 인한 설화가 화근이 됐다는 설도 있다. 정도전이 술만 마시면 "한고조 유방이 장자방을 쓴 게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다" 라고 떠든 게 명줄을 재촉하게 됐다는 것이다. 

  
술의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는 의여도 정가라고 예외가 아니다.
권력이 집중된 곳인 만큼 한 순간의 실수로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을  확률도 그만큼  큰 셈이다. 추락하는 속도 역시 비할 바 없이 속전속결이라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사람이 술을 먹는 단계까지는 무리가 없을 텐데 ‘술이 사람을 먹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면 그 때부터 사단이 나게 된다고 한다.  모든 가능성이 순식간에 뒤집히게 된다는데  술을 먹지 않는 나로서는 짐작만 할 뿐인 세상이다.
결국 과함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취중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인생 전체의 명운을  잘라버리는 허망한 일이 어제도 오늘도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다.  술 때문에 사력을 다해 쌓아올린 공든 탑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일은 매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술을 먹지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잘 지켜왔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으로 살면서 술을 마시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잘 했다,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나름 술 안먹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숙련된  노하우로   노력했다.(지금껏 내가 술을 안먹는다는 걸 모르는 분들이 많다) 술잔 대신 우롱차를 수없이 마셔대는 것은 기본이고 술 안 마실 핑계를 위해 당뇨다 내시경 검사다, 별의별  변명으로   둘러댔다.  본의 아닌 거짓말이 죄송하긴 하지만  순기능이 많았다는 걸로 자위하고 있다. (그러나 술자리 스킬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술자리 분위기 메이커, 뒷정리 도우미로  학창시절부터   인기투표 1위를 도맡아 하던  전력이 입증한다)
후회는  없다.  적당한 음주로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못하겠지만 지나친 음주로 자신은 물론 주변까지 곤란하게 하는 것 보다는 (술 안먹는 내 쪽이) 훨씬  낫다는 생각에서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정권 재창출! 이 대명제를 공동의 목표로 삼아 함꼐  나가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술로 인한 불상사로 우리의 운명이 휘둘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

일단 무슨 일이 있어도 긴장을 늦추지 말자.
긴장하고 또 긴장하면서 최후의 승리가 확인되는 순간까지 우리의 모든 욕망을 유보하고 단 하나의 명제만 생각하자.
그렇게 우리가 가진 최선을 앞세워 전진하자.
그리고 승리하자.     
                                                                        
(2012.9.25.)
...홍문종 생각

2012년 9월 23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오늘의 화두는?


오늘의 화두는? 


정부의 미분양주택 관련 감세 방안 처리가 불발로 끝났다.
부동산 경기부양을 위한 정부의 고육지책을 ‘부자감세’로 몰아붙이는 야당의 공세를 뛰어넘지 못한 탓이 크다.   장기 침체로 매매가 끊긴 부동산 시장엔 그야말로 가뭄 속 단비가 될 만했지만  입장이 다른 야당이  지방 세수만 줄이는 졸속 정책이 될 수 있다는 우려로  법안 통과를 막은 것이다. 
일주일 새 똑같은 법안이 세 번째 반려되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졸지에  국민은  안중에 없이  정쟁질만  일삼는 '국해의원(!)'이 되고 말았다.
  
