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4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진정한 자유

진정한 자유

우연히 조영남, 마광수 두 사람이 함께 한 인터뷰 영상을 봤다.
남의 시선에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 자신만의 진짜 인생을 살아온 평범하지 않은 삶의 방식에 초점을 맞춘 인터뷰였다. 그 나이가 되도록 자유와 낭만을 향한 방랑기를 삶의 동력으로 삼고 있는 의지를 투영시키고자 한 제작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조영남씨의 화투장 그림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두 남자의 입담은 알려진 대로 거침이 없었다. 주저없이 진행되는 대화는 독특했고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부실한 메이컵 탓인지 윤기를 잃은 푸석푸석한 화면발은 그들을 실제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자유인이라고 부르짖는 그들의 외침은 몹시도 공허했다. 50년 이내 결혼제도 자체가 없어질 거라는 등의 주장도 상당히 진보적이긴 했지만 그동안의 ‘파격성’이 반복되는 느낌일 뿐이어서 더 이상 신선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나보다 앞서 사는)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인생이 저런 톤으로 늙어가고 있구나’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그들을 통해 나이든 이들의 재기발랄(?)한 언변은 더 이상 생생한 자극이 될 수 없다는, 인생의 진지한 비밀하나를 발견한 느낌이다. 그리고 어떤 형식이든 종말을 향하고 있는 삶의 한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듯하다.
그 사실을 수긍하도록 강요받는 것 같은 강박감에 당혹스럽고 우울해진다. 특별히 자유인이라고 주장하는 나 역시 같은 삶의 궤적을 갈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우울함의 배경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친구들의 부음이나 중병 소식이 우울함을 더해주고 있다.
최근에는 고등학교 동창 L을 폐암으로 잃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오늘은 내 살을 잘라 먹여도 안 아플 것 같은 친구 S의 소식이 전신의 힘을 빼놓는다. 당뇨기가 있어서 병원에 입원해서 검사를 해 봐야겠다는 S의 힘없는 목소리가 나의 가슴을 칼로 베는 듯 고통을 가한다.
이제는 죽음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 됐음을 실질적인 환경으로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 예정돼 있고 그 어떤 경로를 거치든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그 무게는 늘 만만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사는 일 못지않게 제대로 죽는 일에 대한 고민을 늦출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철저한 자기점검은 삶의 이정을 견인해주는 안정된 조력의 제공처라는 측면에서 더더욱 동반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카터는 평생에 걸쳐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나는 원대한 꿈과 비전, 그리고 열정이 있는데 그것들을 결과물로 만들어내기 위해 과연 얼마만큼 최선을 다해왔는지, 그리고 후회없다고 대답할 수 있는지를 자문한다.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서 살았느냐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통해 그리고 그 답변을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초 단위로 따진다면 좀 더 열심히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인생 전체를 하나로 놓고 보면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에 대한 중압감은 갈수록 크게 느끼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 되기를 기도로 간구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조차 괴로워할 만큼 자기 성찰에 철저했다니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만 하다.
그런 윤동주의 삶이야말로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시대적 고민을 풀수 있는 최상의 답변이 아닐까 생각한다.
조영남이건 마광수건 철학자건 시인이건 정치인이건 그 누가 됐건 ‘최선을 다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시간들이 스스로의 영혼은 물론 사회적 역량을 튼실하게 세울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가치있는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삶의 족쇄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책도 거기 들어있다.

(2010. 9. 5)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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