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31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안철수식 자녀교육

안철수식  자녀교육
 
우연히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 기술대학원 원장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터라 채널을 고정하고 그가 언급하고자 하는 내용에 집중했다.
젊은 층에서 ‘멘토로 삼고 싶은 인물 1순위’를 기록하는 명성답게 그가 전하는 생각들은 진솔하고 명쾌했다. 특히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적 삶의 주인공인 만큼 그가 말하는 자녀교육법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해당 프로그램은 놀라운 기록으로 전국의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는 후문이다.
 
안 교수가 전하는 자녀교육 왕도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1. 부모가 최대한 자녀의 환경을 제대로 만들어주고 2. 부모가 솔선수범으로 본을 보이면 된다.
하지만 그의 자녀교육법에는 분명 이론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모든 교육에 있어서 부모의 솔선수범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다는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결손가정이나 빈곤층 등의 자녀교육에 대한 적절한 해법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솔직히 자녀에게 제대로 된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녀교육에 열의를 가지고 있다 해도 여의치 않은 환경이면 뜻대로 할 수 없는 게 세상 이치다. 똑 부러진 자녀교육 비법을 알고 있어도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부모들이 있을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당장의 호구지책이 발등의 불이어서 자녀 교육을 뒷전으로 미룰 수 밖에 없는 부모가 적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솔선수범이 좋은 줄 알아도 자녀 앞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여건이 안되거나 능력 밖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도 많다. 구태여 서울 강남의 쏠림현상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갈수록 빈부의 격차만큼이나 학력차이가 벌어지고 있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못하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안 교수만 해도 최상의 부모님으로부터 멘토로서의 조력을 성공적으로 접목한 케이스다.
그의 부모님이 자녀교육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걸맞게 갖춰진 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안 교수에게는 생물학적 측면 뿐 아니라 훌륭한 스승으로서도 손색없는 자격을 갖춘 부모님이 계신다. 금전에 눈을 두지 않고 명예를 중히 여기며 평생 남을 위해 헌신한 부친의 선 굵은 삶과 깍듯한 존댓말로 예우하고 자존감을 갖도록 공들여 아들을 키운 모친의 섬세한 손길이 그에게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CEO로서 안교수가 이윤 창출보다는 사회 환원을 우선시 하는 기업윤리를 모토로 내세운 배경 역시 부모님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말없는 가르침으로 솔선수범하며 아들에게 세상의 도리를 일러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부모님이야말로 안철수의 오늘을 만든 일등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안 교수의 자녀교육법이 적용될 그의 외동딸 역시 최상의 부모와 교육환경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는 카이스트 교수로 재직 중인 안철수 김미경 두 부부의 간단하지 않은 이력과 명성만으로도 입증된 바다.
 
그렇다고 자녀교육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부모의 역량이 부족하다면 국가가 그 역할을 대신 보완해주는 게 마땅하다.
예를 들어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을 해당 학생과 연결해주고 그 비용까지 국가에서 해결해주는 방식의 학습 멘토링 제도를 활성화 방안은 어떨까 싶다. 공부할 의욕이 있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고, 멘토가 되어주는 학생들은 국가에서 배려한다면 멘토는 멘토대로 멘티는 멘티대로 각각 도움을 얻을 수 있는 합리적인 제도로 정착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유학시절 공부하면서 한 두 해 먼저 공부한 선배들의 관심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특히 천편일률적인 공교육에 비해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맞춤식 교육이 이뤄진다는 측면에서도 보다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최근 무상급식에 어마어마한 세금이 투입되고 이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사회적 분열양상이 조장되고 있는데 사실 무상급식보다 더 긴요하고 효율적인 용처가 될 수도 있겠다.
또 다른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20세기 초 미국 뉴욕시 소년재판소의 서기 E.K.콜터에 의해 시작된 이래 전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BBS(Big brothers & Big sisters)같은 청소년 선도운동도 불리한 환경의 청소년들을 보호하고 구제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불우 청소년은 물론 비행 청소년과의 1대1 결연을 통해 그들의 친구, 형, 부모의 역할로 교화하는 방식이다. 이 운동은 하계학교 등에서 그룹워크 등의 방법과 병용하여 청소년 선도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니 살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잘나도 혼자만의 삶은 의미가 없다.
사람은 더불어 함께 할 때 비로소 그 진가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자녀교육이야말로 진정한 부모의 역할이다.
모쪼록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함몰되어버리지 않도록  자녀를 제대로 인도하는 혜안을 갖자.
                              ( 2011. 8. 1 )                                      
                           ....(홍문종 생각)                                      

2011년 7월 30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고정관념

고정관념
병석에 계시면서 아버지가 많이 약해지셨다.
걱정도 부쩍 늘어 세상사 대부분을 근심으로 받아들이시는 기색이 역력하다.
특히 장남인 내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이런 저런 당부를 채근하실 정도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많다. 예전만 못한 기력 때문에 더 이상 자식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조급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쩔 땐 미처 다 풀어놓지 않은 아버지의 의중까지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세 아이의 아버지 위치에 놓인 나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얼마 전 바쁜 와중에 무리하게 강행한 미국행 일정도 사실은 그곳에 가 있는 자식들 때문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무더위와 뒤숭숭한 현지의 정황 등이 아이들 안위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직접 가서 확인해야겠다는 판단을 이끌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아이들을 만나보니 내 조바심과는 달리 훨씬 더 현명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그 곳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오히려 틀에 갇힌 나의 한계를 견인해주는 느낌이 들만큼 생동감 있는 모습이었다. 내 아이들이 내 손길을 필요로 할 거라며 불원천리 달려온 내 오지랖은 잘못된 고정관념에 의한 기우인 것 같아 머쓱해졌다. 
 
( 케임브리지에서 사랑하는 세아이들과 함께~♥ )

뉴욕에서의  또 다른 경험도  기존의  시각을 점검하는  빌미가 됐다.    
수백 쌍의 동성애 커플 결혼식이 상당히 큰 이슈로 다뤄지고 있었는데 현지 방송이 연일 이들에 관한 소식을 보도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사람들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었다.
솔직히 오십 몇 년을 살아오면서 이 일만큼 혼란을 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크리스틴 퀸 뉴욕시 의장이 동성애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힐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놀라웠다. 개인적으로 한 번도 동성애를 심각하게 고려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당연한 반응일지 모른다. 그럴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지만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기울여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 만큼 나는 확실히 동성애자들과 다른 성향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할 것이다. 하바드대학 학생회장이 동성애자라는 이야기를 재학중 접했을 때도 남의 일에 불과했던 나였다.

