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1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전주에서

전주에서


미국에서 지낼 때, 미국 동네는 특징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유럽인들을 많이 봤다. 가는 곳마다 맥도널드와 코카콜라 그리고 켄터키프라이드치킨 간판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불평이었다. 그러면서 동네마다 독특한 문화와 역사가 있는 유럽을 자랑했다. 미국보다 훨씬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때는 건성으로 지나쳤는데 전국 각지를 방문하고 있는 요즈음, 당시 유럽인들을 우쭐하게 했던 게 뭔지 알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문화국민이라는 우월감이었다.
오늘 만 해도 여러 도시를 거쳤다. 그러나 청주를 거쳐 전주에 여장을 풀 때까지 특별한 향취로 떠올려지는 곳이 없다. 최근 강행군으로 이어진 도시 순례를 생각하면 결코 적지 않은 도시를 접한 셈인데 말이다. 그저 규모나 빌딩의 높낮이 차이로만 구별될 뿐, 새로운 도시를 만나는 감흥은커녕 시멘트와 아스팔트에 짓눌린 무차별한 욕망이 주는 불쾌감만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숙소조차도 어제 머문 곳을 다시 찾았나 싶을 만큼 도시 고유의 멋과 흥이 아쉬운 여정의 연속이었다.
척박한 우리문화의 적나라한 속살을 들여다 본 것 같아 씁쓸했다.

툭하면 학교 문이 닫히던 대학시절, 서울에서 강릉의 7번 국도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여행길은 억눌린 청춘의 열기를 식혀주는 해우소였다. 버스 두 대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한참을 비껴서있어야 할 만큼 비좁고 덜컹거리던 비포장 국도를 달리다 보면 먼지투성이가 된 몰골 보다는 얼얼한 엉덩이가 더 신경 쓰이게 하던 기억이 새롭다.
아스라한 추억 속에서 그 때 마주치던 마을들이 되살아나는데 지금보다 훨씬 멋스러웠다는 생각이다. 비록 남루하고 못생겼지만 나름대로 독특한 고유의 정취를 담고 있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마을들이 독특한 이름을 달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자연과 더불어 어울리는 삶을 그려내는 모습으로 내 추억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다. 특히 부산 해운대 인근의 달맞이고개도 그 중 한 장소다. 오랜 시간 달려와 마주했던 달맞이고개의 황홀했던 정취는 지금도 설레는 감흥을 준다.

일정이 일찍 끝나 숙소에 들어왔는데 요즘 들어 잠자리에 등을 붙이면 순간적으로 곯아떨어지는 평소와 다르게 잠이 안 왔다. 덕분에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 7번 국도도 떠올리고 달맞이 고개도 떠올리게 됐다.
물론 젊은 날의 내 모습이 그립고 아쉬워 그 때의 풍광이 더 미화되어 떠올려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도시들은 무자비한 시멘트의 물량공세에 치여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숲에 갇혀버렸다. 그 모습이 갈수록 공허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감성이 메마른 내 마음 탓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화장발로 더 화려해지긴 했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멋스럽지 않고 더 이상 누군가의 추억에 새겨질 기회를 부여받지 못할 것 같다는 절박감이 더 큰 이유일거라고.

문득 인간은 원초적으로 외롭고 서글픈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몰개성한 도시의 불편함이 한 몫 거든 셈이긴 하지만 가끔씩 헤매는 주제이기도 하다.
아무튼 뒤척거리는 잠자리에서 건져 올린 생각들을 되새김하자면 다음과 같다.
스스로의 삶인데도 컨트롤 할 수 없는 게 많고 심지어 마음조차도 DNA의 운용지도를 따라야 하는 유한성이야말로 인간이 갖는 슬픔의 근원이 아닐까? 그런 전제에 묶인 운명 때문에 인간은 어떻든 이미 주어져버린 슬픔의 근원에서 해방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정녕 그러하기에 실루엣처럼 인생의 백그라운드를 장식하는 슬픔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건가.


(2012. 11. 20)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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