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12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아버지

아버지


내게 있어 아버지는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산 같은 존재였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특히 더 했다.
부자지간의 다정다감한 대화는커녕 그저 어렵고 두려웠던 기억이 더 크게 각인돼 있다.
기골이 장대한 외모에서 풍기는 위화감 탓도 있었지만 감정표현이 거의 없던 아버지 특유의 무뚝뚝함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아마도 이 땅의 아들들 대부분이 한번쯤 느끼게 되는 좌절감이라는 생각이다.
조금만 더 하면 아버지를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아무리 죽어라 달려도 번번이 저만치 앞에서 뚜벅뚜벅 걷고 있는 아버지의 완강한 뒷모습을 통해 전해지는 패배감에 시달렸던 기억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장성한 이후 아버지로부터 몇 차례 인생고백을 들으면서 상당 부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는 시대적 상황의 희생양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월남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아버지 역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아버지의 기억엔 한없이 근엄하시기만 했던 어린 시절 할아버지(아버지의 아버지)가 전부일텐데 자식 사랑을 살갑게 표현하는 방법을 알 리 만무다. (부전자전인지 나 역시도 아이들에게 그다지 자상한 아버지의 본을 보여주지 못했다)

- 故김학수 화백님,  前교육인적자원부장관 안병영님, 
前연세대총장 故박대선 선생님과 함께-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다.
내 삶의 고비마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듬직하게 뒷배가 되어 주셨던 이도 아버지셨다.
특히 당신이 솔선수범하시면서 훈육하셨던 몇 가지 가르침은 지금도 내 인생에 있어 확실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창씨개명을 거부한 탓에 정식학교에 등록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자신의 품 속 깊숙이 넣어둔 아픔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새겨 주셨다.
약간의 한학 교육을 마친 아버지는 교회에서 만든 평화 중학교를 (정식인가된 학교는 아니었지만 열성적인 선생님들 덕분에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분들 중 한분은 연세대 총장을 지내신 박대선 선생님이었고, 또 다른 맨토이셨던 김학수 선생님과는 작고하신 작년까지 오래도록 교분을 이어가셨다.) 다녔는데 그나마 당시 일본 순사와의 갈등으로 도피 차 남하하느라 학업을 접어야 했다. 남한에서 경희대학교 법학과에 진학, 학업의 기회를 잡았지만 이마저도 전쟁 통에 1년 다니고 졸업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학업에 대한 열망을 채우기 위한 노력을 잊지 않으셨다.
얘기들은 하버드에서 공부 때문에 한창 방황하고 있을 때 미국까지 찾아오신 아버지께 들었다. 그 때 아버지는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당신이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며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덧붙이셨는데 내게 있어 그 어떤 교육보다 효과적인 교육이 되었다.


- 제11대 국회의원시절 워싱턴을 방문하신 아버지와 함께 -

아버지의 산교육이 빛을 발했던 또 다른 기억은 국회의원에 낙선할 때다.
아버지께서는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공천 잡음 속에서 출마여부를 고민하고 있는 나를 부르시더니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던 당신의 경험(아버지는 11,12대 국회의원을 지내셨다)을 들려주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 때 나는 출마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정치 환경이 지금보다 훨씬 위험했기 때문이다. 가장으로서 내가 잘못됐을 때 나나 내 가정을 지킬 사람이 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생각을 굴뚝 같았지만 출마를 포기했다. 그러나 너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출마해라. 왜냐하면 아버지인 내가 있으니까. 아버지는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국회의원이 됐는데 국회의원 아버지를 둔 너는 아버지보다 더 큰 꿈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 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출마를 독려하시더니 모든 준비는 물론 새벽부터 뛰어다니며 뒷바라지를 해 주셨다. 물론 새벽까지 뛰어주셨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낙선이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네가 질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 출마가 앞으로 네가 정치하는 데 있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라며 담담한 어조로 위로해 주셨는데 그 위로가 지금까지 험난한 정치일정을 버티게 해 주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아버지의 힘은 수년 전 음해세력(당시 여당 수뇌부가 움직인 정황 등으로 정치적 탄압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몇 가지 사건들)에 의해 학교 총장이었던 아버지와 이사장이었던 내가 동시에 구설수에 오르고 내가 구속된다는 기사가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때에도 어김없이 발휘됐다.
어느 날 문득 내 방을 찾으신 아버지는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 할 때도 떳떳하게 살아온 내가 치욕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비장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학교에 관한 어떤 허물이라도 너는 명목상 이사장 일 뿐이지 책임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 네가 여기서 혹여 아버지와 학교를 위한답시고 경솔하게 행동하거나 발언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불효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면서 “너는 나를 위해 죽을 수 없지만 나는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다. 아마 지구상에 유일하게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일 것이다”고 덧붙이시는 아버지를 붙들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 유고 중이시다.
헌정회에서 중국여행을 가셨다가 고령인데다 뜨거운 여름날씨 때문에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놀라서 연락을 드렸더니 아버지는 “나는 아무 일 없으니 학교 방문하는 교육부 손님들 잘 영접하고 학교나 잘 지켜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그런데 현지를 통해 알아본 상황은 달랐다.
은근히 아들을 찾으시는 눈치라는 전언이고 보니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조급함이 일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잠시 후,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현지로 출발할 예정이다.
아버지, 언제든지 손을 내미세요. 예전에 아버지가 제게 해주신 것보다는 듬직함이 덜할지 몰라도 아버지 그래도 최선을 다할게요.
아버지 오래 사세요. 불효자식이지만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세상은 생각하기도 싫다.
벌써부터 하늘이 노래진다.
지금 이 순간,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하나님, 제발 우리 아버지를 지켜주세요.

(2011.6.12)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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