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3일 일요일

홍문종생각 -學歷 no, 學力 ok

學歷 no, 學力 ok

사회적 파장이 컸던 신정아의 학력 위조 사건 이후 연예인을 비롯한 사회 저명인사들의 학력 시비가 한동안 도마 위에 오르내리는 현상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한 것 같더니 다시금 에픽하이의 리더 타블로의 스탠포드대 학력이 시비거리로 등장했다. 결국은 당사자가 스탠포드 성적표 등 입증 자료를 공개하면서 막을 내리게 됐지만 이 역시 학벌에 유난히 과민한 한국사회의 일단을 보여준 해프닝이라고 생각한다. (유명 연예인이나 타블로의 학력시비는 가수로서 주목받는 과정에 명문대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이 후광으로 작용했다면 문제 삼을 여지는 있다고 본다)
내게도 학력시비로 곤욕을 치렀던 경험이 있다. 국회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했을 때의 일이다. 상대후보가 사람을 미국으로까지 보내서 뒷조사를 하는 등 북새통을 떨더니 내 하버드 박사학력이 허위라고 선관위에 고발을 한 것이다.
종국엔 상대가 미국의 학위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로 끝나긴 했지만 막바지 선거운동에 피치를 올려야 하는 무렵이어서 대응하느라 고충을 겪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만큼 학벌의식이 강한 나라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학연을 매개로 한 집단의 동맹의식이 지나친 측면이 많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례가 많이 노출된다.
물론 학력이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제는 학벌이 평생을 보장하는 밥그릇으로 통용되던 시대가 지난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차원의 가치가 미래 비전을 주도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학벌주의의 완고한 벽에 대해 할 말이 많다.
학벌주의 조장의 실체는 ‘끼리’ 문화의 뒤틀린 이기심이다. 자기들만의 리그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집단적 횡포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집단의 ‘일원’이 되는 길이 험난한 것은 아니다. ‘학연’의 동질성만 충족되면 개인적 자질은 크게 문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들끼리 감싸주고 보살피고 이끌어 주는 단결력으로 타인의 진입을 철저히 견제하고 배척하고 차단한다. 대신 집단 이익에는 절대적이다. 집단을 위한 충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오늘 날 우리사회의 학벌주의의 참 모습이다.

미국의 좋은 대학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대학의 졸업장이 한 인간의 인생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지 못한다는 건 다양한 연구 보고서를 통해 널리 알려진 바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학자를 중심으로 학교 무용론이 제기되거나 명문학교 폐지가 주장되기도 한다. 또 각 대학상황에 따라 지원의 폭을 조절하는 정부의 차별적 지원제도에 대해 신랄한 비판이 쏟아지기도 한다.
학력보다는 실력 위주로 인재를 평가하는 미국사회에서는 학별이 한 개인의 성공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단적인 예로 미국 NBC-TV 프라임 타임 뉴스의 간판 앵커로 연봉1000만달러를 받는 ‘브라이언 윌리엄스’는 대학졸업장이 없다.
우리사회에서도 학력이 성공적인 인생과 무관하다는 것을 몸소 입증한 사례가 많다.
경제계의 정주영 회장을 비롯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 영화계의 임권택 감독, 가요계의 서태지 등 학벌의 우산을 쓰지 않고도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일궈낸 사람들의 성공사례는 부지기수다.

학벌은 포장지일 뿐이다.
때로 좋은 포장지 속 좋은 실력은 금상첨화일 경우가 없지 않겠지만 포장지만으로 한 인간의 가능성 유무를 결정짓는 척도로 삼는다는 건 '폭력'이다. 한 번 학력이 잘못되면 영원히 그 멍에와 굴레 속에 꼼짝없이 인생을 저당 잡히고 살아야 할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한숨을 생각하면 우리사회의 학벌주의는 한시라도 빨리 축출돼야 마땅하다.
학벌주의에 조종당하거나 음모를 돕는 동업자이기를 거부하는 사회적 각성이 필요한 때다.
무엇보다도 學歷이 아닌 學力으로 인재를 골라내는 안목을 키울 일이다. (2010 .6.14)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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