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4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선거 풍경
오늘도 총구 앞에 나서는 긴장감으로 하루 일과를 연다.
어김없이 무책임한 흑색선전과 입에 담기조차 꺼려지는 인신공격이 선거판을 휘젓고 다닐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거짓과 음해가 난무하는 선거전에 나선 만큼 감수해야 할 숙명이건만 여전히 적응이 어렵고 난감하기만 하다. 당할 때마다 아프고 쓰린 건 둘째 치고 이 난장에 함께 섞여야 한다는 사실이 한없이 부끄러울 뿐이다.
정책과 비전대신 비열하고 살벌한 공세가 목청을 키우는 현실이 주는 자괴감이 더 큰 상처가 되는 것 같다.
그 것 말고도 속상한 일이 많다.
어렵사리 눈길을 맞춰 내민 명함을 매몰차게 외면하거나 새누리당 명함은 안 받는다고 눈 앞에서 내동댕이치는 상황도 있다. 심지어 8년 만에 나왔는데 면전에서 아직도 출마하느냐는 면박으로 기운을 빼는 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감지되는 희망의 사인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심신이 강건한 후보로 뛰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으니 다행이다.
이른 새벽, 전철역에서 출근길 유권자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서 있노라면 한잔 커피로 꽁꽁 언 추위를 녹여주는 따뜻한 손길이 주는 배려가 고맙다. 길거리 유세 중 빗줄기라도 만날라치면 수줍게 우산을 내미는 호의를 만나는 반가움도 내 희망의 한 줄기다. 국밥 한 그릇이나 슬그머니 넣어주는 삶은 달걀 몇 알의 소박한 관심으로 천군만마의 위력을 보태주는 이웃의 말없는 응원도 막강한(?) 배후라 할 수 있다. 꺼칠한 손길로 내 손을 잡으며 “반드시 당선돼 지역을 위해 필요한 일꾼이 되어 달라”는 주문은 과묵하지만 강력한 명령이 되어 전열을 가다듬게 하는 힘이 있다. 구태여 요금을 안 받겠다고 손사래를 쳐서 실랑이를 했던 택시기사님의 호의도 무지 기운나게 하는 응원이 됐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생성하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막강하다.
따뜻한 정들이 있기에 세상은 확실히 살 만하다는 생각이다.
그 격려들을 앞세워 오늘도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선거현장으로 향한다.
앞으로 16일 남은 이 선거전에서 승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다지며 .
(2012. 3. 25)
...홍문종 생각
2012년 1월 16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곧 새벽이다
정치판을 지켜보노라면 대부분의 정치적 현상이 그다지 큰 이변 없이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지난 일요일, 한 달 여 동안의 대장정을 마치고 막을 내린 민주통합당 지도부 선출 결과도 그랬다.
남의 당 일이긴 하지만 우선 당장 총선에서 대척점에 서게 될 운명이기에 야당 사정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예상치를 내놓곤 했는데 역시나 다르지 않은 결과였다. 대표에는 한명숙 전 총리가, 최고위원에는 문성근씨를 비롯한 박영선, 박지원, 이인영, 김부겸 의원이 선출된 것이다.
정치를 화려하고 드라마틱하게 만들 문성근, 신선하고 세대교체 주역으로 등극한 젊은 피 박영선과 이인영, 구민주당 세력을 받치고 있는 박지원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이적한 김부겸 등 상당히 다양하고 짜임새 있는 라인업은 참으로 절묘하다. 일부에서 호남의 퇴조를 위기국면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지만 호남색을 탈피하면서 전국정당으로 갈 기회를 얻은 측면은 전략적으로 엄청난 성공이라 할 것이다.
특히 한명숙, 문성근 등 친노 세력의 선전이 갖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야세 확장에 상당한 탄력을 주면서 공신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중 한명숙 카드는 최근 무죄 확정 판결로 정치적 탄압을 이겨낸 상징성만으로도 야권을 결집시키는 데 있어 상당히 의미있게 작용하리란 생각이다.