그런데 미국인 친구 A는 나와 생각이 달랐다. 그동안 언론 보도 등을 접하면서 동성애에 대한 의식에 변화가 생겼다고 했다. 그렇다고 동성애를 동의하거나 찬성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다만 그동안 절대적으로 아니라고 생각했던 문제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겠다고 했다. 한 방송에서 동성애 커플의 인터뷰를 접했는데 그저 좋았을 뿐인 자신들의 선택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그들의 항변도 그렇고 (동성애 합법화로) 기회를 준 뉴욕시와 미국에 감사하다며 마냥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에 묘한 파장이 일더라는 고백이었다.
 
친구의 갈등은 내게도 긴 여운을 남겼다.
‘소수의 가치는 정말로 사회적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가? 비주류의 가치는 절대적으로 다수의 공적 마인드가 될 수 없는 선천적 한계를 안고 있는가? 반사회적 기준이면 문제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다수의 평화가 보장되는 선택이야말로 최고의 선택이 되지 않을까? 과연 우리의 선택은 어떤 것이 될까?’ 등의 의문들이 뉴욕에 머무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사안이 있을 때마다 공공정책을 입안하는 입장이 되곤 하는 내게 A의 갈등이 선택에 대한 의문부호로 전이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아무리 미물이라도 저마다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선택과 판단이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백안시되는 현상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미국 사회의 도덕적 타락이 결국 미국의 파국을 부르는 촉발점이 될 거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동성애를 비롯한 낙태나 총기소지 등에 대한 미국의 선택을 특정한 방향으로 고정시키는 게 과연 옳은가에 확신이 서지 않았던 점도 일정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 하바드 대학교 설립자
죤 하버드(John Harvard)의 동상 앞에서... )
 
나의 생각을 가두는 고정관념의 틀은 여전히 건재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한 계기가 스스로의 생각(고정관념, 편견, 노파심 등)을 되짚어보거나 새로이 정립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내 기본적인 생각이 변한 건 아니다.
그러나  습관적  선택에 의해  단순한 감정적 판단 만으로  예단하던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은 확실한 나의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2011 . 7.30)                        
                                        ....홍문종 생각                         

2011년 7월 28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집중호우

집중호우
  음....폭우의 위력은 대단했다.
고작 이틀간인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초토화 시키고 경기도 곳곳을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렸다. (개인적으로도 학교나 아프리카 박물관에 크고 작은 폭우 피해를 수습해야 했다)
거침없이 치고 나오는 자연의 기세에 눌려 처참하게 널브러진 피해 현장이 민망할 지경이다. 위용을 뽐내던 도시의 화려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 폭탄 세례 앞에서 건물이 붕괴되고 사람도 자동차도 도로도 스스로의 의지로 버티지 못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치고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들이 줄을 이으며 인간은 그저 무기력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게 납덩이같은 근심을 가슴 한 가득 쌓아 올리는 후유증을 남겼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 기후가 이번 폭우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기상도가 변하고 있다는 건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동안 뚜렷한 사계의 경계를 구분했었는데 아열대로 바뀌면서 점점 사막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반복되는 폭염과 폭우 등 기상 이변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됐다.
한 여름 국지성 폭우는 정례화 된 자연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측 가능한 재해인 만큼 이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책이 있어야겠다.
더 뜨겁고 더 춥고 그리고 폭설과 폭우로 우리의 일상을 뒤 흔드는 이상기후는 더 이상 이변이 아니다. 강 건너 불도 아니다. 우리나라만의 현상도 아니다. 솔직히 지진이나 쓰나미 등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상 이변을 목격하면서 그 동안 자연에게 몹쓸 짓을 너무 많이 했다는 자책감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 여행 중 뉴욕을 방문했던 때도 마침 108도(화씨이긴 하지만)를 기록, 뉴욕 역사상 가장 더운 날이었다는데 머리가 아플 정도로 뜨거운 태양열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세계적 관광 요충지답게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더미가 놀라웠다. 그것을 보니 과연 뉴욕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걱정됐다. 

작년 추석 무렵에도 국지성 호우로 도심이 물에 잠겨 우왕좌왕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여전히 광화문 인근이 물바다가 돼 있고 우면산 토사물이 주택가를 덮쳤다.  이번에는 다수의  인명이 희생되는 등 인명과 재산 피해가 훨씬 더 확대됐다.  
무지한 건지 오만한 건지 모르겠지만 산 중턱을 깎아 도로를 내거나 산 밑에 주거지를 마련하면서 산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 사태를 키운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실제로 이번에 참변을 당한 우면산  인근에는 산사태에 대비한 최소한의 방재시설도  전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참 할 말이 없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자연의 분노가 극에 달한 느낌이다. 
 강펀치로 자연에 응징 당할 만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공격과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상투적인 답변이  공방을 벌이는 현실에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식의 ‘물난리’를 처음 겪는 게 아닌 만큼 인재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다른 건 몰라도 작년 추석 무렵 집중 호우로 물에 잠긴 광화문의 모습은 재현되는 일이 없어야 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서울시는 오히려 홍수 방재 예산을 무려 1/10로 줄여버렸다.  별반 달라지지 않은 대책마련 매뉴얼도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선 잘못의 소재를 따지기보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머리를 모아야 할 때다. 기왕의 문제점으로  다툴게 아니라  피해의 최소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예로부터 치산치수를 국가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던 이유는 그것이 백성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추상같은 절대 권력이 추종되는 시절이었지만 치산치수에 실패한 군주는 그날로 끝이라는 위기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바른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한다는 철학을 모토로 형성된 나름의 정치관이라 하겠다.
그런 점에서 우리보다 천년이나 앞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하수시설을 만들어 도심 홍수에 대비한 비엔나, 파리, 콘스탄티노플 등 유럽의 대도시 치수 정책 사례를 찾아 공부하는 것도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전 지하공간을 활용, 서울의 3호 터널보다 더 크고 높은 배수로를 만들어 치수에 대비한 안목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웃나라인 일본 도쿄의 치수 정책에서도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많다. 1982년 도심 홍수 피해를 당한 그들은 빗물을 탱크에 저장하거나 지하에 침투시키는 방식으로 하수구의 빗물 유입 속도 조절에 성공, 침수피해도 막고 빗물 자원화에도 성과를 내는 치수 정책을 완성했다.
 
