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30일 금요일

홍문종생각 - 용서와 화해

용서와 화해



정치하는 사람 치고(호불호를 떠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 특히나 큰 정치를 꿈꾼다면 반드시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할 정치인 중 최우선 순위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만큼 우리의 현대 정치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서거 1주기를 맞아 세상에 나온 그의 ‘회고록’에 쏠리는 세간의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

‘서자’ 신분이었던 출생의 비밀부터 YS와의 단일화 실패, 연예인 김미화에 대한 코멘트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세세하게 삶의 흔적을 담은 그의 회고록에서 특별히 내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박근혜 전대표를 언급한 내용이었다.

실제로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2004년 8월 정적(政敵)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자신을 찾아와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보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드립니다”라고 말한 일을 소개하면서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했다.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는 소회를 남겼다.

아버지를 대신한 박전대표의 사과에 구원을 받은 것만큼 기뻤다는 노정객의 솔직한 고백이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용서와 화해가 그려내는 한편의 감동적인 대서사시를 보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인간을 동물과 차별화하는 정서 중에서 용서와 화해만큼 인간의 위대성을 부각시키는 기능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일상을 둘러보면 말처럼 수월하게 용서와 화해가 이뤄지는 건 아니다.

선뜻 사과하기도 그렇지만 용서 역시 쉽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그렇다.

내게도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도저히 용서가 안되는 몇 몇의 인연이 있다. 지금으로서는 상대가 어떤 식의 사과를 한다 해도 쉽사리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깊은 앙금이다.

그런데 박근혜 전대표의 사과와 관련한 김 전대통령의 술회는 (역사적 평가는 차치하고) 우리가 놓지 못하는 반목의 앙금들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용서’의 화두는 중복을 맞아 모인 가족모임에까지 따라붙었다. 작고한 지 5주기 째가 되는 동생 때문이었다.

동생은 지병으로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일기를 기록했는데 형인 내게 미처 말하지 못했던 심중의 이야기도 많이 담아 놓아 읽을 때마다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다.

그 중 중학교 때 없어진 돈을 절대로 가져가지 않았다고 강조해 놓은 부분은 쉽사리 덜어낼 수 없을 마음의 짐이 되고 말았다. 동생에게 해 주지 못한 미안함 중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로 말이다. 동생이 죽기 전에 말해주었더라면, 아니 내가 미리 사과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아무 쓸모도 없다.



연로해지는 부모님께서도 가끔 주위에 사과하고 싶거나 용서하고 싶은 지인들과의 일들을 말씀하신다.

특히 젊었을 때 이런 저런 연유로 소원해진 인연들에 대해 많이 아쉬워하시는 것 같다.

부모님들 대신이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나서서 용서를 구하거나 화해하고 싶은데 '길'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잘못한 일에 대해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인간답게 만드는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용서를 구하는 상대를 품어주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김대중 전대통령으로부터 새로운 과제물을 부여받은 느낌이다.
(2010. 7. 30)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28일 수요일

홍문종생각 - 황제, 아무나 되나?

황제, 아무나 되나?



용산 쪽방촌에서 6300원(현재의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책정된 금액)으로 1박 2일의 생계를 해결하는 체험릴레이가 화제다.

오는 9월 1일 최저 생계비 책정을 앞두고 수급자들의 절박한 현실을 역지사지하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참여연대가 주관하고 있는 행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행사에 참여했다가 곤욕을 치르는 여당의원이 있다.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이다.

그는 6300원의 생계비를 요령껏 운영해서 1박 2일을 황제처럼 지낼 수 있었다는 요지의 체험후기로(그것도 보도자료까지 동원해서 홍보했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다가 구설을 자초했다. 의식주 해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인간의 삶임에도 불구하고 먹는 문제의 일시적인 해소가 전체 삶의 해결책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떤 경솔함이 화근이었다.

뒤늦게 사과문을 올리는 등 수습에 나서는 모양이지만 그가 입게 될 정치적인 타격은 불가피할 것 같아 안타깝다.



차 의원 해프닝은 최저생계비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한 탓이 크다고 본다.

평소 직접 장보기를 한 경험이 전무한 나 역시 생계비에 대한 감각이 다른 사람보다 나을 리 없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300원’이 1박 2일의 생계를 해결하는 비용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금액이라는 건 알 수 있을 것 같다.

빈부 격차로 인한 사회적 갈등 구조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안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점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최저생계비의 문제는 얼마냐의 문제가 아니라 부족한 최저생계비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은 받아들이는 입장차이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배가 고프다는 민중을 향해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던 철없는 발언으로 급기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불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던 마리 앙뜨와네트의 자기본위적인 인식과 닮아있다.

똑 같은 삶이라고 해도 선택의 여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과의 차이는 극과 극이다.

무엇보다도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주체가 되는 사람들의 배려없는 여유로움은 때로 삶의 극단에 몰린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독성이 되기도 한다. 없는 사람들의 고통에 둔감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저생계비가 통계수치만으로 결정되기보다 관련자들로 하여금 단 하루라도 쪽방체험을 의무적으로 참여도록 하면 어떨까 싶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체험이 기초생활 수급자들의 절박한 애환을 조금이라도 역지사지 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진 사람들 눈에 비치는 가난은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는 무능이다. 그런 대상을 배려나 이해로 감쌀 리 만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잘못된 편견이다.

대기업이 수많은 중소기업이나 노동자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부자의 안락한 삶 역시 다른 이들의 조력 없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경주 최부자 댁이 200여년 동안이나 존경받는 부자 가문으로 유명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10대를 이어오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으로 부의 철학을 실천한 덕분이다. 그것은 어쩌면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우리 삶의 원형을 이해한 지혜로운 처신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잇단 설화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요즈음이다.

요는 가진 자의 교만과 방심의 문제다.

좀 더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을 성찰한다면 최소한 낯부끄러운 소동의 주인공으로 등극하는 불운은 막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다.



황제. 그거 아무나 될 수 있는 거 아니다.

덥다.
(2010. 7 .29)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27일 화요일

홍문종생각 - 나와 그대와

나와 그대와



-홍문종-




오늘 따라 달이 해처럼 빛나고

달무리도 햇살처럼 퍼져나간다
달에게 물어

내가 물어



핼리오스보다도 더 광채가 나는것 같다고

셀레나가 빙그레 미소로 대답해

내가 온 대지에 부드러움이 있다면

활화산 같은 핼리오스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금 눈에는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태양이 있어

오늘 밝은 기쁨으로 세상을 노래 함이야

타오르는 광채가 있어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해에게

당신의 무엇이

달님까지도 환하게 빛나게 하는가?




나는 다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라고

있다면

사랑

솟구치는 뜨거움



태양이 힘찬 환호성이고

달이 눈부신 아름다움임은

아폴론

아르테미스




있음에

써니의 눈부심이 있음에

있음에

조이의 활화산이 있음에




해와 달과

조이와 써니와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와

나와 그대와

(2010. 7. 27)

2010년 7월 26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백남준의 후예를

백남준의 후예를



지난 2006년 타계한 천재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다시 접할 수 있게 됐다.

미망인 구요타 시게꼬가 출간한 회고록 ‘나의 사랑 백남준’를 통해서다.