그렇다고 민주통합당에 장밋빛 미래만 보장되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전대이후 최고위원 간의 첫 회의 테이블에서부터 감지되고 있는 서먹한 기류가 심상치 않다. 친노계와 민주계 사이의 갈등 조짐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게다가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 협상이 매끄럽지 않은 것도 자칫 민주당의 상승기류에 제동을 거는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야권연대로 총선승리와 정권교체를 이뤄내자는 공동목표를 설정해 온 두 야당 사이가 확실히 전과 같지 않다는 분석이다. 전대 흥행으로 치솟은 민주당 지지도가 민주당 변심(?)의 원인이라는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나돌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민주통합당은 전당대회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는 관측이다. 리얼미터의 주간 정례조사 결과, 34.7%의 지지율로 한나라당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서 있으니 목에 힘을 줄 만 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민주당의 방심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민심은 냉정하고 안목도 높다. 민심을 두려워할 줄 아는 정치를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결에 민심을 잃고 석고대죄를 외치게 될지 모를 일이다. 때를 놓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될 수도 있다. 지향하는 바가 다른 내가 민주당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으니 뜨악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나름의 진실을 인정해주면 좋겠다.
실속 없는 헛발질로 모처럼 정치를 정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떠나보내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한나라당은 더 어려운 처지다.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위기국면에 처해있는 상황이다.
이런 저런 당내 반발이 일고 있지만 민주당과의 승부를 위해서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비대위원회의 개혁작업이 순조롭게 결실을 맺도록 협조하는 게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위기에서 당을 구하고 조직원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아무리 박근혜 위원장이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는 슈퍼스타의 자질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못한 팀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플레이어 없이 '펠레' 한 사람으로 팀의 우승을 보장받으려는 어리석은 전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팀을 정비해서 골키퍼나 레프팅 라이팅 센터 등 각각의 포지션을 받쳐줄 수 있는 용병을 라인업하는 일이 정말로 중요한 이유다.
그런 측면에서 정당마다 논의되고 있는 당 쇄신작업을 얼마나 다행으로 여기게 되는지 모른다.
일련의 개혁작업들을 정치발전의 초석을 놓는다는 자부심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동안 정치권을 오염시켰던 나쁜 관행의 물을 빼고 있는 이 상황이 어느 측면에서는 통쾌하기도 하다.
물론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상처입게 될 가슴들이 적지 않을 것이고 그로인한 진통도 불가피할 것이다.
그럼에도 기쁜 마음으로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생각이다.
개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대한민국 미래를 위한 고통분담 차원에서 의연하게 극복해낼 생각이다.
희망의 새벽이 멀지 않았기에.
(2012 . 1. 16)
....홍문종 생각
2012년 1월 3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희망을 묶는 전사이고 싶다
희망을 묶는 전사이고 싶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지난 몇 년 동안 블로그와 트위터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한 나의 흔적들이다. 또 내 열망의 시작과 끝을 근본에서부터 다듬는 과정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을 넓힐 수 있었던 기록의 산물이기도 하다.
글 한편 한편마다 내 시야에 들어온 세상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담기 위해 마음을 쏟았다. 내 안의 열정과 가능성 그리고 문제점들을 천착하며 울고 웃었다.
이제 그렇게 남긴 기록을 가려 묶는 지금, 늦은 밤 홀로 새기던 투박한 자취를 세상에 내놓는 쑥스러움이 없지 않지만 맨 얼굴 그대로인 생각의 결을 만나는 반가움이 더 없이 정겹다. 그 느낌들은 새로이 출발선 상에 선 나를 힘 있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내 몫의 과제, 내가 꿈꾸는 희망의 실체를 선명하게 확인시키며 격려하고 부추긴다.
