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7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미완이 혁명을 부른다

미완이 혁명을 부른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 축하로 분주하던 상해 홍커우 공원에 폭탄이 떨어졌다. 그리고 현장은 수많은 사상자로 금새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80년 전의 일이다.
윤봉길 의사의 역사적 거사가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가와바다 일본인 거류민 단장 등을 즉사시킨 것이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의사는 30년의 짧은 생을 미처 채우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윤의사의 행적을 새삼 상기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니다. 윤의사의 ‘의거’를 환기시키려는 의도도 아니다. 그 보다는 무엇이 농촌계몽에 열정을 쏟던 한 청년을 혁명가의 길로 나서게 했을까. 그 배경이 궁금해졌다는 것이 더 정확한 사유일 듯싶다. 그 자신 법정 진술을 통해 주장했듯 솔직히 일본 수뇌부 몇 명 제거한다고 식민지배가 끝나는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독립이 쟁취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희생이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고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우리의 현실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을 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윤의사가 혁명가의 삶을 선택한 배경이 100% 설명됐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건 미숙한 정치사회적 환경이 젊은이를 혁명가로 내모는 결정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윤의사 역시 비슷한 절차를 통해 혁명에 자신의 운명을 건 흔적이 분명 있다.

선거를 치르는 동안 젊은이들을 접하면서 비슷한 걱정을 했다.
그 때 느낀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더 나아가 이 세상에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다는 우리 젊은이들의 좌절감이 생각보다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주역이기보다는 주변인으로 살 수 밖에 없다는 체념과 분노가 그들의 생산적 에너지를 비틀어 악순환의 고리를 자처하는 위기 상황이었다. 그렇게 잘못 형성된 에너지가 젊은이들을 어줍지 않은 혁명가로 선동하고 있었다.
그것이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얼마든지 우리 사회를 긍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이끌어갈 수 있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단편적이고 순간적인 스포트라이트나 자기만족에 그치는 것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젊은이들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스토리의 중심이 윤의사의 ‘거사’에서 너무 멀어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흐트러진 이유조차 내 풍부한 상상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걱정이 많다.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라가 됐건 정권이 됐건 사회가 됐건 젊은이들을 혁명가로 내모는 출구전략은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모호한 기운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해서 힘을 쓸 수 있는 자체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혁명은 나약하고 문약한 기회주의나 패배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이 땅의 젊은이들을 혁명의 이름으로 산화하도록 부추기고 설득한 배경논리도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떤 사회건 젊은이의 균형잡힌 가치관은 집단의 건재함을 담보할 수 있는 주요 바로미터다. 그런 점에서 젊은이들을 지독한 냉소주의나 방관주의로 내모는 형태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에게 건전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의도적인 사회적 합의와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극단은 미완과 상통하고 미완은 혁명을 부른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이 사회를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긍정의 동력으로 밀어주고 보완해주는 것이 기성세대 본연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이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는 정도의 따끔한 경고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2. 4. 26)
....홍문종 생각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