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5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도행역시(倒行逆施)


도행역시(倒行逆施)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의미의 ‘도행역시(倒行逆施)'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택했기 때문인데 이런 저런 해석이 붙으면서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분주해진 듯하다.  특히  아전인수 격 해석으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거리로 활용하려는 이들이 반기고 있다.
하긴 생각이 다르거나 정치적 출구로 활용하려는 이들에게 이 정부의 무엇인들 곱게 보일까 싶기는 하다.
 
  
어떤 방향이든 정부정책이 다양하게 평가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개혁을 기치로 한 대통령 의중이 왜곡되는 현실은 안타깝다.
반정부 선전전의 수위가 금도를 넘는다.
다만  사심을 버리고 정도를 걸어  기득권 사수의 낡은 관행을 깨자는 의지를 말하고 있을 뿐인데  받아들이는 입장은 극과 극이다.  과거로의 회귀니 독재니 심지어 ‘정권 퇴진’까지 운운되는 현실이다.  고려해야 할 변수를 외면하고 관점이나 방식에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는 지나친 성마름의 결과다.
상황 왜곡을 기본이고  정부정책의 성패판단을  일방적 기준으로 매도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축적된 경험과 사실에 입각한 검증된 가치를 담론으로 삼는 보수진영과 경험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미지적 가치를 내세워 현실을 비판하는 진보진영의 입장이 충돌하는 현장은 참혹하다.


돌아보면 경제대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희생’이 불가피했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정치적 목표가 됐건 경제적 목표가 됐건 희생을 희망의 대체재 삼아 꿈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던 세월이었다. 그 결과 오늘 날 OECD 경제대국 반열에 올라선 대한민국 위상을 만들어 냈고 이제 더 이상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암묵이  용납되는 분위기도 아니다.   그에 더해 또 다른 도약을 모색 중이기도 하다.
상당 부분 상황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그동안의 희생을 우선 과제로 짚어 결론을 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희생을 기반으로 했던  지난 세월을 반성해야 하는 건지 격려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위로해야 하는 건지 어떤 식으로든 매듭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도록, 정리정돈을 마쳐야  다음 단계의 대한민국 도약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나름의 관점으로 들여다보니 교수들이 선택한 ‘도행역시’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지난 일 년, 온 사회가 주춧돌 마련을 위해 몸부림 친 노고 덕분에 이제 새로운 이정표를 향하고 있는 측면에서 정부정책의 자신감이 읽혀진다고나 할까.
뒤틀려 있는 남북관계만 해도 그동안 재정립되는 과정을 겪으며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국 제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다. 정치 현실 역시 삐딱하기는 남북관계 못지않지만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통해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저마다 지켜야 할 처신이나 금도의 마지노선을 극명하게 경험한 지난 일 년인 만큼 이 역시 새로운 지표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편안하지 못했던 건 경제 분야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경제민주화도 익숙하지 않은 사회적 주제를 실행하기 위해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명쾌한 답안이 즉각 제시되지 못한 측면이 크다. 그러나 실천 의지가 명백하기에 이 어수선한 과정조차  경제민주화가 제자리를 찾도록 돕고 있다는 셈법이다.
   

얼핏보면  박근혜 정부에 있어 지난 일 년은 한걸음 후퇴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이 한 번의 자리매김이 박근혜 정부를 열 걸음 전진시키는 미래지향적 전환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기설기 대충 꾸려왔던 세상을 한번쯤 총체적으로 정리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있는  걸음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되돌아 부족한 점을 살피고 채우는 기능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교수들이 제시한 사자성어에서   긍정적 측면을 찾는다면 바로 이런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 2013. 12. 23)
 ....홍문종 생각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무임승차

무임승차 


오늘 일과의 종착지는 63빌딩이었다.
모임이 파한 뒤 여의도순복음교회 인근까지 가야하는데 자동차 대신 걷기를 택했다.
(사색과 건강,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런 식의 선택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도중에 돌발상황이 생겼다.
출발 때부터 조금씩 날리던 눈발이 굵어지면서 부담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눈 때문인지 빈 택시도 보이지 않고 해서 한 정거장 거리인 목적지까지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는 금방 도착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는데 아뿔사!! 이번에는 버스비가 문제였다. 수중에 잔돈이 없었다. 엉거주춤 만 원짜리를 내밀었더니 거스름돈이 없다는 단호한 대답이 버스에서 도로 내리라는 압력이 되어 내 등을 떠밀었다.
여전히 택시는 없고 버스도 탈 수 없고... 그렇게 잠시 난감한 순간이 흐르고 또 다른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 사정을 얘기하자 이번 기사님은 잔돈이 없는 나를 도로 내리게 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무임승차를 하게된 것이다.
   
짧은 동안의 해프닝이었지만 생각의 여지를 크게 남기는 경험이었다.
특히 ‘과감한 실행’에 우선가치를 두는 부분 등에 대해 생각이 깊어지게 했다.
내 경우, 잔돈 때문에 근심하기보다 일단 버스에 올라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문제 해결을 앞당길 수 있었다. 눈을 피해 목적지를 가야하는 내 입장에서는 차비를 만원 내느냐 공짜로 타느냐 여부보다 버스로 한정거장 구간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기꺼이 만원을 차비로 지불할 용의가 있었는데도 버스이용에 어려움을 겪은 건 실행보다는 생각에 몰두하다 기회를 놓쳤다.
나라 일을 하면서 특별히 필요로 하는 예산규모가 명확하지 않으면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게 어떨까 갈등하거나 지레 포기하게 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될 때가 많다. 청년 창업을 돕는 프로젝트만 해도 불확실한 집행비용에 따른 불안감이 사업결정을 망설이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젊은이들에게 창조경제 참여기회를 제공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무한한 가치를 갖고 있지만 역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때로 제동을 걸게 우리를 조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저지르고 사후 수습책을 마련하는 쪽으로 방법을 찾는 쪽이 훨씬 생산적이라는 생각이다. 기왕에도 기대보다 훨씬 더 큰 보람으로 보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다른 하나는 각박해질 대로 각박해진 우리 사회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다.
처음 버스기사님은 눈 내리는 늦은 밤, 강변에서 만 원짜리를 들고 잔돈이 없어 난감해 하는 손님을 배려하지 않았다. 악의적으로 무임승차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단호하고 매몰찬 행동과 말투로 마음의 빗장을 닫아버렸다.
시혜를 베풀 입장이 아니라면 적어도 거스름돈을 포기하라는 식의 절충으로 고충을 해결해 줄 순 없었을까?
그렇게 묻고 보니 단순히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반론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마주한 건 너나 할 것없이 각박하고 여유없이 돌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었다.
물론 기사님은 버스회사 종업원 입장에서 성실하게 운행수칙을 준수해야 할 책임이 있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라 ‘배려담긴 친절’이 기업경영에 기계적인 원칙보다 더 큰 보탬을 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한 순간의 감동이 해당 버스회사의 기업 이미지 상승으로 연결된다면 그 효과는 ‘차비’와 견줄 수 없는 막대한 가치 창출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비단 산술적 계산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선한 동기는 긴요한 자원임에  틀림없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좀 더 살만한 세상의  토대가 된다는  차원에서. 

 대체로 샌치해지기 일쑤인 눈 오는 밤,  조금은  심각한 생각에  잠겨있다.  뜻하지 않은 버스 무임승차가 인간심리에 대한 고찰과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화두를 던져준 덕분이다.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마음만 있어도 이 삭막한 모래밭 풍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또 다른 희망을 부르고 있다.
감사하다.                                                           

(2013. 12. 18)     

...홍문종 생각  

2013년 12월 13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장성택 몰락

장성택 몰락   

북한의 2인자, 장성택 숙청 소식이 지구촌을 달구고 있다.  
실제  김정은은 자신의 집권을 돕던 고모부를  ‘반당·반혁명 종파행위’  죄명을 씌워 무자비하게 축출하는 냉혹함을 보였다.  김정은의  권력 강화설, 비자금 쟁취설, 장성택 쿠데타와 측근 망명설과 군부 강경파 요구설 등이  장의  또 다른 실각 이유로 따라 붙고 있는데  확인은 불가능한 상태다.



장성택의 몰락은 사실상 예견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북한이 3대 째 왕조세습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피의 숙청’은 절대권력 체제구축을 위한 필수 코스였다. 다만 그  정황이 갈수록 더 잔혹해진다는 점만 다를 뿐.
김정은의 몰락도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다.
마치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말로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다.
김정은은 아무리 뜯어봐도 ‘1대 창업, 2대 수성, 3대 멸망’의 불문율을 극복해 낼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굳이 맹자의 ‘군자지택 오세이참(君子之澤 五世而斬)’을 들추지 않아도 그는 확실히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에 비해 미흡하다.  김일성의 따뜻하고 친근한 지도자 이미지와 김정일의 냉혹한 카리스마를 모방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워낙 취약한  본바탕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얼치기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생전의 황장엽 선생이 ‘자수성가하면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어 아들인 김정일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라고 세습왕조를 창업한  김일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기억이 난다.   
김정일도 오랜 기간에 걸쳐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는 등 지도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한 편이다.  무엇보다  스스로 살벌한 권력투쟁을 통해 권력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권력을 세습하게 된 김정은과 여러모로 차별된다.   덜컥  절대권력을 쥐긴 했지만   한창 세상 경륜을 쌓을 나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찬 짐이었을 게 뻔하다.   
그런 김정은의 미래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문제는 김정은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대신 무모함으로 덤비는  작금의 현실이다.  
종횡무진 ‘총질’을 남발하는  공포정치로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는 모습은 통제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 얼마나 큰 폐해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북한사회에서나 가능한 이런 상황은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불행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민주주의 경험이 없는 북한의 폐쇄적 특성이 체제 유지를 도왔을 테지만 인터넷 등 첨단화된 과학 장비들이 북한을 더 이상 동토의 왕국으로 머물도록 방관할 수 없는 환경이니 한치 앞조차 어둡게 됐다.  
북한의 몰락이 불가피하다고 예견하게 되는 이유다.
우리로서는 대한민국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을 맞게 되는 셈이다.  
모르긴 몰라도 북한의 몰락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이자 위기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몰락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와 이에 대한 준비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다.  철부지  독재자의 오판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망치게  방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간접촉을 늘리는 한편 남한을 중심으로 이해당사국들이 모여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논의에 앞장 서야겠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지금까지 열강들이 한반도 긴장상태를 이용해왔던  국면을 감안,  이참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힘을 빌리는 방안을 모색하는 건  어떨까 싶다.  
 한반도 평화를 당길 묘안이라도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2013. 12. 11)     

