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30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지피지기면 백전 백승

지피지기면 백전 백승


미국 외교의 ‘불편한 진실’을 온라인에 폭로하고 나선 위키리크스의 이번 ‘한방’은 간단치 않은 듯하다.
이번만큼은 단순히 미국의 체면을 구기는 선에서 끝날 것 같지 않은 조짐이 역력하다.
이들이 입수한 ‘최근 3년 동안 대한민국을 포함한 270여개국에 주재하고 있는 해외 공관과 주고 받은 미 국무부의 외교 전문 25만 여건을 통한 ‘생생한 역사(?)’ 전달 작업은 당분간 멈춰지지 않을 듯하다. 각종 압력과 제재에도 불구하고 창업자 줄리언 어샌지는 폭로작업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미국은 죽을 맛이겠지만 역사의 현장을 날 것 그대로 접하게 된 입장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비밀의 성찬 - 역사가의 꿈이고 외교관의 악몽이다. 앞으로 몇 주간 독자들은 현재진행형인 역사를 코스요리로 즐기게 될 것“이라고 평하며 위키리크스의 행보를 두둔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번 폭로를 통해 반기문 유엔총장을 비롯한 유엔고위 관계자에 대한 일상적 사찰과 해킹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려는 힐러리 클린턴의 지시가 드러나 국제사회의 이목을 모았다. 특히 반기문 총장과 관련해서는 의사결정 방식과 유엔사무국에 대한 영향력 파악은 물론 DNA, 지문, 홍채 스캔 등 생물학적인 신체정보들, 그리고 신용카드 번호, 이메일 주소, 전화 등 각종 통신 번호 등도 파악하라는 지시가 포함됐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유엔사무총장 사찰은 불법’임을 분명히 한 유엔선언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지침을 지시한 미국의 이중성이 국제사회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 셈이다.
실제로 이번 사태로 힐러리 클린턴의 정치 생명이 문제시되고 있고 미국이 숨겨진 치부의 실상을 드러냈다며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뿐만 아니라 각국에 대한 미국 외교적 시각이 적나라하게 표출돼 있는 문건 공개로 인해 전 세계 외교가가 술렁이면서 일부에서는 심각한 외교분쟁이 염려되는 상황으로까지 번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어버린 후유증으로 미국이 입게 될 타격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은 다르다.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놀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런 일들은 당연히 어떤 형태로든- 관행적이거나 전략적이거나-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범주이기 때문이다.
미국 역시 이번 일로 스타일이 구겨지긴 하겠지만 국익을 위한 업무 수행이라는 대명제임을 내세워 그다지 자책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가끔 미국인들과 다른 미국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실제로 미국인들은 대체로 술수도 잘 모르고 규율과 규범을 잘 지키는 순박한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같은 미국인의 모습으로 미국을 규정하는 건 위험하다. 미국을, 미국인들이 모인 공동체 개념 보다는 외부의 환경과 무관하게 스스로를 위한 법칙으로 움직이는, 독특한 캐릭터의 거대한 집단 개념으로 파악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동안 겪었던 미국의 몇 개 얼굴만으로도 알 수 있다.
1905년 가즈라 태프트 조약으로 필리핀과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고 6.25 때는 한국전쟁을 도맡아 해결사를 자처했고 1945년 이후엔 일본과 한국의 국방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우방국으로서 양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줬다. 그리고 월남전, 한국전, 이라크 전쟁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모든 현장이 미국의 아젠다에 따라 운명이 엇갈린 희비의 역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주도하에서 한국이건 필리핀이건 일본이건 월남이건 이라크건 그 때 그 때 주어진 조연의 역할에 충실했고 어쩌다 타이밍이 잘 맞으면 서로가 최대의 이익을 나눈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 역사가들도 많이 있다. 오직 미국의 관심사는 그들의 행복과 번영이라고 혹평하면서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위키 리크스 폭로 파동을 충격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현실을 인식하고 우리의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본 명제로 무장할 필요가 있다.
수 많은 변수들 중에서 과연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 무엇이고 그 길이 어디에 있는건지 하는 것들을 우리 나름대로 알아내고 판단해서 결정짓겠다는 의지와 각오가 있어야겠다.
존경하는 반기문 총장은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훤히 내다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평소 내가 알고 있는 반 총장의 (외교적 역량 등)‘내공’ 대로라면 그는 이번 사건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방이 도청하고 있다면 그 상황을 이용해서 역으로 도움이 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어차피 점점 단조로워지는 ‘정의’ 보다는 정글의 법칙이 세계 질서를 주도하고 시점이다.
고정된 틀에 갇혀 옛노래로 권리 주장에 매몰되다간 밥 굶기 딱 좋은 시대적 상황에 우리가 살고 있다. 세계적 조류를 질서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면서 살 궁리를 잘 해야 그나마 자기 밥그릇을 챙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파고를 넘어야 하는 전시 상황임에랴.

(2010.11.24)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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