바야흐로 선진국 대열 합류를 목전에 두고 있는 우리다.
21세기를 견인하겠다는 의욕이 충천해 있는 우리가 치수정책의 실패로 도심을 물바다로 만들고 산사태로 도로가 마비되는 모습으로 전 세계에 중계되는 현실은 상당히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세계적으로 비상하겠다는 중국의 야심이 고속철 사고로 하루아침에 스타일을 구겼던  상황이 겹쳐진다.
물론 인간이 하는 일인 만큼 실수는 물론 시행착오 역시 불가피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국제사회를 리드하려면 그에 걸 맞는 명성과 신뢰를 잃는 일을 자처해서는 안된다.
성실한 이미지는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이번 피해복구 과정을 통해 대한민국의 저력을 발휘해보도록 하자. 
결실 여부는 결국 우리의 노력에 달려있다.   
해보자.                      (2011. 7. 29)                     
                                 ...홍문종 생각                      

2011년 7월 26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폭우

   폭우                      
                                                        -홍문종         


천둥 번개 하늘을 덮고
진노와 탄식 하늘을 가르는데
질주하는 하늘 끝  번뜩이는 섬광
앞서가듯 뒷서가듯 수작


사하소서 궁휼히 여기소서
도말하소서
비명소리 채찍소리
우르를 꽈당 꽝


고개들어 하늘을 보라
너와 나의 이 땅 위에
무지개도 방주도 지었거늘
자신을 숨겼더냐 기쁨이 도망쳤더냐



 세상에 던져진
영문도 한문도 허술한
인생의 한자락 붙잡아
나의 인생 나의 삶 하였거늘


불려든 또다른 한쪽에서
얼싸안고 어우른들
네 슬픈 마음도 못가눌 일
사랑이어라 목청 돋우리라


나의 삶 나의 사랑 나의 영혼이여
행복의 축배를 들자
소리치고 따져본들
돌아서면 그 자리니


승리! 승리! 노래하며 살리라.
알았다 알아 끄덕이고
고맙다 고와 마음열고
용서? 용서? 손벽치며


승리!
승리!
노래하며
살으리랏다

                                                                           (2011.7.26)    

2011년 7월 25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아마겟돈

아마겟돈


대규모 인명이 희생된 테러가 발생해 전 세계가 또 다시 혼란의 도가니다.
이번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평화의 나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나이 어린 청소년을 대상으로 범행이 자행됐다. 무엇보다 이슬람교에 대한 극단적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극단적 기독교주의자로 알려진 범인이 뉘우치는 기색은커녕 자신의 범행을 신념으로 미화하는 등 ‘무죄’를 주장하고 있어 충격의 강도를 더하는 분위기다.
우연의 일치인지 때 마침 여행 중 집어든 책(사이토 다카시라는 일본 대학교수가 쓴 ‘세계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에도 종교 간 갈등을 다룬 내용이 들어있었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를 믿는 건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위대한 힘에 자신을 바치는 대신 정신적인 안정감을 얻기 위함’이라고 정의하는데 신앙의 근본과 인간이 자아를 버리게 되는 원인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기조가 저자의 시각이다.
그런 그가 사랑을 모토로 삼는 기독교가 제국의 야망과 하나가 되고, 비교적 관용적인 이슬람교가 지구촌 분쟁의 불씨가 되어버린 아이러닉한 종교 현실에 대해 나름의 시각을 동원했는데 흥미롭게 읽혀졌다.
그러나 읽는 내내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축으로 전 세계가 극단적인 대결구도로 분열되는 현실을 고민했다. 이대로 가면 파멸로 이어진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어떻게 해서든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전 세계를 경악시킨 노르웨이 테러가 발생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기막힌 타이밍이어서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뉴욕 한 복판에 고스란히 보존된 테러현장을 통해서도 종교 분쟁의 주홍글씨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9.11 테러의 트라우마를 수인번호처럼 매단 Twin Tower 자리는 'Ground Zero'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채 전 세계 사람들이 찾는 성지가 되어 있었다.
수십만 관광객들에게 테러리스트(이슬람 무장단체)들이 얼마나 심각한 만행을 저질렀고 얼마나 극악무도한 폭력을 휘둘렀는지를 최첨단 테크놀러지 장비를 다 동원해서 최대한 보여주고자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마치 테러단체는 그 막대한 과오 때문에 어떤 보복성 대가를 치러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압력처럼 비쳐졌다. 특히 9.11 테러 당시 거대한 쌍둥이 빌딩이 순식간에 초토화되는 충격에도 불구하고 바로 인근에서 멀쩡히 살아남은(?) 트리니티 교회(뉴욕 최초의 교회)의 기적을 빼놓지 않았는데 마치 기독교 승리의 상징인양 부각시키고자 하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그야말로 전 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이슬람교에 대한 증오가 차곡차곡 쌓이도록 세뇌하는 작업이 소리없이 진행되는 셈이었다.

종교 갈등의 여진은 일상 속에서도 거의 횡포에 가까운 형태로 표출되고 있었다.
미국 공항의 입국심사대를 거칠 때마다 아랍인처럼 생긴 사람들은 예외 없이 한쪽 구석으로 끌려가 몸수색 당하는 일이 빈번한데 이슬람교에 대한 미국사회의 증오심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간혹 동행한 어린 아이들이 ‘Mom, Mon’ ‘What's going on mommy?’ 등의 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면 아랍계 미국시민임에 틀림없어 보이는데도 그들의 수난은 통과의례가 됐다.
비슷한 정경이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있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당시 미국에 살던 일본인들은 미국 정부에 의해 사막지대 수용소에 격리되거나 따돌림을 당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의 벌어진 일이다. 실제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한 미국인들이 자국 내에 있는 일본인들을 시민권 여부와 관계없이 단지 일본 혈통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도 학대했다. 감정적인 애국주의, 일종의 징고이즘에 시달렸던 것이다. 같은 시기에 나치에 시달렸던 유태인의 처지도 다르지 않았다.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유태인 학살의 역사 역시 정도는 다르지만 그 뿌리는 비슷하다 할 것이다.
종교 갈등이 끔찍한 무차별 테러로 표출된 노르웨이 사태는 더 이상 노르웨이만의 문제로 볼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번 한번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데 사안의 심각성을 고민해야 한다.
심지어 아마겟돈의 시작을 알리는 전초전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과다한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토이 다카시 교수의 걱정처럼 아무도 승복 할 수 없는 종교 전쟁은 결국 인류가 파멸해야 끝나게 되는가 싶은 좌절감에 울컥하는 심정이 된다. 카톨릭을 합한 21억의 기독교와 17억의 이슬람교가 끝까지 해 보겠다고 설쳐댄다면 결국 인간 파멸의 서곡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손놓고 쳐다만 볼 수는 없는 일.
우선 우리 형편부터 점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아직은 국내 이슬람교도 세력이 그다지 활성화 되지 않은 건 다행이다.
하지만 갈수록 빈도수를 높이고 있는 기독교와 불교 간 마찰이 우려를 낳을 정도인 건 사실이다. 기왕에도 종교 마찰로 인한 동족상쟁의 여파로 제살을 깎았던 나라가 없던 게 아닌 만큼 우리라고 마냥 안심할 처지는 아니다.
싸우면 안 된다. 누구 좋으라고 싸움을 하는가. 동족끼리의 갈등과 반목은 서로의 피해영역만 확대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기독교는 사랑을 말하는 종교다. 사랑의 힘으로 나와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포용하자. 자비의 불교도 마찬가지다. 자비의 동력을 앞세워 민족과 민족을 하나로 묶는다면 바람직한 결과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종교 갈등이 극에 달한 세계사에 통쾌한 해법 제시로 대한민국 리더십의 위용을 세워보는 건 어떨까?
믿는 구석이 있다.
소유를 향한 저마다의 욕망을 양보하면 뭔가 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감이 그것이다.        (2011. 7. 25 )
                    ....홍문종 생각