...홍문종 생각      

2013년 11월 29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제월광풍(齊月光風)

제월광풍(齊月光風) 

  

                                                  -홍문종-  



높게걸린 하얀 달 
채선강에 비치니
태백이 걸친 달
당신 눈에도 걸렸네

시리도록 하얀 별
은빛 물결에 흩뿌려져
시인이 훔친 달
당신 마음도 훔쳤네

지생달 꾸물꾸물
삼도천에 우물쭈물
호수에 을렁 일렁
바람에 설렁 덜렁

아르고 별 휘적휘적
레테강 훌쩍훌쩍
호수에 한적두적
바람에 살짝슬쩍

물 위에 써버리고
 바람에 속삭였던,

잊지 마소서
잊지 마소서
                    

(2013.  11. 28)   

2013년 11월 25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돌직구 세상

돌직구 세상 
 


돌직구 과잉 시대라고나 할까, 솔직함을 무기로 날것의 상황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정면승부에 나설 일이 그만큼 많아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너도 나도 돌직구 대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정치판 상황이 걱정된다.
이로 인해 야기될 사회적 혼란과 폐해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천주교 시국미사 강론에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며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정당하다고 옹호하는 원로 신부의 ‘돌직구 발언’이 정국을 급속도로 냉각시키고 있다.
그는 한일 간 독도 상황에 빗대 ‘NLL(북방한계선) 문제 있는 땅에서 한·미 군사운동을 계속하면 북한에서 쏴야하는데 그것이 연평도 포격사건’이라고 말했다. ‘NLL은 북한하고는 아무 상관없고 휴전협정에도 없다‘며 사실상 NLL의 군사분계선 기능을 인정하지 않거나 북한의 천안함 폭침을 부정하기도 했다.
노 사제의 ‘돌직구’가 진영논리에 따라 극명하게 평가가 엇갈리며 갈등과 반목의 불씨로 전개되는 건 불을 보듯 훤한 결과다.

무엇보다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는 돌직구의 속성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위기상황을 돌파해내는 해결사가 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패인으로 작용하는 특성을 모르지 않을 텐데 관중의 욕구는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다. 날렵한 돌직구 한 방으로 상대진영을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자기 안의 유혹 역시 떨쳐내기 어려운 화근임에 틀림없다. 이로 인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생각하면 마땅히 거부해야 하는데도 결코 쉽지 않을 터다. 세상 일이 다 그렇듯 결코 간단히 승부가 결정될 일도 아니다.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건 지고 있는 상황에서건 손실을 감당해야 할 책임량은 다르지 않다.
이 또한 조금만 더 객관적이어도 파악할 수 있는 일이기에 허망한 결론이 민망한 건 나만의 기분일까? 

오랜만에 정치 선배님들을 모셨다. 
정치판을 쥐락펴락하며 하늘같은 존재로 군림하던 이들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일정한 경지에 올라있는 분들답게 뵐 때마다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하는 포스의 소유자들이다.  특히 오랜 경륜으로 체화된 이들의 정국 해법은 비할 바 없는 가치로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후배는 후배대로 동료는 동료대로 의미 있는 만남이지만 구태여 즐거움의 크기를 따지자면 선배님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꼽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오늘도 예외 없이 선배님들의  말씀을 경청하는데 걱정이 깊으셨다.   유난히 돌직구성 해법이 많았는데  최근의 경직된 정국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낭만과 풍류로 여야갈등을 풀어내던 시절을 그리워하거나 날로 각박해지는 정치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날 정치권에 돌직구가 만연된  건 결국 낭만과 풍류가 실종된 결과라는 그들의 생각에 공감하게 된다. 
개인적 경우만 해도 민주당 김한길 대표는 같은 은사님을 모신 고교 선배고 전병헌 원내대표는 함께 기억하는 교수님이 적지 않은 대학후배다.  사적으로 만나면 마냥 정다운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정치판에만 들어서면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할퀴어야 하니 사람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던 터였다.
      

정치의 후진은 정치인 당사자 못지않게 환호하는 관객의 잘못도 크다.  
후원과 지지라는 명목으로 상대를 향한 야멸찬 돌직구로 존재감을 과시하라고 요구해서는 안된다.  대리만족을 위해 정치인을 검투사로 만들고 정치판을 사생결단의 장으로 몰고 가는 관객의 천박한 호기심이 절대적인 화근이다. 정치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처럼 죽고 죽이는 검투사들의 싸움터가 아니다. 누군가 피 흘리며 쓰러질 때까지 비수를 휘둘러 승부를 결정하는 전투장이 아니다.
열광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시 낭송이나 합창 같은 문화 프로그램의 기능이 더  효율적이다.   김연아나 류현진 선수 등이 활약하는  스포츠 경기도 있다.  그런 것들이   정치판 갈등을 부축이고 상대를 향해 응징의 칼날을 날리게 부축이는  뒤틀린 의식보다  대한민국 정치발전을 위해 백배 나은 처방이 될 것이다.   
상대에 위해를 가하고 상대방 숨통을 끊어야 비로소  만족하는 진영 논리 대신  자신과의 싸움에서 최선을 다해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정치 구도를  짠다면  국민 전체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행복 지킴이로 거듭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남을 죽여야 비로소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지금의 정치로는 암울한 현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더 나갈 수 없다.  고품격 정치는커녕  투쟁의 선봉에 서는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불합리한 측면의 시국선언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에 대한 존경의 염을 거둘 생각은 없다.  
다만 좀 더 합리적인 판단과 처신으로 그들의  선택이 후회를 남기지 않게 되길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정치판을 향해 사제들이 던진 돌직구는 어떤 형태로든 후유증을 남기게 될 것 같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선혈이 낭자한 싸움을 거친 다음 정리될  것 같은 예감이다.  
원형경기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로선  심각하게 우려되는 부분이다.
해법이 있다면 국민들 스스로가 나서서 이 싸움이 수준높은 게임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살피는 길이다.  
더 이상 역사를 퇴행시키는 정치싸움을 원하지 않는다고 강력한 메시지로 가로막는 행동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걷잡을 수 없이 대한민국 전체가 휘말리게 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어떻게 전개될까,   걱정이다.      

(2013. 11. 24) 

 ...홍문종 생각  

2013년 11월 19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겨울오면


겨울오면
                  


                                       홍문종  


 겨울오면   
생각나요  
그대의 모습

바람불면
떠올라요
그대의 호흡

낙엽지면
느껴져요
그대의 마음

겨울오면
같이와요
그대의 느낌  


(2013. 11. 17) 

2013년 11월 17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가을 나그네

가을 나그네 

                                           
                                         홍문종


노란 은행
노오란   깊어  샛노랑
빨간 단풍
빠알간   깊어  샛빨강  
파란 하늘
파아란   깊어  샛파랑
하얀 구름
하아얀   깊어  샛하양


가을의 길목 지키고 서니 
허겁 지겁  호홉만 가빠지고  
세월의 길목 버팅겨 보니 
이리 저리  주름만 깊어지네


기우는 만추 
만산 홍엽 안타깝고
기세난 바람
당찬 너울 고삐풀고 
구르는 낙엽 
홀홀  단신 서글프고 
초로의 사내
훵한 가슴  허무하고


차마 돌아보지 못해도
낡은 바바리 탓할소냐
깃 세우고 휘파람 불며
가던 걸음    재촉하네
                                                         
                                   (2013. 11.15)

2013년 11월 12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역사는 승자의 기록

역사는 승자의 기록

 
야당의 시대착오적 선동정치가 도를 넘고 있다.
‘막말’이나 ‘억지’에 기댄 이분법적 대결구도 아니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처럼 막무가내의 연속이다.  사사건건 극단의 언어로  국가 지도자를 모독하기에 여념이 없다.  민생은 안중에도 없다. 국민적 갈등 조장으로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고 지지 세력을 결집하려는 천박한 이기심이 있을 뿐이다.   
특히 국정원불법의혹 사건에 집착하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패자의 ‘볼멘’ 객기로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악의적인 혐의가 곳곳에서 포착된다.
“불공정 선거지만 대선불복은 아니다”는 말장난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1년이 다가도록 새 정부 발목을 잡고 있는 행태도 그 중 하나다.   
그러다  들고 나온 게 ‘신야합연대’는 목불인견이다.    
지난 총선 당시 종북세력을 국회에 들이던 때의  세력들이 고스란히 ‘헤쳐 모여’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반성도 자책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들리는 딴 나라 정가 소식은 신선한 자극이다.
무엇보다 치열하게 싸우되 결론이 나면 깨끗하게 승복할 줄 아는 선거문화가 부럽다.   
지금 미국 정가의 관심은 2016년 차기 대선에서 강력후보로 부상하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 쏠려있다.  65%가 넘는 독보적 지지율을 업고 백악관을 향해 질주 중인 그녀를 막을 대항마는 거의 없어 보인다.
민주당 경선에서 당시 오바마 후보에게 패한 직후 "민주당원으로서, 자랑스러운 오바마 후보 지지자로 이 자리에 섰다"며 흔쾌히 결과에 승복하던  그녀가 차기 대선을 3년여 남겨놓은 지금 강력한 차기 백악관 주인 후보로  국제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쳐진 운명 앞에서 이내 자신을 수습하던  남다른 그녀의 처신이 기억난다.  
그녀의 오늘은 오래 낙담하지 않고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걸어간  보답일 것이다.   
 
