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3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욕망

욕망

어릴 때 읽었던 ‘숲속의 나무꾼’이라는 동화가 생각난다.
어느 날 나뭇꾼이 나무를 하다 호수에 도끼를 빠뜨려 슬피 울고 있었다. 산신령이 나타나 이를 찾아주려는 호의를 보의자 금도끼 은도끼 타령을 하며 욕심을 부리다가 원래의 도끼마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다.
단순한 동화지만 인간의 욕심이 스스로의 삶을 망가뜨리는 이야기를 절묘하게 대변했다는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욕구의 경계선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만나게 되는 건 비단 나뭇꾼만이 아니다. 모든 이의 삶에 해당되는 일이다.  현실에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정선을 지키며 원하는 바를 손에 넣기란 정말 쉽지 않다.
어떤 선택에서건 소탐대실과 과유불급의 경고가 따라 붙는 걸 보면 인간이 욕구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알 것 같기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지극히 평범한 상식선조차 판단이 어려워진다.  

매가톤급 위력으로 정가를 발칵 뒤집어 놓은 ‘선관위 해킹사건’만 봐도 그렇다.
여당의원의 수행비서가 지난 보궐선거 당일 디도스 공격으로 선관위 홈페이지를 마비시킨 배후로 밝혀지면서 구속됐다.
결국 패배로 끝난 선거에서 아무 소득도 거두지 못한 전형적 소탐대실의 패착이었다.  어떤 욕망이 설흔도 안 된 앳된 젊은이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했을까 싶다. 
특히 이번 소란이 내년 총선을 제물로 바치는 악재가 될까전전긍긍하는 여당의 혼란을 보면 욕심의 대가를 엄청나게 치르고 있는 것 같다.
때마침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날아온 스트로스 칸 전 IMF 총재에 관한 소식도 절제에 대해 넉넉한 가르침을 줬다.
칸 전 총재는 최근 발간된 자신의 전기를 통해 ‘쾌락의 순간을 한번도 거부하지 않은 삶이 정치적 이력을 망쳤다’고 토로했다. 육체적 쾌락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자신의 대통령 꿈을 날아가게 만든 사실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탓하며 전하는 회한의 메시지였다. 

사실이다. 과욕이 단숨에 그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상당히 매력적이고 가능성 높은 프랑스 대통령 후보였다. 그동안 상당히 균형잡힌 안목으로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 미국 일변도의 경제 질서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유로운 발상으로 접근하는 그를 관심있게 지켜봐 왔던 터다.
음모가 됐건 실수가 됐건 분명한 건 더 이상 그를 위한 파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욕이 초래한 그의 참상이 내게도 되돌아보고 음미할 수 있는 공간을 줬다.
결론은 지나친 욕심은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이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며 곳곳에서 절제의 미덕을 강조한 성경의 가르침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러 경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욕망과 분리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과욕의 끝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알면서도 과욕의 선동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모습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때때로 욕심이 인간을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드는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욕심의 순기능이 없지 않다. 어떤 형태로든 무욕의 삶보다는 강한 욕구로 스스로를 다그쳐가는 적극성이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니까.
그러나 부나비 같은 인간의 속성이 문제다.
아무리 영악한 인간이라도 일단 욕망 앞에 서면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많이 봤다.
자신이 필요한 바를 얻기 위한 대가로 목숨을 내놓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둔감해진다.
대충 얼버무릴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놓여지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만 해도 스스로의 균형감각이나 이성적 판단 기제에 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얽힌 욕망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될 때가 많다.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욕심인 줄도 모르고 집착하는 경우가 더 문제다. 

정보의 홍수가 일상을 이루고 있는 디지털 시대가 문명의 혜택으로만 다가오는 건 아니다. 아나로그적 공간 부재가 저마다의 꿈을 잘 정제하고 주도면밀하게 따져볼 기회를 차단하는 부작용이 우리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간단치 않다. 손쉬운 정보에 의한 기계적인 판단이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부르고 상황을 호도하기도 한다. 인간이 갈수록 욕심의 포로가 되어 황폐함을 자처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2011년도가 저물어가고 있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 앞에서 생각이 많다.
지난 시간 동안 가졌던 잘못된 욕심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의미에서 성취하겠다고 내세운 꿈과 목표 자체가 신기루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설사 잘 가꿔지고 있다 해도 막상 도달 해보면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낯선 존재로 우리를 황당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목표의 끈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반성은 미래를 위한 적극적인 투자의 시간이고 잘못된 과정을 거르는 정교한 여과장치다. 반성을 통해 지난 시간을 공고히 하는 건 돌아오는 2012년에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방이기도 하다.
찰나에 불과한 욕구가 평생에 걸친 비전을 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다짐으로 나의 꿈을 돌아본다.

팁 하나.
욕심을 구별하는 자가 진단법이 있다.
원래는 양심에 물으면 되는데 욕심이 커지면 양심조차 자기합리화의 덫에 갇혀 버리기 때문에 정밀한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내가 가진 ‘욕심’을 모든 이들 앞에서 떳떳이 드러낼 수 있는지 여부부터 살펴야 한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공표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욕심이 아니라 의욕이다. 

(2011.12.3.)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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