미망인이 연인이자 아내, 예술적 동반자로 고인과 함께 했던 40년 세월의 깊은 속살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알려지다시피 백남준은 광범위한 설치 작업과 비디오 영상, 범세계적으로 TV망을 연결한 작업, 영화, 퍼포먼스 등을 통해 현대미술에서 시간적인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새롭게 형성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거장이다.

열여덟에 고향을 떠나 세계를 떠돌던 작가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우뚝 서게 되기까지의 고단한 삶의 여정이 생생한 육성으로 소개됐다는 점에서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 같다.



백남준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비디오 아트 분야를 창시해서 세계 미술계로부터 주목받았을 뿐 아니라 아시아의 영웅으로 우리나라 예술 문화의 신화가 됐다.

그런 백남준의 케이스만 보더라도 예술과 문화가 미국의 월가보다 훨씬 더 큰 가능성을 발휘하는 세상이 됐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겠다.

문화 예술의 선구자적인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의 인재 환경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확신할 수 있게 해주는 무형의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21세기를 대한민국의 시대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백남준이 섬유업계 재벌가의 막내아들로 안주하는 삶에 자족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국제적 배경이나 교육환경이 지금과 많이 다르긴 하지만 백남준에게 세계 각국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경험이 없었다면 오늘 날 그의 입신양명은 ‘불가능’ 하지 않았을까 싶다.

각국의 특성을 골고루 섭렵할 수 있었던 교육환경이야말로 그의 예술적 감수성을 성장시키는 일등공신이었던 셈이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교육시장 개방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우리가 세계를 품기 위한 필수 절차라는 측면에서도 우리의 교육시장을 세계에 오픈하는 것을 더 이상 주저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오바마는 아시아를 휩쓸고 있는 한류의 기적을 한국의 교육 덕분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오바마가 그리고 세계가 우리의 교육 경쟁력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페쇄된 우리의 교육시장은 열릴 줄 모르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서일까?

한국 교육시장이 개방되면 우리 학교 같은 그룹이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시장 개방을 부르짖는 건 개인적인 이해득실보다 공동체가 입을 손실을 생각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경쟁 구도에서 이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세계로 뻗어나갈 기회를 찾아야 할 시점이라는 충정 때문이다.

물론 교육의 특수성 때문에 자칫 정신적 혼혈아가 양산되는 부작용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공포심 때문에 해외 교육의 한국 시장 유입을 막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님에랴.



쇄국 일변도의 교육정책은 우리의 미래를 지우는 일에 다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제2, 제3의 백남준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손실규모가 막대해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민족적 자질과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으로 과감히 문호를 개방하자.

백남준의 후예들로 우리의 지평을 넓히자.

그렇게 세계를 접수하자.



백남준 미망인의 책을 통해 확실해진 개인적 확신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 쓴 글이다.

혜량 있으시길....
(2010. 7. 26)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25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사랑은

사랑.

막상 사랑의 의미를 정의하려고 하니 딱 떨어진 설명이 입에 붙지 않는다. 입 속을 맴돌고는 있는데 정리되지 않는 버벅거림 때문에 허를 찔린 느낌이다.

인터넷을 통해 ‘사랑’을 검색해 본 결과 문학.·도덕·철학·종교 모두에서 가장 근본적인 관념의 하나(브리태니커),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나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국어사전)이라고 설명돼 있다.

최근 그 사랑 때문에 끔찍한 참사가 일어나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한 젊은이가 자신의 사랑을 방해한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여자친구를 상대로 인질극까지 벌이는 파란을 일으켰다.

무분별한 광기로 이어진 비뚤어진 사랑이 문제였다.

사랑으로 인해 형성되는 여러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생각한다면 너무나 어이없는 결말이다.

자신의 욕망에 지나치게 매몰된 나머지 여자친구나 그 부모님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그가 면죄부라도 되는 양 시종일관 사랑을 말하는 모습은 그로데스크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일상을 통해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단어가 사랑이다. (특히 남녀간의 사랑) 그러면서도 점점 알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워지는 게 사랑이 아닌가 싶다.

문명의 발달이 때로 사랑의 트라우마를 남기는 경우가 있는데 간단히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선진화 사회에 접어들수록 사람들의 일상이 바빠지면서 초래되는 현상 중 하나가 남녀 간의 사랑도 덩달아 급속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인스턴트 사랑이라는 말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문제는 사랑의 속도나 방식에 있어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 모든 게 자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급기야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살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게 오늘 날 사랑을 말하는 방식이라면 더 이상의 설명이 무의미하다. 내가 사랑하면 상대방의 거절 의사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고 부모가 반대에는 흉기를 휘둘러서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사랑인가, 무모한 욕망일 뿐이지.



기다림의 미학이나 지고지순한 사랑의 완성을 보여주는 ‘성춘향과 이몽룡’이나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황진이와 서화담’ 등에서 엿볼 수 있는 전통적인 사랑방식을 얘기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변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젊은이들의 사랑 방식에 있어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 옛사람의 사랑 방식을 벤치마킹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동의를 얻어내고 허락을 받고 더 나아가 축복을 받는 절차를 위한 노력은 사랑의 완성을 위해 지불해야 할 당연한 절차다.

자기 딸을 모르는 남자에게 내어 주어야 할 어머니 입장에서 주저하고 망설이고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어머니의 망설임이나 반대 이유를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사랑을 말할 기회가 된다면 몇 가지 당부를 남기고 싶다.

책임질 수 없다면 사랑하지 말라. 그리고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사랑은 거의 없다. 사랑을 이루어가는 과정엔 생각지 못했던 역경들이 수없이 많은 고통을 요구하며 곳곳에 매복돼 있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사랑은 자기희생을 전제로 완성될 수 있다는 각오와 신념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방식이나 속도를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상대방의 것을 들여다보며 거기에 나를 맞추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자기만의 사랑 방식에 집착하고 상대의 사랑 규칙을 무시하는 건 이미 사랑이 아니다. 횡포라는 점에서 이미 사랑할 자격을 상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으로 사랑을 얻을 수는 없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할 사안이다.

마지막으로 양념삼아 한마디 더 추가한다면 오랜 세월동안 빛이 바래지 않는 사랑을 간수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사랑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얘기해주고 싶다.



너무 교과서적인 당부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말해 준 사랑의 지침들이 지금 사랑하는 모든 청춘남녀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처방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러분에게 사랑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은 나 자신 역시 사랑의 완성도가 그다지 내세울 만한 처지가 아님을 고백하는 바이다)

이번 사건이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를 만들어 줬다.