엊그제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영국에서 여왕과 함께 꽃마차 타는 날, 대선 경쟁자였던 문재인 의원은 검찰청사 앞에서 사진 찍히고 이정희 전 후보는 당이 해산 청구되고... 좀 심한 거 아니냐는 인식이 있는데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학창시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만큼 패자의 입장에서도 이리저리 살펴야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던  역사 선생님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했고 특정 진영논리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지만 입장을 달리하면 그런 관점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을 들게 했다.  
승자 위주인 역사 평가의 수상한 조짐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다.  
 설령 패자의 비참함이나 억울함에 대한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누군가의 시도가 있었다 해도 아무도 그것을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 한 패자의 역사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가장 큰 모순을 바꾸지 못하고 고질적 병폐를 끌어안고 있는 치명적 오류를 외면하는 공범인 셈이다.  
 
그러나 어쩌랴.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  속도를 겨루는 경기에서 찰나의 차이로 1인자의 영광이 결정되는 일이 다반사다. 
정치권이라고 다르지 않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3표차로 당락이 엇갈려 ‘문3표’라는 별명을 얻은 국회의원도 실제 있었다.
피를 말리는 간발의 차이에 누군가는 역사를 기록하는 주체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삶의 질서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반목과 갈등 처리다.  승자와 패자로 엇갈린 운명에서 야기된 문제점을 승자가 되지 못한 추궁만으로 덮으려는 관행이 계속되는 한 답은 없다.   
그렇더라도 이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실패한 사람을 억압하고 승자 독식을 허용하는 사회적 분위기부터   손질해야  한다. 
승자의 관용과 패자의 겸허한 승복이 중요하다. 
특히 실패한 사람에게서 반면교사의 교훈을 찾는 지혜와  패자의 손을 끌어 역사 기록의 주체로 동참시키는 승자의 도량이야말로 승리를 완성시킬 수 있는 신의 한수가 아닐까 싶다.
 
승자와 패자의  안목이 만들어 낸  어울림 백신.
우선 당장 막가파식 막말과 불복으로 혼탁해진 정치권부터 적용해 볼 일이다.     

(2013. 11. 14)    
 ....홍문종 생각  


2013년 11월 5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以心傳心? 異心轉心?

以心傳心? 異心轉心?



以心傳心의 관계를 생각한다.

타인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허용한 세상에서 가장 원숙한 경지를 담고 있는 세계다.
굳이 말하지 않고도 마음전달이 가능한 동력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공감의 위력이 거기 있다.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배짱 맞는 파트너십을 더 없이 소중한 자원으로 우대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심전심은 생각보다 훨씬 유능한 교감 능력으로 우리 삶의 윤활류가 된다.   평범한 일상도 신명나게 하고 버거운 과제도 너끈히 처리하는 자신감을 준다.   
인간의 가능성을 수긍하도록  설득도 한다. 
  
개인적으로 말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힘들어 하는 편이다.
아주 가끔은 상대의 말만으로 본심을 읽을 혜안이 주어져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부분은 속생각과 딴판으로 이어지는 대화에 낯을 가리게 된다.  구르다 왜곡되고 전복되는 말 파편에 마음을 다치고 옹색해지기 일쑤다.
그런 내가 유난히 以心傳心 보다는 '異心轉心' 처세가 더 유능해 보이는 정치권 일원으로 살고 있다니 아이러니다.  운명론을 끌어다 댈 만하다.
실제 이 동네 사람들은 ‘마음 나누기’가  영 서툴다.  정치의 본질이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 해결이라는 해석이 무색할 정도로 폐쇄적이다.         
나조차 예외는 아니다.  
당 사무총장 직무를  수행하게 된  이후 갈수록 정치적 수사에 능해지는  내 모습이  두렵고 씁쓸하다.   
이중성과  왜곡으로  오염된 말의 성찬이 뒷덜미를 잡아당겨도 의연하게(?) 순응해야 하는 현실이  아프다.    
본의와 달라도 상황을 왜곡하거나 전복시키는 대화를  감내해야  하는 역할도 여전히 당혹스럽다.
      
그나마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 간 정치인들의  열정이 담긴  명연설이  있어  다행이다.  

그들의 육성에 녹아있는 울림을 음미하며 마음을 다듬을 수 있는 이 시간이 행복하다.   
들을 때마다 온 몸에 전륜이 느껴지는 수작들이 많다.     
특히 촌철살인으로 모두를 사로잡았던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이나 너무나 간절해서 강렬하게 와 닿던 마틴루터 킹의 'I have a dream!!'은 너무 좋다.   시대를 관통하는 울림이 백미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당시의 감격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노고를 느낄 수 있는 연설이다. 
생 전부를 투입해도 후회가 남지 않는다는 각오를 담아 쏟아낸 진심이 있기에 가능한 교감이 아닐까 싶다.   
  

염화시중의 미소.
새 날을 준비하는  이 순간  손을 내미는 첫번째 화두가 반갑다.    
타성을 거부하고 최대한 솔직해지겠다.
술수에 능한 재사가 아닌 바른 말로 정도를  좇는 정치를 하겠다. 
그렇게 결심을 세우니 대번에 세상이 달라진다.

이심전심,  의미있는 조짐이다.      

                                                            

(2013. 11. 4)   
...홍문종 생각    

2013년 10월 31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어릴적에는

어릴 적에는 

어릴  적에는 아픈 게 좋았다.  
자주 아팠던 건 아니지만 부모님은 물론 온 집안 식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는 상황이 좋았다.  
청년기까지만 해도 아픔은 여전히 기대감을  부추기는 우호적  싸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플 동안만큼은 사유의 폭을 넓히고 존재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이  나이에는 몸의  이상이  더 이상 여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아픔에  세월이  얹히자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지금껏  살아온 날보다 짧을 수밖에 없는 남은 날들에 대한 체념이  생각보다 일찍 한계를 드러내게 만들었다.  
실제 살인적인 일정(나를 전담하는 기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빡센)에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이라고  찬바람을 뚫고 유세차로 강행군을 이어갔더니  탈이 나고 말았다.  머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급기야  약을  찾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간의 일정을 얼추 마무리 했다는 안도감에   방전된  로봇이 되어 널브러졌다. 

 결국 내일이면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나 새로운 날을 열게 될 것이다.
 불량품이 된 컨디션 덕분에  삶을  중간점검하는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이 위기를 수습해서  불안정하고 연약한  지금의 현실을 딛고 일어서야겠다  다짐해본다.     
흔히 말하는 성공적인 삶의 선택도   크게 어려운 과정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
원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기질이기에 자신감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라는 깨달음을 체계적으로 차곡차곡 정리해보고  싶다.  
우선은 인간의 굴레가 주는 한계를 인정할 일이다.  그 다음엔  현실적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려는 의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난관도 내 갈 길을  막지 못할 거라는 결기가 내 안을 충만하게 채우고 있다.     
이런 '순응'들이 내 삶을 바꿔 줄 것이라   확신한다.    
10월의 마지막 날  신새벽, 자다가 일어났다.   
책상 앞에 앉아   천상의 비밀이라도  채워넣듯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자니  왠지 거룩해지는 느낌이다.                                                                      

(2013. 10.30)
...홍문종 생각 

2013년 10월 27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秋夜 短想

    秋夜  短想

 
                                    -홍문종
 
 

           낙옆   
  힘차게   새눈트고   
  프르게   뽐내더니   
  뻘겋게   달구어져     
  길가에   흩어지네   



          마음  
  구름은  높아지고  
  하늘도  거머쥘듯  
  기상은  뻗어나가  
  계절이  깊어가네  
  


           인생  
   저녁이   저무르고  
   하루가   지나가고  
   일년이   익어가고  
   세월도   셀수있는  
  


           추야  
   나뭇잎    서러워라   
   칼바람    두려워라   
   초생달    저려워라   
   가을밤    아쉬워라   

  
  
   (2013.  10. 27) 


2013년 10월 23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인재의 세계화

인재의 세계화 


‘대한민국은 확실히 축복의 나라다’
HARVARD, STANFORD, MIT 등에서 MBA, MPA를 마친 3,40대 그룹의 연합동문회, ‘future Korean leader’ 현장에서 굳히게 된 생각이다.
그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인재들이었다.   저마다 의욕과 활기가 넘쳤다.   
그들의  자부심이  탄탄대로인 대한민국의 미래를 확신하게 해 주었다.  
 하버드 행정대학원 회장 자격으로   조언을  부탁  받았지만  오히려  젊은 그들에게  더 많은 영감과 에너지를 수급 받은 기분이었다.  
연단에 올라 몇 마디 하는데 신명이 났다.
      
  
“국정감사 한다고 날마다 피감기관 사람들만 만나며 무거웠던 차에  여러분을 만나니  너무  신난다.  그런데 야속한 보좌진들은 빨리 국정감사장에 가야한다고 여간 닦달하는 게 아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하고 가겠다.
여기 올 때는 대한민국을 위한 여러분의 역할을 알리고 내년 지방선거를 대비한 헤드헌팅, 새누리당을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해 줄 젊은 피를 물색하겠다는 사심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반짝이는 여러분들을 보니 역시 잘 왔다는 생각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계화’다.  자원도 없고 영토도 좁고 사람도 적은 우리로서는  ‘인재의 세계화’를  통해 세계적인 리더 국가로 거듭나는 선택이  가장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미국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미국이 세계무대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던 부분을 한국이  대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공부하고 미국의 리더십 세태를 파악하고 있는 여러분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세계적 리더십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 참으로 중차대한  자원이라 하겠다.  
미국을 알고 대한민국을 알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화된 리더십을 만들어가는 여러분이 자랑스럽고 기대 또한 크다“ 
      
  
국감 일정에 쫓겨 두 시간도 채 안 되는 짧은 만남에 그쳤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젊은 그들의 넘치는 자신감과 책임감이야말로 막강 대한민국을 만들어 낼 든든한 자원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힘이 불끈 솟았다. 적어도 이 들 중 몇몇은 국민 저마다 자신의 영역에서 신명나게 일할 수 있게 해주는 본연의 역할을 실천하는 정치리더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용기가 났다.
아직은 미래를 말하기보다 과거에 집착하고, 칭찬하기보다 탓하길 좋아하고, 겸허히 승복하기보다 무모한 떼쓰기가 만연해 있는 정치현실이지만   머잖아  품격있는  리더십으로 바로 잡힐 걸 생각하니 문득 행복해졌다.                                                                         

                                                 

(2013. 10. 23)
...홍문종 생각

2013년 10월 21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여성 정치인, 그녀

여성 정치인, 그녀

 
최고위원회의, 국정감사, 선거지원유세, 모교행사 등 이른 아침부터 숨 가쁘게 진행된 오늘의 일과를 마감한 곳은 성북동 산꼭대기 윌리엄 패터슨 호주대사 관저의 만찬장이었다. 방한 중인 줄리 비솝 호주 외무부장관과 꼭 함께 하고 싶다는 대사관 측 요청에 몇 배로 바쁘게 무리해가며 빼낸 일정이었다. 늦을세라 훠이훠이 성북동 산꼭대기에 위치한 대사관저를 찾았는데 몇 몇 동료의원들과 외무부 직원들도 함께 하는 자리여서 반가웠다.
      