2011년 7월 22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파국을 부르는 탐욕

파국을 부르는 탐욕

아이들을 만나러 미국에 와 있는데 두 가지 이슈가 관심사로 부각되는 분위기다.
미국의 디폴트 가능성과 언론재벌 루퍼드 머독의 불법도청 사건이 그것인데 양 사건 모두 간단치 않은 파장을 예고하며 뉴스의 중심에 서 있는 상황이다.
지나친 욕심은 결국 인간이나 시스템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것 같다.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두 사건이 ‘절제되지 않은 탐욕’이라는 공통분모로 얽혀있는 정황은 흥미롭다. 지나친 예단일진 몰라도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처하며 오만의 극치를 달리던 미국과 무제한의 언론 권력을 절제하지 못하다가 제 덫에 걸려버린 머독의 과오는 비슷한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이 재정악화로 디폴트 위기에 직면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34년 전 처음 미국 땅을 밟을 당시의 충격을 생각하면 오늘 날 미국의 현실은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다.
정치적 합의에 명운을 걸고 움직이는 미국 정부의 발걸음이 천근의 무게다. 다음달 2일까지 채무한도증액 협상에 실패할 경우, 디폴트 사태가 불가피할 거라는 위기감도 부담을 더하는 형국이다.
활로를 찾는 시장의 긴박한 움직임도 위기에 처한 미국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월가의 금융사나 뮤추얼 펀드들도 자산 포트폴리오를 재검토하거나 국채매각 여부에 대해 검토하는 등 디폴트 사태를 대비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세금을 깎느냐, 사회보장 규모를 줄이느냐 하는 따위의 진부한 논쟁으로 미국의 위기가 해결 될 것 같지는 않다. 부채한도를 임시 증액하는 비상 대책 방안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그 역시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되는 상황을 감수해야 하는 만큼 진퇴양난에 빠진 미국을 구해 낼 묘책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사실 미국의 오만을 향한 원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번 여행 과정에서도 그 건재함(?)을 확인한 바다.
입국심사 동안 불친절과 무례함으로 일관하는 공항 이민국 관리들의 오만불손은 여전했다. 영어를 못하는 입국객에게는 어김없이 노골적인 비아냥과 짜증으로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였다. 마일리지 덕분에 우등 칸을 이용하게 된 델타항공은 대한민국 비행기는 전부 우등칸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실망스러웠다. 떨어져 나간 의자가 방치돼 있었고 기내식은 너무나 성의가 없었다. 짐은 왜 그리도 한참 만에 나오는 건지... 특히 바가지 상혼이 판을 치는 뉴욕은 거대한 미국 시스템의 추락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상황실 같다는 느낌이었다. 결국 파산이라는 극한상황은 피할 수 있겠지만 이번 국면이 미국에 던지는 시사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단언하건데 미국이 청교도 정신(신앙적인 면보다는 성실과 근면 측면에서)의 초심을 찾지 못한다면 미국의 회생은 요원하다고 본다. 그 어떤 수단도 짧은 노동과 긴 휴식 그리고 최고의 월급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도로 대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대각성 운동 등으로 새로운 국민적 정신 무장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미국은 없다는 생각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막강하고 완벽한 나라로 존재했던 명성은 박물관에서나 찾게 될 한 때의 추억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위기감을 현실로 받아들여야겠다


머독 사건은 특종을 노린 미디어의 탐욕에서 비롯된 불법행위를 핵심으로 보이기도 하고 인간사를 관장하고 싶은 욕망으로 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의 어리석은 과욕이 빚은 해프닝으로 판단되기도 한다.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청문회장에 나선 머독의 모습을 제대로 산 인생으로 평가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머독 스스로 조차 자신의 그런 모습을 혐오스러워 할 가능성이 높다. 지나친 탐욕이 머독 자신의 인생은 물론 기업의 미래에까지 누를 끼친 셈이다. 조금만 살펴도 지나친 욕심을 바탕으로 한 경쟁심이, 한 인간을 이기고 싶은 절박함의 포로로 만들어 파멸로 이끈 결론을 비일비재하다.
머독이 자초한 망신살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영역 너머를 넘본 절제되지 않은 탐욕이 문제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이를 인정하는 한편 우연한 기적에 현혹 되어서는 안된다는 경고로 해석될 수도 있다.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일 뿐이고 단지 최선을 다해 감사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몫임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러다 간혹 특별한 상황에서 기적을 경험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신의 영역에만 속해있는 범주임을 인정하는 혜안을 요구하는 신의 목소리가 아닐까 생각하는 건 지나친 상상력일까?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국제사회의 질서와 패러다임이 속속 바뀌고 있는 이 즈음, 그 어느 때보다 성실한 땀의 노력이 필요한 현실이다. 우리도 게임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 받은 이상 노력을 등한시해서는 안되겠다.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를 위한 정보수집이나 분석하는 과정에 공을 들이는 건 물론이다. 자칫 한눈팔다간 공염불이 되고 말 일이다. 특히 미래를 기약하는데 있어 도덕과 신뢰는 빼놓을 수 없는 절대적 가치임을 가슴 속에 새기다.
그렇게 파국을 부르는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하자.
더불어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도록 미리미리 준비할 것을 권면하는 바다.

PS: 20년 만에 찾은 하버드 캠퍼스에서 지난 청춘을 회고하는 호사를 누렸다.  백발이 성성해진 옛 지인들과 반가운 회포를 풀었는데 폭포수 같은 덕담으로 기운을 북돋아주는 그들에게서 아직은 건재한 미국을 확인 할 수 있어 좋았다.


(2011. 7. 22)
...홍문종 생각

2011년 7월 20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그에게서 길을 찾다

그에게서 길을 찾다

 
지난 18일(현지시각)은 93번째 맞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생일이었다. ‘아프리카의 정치적 대부’ '살아있는 신화'로 불리는 명성답게 국제사회의 지대한 관심이 쏠리는 분위기였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이 (생존 인물 중)'우리 시대 최고의 위인'이라는 극찬의 축하 메시지로 그를 기렸고 생일 아침엔 남아공 전국 1200만 명 학생들이 동시에 축가를 부르며 그에 대한 메머드급 애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남아공은 물론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이 ‘만델라가 67년 동안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정신을 기려 그의 생일마다 67분 동안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자는 취지로 유엔이 제정한’ ‘만델라 데이’ 정신을 실행에 옮기는 등 갖가지 축하 이벤트가 이어졌다.