충분히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2010.7.25)

....홍문종 생각

홍문종 생각 - 빅브라더의 손

빅 브라더의 손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이 문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빅 브라더는 시민 통제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과거의 모든 기록을 왜곡하는 것은 물론 인간의 감정까지도 관리하고 있다. 시민들은 국가의 지도와 통제 아래 조작된 진실과 왜곡된 역사로 세뇌되는 일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텔레스크린’이라는 감시카메라가 공공장소는 물론 회사의 사무실이나 구내식당 심지어 개개인의 집안에까지 설치돼 모든 행동과 대화가 체크되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이번 총리실 불법 사찰 사건을 접하면서 ‘1984년’을 떠올렸다. 60여년전(‘1984년’은 1949년 출간됐다) 소설을 통해 경고된 감시사회의 암울함이 재현되는 현장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소설 속에는 정보화라는 미명 아래 개인 정보를 무단유출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들어있다. 조지오웰의 통찰력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CCTV, 신용카드, 휴대전화, PC, 전자우편.... 인간의 자유를 배가시켰던 문명의 이기가 이제는 자유를 구속하는 족쇄가 되어 우리의 사적 영역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트루먼 쇼’와 ‘빠삐용’ 그리고 ‘쇼생크 탈출’ 등 예전에 봤던 영화들이 떠올랐다. 전부 자유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열망을 표현한 영화들이다. 자유가 인간의 원초적 권리이며 인간 최대의 가치라는 사실은 물론 자유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치열하게 인간의 본능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 공감대를 자극했었다. ‘freedom'이나 ’I'm free' 등의 외침으로 자유의지를 보여주던 극 중 주인공들의 모습이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할 만큼.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을 몰래 훔쳐보는 재미에 흥미를 느낀다고 한다. 심할 경우 일종의 정신질환으로까지 분류되는 관음증은 후진국일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도 종종 사회적 공익을 앞세운 권력 기관의 관음증이 사회적인 물의를 빚는 경우가 많았다. 지배 계급층의 통솔을 쉽게 해준다는 점에서 권력이 유혹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권력의 사찰행위는 개인의 관음증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후유증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중범죄로 처벌받아야 한다.

언제나 인간의 과욕이 화근인 것 같다.

권력의 만용이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근원적 배경이 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역대 정권의 수많은 시행착오만으로도 충분한 학습효과가 될 법한데 똑 같은 어리석음이 반복되는 건 참 아이러니다.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한 권력이 어떤 식의 최후로 마감되는지 너무나 많이 봐 왔으면서도 불행을 자초하는 그 속을 모르겠다. 잘못이 확실하고 또 잘못인줄 알면서도 반복되는 불운의 역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제어될 수 없는 권력의 속성 때문일까?

누군가에게 나의 일상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보이지 않는 눈길에 관찰 당하고 있다는 강박감은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불법사찰 혐의로 이인규 전 지원관이 구속수감 됐다.

불법사찰이나 사임압력 혐의를 부인하는 이 전지원관의 표정에서 ‘나라를 위해 할 일을 했는데 무슨 잘못이냐’는 항변이 읽혀진다. (그런 그에게서 권력의 중독현상을 감지하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이번 사건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건이 연이은 공세와 폭로전으로 이어지면서 권력투쟁 양상으로 번지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어디까지 그 불똥이 튀게 될 지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나 정직이 최선의 무기라는 말을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지금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 게 더 현명한 처세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닉슨으로 하여금 세계 최강의 막강 권력을 놓게 한 워터게이트의 결정적 잘못은 ‘거짓말’이었다. 워터게이트는 거짓말 꼼수로 잘못을 덮으려다가 점점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죄과’를 만들어 버린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당시 잘못된 국가권력을 응징한 힘은 국민여론에서 나왔다는 사실 또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국민 여론이야말로 빅 브라더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켜낼 수 있는 상수의 힘인 셈이다.



총리실 사찰 건이 우리에게 국제적 망신을 안겨주는 결론이 될까봐 걱정이다.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모두가 이번 사건에 대한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리는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정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며 실제로 이 배후를 조종했던 사람들이 나는 괜찮지 않겠나 안주하고 있다면 역사와 민족의 심판을 반드시 받게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자 역시 반드시 퇴락하게 된다는 사실또한 명심해야 할 사안이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건 철저한 규명 과정을 통해 한국사회가 이번 기회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권력에 대한 감시의 끈을 결코 늦춰서는 안되겠다는 국민적 자각이 절실한 시점이다.

깨어있는 국민여론이 명품의 국가 권력을 만들어내는 자원임을 잊지 말자.
(2010.7.24)

....홍문종 생각

홍문종생각 - 나라 밖에서 보니

나라 밖에서 보니



일본 출장 중이다.

덕분에 오랜 만에 일본 내 지인들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반가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나라 사람들의 시각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대화 중 견해가 상충되거나 일치되기도 했는데 개인적 성향이라기보다 국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조심스러움 때문이었다.



때 마침 34년 만에 최대 규모로 한미양국이 합동훈련을 시작한 상황이 관심을 끌었다. 이를 위해 미국의 국방 외교 양 부처 장관이 태평양을 건너 와 있는 상황 때문에 더 크게 부각되는 것 같았다. 미국이 영국에 대한 ‘냉대’를 풀고 디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정상회담을 연 근황도 화제가 됐다. 그 밖에 미국의 품을 벗어나 독자적 활로를 모색하는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 미래에 대한 전망도 모여있는 사람들의 관심거리 중 하나였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패권국의 약소국 원조공여 의도를 바라보는 관점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국제사회에 나라의 명운을 내맡긴(?)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의 결정적 문제점은 일정 수위에 이르지 못한 민도나 정치적 수준 때문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들 국가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동안 원조수혜국이었다가 이제 막 신흥 원조공여국으로 데뷔한 대한민국의 향배에 대해서도 관심이 컸다. 남북한 대치라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리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과연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해법을 찾아가는지 예의 주시하는 모습이었다.

일본 내의 반미감정에 대해서는 좌중이 기본적으로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일본은 국익 관점에서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미국과의 밀고 당기는 협상에 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자리에서도 일본이 미국을 (경제적으로)원조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다만 군사적 동력 없는 경제적 우위가 오히려 일본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음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들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오면서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 일본과 동일한 절차를 밟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이번 정상회담 때 캐머런 영국 수상이 안개 때문에 헬기이용에 곤란을 겪자 비행기를 보내주는 등 우애를 과시했다. 지난 해 미국에서 열린 G20 회의 당시 5차례에 걸친 브라운 (캐머런의 전임)총리의 오바마 면담요청을 거절하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어쩌면 이런 모습들이 미국과 세계와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논란을 초래한 전작권 환수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국제사회에서 패권국이 약소국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강대국의 일방적인 강압외교에 짓밟히고서 눈물을 흘리는 약소국 설움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냉혹한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살벌한 생존경쟁의 현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저 자국의 이익만이 최대의 가치이고 정의인 것이다.



그동안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조금만 지나치면 사대주의 논쟁에 휘말렸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다. 독자노선으로 치고 나가려 해도 과연 독립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국민적 불안감이 발목을 잡기 일쑤였다. 그것이 엉거주춤 할 수 밖에 없었던 대한민국의 속사정이다.

햐지만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그 저력을 이미 검증받았다. 우리의 지향점을 찾아가는 해답도 이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아젠다로 목표점에 도달할 것이냐의 문제는 남아있지만.

영국처럼(영국과 미국은 형제라는 의식이 강하고 캐나다까지 한나라처럼 움직일 때가 많다) 미국과 공조할 수 있는 역사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닌 우리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양키 고 홈’을 모델로 삼기엔 우리의 국력이 너무나 불안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조금만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북한을 끌어안고 더 나아가 통일 독립 국가로서 확고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의 리더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변국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우리의 독립을 이어나갈 수 있는 지략은 물론 독립 국가의 지초적 틀을 놓을 수 있는 지도자의 안목 말이다.



지금 정치권에서 이원집정제 개헌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탐욕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지금 누가 대통령 되고 권력이 어떻게 나누어지고...그저 모두가 다 3년 이내 밖에 내다볼 수 없는 단견에 빠져 한치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코미디다.