변호사 출신인 비숍 외무부 장관은 토니 애벗 총리에 이은 자유당 2인자로 호주 정부 유일의  여성 각료로도 유명하다.   이제 막 취임 4주째를 맞고 있었지만  만찬장에서의 그녀는 좌중을 압도하는  안정된 카리스마로  정치적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보수 정권을 이어갈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나와의 대화를 여는 적극성을 보였다. 아마도 내가 언급했던 20년 집권 발언을 염두에 둔 반응인 듯 했다. 이와 함께 박근혜 정부의 기초연금 공약 논란에 관한 국민 반응에 대해서도 궁금해 했다.
나는 ‘보수는 썩지 않고 너그러우며 자기진화를 멈추지 않는다면 충분히 20년 집권이 가능하다, 결국 그런 것들이 경제발전을 만들어낼 수 있고 정권유지에 결정적 요인이 되기 때문’이라는 취지로 그녀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기초노령연금에 대해서는 결국 국가 부가 늘면 최소한의 증자를 가지고 노령연금을 해결할 수 있다는 해법을 얘기했다. 기초노령연금과 경제는 동전의 양면 같아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함께 해야 하는 관계의 당위성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경제가 무시된 기초노령연금은 국가를 파산시키고 기초노령연금이 없는 경제는 사회전체를 불행하게 한다는 견해에 그녀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나섰다.
나 역시 호주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우리의 국민정서를 전하면서 일본자위권을 두둔한 최근 발언에 대한 섭섭함을 표명했다. 그녀는 표현상 문제였다면서 그 보다는 한국을 좋은 우방으로 얘기하는 등 긍정적 내용이 더 많았다고 적극 설명하는 한편 한·호주 자유무역협정(FTA)의 조속한 체결을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한국과 호주는 서로의 장점을 굉장히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FTA 체결을 통해 상호 발전할 수 있는 모멘텀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주 적극적이고 친밀감 넘치는 대사, 그리고 사려깊은 친한파 캐릭터 외무장관과의 저녁만찬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멋진 하루에 확실한 방점을 찍어준  성북동 야경 역시  모두를 매료시키는 훌륭한 자원이었다.                                                                                                           

(2013. 10. 17)   
 ...홍문종 생각

2013년 10월 20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home coming day

home coming day 



73학번 입학 40주년기념 모교방문 행사가 있었다. 
모교 발전을 바라는 공감대로 인연의 실타래를 감고 있는 현장은 유쾌하고 발랄하기까지 했다. 특히 40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스물 나이 당시 우리들만의 언어가 공존하고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73학번 강의실’ 현판 제막식(교우들이 모교발전 기금을 모아 마련한 교양관)에서 극대화된 일체감을 통한 ‘愛校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모교를 향하는데 마치 40년 전 새내기 대학생 시절로 되돌아간 듯 설렜다.
수개월 전부터 준비위원장을 맡아 나름 열과 성을 쏟은 행사니 그럴 만 했다. 거기다 오래 묵은 약속을 이행했다는 성취감도 home coming day에 대한 각별함을 거들었다.
      

묵은 약속의 정체를 밝히려면 학도호국단이 학생회를 대신하던 대학시절 이야기부터 풀어야 한다.
그 때는 학생들 안보의식을 고취하고 전시에 대비한다는 미명 아래 설치된 학도호국단이 학생회를 대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학생 조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게 일상적인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간부급을 연대장, 대대장, 사단장 등으로 호명하는 방식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생회장 격인 학도호국단 간부직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은 이유다.
친구들이 그런 나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중고등학교 때만 해도 학생회장 선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열성적이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때 내가 한 대답이 ‘나중에 home coming day 때 앞장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런데 이번 40주년 행사에서 준비위원장을 맡아 뛰어다닌 것이다.
예사롭게 넘기기에는 너무도 딱 떨어지는 필연이라는 생각에 놀라웠다.
      

입학 40주년 기념행사라니.
‘기쁘면서도 착잡하고 즐거우면서도 속상한’ 형언하기 어려운 속내가 온종일 오락가락 마음을 흔들어댔다. 듬성듬성해진 머리 숱, 깊게 패인 주름, 세월의 간극을 비껴가지 못한 친구들에게서 자화상을 보고 있자니 덧없고 무상한 세월이 절감됐다. 엇갈린 운명이 내 인생의 명암을 소나기처럼 한바탕 휘젓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눈을 감으니 지금의 내 연배 쯤 되는 선배들에게 왜 40년 세월을 그 정도로 밖에 살지 못했느냐고 질책하는, 조금은 당돌하고 거만한 어린 날의 내 모습이 보였다.  질책하고 있지만 조만간 나 또한 나무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세상 이치를 알지 못하던 치기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알고 있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의 속성이 얼마나 허망한지, 그 무력감은 또 얼마나 속수무책인지를.   


무엇보다 40년 전 세운 목표를 향해 한 눈 팔지 않고 오롯이 달려온 나의 지난 삶이  대견스럽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자부심이 나를 새로운 목표물을 향하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순의 나이를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 남아있는 시간을 초조히 세고 있는 현실은  고역이다. 
앞으로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지만  삶의 지혜를 통해 극복해야 할 과제다.    
주목할  건 최선을 다해 내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명료한  의지가  적어도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순간,
지금껏 뭐하고 이렇게 초라한 뒷모습을 남기느냐는 질책은 듣지 않겠다는  갈망으로  환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갈망이  요즘 들어 부쩍  자극을 주고 있다.        
신발끈 질끈  동여매고 미래를 향하라는  성화로  뭔가 큰 일을 낼 것 같은 조짐을 부르고 있다.   
                                                      
 2013.10.17
...홍문종 생각
  

  
- 한용진(고려대 사범대학장). 홍문종(73 행사준비위원장.사대교우회장). 조원선(사대교우회 수석부회장) 김덕천(전 사대교우회장) 강선보(전 고려대 교무부총장) - 

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국정감사 첫날에


국정감사 첫날에 


  
의정활동의 꽃, 국정감사가 드디어 서막을 열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 같은 설렘으로 기다려 온 날이다.
지나간 국감현장이 흔쾌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도 아닌데  국감 자료를 꼼꼼히 따져 읽으며  긴장하는 것이  영락없는 수험생 폼새다.
 누워서 침뱉는 격이지만 매 번 국감무용론이 대두될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현실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형식에 얽매여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오명이 익숙할만큼  원성이 자자하다.  특히나  피감기관을 향해  언성을 높이고 인상을 구기는 퍼포먼스로 정신을 빼놓는 '카메라파' 의원들을 올 국감에서만큼은  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바꿔놓지도 못하면서 호들갑만 잔뜩 떠는 빈깡통의 폐단에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다.    
 그런 식의 국감이 성과를 남길 리 없다.  그저 만리장성 앞 돈키호테로 전락된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과 자괴감에 짓눌리는 현실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경건한 마음으로, 지나치게 경건해서 무슨 예배 의식이라도 거행하듯  국정감사에 임했다.   신의 영역에 속하는 엄청난 일들을 잘 알 수도 없지만 간절히 간구하면 그 길을 열어나갈 수 있다는 신념이 확신이 되어 내게 용기를 줬다. 
무엇보다  첫 피감기관인 미래창조과학부 질의 현장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할 수 있어 기뻤다.      
지엽적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탈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의 동료 의원들이 사명감과  충정으로 국정감사에 임하고 있었는데  조금씩  허물을 딛고 거듭나고  있는  우리 안의 변화를  확인하는 것  같아 더  없이  행복했다.
특히  평소 박근혜 정부와 대한민국 미래에 미래창조과학부의 역할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던 터여서   각별한 마음으로 질의에 임했다.   그런 만큼   대한민국 미래를  설계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역량을 발휘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감도  컸다.       
7분여에 불과한 짧은 질의 시간이 못내 아쉬웠다.   모든 걸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 많이 준비하지 못하고 내 진심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  미진함이 남았다.     

요즘 들어  부쩍   인류역사에 커다랗게 기여하는 합리적인 역할로서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예고하고 준비시키는 하늘의 뜻을 느끼게 된다.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우리 대한민국이  반드시  세계무대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위치에 오를거라는 확신이 든다.   
이번 국감이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  여기저기  등불을  켜는  작업이 되길  간구하며  국감 첫날의  소회를  남긴다.                                                                 

(2013. 10. 14)  
...홍문종 생각  

2013년 10월 13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한 밤에 여의도 강변을 거닌 까닭은


한 밤에 여의도 강변을 거닌 까닭은


한강 고수부지 산책은 여의도 생활을 시작하면서 누리게 된 호사 중 하나다.
틈만 나면 강변을 거닐  궁리를 하는 내 모습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워낙 걷기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다른 곳이 아닌 한강이어서  주는 즐거움이 큰 탓이다.
강가를 거닐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목표만 바라보고 달려오느라 거칠어진 숨결도 잔잔해지고 번민으로 주름진 마음도 어느 결에 환해진다.  아우슈비츠를  탈출하는듯한 통쾌함까지 제공되는  가히 묘약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실타래처럼 엉킨 일과에 지친 오늘 같은 날엔 강가를 갈구하는 마음이 더 커지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오늘을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작용한 이유도 있는 듯하다.
   그런 배경을 업고  늦은  밤 여의도 강변산책을 결행했다.  
편한 복장과 신발로 무장해제를 한 채 익명의 바다에 뛰어드는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서강대교 옆으로 나 있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한강을 끼고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나오는데 국회를 등지며 걷기 시작하자  이내 순복음교회 십자가가 시야를 채웠다.   그리고 아주 잠시 동안 그 환한 빛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더니 코끝을 간질이며 다가오는 강바람에 밀려나버렸다.  
어느 날  흔히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인생의 한 장면처럼.   
     