지금의 아프리카로 새롭게 조명받기까지 만델라의 지대한 역할이 있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 해방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희망의 화두였다. 44세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간 갇혀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았던 인생의 목표이기도 했다. 72세가 되어서야 감옥에서 석방된 이후 노벨상 수상이나 대통령 당선 등의 봄날을 맞았지만 인종차별 종식을 위한 그의 원초적 몸짓은 멈추지 않았다. 화해와 통합의 통치철학을 근간으로 삼아 모두가 함께 희망을 꿈꾸는 아프리카를 실현시켰다.
그 결과 쿠데타와 내전이 일상화된 아프리카에서도 평화로운 권력 이양이 가능한 현실을 보여줬고 대통령을 그만 둔 이후에도 사회 공헌을 위한 역할에 최선을 다한 그였다.
100년 전 막스베버는 이상적인 직업 정치인이 되려면 ‘자신의 숭고한 뜻을 짓밟는 세상의 어리석고 비열한 도전에 좌절하지 말아야 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소명의식을 굽히지 말아야 한다. 또 눈앞의 이익에 결코 약해져서는 안되고 가슴 속에는 객관성이 담보된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만델라야말로 거기에 딱 부합되는 삶을 기록해왔다는 생각이다.


현직을 은퇴하고도 여전히 뜨거운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노정객의 근황이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온다.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평생을 바친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세상의 찬가와 굽힐 줄 모르는 신념으로 결국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낸 리더에게 바치는 존애의 표식이 아낌없이 쏟아지는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지난한 과거를 딛고 올라선 인간 승리의 결정판 같은, 특히나 아프리카 해방을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건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극한상황을 초월한 인간의 완성도 높은 삶의 결정체를 마주하는 경건함이랄까, 언제나 정치인의 역할을 고민하는 내게는 섬광처럼 스치는 영감의 기운으로 현신하고 있다.
덩달아 괜찮은 정치인으로 묻어가는 느낌이 싫지 않다.

그러나 지극히 인간적인(?) 우리의 정치현실에 고개를 돌리면 속절없이 허전해진다.
드센 기들의 충돌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정치판은 오늘도 어김없이 이전투구다.
국민을 볼모로 위악을 쏟아내면서도 아무런 가책이 없다. 서로를 향한 불신을 독화살처럼 쏘아대고 있다.
관심이 가는 건 오로지 정치권력 하나뿐이지 싶다. 불을 향해 자신의 운명을 던지는 불나방의 어리석음이 역력하건만 알바 없다는 식이다.
사심만 가득하니 현실을 직시할 리 만무다. 진심이 없는데 교감이 있을 리 없고 사랑 역시 요원한 얘기에 불과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게 불행의 시작이라 하겠다.
문득 고 이청준 선생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의 ‘외침’이 새삼스런 울림으로 되새겨진다.
“사랑과 신뢰 없는 공동체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건설되든 항상 ‘당신들의 천국’이다.
오로지 사랑과 신뢰만이 ‘우리들의 천국’을 만든다”

만델라의 성공은 마음을 비우고 진정으로 자신의 민족을 사랑한 그의 헌신에 신뢰로 화답한 민중의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도 만델라처럼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국민들의 천국’을 만드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

 (2011. 7. 20)
....홍문종 생각

2011년 7월 17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올챙이 적을 생각해!!

올챙이 적을 생각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법칙(?)이 제일 잘 활용되는 현장을 꼽는다면?
단연 정치권 아닐까 싶다. 형편에 따라 조변석개 하는 인간의 한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곳 역시 이곳으로 지목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다.
정치 현장에 있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돌이켜봐도 정치적 반사 이익을 노린 정당의 의도에 따라 국회의 전쟁과 평화가 결정된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싸우는 모양새로만 보면 국회가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집단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게 될 정도다. 민망하긴 하지만 ‘싸움 솜씨’에 따라 정치력이 평가되는 측면도 있다.

권재진 청와대 정무수석의 법무장관 내정에 대해 설전을 벌이고 있는 정치권 공방도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늘 반복되는 현상이긴 하지만 여전히 정론이고 합리적인 설득 논리고 존재가치 자체가 불필요한 현장이다. 정권 교체로 여야 진용만 달라졌을 뿐이다.
상황이나 공수논리는 어찌 그리도 변함이 없는지 마치 참여정부 시절로 ‘back to the future' 했나 헛갈릴 정도다.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1년여를 앞두고 문재인 정무수석을 법무장관에 기용하려다 ‘대통령 측근 기용은 대선의 공정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야당의 강력한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정황이 고스란히 ‘데자뷔’ 되고 있다. 측근 인사를 법무부 장관에 기용하려는 권력의 의지나 이를 방어하고 공격하는 여야 공방의 재현을 통해서다.
이 과정에서 여당은 야당으로, 야당은 여당으로 바뀐 현실 때문에 기존 발언을 부정해야 할 처지에 놓인 발언 당사자들의 입장이 딱하게 됐다. 입으로는 국민을 팔고 정작 자신들을 위해 싸움을 불사했던 실체를 들킨 민망한 현실에서 실명까지 거론되는 마당이니 오죽 할까 싶다. 하긴 사람에 따라 무조건 이기는 것이 미덕인 정쟁의 실상과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불가피성을 들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각 당에서 1백 명 씩의 지도자를 뽑아 머리의 크기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짝을 지어 놓는다. 그런 다음 훌륭한 의사로 하여금 톱으로 머리를 둘로 절반으로 나누어 잘라낸 반쪽을 반대편 정당의 사람에게 붙인다. 이렇게 두 개의 뇌가 하나의 두뇌 속에서 논쟁을 하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세상을 다스리고 감독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의 머리에서도 국민이 무척이나 바라는 조화로운 사고와 중용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1726년 영국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라는 풍자소설을 통해 처방한 일종의 ‘정쟁화해법’인데 기발하다. 달라지지 않은 정치권 행태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황당하긴 하지만 갈수록 개념을 잃어가는 정치권 정쟁의 속내를 꿰뚫고 그들의 몰염치를 향해 일갈하는 작가의 시선이 통쾌하기도 하다.

아무리 첨예한 이해관계(권력 쟁취)가 얽혀있다 하더라도 ‘역지사지’ 철학이 개입된다면 정치판 위상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비단 정치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노사간, 사제지간, 부모자식간 그 어떤 갈등 현장도 역지사지의 놀라운 힘은 기적을 만들어 낼 것이다. 객관성과 공정성을 기반으로 한 공론장이야말로 모든 관계를 풀어낼 수 있는 마법의 열쇠다. 상대방 입장에서 나와 다른 이해관계를 받아들이고 배려한다면 싸우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합일점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데 있어 더없이 취약한 현실이다.
세계적으로 남다른 교육열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배려에 대해서는 더없이 무관심했던 사회적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대통령이 국민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다면, 재벌이 노동자를 먼저 배려했다면, 선생님이 학생을 먼저 존중 했다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위기 국면은 그 양상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적 지위를 위한 스킬이나 테크닉 못지않게 중요한 인간 존중을 외면해왔던 교육제도의 개선이 시급한 이유다.

