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9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떠날 때를 알아야

떠날 때를 알아야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렇지 않으면 비루함만 남게 된다는 걸 미처 몰랐는데 이번에 알게 됐다.
돈봉투 사건을 처리하는 박희태 국회의장의 미숙한 처신을 통해서다.
국민적 관심으로 새벽부터 북새통을 떨던 박희태 의장의 공항 회견은 ‘역시나’로 끝났다.
‘기억이 희미해서 (돈 봉투 사건) 잘 모르겠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4월 총선 불출마, 수사결과에 책임지겠다’가 전부인 의장의 신상발언에 정치권 전체가 부글거리고 있다.
본회의 사회권을 부의장에게 넘기고 사퇴압력에 시달리는 입법부 수장의 모습이 현실정치의 실체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한없이 씁쓸했다.

국회의원이 되어 첫 등원하던 날 ‘귀는 열 되 입은 닫으라, 지역구 활동은 열심히 하되 중앙에서의 움직임은 신중에 신중을 더하라, 많이 보고 기억에 담되 잘못된 정치를 닮지는 말라’며 정치선배로서 당부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자신의 선거 경험담을 털어놓던 선배의원(당의 최고 책임을 맡기도 했던 다선의원)의 얼굴도 생각난다.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첫 선거에선 30억이 남았고 두 번째 선거에선 10억 정도, 그 다음엔 본전이었다가 정치환경이 맑아지고 부터는 더 이상 남고 부족하기를 따지지 않게 됐다는 나름의 ‘산 증언’을 들려주었다.
15대 총선의 개인적 경험에 비춰 봐도 선거자금 운용이 무척이나 여유로웠다는 기억이다. 선배의원들이 이제 막 국회에 입성한 초선의원들에게 용돈하라며 일, 이백만원 씩 주머니에 넣어주는 풍경이 일상처럼 펼쳐지던 시절의 이야기다.
모르긴 몰라도 6선 의원의 관록을 자랑하는 박의장에게는 결코 생경하지 않은 경험일 것이다. 고액의 후원금을 거두어들이거나 선배의원들이 후배들에게 용돈을 챙겨주는 일들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정도 위치에 있다 보면 워낙 챙기고 수발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어서 실제로 본인은 모를 수도 있겠다 싶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선거를 치르다 보면 ‘돈봉투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색한 변명으로 일관한 박의장의 기자회견은 당혹스러웠다.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자충수로 득보다 실이 컸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모르쇠 전략이 그 자신에게는 한 숨 돌릴 기회가 됐는지 모르지만 한나라당 깃발로 선거에 나서려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가혹한 형벌이 되고 있는 지 현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다.
“솔직히 오래 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잘못했습니다.
제 주변에 일고 있는 이 모든 구설이 다 못난 저로부터 비롯된 불행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알고 지었건 모르고 지었건 또 관행으로 빚어졌건 그 모든 허물의 근원인 저에게 책임을 물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선배정치인들이 후배들을 격려하는 의미의 후원금이 여야 가릴 것 없이 널리 알려진 정치권의 비밀이었다 해도 시대가 바뀌어서 이런 일들이 문제시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저의 잘못이 큽니다.
불미스러운 중심에 서 있는 처지가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저에 대한 단죄가 잘못된 구시대 정치 관행을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시금석이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감히 가슴에 품습니다.
이렇게 불명예스러운 상황에서 정치인생을 마감하게 되어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부디 책임져야 할 모든 죄를 물어 저의 부덕을 나무라시고 처벌해주시기 바랍니다.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
이렇게 말하고 흔쾌히 의장직을 내놓았다면 그나마 실책을 만회할 수 있는 상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역대 최악의 일그러진 입법부 수장으로 기록되는 불명예는 피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아쉽다.

그나저나 사사건건 약방의 감초처럼 나서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훈수를 두던 이른 바 쇄신파 의원들이 이번 돈봉투 사건에 지나칠 정도로 조용해서 이상하다. 유난히 돈 봉투 사건에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들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란스럽다.

(2012.1.19)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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