따라붙는 상념을 애써 떨구고 걸음을 옮기자니 나름의 뜻을 담아 ‘현대판 아고라’로 명명해 놓은 강변무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내게 있어 각별한  장소다. 
지금 만약 고대 그리스 당시처럼 직접 민주주의 방식의 정치가 행해진다면 우리의 정치 환경은 어떨까를 상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한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강바람과 마주치는 지점 또한 개인적인 은밀함이 통용되는 장소이기에  그 의미가 더하지 싶다.    
납득할 만한  개연성이 충분한 건 아니다.  다만  딱 그 곳에 발걸음을 멈추면 내 안의 신명이 스파크를 일으키고 강바람과의 합체를 통해 에너지가 채워지는 느낌이 흔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가  설명할 수 있는 전부다.   
일종의 강신바람의 발현이라고나 할까.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포대교는  그  현란한 불빛만으로도  충분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등 뒤의 서강대교가 거스를 수 없는 세월 앞에 순응하기로 마음먹은 여인네의 수더분함을 강점으로 내세운다면   마포대교의 튼튼한 교각과  생동감 있는 불빛은 자신감으로 도발하는 젊은이의 패기를 닮았다 할 것이다.  
다리를 기점으로 선명하게 엇갈리는 주변 풍경도 이 같은  생각을 받쳐준다. 
마포대교 이전까지는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 기분인데 마포대교를 지나면서부터는 엘지 트윈타워로 대변되는 도회의 소란스러움이 불야성을 이루며  편을 가르는 모습이다.
교각 주변에서 예외 없이 삼삼오오 모여 통기타 반주에 맞춰 마음을 나누거나 텐트 안에서 저물어 가는 휴일을 함께 하는 이들은 물론  그 소란스러운 틈새로 서로의 밀어에 취해있는 연인들의  사랑스런  모습도 한 몫 거드는 분위기다.   
그  은밀함에  홀려  안보는 듯  훔쳐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다.   
 젊음에 대한 부러움 때문일까, 지나간 날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를 되짚어 보는. 
      
  휘적 휘적  걸음을 재촉하니  저 멀리  원효대교가  모습을 드러내다가 이내 희미해졌다.
원효대교는 그 이름이 주는 고즈넉함 때문에 오래된 골동품을 대하는 느낌이었는데  현실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게 되고 말았다.  국내 제일의 위용을 자랑하는 63빌딩에 압도당한 탓이었다. 
하지만  63빌딩은  기도하는 손을 모델로  삼은  당초 의도와는  다르게   불통의 상징으로 전락되는 위기였다.   
실제  늦은 시간,  층층이 쏟아지는 불빛들이 여의도 구석구석을 넘나드는 모습은 현대판 바벨탑을 지켜보듯 아슬아슬했다.   휘황찬란한 불빛은  아름답지 않았다.  미완에 그친 인간의 욕망이  조금은 허영스러운 모습으로 기품을 갖추지  못하는  한계를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었다.    
  
....63빌딩에  다다를 때까지는 어떻게든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출발지로 되돌아 올 때까지도  여전히  비어있는  두 손이  전신의 기운을 뺐다.  
 자괴감에  천길 만길 늘어지는데  때 마침  울리는 휴대폰 너머  어머니 음성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아이고, 수고 많았다.  얼마나 힘들었니. 이젠 딴 생각 말고 빨리 잠자리에 들도록 하렴”
나에 관한 일이라면 뭐든지 알고 계시고 또 이해해 주시는 수호천사 어머니,  늘 감사합니다.  
  
PS: 당사에서 방송 카메라를 앞에 선  일정이 마지막 일과였던  지난 6일  시작한   이번  글은  유난히 더딘 걸음으로 완성됐다.  김아무개 박아무개를 비롯한 이런 저런 인연들과 연관된  각오와 교훈을  풋노트로  새긴 이 기록에 애착이 많아질  것 같다.                                    

(2013. 10. 11)      
...홍문종 생각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달 밤에


 달 밤에 

‘십오야 밝은 달은 구름 없는 탓이고  
이내 몸 외로운 것은 임 없는 탓이라’
올 추석, 유난히 크고 밝은 달이라더니 휘영청 고운 달빛이 황홀하다.
천지를 품어주는 따뜻함에 홀린 탓일까?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 뜻도 모르고 흥얼거리던 노랫가락이 저절로 읊조려진다.
추석이면 달 따러 간다고 뒷산에 오르며 친구들과 부르던 추억의 노래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두둥실 떠오른 한가위 달에서 세상 만물을 다 녹여내는 미소를 본다. 모든 걸 헤아리는 토닥거림으로 세상에서 제일 푸근한 휴식을 주는 어머니 품 속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달은 조금은 삭막하다.
태양의 조력 없이는 발광이 불가능한 달의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달빛에 취한 우리 눈에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도 온통 달 얘기뿐일 때가 많다.
달이 빛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위에 오른 건 태양의 역할이 있기 때문인데 이를 간과하는 게 문제다.
우선은 태양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스스로의 한계를 외면하려 든다. 스스로 달빛을 만들어내고도 기꺼이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태양의 통 큰 지원이 더 이상 달갑지 않은 모습이다. 왜곡과 자화자찬으로 스스로를 미화하는 민망함은 그래도 양반이다. 심지어 자신의 치적을 위해 태양의 존재 자체를 통째로 편집해버리는 몰염치도 불사하는 형국이다.
그렇다고 그 끝이 좋은 것도 아니다.
      
 
누워서 침 뱉는 격이지만 정치판에서 가장 두드러진 행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위를 둘러보면 민심을 돌아보지 않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  자체발광이 불가능한 달이 스스로를 태양으로 착각하면서 벌이게 되는 블랙 코미디를 보는 기분이다.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살벌하다. 지나친 자만과 함께 하는 권력은 반드시 독이 되기 마련이다.
실제 그런 착각으로 국민 위에 군림하려다  정치낭인이 된 사례가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같은 시행착오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반복되고 있으니 난감하다.
정치 연륜을 더해갈수록 민심을 천심으로 받들던 선인의 고민이 선명해지는 이유를 생각하면 답이 나올 지도 모르겠다.
      
 
정치 항로에서 ‘달이 태양을 만나는’ 인연은 분명 행운이다.
다만 무턱대고 반길 명제만은 아니라는 망설임이 있는 게 사실이다.
예상치 못한 후유증이 치명적 결함으로 작동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전부를 내던질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자신을 소멸시킬 각오나 희생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과대 포장에 편승하려는 얍삽함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하여 나름 생각해 낸 답의 키워드는 감사와 최선, 그리고 융통성이다.
서로의 인연이 진행되는 동안은 물론 후광 이후를 대비하는 노력을 보다 중요하게 고려한 결과다.
겸허하고 하는 마음으로 수혜에 감사하고  최적의 결과물로 보답할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하는 한편  고정 틀을 벗어난 융통성으로 다가올 미래를 독립적으로 대비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크건 작건 저마다의 대체기능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때 비로소 멘토의 역할도 멘티의 역할도 우주의 조화로운 규합도 가능하다는 깨달음이 힘을 보탰다.
      
 
태양에게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갖가지 능력에도 불구하고 완벽을 기할 수 없는 원천적 장애가 있다.  눈부심 때문에 누구와도 시선을 나눌 수 없는 치명적 결함이 그것이다.  달은 태양보다 위대하진 않지만 태양은 불가능한 시선을 통한 교감이 가능하다.  수많은 시인의 가슴을 울려 사랑의 시를 쏟아내게 하는 에너지가 있다. (그런데 달빛은 태양을 속박하는 빛의 산란에서 비롯됐다) 거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운무의 조화로운 자태까지 더해진다면 어떨까 갑자기 신명이 난다.  최소한 구름이 달을 덮는 불상사만 아니면 우주의 조화로운 합체가 또 다른 상상력과 즐거움의 영역을 열어줄 거라는 기대감이 충만해진 탓도 있다.
정치 영역에서도  그런 어울림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그렇게 한가위 달밤이 깊어가고 있다. 
오늘 따라 여러 생각으로 갈리는 구름 속 달빛이 유난히 살갑게 다가든다.  
 
 
PS: 친구, 자네가 그랬지. 정치든 문학이든 한 가지만 하라고.  
지나치게 예민한 나의 감수성이 냉정한 정치세계에서 치명적 실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걱정어린 충고, 정말 고마웠네. 
그 때는 침묵했지만 오늘 밤 그 답을 들려주고 싶군.    
친구,, 나의 생각은 다르네. 
물론 진실보다는 음모가 득세했던 옛날식 정치를 떠올리면  자네의  걱정이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이제는 정치판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일테면 정치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시도 같은 거지.   국민과 정치인이 어우러져 긴장없이  놀이마당처럼  한바탕  즐길 수 있는 선거현장,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나?   
결국 정치도 인생도 종교도 예술도 결국은 인간이 먼저여야하는 진리에 공감한다면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하네.    
이쯤이면 나의 예술적 소양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쟁력으로  바뀌지 않겠나.  
그러니 너무 걱정 말게, 친구여.                                                                                   
 
(2013. 9. 20)
....홍문종 생각

2013년 9월 19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평상심

평상심 


살아가면서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될 때가 많다.  
마음의 평정을 놓치면서 생기는 불안정 때문이다.
불안에 떨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중심으로 해서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내기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거기다 말로는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엔 만만치 않은 삶의 덕목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도 문제다. 
더욱이 삶의 경륜이 더해지면서  덕목의 이행을 압박하는 강도가 커지는 현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다 조절 기능을 잃고 상처를 입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감당하지 못해 소멸되는 자연의 섭리는 부지기수고.
      