역지사지와 배려에 필요한 교육과정은 물론 제도 마련과 전문가 양성을 통해 상식의 대원칙에 부합하는 사회적 틀을 조성하고 이를 생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인성교육을 KS마크처럼 규격화 하고 검증하는 체계를 통해 인증할 수 있는 제도화 하는 방안을 고려해볼만 하다. 일정한 자격을 인정받고 배출된 우리의 미래 인력들이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때 객관적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역지사지의 포용력은 대한민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위해서도 더 없이 훌륭한 발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이나 중국 등 동양권은 물론 미국 등 서양 국가와의 교류에서도 상대국 입장을 좀 더 넓고 큰 관점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입장을 전개한다면 더 큰 역할의 대한민국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측면에서 역지사지를 위한 훈련은 세계 지도자의 소양을 키우는 중요한 시간인 셈이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다.
그러면 우선 글로벌 리더의 첫 걸음으로 최소한 올챙이 적을 기억하는 개구리부터 되어 보도록 하자.                                    

 (2011. 7. 17)
 ....홍문종 생각

2011년 7월 14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함께 나서자

함께 나서자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해병대 사태’가  갖가지  우려를 낳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 와중에 근절되지 않는 구조적인 악습이 그 원인이라는  군 인권센터 등의 구체적 조사결과가 나와 주목된다.  강화도 총기 난사 사건을 비롯한 군인들의 연이은 자살(해병대만 해도 이달 들어  7번째) 과정에 심각한 수준의 인권 침해가 있었다는 것이다. 휴가병과 전역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의  피해사례 유형만 해도 30가지나 된다니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새삼스럽게 그 잔혹하고 엽기적이기까지 한 가혹행위 정황을 옮기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사건 발생 당시  총기 사건의 배경으로 지목됐던  ‘기수 열외’의 충격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현실을 생각하면  위기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
  
 1971년 경,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시행했던  ‘인간의 심리변화를 알아보기 위한 가상 실험’을 소재로 만든 영화 ‘엑스페리먼트’가 떠오른다.  당초 14일 예정의  실험이었는데   6일을 넘기기도 전에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등 인간의 정상 궤도를 넘는 이상 증세를 보여 급기야 실험을 중단하고 만  결론의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 과연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게 존재하는가라는 회의에 빠지게 된다.  솔직히  그동안 신봉하던 ‘성선설’에 대한 확신까지도 마구 흔들리게 하는 충격을 줬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실험에 참여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지극히 이성적이고 이타적 자세를 견지하던 사람이 그 짧은 사이에 살인을 저지를 만큼 본래의 자아를 상실하게 되는 현실이다. 환경에 지배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한계를 절감하게 되는 씁쓸함을   맛보게 했다.

영화에서 진행된 실험상황을 비인간적인 집단 논리에 매몰된 병영 내 현실과 비교하면 보인다. 인간이 개인이 아닌 집단 속에 들어 있을 때 얼마나 더 많이 잔혹해지는지, 얼마나 빠르게 환경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되고 집단 체면에라도 걸린 듯 자신의 본심을 잃어버리게 되는지 알게 된다.
영화 속 가상 감옥과 통제 일변도인 병영의 현실이 다르지 않다는 전제가 허용된다면 인간이 환경에 지배되어가는 과정도 군대나 감옥(실험에서 설정한 소재)이나 차이가 분명 없게 돼 있다. 이는 가학적 상황에 반응하는 인간의 심리 표출이 비슷한 여건의 각각 다른 환경에서 보여주는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치와 같다.
발본색원, 엄중처벌. 병영문화의 체질 개선....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제시되는 처방의 형태가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  고민이다. 
어제 오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만큼 근원적인 해법이 있어야 할 텐데 큰일이다.
때 마침 해병대 사령관이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는 얘기가 들리지만 이 역시 근본적인 치유책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병영 내 가혹행위 정황이 갈수록 교묘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자살도 그렇고 총기 난사 사고도 그렇고 근절되지 않는 구타와 가혹행위도 그렇고.
병영문화에 어둠을 드리우는 이 주범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답이 안 보인다.
도무지 근절될 기미가 없다.
아무리 병영 문화 개선을 위해 대책을 마련한다 해도 결국은 본질의 문제 아닐까 싶다.
선임병의 보상심리가 부적절한 병영 내 문제를 유지하는 고리의 시작일 수도 있다. 살아 온 환경이 각기 다른 선ㆍ후임병의 인식 차이가 충돌하게 되면서 가학과 피가학의 질서를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고참이 신병을 비정상적으로 괴롭히는 ‘가학’들이 개인주의가 극대화된 환경에서 양육된 아이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는 악순환을 우선적인 문제로 지목할 만하다.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으로 존재하는 우리로서는 강한 군병력이 요구되는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엄격한 훈련이나 질서를 강요하는 식의 지휘체계를 강군 구축의 수단으로 내세우는 건 21세기에 맞지 않다.
특히 구타와 가혹행위, 그리고 집단 따돌림 등의 저해요소를 관행으로 수용하자는 식의 논리로 군 개혁을 이루고자 한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낫다. 자칫 도로에 그칠 공산이 크다.
강군 건설에는 기존의 구태한 병영문화를 근원적으로 바꾸겠다는 확고한 실천의지가 기본이다. 가혹행위가 됐건 왕따 문화가 됐던 지속적인 교육과 인간에 대한 현실적 이해를 통해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근본도리를 알게 해서 불행한 사태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합리적인 병영생활도 강군을 만드는 데 바람직한 처방전이 될 수 있다. 효율적인 지름길을 안내해 주는 충직한 이정표의 도움을 받는 쏠쏠한 재미를 생각해 봄직하다.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으로 밀어붙이는 기계적인 트레이닝 과정은 영화같은 가상세계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실전에서는 강군은커녕 원치 않은 부작용만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도 명심할 일이다.
 
늦은 나이에 군에 입대해 어린 사병들과 같이 생활해 본 개인적 경험으로는 서로를 존중해주는 인격적 대우의 중요성을 강조할 만하다고 본다. 극단적인 상황에 놓이더라도 이성적인 분위기 속에서 차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인격적으로 무시당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지극히 비상식적인 폭력에 노출되고 만다는 것을 깊이 명심할 일이다.
바람직한 군 문화 조성에 민관이 도울 수 있다면 함께 팔 걷어 부치치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훌륭한 병영 문화가 대한민국을 좋은 나라로 만드는 데 있어 학교 못지않은 중요한 기반이 된다는 '진리'를 무기삼아  말이다.
자, 함께 나서자.                         (2011. 7. 13)            
                                           ....홍문종 생각                   

2011년 7월 13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인내의 리더십

인내의 리더십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한 한나라당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사무총장 인선으로 불거진 내홍이 봉합될 여지를 보이지 않아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다.
급기야 측근을 사무총장에 기용하려는 대표와 이에 반발하는 두 최고위원 간의 기 싸움이 합일점을 찾지 못한 가운데 결국 대표 강행으로 사무총장 임명이 표결로 처리되는 전무후무한 사태가 벌어졌다.
신임 대표의 리더십 부재를  걱정하는  당내  중진들의 질책이 쏟아지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오는 ‘새로운 한나라당’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무색하고 부끄러워진다.