부동산 부양책을 유일한 구명줄로 설정해 놓고 법안이 통과되기만을 학수고대하던  국민  심정을 헤아리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국회의원 본연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크게 야단맞을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사안의 특성을  감안하면  긍정적  측면이 없지 않다.  어차피 인간적 관계가 집약되는 과정에서의 이해타산은 불가피한 산물이다.  부를 질책하건 여야 간 다투건 간에  모두  국민 주권을 대행하는 결과인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재원마련이나 효용성을 논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민감한 이해관계나 오해의 소지로 인한 이견과 갈등은  오히려  정당한   민주적 절차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런  절차들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 개인의   안위를 위해  운영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분명한 건 그런   시도들이  갈수록  설  자리를 잃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엊그제  국회에서  동료의원들과  환담하는 자리에서다.   
‘택시에 대해서도 버스처럼 대중교통 차원의 지원책이 있어야 한다’는 모 의원의 주장이 빌미가  되어 즉석 토론이 진행됐다.  
“8.000억에 가까운 예산마련은 어떻게 하느냐 (A의원), 사대강 사업에 수 조원을 썼는데 그까짓 몇 천 억이 대수냐(B의원), 어차피 주어진 예산인데 어려운 택시기사를 돕는 게 타당하다(C의원), 모르는 소리, 택시기사보다 어려운 계층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D의원)”
그곳에는 '나'만 있는 대화 뿐이었다.   명색이 정치인들이   생각을 나누는 자리인데도 서로를 이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이 답답했다.  
하지만  생각의 여지를  많이 건져올린  순기능도 있었다.


그런  상황이  소통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해 주었다. 
이해와 존중으로  상대를 배려하지 않으면   소통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의제가   커다란  깨달음이라도 되는 양 부각됐다.  상대를 향한 끊임없는 두드림과 그리고 귀 기울임  없이는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친구 그리고 연인의 관계 조차도  소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강조됐다.
그것은 충분히 신선한 자극이었다.
두서없는 옹알이로만으로도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는,  그런 정치 현실을  소망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의  캥김이 없지 않다.  그동안 살인적인 일정을 핑계 삼아   일상의 만남을 소홀히  한  전력이 적지 않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늘 최선을 다하고 싶었지만  욕심만큼  허락되지 않았던 형편이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용기를 내 신발끈을 다져 묶는다.
그렇게  소통을 향해 새로운  출발을 외쳐본다.                          
                   
 (2012. 9.21)
 ...홍문종 생각

2012년 9월 16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생활 속 발견


생활 속 발견


'여의도’로 복귀하고 나서 확실하게 바뀐 게 있다.
방송 출연과 많이 유관해진 신분의 변화다.
그동안 통상적인 의정활동 외에도 당내 선거 등으로 대담프로나 인터뷰를 명목으로 방송 출연할 기회가 많았다. 실제로 공중파는 물론 종편에 이르기까지 TV 화면에서 내 모습을 본 분들이 적지 않으실 것이다.
아직은 실수가 많은 편이지만 미디어 노출이 싫지 않다. 그런 걸 보면 나 자신, 타고난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배우가 되고 싶던 은밀한 꿈을 이렇게라도 이루는구나 싶기도 하다.

방송 출연을 통해 상상이상의 위력을 발휘하는 방송의 영향력을 체험했다.
실제로 방송을 타는 날이면 부산, 광주, 대전 등 전국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쇄도하는 안부인사가 장난이 아니다. 십 수 년 연락이 끊겼던 지인으로부터의 연락은 보통수준이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정치인들의 이미지 세탁도 가능하다는 건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얼마 전에는 대선주자들이 모 인기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시켜달라는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럴 만한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유권자 표심에 목메는 정치인들에게 이보다 더 확실한 홍보도구는 흔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방송출연이 정치인에게 늘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분명 주의를 요한다. 자칫하는 순간, 역작용 한방에 모든 걸 잃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실제 모 인사의 경우, 방송 출연 효과로 유력 대선주자로 급부상했다가 최근 들어 당시의 발언들이 거짓말로 드러나는 바람에 코너에 몰리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고 있다.

