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1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희망을 깨우자

희망을 깨우자



달라진 국가적 위상을 가장 먼저 실감하게 되는 건 외국의 공항 입국심사대가 아닐까 싶다.

아마도 외국을 자주 방문하는 분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여행자 국적에 따라 입국절차의 난이도가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말이다.

어느 때 부터인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대한민국 패스포드를 내밀면서 우쭐한 느낌을 갖게 된 것 같다. ‘Korean'임을 밝히면서 조금은 더 당당해진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다.

처음 미국행 비행기를 탔던 70년대 초반 당시의 풍경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다.

이번 여름 방문했던 폴란드나 체코 등 유럽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시가지 곳곳에 널려있는 한글간판이나 한국제품에서도 그렇고 ‘Korea'에서 왔다고 하면 반기며 호감을 표하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우리의 현주소를 체감할 수 있었다. 폴란드에서 만난 한 상인은 자신의 낡은 중국제 자전거를 가리키며 한국제품이었으면 훨씬 성능이 좋았을 거라고 말을 붙였다. 심지어 그는 중국제품에 대해 별다른 기대감을 갖고 있지 않다며 우리제품의 우수성을 거듭 칭찬해 국제사회에서 달라진 대한민국의 위상을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그런데 생활고 때문에 여러 유형의 생계형 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선진국 반열에 이제 막 발을 들인 대한민국의 어두운 그늘을 고스란히 드러낸 실상인 셈이다.

실제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마트에서 음식물을 훔치다 주부가 구속이 되고 실직한 20대는 생활비가 떨어지자 재래시장을 돌며 푼돈을 털다 덜미를 잡혔다. 성실히 살았지만 빚을 갚지 못해 고민이 깊어진 가장은 어린 자식들을 남겨둔 채 세상을 하직했는가 하면 역시나 경제적인 문제를 이유로 어린 세 딸을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어버린 모진 모정의 안타까운 사정도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전과자로 전락하고 있는 게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이다.

이처럼 어두운 현실을 단순히 개인의 경제 능력 문제로 외면하기엔 사회적 책무와의 연관성이 결코 작지 않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국제사회에서 선진국 대접을 받고 있다 해도 이 같은 사회적 그늘이 제거되지 않는 한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부모로부터 조달되는 용돈만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4억 명품녀'에 대한 논란도 우리 사회의 모순된 부의 편중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정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정부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화두로 ‘잘 살기보다는 공평하고 공정한 나라’라는 케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러시아 방문 중인 이명박 대통령도 “경쟁을 통해 사회의 역동성을 살리며 패자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는 공정한 사회야 말로 대한민국 선진화의 윤리적.실천적 인프라”라는 내용의 포럼 기조연설로 이 같은 입장을 천명한 바 있다.

그런데 정작 현실은 정부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생계의 도탄에 빠진 이들을 향해 ‘잘못’이나 '책임‘을 추궁하거나 종용하는 건 불량기 넘치는 사회적 폭력을 휘두를 수는 없는 일이다.

해결을 위한 공동체적 노력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관점에서 최근의 생계형 범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차원의 주장을 펴자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축적물을 오로지 개인적 영역이라는 편협한 생각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그런 현실이고 보니 우리 사회에 존경받는 부자가 존재하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우리에게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모범적으로 실천해 온 경주 최부자 댁이 있기는 하다. 대를 이어가며 이웃을 향해 사랑의 손길을 내민 덕에 존경받는 부자의 면모를 보여줬지만 지금은 그 명맥이 끊긴 상태다)

남의 나라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국의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등 억만장자 40명이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는 '아름다운 약속'을 결성한 움직임은 이 땅의 기득권 계층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풍토가 정착되려면 아직도 요원한 우리로서는 그저 부러울 뿐인 사회적 자산이다.

특히 우리의 종교인들이나 사회사업가들이 역할 모델로 삼을만한 가치가 충분한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명백히 말하자면 이들은 자신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을 외면하고 있는 형국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종교계의 현주소는 비관적이다.

들여다보면 교회나 사찰 등이 본연의 업무와 역할의 중심에서 벗어난 일탈 투성이다. 마치 외형으로 교세가 결정되기라도 하는 양 날마다 신축 경쟁에나 매달리면서 정작 해야 할 진짜 해야 할 임무들을 도외시 하면서 빈축을 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그들에게 기대할 게 과연 있기나 한 건지 모를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은 임금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 말은 이제 말 그대로 옛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성 있는 사회적 합의로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동력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해결책은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우선 당장 한 끼를 해결하는 정도의 단편적 구호는 제공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줄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 양극화의 폐해를 완충시키는 치유책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히려 전체 국민에게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불평등 구조의 심각성을 인식시키는 것이 더 빠른 해결책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게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알리자는 것이다.



모두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분배와 공유가 제자리를 찾는 길이 가장 빠른 해법이다.

이를 기본 전제로 모두가 한마음이 될 수만 있다면 양극화 해소는 물론 이 정부의 주요 화두인 공정한 사회 구축을 한결 더 수월할 수 있도록 하는 묘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부자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 쉬운 ‘존경과 사랑’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키워드가 될 수도 있다.

모쪼록 희망을 잃지 않는 게 관건인 만큼 희망을 깨우도록 하자는 얘기다.

(2010. 9. 10)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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