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1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자연의 역습

자연의 역습


대참화다.
140년 만이라는 최악의 강진과 쓰나미가 일본을 초토화 시켰다.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혼돈으로 뒤엉키며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무섭고도 놀라운 전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재산피해도 피해지만 희생된 인명 규모가 시간이 지날수록 늘고 있으니 걱정이다.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연의 역습에 처절히 찢긴 도시의 모습이 무언의 압력이 되어 공포를 조장하는 것 같다. 상상 속에 머물러 있던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나 폼페이 최후 당시의 엄청난 공포 상황을 체감하는 기분이다.
자연 재앙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실감하면서 스스로를 되짚어 살피게 되는 마음이다.

일본의 이번 참사를 두고 여러 해석이 분분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문제는 인간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결론이다. 무지에서였건 오만에서였건 자연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던 인간의 불찰을 이번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인간이 그동안 자연에 했던 몹쓸 짓이나 하늘의 뜻을 어기고 인간 위주의 삶을 살았거나 했던 행위들에 대한 반성과 두려움을 갖게 하는 계기로 작용되는 것 같다.
교회에서 장로직분을 맡고 계신 어머니는 “패역한 세태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이번 사태를 걱정하셨다. 제각각 외국에 나가있는 아이들은 전화로 ”기도를 많이 해야 하나 봐요“라고 하거나 ”기도를 많이 해 달라“며 안위를 전해왔다. (동경에 있는 딸은 다시 통화를 시도하니 연결이 안돼 못내 불안한 심정이다) 또 누군가는 ‘말세 징조’로 못을 박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번 재난을 일본에 국한된 불행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두려움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두려움의 강도는 대상을 알 수 없는 불시의 역습일 때 극대화 되는 성향이 있다. 언제 시작될지, 어떤 과정을 거칠게 될지 어느 정도의 강도일지 더구나 해결책도 불투명한 상태에서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지난 밤 잠자리를 설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말세의 기록이 존재했던 것 같다.
누구도 말세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의 반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야의 달력이나 주역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비롯해서 심지어 성경에도 지구 최후의 모습이 기록돼 있을 정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늘의 존재에 대한 개념은 점점 더 확실해지는 것 같은데 하늘의 뜻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져있다. 공자는 나이 50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했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여전히 하늘의 뜻을 묻고 있는 나는 뭘까, 싶기도 하다. 하늘의 뜻이 헷갈릴 때가 많아질수록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하늘의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갈수록 분명해 지는 건 있다.
자기 마음에 비춰 하늘의 이해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하늘이 내 편을 들어 도와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아마도 그런 순간이 저마다에 있어서 하늘의 뜻이고 하늘의 소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갈수록 커지는 것 같다.


마구잡이로 돌아가는 세상일을 보면 정말 말세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돼 있는 인간의 숙명적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말세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거나 특별한 삶의 지침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종말론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생을 진지하게 관리해야 할 책임이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하늘의 뜻에 합당한 참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바쁜 일상을 핑계로 하늘의 뜻을 헤아릴 여유를 갖지 못하거나 그 자체를 귀찮아하는 모습을 주목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영위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경시하는 풍조로 이어진다는 측면에서 한번쯤 되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전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늘의 진노는 무섭다.
더 이상의 피해가 확산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는 경험이다.


(2011.3.12)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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