태어날 때부터 유난한 산통으로 어머니의 고통을 배가시킨 불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늘 내편이시다. 예정시간이 지나도 통 나올 생각 없이 버티다가 어머니가 실신할 지경이 되어서야 세상 밖으로 나온 아들에게 지금껏 끝없는 사랑을 주고 계신다. 가끔씩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왜 그렇게 안 나오려고 버텼는지 모르겠다” 하시면서도 “훌륭한 아들로 자라줘서 고맙다”며 태산 같은 믿음을 주시는 이도 어머니시다.
어머니는 일 욕심 때문에 소망하는 바가 많은 내게 마르지 않는 삶의 원천이기를 자처하신다.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언제나 용기백배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삶과 꿈에 대한 본연의 역할을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사랑이 준 자극의 결과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건강한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약속이 아닌 우직한 헌신을 통해 이웃의 고통에 진정을 다하는 참사람으로 거듭나겠다. 누구에게라도 진실로 필요한 이웃이 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 준비하겠다.
그래서 오래 오래 선택되는 인재가 되고 싶다.
이 책을 통해 위로가 필요한 이웃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는 소망을 감히 품는다.
각박한 현실에 지친 이웃들을 기운 나게 할 희망의 언어가 많이 담긴 책이면 정말 좋겠다.
이 책에 개인적인 소소한 일상부터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비전에 대한 고민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정확한 눈으로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담은 것도 건강한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 정치가 국민에게 희망으로 자리매김되는 미래 말이다.
이 책이 그 미래를 조금이라도 앞당겨주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ps;
그동안 이 곳에 올렸던 글들을 간추려 새 옷을 입혔더니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오는 1월 11일 오후 2시 경기도 제2청사 강당에서 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고자 하오니 부디들 오셔서 아낌없이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2. 1. 2)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1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낙엽이 부르는 길
무심히 시작된 가을이 옛 노래 속에서 깊어지고 있다.
바바리 깃 올린 고독한 뒷모습이 아니어도 거리를 구르는 한 점 낙엽에조차 가슴이 뭉클해지는 사내의 감성이 그저 부담스럽기만 한 계절이다.
오늘도 소요학파의 맹렬 추종자답게 고독을 씹으며 낙엽이 부르는 가을 길을 걸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옷깃을 여밀 정도로 바람이 싸늘해지면 떠나버린 사랑이 그리워진다는 태고적 사연을 따라 온종일 낙엽을 몰고 다녔다. 나이도 직위도, 주어진 처지 같은 건 말끔히 잊은 채 캠퍼스를, 철둑길을, 산 중을 걸으며 낙엽 속에서 개똥철학을 건져 올렸다.
무더기를 이룬 낙엽의 면면을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그 때 처음 알았다.
그 들 중 어떤 것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색깔도 모양도 세상에 나온 시기도 소멸의 시기도 어쩜 이리도 다를 까 싶게 제각각이었다.
닮은 게 있다면 마지막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용쓰는 그 처연한 모습을 꼽을 수 있을까?.
문득 푸르고 싱싱했던 지난 기억은 까맣게 잊고 ‘추락’으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 제 운명에 순응하고 있는 낙엽의 처신이 눈물겹다는 생각이다. 냉정히 생각하면 그런 식의 마감은 나뭇잎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을 터다. 하루 이틀 시간차는 있을 지라도 절대로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 쌍둥이처럼 닮아있는 삶의 대기표로 대변할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러고 보니 가을이면 유난히 심해지는 내 센티멘탈리즘은 낙엽으로부터의 청구서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을이면 시도 때도 없이 마음 속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던 미련이 아스라한 슬픔으로 피어나는 가 싶기도 하다.
너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나.
단풍잎 하나 집어 들고 속삭였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아니지요. 더 많이 발효된 다음 산산히 분해된 분진으로 새로운 생명들이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면 소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책임이 남아있는 거지요.
파르르 생명줄을 떠는 단풍의 모습이 더 없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그 순간 눈앞의 만산홍엽이 그토록 우리 마음을 끄는 건 외형의 멋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 안에 내재된 숭고한 사명의식 덕분이라는 깨달음이 뇌리를 스쳐간다.
