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4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묻지마' 유감


'묻지마' 유감


흉흉한 민심에 뉴스보기가 겁난다.
언제부터인가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웃음기 걷힌 거리의 표정은 삭막하기만 하다.
불신과 불안에 태평양 보다 더 먼 간극으로 마음이 벌어진 사람들은 깊은 침묵 속에 빠지고 빈 바람 소리가 폐허처럼 무너진 가슴을 대변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인과 강간과 폭력인 난무하는 현실이 만들어낸 생지옥의 실체다.
날마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또 벌어지고 있다. 백주의 무차별 칼부림으로 인명이 살상됐고 전자발찌에도 불구하고 성폭력범은 무고한 주부를 노렸다가 살인죄를 추가했다. 피자가게 사장의 철면피한 이기심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운 꿈을 키우던 한 여학생의 꿈을 무참히 짓밟았다. 솜털도 채 안가신 중학생은 건물 꼭대기에서 세상과의 작별을 고하고서야 악마의 손길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슬픈 서사시 한편이 골목을 타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근원을 알 수 없는 ‘가해’의 충동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칼춤을 추며 돌고 있는 사이에 누구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또 다른 누구는 그 손길에 의해 희망의 줄을 내려놓는 모습이다. 법이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질서가 판을 치는 이 미친 사회를 공유해야 하는 현실은 차라리 비애스럽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궁금해진다. 이 모든 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업보일까 하고.

도를 더해가던 인면수심은 급기야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범죄’로 정점을 찍는 분위기다.
집 안에서 곤히 자던 7살짜리 어린아이가 이불 째 납치돼 성범죄 희생양이 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묻지 마 범죄’의 극단을 보는 듯한 이 사건의 범인은 지근거리의 이웃이었다. 이젠 집 안에서조차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끔찍한 현실이 저마다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대한민국 전체가 공분에 쌓여 흥분할 만 하다. 성난 여론이 당장에 사형이나 화학적 거세로 범인 응징을 주장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이 땅에 다시는 발붙이는 일이 없도록 인간의 영역 밖으로 영원히 추방시키고 싶은 마음은 너나 없이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과연 최선일까 망설이게 되는 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은 우리의 현실 때문이다
.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에도 인간의 격이 이처럼 바닥이진 않았다. 특별한 손길이 아니어도 최소한 인간적 도리는 기본으로 지켜졌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임계점을 넘긴 지 오래다. 인성과 수성의 구분이 모호해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 등의 극단적 처방보다 범죄 취약게층에 대한 배려가 '묻지마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싶다. ‘묻지마 범죄’ 유형이 대부분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에서 비롯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결국 사회안전망 확충이 답이라는 결론이다. 교도행정의 혁신이 병행된다면 공동체 모두의 안전을 위한 최적의 장치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보장된 나라 범죄율이 낮다는 건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 바다. 사회에 대한 좌절감이나 적개심이 그들의 반사회적 인격형성을 부축이고 범죄를 충동질한 혐의가 짙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단, 예외 규정 등 운영의 묘는 필요하다. 아무리 배려해도 교정이 안되는 대상까지도 사회안전망의 온정주의로 끌어안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걸맞는 특단의 조치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다.

이번 ‘나주 성폭행범’ 경우만 해도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하고 고립된 환경 속에서 왜곡된 성장기를 거친 게 화근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계모의 학대 속에서 굴절된 시간을 보낸 게 사실이라면 ‘괴물’로 성장한 그의 오늘은 필연이라 할 것이다. 다른 범죄인들의 경우도 결손가정의 폐해가 독이 된 정황이 많다. 가족의 사랑과 배려가 한 인간의 인격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 것 같다. 그들을 순화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공적 장치만 있었더라도 인생의 상당부분이 달리 쓰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설혹 교도소에 갔더라도 제대로 된 교화과정만 주어졌더라도 지금의 전과자 현황과는 많은 차이가 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우선은 성적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유해환경 부터 근절시켜야겠다. 솔직히 텔레비전을 틀기만 해도 얼마나 많은 음란물이 범람하는가. 도처에 널린 도색잡지나 비디오 등으로 인한 성지식 왜곡은 그 폐해의 측량이 쉽지 않을 정도다.
세상에, 휴대폰 채팅창이 새로운 성폭행 수단으로 등극했다는 사실을 나는 며칠 전에야 알았다.
고립의 그늘에서 커가고 있는 범죄의 독버섯을 제거하는 일도 이 못지 않게 다급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빈곤하거나 소외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묻지마 범죄의 시발점이 되지 않도록 좀 더 섬세한 배려와 관심으로 살피는 건 우리 사회 전체의 몫이라는 데 인식을 함께 해야 한다. 더 이상 묻지마 식의 범죄가 이웃은 물론 내 고통이 되는 불상사를 막는 건 우리의 역량이다. 국가차원의 안전망으로 그들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것이야말로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위한 가장 최선의 방책이 아닐까 싶다.

묻지마 범죄는 특정 개인이 아닌 전 국민의 문제라는 관점으로 국가가 나서서 개인별 맞춤형식으로 풀어내야 할 문제다. 심리적 조력이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말이다. 무엇보다 한계상황에 놓인 취약계층을 그들만의 리그로 팽개쳐버리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그렇다고 맹목적이고 무한 배려의 교도행정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개개인 특성에 맞춘 합리적인 교도로 더 이상 우리 주변에 묻지마 범죄가 남용되는 불행을 막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건 일괄적용은 무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명운이 달렸다.
그 어느 때보다 지혜로운 처신이 필요한 때다.

(2012. 9.4)
...홍문종 생각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