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2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달 밤에


 달 밤에 

‘십오야 밝은 달은 구름 없는 탓이고  
이내 몸 외로운 것은 임 없는 탓이라’
올 추석, 유난히 크고 밝은 달이라더니 휘영청 고운 달빛이 황홀하다.
천지를 품어주는 따뜻함에 홀린 탓일까?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 뜻도 모르고 흥얼거리던 노랫가락이 저절로 읊조려진다.
추석이면 달 따러 간다고 뒷산에 오르며 친구들과 부르던 추억의 노래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두둥실 떠오른 한가위 달에서 세상 만물을 다 녹여내는 미소를 본다. 모든 걸 헤아리는 토닥거림으로 세상에서 제일 푸근한 휴식을 주는 어머니 품 속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달은 조금은 삭막하다.
태양의 조력 없이는 발광이 불가능한 달의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달빛에 취한 우리 눈에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도 온통 달 얘기뿐일 때가 많다.
달이 빛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위에 오른 건 태양의 역할이 있기 때문인데 이를 간과하는 게 문제다.
우선은 태양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스스로의 한계를 외면하려 든다. 스스로 달빛을 만들어내고도 기꺼이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태양의 통 큰 지원이 더 이상 달갑지 않은 모습이다. 왜곡과 자화자찬으로 스스로를 미화하는 민망함은 그래도 양반이다. 심지어 자신의 치적을 위해 태양의 존재 자체를 통째로 편집해버리는 몰염치도 불사하는 형국이다.
그렇다고 그 끝이 좋은 것도 아니다.
      
 
누워서 침 뱉는 격이지만 정치판에서 가장 두드러진 행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위를 둘러보면 민심을 돌아보지 않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  자체발광이 불가능한 달이 스스로를 태양으로 착각하면서 벌이게 되는 블랙 코미디를 보는 기분이다.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살벌하다. 지나친 자만과 함께 하는 권력은 반드시 독이 되기 마련이다.
실제 그런 착각으로 국민 위에 군림하려다  정치낭인이 된 사례가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같은 시행착오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반복되고 있으니 난감하다.
정치 연륜을 더해갈수록 민심을 천심으로 받들던 선인의 고민이 선명해지는 이유를 생각하면 답이 나올 지도 모르겠다.
      
 
정치 항로에서 ‘달이 태양을 만나는’ 인연은 분명 행운이다.
다만 무턱대고 반길 명제만은 아니라는 망설임이 있는 게 사실이다.
예상치 못한 후유증이 치명적 결함으로 작동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전부를 내던질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자신을 소멸시킬 각오나 희생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과대 포장에 편승하려는 얍삽함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하여 나름 생각해 낸 답의 키워드는 감사와 최선, 그리고 융통성이다.
서로의 인연이 진행되는 동안은 물론 후광 이후를 대비하는 노력을 보다 중요하게 고려한 결과다.
겸허하고 하는 마음으로 수혜에 감사하고  최적의 결과물로 보답할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하는 한편  고정 틀을 벗어난 융통성으로 다가올 미래를 독립적으로 대비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크건 작건 저마다의 대체기능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때 비로소 멘토의 역할도 멘티의 역할도 우주의 조화로운 규합도 가능하다는 깨달음이 힘을 보탰다.
      
 
태양에게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갖가지 능력에도 불구하고 완벽을 기할 수 없는 원천적 장애가 있다.  눈부심 때문에 누구와도 시선을 나눌 수 없는 치명적 결함이 그것이다.  달은 태양보다 위대하진 않지만 태양은 불가능한 시선을 통한 교감이 가능하다.  수많은 시인의 가슴을 울려 사랑의 시를 쏟아내게 하는 에너지가 있다. (그런데 달빛은 태양을 속박하는 빛의 산란에서 비롯됐다) 거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운무의 조화로운 자태까지 더해진다면 어떨까 갑자기 신명이 난다.  최소한 구름이 달을 덮는 불상사만 아니면 우주의 조화로운 합체가 또 다른 상상력과 즐거움의 영역을 열어줄 거라는 기대감이 충만해진 탓도 있다.
정치 영역에서도  그런 어울림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그렇게 한가위 달밤이 깊어가고 있다. 
오늘 따라 여러 생각으로 갈리는 구름 속 달빛이 유난히 살갑게 다가든다.  
 