낙엽이 지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사라질 뿐이고 새 생명의 창조적 근원으로 환치되는 중이다.
적어도 제 한 몸을 온전히 제대로 희사하는 과정을 완성했다면 말이다.
그것은 수없는 세월을 이어온 재탄생의 위대한 작업이기도 하다.
인간도 낙엽처럼 최후가 예약돼 있는 존재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 절명의 한계다.
문득 자칫하면 한 잎 낙엽보다 못한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창조적 역할을 외면한다면 아무리 만물의 영장을 자처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한낱 우주의 쓰레기 더미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는 오명으로 남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할 일이다.
우리가 공의의 삶을 지향하는 이유는 죽지만 죽지 않기 위해서다.
영원한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기 위한 삶의 에너지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생각 없이 살다 사라질 인간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다.
......
인간은 죽는다.
인간은 죽지 않는다.
희망으로 시작하는 11월의 첫 날을 이렇게 마감한다.
(2011. 11. 1)
....홍문종 생각
2011년 5월 5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어린이
2011년 5월 1일 일요일
홍문종생각 - 정치의 계절
2011년 2월 24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청년에게 희망을
청년에게 희망을
사상 최대의 청년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현실이다.
청년 실업이 금기의 선을 넘어선 후유증을 체감하고 있다.
도처에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 무리들이 널려있다.
그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시대의 우울을 더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선배 세대로서 그들에게 좀 더 희망찬 출발을 마련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마음이 무겁다.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서는 제자들에게 건네는 축하 인사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다.
졸업이 풍찬노숙의 사지로 내모는 또 다른 음모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솔직히 있다.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취업 현장의 경쟁률도 가슴을 덜컥 내려않게 만든다.
9급 공무원 공채 경쟁률이 93:1을 기록했다는데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예사롭지 않게 들렸을 것이다. 정년 보장의 틀이 무너진 취업환경이 상대적으로 남녀차별이 적고 신분이 보장되는 공무원 직종을 선호하게 만들었을 테지만 그만큼 심각한 청년 실업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반증일 것이다. 교육 일선에 있는 입장으로서는 젊은이들이 하고 있는 고민의 일단을 보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지구촌 곳곳이 청년 실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형국이다.
주지하다시피 이집트의 30년 독재를 무너뜨린 촉발점은 일자리를 얻지 못한 한 청년의 절박한 구호에서 시작됐다. 청년 실업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점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청년 실업 자체보다는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병폐부터 해결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할 수만 있다면 빈부격차부터 해소하는 게 왕도다.
가장 무서운 절망은 빈곤의 악순환 앞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꿈을 포기하고 무릎을 꿇게 되는 일이다. 젊은이들을 좌절에 빠뜨리고 의욕을 떨어뜨리는 빈부격차부터 바로 잡아야한다. 따라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고 본다.
도대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평생 집하나 제대로 장만할 수 없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자식하나 제대로 교육시킬 여건이 안된다면, 그 어떤 최선의 노력으로도 낙오 대열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면 무엇으로 꿈을 세울 수 있겠는가.
결국 결혼문제가 됐건 자식문제가 됐건 취업문제가 됐건 인생의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게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 좌절로 인한 깊은 상처가 한 인간의 삶 전부를 망가뜨릴 수 있는 치명적 독성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럴 진데 아무리 세계는 넓고 할 일이 많다고 외쳐본 들 약발이 먹힐 리 없다.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젊은이들의 현실이 안쓰럽다.
경기불황과 청년실업도 모자라 사회적 부양책임도 이들 세대에 떠넘긴 꼴이 됐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이 그들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직격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가볍게 시작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후원과 따뜻한 격려로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줘야 하는데 출발도 하기 전, 무거운 짐부터 지워준 꼴이 됐다.
안팎으로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이 넘치고 있다.
