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3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나를 키운 8할은

나를 키운 8할은

 
돌아보면 나를 키운 8할은 정치였다.
그런 연유로 정치인으로 살아가는 지금의 내 모습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일찌감치 정치적 유전인자의 특성을 표출하며 살았다. 고비마다 정치적 연결고리가 아니면 설명이 어려운, 숙명적 상황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결혼식 택일조차 정치적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민주적 선거가 치러진 날(5.10 총선거)’이라는 게 당시 택일을 주관하셨던 장인어른이 밝힌 이유의 전부였으니 하는 말이다.
결혼을 앞두고 4.19 탑과 현충원 국립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3김(DJ,YS,JP)을 만나겠다는 계획아래 움직였던 일도 범상치 않은 남다름이다.
   
80년 3월 26일, DJ 강연을 듣기 위해 YWCA를 찾은 것도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
민족혼을 주제로 한 그날의 강연은 비정치성을 표방하면서도 가장 치열한 정치성을 담고 있었다. 특히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옳소! 연호’와 ‘박수 유도’ 등의 전략적 움직임으로 관중의 뜨거운 열기를 이끌어내는 ‘기술’은 내게 는 새롭게 열린 정치의 ‘신문화’였다.
언론의 창의적(?) 속성을 경험하며 그 쓴 맛을  익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DJ 강연 중 ‘예수님은 나의 형님’이라고 한 대목을 언론에서 ‘예수님은 나의 형님?’ ‘무슨 신이야?’ 라는 식의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현장에서 듣기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주도하고 인도한다는 일종의 신앙고백이었는데 앞뒤를 자르고 단번에 교만한 인간성을 부각시키는 편집의 위력을 일찌감치 체험한 셈이다.

그 여파일까.
‘매일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다’는 이 간단한 표현 앞에서조차 망설이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
언론에 진의가 왜곡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지나친 조심성 때문이다. (하나님과 소통한다는 건 별다른 게 아니다. 곤궁한 상황에 놓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방향을 잃었을 때, 답을 구하면 언제나 화답하며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어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말하고자 하는 의미다. 물론 부모님 역할도 못지않다. 정치 선배인 아버지는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 나를 제일 사랑하시는 어머니는 어떤 조언을 해주실까...를 생각하며 위기의 순간을 넘겨왔다.)
솔직히 현실정치를 하면서 국민보다 언론의 평가를 더 의식하게 되는 것 같다.
특히 당 중책을 맡고 있는 요즘 들어 그 증세가 더 심해진 느낌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치현안에 관한 몇몇 발언이 본의와 다르게 보도되는 바람에 논란의 중심에 선 경험이 없지 않다.  차마 내색하지 못한 속내를 꿰뚫거나 생각지도 못한 앞지른 표현 때문에 놀라기도 했다. 어렵게 내린 결단이 난도질당하는 정황을 속수무책 바라보기만 했던 쓴 기억도 있다. 모르긴 몰라도 언론 보도를 앞에 두고 내 발언이 이번에는 어떤 옷을 입고 나타날까를 걱정하는 건 나만의 사정이 아닐 것이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언론을 향해 ‘불가근불가원’을 외치는 항변도 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가까이 하고 싶어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존재에 대한 이 오묘하고 아이러니한 정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단을 요구받고 또 그에 대한 책임과 후유증까지 책임져야 하는 정치인의 삶은 고독한 순례자의 그것과 닮은 점이 많다. 그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지만 무엇인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과제는 나로 하여금 늘 서성거리게 한다. 정치적 지위로도 해결되지 않는 일종의 불치병이라는 걸 알고 있다. 순간적인 파플리즘을 부추기는 유혹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고립무원의 외로움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알고 있기에 더 심연으로 빠져들게 되는 건지 모른다.
하여, 조금 더 정직하고 성실한 정치에 방점을 찍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정치적 완성을 위해 도전장을 내밀었다.  상식이 이끄는 정치가 진정한 승리를 누리게 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
이를 위해 언론과의 성숙한 파트너십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진정성을 담은 결단이라면 언제나 아낌없는 갈채로 격려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출 줄 아는 언론환경을 갈구한다.
   
