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7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의인의 시대

의인의 시대

며칠 전 언덕을 구르는 통학버스를 몸으로 막다가 참변을 당한 한 기사님의 의로운 선행이 있었다. 그의 희생으로 20여명의 인명은 무사했으나 정작 자신은 목숨을 잃고 만 안타까운 사건이다. 그의 의로운 행적이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많은 이들이 추모의 염으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하고 있는 분위기다.
앞서 일본에서 유명을 달리한 아름다운 청년 故이수현군의 삶도 비슷하다.
2001년 1월 26일 일본 유학 중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역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만 故 이수현군의 안타까운 사연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술이 취해 전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해내다 참변을 당했는데 그 때 그는 스물여섯 나이에 불과했다.
그의 희생은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삶에 익숙해있던 당시 일본사회를 각성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감사의 눈물로 그의 삶을 기렸다. 일본 내에 ‘이수현 장학회’가 설립되는 가하면 그의 삶을 조명한 영화 ‘너를 잊지 않을거야’가 한일 합작 영화로 제작되는 등 그를 추모하는 각종 행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살신성인하는 모든 의로움은 우리에게 있어 시공간을 초월한 기운을 품은 영원불멸의 아우라의 흔적이다.
무엇보다도 희망의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 귀한 가치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하고 기록해서 후대에 계승하고 기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제 명을 다하지 못했지만 결코 짧다고 할 수 없을 이들의 의로운 삶이 새삼스럽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명제를 되짚어보게 한다.
톨스토이는 동명의 소설집을 통해 인간의 지위나 부, 권력의 덧없음을 말하는 대신 절대절명적인 ‘사랑’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그들의 삶을 어우르며 절대적 구심체가 되고 있는 사랑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 사랑에 의해 살아가되 개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된 동력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
그는 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고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라는 조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건 무엇이고 죽는 건 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는 삶이 되는 건지 하루종일 내 머리 속을 맴돌며 혼란스럽게 하는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있다.
결국 언젠가 죽게 돼 있다면 그 기간이 30년이든 40년이든 아니면 100년이든 영겹의 세월로 흘러온 인류의 역사성을 생각한다면 굳이 아등바등 거릴 필요도 없지 않을까, 정말 그렇다면 의미있는 삶이나 죽음의 명제에 무슨 무게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론에 골머리가 썩히고 있는 중이다.
내 자신 스스로의 세계이기에 내 삶의 의미를 찾아야한다는 결론을 깨달으면서도 그런들 영겁의 시간 속에 한 점 티끌의 존재로 소멸되어질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은 체념이 빠르게 교차하는 갈등의 연속이다.
아무리 좋은 집이나 옷, 음식이 있다한들, 금력, 권력, 명예가 넘친다 한들, '수명‘의 한계 앞에서 모든 게 신기루가 되고 만다는 사실 역시 그러한 정황을 부축이고 있다.
문득 ‘온 세상을 얻고도 내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 내가 바로 우주이고 세계가 내 안에 있다’는 성경의 의미가 좀 더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의문투성이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 뭔가 실행되는 그 순간, 의인의 필요충분조건만큼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규명돼야 하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왜 그랬는지가 중요하다기 보다 그 순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일을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무릅쓰고 주저함 없이 해냈다는 사실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설정이다.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의인을 기리고 존경하며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존재할 때 삶의 길이와 상관없이 더불어 살만한 세상이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어제가 10주기 추모일이었는데 10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뜨거운 마음으로 이수현님의 선행을 기리는 분위기였다는 소식이다. 특히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에서 그 열기가 더 뜨거웠다는 후문이다.
한 사회나 국가적 삶의 품격은 그에 속한 구성원들이 선하고 의로운 일에 어떤 식의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높은 점수로 격려의 박수를 보낼 수 있는 마음가짐이 삶의 품격을 평가하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우리보다 더 열성적으로 이수현님에 대한 추모열기를 이어가는 일본의 저력에 다시한번 놀라게 된다.
선진국민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데 우리가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부의 척도보다 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작은 일이라도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일을 한 한사람 한사람을 잘 기억해 내고 감사하고 롤 모델로 삼고 하는 일들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의인이 관리되는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해보자는 소리다.

선진사회일수록 의인이 대접받는다.
우리 사회에 의롭고 선한 일들을 확산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이들의 삶이 부디 쓸쓸하지 않게 되길 .

( 2011. 1. 27 )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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