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8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가을 남자

가을 남자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한결 섬세해진 마음결이 조심스러운 계절이다.
미세한 통증 하나에 가슴 전체가 순식간에 텅 빈 동굴로 초토화되거나 바스락 구르는 낙엽소리조차 예사로이 넘겨지지 않는 고감도 감성이 때때로 천형이 되어 신상을 들볶고 있다.
흐르는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가을의 내 모습이다.
그렇게 통과의례처럼 가을을 앓고 있는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는 밤.
아직은 건재함에 안심하면서도 쫓기는 듯한 이 불안감은 뭔지 모르겠다.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알리는 신의 엄중한 경고일까?
감정과 감정 사이를 흐르는 심연과 날카로운 바위들에 놀라고 다치다 좌절하고 포기하는 나약한 모습은 도처에 깔린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 앞에 적나라한 나상으로 서 있노라면 세상의 명예도 권력도 그 무엇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복이 절로 튀어나온다.
그러면서도 끝내 그것을 내려놓지 못해 불면을 키우고 있는 이 어리석음이 인간의 한계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이중적이지만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변명으로 위안을 삼아보지만 엄청난 압박을 피할 수 있는 방패막이가 되기엔 한참은 역부족인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잠 못 이루며 뒤척이다 고개 들어 가을 밤하늘을 쳐다보니 날 선 빛으로 박혀있는 달과 별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나 선명한 지 파르르한 떨림까지 전해질 기세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유난히 먼 거리에 놓여있는 느낌이다. 선명하다고 해서 거리가 늘어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의 거리가 달라졌을 뿐이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 실제로 깨끗해서 선명한 대상에 거리감을 갖거나 경원시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판단의 오류가 선호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깨끗한 결론이나 대상을 도외시 하려는 건 배제돼야 할 속물근성이다.
새삼스런 깨달음이 힘이 되고 있으니 다행이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이고 보면 ‘가을을 탄다’는 자체를 사치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불황의 늪에 빠진 경제상황 때문에 약간의 냉기에도 쉽사리 움츠러들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둔감하게 지나치기보다는 더 적극적인 모습으로 가을과의 조우를 권면하고 싶다.평생을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다간 법정 스님이 생전에 쓰신 글 중에 가을을 참 이상한 계절이라고 표현한 대목이 있다. 그러면서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가을 나무에게서 착해지고 싶게 만드는 충일의 순간을 포착한 적이 있음을 고백했다.
법정스님하여금 비어있음과 충만을 동일시하도록 작용한 권력이 있다면 오로지 가을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계절의 변화와 가을의 서풍, 떨어지는 나뭇잎 등은 우리 자신을 한번쯤 돌아볼 수 있게끔 배려한 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굳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평생 화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 구하기의 일환이라는 쪽에 무게를 싣게 된다. 어쩌면 인간 삶의 근원을 묻는 질문에 각 개인 저마다의 질문이 맞닿아 양산되는 수 만개의 서로 다른 대답들이야말로 가을앓이의 본질이라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올 가을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묻고 그에 대한 답을 내놓는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수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삶들과 견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녕 감사해야 할 일이다.

가을남자 앞으로!!
세상이 아무리 슬프게 해도 그것에 스스로를 함몰시키는 불행은 자초해서는 안된다.
이 가을이 위축된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 커다란 위안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2011. 10.18)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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