어느 덧 정치현안에 관한 워딩 다지는 일이 일과가 됐다.
이리저리 궁리하며 매만진 ‘워딩’이 개인적 정치 신념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편해지지만 언론에 비춰질 모습을 생각하면 여전히 걱정이다.
그렇다고 파플리즘적 유혹에 굴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결국은 스스로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의 다짐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자 주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3. 7. 23)

...홍문종 생각

2013년 7월 15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귀태

귀태 
 

선진화 법 통과로 국회에서 몸싸움 현장이 사라졌지만 대신 말싸움이 늘었다.  
투쟁을 통한 진영논리 구축을  정치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욕구로, 또 누군가는 당리당략의 위대한(?) 과업 수행의 일환으로 되지도 않은 막말을 쏟아내는 어지러운 현실은 시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신성한 민의의 전당이 정치적 신념의 허울을 뒤집어 쓴 교언영색에 유린되고 있는 것이다.    
그 스트레스를 어쩌라는 건지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어떻게든 정치권 이기심에 제동을 걸고 합리적인 대안이라도 내놓고 싶은 바람인데 맘처럼 쉽지 않다.
       
정국을 발칵 뒤집은 ‘귀태’ 논란도 마찬가지다.
그 배경이 간단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민주당이 당사자 당직 사퇴와 당 대표 사과 카드로 수습에 나서긴 했지만 개인의 일탈 정도로 넘길 수 없다는 생각이다.
홍익표 의원은 대선 결과를 불복하고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인하는 ‘망언’으로 대통령은 물론 국민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의 이번 막말은 민주당 전체의 속내를 압축한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실제 민주당 차원의 부적절한 현실인식이 담겨있는 정황이 적지 않다.
 더구나 아무리 생각 없는 대변인이라도 당 입장과 무관한 주장을 브리핑에 담기가 쉽지 않다.   
도를 넘는 홍의원 발언이 대변인의 공식 브리핑을 통해 나왔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거기에 더해  잘못했다고 한 대표 입술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청와대가 홍의원을 키웠다’는 궤변으로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  
그 표리부동에 참 할 말이 없다.  전국을 순회하는 최근의 장외 집회에서는 '탄핵' '하야' 같은 과격한 단어도 남용하는 분위기인데 대선 불복은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 게 민주당 모습이다. 철저한 이중성의 코스프레로 승복은커녕 진정성조차 갖추지 못한 스스로의 척박한 정치수준을 고스란히 자폭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홍의원의 막말이 민주당 속내를 대변했다고 주저 없이 믿게 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결국 일련의 해프닝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민주당의 역사인식과 이를 부추기고 싶은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결론이다.
새누리당은 민주당의 이번 공세를 상상도 못한 놀라움으로 바라보는 표정이 역력하다.  백전백승은 아니더라도 상대진영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있었다면  수습이 가능했을  패착들이 곳곳에서 감지되는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적진분열도 벌어지고 있는 마당이다.
그런 점에서 새누리당 진영의 대오각성이 요구된다.  
 당 전략이 됐건 원내 전략이 됐건 이슈 파이팅에 강한 당으로 거듭나야한다는 상황인식이 절실한 시점이다.  
 우리는 이미 NLL 논란을 비롯, 교육분야 등 여러 현장을 통해 민주당의 위험성을 확인한 바 있다. 지난 좌파정권 10년 동안 전교조에 노출됐던 세대의 역사인식을 우려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실제 잘못 주입된 교육으로 굴절된 역사인식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폐단에 대한 지적이 적지 않다. 특히 확신범에 가까운 이들의 가치관이 청년세대의 생각을 휘젓고 왜곡된 역사관을 세뇌시키는데 집요하게 작용한 혐의가 짙다.  
앞으로 보수가 10년 더 집권해야한다는 주장은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기왕에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잡는데 최소한 20년이 필요하다는 전문가 그룹의 진단도 참고했다.   
괜히 해 본 소리가 아니다.  

