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7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딸내미의 강추로 영화 ‘still Alice’를 봤다.
 
언어학자로 명성을 날리며 승승장구하던 51세의 명문대 여교수가 희귀성 알츠하이머 발병으로 지워져가는 기억을 붙들고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였는데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뜻하지 않는 병마의 습격을 받은 여주인공 앨리스의 당혹스러움과 두려움 등의 심리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그 어떤 절실함으로 다가와 눈길을 붙잡는 특별함 때문이었다.
 
 
스틸 앨리스를 유작으로 남기고 지난 3106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감독의 흔적을 살피다 보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영화는 루게릭으로 시한부 삶이었던 리차드 글랫저 감독의 실전이었다.
 
그리고 극 중 여주인공 대사의 태반은 감독 자신이 세상을 향한 외침과 다르지 않았다.
 


제가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전 고통스럽지 않아요. 다만 힘을 다해 애쓰고 있어요.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 또 예전의 나 자신으로 남아있기 위해서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제 자신에게 말하죠.
 
그게 순간을 사는 동안 정말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죠.”


 
촬영기간 내내 현장을 지키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화에 자신의 전부를 바쳤던 그의 투혼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병세가 악화돼 더 이상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아이패드의 음성응용 프로그램까지 동원해 촬영을 강행할 정도였다니.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자신의 치열한 내면을 할리우드 최고의 연기력을 자랑하는 줄리안 무어에 완벽하게 투영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굴하지 않고 의욕을 잃지 않는 영원한 용자의 표상이 되었으니 다행이다.
 
 
영화는 내게도 몇 가지 생각을 던져줬다.
 
우선은 그 어떤 인생의 고비에도 굴하지 말고 꿋꿋이 자신을 세우라는 강렬한 메시지다.
 
지나친 낙관이나 비관도 말라는 선인의 말씀을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성공적인 삶도 사실은 끊임없는 좌절 속에서 찾아낸 길의 첫머리일 뿐그 때 그 때 주어진 삶에 충실한 것이 최고의 전략인 것을.
 
 
또한 앨리스의 곁을 지키는 막내딸 리디아의 선택에서 세상의 또 다른 질서를 봤다.
 
유별난 자유분방함으로 가족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던 그가 영원한 결속을 다짐하던 가족들이 저마다의 삶을 위해 뿔뿔이 흩어진 뒤 텅 빈 앨리스의 존재감을 채워주기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모습은 숭고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건 소위 잘난 이들의 능력보다 오히려 어렵고 고통받는 가운데 역지사지로 타인을 품을 수 있는 손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세상을 완성시키는 데 필요한 건 뛰어난 능력보다는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이들의 헌신적 역할이었다. 조만간 이를 기준으로 한 사회적 재평가 작업이 이뤄져야겠다.
 
 
사랑을 통해 여전히 진행 중인 희망을 전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기억은 물론 언어까지 다 소진해버린 앨리스를 마지막까지 지탱시키는 가치는 '사랑'이었다.
 
그렇게 세상에 남는 건 사랑밖에 없다는 웅변을 통해 삶의 의욕을 독려하고 있었다.
 
사랑이야말로 그녀를 당당한 세상의 일원으로 존재토록 하는 에너지의 실체였던 것이다.
 
​​영화의 대주제이기도 한 ‘still Alice’를 충족시키는 메시지로서 사랑의 위대함을 적극적으로 설파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가 담겨있는 대목이었다.
 
 
모처럼 나이 들면서 무뎌져가는 감각을 무장해제 시키는 영화를 만난 것 같아 반가웠다.
 
사려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영화 관람을 이끌어 준 딸에게 감사하다.
 
큰 위로가 되었다.
 
아빠가 힘낼게” 

(2015. 5. 15)

...홍문종 생각
 
 

2015년 5월 14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종점 이용원

 

종점 이용원

 
 
대원여객 106(13) 종점에 위치한 종점이용원에 들러 머리를 정리했다.
 
선거구가 바뀐 뒤로는 자주 찾게 되지 않아 오랜만이었지만 어제 본 사람처럼 살갑게 반기시는 주인장의 미소가 있어 편안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스스로의 품격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발 기술에 관한 한, 오랜 기간 한 우물을 파 온 장인의 꼿꼿한 자부심이 그의 삶을 충분히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처럼 전통적인 머리 모양을 낼 수 있는 명품 이발사는 드물다고 한참을 강조하던 그가 스스로를 이발 명장반열에 올렸는데 반감이 들지 않았다.
 
실제 머리를 다듬는 손놀림을 보니 단순한 가위질이 아니었다. 작품을 다루는 예술가의 손길과 다르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솜씨를 인정받아 과거, 두 분의 대통령을 모시기도 했다니 자부심을 가질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순을 훌쩍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내 활력이 넘치는 입담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군대를 삼대 째 다녀온 집안에 대해 공무원 특채 등 사회적 이익을 주는 법을 만들어 국가 의무에 충실한 사람들이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라는 주문은 귀에 쏘옥 담겼다.
 
갈수록 젊은이들이 군대를 기피하는 현상이나 군대는 배경없는 집 아이들만 가는 곳으로 인식되는 우리 사회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쓴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 얘기를 묻길래 두 아들 중 하나는 제대했고 하나는 군 복무 중이라고 했더니 자신의 동해 경비사령부 시절의 무용담을 들려주며 신명을 내셨다.
 
 
그러다가 문득 머리를 깎던 그가 내 이마에 관심을 가졌다.
 
한참을 이마에 눈길을 주더니 굉장한 이마를 가졌다며 큰 인물이 될 상이라고 덕담을 했다.
 
역대 대통령들의 이마에 대한 나름의 평가도 들려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이발소 앞에서 함께 사진 찍기를 청했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건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명품 이발사가 되려면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을 매만지는 솜씨도 여간 아니어야 할 듯 싶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하루에도 몇 번씩 평상심 유지를 위해 애를 써야 하는 요즈음, ‘종점 이용원에서 얻은 활력이 참으로 감사했다.
 
더욱 기품 있는 이발의 명장으로 거듭나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2015. 5.12)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