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3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상책을 쓰자

상책을 쓰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막연한 짐작이 막상 현실로 들이닥치니 공포 그 자체였다.

태풍 ‘곤파스’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뿌리 째 뽑혀 널브러진 나무,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제, 산산조각난 대형 유리창....

태풍이 순식간에 거리를 전쟁터로 변신시켰다. 사람이 맥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가 하면 출근 길 전철은 속수무책으로 묶여버렸다.

자연의 역습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곤파스'의 여진이 채 사라지기도 전인데 이번에는 ‘말로'가 북상중이란다.

게다가 앞으로도 몇 개의 가을 태풍이 더 있다고 하니 근심이 커진다.

차라리 멋모르고 당한(?) ‘곤파스’가 나은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혼란의 와중에 문득 인생이 있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태풍과 닮아있는 우리 삶의 과정이 보였다.

해마다 치르게 되는 연례행사인데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그 때마다 피해를 반복하는 현상이 서로 닮아 있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미욱함으로 피해 규모를 키우게 되는 것도 그렇고 일희일비하는 단순함도 그렇다.

인생에 행복이나 불행이 정확하게 예약돼 있는 게 아닌데도 좋은 일엔 그 기쁨이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쁜 일 앞에선 그 아픔이 영원할 것처럼 일희일비한다. 순간의 감정에 빠져 자신의 인생을 또 다른 형태로 꾸밀 새로운 감정이 예비돼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해 민망함을 자처한다.



근본적으로 인생에서의 행복과 불행은 공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기쁨과 슬픔은 취사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현실을 수긍해야 한다. 다만 그 폐해를 예상하고 그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대비하는 삶의 지혜가 필요할 뿐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근본적으로 인생의 노정에서 불행구간 전체를 들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대신 현명한 대처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지혜로운 처신이다.

문제는 희망의 존재여부다.

우리 삶에서 희망의 영향력은 예방주사 같은 효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생각보다 막강하고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지금 이 순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인생을 흔들지만 잠시만 인내하면 곧 밝은 햇살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은 천지차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에 대해 준비하고 대비하는 것은 일종의 희망 세우기인 셈이다.



태풍이 지난 자리에서 그것이 무서운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인생에서도 같은 현실을 보게된다.

강력한 바람과 폭우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온갖 텁텁함을 말끔히 정화시키는 현상이 그것이다. 코 끝을 간질이는 청량하게 정화된 공기가 상쾌하다.

매번 태풍은 찾아 올 것이다. 그러나 폭풍 뒤 개인 날이 준비돼 있음을 알고 있기에 태풍을 더 이상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눈부신 태양 빛이 지난 밤 태풍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단단함으로 거듭나고 있는 모습이 경이롭다. 한번 무너진 둑이 새롭고 튼실한 제방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예전 어머니들이 출산을 통해 아픈 몸을 치유하던 삶의 지혜와 비슷하다.

태풍을 통해서 자연이 정화되듯 우리 인생에서도 고통이나 슬픔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활력의 근원을 창출해내는 삶의 비밀이 새삼스럽다.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바벨탑으로 신에 맞서다 초토화 된 경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과신하는 어리석음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모습에서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길을 가다 예기치 않은 태풍 앞에서 생존을 위한 건곤일척의 몸부림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맞서 싸우는 건 결코 지혜로운 처신이 될 수 없다. 성난 바람 앞에 우산을 들이대면 우산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때때로 우산주인까지도 바람에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려워 하지는 말자. 대신 엎드려 피해가는 상책을 쓰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상책이라고 손자병법도 말하지 않았던가?



지난 밤 광풍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새로이 맞는 새벽하늘이 평화롭다.

싸고도는 달콤한 공기가 언제 그런 격랑이 있었는가 싶다.

(2010.9.4 )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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