몇 번의 경험에 불과하지만 방송의 생리가 우리네 삶의 질곡과 엇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어진 틀에 따라 들쑥날쑥한 모양새로 주조되는 과정이 많이 닮았다. 물 만난 고기처럼 술술 풀리다가도 미세한 움직임 하나에도 덜컥 말문이 닫히고 마는 나약함을 인간의 한계로 풀어내는 과정이 그렇게 드라마틱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한계를 통해 인간의 교만을 견제하기를 잊지 않는 센스라니. 영역을 가를 틈도 주지 않는다. 프로가 됐건 아마추어가 됐건 그저 겸허히 모든 걸 내려놓으라는 주문이다.
인간의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인연이 존재하는 것처럼 방송에서도 파트너와의 인연이 중요시된다. 실제로 한 방송에서 사회자와의 불화로 인터뷰 도중 퇴장해버려 구설에 오른 야당 대표의 ‘한 성깔’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토론 프로그램에서 패널들의 지나친 자기주장이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왕왕 있는 일이다. 방송 출연 때 진행자나 토론 상대와의 궁합(?)을 따지게 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그런 경우에 비하면 엊그제 ‘조선TV’와의 인터뷰 방송은 여러 면에서 성공적이었다.
우선은 앵커들의 편안한 진행이 자신감을 키워줬다. 인터뷰 내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내공 깊은 진행이었다. 때 마침 평소 관심을 갖던 분야여서 인터뷰의 완성도를 도왔다. 거기다 이심전심이었는지 방송이 나가자 칭찬과 격려로 나의 신바람을 부추겨주신, 영원한 나의 우군인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 분들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인터뷰 성공의  최대 수훈자는 노련하게 인터뷰를 이끌어준 진행자들이었다.
  
그런 식으로 정치의 장이 됐건 사업의 장이 됐건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세상이 됐다. 모든 성공여부가 조직의 신명을 이끌어내 축적된 지식을 활용하게 하는 지도자의 역량에 달려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문득 돌아봤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잘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는 건지, 저마다 자기가 속해있는 조직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존재인지 등을 생각해 본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어렴프시나마 답을 얻을 수 있었고 이를 공유하고자 한다.
우선은 자기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고 지휘자로서 결격 사유가 없는지 여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지휘를 받는 이들로부터의 의견 수렴이 올바른 선택을 견인하는 결정적 동인이 될 수도 있음을 수긍하라는 것,  그리고  실패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늘  긴장된 설렘을 놓지 말고 소통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이상, 새로운 각오로 새겨 듣길 바라는  '생활 속 발견'이었다.            
              
(2012. 9.14)
...홍문종 생각 

2012년 9월 4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묻지마' 유감


'묻지마' 유감


흉흉한 민심에 뉴스보기가 겁난다.
언제부터인가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웃음기 걷힌 거리의 표정은 삭막하기만 하다.
불신과 불안에 태평양 보다 더 먼 간극으로 마음이 벌어진 사람들은 깊은 침묵 속에 빠지고 빈 바람 소리가 폐허처럼 무너진 가슴을 대변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인과 강간과 폭력인 난무하는 현실이 만들어낸 생지옥의 실체다.
날마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또 벌어지고 있다. 백주의 무차별 칼부림으로 인명이 살상됐고 전자발찌에도 불구하고 성폭력범은 무고한 주부를 노렸다가 살인죄를 추가했다. 피자가게 사장의 철면피한 이기심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운 꿈을 키우던 한 여학생의 꿈을 무참히 짓밟았다. 솜털도 채 안가신 중학생은 건물 꼭대기에서 세상과의 작별을 고하고서야 악마의 손길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슬픈 서사시 한편이 골목을 타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근원을 알 수 없는 ‘가해’의 충동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칼춤을 추며 돌고 있는 사이에 누구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또 다른 누구는 그 손길에 의해 희망의 줄을 내려놓는 모습이다. 법이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질서가 판을 치는 이 미친 사회를 공유해야 하는 현실은 차라리 비애스럽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궁금해진다. 이 모든 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업보일까 하고.