그런 가벼움으론 세계를 호령할 대한민국의 절대권력을 들어낼 수 없다. 제대로된 리더십이 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정신을 더 바짝 차리고 우리의 위상을 정립하자는 간곡한 부탁이다. 나라 밖에서 보니 애국심이 저절로 커지는 것 같다.
(2010.7.22)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19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이번에는

이번에는



국회의원 시절, 대통령에게 전화를 받고 청와대에 가서 밥을 먹어 본 적이 있는데 초선이었던 내게는 이벤트로 느껴질 정도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 때 내가 느낀 청와대는 지나치게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들고 나는 일은 물론 사람 만나는 절차도 몹시 까다로웠다.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불가피한 정황이 겠지만 문턱이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턱을 낮춰 소통을 위한 노력으로 좀 더 다양한 계층의 의견이 가감없이 전달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더불어 했던 것 같다.

청와대 생활을 했던 주변 사람들도 청와대가 대통령에게 있어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일거수 일투족이 낱낱이 노출돼 사적 영역이 제한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자기 권력에 대한 과신과 반드시 달성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그리고 이를 이용하려는 보좌진들의 절제되지 않은 탐욕 때문에 의외의 곳에서 문제가 꼬이는 경우가 많이 벌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회동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청와대 쪽에서 섣부른 접근으로 실패했던 이전의 전철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한 만남이 되도록 하겠다는 의지도 보이고 있어 이에 대한 한나라당 내 분위기 역시 상당히 고무돼 있다.

대통령은 정치나 한나라당에 대한 호불호 성향과 상관없이 국민 모두와의 소통을 기본 전제로 삼아야 하는 위치다. 그런 만큼 금번 두 분의 회동이 표류하는 여당을 진정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를 도출해내기 바라는 기대감 때문인 것 같다.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어차피 모든 사람의 의견을 다 존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또 대통령이 생각하는 것과는 안목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야기되는 문제점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에 다르게 볼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야 할 당사자는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의 도량을 구하기보다 대통령 스스로 이해하고 품어줘야 하는 어려움에서 구중심처의 고독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그동안의 아프고 속상한 기억들이 앙금으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상대보다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배려하겠다는 의지면 통하지 않을 대화가 없다고 본다. 특히 대통령이 이를 주도한다면 더 할 나위 없다.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에 대해 ‘저 사람이 내게 왜 잘못 하고 있을까’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왜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까’에 먼저 초점을 맞추는 것이 소통의 첩경이다.

대통령은 많은 것을 성취한 위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겸손해도 누가 되지 않는다. 남의 말을 잘 들어줘도 그것으로 인한 손해보다는 이익이 커지게 돼 있다.

모르긴 몰라도 ‘도량의 미덕이 성공한 대통령 인생을 완성시키는 화룡첨정이 될 것이다.



이왕 만나기로 했다면 긍정적인 성과를 기대한다.

두 분의 대화가 좋은 결실을 맺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선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성공적인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정성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열고 듣는 건 기본이고 솔직한 접근을 통해 상대가 나를 위해 진정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게 한다면 가슴을 연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집권 중반기를 돌아서는 대통령 입장에서 많은 이들의 협조가 필요한 시점이다.

국정이 안정돼야 국민이 행복하다는 측면에서 이번 대화가 많은 이들의 이해와 협조를 구할 수 있는 통로로 작용될 수 있었으면 한다. 특히 당내에서의 협조가 중요한 시기인 만큼 좋은 결실을 얻는 소통의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소탐대실의 꼼수는 절대 금물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2010.7.19)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18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스티브 잡스와 아이폰4

스티브 잡스와 아이폰4



지난 16일(현지시간) 쿠퍼티노 본사에서 열렸던 애플 CEO 스티브 잡스의 기자회견이 화제다. 아이폰4의 결함에 따른 논란을 해명하기 위해 열린 자리였는데 당사자로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회견이었던 것 같다.



아이폰4가 애플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지만 완벽하지는 않다는 말로 회견을 시작한 그는 지난 3주간 300만대를 팔았는데 제품 불만에 따른 반품율은 1.7%라는 데이터를 제시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는 또 고객 불편을 최소화를 위해 아이폰4의 문제점 해결에 최선을 다할 것이며 우선적인 조치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와 케이스 무료 제공. 환불, 반품 처리 계획을 밝혔다.

투자자들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사과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애플은 고객의 신뢰를 바탕으로 미래 지향적인 투자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작은 문제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일환이었다.

그는 구글을 예로 들며 잘나가는 기업을 깎아내리는 언론 풍토에 불만을 토로했는데 특정 언론의 경우 ‘쓰레기’라는 격한 표현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언급되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4를 부정적으로 보도한 언론을 질타하면서 특히 미국 언론을 향해 ‘애플이 한국기업이면 좋겠느냐, 아니면 미국에 남아 이런 제품으로 세계를 주도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솔직히 뿌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기업이 그만큼 국제적 경쟁력을 갖고 있는 반증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달 30일, 아이폰4가 추가 출시된다는 발표가 이목을 끌었는데 17개 대상국에 우리나라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접 밝혀 이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이폰4가 ‘담달폰’이 되었다는 소식은 국내 애호가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제외된 배경을 놓고 KT가 시달리는 후유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의 회견에 대해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호감이 간다.

토요일 아침 CNN 뉴스를 통해 기자회견을 지켜보았는데 엔지니어의 고집과 자부심을 엿보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이폰4의 결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자사제품에 대한 두터운 애정과 자신감을 내보이는 CEO의 당당함이 오히려 신뢰감을 갖게 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솔직함과 자신감을 무기로 한 그의 대응 태도에서 위기에 대처하는 리더십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폰4의 결함으로 인한 구설에도 위축되지 않고 자사의 가능성을 부각시켜 현재보다는 미래를 보고 투자할 것을 주문하는 스티브 잡스의 자신감 넘치는 설득력이 놀라웠다.

악마적 천재, 메시아 ,독재자, 인간착취자, i절대권력, IT의 신 등 극단을 오가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독보적인 아이콘, 이 시대 최고의성공한 CEO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스티브 잡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 경영 전략에서 벤치마킹한 아이디어 하나가 있다.

신제품 발표를 최대한 늦추는 전략으로 소비자의 구매심리를 높이는 애플의 마케팅 전략은 한시라도 빠른 시일에 신제품을 출시하는 일반 마케팅 발상과는 다르다. 정보에 대한 소비자의 갈망이 극에 달할 때까지 제품 공개를 미루고 구매하는 과정 역시 줄을 서서 기다려야 살 수 있도록 접근성을 제한함으로써 구매 욕구를 높이는 것은 물론 만족도도 극대화 시키는 전략이 그것이다.

제한된 접근성은 독선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브랜드 가치나 사람의 가치 높이는데 지대한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미지의 사전 홍보를 통해 존재성은 널리 알리되 접근을 제한함으로써 브랜드 가치를 높여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안은 인간 경영에도 필요한 전략이 될 듯 하다.