다른 나라와의 생존 경쟁이 즉각적인 현실로 반영되는 이 시점에서 차세대를 책임질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미래를 위한 가장 적극적인 투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은 대한민국 전체가 ‘청년 프랜들리’ 정신으로 그들을 돌봐야 할 때다.
젊은 세대들이 창업 등 새로운 시도를 통해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이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나 여건을 만들어 주도록 관심을 가져야겠다.
그들의 고충에 귀를 기울이고 짐을 덜어주자.
우리 모두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자기 포부를 펼칠 수 있는 든든한 뒷배가 되도록 하자.
무엇보다 계층 간 격차를 줄이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젊은이들이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하는 큰 지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땅의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도록 하자.
(2011.2.25)
....홍문종 생각
2011년 2월 18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졸업, 그 시작의 의미
바야흐로 졸업시즌이다.
대한민국 전역이 장사진을 이룬 졸업식 물결로 가득 채워진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도 덩달아 바빠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졸업식장을 넘나들며 소화해야 할 살인적인 ‘축사’ 일정이 어느 결에 정기적인 연례행사가 되고 말았다.
경민학원만 해도 10여개가 넘는 학교기관이 있다. 거기다 인근 학교 졸업식에 까지 불려 다니는 일정을 생각하면 얼마나 숨 가쁜 스케줄을 감당하고 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졸업식 풍경은 거의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진부하고 또 여전히 새로운 기운이 넘치는 절묘한 조화로움이 졸업식을 떠 받치고 있다.
가장 진부함을 드러내는 건 아무래도 축사 부분이다.
대부분 고정된 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로 시작해서 희망, 미래, 비전, 포기하지 않는 삶의 목표 설정 등으로 이어지다가, ‘인생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많이 벌었나, 얼마나 큰 권력을 쌓았나, 얼마나 명예를 높였나가 아니라 얼마나 인간다운 삶을 살았느냐에 달려있다’(내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다)로 마무리되기 일쑤인데 오래 전과 비교해서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느낌이다.
반면 졸업식마다 매번 주인공이 바뀌고 주변 환경과 여건의 변화로 생동감 넘치는 졸업현장은 신선도 높은 새로움을 제공한다. 개인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달라지고 그런 만큼 세상을 향해 첫걸음을 떼는 졸업생들에게 사회에 대한 합리적인 관심기준을 주문하는 합리적인 현실을 만나는 반가움을 맛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진부와 참신이 공존하는 아이러닉한 공간이라고나 할까.
진부함을 벗지 못한 축사로는 졸업생들에게 구체적이고 확실한 목표의식을 심어주기에 역부족이지 싶다. 유행이 지나쳐 상투적이 된,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독창성이니 창조성이니 하는 언급들만으로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알게 하기는커녕 무지개만 쫓는 오류를 부축일 수도 있다는 걱정이 있다.
그래서 졸업식 축사에 나설 때마다 많이 고민하게 된다.
짧은 시간 동안 전하고자 하는 나의 의도가 (졸업생들에게)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건지,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가능성과 미래를 준비하는 그들에게 아주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있는 건지 명확한 가늠이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씩 내 자신의 졸업식을 돌이켜보기도 한다.
초중고 시절의 교장선생님들과 담임선생님들의 당부 말씀들을 떠올리다 보면 우리를 바르게 가르치시고자 했던 은사님들의 노심초사를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대학과 대학원 졸업식 축사 중에서 각별한 기억이 되어 내 삶의 고비마다 큰 힘을 발휘하는 당부 말씀들이 있다.
김상협 총장님의 '지성과 야성론’도 있고 88년 美 대선 당시 하버드 출신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듀카키스의 ‘unbelievable people' 등도 특별히 여운을 남기는 축사다. 하버드 졸업시장에서 ’세상에 던져진 여러분들에게 뭔가 확실하고 분명한 방향타를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잘해만 달라고 부탁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이해해 달라‘는 취지로 심금을 울렸던 총장님 말씀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는 나만의 '명 축사'다.
