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6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불세출의 영웅, 시저를 생각한다.    
시오노 나나미가 자신의 저서 ‘로마 이야기’에 적지 않은 분량으로 소개할 만큼 명성을 날렸지만 그의 말로는 비참했다. 권력다툼과 음해와 배신 속에서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 비운의 삶에 종지부를 찍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브루투스 너 마저”
시저는 자식처럼 정을 주던 브루투스의 칼끝이 자신의 폐부를 뚫는 순간, 이 같은 마지막 단발마로 절망과 회한을 표출시켰다. 그리고 브루투스는 “시저를 사랑했지만 로마를 더 사랑한다”는 항변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설득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렇게 역사의 한 점에서 서로를 엇가른  운명의 실타래는 여전히 ‘길 찾기'를 중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를 시작한 이후 지금 이 순간까지,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명제이기도 하다.  

정치 초년병 시절 만난 노 정객의 정치인생도 나를 자극하는 명제 중 하나다.
혈혈단신으로 6선의 고지까지 오른 그는  YS, DJ 못지않다고 스스로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자부심을  감추지 않는 분이었다.  만날 때마다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보다 당의 이익, 당의 이익보다 국가이익, 국가이익보다는 인류공영의 보편적 진리 순으로 행동강령을 삼고 있다고 주장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항상 넉넉하고 유쾌한 인품과 실력으로 후배들을 이끌었지만 정작 자신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조금은 초라한 모습으로 굴절된 채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실패 이유를 복기해 보자면 결국 ‘당, 국가, 인류공영’을 앞세운 그럴듯한 구호가 정치적 합리화를 위한 도구로만 기능했기에 문제가 됐다는 생각이다. 지도자로 신뢰를 얻고 자리매김이 가능하도록 추동하기엔 충분하지 않은 개인적 내공도 원인이겠지만.

지도자의 덕목에 있어 개인적인 신념이나 철학 못지않게 흔히 말하는 저자거리 의리도 중요하다는 교훈을 그 때 얻었다. 당이나 국가 등 인류공영을 위한 지도자의 헌신은 너무도 당연한 명제지만 가치창출 방식 역시 이에 못지않음을  감안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도자라면 반드시 함께하는 이들과의 협치를 뜨겁게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에 나름의 주석을 달게 되는 이유라면 이유다.  우정의 가치를 살피는 관리능력은 공적 영역에 웅대한 이상을 확충하는 작업 못지않게 중요함을  강조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당의 책임을 맡다 보니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이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그로 인한  긍정적 요소가 없지 않지만  지금껏 생각해오던 개념이 혼미해지고 갈피를 못 잡게 되는  부작용도 겪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브루투스의 선택을   다시 생각해 보지만 아무래도 최선은 아니었다는  결론이다.    
 실제로 역사는 냉담한 시선으로 그의 선택에  돌팔매를 날렸다. 사리사욕에 눈먼 탐욕의 배신자로 낙인찍고 몰아내며 그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아무리 로마에 대한 사랑을 강변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시저와의 의리를 지키며 각성을 촉구하는 정도의 선택이었다면   달랐을까? 
모르긴 몰라도 로마의 미래는 물론 브루투스에 대한  평판은  분명 다른 그림으로 채워졌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어떤 위치에 있건 어떤 종류의 리더십을 발휘하건 중심을 잃지 않으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일본 전국시대 당시  세 영웅의 특성을 비교한 ‘울지않는 새’ 스토리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본다.    
'울지 않는 새'를 쥐어주었을 때, 다혈질의 '오다'는 울지않는 새는 필요 없다며 즉석에서 죽일 거라는 예상이고 도요토미의 경우 어떻게든 새가 울게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뜻을 이룰 것이며 느긋한 도쿠가와만이 새가 스스로 목젖을 울리기를 기다렸을 거라고 유추한 내용이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보니  당연히 도쿠가와 이에야스 쪽이었을 것 같다. 인내하며 기다릴줄 아는 그의 모습이 갈등의 실타래를 풀고 상대에게 새로운 기회와 명분을 제공하는 덧셈의 정치를 지향하고픈 나의 정치철학과  상당부분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강한 자력으로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이 느낌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나친 이상주의적 발상이라는  지적이 있어도  결코 궤를 달리하고 싶지 않다.    

또 다른 위치,  또 다른 현실정치와 맞닥뜨리게 됐을 때 어쩌면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마키아벨리로  변신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기다림의 미덕을 세상의 최고 가치로 삼는 ‘기린초’가 되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또 그것이 지금까지의 총체적 입장을  감안해서 내린  결단이기에    유의미하다.   
 적당히 기분좋은 바람이 볼을 간지럽히는 이 새벽,  이런 결론으로 입장정리를 마치고 나니   조금은 뿌듯한 기분이다.   
뭐지?          

(2013. 6. 26)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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