평상심은 이순을 목전에 두고도 가끔씩 헤매게 만드는 평생 화두다.
양날의 칼이라고 할까, 상태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평상심이 유지되는 상황에서는 에너지가 넘친다.  화수분처럼 샘솟는 아이디어는 기본이고 방송 인터뷰나 대중연설, 특히 모임이나 행사장에서 펄펄 날게 하는 역동성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평상심을 잃으면  모든 게 흐트러진다.    
심지어 평소 곧잘 하던 것조차 어긋나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나가며 갈 지(之)자 행보가 되고마는 어이없는 행각(?)이 펼쳐진다.   
모두들 그런 식으로 일을 그르쳐 본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평상심의 중요성을 경고하는 인생의 충고가 많은 배경이  아닐까 싶다.
      

최근 인터넷 공간에서 ‘인내심 테스트 자판기’ 해프닝이나 개그맨의 우울증 진단 건들이 관심을 끄는 이유도 같다는 생각이다.
동병상련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은 미완에 그친 어두운 과거가 미련으로 작용한 탓이 크고 더불어 같은 상처를 보듬던 기억이 있기에 가능한 결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내심테스트 자판기’는 불가리아의 광고회사가 제작한 맥주 광고영상이었는데 3분의 여유도 없는 현대인의 조급증을 꼬집고 있었다. 실제 자판기 앞에서 다른 움직임 없이 3분만 기다리면 공짜로 맥주를 제공한다는데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3분을 채우지 못하는 결과를 보였다.
또 다른 건, 개그맨 허경환씨가 방송에서  소화불량이나 위통은 물론, 스트레스로 건망증 증세를 보이는, 고도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다른 이들을 위한 웃음 코드 작업이  정작  개그맨 자신에게는 '독약'으로 작용하는 현실이 놀라웠다.  특히 ‘실력에 비해 좋은 결과가 나와서 항상 불안하고 걱정스럽다’는 그의 고백은 더 없는 비애였다.   
      

오늘 내게도 그런 도전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인연과 조우하는 일과 중, 내 일상의 평화를 깨는 침입자가 있었다.
얼토당토않게 쏟아내는 ‘말 비수'에   순식간에 ‘상처입은 영혼’이 되고 말았다.
상대의 비난이 합당한 건지, 내가 감내해야 할 당위성을 갖춘 비난인지를 생각했지만 승복이 안됐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생각을 바꾸니 새로운 길이 열렸다.
‘물살이 세다는 건 목적지를 앞당길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다. 다만 그 물살을 이용하지 못해 전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건 저마다의 운명이다. 마찬가지로 평상심을 흔드는 온갖 도발도 나를 단련시키고 점검하게 하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기피할 일만은 아니다. 주어진 기회의 활용이 더 빠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평상심에 대한 도발이 없는 환경은 오히려 경계해야 할 상황이었다.  새로운 발전과 도전의 기회를 차단한다는 점에서  반성이 요구되는 대반전이 거기 있었다.     
  
앞으로 평상심에 대한 도발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오늘의 결론을 전하면서  글을 맺는 이 순간,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2013.  9.  17)  
....홍문종 생각   

2013년 9월 10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디서 무엇이 되어


인간관계,  결코 수월하지 않고 흥미롭기도 한  명제다.  
안철수 의원과 최장집 교수의 ‘파경’에 천착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십고초려’ 미담(?)을 바탕으로 한, 원로정치학자와 '새'정치인의 정치실험은 세인의 눈길을 끄는 화제작이었다.  장밋빛 덕담도 넘쳤다. 그러나 이들의 밀월은 80일을 넘기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그나마 안의원은 위장부부의 연이라도 잇고 싶었던 것 같은데  최교수의 협조가 용이하지 않았다.  급기야  ‘안의원과는 더 이상 연락도 안하고 자문에도 응하지 않는다’는 확인사살까지  감행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정치세력화나 대중정치에 대한 복잡한 고민들로 골머리를 앓는 안의원의 입장을 모르지 않을 최교수로서는 다분히 의도적인 도발이라 하겠다.  
도중하차한 인간관계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일찍이 東洋의 맹자는 ‘성공하려면 하늘의 때를 얻는 것보다도, 땅의 이치를 얻는 것보다도, 인화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西洋의 셍떽쥐페리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자신의 저서 ‘어린왕자’를 통해 토로한 바 있다. 그들 말고도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인간관계의 가치를  설파한  혜안들이 많았다.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에 관한한 인간관계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의견일치를 이룬 셈이다.   
‘각자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에서 순간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어린왕자'의 탄식에  백번 공감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인간을 향한 희망은 여전히 간절하니 무슨 조화인가 싶다.  그 순기능에 기대고 싶은 본연의 욕구가 깊은 탓이 아닐까 싶다.  관계라는 것이 누군가의 마음 얻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만으로는 그 어떤 조짐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에 비춰보면 대단한 애착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물 안 개구리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  
무엇보다 제 눈에 담긴 풍경을 세상의 전부로 삼는  전제가 문제다. 갇힌 사고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각각의 개성도 좋지만 그것들이 어울림의 과정을 거쳐 나오는 성숙한 기량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독창적 사고도 마찬가지다.   성공적 인간관계가 뒷받침 됐을 때만이 도약이 가능하다.  
다만 21세기라는, 새로운 세상을 향하는 관점에서 보면 장벽으로 받아들여질 개연성에 대한 고려는 필요하다.  
실제 세상살이가 복잡다단해지고 자기중심으로 바뀌면서 관계 속에서 연결고리를 찾기보다 타인은 타인일 뿐이라는 체념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형국이다. 창조적이고 독창적 아이디어를 강조하다 보니 혼자라는 자의식의 팽창이 기형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현실도 마찬가지다. 개인주의의 독특함을 21세기가 새롭게 요구하는 삶의 형태로 오해할 여지가 함정이 될  때가 많다.  

그래서 인연의 고리를 다듬고 가꾸는 진심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한 다리만 건너뛰면 모든 인연의 연결이 가능해진 세상을 사는 올바른 대응이 아닐까 싶다.   
소통이 가능할 때 비로소 인간관계의 순기능이 열리게 되는 건 만고의 진리다.   특히 우리처럼  사람과의 결합을 직업으로 하는 정치인에게는 더 없는 가르침이다.  창조적 기업 경영으로 인정받고 있는 故스티브잡스나 빌게이츠의  오늘날도  인간에 대한 다양한 확률을 통한 인간 연구에 소홀하지 않았던 남다른 관점이 주효한 덕분이다. 
실제  인간관계를 주무대로 삼는  정치항로 속에서  기술이나 능력보다는 진정성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현실을 보게 될 때가 많다.  조금 과장한다면,    깊은 신뢰를 매개로  한 인간관계가  온전한  소통으로 일치되는  순간은 감동의 도가니다.  상대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받아들여지는 합일의 순간,  금방이라도 세상의 모든 갈등을 녹여낼 수 있을  것 같은 충만한 마음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백아절현(伯牙絶絃), 백아와 종자기의 뜨거운 인연을 생각한다.  
마음을 알아주는 벗, 3명이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는데 나는 어떤가, 새삼 민감해진다.
그런데 어깨를 툭툭치는  작은 속삭임이 나를 에너자이저로 만든다.    
"괜찮아...지금 잘하고 있어"                       

(2013.9.10.)
....홍문종 생각

2013년 9월 2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독화살

독화살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우울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병원에서 나쁜 진단이라도 받은 건가, 덜컥하는 마음에 이유를 채근했더니 ‘마나님과의 불통’이 화근이었다.  
부인과 다투는 와중에 ‘세상에서 제일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런 식으로 낙인찍히고 나니  
삶의 의욕마저 떨어진다는 하소연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한 서글픔과 서운함이 그렇게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위로와 격려의 언어가 간절해지는 나이듦의 현실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다가선다는 점에서  쓸쓸함과 씁쓸함이 버무려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친구의 ‘속울음’을 받아 안았는데  위로를 한 건지 위로를 받은 건지  도통 모를 정도로 말이다.   
       
되돌아보면  내게도  '이기적'이라는  명제로  갈등하게 되는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고분고분 수용되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공적 영역을 위해 사적 영역을 희생하고 있다는 나름의 자부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개인의 안일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우선시하는 이타적 삶에  관심을 기울며 살아온 스스로에게 조금 더  괜찮은 점수를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누군가 ‘이기적’ 딱지를 붙여  공격해오면  유난히 민감해지고 상처를 키우게 되는 것 같다.  
  
가장 큰 기억은 유학 당시  미국에 다니러 오신 아버지에 관한 일이다.
공항으로 아버지를 모시러 가야하는데 제출 시한이 임박한 리포트가 발목을 잡았다.   당장 아버지께 달려가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리포트 제출 시한을 넘기게 되는 고약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결국 오래 고민하다가 운전면허 딴 지 얼마 안 된 아내가 나서기로 했다.
 당신께 죄송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한참 동안이나 며느리가 운전하고 나온  차를 타지 못하셨다는 소리를 나중에 들었다.   
며느리의 초보 운전 솜씨가 못내 불안했던 것이다.  
 리포트를 포기하는 게 옳았을까?
       
