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2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카노사의 굴욕


카노사의 굴욕 

고등학교 때 독일 왕 하인리히 4세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굴복하고 사면을 구했던  세계 역사를 공부한 기억이 있다.  이른 바 '카노사의 굴욕'으로,  서임권 투쟁이 정점을 이루던  1076년을  배경으로 한   사건이다. 특히   교황 앞에 무릎을 꿇은 왕의 모습을 담은  교과서  삽화가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당시로서는  납득이 안가는 대목이었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을 일이지 왕까지 되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 때 담당 선생님은 “저렇게 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왕의 자리이고 그 자리가 주는 향연이다”라는 말씀으로 우리들의 이해를 도우셨는데 자리가 됐건 권력이 됐건 그로 인한 부가급부를 맛 본 사람일수록 그것을 위해서 최소한의 자긍심도 버릴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읍소하고’
카노사의 굴욕을 연상시키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15분 퍼포먼스’가  화제가 됐던 하루였다.
주민투표 결과 투표율이 미달(33.3% 이하) 되거나 무상급식 안이 통과되면 서울시장직을 그만두겠다는 오시장의 파격선언이 정국을 들끓게 한 것이다.  
초임 때만 해도 서울시장 직무를 잘 해내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으로 그를 지켜봤었다. 그런데 재선 임기 시작부터는  상황이 꼬이는 조짐이었다.   민주당이 다수인 서울시의회에서  시장을 상대로  날린 견제구가   원인이었던 듯 싶다. 
그러더니 급기야  '자신의 결정이 이 나라에 지속가능한 복지와 참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데 한 알의 씨앗이 될 수 있다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서울시장직을 담보로 시민들에게 정치적 선택을 강요하는 초유의 일을 벌이고 말았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오시장이   자신을 서울시장 꽃가마에 태워줬던  '오세훈 선거법'에 지나치게 경도돼     시장직무를 볼모로 삼은  자신의 선택에  아무런   명분이 없는 현실을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그의 성마름이  공감보다는   불신의  단초가 되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 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국회의원 시절 상임위 활동을 함께 했고 옆자리 지기의 인연을 나누기도 했던 나로서는 오시장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귀족스러운 용모와 정갈한 말솜씨로 뛰어난 설득력을 발휘하던 실력있고 합리적인 인물로 기억되는 만큼 오죽하면 그런 결단을 내렸을까 싶기도 하지만 공인으로서 지나치지 않았나 싶어 걱정이다.
 
이제는 무상급식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오시장의 황당하기까지 한 행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가 더 큰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되는 분위기다.
정말 무상급식 이슈가 잠룡으로 평가받는 오 시장에게 있어 서울시의 산적한 문제를 제치는 최우선 순위의 가치였는지, 시장자리를 내던질 만큼 절박하고 심각한 현안거리였는지,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요 문제였는지 여부를 두고 좀 더 심사숙고 하는 시간을 가졌어야 했다. 또한 번번한 태클로 앞길을 가로막는 야당의 공세가 아무리 아팠어도 그렇게 빨리 손을 들고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어렵겠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내심을 보여줬어야 했다.
진정한 리더십은 장애 앞에서 이를 극복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내공에 달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 시장은 적은 어려움도 극복하지 못하고 이해 불가의 계산표를 들이미는 조급함으로 스스로의 무기력을 드러낸 셈이다.
 
처음부터 많은 일들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무상급식 문제를 주민투표로 몰고 간 자체가 개인적 과욕의 산물이었다.
 단정하기 이르지만 낙관하기 어려운 주민투표 결과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 같지도 않다.  더구나 코 앞에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있는 마당이다.
물론 ‘사퇴’라는 배수진으로, 주민투표 이슈를 전환(무상급식 찬반을 묻는 정책투표에서 오세훈 신임여부를 묻는 정치투표로 바꾼)시킨 성과로 보면 오시장 개인으로서는 정치적으로 남는 장사라는 셈법을 제시하는  언론이 보이기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승부수 때문에 서울시민은 물론 당과 동료를 볼모로 삼았다는 지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 오시장의 정치적 입지는  결코 플러스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정황들이 족쇄가 되어  그의 미래 구속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판단이다.  특히 오 시장을 공천해 서울시장으로 만든  한나라당으로서도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좀 해야겠다.
주민투표 이후 예상되는 후폭풍들에 대한 수습책 마련에 골머리 아프게 생겼다.  
우선 당장 선거판에서 치룰 대가가 가장 아픈 매가 될   것  같다. 

‘무상급식이  저에게는 앞으로 시정을 수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어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그리고 이 이슈를 저의 정치적 열망과 일직선상에 놓고 생각해보기도 했었습니다. 지금까지 줄곧 시민 여러분의 뜻을 겸허히 받들고 정성을 다해 섬기겠다는 게 저의 기본적인 마음입니다. 바꾼 것도 없고 변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잠시나마 무상급식 이슈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시장직을 걸겠다고 말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부디 저의 아둔함을 용서하시고 다시한번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은 임기동안 성실히 시장직무를 다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혹여 이런  담화문이 필요한 현실이 도래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오세훈시장을 아직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전직 동료의원으로서, 오세훈시장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에게도 오시장에게도 긍정적 사인의 퇴로가 활짝 열릴 수 있기를.
                              (2011. 8.23)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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