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7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생사여탈권?

생사여탈권?



권력의 무게중심이 미래권력으로 옮겨가고 있는 정황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살생부다.
그 중 붓끝 하나로 정적을 제거하고 계유정란의 종결자로 등극한 한명회의 것은 살생부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실제 사극 흥행의 감초 역할을 비롯 유명세를 타는 역사적 소재이기도 하다.
수양의 왕권 찬탈을 돕기 위한 한명회의 음모로 수많은 충신들이 영문도 모르고 비명횡사했다.
부지불식간의 일이었다. 그들의 아픈 운명에서 냉혹의 극치를 이루는 살생부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 같다.

그 살생부가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서 여의도 정가를 흔들며 많은 이들을 떨게 하고 있다.
드디어 때가 돌아왔구나 싶기도 하다. 이번에는 여당 의원 38을 낙천 대상으로 지목한 명단이다.
선거 때면 여야 가리지 않고 출몰하는 단골메뉴가 된 지 오래지만 그 때마다 소요가 큰 걸 보면 권력에 초연해지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름을 달리한다면 살생부(?)의 존재에도 나름의 의미가 없지 않다.
한명회처럼 처음 한 두 사람의 기획으로 정국운영의 그림이 나오면 팀플레이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차원에서의 순기능이 있다는 생각이다. 선 스케쥴이나 당의 구조로 봐서 철학과 가치관의 정리가 불가피한 현실은 여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언제나 그런 식으로 대한민국 정치 지형이 짜여져 왔다는 건 불문가지다. 그것이 살생부가 됐건 정국운영의 기초 틀이 됐건 진정성이 전제돼야 한다는 건 물론이다.
권력 이동시마다 살생부 존재가 부각되고 또 그 앞에서 작아지는 사람이 많은 건 자신의 생사여탈이 거기에 달려있다는 걱정 때문일 것이다. 그런 걱정은 공정한 공천 시스템이 담보된다면 깨끗이 사라질 기우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해법은 국민에게 공천권을 되돌려주면 된다.

현재까지 드러난 각 당의 공천 관련 움직임을 보면 국민경선의 범주를 넓히는 등 쇄신과 개혁을 위한 노력의 기미가 엿보인다. 지금까지 국민 앞에서 다짐한 각 정당의 각오로만 본다면 최소한의 기본 양식만 있으면 누구든지 공천 작업에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기기도 한다. 공천심사위원은 물론 공천심사위원장으로 활동해도 공정하고 선명한 경선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은 이면의 정치현실은 ‘낭만은 금물’이라는 경고사인을 주고 있다.
외부인사와 당내 인사 비율을 민감하게 따지는 공천심사위원 인선작업 과정만 해도 그렇다. 공천심사위원장 인선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공전하는 것만으로도 녹록치 않은 기싸움이 느껴진다.
어떤 형태로든 살생부가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다. 다만 살생부를 기획하는 주체가 선한 철인일 것인가, 악한 독재자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여파를 주시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여의도에 나갔다가 살생부 문건을 봤다.
수도권 의원들이 명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터라 아는 이름들이 많았다.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자면 70% 정도는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내용이라는 판단이다. 특히 본선에서 실패할 확률까지 감안한다면 신뢰도가 훨씬 높아진다. 살생부 범주가 공천에 국한되지 않고 당선을 선거의 완성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더욱 그렇다는 결론이다.
누군가의 공작이다, 친박이 친이 진영을, 친이가 친박 진영을 음해하려는 의도다, 오래 전 작성됐다, 누군가 상상력으로 장난했다 등등 공천 살생부를 둘러싼 갖가지 설이 난무하지만 결국은 추론에 불과하다. 분명한 것은 이번 공천 살생부 역시 선거 때면 늘 이런 저런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부질없이 소멸됐던 음모의 일환이라는 사실이다. 일희일비 하는 자체가 부질없다는 생각이다. 그야말로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들어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는 불확실한 실체에 매달려 체통을 잃고 일희일비하는 선량들의 몰골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아직도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공천권을 내려놓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탐욕에 갇혀 있는 정치권이 문제다.
오랜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멸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어지럽다.

공천의 진정한 주인은 국민이다.
국민이 만든 살생부가 정치권의 생사여탈을 좌우하는 게 진정한 정치다.
좋건 싫건 바람직하건 바람직하지 못하건 국민의 본뜻을 충실하게 옮겨지는 진정한 대의정치 현장에서 미력하나마 내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꿈꾸며 삭풍이 몰아치는 여의도를 떠나왔다.

(2012. 1.27)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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