또 다른 기억은 한창 정치 시련기에 있던 시기의 일이다.
한창 잘 나가던 이모가 최고 실력자를 만날 날을 며칠 앞두고 가족이 모였다.
자식 문제로 노심초사하시던 어머니가 기회라도 잡은 양 ‘내 문제’를 적극 거론하셨다.
그 때도 독화살이 날아왔다.
가족 문제를 얘기해야 할 자리에서 내 문제만 얘기했다는 게 이유였다.
부당한 공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맹세코 어머니 말씀을 그저 한 두 마디 거들었을 뿐인데 왜 이기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야 하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며칠 째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있는 와중이다.  
이럴 때  어릴 적 일기가  생각의 품을 키워주고  있으니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이기적으로 따지자면 예수의 모습이 가장 이기적’이라는 지적질은 물론 ‘싸움으로 혼란스러워진 교회 안에서 어린 심령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어찌해서 고매하고 멋있고 세상을 구한다는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느냐’는 원망, 심지어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예수의 모습을 인간인 나는 닮아서는 안되겠다’라는 치기어린 호기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속내를 마음껏 풀어놓은 청춘의 기록이 지난 시간을 반추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그동안 완고했던 마음에 틈새가 생겼다. 
잘하고 있을 때는 잘하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잘못하거나 억울할 때는 또 그런 것들에 대한 상황의 합리화를 위해 자랑과 변명을 남발해 온 건 아닌지 성찰이 시작된 것이다. 그 급급함 때문에 눈 맞춤의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소탐대실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또 이를 방치하게 되는 어리석음이 문제였다는 결론 도출 과정에도 힘을 보탰다.  급기야  시간까지 부족해져서 더 성실하게 설명도 못하고 더 나아가 체력까지 떨어져 더 섬세하게 납득시키기 위한 절차를 생략하게 됐으니 ‘그런 구박을 받아도 싸다’는 자아비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게 됐다.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고싶다는 갈망이 나로 하여금  타협의 접점을 서두르도록 조종하고 있다.  
 이렇게 반성하게 됐으니  다시는 이런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스스로를 사면하자는 그것이다.  
그러나 싱겁게 끝내고 말았다는 자격지심 때문일까?
밤하늘에 떠 있는 반달과 별, 스치는 바람, 퇴락해가는 내 모습까지 모든 게 마냥 슬퍼지는 느낌이다.
“보세요,  이제 그만 독화살을 거두고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의 마력으로 기 좀  팍팍 넣어주시면  안될까요?”                                                         

 (2013. 9.1)        
...홍문종 생각               
 

2013년 8월 28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故 고희선 의원 영전에

故 고희선 의원 영전에

 
지난 대선 때 마치 선거에 출마한 사람처럼 뛰어다니는 그를 보았다.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저 양반이 큰 꿈을 꾸고 있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주변 분들이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귀띔을 해줬다.
일 년마다 신발을 여러 켤레 바꾸고 오토바이도 한 대씩 폐차할 정도의 부지런함으로 굴지의 국내 종묘산업 1위 업체를 일궈낸 분이라고. 불같은 열정으로 우리나라 종자시장을 지켜내고 바이오산업을 이끄신 분이라고.
그렇게 모두가 입을 모아 인정하는 참으로 귀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조국과 당의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그리며 신명을 냈던 시간들이 꿈결처럼 아득하다. 
초선 때 여의도에서 지역구인 의정부까지 하루에 네 번 왔다 갔다 한 적도 있다는 내 말을 받아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만만치 않은 분이 또 있었네” 라면서 껄껄 웃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의도에서 그의 지역구인 화성까지는 의정부 보다 1.5배 정도 더 멀다)

그런 그가 불현 듯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
영전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생시처럼 아련한데,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말을 걸어 줄 것 같은데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함께 하자던 약속들, 그 많은 계획과 포부를 두고 어찌 그리 황망히 떠나버렸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망자와의 이별이 산자의 인생을 겸허할 수 있도록 다듬어주는 인연으로 작용하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남은 삶을 더 열심히 살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되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아릿한 슬픔을 여미며 이제 그만 고인을 보내드리고자 한다.
고희선 의원님,  
당신을 만나 함께 했던 시간들, 못 다 이룬 그  꿈들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제 아쉬운 추억으로 묻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나마 많은 이들의 진심어린 애도 속에서 그를 떠나보낼 수 있어 위안이 된다는 건 남은 자들의 이기심일까?   많은 이들이  천수를 누리지 못한 고인의 운명을 아쉬워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만큼 생전의 그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잘 운영한 반증이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다.            
 
PS: 그 와중에 고개를 드는 몇 가지 궁금증이  있어 이곳에 남긴다.  
      여백은 독자들께서 혜안으로 채워주시길.
                       

   *내가 유명을 달리하게 되면,
                    - 누가 올까?
                    - 자식들은 어떤 심정일까?                                
                    - 어떤 내용의 조사가 될까?
                    - 인생을 평가하는 세상 인심은?                                   




(2013. 8.29)                                                                                              ....홍문종 생각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Head? Heart?

Head? Heart? 


비교적  이른 나이에 정치를  시작한  탓인지  선배 정치인들과의 추억이 많은 편이다. 뵐  때마다  유난히  살가운  강창희  국회의장도 그런  인연 중 한 분이다.
그와 함께 했던  추억의  백미는 2002년 월드컵대회를 앞두고 일본 도쿄 올림픽구장에서 열린 한일 국회의원 친선 축구대회 기억이다.  
우리 측이 3대 1 역전승을 거둔 이날 경기에서 그는 야생마처럼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볐다.  급기야 상대방 골문 앞에서 얻은 프리킥 찬스를 멋지게  동점골로 연결시키더니  국가대표 출신인  가마모토 구니시게 의원의 정강이를  걷어 차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기량(?)을 선보였다.  적진의 에이스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고도 “다음 대회 때 내가 못 뛰더라도 아킬레스가 끊어진 가마모토의 정강이를 공략하면 이길 수 있다”며  승부욕을 보이기도 했다. 
 
그 후 우리는 더 드라마틱한 인연으로 만나게 됐다.  
8년의 정치공백을 딛고 복귀에 성공한, 흔치않은 경험을 공감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 인고의 시간동안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정치복귀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서로를 더 가까이 엮어주는 느낌이다.  
엊저녁 전현직 의원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도 우리의 낙방거사 시절 얘기가 단연 화제였다.
특히 강 의장은, 그의 오늘이 결코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고 돌파한 끝에 얻은 결과물이라며 지난 세월을 풀어놓아 박수를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얘기이기도 했다.
그는 (나를 지목하면서) 우리처럼 끈질기게 최선을 다하면 다시 복귀할 수 있다고 한 때 잘나갔던 전직 국회의원들을 격려했다. 살펴보니 그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들 어떤 식으로든 자극을 받는 분위기였다.  
지난 정권 당시 핵심이었던 A 전의원은 “예전에 주어진 일을 하다보니까 잘못한 게 많은 것 같다. 죄송하다”며 내게 사과를 해왔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자격지심에 시달리고 있던 B 전의원은 “의장님 말씀이 평소 홍총장님이 해주시는 조언과 비슷한 내용이 많은데 숙연해진다.”고 했다.  
(내 경우, 인간만큼 정치적인 동물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  
  
살아오면서 성공보다는 실패의 순간을 주목한 적이  더 많았다.    
실패의 순간, 그 상황을 얼마나 큰 약으로 쓰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 지금까지 내게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중학교 입학 실패, 박사과정 낙방, 국회의원 낙선 등-을 돌아봐도 그 때마다 나중에 이 실패를 인생의 교훈으로 삼겠다는 나의 다짐들이 ‘부록’처럼 달려있는 형국이다.
그렇게 쌓인 ‘부록’들은 나의 삶을 지키는 든든한 파수꾼 같은 존재가 되어있다.  어지간한 시련 쯤은 쉽게 극복되는 경지에 오른 요즘의 여유가 연륜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거기에다   자신에 대한 믿음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미국에 유학 간 지 얼마 안 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운전을 하다가 애매모호한 도로표지를 빨리 판단하지 못해  적발됐는데  백인우월주의자 같은 경찰의 언행이  문제가 됐다. 
"잘 몰라서 실수했다"고 하자   하버드 유학생인  외국인에 대한 적개심인지는 모르겠으나 비양거리듯이  “Use your head”라고 하면서 딱지를 뗀 것이다.  거기에  속상한  내가 “Use your heart”라고 응수하자  그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한동안 하버드 내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렇듯  나에게 있어 자존감은  삶의 고비를 맞을 때마다 더 큰 소명을 감당하기 위한 담금질이라고,  인생을 도전과 응전의 역사로 규정한 토인비의 안목이 괜한 건 아닐 터라고  토닥이며  에너지를  보태주는 보고였다.
   
강창희 의장님....
새로운 추억을  기록에 남기며  그를  떠올리니  이  멋진 인연이 마냥 감사하다.    
여전한 노익장으로 좌중을 휘어잡으며  인간적 매력을  유감없이 발산하는 강창희 의장의 에너지 보고는 무엇이었을까, 기회가 되면 여쭤봐야겠다.     
 “의장님, 의장직 그만 둔 뒤에도 괄시 안하고 열심히 존경해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2013. 8.28)
                                                                                                            ...홍문종 생각 

2013년 8월 25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단비


단비


단비 덕분에 폭염의 횡포에서 놓여난 해방감에 숨통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가뭄에 시달리는 농촌에 더 없이 반가운 소식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기쁨이 컸다.
현장 최고위원회의 차 찾은 경남 창원에서의  경험이다.
산업단지공단을 찾아가는데  때 마침 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과 폭염 때문에 걱정이 많았던 때여서인지  모두의 환대를 받는 단비의 위상이 대단했다.
우중의 이동이 번거롭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색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홍준표 지사나 김동오 의장은 단비를 몰고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 일행이 반가운 기색이었다. 눅눅한 습기에 짜증을 내며 지루하게 이어지던 우기를 불평하던 때가 불과 얼마 전 일인데  대접이 달라진 것이다.    
      
 
확실히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것 같다.
장마 때는 성가신 존재지만 가물 때는 구세주로 초특급 대우를 받는 단비가 되는 건 인간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관계나 사회생활 와중에 타이밍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적지 않다.
실제 억만금이라도 절박할 때의 동전 한 닢에 못 미치고 불로초를 능가하는 보약이라도 필요할 때의 약 한 첩만 못한 현실이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단비’는  어려운  상황에서  존재감이  도드라지게 되는 것 같다. 
전국시대  제나라  당시,  삼천 식객을 거뒀던  맹상군은 정작 권세를  잃자  ‘풍훤’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곁을 떠나는 세상인심을 겪은 바 있다.  그리고 훗날  풍훤의 헌신적 조력으로  복직을 했다. 
일테면 ‘풍훤’은  맹상군 인생에서 ‘단비’같은 인연인 셈이다.
      
