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1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파토스(pathos)

파토스(pathos)

슬픔은 인간생존의 근본이라고 할 만큼 인간 심리에서 가장 원초적 부분이다.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숨겨져야 하는 아이러니 때문인지 대부분의 인간이 비극적 서사에 이끌리는 풍경은 결코 낯설지 않다. 가슴 애려하면서도 은근히 슬픔을 즐기는 이중성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도 드물지 않다. 심지어 무한에너지 자원의 동기로 승화되기도 하니 슬픔의 특성을 일정한 영역으로 규정짓기도 애매한 점이 있다.

오랜만의 블로깅에서 슬픔을 언급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슬픔과는 약간 다른 파동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파토스’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다.
나의 낙천적 성향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어딘가에는 '파토스' 인자가 원죄처럼 떠돌고 있는 것 같다. 특정한 자극을 받으면 때와 장소 구분없이 내 정서의 심연을 마구 흔들어대는데 그럴 때마다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막내의 군 입대를 앞두고 의기투합해서 큰 아들을 만나러 온 어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우리 삼부자는 모처럼 남자들끼리 만의 시간이 제공하는 색다른 신명에 들떠 있었고 부자지간, 형제지간의 정을 확인하며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실제로 유난히 빛나 보이는 자식들은 내 어깨를 으쓱하게 했고 (탤런트 뺨치게 잘 생긴 큰 아들과 건장한 체구로 남성미 넘치는 막내아들을 양쪽에 두고 있는 그 뿌듯함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리) 두 아들 역시 최근 정치적 재기에 성공한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역력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모든 것이 충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두 아들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서면서부터 근원 모를 슬픔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은 조금 전 삼부자 회동 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아무래도 '부모가 된다는 건 천형인 것 같다'는 지인의 카톡이 반전의 배경이지 싶다. 카톡을 읽는 순간, ‘천형’이라는 단어에 눈을 떼지 못하게 되면서 내 안의 무엇인가가 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비애감이었다.

한 생명이 태어날 때의 희열은 어머니 산고와 탯줄을 자르는 고통이 함께 했을 때 완성될 수 있다. 또 수레바퀴의 운명처럼 더불어 공존하고 공명할 때만이 비로소 그 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있는 불가분의 결합체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신성한 인연이 천형으로 표현되다니 순간적으로 내 안의 파토스가 장치를 풀고 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생의 본원적 비애감이 물 밀 듯 내 안으로 밀려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싶은 정도의 자극이었다.
어떻게 보면 파토스의 작동은 내 안의 것을 지키려는 소심한 자구책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아닌가 아니라 어느 시인은 목이 길어 슬픈 사슴의 파토스를 원혀으로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거기에 비하면 고작 낯선 거리를 방황하는 퍼포먼스일 뿐인 나는 소극적인 몸짓으로나마 내안의 슬픔을 다스리고자 했던 건 아닐지.

말해주고 싶다.
오늘의 슬픔에 지나치게 오래 빠져있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오늘의 기쁨에 도취돼 밤새워 축가를 부르는 일 역시 경계해야 마땅하다고.
영원한 슬픔도 영원한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 인생의 비밀을 눈치채야 한다고.
기쁨과 슬픔은 일란성 쌍둥이로 우리 안에 동거하는 존재이며 그 중 슬픔은 필경 머잖아 위대한 기쁨으로 승화될 자원이라는 사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정에 오른 기쁨의 순간조차도 애끓는 슬픔의 방문을 받을 가능성이 늘 열려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도.
감당할 수 있는 슬픔과 탐욕스럽지 않은 기쁨으로 언제나 주어진 상황에 감사할 줄 아는, 균형잡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길 기도 제목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도.
(2012. 5.21)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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