물론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속사정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또 다시 한나라당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는 민심의 현장은 더 잘 보고 있기에 조바심이 생긴다.   친 한나라당 성향 쪽에서는 ‘과연 내년의 중요한 대소사를 잘 이끌어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불안해하고 있고, 반대 진영에서는 ‘그럼 그렇지’하는 비아냥과 기대감(?)으로 한나라당 지도부의 불화를 반기는 분위기다.
적진을 향해 화력을 모아도 시원찮은 판에 헤게모니 다툼으로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는 모습이 정말로 딱하다. 설마 ‘봉숭아 학당’이라는 세간의 조롱을 ‘애칭’으로 즐기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부터  리더십  구설에 휩싸인   당사자로선  억울하고 답답한 일단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조직의 수장을 맡을 기회가 많았던 만큼 (고하를 막론하고 그 지위들이 내게 ‘수혜’의 의미였던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결단을 요구받는 압박감에 고민했던 기억이 더 많다) 화려함 뒤에 감춰진 리더의 고독한 눈물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홍준표 대표가 조금은 더 인내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쉽다. 
정말로 자신만의 개혁정치를 하고 싶다면 지금으로선 탕평인사가 최선인  현실을 그는 외면했다. 탕평인사를 단행하고 이를 무기삼아 개혁과 보수의 가치를 밀고 나가는 게 자신의 꿈에 근접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 텐데 성마름을 너무 원색 그대로 표출하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서민을 보살피고 경제를 살리는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바람직한  방향설정 (남이 가지 않은 길을 통해 국민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이슈를 짚어낸 홍 대표 특유의 순발력이 돋보이는 측면이기도 하다)에도 불구하고 손쉬운 하책을 선택했기 때문에  실기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제되지 않은 조급함 때문에 훌륭한 의도가 묻히고 있는 상황이다.
또 지나치게 솔직하고 직설적인  언행이  장애물이 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도 있다. 이제는 개인의 개성에 치중해서는 안될 집권 여당 대표로서의 의전을 요구받는  처지임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언행 하나하나를 왜 태산처럼 무겁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자각이 시급하다. 


구성원의 의욕을 북돋아 조직의 성공을 이끌어내는 게 리더의 역량이라면 강압적이기보다는 구성원 저마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감성의 리더십이 우위라는 생각이다.
리더십의 성패는 리더가 구성원의 자발적 충성을 얼마만큼 이끌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구성원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리더의 역량에 달려있는 셈이다. 갈수록 ‘섬김의 리더십’이 중요시되는 사회적 분위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리더의 ‘성마른 결론’은 독이 될 수 밖에 없다.
구성원 간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장을 조정해 본 개인적 경험으로도 ‘인내와 시간 그리고 기다림’ 이 세 가지 키워드가 성공적 리더십의 왕도라는 결론이다. 
설사 밀어붙여야 할 상황이 되었다 해도 시간을 두고 좀 더 기다릴 줄 아는 리더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관전자들이나 관계자들이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까지 말이다.
그래야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그 결정에 힘이 실릴 수 있다.
 
대표와 지도부의 리더십 성패에 따라 구성원의 운명이 결정되는 만큼 새 지도부의 성공적인 안착을 기원한다. 그러면서도 자꾸 걱정을 놓지 못하겠다.
우리 지도부가 국민은 둘째치고라도 당내 여론을 어떻게 수습하고 해결할지에 대해 생각하면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나 한 사람이 아니라 주위의 많은 당원들이 걱정하고 지적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한 배에 올라있는 공동체라는  숙명의식 때문이겠지.
부디 슬기롭게 백가쟁명의 어려운 위기를  잘 극복하고 봉합해서 좋은 결실을 맺는 리더십을 기대한다.
                                  (2011. 7.13)                 
                               ...홍문종 생각                 

2011년 7월 11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여름 소낙비

여름 소낙비

                                                   
                                        홍문종


소낙비 여름례
 인생에 축복세
 힘차게 내려라
 가슴에 적셔라
 대지를 품어라


잊었던 사랑의 전설처럼
 떠나간 이별의 여정처럼
 아쉬워 몸서리 떨며
 그리워 냉가슴 치며
 전율로 온몸을 덮어


반백년 구비구비 돌아
 찰나의 짧은순간 만나 
 영겁의 모퉁이서 이별 
 기쁨과 환희의 찬가들
 슬픔과 눈물의 라퀴엠


어디선가 만났다가
 어디론가 떠나버릴
 무엇인가 되었다가
 무엇인지 모르게될
 너와나의 인생유전


여름비여 세게 내려라
 하늘에서 진노 와르릉
 대지에서 화답 차르르
 인간세상 놀라 화들짝
 삼라만사 감사 후아우


설레임
 기다림
 꿈을꿈
 만나암


 지침
 지루함
 진짜 이별


 희망
 백일몽
 정말 만남


소낙비
 내리고
 소나기
 멈추고
 여름 소낙비



(2011.07.12)

2011년 7월 10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짝퉁, 게 섯거라!

짝퉁, 게 섯거라!



중국의 짝퉁시장을 가 본 사람은 안다.
그곳의 짝퉁 업계가 얼마나 엄청난 규모와 다양성으로 가동되고 있는지, 마치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을 듯한 기세로 얼마나 활기차게 판을 주도하고 있는지.
세계의 수많은 브랜드들이 중국의 짝퉁 시장을 경고하고 있고, 이를 근절시키기 위한 수고가 이어지고 있지만 중국의 짝퉁 시장 기세가 꺾이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솔직히 중국에서 짝퉁 근절을 기대하는 자체가 현실적으로 이미 어려운 일이 됐는지도 모른다.
일상용품부터 식용재료에 이르기까지 일단 그 왕성한 레이더망에 포착되면 그 어떤 제품이 되었건 짝퉁 모델로 낙점되는 운명에 직면하게 된다. 심지어 스타벅스나 맥도날드 등 세계적인 업체조차도 교묘한 유사상호 조작으로 명성을 더하고 있는 중국 짝퉁업계의 재물이 되는 상황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짝퉁들은 이 방면의 프로조차도 구분이 힘들 정도로 놀라운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세계의 정품 유통시장을 교란할 만큼 엄청난 조직력과 치밀함을 보이는 짝퉁시장 배후에 중국 정부가 있는 건 아닌지 의혹을 살 지경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사 주신 고급 손목시계 생각이 난다.
당시로서는 몹시 귀한 물품이었던 만큼 내 손목에 걸려있는 시계를 한번만 찰 수 있게 해 달라는 친구들의 요청이 쇄도하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나 시계와의 인연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교회 발표회 때 꼭 시계를 차고 무대에 서고 싶다는 친구에게 빌려준 이후 시계가 내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혼날 것이 두려웠던 나는 궁여지책으로 친구가 구해 온 프라스틱 시계(달라시계라고 불리던 헐값의 짝퉁 시계였다)를 대신 차고 다니다가 어느 날 드디어 시계의 행방을 묻는 아버지의 추궁에 답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리고 얼결에 대답한다는 것이 ‘더 좋은 시계여서 바꿔 차고 다닌다’고 둘러댄 거짓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어린 나의 꼼수를 모를 리 없으셨을 텐데 아버지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러면서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을 대신할 수 없고 나쁜 물건이 좋은 물건을 대신할 수 없다. 사람들이 급하게 구색을 맞추거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우선 당장 손쉬운 방법을 생각하기 쉬운데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이는 행위가 되어 낭패를 초래하게 된다”는 말씀으로 훈육하셨다.