지금은 나 자신 역시 대학 총장 직함으로 졸업식을 치르고 있는 입장이다. 그래서인지 오래 전에는 철없이 놓치고 말았던 은사님의 ‘속울음’이 내포하는 깊은 뜻이 헤아려지는 것 같다.
특별히 세상 일이 더 어려워진 요즈음이고 보니 제자들에게 확실하고 분명한 방향타를 제시해주지 못하고 일방통행식 단어 몇 마디로 눙치고 있다는 자괴감이 적지 않다.
졸업식을 마치고 학교를 떠나는 제자들이 물가에 내놓는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예전에 내 은사님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제자들을 위한 기도 제목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간절히 간구한다. 한발은 과거에, 나머지 한발은 미래에 의지하고 과거와 미래를 잘 조율하면서 현명함으로 이 어려운 현실을 잘 헤쳐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매달려보지만 선생의 도리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내려놓기엔 미흡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인생은 어차피 기차길 처럼 두 개의 레일 위에서 존재하는 과정인 것을.
한 쪽 레일에서는 세상 밖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일들을 지켜보고 또 다른 레일에서는 깨우치고 배려하고 지탱하고 붙잡는 인간 내면의 존립기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만으로는 그 누구도 도리 없음을 받아들이고 삶의 질서에 순응해야한다는 생각이다.
사랑하는 제군들이여,
이제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걸음마를 시작한 그대들의 졸업을 축하한다.
그러나 푸른 그대들이여,
세속적인 성공 개념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 일이다.
자신의 삶을 운용하는 이는 스스로 밖에 없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용맹스러운 실천과 우주를 품는 지혜로 이 넓디넓은 세계를 한 가슴에 받아 안길 바란다.
자, 시작이다.
(2011. 2. 18)
......홍문종 생각
2010년 9월 11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희망을 깨우자
달라진 국가적 위상을 가장 먼저 실감하게 되는 건 외국의 공항 입국심사대가 아닐까 싶다.
아마도 외국을 자주 방문하는 분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여행자 국적에 따라 입국절차의 난이도가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말이다.
어느 때 부터인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대한민국 패스포드를 내밀면서 우쭐한 느낌을 갖게 된 것 같다. ‘Korean'임을 밝히면서 조금은 더 당당해진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다.
처음 미국행 비행기를 탔던 70년대 초반 당시의 풍경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다.
이번 여름 방문했던 폴란드나 체코 등 유럽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시가지 곳곳에 널려있는 한글간판이나 한국제품에서도 그렇고 ‘Korea'에서 왔다고 하면 반기며 호감을 표하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우리의 현주소를 체감할 수 있었다. 폴란드에서 만난 한 상인은 자신의 낡은 중국제 자전거를 가리키며 한국제품이었으면 훨씬 성능이 좋았을 거라고 말을 붙였다. 심지어 그는 중국제품에 대해 별다른 기대감을 갖고 있지 않다며 우리제품의 우수성을 거듭 칭찬해 국제사회에서 달라진 대한민국의 위상을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그런데 생활고 때문에 여러 유형의 생계형 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선진국 반열에 이제 막 발을 들인 대한민국의 어두운 그늘을 고스란히 드러낸 실상인 셈이다.
실제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마트에서 음식물을 훔치다 주부가 구속이 되고 실직한 20대는 생활비가 떨어지자 재래시장을 돌며 푼돈을 털다 덜미를 잡혔다. 성실히 살았지만 빚을 갚지 못해 고민이 깊어진 가장은 어린 자식들을 남겨둔 채 세상을 하직했는가 하면 역시나 경제적인 문제를 이유로 어린 세 딸을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어버린 모진 모정의 안타까운 사정도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전과자로 전락하고 있는 게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이다.
