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친구

친구
 
근래 들어 옛 친구들과의 추억을 더듬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주 뵙게 된다.
특히 옛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속절없이 지나가버린 시간을 아쉬워하는 눈치시다.
며칠 전에도 빛바랜 사진 한 장을 펼쳐놓고 오래 생각에 잠겨 계신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었다. 40여 년 전 우리 집 안마당을 배경으로 아버지를 비롯한 20여명의 친구 분들이 함께 한 순간을 담은 사진이었는데 꿈인가 싶게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모습의 아버지가 거기서 웃고 계셨다.
아버지는 사진 속 친구 분들을 하나하나 짚으시며 이름을 뇌이셨다. 같이 들여다보고 있던 내게 미국에 계신 한 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유명을 달리했다고 얘기해주시는 아버지의 표정이 더 없이 허탈해보였다.
 
우울한 아버지의 기분을 바꿔준 건 친구 분들의 병문안이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연배인 만큼 그야말로 몇 분 안 남은 친구들의 방문에 아버지는 들뜬 기색이 역력하셨다. 수 일 전, 친구들이 방문하신다는 전갈을 받으실 때부터 . 머리도 다듬고 염색도 하시고 당일 일정을 일일이 챙기는 것은 물론 점심메뉴까지 내게 직접 지시할 정도로 신경을 쓰시며 친구들과의 만남을 고대하는 기색이셨다.
더구나 폭우 때문에 일정이 며칠 연기되자 더 간절해지신 눈치셨다.

 

공자는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呼아’ (먼데서 뜻이 통하는 친구가 나를 찾아오니,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닌가!)라고 했다.  역시나,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친구의  영향력을 일찌감치 내다볼 줄 알았던  혜안이 무릎을 치게 만든다. 
실제로 친구분들의 방문으로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지신  눈치다.
 아버지를 대번에 혈기 넘치는 청년으로 만들고 열정과 카리스마 넘치던 시절로 되돌려 놓았다. 와병 중 잠시 내려놓았던 활기도 되찾게 해줬다,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 나눈 추억의 내공은 역시 간단하지 않았다.
어르신들은 대한민국 격동기의 한 때를 평정하시던  분들답게   여전히 살아있는 안광과 기품있는 외모로 주위를 압도하셨다.   내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친구들과의 대화에 몰입하시며 신명을 내는  아버지의 모습이  고마움과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아버지와 친구 분들 사이를 오가는 대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겪은 세대가 갖는 조국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것과 또 달랐다. 단순한 세대차이로 일축하기엔 선이 굵은 자극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조국의 존재는 사랑은 물론 언제든지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민족중흥을 얘기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에서는 청년 못지않은 열망과 신념이 엿볼 수 있었다.
아버지 세대가 조국에 바친 헌신의 에너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가 누리는 오늘의 안락은 맨 땅에 헤딩하듯 황무지를 개간해나갔던 그들의 신화가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노고를 필설로 다 드러낼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조국이 그들에게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순의 노구인 그들은 아직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피땀을 흘릴 수 있다는 각오를 말하고 있었다.
 
감사함과 부끄러움이 교차하는 묘한 감동이 일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현재가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어르신들이 청운의 열정을 조국에 바친 결과라는 생각에 미치자 숙연해졌다. 너나없이 늙고 병들고 세상을 하직하게 되는 게 세상 이치이고 누구나 예외없이 적용되는 운명의 수순임에도 불구하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게 되는 인간의 아둔함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기도처럼 가슴에 새겼다. 지금 누리고 있는 우리의 위상이 거저 얻어진 게 아니듯 우리의 미래 또한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하루하루가 10년 20년 뒤 우리의 현실을 결정짓는 중요한 근간이 된다는 것을.
더불어 항상  스스로를 향해 되새기곤 하는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과연 우리의  지금 모습을 묻는 후대의  날카로운질문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남긴 채 손님들은 떠나셨다.
그들을 배웅하면서 구순 노인의 뒷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들이 나누는 우정 때문에, 아직도 식지 않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소서.     (2011. 8. 2)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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