도를 더해가던 인면수심은 급기야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범죄’로 정점을 찍는 분위기다.
집 안에서 곤히 자던 7살짜리 어린아이가 이불 째 납치돼 성범죄 희생양이 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묻지 마 범죄’의 극단을 보는 듯한 이 사건의 범인은 지근거리의 이웃이었다. 이젠 집 안에서조차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끔찍한 현실이 저마다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대한민국 전체가 공분에 쌓여 흥분할 만 하다. 성난 여론이 당장에 사형이나 화학적 거세로 범인 응징을 주장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이 땅에 다시는 발붙이는 일이 없도록 인간의 영역 밖으로 영원히 추방시키고 싶은 마음은 너나 없이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과연 최선일까 망설이게 되는 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은 우리의 현실 때문이다
.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에도 인간의 격이 이처럼 바닥이진 않았다. 특별한 손길이 아니어도 최소한 인간적 도리는 기본으로 지켜졌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임계점을 넘긴 지 오래다. 인성과 수성의 구분이 모호해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 등의 극단적 처방보다 범죄 취약게층에 대한 배려가 '묻지마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싶다. ‘묻지마 범죄’ 유형이 대부분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에서 비롯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결국 사회안전망 확충이 답이라는 결론이다. 교도행정의 혁신이 병행된다면 공동체 모두의 안전을 위한 최적의 장치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보장된 나라 범죄율이 낮다는 건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 바다. 사회에 대한 좌절감이나 적개심이 그들의 반사회적 인격형성을 부축이고 범죄를 충동질한 혐의가 짙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단, 예외 규정 등 운영의 묘는 필요하다. 아무리 배려해도 교정이 안되는 대상까지도 사회안전망의 온정주의로 끌어안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걸맞는 특단의 조치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다.

이번 ‘나주 성폭행범’ 경우만 해도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하고 고립된 환경 속에서 왜곡된 성장기를 거친 게 화근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계모의 학대 속에서 굴절된 시간을 보낸 게 사실이라면 ‘괴물’로 성장한 그의 오늘은 필연이라 할 것이다. 다른 범죄인들의 경우도 결손가정의 폐해가 독이 된 정황이 많다. 가족의 사랑과 배려가 한 인간의 인격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 것 같다. 그들을 순화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공적 장치만 있었더라도 인생의 상당부분이 달리 쓰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설혹 교도소에 갔더라도 제대로 된 교화과정만 주어졌더라도 지금의 전과자 현황과는 많은 차이가 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우선은 성적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유해환경 부터 근절시켜야겠다. 솔직히 텔레비전을 틀기만 해도 얼마나 많은 음란물이 범람하는가. 도처에 널린 도색잡지나 비디오 등으로 인한 성지식 왜곡은 그 폐해의 측량이 쉽지 않을 정도다.
세상에, 휴대폰 채팅창이 새로운 성폭행 수단으로 등극했다는 사실을 나는 며칠 전에야 알았다.
고립의 그늘에서 커가고 있는 범죄의 독버섯을 제거하는 일도 이 못지 않게 다급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빈곤하거나 소외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묻지마 범죄의 시발점이 되지 않도록 좀 더 섬세한 배려와 관심으로 살피는 건 우리 사회 전체의 몫이라는 데 인식을 함께 해야 한다. 더 이상 묻지마 식의 범죄가 이웃은 물론 내 고통이 되는 불상사를 막는 건 우리의 역량이다. 국가차원의 안전망으로 그들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것이야말로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위한 가장 최선의 방책이 아닐까 싶다.

묻지마 범죄는 특정 개인이 아닌 전 국민의 문제라는 관점으로 국가가 나서서 개인별 맞춤형식으로 풀어내야 할 문제다. 심리적 조력이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말이다. 무엇보다 한계상황에 놓인 취약계층을 그들만의 리그로 팽개쳐버리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그렇다고 맹목적이고 무한 배려의 교도행정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개개인 특성에 맞춘 합리적인 교도로 더 이상 우리 주변에 묻지마 범죄가 남용되는 불행을 막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건 일괄적용은 무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명운이 달렸다.
그 어느 때보다 지혜로운 처신이 필요한 때다.

(2012. 9.4)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