 
PS: 친구, 자네가 그랬지. 정치든 문학이든 한 가지만 하라고.  
지나치게 예민한 나의 감수성이 냉정한 정치세계에서 치명적 실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걱정어린 충고, 정말 고마웠네. 
그 때는 침묵했지만 오늘 밤 그 답을 들려주고 싶군.    
친구,, 나의 생각은 다르네. 
물론 진실보다는 음모가 득세했던 옛날식 정치를 떠올리면  자네의  걱정이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이제는 정치판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일테면 정치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시도 같은 거지.   국민과 정치인이 어우러져 긴장없이  놀이마당처럼  한바탕  즐길 수 있는 선거현장,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나?   
결국 정치도 인생도 종교도 예술도 결국은 인간이 먼저여야하는 진리에 공감한다면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하네.    
이쯤이면 나의 예술적 소양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쟁력으로  바뀌지 않겠나.  
그러니 너무 걱정 말게, 친구여.                                                                                   
 
(2013. 9. 20)
....홍문종 생각

2013년 9월 19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평상심

평상심 


살아가면서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될 때가 많다.  
마음의 평정을 놓치면서 생기는 불안정 때문이다.
불안에 떨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중심으로 해서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내기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거기다 말로는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엔 만만치 않은 삶의 덕목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도 문제다. 
더욱이 삶의 경륜이 더해지면서  덕목의 이행을 압박하는 강도가 커지는 현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다 조절 기능을 잃고 상처를 입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감당하지 못해 소멸되는 자연의 섭리는 부지기수고.
      

평상심은 이순을 목전에 두고도 가끔씩 헤매게 만드는 평생 화두다.
양날의 칼이라고 할까, 상태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평상심이 유지되는 상황에서는 에너지가 넘친다.  화수분처럼 샘솟는 아이디어는 기본이고 방송 인터뷰나 대중연설, 특히 모임이나 행사장에서 펄펄 날게 하는 역동성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평상심을 잃으면  모든 게 흐트러진다.    
심지어 평소 곧잘 하던 것조차 어긋나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나가며 갈 지(之)자 행보가 되고마는 어이없는 행각(?)이 펼쳐진다.   
모두들 그런 식으로 일을 그르쳐 본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평상심의 중요성을 경고하는 인생의 충고가 많은 배경이  아닐까 싶다.
      

최근 인터넷 공간에서 ‘인내심 테스트 자판기’ 해프닝이나 개그맨의 우울증 진단 건들이 관심을 끄는 이유도 같다는 생각이다.
동병상련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은 미완에 그친 어두운 과거가 미련으로 작용한 탓이 크고 더불어 같은 상처를 보듬던 기억이 있기에 가능한 결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내심테스트 자판기’는 불가리아의 광고회사가 제작한 맥주 광고영상이었는데 3분의 여유도 없는 현대인의 조급증을 꼬집고 있었다. 실제 자판기 앞에서 다른 움직임 없이 3분만 기다리면 공짜로 맥주를 제공한다는데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3분을 채우지 못하는 결과를 보였다.
또 다른 건, 개그맨 허경환씨가 방송에서  소화불량이나 위통은 물론, 스트레스로 건망증 증세를 보이는, 고도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다른 이들을 위한 웃음 코드 작업이  정작  개그맨 자신에게는 '독약'으로 작용하는 현실이 놀라웠다.  특히 ‘실력에 비해 좋은 결과가 나와서 항상 불안하고 걱정스럽다’는 그의 고백은 더 없는 비애였다.   
      

오늘 내게도 그런 도전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인연과 조우하는 일과 중, 내 일상의 평화를 깨는 침입자가 있었다.
얼토당토않게 쏟아내는 ‘말 비수'에   순식간에 ‘상처입은 영혼’이 되고 말았다.
상대의 비난이 합당한 건지, 내가 감내해야 할 당위성을 갖춘 비난인지를 생각했지만 승복이 안됐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생각을 바꾸니 새로운 길이 열렸다.
‘물살이 세다는 건 목적지를 앞당길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다. 다만 그 물살을 이용하지 못해 전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건 저마다의 운명이다. 마찬가지로 평상심을 흔드는 온갖 도발도 나를 단련시키고 점검하게 하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기피할 일만은 아니다. 주어진 기회의 활용이 더 빠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평상심에 대한 도발이 없는 환경은 오히려 경계해야 할 상황이었다.  새로운 발전과 도전의 기회를 차단한다는 점에서  반성이 요구되는 대반전이 거기 있었다.     
  
