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감사의 힘

감사의 힘

연일 끔찍한 사건의 연속이다.
사소한 이유로 자식이 부모를, 남편이, 아내가 배우자를 죽이는 극단의 사건이 줄을 잇는다. 악연의 퍼레이드에 더 이상 놀랄 가슴도 남아있지 않다.
눈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 충격적인 상황들을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스스로가 놀랍다. 우리가 지금 엄청나게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반증인 것 같아 씁쓸하다.

이번에는 고3 아들이 어머니를 죽였다.
8개월 동안이나 시신을 방치한 채 집에서 함께 지내다가 발각됐다.
전국 1등을 강요하는 ‘엄마’의 폭력이 무서웠다는 게 살해 동기란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요구한 건 오로지 1등이었다. 공부만이 아들의 성공적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확신했던 것 같다. 지나치리만큼 아들의 공부에 집착했다. 어머니는 ‘밥을 굶기고 잠을 안 재우고 골프채로 때리는’ 식의 체벌로 아들의 선전을 독려했다. 아들의 성공을 바라는 나름의 사랑법이었을 것이다. 아들 역시 그런 어머니의 명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국 1등이 아닌 성적으로 어머니를 설득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아들의 이성을 앗아갔다. 이들 모자의 엇갈린 사랑법이 좋은 결말을 내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는 차디찬 시신으로, 아들은 어머니를 살해한 패륜아로, 서로의 운명을 구겨버리는 존재가 되었다.
복잡해진 사회적 상황만 탓하기엔 18세 범인의 나이테가 너무나 푸르러서 마음이 아프다.

인간은 미완의 존재다.
문제를 안고 살아야하는 운명인 만큼 더 없이 불완전하다.
해법을 찾자면 자족하면 된다.
결국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고 주어진 상황에 자족하고자 하는 마음자세에서부터 인생의 해법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똑 같은 분량의 물이 병속의 있다. 같은 분량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것밖에 안남아’ 부족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이만큼이나 남아’ 풍족한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만족과 불만족의 차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당사자의 마음 상태에 달려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앞서의 불행한 모자도 어머니가 전국 1등에 못 미치는 아들의 부족한 실력을 탓하기보다 병치레 없는 건강에 방점을 두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체벌의 형태가 아닌 부드러운 스킨십이나 상호 교감으로 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면 지금쯤 아들의 진로를 위해 가장 중요한 활약을 벌이고 있지 않을까?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 차디찬 감옥에서 인생을 포기하는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구절의 긍정적 효능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는 기사가 화제다.
화가 나고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감사한 마음이 뇌의 재설정 버튼을 누른 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어지는 건 물론이고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로 다른 사람과 활발한 교감을 나눌 수 있게 되면서 승리에 도취된 듯 감정의 선순환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놀라운 정보다.
인간의 평화를 가장 강력하게 조정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감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순기능이 아닐까 싶다.

감사는 주어진 상황에 대한 자족감과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 부모는 자식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한다면, 자식은 자신을 위해 그토록 큰 사랑과 관심을 들이붓는 부모에게 감사할 수 있다면 불만이 비집고 들어설 틈이 있을 리 없다. 작은 일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부모 자식 사이는 물론이고 부부나 형제, 친구들이 미움과 반목으로 서로에게 독화살을 날릴 이유가 없다.
돌아보니 내 삶에도 감사할 거리가 넘친다.
힘들고 어려울 때 건강한 체력을 주셔서 감사하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늘 내 뒤를 든든히 받쳐주시는 양친 부모님 건강이 허락되는 상황 역시 크게 감사드릴 일이다.

감사는 역시 힘이 세다.
순식간에 동토의 왕국에 훈풍을 불어넣고 희망의 싹을 틔운다.
혼자만 알고 있기엔 이 기적같은 기능이 정말로 아깝다는 생각이다.
이 참에 감사 확산 운동이라도 펼쳐볼까 싶다.
최소한 우리 사회에 끔찍한 소식들이 판을 치지 못하도록 강력한 방어제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2011.11. 25)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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