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3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한 밤의 데이트


한 밤의 데이트

  
주일인데도 살인적으로 이어지는 스케줄에 파묻혀 하루를 보냈다.
겹쳐진 일정 때문에 고민하기도 했다. 하버드 교우회 초청으로 내한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들 교수와의 만찬과 고교동창들이 마련한 당선축하 모임이 같은 시간대였던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마이클 샌들을 포기하고 동창들을 만나러 나섰다. (옛날 같으면 두 모임을 다 욕심냈을 텐데 요즘 들어 어느 한 쪽에 더 충실하기로 인생관을 바꾼 영향이 미친 결론이었다)
역시나 추억의 힘은 셌다.
한 방을 가득 채운 동창들을 만나 웃고 떠들자니 세상 어디에 있을 때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0여 년 전 시간대로 훌쩍 옮겨 간 우리들은 시절 이야기들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려 울고 웃었다. 기억의 공유만으로 이토록 유쾌해질 수 있는 마법은 동창 모임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지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친구들과의 인연 하나하나가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2, 3차로 정이 이어지는 중간에 내일 일정을 이유로 귀가한 나를 집 앞 뜰로 다시 불러낸 건 덩그러니 둥근달을 걸고 있는 앞산이었다. 얼마 전에는 부처님의 형상이었던 앞산에 조금 전 만난 친구들 얼굴이 오버랩 되면서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국진이가 되었다가 인식이, 춘경이 그리고 만영이 모습으로 바뀌는 앞산을 바라보며 친구들과의 추억을 다시금 곱씹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 12월에는 면류관을 쓴 예수의 모습으로 보였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다 앞산이 달리 보인 건 산의 변모라기보다 내 안의 생각이 변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자연이나 사물이 본래의 모습 대신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이 투영된 형상으로 비춰지기 마련이라는 것, 결국 자기가 보고 싶은 모습으로 보게 돼 있다는 것.
우연히 삶의 비밀 하나를 건진 느낌이 들었다.

타인에게서 내 모습을 찾아내 반추해보는 내 오래된 습벽에서도 비슷한 맥락이 읽혀진다.
다른 사람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고 스스로의 취약점을 보완하는데 이 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는 생각이다. 때로는 스스로를 경계하게 하는 약이 되기도 한다. 나만의 노하우로 내 삶을 긍정적 비전으로 채워가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은근히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오늘도 앞자리에 앉아 신이 나서 사시 합격한 아들의 결혼 소식을 전하는 완성이의 많은 점이 나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동기 회장으로 수고하고 있는 성수는 관심 분야에 무서운 집중력을 보이는 친구인데 그에게 내 모습이 있었다. 천진난만하고 구김살 없는 승철이나 가끔 지나친 욕심으로 눈총을 받는 XX(왜 익명일까요??)에게서도 내가 보였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앞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새벽 공기를 가르는 음성이 내 귓가를 울렸다.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긴 시간, 결코 평범치 않은 삶이었다. 돌아보면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 소재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삶의 매 순간이 극적인 희비로 채워지는 굴곡의 연속이었다. 처절한 좌절이 있었지만 끈질기게 인내하며 운명에 굽히지 않은 네가 자랑스럽다. 지금껏 지난 삶을 잘 지켜낸 것처럼 앞으로도 더 잘 해내리라 믿는다
절대자의 무한 격려가 주는 에너지가 생생하게 감지됐다. 언제나 그런 식으로 내 삶의 과정을 정리해주고 지혜와 여유를 허락해 주시는 절대자에게 감사했고 스스로도 대견하다는 생각을 했다.
 
힘을 얻고 집을 향하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그 여운이 잠자리까지 따라붙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부풀리는 듯 했다.
기분 좋은 한 밤의 데이트였다.



(2012. 5. 30)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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