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독화살

독화살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우울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병원에서 나쁜 진단이라도 받은 건가, 덜컥하는 마음에 이유를 채근했더니 ‘마나님과의 불통’이 화근이었다.  
부인과 다투는 와중에 ‘세상에서 제일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런 식으로 낙인찍히고 나니  
삶의 의욕마저 떨어진다는 하소연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한 서글픔과 서운함이 그렇게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위로와 격려의 언어가 간절해지는 나이듦의 현실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다가선다는 점에서  쓸쓸함과 씁쓸함이 버무려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친구의 ‘속울음’을 받아 안았는데  위로를 한 건지 위로를 받은 건지  도통 모를 정도로 말이다.   
       
되돌아보면  내게도  '이기적'이라는  명제로  갈등하게 되는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고분고분 수용되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공적 영역을 위해 사적 영역을 희생하고 있다는 나름의 자부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개인의 안일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우선시하는 이타적 삶에  관심을 기울며 살아온 스스로에게 조금 더  괜찮은 점수를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누군가 ‘이기적’ 딱지를 붙여  공격해오면  유난히 민감해지고 상처를 키우게 되는 것 같다.  
  
가장 큰 기억은 유학 당시  미국에 다니러 오신 아버지에 관한 일이다.
공항으로 아버지를 모시러 가야하는데 제출 시한이 임박한 리포트가 발목을 잡았다.   당장 아버지께 달려가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리포트 제출 시한을 넘기게 되는 고약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결국 오래 고민하다가 운전면허 딴 지 얼마 안 된 아내가 나서기로 했다.
 당신께 죄송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한참 동안이나 며느리가 운전하고 나온  차를 타지 못하셨다는 소리를 나중에 들었다.   
며느리의 초보 운전 솜씨가 못내 불안했던 것이다.  
 리포트를 포기하는 게 옳았을까?
       
또 다른 기억은 한창 정치 시련기에 있던 시기의 일이다.
한창 잘 나가던 이모가 최고 실력자를 만날 날을 며칠 앞두고 가족이 모였다.
자식 문제로 노심초사하시던 어머니가 기회라도 잡은 양 ‘내 문제’를 적극 거론하셨다.
그 때도 독화살이 날아왔다.
가족 문제를 얘기해야 할 자리에서 내 문제만 얘기했다는 게 이유였다.
부당한 공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맹세코 어머니 말씀을 그저 한 두 마디 거들었을 뿐인데 왜 이기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야 하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며칠 째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있는 와중이다.  
이럴 때  어릴 적 일기가  생각의 품을 키워주고  있으니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이기적으로 따지자면 예수의 모습이 가장 이기적’이라는 지적질은 물론 ‘싸움으로 혼란스러워진 교회 안에서 어린 심령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어찌해서 고매하고 멋있고 세상을 구한다는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느냐’는 원망, 심지어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예수의 모습을 인간인 나는 닮아서는 안되겠다’라는 치기어린 호기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속내를 마음껏 풀어놓은 청춘의 기록이 지난 시간을 반추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그동안 완고했던 마음에 틈새가 생겼다. 
잘하고 있을 때는 잘하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잘못하거나 억울할 때는 또 그런 것들에 대한 상황의 합리화를 위해 자랑과 변명을 남발해 온 건 아닌지 성찰이 시작된 것이다. 그 급급함 때문에 눈 맞춤의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소탐대실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또 이를 방치하게 되는 어리석음이 문제였다는 결론 도출 과정에도 힘을 보탰다.  급기야  시간까지 부족해져서 더 성실하게 설명도 못하고 더 나아가 체력까지 떨어져 더 섬세하게 납득시키기 위한 절차를 생략하게 됐으니 ‘그런 구박을 받아도 싸다’는 자아비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게 됐다.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고싶다는 갈망이 나로 하여금  타협의 접점을 서두르도록 조종하고 있다.  
 이렇게 반성하게 됐으니  다시는 이런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스스로를 사면하자는 그것이다.  
그러나 싱겁게 끝내고 말았다는 자격지심 때문일까?
밤하늘에 떠 있는 반달과 별, 스치는 바람, 퇴락해가는 내 모습까지 모든 게 마냥 슬퍼지는 느낌이다.
“보세요,  이제 그만 독화살을 거두고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의 마력으로 기 좀  팍팍 넣어주시면  안될까요?”                                                         

 (2013. 9.1)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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