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30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나도 왕따였다

나도 왕따였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어린 영혼의 자살 소식이 음울함의 두께를 더하는 세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은 많은 이들을 마음의 감옥에 가두고 있다.
지옥이 따로 없다.
중학생들의 행위라고 하기엔 그 수법이 너무도 잔인하다.
폭행은 기본이고 심지어 전기선으로 목을 묶고 끌고 다니면서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게 하거나 물고문을 가하는 등 상상도 못할 짓으로 피해자를 괴롭힌 사실이 수사결과 밝혀지고 있다.
그렇게 석 달여 동안 진행된 33차례에 걸친 폭행과 174건의 협박 문자가 어린 영혼을 극단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해지던 위해는 고통 받던 피해자가 지옥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스스로의 삶을 지우는 선택을 하고나서 비로소 멈췄다.
무엇보다 끔찍한 건 덫에 걸린 어린 영혼이 발버둥 치던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그의 절망을 알아채지 못한 현실이다. 교육 당국은 물론 학교도 선생도 부모도 친구도 그 누구도 아이의 고통을 품어주지 못하고 방조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는 초중고생 규모가 3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는 언론 보도다.
예사롭지 않은 정황이다.
만일이라는 가정은 늘 후회스럽기 마련이지만 아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가 무관심 때문에 무너진 상황이 가슴을 치게 만든다. 그렇게 아플 수가 없다.
만일 선생님이 교실에서 혼자 울고 있던 아이를 발견했던 그 순간, 그의 고통을 살피겠다는 의지를 조금만 더 키웠더라면 이 가슴 아픈 현실을 피할 수 있었을까 묻게 된다. 아무리 직장생활이 바쁘더라도 자식과 소통하고자 하는 부모의 관심이 중심을 잡고 있었다면 미래 희망에 들뜬 아이의 환한 표정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회적 책무 역시 마찬가지다. 툭하면 요즘 아이들 타령을 하면서도 그들의 굴절된 행위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비중을 두고 다루었던 가를 따져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국가도 결코 가볍지 않은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는지 살필 일이다.
파행으로 치닫는 일선 교육의 폐단에도 불구하고 피멍이 들고 죽어 넘어가도 속수무책인 국가가 무슨 신뢰로 국민들에게 출산을 장려하고 교육정책을 논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가 어린 생명을 해친 공범인 것이다.
자기 일 외에는 관심이 없는 이기적 풍토가 벼랑 끝에 매달린 아이의 절박한 외침을 가로막았다.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우리의 죄가 크다 할 것이다.
특히 무한책임을 져야 할 교육 현장에 있는 나로서는 더 없이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이다.
마음의 감옥에 갇히는 것만으로 면피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하겠다.

어릴 적 경험으로 왕따의 고통을 익히 알고 있다.
일찍이 적지 않게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던 내가 감내해야 했던 의례적인 절차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가, 용산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수송초등학교로 전학을 간 적이 있다.
명문 중학교에 진학시키려던 부모님의 노력을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내게는 쓴 추억으로 남아있는 인생의 한 페이지다. 학교를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공백기를 거쳐야 했는데 막상 학교 생활이 시작되자 사정없이 성적이 추락하는 복병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예상못한 후유증이었다.
그 전까지 우등생이었던 나로서는 실로 견디기 힘든 충격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왕따의 유탄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우등생이라는 프라이드를 잃은 상처를 쓰다듬을 틈도 없이 아직은 낯 설기만 한 친구들의 냉대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선생님이고 친구들이고 내가 중심이었던 전 학교와는 너무나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왕따로서의 나의 삶은 차라리 지옥이었다.
존재감 없는 전학생에서 왕따로 이어진 내 삶은 힘들어진 상황 빼고는 흥미없는 현실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그 때 마음 붙일 데 없이 겉돌면서 거의 날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자칫 했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숨통을 열어주고 흔쾌히 피난처가 되어준 가족이나 만화책, 그리고 교회와 동네 친구들의 존재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친구나 동생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만화책을 보면서 아니면 어린이 주일학교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다독거릴 여유를 챙길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나마 치유할 기회를 실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 긴 어둠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피해 학생 부모가 학교 당국과 가해학생 부모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모양이다.
미국의 지방정부가 비슷한 사례로 26억여원을 지급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만큼 어떤 형태로든 손해배상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도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해마다 적지 않은 청춘들이 같은 이유로 유명을 달리하고 있건만 이를 수수방관해 온 국가의 배상 책임은 지극히 당연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피해자 부모라고 예외를 둘 수 없다. 긴 세월동안 아들의 고통을 짚어내지 못한 죄가 결코 적지 않다.

가해 학생들을 괴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모든 일탈이 어른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예전처럼 형제자매가 많은 것도 아니고 일하는 어머니가 늘다 보니 아이들을 거두는 손길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로 볼 때 무조건 매도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다. 고민을 듣거나 위로해 줄 대상도 없는 요즘 아이들의 불운을 물질적 풍요가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아이들이 인터넷 게임에 매달리게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초래되는 갖가지 경고들은 무신경하게 처리되는 경향이 있다.
보호막 없이 방치된 아이들의 안위를 챙길 염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겠다.
특히 대화채널 부재가 사회적 문제로 야기된 지 이미 오래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사후 약방문이긴 하지만 향후 재발되지 않도록 적절한 사회적 장치를 배려했으면 좋겠다.
학생들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안전장치로 대한민국의 21세기를 채워나가자.

"왕따 없는 그곳에선 행복한거니?"
어린 영혼의 명복을 빈다.

(2011. 12.30)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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