짝퉁은 시장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정치판에도 짝퉁들이 넘친다.
때 마침 신문을 보니 유력 대선 주자를 팔아 호가호위하려는 정치판 짝퉁들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기사가 눈에 띈다. 해당 정치인을 팔아 사람들을 모아 세를 얻으려 하거나 스케쥴 핑계를 대며 참석 일정이 취소됐다는 거짓말로 국민을 기망하거나 함께 찍은 사진을 내세워 핫라인이 가동되는 측근을 자처하는 짝퉁들이 우글거린다는 내용인데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메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후죽순으로 범람하는 짝퉁들의 진상이 난무하는 현실은 걱정스럽다.정치하는 사람으로서 심히 우려하게 되는 부분이다.
정품 보호를 위해서는 짝퉁 근절이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유혹을 이기지 못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거나 값싼 허영심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심을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향 싼 종이에선 향내가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선 비린내가 난다는 옛말이 있다.
짝퉁이 절대 명품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겠다.정치 발전을 위해서도 짝퉁들의 호가호위를 막는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사명인지를 많은 이들이 이해하고 동조할 수 있었으면 한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본 지금, 그 옛날 손목시계 사건 당시 아버지께서 전하고자 하셨던 의중을 다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삶에 짝퉁이 끼어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짝퉁 변별법’을 가르쳐 드리겠다.
유난히 큰 목소리로 허장성세를 부리거나 기름지거나 때깔이 좋거나 또 무엇인가 과시하지 못해 안달을 부리거나.... 이런 치들은 가짜일 확률이 높다.
유력 정치인일수록 많은 사람을 만날 수 밖에 없다. 특히 선거 때는 손에 붕대를 감을 정도로 악수하고 사진 찍히는 일이 일상화 돼 있는 상황이다. 그런 만큼 악수 한번 하고 사진 한번 찍었다고 특별한 인연임을 내세우는 인간일수록 짝퉁일 가능성이 높다.
특별히 경계 경보로 관리해야 할 가짜들이니 조심하길 바란다.

(2011. 7.10)
...홍문종 생각

2011년 7월 8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지금부터 시작이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오랜 염원을 이뤄냈다는 흥분 때문일까?
2018 동계올림픽 평창 유치의 생생한  감격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루였다.
역시나 뜻이 있으면 길을 찾게 돼 있다는 만고의 진리를 다시금  절감했다.
한두 번 잘못됐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삶의 의지도  새삼 다졌다. 
평창의 성공은 무슨 일이 됐건 뜻을 세우고 최선을 다하면 종국에는 좋은 결실을 맺게 되는 실체를 보여줬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국운이 트일 거라는 기대감에 설레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사안에서  성공이 좌초될까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평창의 기적을 완성시키기 위한 대장정의 진짜 출발은 지금부터다.
계올림픽 유치 성공은  서막에 불과할 뿐이다.
이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려면 더 없이 철저한 준비와 실천을 기본 약속으로 하는 재무장이 있어야겠다. 성공하면 대한민국 역량을 세계만방에 떨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되겠지만 생각만 갖고 될 일이 아니기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2018년 동계올림픽이 개최되는 그 날까지 앞으로 남은 7년을 어떤 노력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지금까지의 공력들이 제대로 된 결실을 맺게 돼 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들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평창 주변 땅 73% 외지인 소유고 기존의 시설 공사는  근시안적이고 부실하게 진행됐다는 소문들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솔직히  걱정을 안할 수 없다. 

60조의 경제 효과 운운하며  들떠있는 기대감은  지나치게 막연하다. 
자칫   위험천만한 일장춘몽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기왕에도 막대한 재원이 투자됐고 앞으로도 적지 않은 재정 투입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국가사업인 만큼 보다 신중하고 꼼꼼한 판단력이 요구되는 건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앞서 동계 올림픽을 개최했던 도시(일본의 나가노나 캐나다의 밴쿠버 등)들이 재정위기에 상태에 빠져 있는 현실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올림픽 유치를 성사시킨 주역들이 2018년 올림픽을 실질적으로 치러낼 면면과 동일하지 않을 현실도 고려해야  할 주요 변수 중 하나다.  처음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계획 단계부터 실행에 옮기고 또 추진해서 열매를 따는 역할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세분화된   역할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이유다.   
성공한 이후라도  논공행상에 따른 잡음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문제거리가 불거질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혹여 이번 올림픽 유치 결과물을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하려거나 생색내려는 사심은 일찌감치 거두는 게 좋다.  
 
사마란치니 자크로케니 세계 스포츠계를 주름잡는 거물급의 영향력을  익히 경험한 바 있다.
이번 유치 과정에서도 절감한 바지만 이제는 우리도   전문성을  갖춘 스포츠 지도자 양성에 관심을 가질 시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세계 스포츠계를 제패하기 위해서는  실력있는  차세대 리더들이 대한민국을 본산으로 배출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인재들이 많을수록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대한민국 영향력이 커지게 된다.  무엇보다 이번처럼 국가 전체가  달려들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게 되는 격이다.
하나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이번 기회에 우리도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를 갖게 되었으면 싶은 바람이 있다.   토종 브랜드를  키우거나 브랜드 인수 작업을 통해서라도  휴대폰이나 자동차처럼   일등 기술로 스포츠 업계를   장악하게 되는 그날을 기대한다.
비약하니까 더 비약이 되는데 통일이 되어 설질이 좋은 백두산이나 묘향산에서 동계 올림픽 세계 대회를 한 번 더 개최할 수 있는 기회가 내 생에 이뤄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잊지 말자. 
평창 동계 올림픽이 절반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부터의 노력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2011.  7.   8)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