앞으로 평상심에 대한 도발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오늘의 결론을 전하면서  글을 맺는 이 순간,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2013.  9.  17)  
....홍문종 생각   

2013년 9월 10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디서 무엇이 되어


인간관계,  결코 수월하지 않고 흥미롭기도 한  명제다.  
안철수 의원과 최장집 교수의 ‘파경’에 천착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십고초려’ 미담(?)을 바탕으로 한, 원로정치학자와 '새'정치인의 정치실험은 세인의 눈길을 끄는 화제작이었다.  장밋빛 덕담도 넘쳤다. 그러나 이들의 밀월은 80일을 넘기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그나마 안의원은 위장부부의 연이라도 잇고 싶었던 것 같은데  최교수의 협조가 용이하지 않았다.  급기야  ‘안의원과는 더 이상 연락도 안하고 자문에도 응하지 않는다’는 확인사살까지  감행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정치세력화나 대중정치에 대한 복잡한 고민들로 골머리를 앓는 안의원의 입장을 모르지 않을 최교수로서는 다분히 의도적인 도발이라 하겠다.  
도중하차한 인간관계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일찍이 東洋의 맹자는 ‘성공하려면 하늘의 때를 얻는 것보다도, 땅의 이치를 얻는 것보다도, 인화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西洋의 셍떽쥐페리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자신의 저서 ‘어린왕자’를 통해 토로한 바 있다. 그들 말고도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인간관계의 가치를  설파한  혜안들이 많았다.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에 관한한 인간관계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의견일치를 이룬 셈이다.   
‘각자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에서 순간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어린왕자'의 탄식에  백번 공감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인간을 향한 희망은 여전히 간절하니 무슨 조화인가 싶다.  그 순기능에 기대고 싶은 본연의 욕구가 깊은 탓이 아닐까 싶다.  관계라는 것이 누군가의 마음 얻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만으로는 그 어떤 조짐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에 비춰보면 대단한 애착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물 안 개구리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  
무엇보다 제 눈에 담긴 풍경을 세상의 전부로 삼는  전제가 문제다. 갇힌 사고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각각의 개성도 좋지만 그것들이 어울림의 과정을 거쳐 나오는 성숙한 기량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독창적 사고도 마찬가지다.   성공적 인간관계가 뒷받침 됐을 때만이 도약이 가능하다.  
다만 21세기라는, 새로운 세상을 향하는 관점에서 보면 장벽으로 받아들여질 개연성에 대한 고려는 필요하다.  
실제 세상살이가 복잡다단해지고 자기중심으로 바뀌면서 관계 속에서 연결고리를 찾기보다 타인은 타인일 뿐이라는 체념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형국이다. 창조적이고 독창적 아이디어를 강조하다 보니 혼자라는 자의식의 팽창이 기형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현실도 마찬가지다. 개인주의의 독특함을 21세기가 새롭게 요구하는 삶의 형태로 오해할 여지가 함정이 될  때가 많다.  

그래서 인연의 고리를 다듬고 가꾸는 진심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한 다리만 건너뛰면 모든 인연의 연결이 가능해진 세상을 사는 올바른 대응이 아닐까 싶다.   
소통이 가능할 때 비로소 인간관계의 순기능이 열리게 되는 건 만고의 진리다.   특히 우리처럼  사람과의 결합을 직업으로 하는 정치인에게는 더 없는 가르침이다.  창조적 기업 경영으로 인정받고 있는 故스티브잡스나 빌게이츠의  오늘날도  인간에 대한 다양한 확률을 통한 인간 연구에 소홀하지 않았던 남다른 관점이 주효한 덕분이다. 
실제  인간관계를 주무대로 삼는  정치항로 속에서  기술이나 능력보다는 진정성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현실을 보게 될 때가 많다.  조금 과장한다면,    깊은 신뢰를 매개로  한 인간관계가  온전한  소통으로 일치되는  순간은 감동의 도가니다.  상대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받아들여지는 합일의 순간,  금방이라도 세상의 모든 갈등을 녹여낼 수 있을  것 같은 충만한 마음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백아절현(伯牙絶絃), 백아와 종자기의 뜨거운 인연을 생각한다.  
마음을 알아주는 벗, 3명이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는데 나는 어떤가, 새삼 민감해진다.
그런데 어깨를 툭툭치는  작은 속삭임이 나를 에너자이저로 만든다.    
"괜찮아...지금 잘하고 있어"                       