 
지금껏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의 주인이고 싶다는 노래를 불러왔다.
그 때문인지 자꾸 가슴을 향해 묻게 된다.
‘지금이 때인가?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 새누리당에 필요한 역할은 무엇일까?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더 나아가 인류를 위해서는?’
결국 ‘단비’가 될지 ‘쓴비’가 될지는  두고 살펴야 할 일이고 우선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바람직한 방향을 정하는  최소한의 역할만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이다.
다만 지금 이 순간,  통찰이 가능한 혜안, 적임자를 자임하는 용기, 이끌어내고 동참시키는 추진력, 이 모든 걸 추동하고 견인할 수 있는 리더십 등이 필요한 시점인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대를 이끌 화두를 고심하며 새벽 산책길에 나서는데  빗줄기가  반색하며  맞는다.
밤 샌 담금질로 어수선해진 머리를  예사롭지 않게 나를 품는 기색이다. 
이 순간 머리가 맑아지고 생각이 뚜렷해지는 건   나아갈  방향을 정한  자신감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대한민국 운명을 바꿀  불세출의 리더십.....  
단비처럼  살포시  다가올 , 시대의  로망이요  우리의 미래 아닐까?                                 

 (2013. 8. 22)   

...홍문종 생각 

2013년 8월 16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결국은 사람이다

결국은 사람이다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정치는 사람 고르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던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생각한 대로 행동한다-
얼마 전 찾아낸, 누군가를 관찰한 34년 전 메모에도 그런 내 생각이 담겨있었다.
(어릴 땐 일기로, 나이 들면서는 메모를 통해 남긴 과거 기록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없어져 안타까울 때가 많다)
     
사람이 문제인 건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초한지’의 두 주인공, 유방과 항우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요인도 바로 ‘사람’이었다.
유방은 ‘잘난’ 항우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뒤처지는 인물이었다. 다만 여자나 좆는 건달로 살면서도 차곡차곡 대업을 쌓아올리며 자신의 꿈을 키우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인재를 기용할 줄 아는 출중한 안목의 소유자였다. 실제 유방이 천하통일 과업을 이룬 배경도 따지고 보면 장량, 소하, 한신 등의 뛰어난 기량이 역할의 전부라 할 수 있다.
반면 항우는 역발산기개세의 화려한 위용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스스로에 대한 과신이 인재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가 범증의 진언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면, 품안에 들어온 당대 최고의 지략가 한신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면 역사의 물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정치에서 사람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이 요구되는 측면은 도박판 생리와 다르지 않다. 
실제  쭉정이 같은 내면을 가리려는 허장성세가 유난히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사람을 가르는 일은 늘 쉽지 않다. 나름대로의 안목을 자부하는 편인데도 그렇다.  
실력을 갖춘 사람이 상대의 허를 찌르기 위해 허풍을 떠는 것처럼 꾸미거나 별 볼일 없는 사람이 허풍을 떠는 정도는 어지간한 내공이면 해결될 일이다.
나보다 수가 낮은 상대면 더더욱 일도 아니다.
그러나 고수의 허허실실은 다르다. 제스처까지 능수능란하게 가동하는데 버금가는 안목이 아니면 도리가 없다.  특히 정직을 신념처럼 앞세우는 사람의 경우, 결정적인 순간 치명적인 거짓말로 상대를 속일 확률이 크다는 경계심도 염두에 둘 만하다.


어린 시절, 지능이 떨어지는 동네 친구가 있었는데 만날 때마다 ‘홀짝 접기’를 하자고 졸랐다. 그러면서 번번이 내게 졌다. 질 수 밖에 없었다. “많이 잡았니?”라고 물었을 때 “많이 잡았어”라고 대답하면 ‘홀’을 쥐고 있고 “조금 잡았어”라고 하면 ‘짝’을 쥐고 있는 자신의 트릭 패턴을 바꿀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창시절, 시험 때면 벌어지는 친구들 사이의 눈치작전은 달랐다. 특히 오늘은 졸려서 시험공부 안하고 잠이나 자겠다고 연막을 피우는 당사자가 고수인 경우, 시험공부 대신 잠을 선택했다가 뒤늦게 땅을 치는 친구가 어김없이 나왔다.
상갓집 개를 자처하는 파락호로 위장하거나 또는 백정의 가랑이를 넘나드는 수모를 감수하며 때를 기다렸던 대원군이나 한신이 고수의 반열에 속하는 이들이다.    자신의 본질을 감추기 위해 고도의 전략을 구사하는 이런 캐릭터들은 판단을 교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정밀분석 대상이다.  자칫 방심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 한 방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단독 게임이 불가능한 정치 속성을 비춰볼 때 또 다시 안목을 화두로 삼을 수 밖에 없다.
어떤  파트너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정치적 위상과 판도가 결정되기에 하는 소리다.
이는 역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돌이켜보면 예측한대로 순조롭게 대통령직에 오른 분이 있는가 하면 연속된 실패 끝에 은퇴를 선언했다가 이를 번복하고 기회를 잡은 케이스도 있다. 따 놓은 당상으로 여겨졌던 선거구도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기회를 놓치고 종국엔 레이스를 포기하고 만 경우도 있고 황당해 보이는 경로를 거쳐 기적처럼 대업을 일궈낸 주인공도 있다.  
결국  성공과 실패는 각자에 동등하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자신을 알고 상대를 아는 상태에서 더불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면 하늘이 주신 뜻을 이룰 수 있다.  나를 알고 상대방을 모르는 상태라면  현상유지 정도는 가능할  것이고  나도 모르고 상대도 모르는 무모한 시작이라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털릴 수도 있다."   
 우선은 이 평범한 가르침부터 가슴에 새겨야겠다.
그런 다음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의 안목을  위해  두눈을 크게 부릅 뜰 일이다.  

(2013. 8. 16)
...홍문종 생각

2013년 8월 9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불치하문(不恥下問)

불치하문(不恥下問)




일찍이 '아는 것’의 경쟁력을 간파했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통찰력이 놀랍다.
연륜의 관록이 쌓일수록 감탄하게 되는, 삶의 진리라는 생각이다.  특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갈수록 그 위력의 범주가 넓혀지고 있는 추세다.
거듭되는 진화를 통해 우리에게 ‘문명'을 공급하고 있는  컴퓨터나 스마트 폰만 해도 그렇다. 새로운 기능을 발견할 때마다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의 콜럼부스 못지않은 문화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간단한 기능 하나에 세상살이 절차가 훨씬 더 수월해지는 현실이라니, 그 반가움 때문에 둔한 손놀림으로라도 기능을 익히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섣불리 아는 척하기보다 아예 모른다고 하는 게 모두의 평화를 위해 백 번 낫다. 
다만 어설프게 알고 있는 경우엔 반드시 조금 다른 처신이 필요하다.     
얼마 전 미국 방문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보스턴에서 렌터카를 빌렸는데  유학할 당시 오랫동안 거주해서 지역사정에 밝다는 어설픈 자신감이 화근이었다. 네비게이션 없이 캠브리지, 하버드, 엠아이티 등 대학 캠버스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예전에 잘 알고 있었던 길들이 지금은 많이 바뀌어 낯선 환경이 되어버릴 만큼 흘러가버린 세월의 간극을 의식하지 못한 패착의 결과였다. 
결국 한 시간여를 뱅뱅 돌며 길 위에 뿌리고 나서야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인위적인 길안내에 의존했다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후회막급이었다.  
 
어설픈 잘난 척으로 이 보다 더 심각한 폐해를 초래하는 곳이 있다.
바로 정치판이다.
천양각색의  성향이 모인, 흔히 엘리트집단의 집결지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징후는 얼마든지  있다.  
얄팍한 지식만으로 전문가연하는 사람들이 만연해 있다.  완전치 못한 지식을 인정하거나 겸양의 도로 스스로를 낮추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정도 수준이면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나마 양호한 축이다.
문제는  어설픈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신념을 고수하는 '치명적인 폭탄들'이다.  신앙이 되어버린 신념은 바꾸기 힘들 뿐 아니라 주위의 많은 이들을 미혹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거의 통제불능 상태다.        
결국 사교집단 유형과 흡사하다는 생각이다. 종교를 잘못 이해하거나 이해시키려는 시도들이 우리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 전례를 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30여년의 세월이 얹힌 오래 전, 하버드에서 공부할 당시,  친구들은  모르는 것이 생기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질문을 던지거나  답을 구하는 나를  낯설어 했다.  하버드에 다니면 뭐든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자부심과 배치된다는 반발심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그 모습이  내 본연의 성정이라는 걸  알고 난 후부터는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홍문종만의 강점'으로  인정하는 친구들도 생겼다.   
(그 때부터 불치하문(不恥下問) 의 도리를 실천하고 있었던  걸까?)  
  
아는 것은 확실히 힘이 된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잘못된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민폐로 작용하는가를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멀게는 세기의 독재자, 히틀러나 무솔리니, 그리고 가까이에는 최근 ‘나치 식 개헌을 배우자’는 망언으로 분통을 터뜨리게 하는 일본의 아소 부총리 등이 그 단적인 예다.
그런 점에서 지도자급 위치에 오르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없게 만드는  우리 문화 역시 자유롭지 않다. 심지어 특정 미션을 강요당하는 일까지 있다. 그런 것들이 국민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깊어질 수 밖에 없다.   
   
특별히 국회 등 정치권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스스로의 약점을 용기있게 고백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 지도자에게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기회의 허용이 필요하다.  그것도 무제한으로. 
더불어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게 하고  교정을  독려하는 사회적 배려야말로  배놓을 수 없는 덕목이지 싶다.  

그것이 비로소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최적의 답이 아닐까 싶다. 


(2013. 8. 8)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