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4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구두수선소 주인장

구두수선소 주인장


풍족하진 않지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자족할 줄 아는 모습만으로 주위를 행복하게 해 주는 이웃이 있다. 의정부 신곡 1동 발곡중학교 앞 사거리에 위치한 가판, 3평 남짓한 구두 수선소 주인장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나의 열혈 팬(?)이기도 하다. (맹렬하게 지지해 주시니 힘이 납니다^^=)

그의 일과는 아침 7시, 일터의 문이 열리면서 시작된다.
오래 전부터 칼같이 지켜온 출근 시간이다. 어기는 법이 없다.
그의 손끝에서 구두는 물론 망가진 우산이나 가방 등이 새롭게 소생하는 모습이 놀랍다. 도장도 파고 문패도 써주는데 예사롭지 않은 장인의 솜씨가 훈장처럼 빛나고 있다.
내게도 승리의 염원을 담아 도장을 하나 파 주었는데 한 눈에 들어오는 녹록치 않은 솜씨였다.
가족의 생계를 걸머지고 허덕이던 예전이면 몰라도 두 자식, 남부럽지 않게 잘 가르쳐 출가까지 시킨 지금은 조금 여유를 가지라는 주위의 채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좁은 박스 속에서의 고된 일과를 고집하고 있는 그다. 육십 중반에 이르도록 성실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자부하는 우직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예전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책임 때문에, 지금은 손자 손녀의 손에 부담없이 용돈이라도 쥐어줄 수 있는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 일을 놓지 못하겠다는 사정을 듣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저마다 소설책 몇 권 분량의 ‘사연’이라고 자신의 인생을 하소연하지만 신산하기로 따지자면 그 역시 간단치 않은 삶을 살았다. 2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고향인 목포를 떠나와 용산 천막촌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지만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 전체에 견주면 서곡에 불과했다. 설상가상 빚을 내어 천막에 2층을 조성해서 세를 주는 식으로 삶의 궁핍을 벗어나려던 부친의 ‘꿈’은 느닷없는 화마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44세의 짧은 삶을 마감케 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화재로 상계동 집단촌 9평 판자집을 얻어 이주하게 됐지만 화병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13살부터 17살에 이르는 4형제에게 ‘도둑질 하지 말고 인사 잘하고 착하게 살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졸지에 가장을 잃어버린 가족의 삶은 오롯이 그의 짐이 되고 말았으니 그 고생이 오죽했을까 싶다.
선친의 유언을 가슴에 담고 온갖 거친 일을 하며 세상을 살면서도 자신의 삶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다. 동생들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은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는데 유일한 학교 동창인 당시 친구들과 지금까지 평생 우정을 나누고 있는 근황을 말하면서 웃는 모습이 참으로 진솔해 보였다.

이상이 어느날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가 내게 털어놓은 고달픈 인생사의 전부다.
그런 식으로 내게 마음을 열더니 열렬한 지지자가 되셨다.
나 역시 자라면서 6.25 때 월남한 이후 실향민으로 고달프고 아프게 살아온 부친의 삶의 궤적을 수없이 들어왔기에 신산한 그의 과거가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제법 긴 시간을 먹먹한 가슴으로 경청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때는 손을 잡고 들어주는 도리 밖에 없었지만 마음 속으로 다짐한 건 있다.
'이런 분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해야겠구나.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정치를 해야겠구나'

(2012. 3. 15)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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