다정도 병이라 했던가.  
정치판 밥그릇이 쌓이며 늘어난 정치적 촉 때문에  걱정이 더 많아졌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던 초선 때가 더 좋았다는 생각이다.
의욕은 넘쳤지만 밤잠을 못 이루는 일은 없었다. 늦은 시간 홀로 깨어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잠기다가  한숨 쉬는 일도 없었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는  강박감에 내몰려서일까.   
평소답지 않게 사용하는 언어가 많이 강퍅해진 느낌이다.   
강렬하고 선동적 단어를 선호하는 것도 모자라  진영의 각성을 촉구하고 결집을 유도하는 전략적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스스로의 모습에 놀라게 될 때가 많다.
당분간 선봉에 서 있다는 책임감에 그 길을 가게 될 텐데 걱정이 많다.
여러분의 성원과 격려, 질타가 그나마 홍문종의 원형질을 보존해주는 원천자원임을 말씀드린다.
부디 아낌없는 충고로  품격있는 정치인으로 지켜주시길.                                          

 (2013. 7. 14)

 ....홍문종 생각

2013년 7월 10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네잎 클로버


네잎 클로버


오늘, 다섯 장의 네잎 클로버가 내게로 왔다.  
첫사랑의 날카로운 입맞춤같은 강렬함으로 내 눈에  띄었다. 
점심식사 후 모처럼 여유(그것도 30여분에 불과하지만)가 생겨 국회 앞 한강변을 걷다가 일어난 일이다.  
한강 둔치는 평소에도 틈만 나면 찾는 곳인데 오늘따라 나폴레옹의 네잎 클로버(전쟁 중 나폴레옹이 잎이 네 개인 클로버가 신기해 이를 따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총알이 비껴가 목숨을 구하게 됐다는 일화)를 떠올린 게 발단이 됐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곳곳에서 진한 향기를 뿜어내던 클로버 꽃들이 제 기능을 마감한 것과는 달리 장마철 습기 속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잎사귀 군단에 눈길을 주게 된 배경이다. 

횡재를 한 기분이 이런 걸까. 
그동안 몇 번 네잎 클로버 찾기를 시도한 경험이 있지만 별다른 실적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허리를 굽히자마자 무려 다섯 장의 네잎 클로버가 기다리기나 한 듯 나를 불렀다. 
순간, 강력한 에너지 파장이  내 온 몸을 채우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무슨 조화일까 싶었다.  
두 손은 물론 와이셔츠 주머니를 채웠는데도 더 찾아낼 수 있다는 의욕이, 기운이 넘쳤다.  
다섯 장의 네잎 클로버를  품고  있자니 생각이 많아졌다.
그 모습이, 한자‘國’내부의 다섯 모퉁이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했고, 별 모양을 이루는 오각의 꼭지 점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 머리에 쓰는 관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워낙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극대화되는 순간의 기분이 싫지 않았다. 
그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비서관을 불러 책갈피에 보관할 것을 당부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누구에게나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여러 유형으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이 말해주듯 누구나 그 기회를 활용하게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기회를 활용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도 평가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기회가 온 줄 모르고 있다가 놓친 사람이, 알면서도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보다 차라리 더 낫다는 시각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다가온 소중한 기회를 무위로 끝낸 어리석음을 탓하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모르고 놓친 사람은 다음에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알고 놓친 사람은 다음에 또 기회가 와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음을 경계하는 것일게다.   
  
그런 의미에서 네잎 클로버와의 오늘 인연을, 인생을 살면서 만약에 기회가 온다면 놓치지 말라는 교훈으로 가슴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오늘의 이벤트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될 거라는 예감이다.                   