혹시 여러분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됐으면 좋겠다.
(2010. 7. 18)

....홍문종 생각

홍문종 생각 - 愛夏雨

愛夏雨

-홍문종-





비가 오니

마음이 우니

이 오랜 세월 보내니

아픈 마음으로 먼 하늘 바라보니



물안개 산을 빠져 나오려

발버둥 치는데

홀로 솟은 듯 장송은

작별하려는 것인지 맞으려는 것인지

애끓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 모습은 아련하고



메아리조차 없는 이 슬픔

누가 알겠소

오호라 세상이 끝이면

소멸되는 것이라 달래보아도

지금 아픈 이 가슴을

어찌 기다린단 말이오

일없이 내리는 빗방울만

서럽다 하는구려

(2010.7.17)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15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트위터

트위터



드디어 트위터 세계에 입문했다.

어리둥절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이리저리 매뉴얼을 익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요즈음이다.

2년 전 블로그를 처음 시작할 때보다 훨씬 더 큰 문화 충격으로 다가온다. 새롭고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다는 자극이 적지 않은 기대감과 설레임을 주고 있다.

트위터 계정만 있으면 누구나 만날 수 있다. 다양한 생각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접할 수 있고 개인적인 생각도 언제든지 전할 수 있는 세상이라니 생각만 해도 놀랍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결과물이 우리 앞에 펼쳐질지 모르지만 현재로선 트위터가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터넷 정보 네트워크의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트위터는 순발력을 동반한 위트와 기지의 총체적인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수없이 쏟아지는 글 무더기 속에서 140자의 단문만으로 눈길을 끌어야 하니 오죽할까 싶다.

나 역시도 뭔가 독특하고 새로운 내용이 아니면 솔직히 읽게 되지 않는다.

그런데 순간적인 발상 위주로 운용되는 트위터의 속성이 자칫 오래참고 기다리는 인간의 미덕을 훼손시키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되도록이면 빨리 생각을 쏟아내야 하는 속도전에 밀려 자칫 숙성된 사고 자체를 경원시 하는 풍조가 정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발력이나 톡톡 튀는 감성만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다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한 구절의 깨달음을 위해 평생을 면벽수행에 바치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찰나적이고 표피적인 것으로는 풀어내지 못할 간단치 않은 세계임에 틀림없다.

트위터의 모든 순기능을 동원한다 해도 결코 대변할 수 없는 심오함이 거기 존재하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될지 모르겠다.



아무튼 앞으로 열심히 해서 미지의 신세계를 정복하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다.

이 초짜의 지저귐에 많은 분들이 귀 기울여 주시길 부탁드린다. 짹!짹!짹!

(트위터에서 '홍문종'이나 'mjhong'으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2010. 7. 15)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14일 수요일

홍문종생각 - 문어와 월드컵

문어와 월드컵

축구 하나로 지구촌 전체가 울고 웃으며 행복해 하던 시간이 꿈결처럼 지나가 버렸다.
스페인이 오랜 불운을 딛고 80년 만에 축구 최강국의 권좌를 차지하면서 월드컵 축제가 막을 내렸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결승전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내기에 나섰는데 나는 네덜란드를 우승후보로 꼽았다. 스페인 전력을 우위로 판단하면서도 네덜란드 승리에 힘을 싣게 된 건 순전히 ‘월드컵 점쟁이’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문어 팔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팔머의 스페인 간택(?)이 나로하여금 거의 자동으로 네덜란드 편에 서게 한 것이다.
아무리 신통력이 있다고 한들 설마 100%까지 적중할수 있으랴 싶은 요행수가 생각 한 편에 있었다. 막판에 펠레까지 스페인 손을 들어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인간의 심리라는 게 참 묘한 거 같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보다 소수가 선택하는 길이 더 특별하고 그럴 듯 해 보인다. 그래서 더 관심을 갖게 된다. 특별히 요즘처럼 ‘유별난 개성’을 주문하는 세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우승후보로 공감하는 스웨덴을 제치고 네덜란드를 선택한 내게도 비슷한 심리가 작용한 것 같다. 게다가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 미물인 문어에 따를 수 없다는 치기어린 반발심이 무조건 문어의 반대편에 서게 만든 측면도 있다.

결과는 문어의 완벽한 승리였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잘난 척하고 폼 잡던 인간의 허상이 문어의 신통력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다.
인간이라는 기득권만 믿고 모든 것을 면죄 받으려했던 얄팍함을 들킨 것 같아 머쓱했다.
각국의 수많은 스타플레이어와 아트사커, 오렌지군단, 전차군단, 삼바축구 등 대표단의 이름만큼 멋진 축구실력에도 불구하고 고지를 눈앞에 둔 레이스에서 하나 둘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통해서도 인간의 한계를 볼 수 있었다. 실수와 오판을 반복하는 그 불완전성만으로도 인간이 얼마나 많은 한계에 노출돼 있는지 그 실상을 깨닫게 됐다. 그 무엇도 스스로에 대해 장담할 수 없는 참으로 나약한 존재의 실체 그대로였다.
그런 점에서 여덟 개의 골로 월드컵을 제패한 스페인의 우승은 기적에 가깝다. 조화와 화합(스페인의 민족 간 내분으로 인한 지역갈등은 우리 못지 않다)을 기치로 갈등 봉합에 최선을 다한 감독의 안목과 팀의 성실성이 기여한 바 크겠지만 행운도 크게 따른 것 같다.

어찌 보면 화려함도 막강함도 정교함도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는 있으나 그것들이 축구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월드컵이 아니었나 싶다. (개인적으로도 인간이 미물보다 미욱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월드컵을 통해 축구 경기만 즐긴 건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승패의 엇갈림에서 미래를 준비 하되 항상 완벽할 수 없다는 겸손함을 잃지 않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어느 덧 정상에 오르게 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이제 남아공 월드컵은 아쉬움을 남기며 세계 역사의 뒤편으로 넘어갔다.
월드컵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가슴에 새기며 4년 후의 설레임을 다시 기약해본다.
그 때 쯤이면 대한민국 대표팀도 스페인처럼 화려하게 개선가를 울리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2010.7.13)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12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유리동물원

유리동물원



고백하건데 안에 있을 때는 정치판이 이렇게 비쳐지는 곳인지 몰랐다. 이렇게 까지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몇 년간 정치판을 떠나 보니 알겠다. 국민들이 어떤 심정으로 정치판을 지켜보고 있는지.

밖에 있으니 환히 들여다보이는 정치판 행태가 참으로 가관이다. 유리동물원 속 원숭이를 구경하는 기분이 이럴까...

우스꽝스러운 원맨쇼가 따로 없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에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지경이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 자신을 치장한들 국민들 눈에는 벌거벗은 임금의 자아도취일 뿐이다. 그 후진성이 국민들에게 얼마나 한심하게 비쳐지고 있는지 안다면 차마 못할 짓들을 멀쩡한 표정으로 해내고 있는 무모함이라니.



전당대회를 앞두고 제어되지 않는 진흙탕 싸움으로 치닫고 있는 백가쟁명의 한나라당에서도 비슷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오죽하면 직전 대표가 이대로 가다간 (한나라당 운명이) 타이타닉 같은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고 걱정하겠는가.

지도부가 되겠다고 나선 후보들 간의 이전투구만으로도 기운 빠진 당의 명운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정당 존립을 위한 외연 확장 기회로 삼아야하는 전당대회의 원래 목적이 무색해질 정도로 치명적인 공격과 독설이 난무하고 있다. 사욕 때문에 당의 존립기반이 흔들리는 형국이다.