이처럼 어두운 현실을 단순히 개인의 경제 능력 문제로 외면하기엔 사회적 책무와의 연관성이 결코 작지 않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국제사회에서 선진국 대접을 받고 있다 해도 이 같은 사회적 그늘이 제거되지 않는 한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부모로부터 조달되는 용돈만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4억 명품녀'에 대한 논란도 우리 사회의 모순된 부의 편중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정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정부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화두로 ‘잘 살기보다는 공평하고 공정한 나라’라는 케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러시아 방문 중인 이명박 대통령도 “경쟁을 통해 사회의 역동성을 살리며 패자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는 공정한 사회야 말로 대한민국 선진화의 윤리적.실천적 인프라”라는 내용의 포럼 기조연설로 이 같은 입장을 천명한 바 있다.
그런데 정작 현실은 정부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생계의 도탄에 빠진 이들을 향해 ‘잘못’이나 '책임‘을 추궁하거나 종용하는 건 불량기 넘치는 사회적 폭력을 휘두를 수는 없는 일이다.
해결을 위한 공동체적 노력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관점에서 최근의 생계형 범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차원의 주장을 펴자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축적물을 오로지 개인적 영역이라는 편협한 생각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그런 현실이고 보니 우리 사회에 존경받는 부자가 존재하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우리에게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모범적으로 실천해 온 경주 최부자 댁이 있기는 하다. 대를 이어가며 이웃을 향해 사랑의 손길을 내민 덕에 존경받는 부자의 면모를 보여줬지만 지금은 그 명맥이 끊긴 상태다)
남의 나라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국의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등 억만장자 40명이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는 '아름다운 약속'을 결성한 움직임은 이 땅의 기득권 계층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풍토가 정착되려면 아직도 요원한 우리로서는 그저 부러울 뿐인 사회적 자산이다.
특히 우리의 종교인들이나 사회사업가들이 역할 모델로 삼을만한 가치가 충분한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명백히 말하자면 이들은 자신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을 외면하고 있는 형국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종교계의 현주소는 비관적이다.
들여다보면 교회나 사찰 등이 본연의 업무와 역할의 중심에서 벗어난 일탈 투성이다. 마치 외형으로 교세가 결정되기라도 하는 양 날마다 신축 경쟁에나 매달리면서 정작 해야 할 진짜 해야 할 임무들을 도외시 하면서 빈축을 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그들에게 기대할 게 과연 있기나 한 건지 모를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은 임금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 말은 이제 말 그대로 옛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성 있는 사회적 합의로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동력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해결책은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우선 당장 한 끼를 해결하는 정도의 단편적 구호는 제공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줄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 양극화의 폐해를 완충시키는 치유책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히려 전체 국민에게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불평등 구조의 심각성을 인식시키는 것이 더 빠른 해결책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게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알리자는 것이다.
모두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분배와 공유가 제자리를 찾는 길이 가장 빠른 해법이다.
이를 기본 전제로 모두가 한마음이 될 수만 있다면 양극화 해소는 물론 이 정부의 주요 화두인 공정한 사회 구축을 한결 더 수월할 수 있도록 하는 묘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부자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 쉬운 ‘존경과 사랑’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키워드가 될 수도 있다.
모쪼록 희망을 잃지 않는 게 관건인 만큼 희망을 깨우도록 하자는 얘기다.
(2010. 9. 10)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2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아, 박용하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렌터 윌슨 스미스 -
탤런트 박용하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우기의 음습함을 더해주고 있다.
영정 속 미소가 너무 환해서 보내야 하는 이들의 아픔을 자꾸만 키우고 있다.
무엇이 이 아름다운 청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삶을 거두어들이게 했을까?
남들은 평생에 한번 만나기 힘든 성공을 거둔 삶을 두고 도대체 왜 죽고 싶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그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열심히 꿋꿋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조금만 더 참아보지.
평소 나는 젊은이들의 감각을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도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닥치는 생의 문제에 너무 쉽게 굴복하는 경향을 보이는 그들의 한계에 우려한다.