(2013.9.10.)
....홍문종 생각

2013년 9월 2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독화살

독화살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우울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병원에서 나쁜 진단이라도 받은 건가, 덜컥하는 마음에 이유를 채근했더니 ‘마나님과의 불통’이 화근이었다.  
부인과 다투는 와중에 ‘세상에서 제일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런 식으로 낙인찍히고 나니  
삶의 의욕마저 떨어진다는 하소연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한 서글픔과 서운함이 그렇게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위로와 격려의 언어가 간절해지는 나이듦의 현실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다가선다는 점에서  쓸쓸함과 씁쓸함이 버무려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친구의 ‘속울음’을 받아 안았는데  위로를 한 건지 위로를 받은 건지  도통 모를 정도로 말이다.   
       
되돌아보면  내게도  '이기적'이라는  명제로  갈등하게 되는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고분고분 수용되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공적 영역을 위해 사적 영역을 희생하고 있다는 나름의 자부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개인의 안일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우선시하는 이타적 삶에  관심을 기울며 살아온 스스로에게 조금 더  괜찮은 점수를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누군가 ‘이기적’ 딱지를 붙여  공격해오면  유난히 민감해지고 상처를 키우게 되는 것 같다.  
  
가장 큰 기억은 유학 당시  미국에 다니러 오신 아버지에 관한 일이다.
공항으로 아버지를 모시러 가야하는데 제출 시한이 임박한 리포트가 발목을 잡았다.   당장 아버지께 달려가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리포트 제출 시한을 넘기게 되는 고약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결국 오래 고민하다가 운전면허 딴 지 얼마 안 된 아내가 나서기로 했다.
 당신께 죄송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한참 동안이나 며느리가 운전하고 나온  차를 타지 못하셨다는 소리를 나중에 들었다.   
며느리의 초보 운전 솜씨가 못내 불안했던 것이다.  
 리포트를 포기하는 게 옳았을까?
       
또 다른 기억은 한창 정치 시련기에 있던 시기의 일이다.
한창 잘 나가던 이모가 최고 실력자를 만날 날을 며칠 앞두고 가족이 모였다.
자식 문제로 노심초사하시던 어머니가 기회라도 잡은 양 ‘내 문제’를 적극 거론하셨다.
그 때도 독화살이 날아왔다.
가족 문제를 얘기해야 할 자리에서 내 문제만 얘기했다는 게 이유였다.
부당한 공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맹세코 어머니 말씀을 그저 한 두 마디 거들었을 뿐인데 왜 이기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야 하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며칠 째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있는 와중이다.  
이럴 때  어릴 적 일기가  생각의 품을 키워주고  있으니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이기적으로 따지자면 예수의 모습이 가장 이기적’이라는 지적질은 물론 ‘싸움으로 혼란스러워진 교회 안에서 어린 심령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어찌해서 고매하고 멋있고 세상을 구한다는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느냐’는 원망, 심지어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예수의 모습을 인간인 나는 닮아서는 안되겠다’라는 치기어린 호기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속내를 마음껏 풀어놓은 청춘의 기록이 지난 시간을 반추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그동안 완고했던 마음에 틈새가 생겼다. 
잘하고 있을 때는 잘하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잘못하거나 억울할 때는 또 그런 것들에 대한 상황의 합리화를 위해 자랑과 변명을 남발해 온 건 아닌지 성찰이 시작된 것이다. 그 급급함 때문에 눈 맞춤의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소탐대실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또 이를 방치하게 되는 어리석음이 문제였다는 결론 도출 과정에도 힘을 보탰다.  급기야  시간까지 부족해져서 더 성실하게 설명도 못하고 더 나아가 체력까지 떨어져 더 섬세하게 납득시키기 위한 절차를 생략하게 됐으니 ‘그런 구박을 받아도 싸다’는 자아비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게 됐다.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고싶다는 갈망이 나로 하여금  타협의 접점을 서두르도록 조종하고 있다.  
 이렇게 반성하게 됐으니  다시는 이런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스스로를 사면하자는 그것이다.  
그러나 싱겁게 끝내고 말았다는 자격지심 때문일까?
밤하늘에 떠 있는 반달과 별, 스치는 바람, 퇴락해가는 내 모습까지 모든 게 마냥 슬퍼지는 느낌이다.
“보세요,  이제 그만 독화살을 거두고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의 마력으로 기 좀  팍팍 넣어주시면  안될까요?”                                                         

 (2013. 9.1)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