지켜보고 있는 국민이나 당원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 것 쟁취에만 혈안이 돼 있는 모습들이다. 스스로의 행동이 당에 어떤 식으로 위해를 가하고 있는 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기심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명색이 당의 대표를 뽑는 선거인데 전국적인 이슈 하나 없다. 국민적 지지는커녕 관심조차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

올망졸망 난립된 후보들이 명분도 철학도 없이 그저 치고 박기로 그들만의 치졸한 리그에 열중하고 있다. 자신은 물론 당 전체의 명운을 갉아먹는지도 모르고 서로를 향한 삿대질에만 열을 올리는 모습이라니.

그렇다고 처절한 자기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열 명이 넘는 후보들이 자신만큼은 당의 과오와 무관하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지방선거 참패결과로 당에 철퇴를 가한 민심을 생각한다면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우리 당이 이런 잘못을 했다. 너무나 잘못됐다. 앞으로는 잘 할 테니 용서해 달라는 읍소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디를 봐도 정작 있어야 할 고해성사는 없고 오직 나만 잘났고 다른 후보는 못났다는 주장 투성이다.

그렇게 해서 지도부가 선출된 들 어떻게 그 권위를 보장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국민과 당원에게 철저하게 외면받는 지도부는 안타깝지만 단명할 게 뻔하다.

암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래서는 한나라당의 미래는 없다.

한 두사람의 개인적인 영향력으로 조종되는 정당구조로는 더 이상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없게 돼 있다.

아무리 용을 써도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정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의 마음을 담지 못하고 정권재창출을 꿈꾸는 건 언감생심이다.

핵심은 지도부의 의중이 아니라 민심이라는 엄밀한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번 전대를 통해 기존 틀을 깨고 거듭나야 그나마 살 길이 있다. 입으로만 외치는 쇄신이 아니라 뼈 속 깊이 반성을 거친 쇄신의지로 당 재건에 나서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함이어야 한다.

계파와 보스에 매달리기보다 세상과 국민을 바라보는 새 모습으로 환골탈태하느냐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유리동물원을 과감히 깨뜨려야 한다.

그래야 길이 보일 것이다.



한명이라도 내 주장이 틀렸다고 반박해 줬으면 좋겠다.

그만큼 희망의 분량이 많은 증거가 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2010. 7. 12)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10일 토요일

홍문종생각-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품 인생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품 인생을



방학 때문에 생긴 여유를 세상살이에 쏟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동안 바빠서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이나 특별히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이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며칠 전 내 정치행로에 危害를 가하고 상처를 줬던 ‘사람’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배신자라 칭하며 자신의 지난 죄상(?)을 고해성사했다. 본인은 숨겨진 그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물론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일련의 음모들이 당사자의 입을 통해 재생됐다.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삶의 줄기를 쥐고자 하는 방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바닥을 송두리째 드러내 내게 내밀었다. 나를 배신했던 대가를 제대로 얻지 못했던 울분도 함께 보여줬다.

담담한 마음으로 그를 볼 수 있었다. 평정심의 발로라기보다 인간의 나약한 한계를 확인하게 되면서 전의를 상실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주변인의 유고를 접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한 끼 먹는 것조차 아까워하며 아등바등한 끝에 무일푼에서 엄청난 자산을 이뤘지만 암으로 세상을 떠난 A씨, 재력가의 아들로 태어나 유일한 취미가 돈쓰기이고 제일 열심히 한 일이 술 마시기로 꼽을 정도로 세상을 허탕하게 살다가 결국 술로 목숨을 잃은 B씨. 돈도 없고 배경도 없이 무색무취로 인생을 가늘게 이어가다가 흔적도 없이 죽어간 C씨,

이들이 남긴 삶의 궤적은 현격히 달랐지만 죽음이라는 종착역은 같았다. 아무리 특별해도 죽음 앞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자손에게 물려준 유산이 화근이 되어 상갓집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경우도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만은 예외라는 생각으로 독특하고 특별한 삶의 주인공을 자처하며 살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부모님이나 이웃의 삶을 판박이로 반복하고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인생이라는 건 어쩌면 자기만의 노래를 부르다 소멸되는 단순한 과정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결국 죽음을 향한 노정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죽게’ 돼 있다면 어떻게 살든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선악의 가치기준이나 또 이에 따른 판단과 실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문득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인생을 막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평생에 걸쳐 나를 관통하는 내 인생의 화두이기도 하다.

아쉽고 허무하다는 생각에만 방점을 찍는다면 그야말로 의미없는 삶이 되고 만다. 경계해야 할 현실이다. 허무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생이라고 해도 결국은 나만의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던 어차피 자기가 믿는 대로 살게 돼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던지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을 죽을 까지 인도라고 믿었던 콜롬부스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 중심의 이기적 사고로 봐서는 진리의 왜곡은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꿈을 향해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 더 없이 소중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현실에서의 삶과 내세를 위한 삶, 둘 다를 충족시키는 가치관으로 인생을 꾸려나가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된 배경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믿자.

나의 꿈을 믿자.

수많은 인생들이 앞서 불렀던 행복과 환희의 노래를 증거로 삼자.

지난 밤 번민의 터널을 뚫고 스스로에게 내민 ‘처방전’이 새로운 에너지로 다가온다.

여러 조건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극복하고 홍문종 만의 명품 인생을 만들기 위한 가열찬 정진을 지금부터 시작해야겠다.
(2010 .7. 10)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8일 목요일

홍문종생각-블랙리스트

블랙리스트



개그우먼 김미화씨가 트위터를 통해 블랙리스트 의혹을 제기하자 KBS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나서면서 논란을 키우고 있다. 과잉 대응이 아닐까 싶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특별한 복안이 있다면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수순처럼 고발을 감행했다면 KBS의 패착이 분명하다. 우선 당장 진중권, 유창선 두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내놓으며 가세하자 KBS에 대한 비난여론이 빠른 속도로 번지는 정황만 보아도 그렇다.

문제는 국민 여론이 권력 주변부에 깊은 불신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외압 시비는 비단 KBS 뿐 아니라 여타 사례를 통해서도 국민반감을 불러온 전력이 있다.

펄쩍 뛰며 결백을 주장하는 KBS보다 김미화의 하소연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역력한 작금의 상황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돼야 할 것이다.



국민에게 있어 입맛에 맞지 않은 인사들에 대한 권력 주변부의 압력행사 혐의는 거의 확신범 수준이다. 김미화의 ‘단발마’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반응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확신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김미화를 또 한 명의 김제동으로 복제시키고 있다. 평범한 개인을 힘 있는 반정부 인사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앞서 비슷한 경로로 형성된 퇴출 인사들의 유명세가 민심에 어떤 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를 보라. 정치권의 러브콜 대상이 될 만큼 거물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한나라당이 총공세에 시달리며 수세에 몰리고 있는 걸 보면 트로이 목마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다.



국민여론이 KBS에 핵심세력이 주도하는 (유형이든 무형이든)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인보다 신뢰받지 못하는 공영방송의 암담한 현실을 목도하는 심정이 착잡하다.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이런 식의 구설은 집권당에 불리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자칫 허명이라도 이름을 날릴 목적이나 이를 부축이는 세력에 의해 제2, 제3의 ‘블랙리스트’ 파동이 획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정황을 걱정해야 한다.

