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2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새벽등산

새벽등산



평소보다 일찍(자정을 30분쯤 넘긴 시간)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깨어보니 새벽(3시 30분)이었다. 더 이상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달콤한 생수라도 마신 듯 진한 여운을 남기는 꿈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잠깐의 새벽기도를 마치고 뒷산에 올랐다.

아직 잠이 덜 깬 미명의 뒷산은 독특한 분위기로 나를 맞았다.

조금 올라가니 항상 미안함만 가득한 동생의 유택이 보였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아름다운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마지막까지 동생을 사랑했던 한 여인의 흔적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 해졌다. 병마와 싸우고 가족의 편견과 싸웠던 동생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주던 여인이었다. 몇 해 전 한 통의 편지로 동생에 대한 사랑을 절절히 풀어놓던 그녀의 통한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역시 사랑보다 인간을 더 감동시킬 수 있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동생을 위한 기도로 내 마음을 다독였다.

다시 발길을 재촉하니 잠시 후 내게 극진한 사랑을 주시던 분들이 잠들어 계신 곳이 나타났다. 그분들께도 생전의 연을 떠올리며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곳에서 몇 걸음 더 옮기자 통정대부를 지냈다는 세도가 부부의 봉분이 보였다. 그 옛날 이 시골에 이 정도 크기의 무덤을 쓸 정도였으면 꽤나 권세를 누리던 집안이었을 텐데 불과 100년도 채 못돼 무성한 잡초와 어지럽게 흩어진 상석들 때문에 폐허가 되어 있는 인생무상이 절로 느껴졌다.

평소 지나치며 자주 보는 무덤이기도 해서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아주며 고인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의 무덤을 아무런 관심없이 지나쳤는데 당신처럼 안부를 묻기는 처음“이라며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 인생, 생각처럼 그렇게 길지도 않으니 너무 아등바등거리며 살지 말라“고 충고했다.

나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저 산책길에 자주 만나는 인연을 생각해 내일 인부들을 시켜 벌초를 해드리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이내 다시 산을 올랐다.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대한민국 굴지의 언론재벌가의 호화스런 가족묘지들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정상 언저리다. 호화분묘 단지 앞을 지나며 뭐라고 한마디 남길까 망설이는데 쏟아지는 땀방울이 얼굴을 적시기 시작해했다.

발 아래로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며 부산한 아침을 준비하는 시가지 정경이 야트막한 높이 때문인지 정겹게 눈 안에 들어왔다. 아직 잠이 덜 깬 산짐승들과 함께 도시의 새벽을 훔쳐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도 했다.

몸을 돌려 하산을 시작하는데 제 몸집의 수 십배 면적으로 거미줄을 쳐 놓은 거미가 내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문득 제 속을 다 드러내놓고 있는 거미가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사람아, 이 치열한 21세기 생존경쟁 구도 속에서 이렇게 번거로운 몸집으로 전략을 다 드러내고 있으면 어떻게 먹고 살겠는가”라고 하자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양반 아저씨, 이 세상에는 고작 하루살기에 급급해하며 나처럼 헐떡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효용성이니 21세기 전략이니 사치를 부리는 거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그만하고 가던 길이나 가슈, 나는 여태 아침도 못 먹었수다”라는 거미의 퉁명스런 일갈이 나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1시간여 넘게 산을 타다 돌아오는 길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이제 막 등산길에 오르시는 어머니를 만났다.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아들을 만난 어머니는 온 몸으로 나를 반기시더니 엊그제 만난 자리에서 어머니께 주름살이 많다고 "얘 너는 왜 화장도 안하고 다니니"했다는 나도 아는 한 여고 동창 얘기를 꺼내셨다. 그리고는 못내 못마땅하신 어투로 “아무리 쳐 발라도 지가 더 쭈글쭈글 하고만” 하셨다.

아직도 청춘인 우리 어머니.

몇 발자국 더 가다가 만난 아버지는 함께 계시던 목사님들께 나를 소개하시면서 “나는 이제 다 됐지만 우리 아들은 저보다 훨씬 목사님들을 잘 모실 겁니다.”라고 하셨다.

매일 야단치시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아들을 칭찬하시는 건지 당신을 자랑하시는 건지 늘 애매모호한 화법을 사용하시는 아버지시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아침 새벽 등산이 끝났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가슴 부푼 만남 속에 사라져가는 것 같다.

산 밑으로 떨어지는 달과 함께 잔뜩 부른 배를 식히기 위해 1시간 넘게 걸으며 정리해 본 오늘 아침 새벽의 전모다.

여러분 어떠셨나요?
(2010 6. 22)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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