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1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낙엽이 부르는 길

낙엽이 부르는 길

무심히 시작된 가을이 옛 노래 속에서 깊어지고 있다.
바바리 깃 올린 고독한 뒷모습이 아니어도 거리를 구르는 한 점 낙엽에조차 가슴이 뭉클해지는 사내의 감성이 그저 부담스럽기만 한 계절이다.
오늘도 소요학파의 맹렬 추종자답게 고독을 씹으며 낙엽이 부르는 가을 길을 걸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옷깃을 여밀 정도로 바람이 싸늘해지면 떠나버린 사랑이 그리워진다는 태고적 사연을 따라 온종일 낙엽을 몰고 다녔다. 나이도 직위도, 주어진 처지 같은 건 말끔히 잊은 채 캠퍼스를, 철둑길을, 산 중을 걸으며 낙엽 속에서 개똥철학을 건져 올렸다.
무더기를 이룬 낙엽의 면면을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그 때 처음 알았다.
그 들 중 어떤 것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색깔도 모양도 세상에 나온 시기도 소멸의 시기도 어쩜 이리도 다를 까 싶게 제각각이었다.
닮은 게 있다면 마지막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용쓰는 그 처연한 모습을 꼽을 수 있을까?.

문득 푸르고 싱싱했던 지난 기억은 까맣게 잊고 ‘추락’으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 제 운명에 순응하고 있는 낙엽의 처신이 눈물겹다는 생각이다. 냉정히 생각하면 그런 식의 마감은 나뭇잎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을 터다. 하루 이틀 시간차는 있을 지라도 절대로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 쌍둥이처럼 닮아있는 삶의 대기표로 대변할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러고 보니 가을이면 유난히 심해지는 내 센티멘탈리즘은 낙엽으로부터의 청구서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을이면 시도 때도 없이 마음 속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던 미련이 아스라한 슬픔으로 피어나는 가 싶기도 하다.

너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나.
단풍잎 하나 집어 들고 속삭였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아니지요. 더 많이 발효된 다음 산산히 분해된 분진으로 새로운 생명들이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면 소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책임이 남아있는 거지요.
파르르 생명줄을 떠는 단풍의 모습이 더 없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그 순간 눈앞의 만산홍엽이 그토록 우리 마음을 끄는 건 외형의 멋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 안에 내재된 숭고한 사명의식 덕분이라는 깨달음이 뇌리를 스쳐간다.

낙엽이 지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사라질 뿐이고 새 생명의 창조적 근원으로 환치되는 중이다.
적어도 제 한 몸을 온전히 제대로 희사하는 과정을 완성했다면 말이다.
그것은 수없는 세월을 이어온 재탄생의 위대한 작업이기도 하다.
인간도 낙엽처럼 최후가 예약돼 있는 존재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 절명의 한계다.

문득 자칫하면 한 잎 낙엽보다 못한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창조적 역할을 외면한다면 아무리 만물의 영장을 자처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한낱 우주의 쓰레기 더미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는 오명으로 남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할 일이다.
우리가 공의의 삶을 지향하는 이유는 죽지만 죽지 않기 위해서다.
영원한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기 위한 삶의 에너지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생각 없이 살다 사라질 인간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다.
......
인간은 죽는다.
인간은 죽지 않는다.
희망으로 시작하는 11월의 첫 날을 이렇게 마감한다.

(2011. 11. 1)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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