공영방송은 물론 정치적 중립이 담보돼야 할 조직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번 기회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이 외부적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중립성과 공공성을 유지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체질 개선에 나서는 진정성을 보인다면 돌아선 국민의 마음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 힘 있는 인사들의 각성과 역할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권력의 향방과 상관없이 공공성 유지가 가능한 항구적인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확보해 보자.



트위터 세대를 따라잡을 수 있기 위한 기성세대의 고군분투가 필요한 상황이다.

정부의 트위터 세대에 대한 대응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야 한다. 인력도 별로 없는 검경이 이들을 따라잡겠다며 무조건 감시대상으로 몰고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세대와의 공감대 확보는 물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아젠다나 컨텐츠 개발 등의 합리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의 장점을 본받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현란함에 빠져들지 않는 지혜도 요구된다.



때 마침 은평 재선거 국면에서 신경민 MBC 앵커가 이재오 전 권익위원장의 대항마로 거론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블랙리스트 파동이 정부 여당의 발목을 잡는 악재가 되지 않도록 지혜로운 처신이 뒤따라야겠다. 지난 지방선거의 악몽을 재현하는 촉발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2010 . 7. 8)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6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성폭행, 우리 모두의 문제다

성폭행, 우리 모두의 문제다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다.

나라 전체가 아동을 상대로 한 성범죄 때문에 발칵 뒤집혀 있는 이 와중에 보호자와 함께 있던 아동을 상대로 성폭행을 시도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낮에 할머니와 함께 놀이터에서 놀던 여섯 살 여아를 성폭행하려다 검거됐는가 하면 새벽에 집에서 자고 있던 3살, 7살 여아들을 성폭행하려다 함께 있던 할머니가 저항하자 할머니에게 위해를 가하면서까지 재차 범행을 시도하던 범인이 도망가 버린, 믿기 힘든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기가 막힌다.

이제는 홀로 있는 아동 뿐 아니라 보호자와 함께 있어도 그 안위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갈수록 도를 넘고 있는 범인들의 인면수심을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 지 정말 걱정이다.




늘어나는 성범죄 배경에 혹시 환경 파괴가 관련돼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환경 파괴가 비정상적인 주변 여건을 형성하고 그것이 인간성 파멸 초래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단초로 작용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마치 정신질환이 유발되는 과정처럼 말이다.

인간성 파괴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마저도 저버리는 ‘무개념’의 범죄를 양산시킬 수 있다는 가정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솔직히 아동 성폭행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번 처음 일은 아니다. 그 때마다 화닥닥 끓어오르는 여론을 타고 금방이라도 범죄가 '박멸‘될 듯한 기세였지만 결과는 언제나 도루묵으로 끝난 전력이 있다.

인간의 추악함이 어디까지 하한선을 두고 있는 건지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대안 제시가 무기력해지는 분위기다. 성폭행 근절을 위해 ‘화학적 거세’ 등의 방안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근본적 치유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하다. 오히려 사회적 관성이 되어 ‘불감증’을 키우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나로서도 무슨 뾰족한 대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깨우치도록 알려주는 게 그나마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타의에 의해 강요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 인격체임을 가르쳐줘야 한다. 특히 물리적 힘으로 상대의 권리영역을 침범하는 행위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어렸을 때부터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내가 타인의 침범이 싫은 것처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중고등학교에서 윤리나 도덕 부분을 강화하는 노력이 실천돼야겠다. 솔직히 그동안 학력 만능주의에 치여 자라는 세대에게 정작 필요한 인성 교육이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좀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교육현장의 인성강화 교육에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방법의 일환으로 신앙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싶다.

모든 종교들이 계파나 종파를 떠나 인간의 기본소양을 쌓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면 사회적으로 인간성 회복에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즈음 교회나 사찰들이 너무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역사회의 공동체 교육을 통한 방법은 어떨까 싶다.

마을 단위로 건전하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어른들이 주체가 되어 특별히 우려되는 사람이나 집단을 대상으로 행하는 일종의 시민교육 형태가 그것이다.



아동 성폭행 피해자의 경우,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트라우마를 갖게 되고 심하면 인격 장애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학계의 보고가 있다.

한 순간의 비뚤어진 욕망이 한 사람의 인생을 철저히 망가뜨릴 수 있는 성폭행에 대한 문제의식을 달리가져야 할 시점이다.

대담해지고 만연돼 있는 범죄행각만 봐도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으로 처리할 수 없는 다급한 지경이 됐다. 우선 당장 어느 누구도 피해범주에서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도 그렇다.

우리 모두의 책임과 의무라는 생각을 갖고 성폭행 근절에 한마음으로 나서야하는 이유다.
(2010.7.7)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5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마라도나

마라도나



축구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라도나를 기억할 것이다.

왼발 하나로 세계 축구를 좌지우지 하는 실력으로 신의 경지라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무절제한 사생활과 돌출적 언행으로 인한 끊임없는 불화 때문에 그라운드의 악동으로 빈축을 사던 그를 말이다. 특히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정상에 끌어올리던 순간의 그를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마약 중독, 탈세, 폭행 등 온갖 추문을 일으키며 축구계에서 사라지는가 싶었던 마라도나가 남아공 월드컵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 눈길을 끌었다. 이번에는 선수가 아닌 아르헨티나를 진두지휘하는 사령탑으로서였다.



독설과 잦은 말실수는 여전했지만 아르헨티나가 우리를 4:1로 꺾을 때만 해도 감독으로서 그의 재기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였다. 그러나 4강을 다투는 독일전에서 마라도나의 화려한 귀환의 꿈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0:4라는 전적으로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제대로 완패를 당한 것이다.

이런 저런 독설로 잘난 척 할 때는 밉상이더니 축 처진 어깨로 귀국길에 오르는 마라도나의 뒷모습이 연민을 느끼게 했다.



마라도나의 퇴락으로 인간의 자신감과 교만의 경계선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감은 인간을 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리기도 하지만 철저히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측정하기 힘든 그 경계가 언제나 문제다.

자신감에 대한 호감에도 불구하고 제 위치를 고수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조금만 넘치면 교만이 되고 또 조금만 부족해도 열등감이 생성되는 특성 때문이다.

결국 교만과 열등감은 자신감의 긍정적 영역을 호시탐탐 엿보는 일란성 쌍둥이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과유불급.

독일과 아르헨티나 전을 보면서 만고불변의 이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됐다.

예선전에서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어 무적의 함대 같던 아르헨티나가 저조한 기록으로 전력이 많이 약해진 것처럼 보였던 독일에게 처참하게 패한 것은 실력차이가 아니라 그들의 정제되지 않은 자만심에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축구에 불과하지만 독일과 아르헨티나의 극적인 반전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일상에서도 못 미치는 것도 넘치는 것도 결국은 문제가 되는, 과유불급의 진리를 깨우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신뢰가 안가고 뭔가를 함께 도모하기 싫어진다. 지나치게 자신감을 보이는 사람 역시 못지않은 우려를 주고, 결과에 있어서도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는 점에서 반겨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골프를 치면서도 과유불급의 교훈을 절감하게 될 때가 많다.

충만한 자신감으로 의욕이 너무 넘치다 보면 '버디' 찬스가 '보기'가 되고, 자신이 없는 날은 지나친 소심함 때문에 쉬운 '파' 찬스를 '보기'로 만든 경험은 나만의 경우가 아닐 것이다.