(2013. 7.9)
...홍문종 생각 

2013년 7월 7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백인천 선수


백인천 선수

 
유일한 4할 타자, 최고의 타격 이론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백인천 선수(감독과 스포츠 해설위원 등 그를  칭할 용어는 많지만 내게 있어 영원한 야구선수인 그를   '선수'로 부르고 싶은 개인적 소망을 담았다)를 만났다.
역시나 특정 분야의 전설 타이틀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빡빡한 일정에 쫓긴 짧은 시간이 아쉬울 만큼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만남이었다.
무엇보다 자신감 넘치는 노익장의 모습이 좋았다.
거목의 깊은 그늘을 느끼게 하는 열정으로 좌중을 사로잡고 있었다.
경기도 수원에 프로야구 팀을 창설해 야구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보겠다는 다부진 각오로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들뜨게 하는 힘이 있었다.
다들 지쳐 돌아간 텅 빈 운동장에서 혼자 남아 트랙을 돌며 연습에 매진했다던 어린 날의 승부 근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칠순 거장의 구리 빛 미소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여전히 현역이었다.
아마도 스스로의 신념이 그를 영원한 현역이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듯 했다.
실제 한국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 진출한 그가 20여년 활약을 통해 상상초월의 몸값으로 대접받던 탄탄일로를 접고 국내컴백을 결정했는데 이유는 딱 한 가지, 고국에 프로야구를 만들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후 그가 걸어온 삶의 노정을 보면 빈 말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 야구계의 열악한 환경과 무지로 인한 몰이해를 온 몸으로 막아낸 뚝심도,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는 자칭타칭 ‘야구 중독자’의 삶도 자기 인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이다.
게다가 남다른 체력도 그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천혜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42년생,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활력이 넘치는 백 선수에게 호감과 믿음이 절로 갔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일단의 사람들도 내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자기 뜻에 동조하고 도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이라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을 터다.
      
 
축복받는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세상을 향한 철학과 신념이 있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의지와 체력이 있고 또 같이 도모하고 돕는 친구들이 있다면 세상 어떤 난관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몸소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그는 야구 외에 새로운 소명을 세상에 전하고 있는 셈이다.
이참에 ‘백전도사’라는 호칭 하나를 더 붙여드리면 어떨지.                        

(2013. 7. 5)

...홍문종 생각

2013년 7월 2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연평도에서


연평도에서 

  
동족상쟁의 비극, 제2연평해전이 어느 새 11주기를 맞고 있다.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하면11서 NLL 논란 때문에 조금은 뒤숭숭해진 심사를 안고 비운의 땅, 연평도를 찾았다.  
여의치 않은 기상 상태로 헬기와 함정을 번갈아 타는 번잡함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시간을 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조국의 안위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 영령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막힌 과거에 갇혀 슬픔과 분노에 시달리고  있을  주민여러분께  조금이라도 위안을 드리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도 있었다.        
 
그렇게 찾은 연평도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군부대를 방문하고 연평해전 추모탑을 찾아 묵념하고 주민들과 대화를 나눌 때만 해도 유난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일행들과의 일정 소화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북한으로부터 피격당한 현장을 목격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경기장 담벼락을 뚫고 지나간 상흔이 당시의 긴장감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었다.  
그 날의 혼란과 공포가 현실적으로 다가오면서  우리의 통각신경을 압박했다.
죽음의 현장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주문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거기 있었다.


전에 없는 경험의 여파였을까?  
온 종일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뒷면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너무 진부해서 새로울 것 없는 이 생각이 연평도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누구도 방금 전까지 호흡을 함께 하던 형제가, 친지가, 전우가 순식간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생이별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섬에서  그런 무지막지한 우격다짐이 가까운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건 사실이다.   
이후로도 재현될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할 말이 많지만  모두가 입속으로 우물거리거나 허공에 흩어지는 말 뿐이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를 생각해본다.  
뭔가?  떠나간 이들의 남은 시간이 살아남은 자의 몫으로 덧보태진 삶에는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삶과 죽음은 이념이나 철학의 잣대로 가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불가하다는  생각이다 .   
하지만 코 앞의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숨만 늘어진다.   
한 형제요, 한 민족이라는 명제가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방의 영역이 아니라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정녕 가까운 관계인지 먼 관계인지 조차 선뜻 규정지을 수 없는 현실이 아프다. 아무리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아도  쉽사리 함께 담을 수 없는 어려움을 극복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 묻힌 한을 모르지 않기에 미욱한 미련에 자꾸만 눈길을 던지게 되는 것 같다.   
      
 
떠나올 때도 불안정한 기류가 여전히  우리의 두려움을 쥐고 흔들었다.     
물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긴 했다.  
하지만 순간마다 존재감을 과시하는 헬기와 함정의 소음과 뒤뚱거림이 두려웠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회의하게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내 안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스스로를 노출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각인시키기 위한  자연의 음모에 다름 아니었다. 
  

서울 한복판에 되돌려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분주한 일과 속으로 파고드는 내 모습을 본다.  
불과 몇 시간 전,  삶과 죽음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했던 기억조차  아득해진다.   
 또 다시   7월의  역사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힘내자!!'                                                          

(2013. 7.  1)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