과유불급이 문제라면 중용이 답이 되겠지만 이 역시 생각처럼 쉽게 얻어지는 ‘경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만이나 열등감으로 인한 결과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려는 태도 역시 패배의식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정진과 성찰로 자신의 삶을 체크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기의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는 인간에게 있어 더 없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기게 된다.

현재나 과거의 자신을 점검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미래 지향점을 챙기는 과정이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과유불급의 저울추로 삶의 무게를 재어가며 희망의 부피를 키우자고 마음을 다 잡아 보는 이 아침, 새로운 생명력에 힘이 솟는다.
(2010.7.6)

...홍문종 생각

홍무종생각 - 영포회

영포회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이른 바 '영포회 사건'을 바라보는 심정이 편치 않다.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얘기다.

경북 포항 출신 고위공무원 모임인 '영포회'가 불법사찰을 주도한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청와대와 여당까지 긴장하고 있는 분위기다. 영포회 조직에 권력 실세가 관여하고 있다는 증언들이 튀어 나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터다.

며칠 전에는 불법 사찰의 피해 당사자가 자신이 당한 봉변을 고발하는 시사프로그램이 안방에 방영되기도 했다. 평생을 공직과 무관하게 살아온 한 민간인이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관의 횡포에 인권을 유린당한 사실이 여러 정황과 함께 낱낱이 공개된 것이다.



‘영포회’라는 초법적 기구가 존재하는 건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다.

이런 구시대적 발상이 아직도 통용되고 있고 그런 세상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게 맞나 싶기도 하다.

권력의 횡포가 한 개인을 얼마나 무기력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자신 사찰 대상으로 시달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감시하는 보이지 않는 손길을 의식해야 하는 긴장감은 거의 공포다. 그것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행태인가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마저 말살시킨다는 점에서 당사자에게 남기는 상처가 너무 깊다고 할 수 있겠다.



시중에 퍼지고 있는 이런 저런 ‘설’들을 듣고 있자면 기가 막힌다. 거의 백주 대낮에 활개를 치고 있는 강도떼들의 괴담 수준이다.

문제는 중심을 잃은 무소불위의 권력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다.

대통령 권력에 기댄 측근들이 스스로의 권력에 취해 버린 나머지 마음만 먹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대박 난 로또 주인이라도 된 양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휘두르다 탈이 난 것이다.

정권 종식의 단초가 되었던 3.15 부정선거와 부마사태가 떠오른다.

그 때도 사찰과 공포정치가 문제였다. 사찰에 이어진 강력한 공포정치가 이 두 사건에 빌미를 제공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도덕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이해관계로만 똘똘 뭉친 정권의 말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도덕과 원칙을 갖추지 못한 리더십이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도 너무나 잘 아는 우리다.

왜 민간인 사찰 파장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건지,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게 해 주는 배경이 아닐까 싶다.



영포회의 망령에서 망국병으로 지탄받고 있는 지역감정을 활용하려는 교활한 기회주를 발견하게 된다.

지역주의를 이용해 자신들의 뱃속을 불리려는 의도는 매국의 개념으로 처리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의 국운을 좀 먹는 지역감정을 부축여 자기들만의 이익을 챙기려는 파렴치함은 온 천하에 공개해 지탄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할 '불의'다.

'우리가 남이가'를 찾으며 족보를 따져 성골과 진골의 명확한 구분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튼실히 하는데 혈안이 돼 있는 무리들이 아직도 활개를 치는 불행한 대한민국이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인권을 짓밟는 짓도 서슴지 않는 그들이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덕분에 우리의 선진화는 한참을 뒷걸음질 한 상태가 됐다. 소인배들의 소탐대실이 그동안 뜻 있는 이들의 노력을 단숨에 무위로 돌려버린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파괴한 민주주의를, 이 땅의 정의를 어떻게 회복시켜야 할지 암담하다.



사조직으로 대한민국의 인권을 묶으려는 어리석은 시도야말로 우리의 선진국 진입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특히 이번 사건에 대해 치명적인 권력 내부의 증언들이 잇따르고 있는 걸 보면 대형게이트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통령의 레임덕을 가속화 시키고 보수 정권을 무력화 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대통령을 팔아 호가호위하는 무리들이 더 이상 우리사회를 농단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될 일이다.

정부 뿐 아니라 온 국민과 정치권도 함께 진상규명에 나서도록 하자.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들이 우리 사회를 좀 먹는 일이 없도록 모두가 파수꾼이 되어야겠다.
(2010. 7. 4)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2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아, 박용하

아, 박용하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렌터 윌슨 스미스 -





탤런트 박용하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우기의 음습함을 더해주고 있다.
억장 무너지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또 한 젊음이 그렇게 사라져갔다.

영정 속 미소가 너무 환해서 보내야 하는 이들의 아픔을 자꾸만 키우고 있다.

무엇이 이 아름다운 청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삶을 거두어들이게 했을까?

남들은 평생에 한번 만나기 힘든 성공을 거둔 삶을 두고 도대체 왜 죽고 싶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유서를 남기지 않았기에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런 저런 정황을 미루어 짐작해 봐도 그저 나무라고 싶은 마음만 앞선다.

그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열심히 꿋꿋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조금만 더 참아보지.



평소 나는 젊은이들의 감각을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도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닥치는 생의 문제에 너무 쉽게 굴복하는 경향을 보이는 그들의 한계에 우려한다.

학업, 직장, 병역 그리고 대인관계 등 평범한 일상으로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 순간의 차이로 무게를 달리할 경우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쓰나미’가 되는 게 문제다. 참을 수 없는 나약함이라고나 할까, 도무지 인내하려 들지 않는다. 젊은 그들에게 있어 치명적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자살도 마찬가지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지레 겁먹고 항복하는 형국 아니겠는가.

정말로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이지만 어차피 지나가게 돼 있다. 그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건 인간의 숙명일지 모른다.

다만 그 아픔을 얼마나 잘 다독일 수 있느냐에 따라 행복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자살공화국의 불명예가 아니더라도 자살은 최악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용납될 수 없다. 오히려 인생의 무게를 감내하지 못한 나약함은 마땅히 질타를 받아야 한다.

안타깝긴 하지만 박용하의 죽음도 더 이상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고통이나 슬픔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부재가 특별히 다른 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용하의 비보가 전해지자 그 실체를 드러낸 이른 바 ‘베르테르 효과’의 현장을 보고 있다.

박용하가 숨진 지 하루 만에 레이지본 멤버인 노진우가 한강에 투신했다 구명됐는가 하면 우울증을 앓던 40대 주부가 관련 보도를 본 뒤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시인 도종환은 말했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고.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트는 거라고.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냐고.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면서 따뜻한 꽃잎으로 피어나는 거라고.

나는 이 블로그를 통해 말하고 싶다.

역경을 이겨내지 못한 삶은 그 열매에 향기가 없다고.

자신의 생에 대해 좀 더 진지해지고 열정을 갖자고.

어차피 오게 돼 있는 어려움, 피하려고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자고.

무엇보다 그 어떤 난관도 우리의 삶을 좌초시킬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자고.



내게도 죽음을 떠올릴 만큼 힘들던 좌절과 역경의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죽음에의 유혹을 딛고 그 지난한 시절을 이겨냈기에 오늘 날 내 나름대로의 성공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더 이상 극단의 선택은 없었으면 좋겠다.

고인의 명복을빈다.
(2010. 7. 3)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