학업, 직장, 병역 그리고 대인관계 등 평범한 일상으로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 순간의 차이로 무게를 달리할 경우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쓰나미’가 되는 게 문제다. 참을 수 없는 나약함이라고나 할까, 도무지 인내하려 들지 않는다. 젊은 그들에게 있어 치명적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자살도 마찬가지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지레 겁먹고 항복하는 형국 아니겠는가.
정말로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이지만 어차피 지나가게 돼 있다. 그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건 인간의 숙명일지 모른다.
다만 그 아픔을 얼마나 잘 다독일 수 있느냐에 따라 행복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자살공화국의 불명예가 아니더라도 자살은 최악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용납될 수 없다. 오히려 인생의 무게를 감내하지 못한 나약함은 마땅히 질타를 받아야 한다.
안타깝긴 하지만 박용하의 죽음도 더 이상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고통이나 슬픔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부재가 특별히 다른 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용하의 비보가 전해지자 그 실체를 드러낸 이른 바 ‘베르테르 효과’의 현장을 보고 있다.
박용하가 숨진 지 하루 만에 레이지본 멤버인 노진우가 한강에 투신했다 구명됐는가 하면 우울증을 앓던 40대 주부가 관련 보도를 본 뒤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시인 도종환은 말했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고.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트는 거라고.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냐고.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면서 따뜻한 꽃잎으로 피어나는 거라고.
나는 이 블로그를 통해 말하고 싶다.
역경을 이겨내지 못한 삶은 그 열매에 향기가 없다고.
자신의 생에 대해 좀 더 진지해지고 열정을 갖자고.
어차피 오게 돼 있는 어려움, 피하려고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자고.
무엇보다 그 어떤 난관도 우리의 삶을 좌초시킬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자고.
내게도 죽음을 떠올릴 만큼 힘들던 좌절과 역경의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죽음에의 유혹을 딛고 그 지난한 시절을 이겨냈기에 오늘 날 내 나름대로의 성공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더 이상 극단의 선택은 없었으면 좋겠다.
고인의 명복을빈다. (2010. 7. 3)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9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고독 헤는 밤
알 수 없는 지독한 우울함에 시달리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더 이상 잘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좌절감에 갇혀 버렸다는 호소였다. 아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상실감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절박한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지 알 것 같았다.
당사자로선 죽을 것 같지만 정작 병명조차 제대로 부여받을 수 없어 가중처벌의 혹독함이 더해지는 고독증후군의 증세가 새삼 상기됐다.
고독의 마수에 걸린 그의 현실이 몇 마디 어설픈 위로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침묵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고독이 동반되지 않은 삶은 개 돼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며 고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사상가나 철학가가 있었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고통 앞에서 무슨 힘이 될까 싶었다.
내게 있어 고독은 오래 묵은 친구 같은 존재다.
보통 하루면 기십명을 만나야 하는 나의 일상을 염두에 둔다면 군중 속 고독인 셈이다.
사람들과의 어울림도 좋은 편이고 친구관계도 원만한데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들 때가 많으니 가히 병이라면 병이라고 하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전학을 많이 다니다 보니 홀로 있던 시간이 많아서 생긴 습성일까 싶었는데 결국 나의 의식 밑바닥에 꽁꽁 매어놓은 강력한 자아가 나를 고독의 세계로 떠다미는 결정적 인자라는 선에서 결론을 지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심야를 좋아하고 그 동반자인 고독을 즐긴다. 유학준비를 하던 5년과 10년의 유학생활 동안 집중하기 쉽다는 이유로 밤새우기를 일상화하면서 생긴 습성과 무관하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고쳐보려고 노력을 안 해 본 것도 아닌데 결국은 원점이어서 습관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다.
고독하다는 건 아직도 스스로에게 희망이 남아있는 징조라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어쩌면 그 자신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끝에 얻을 수 있었던 '득도의 현장'일 수도 있다. 실제로 고독이 우리에게 인생 전반에 대해 돌이켜 성찰 시키고 현실인식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하는 순기능으로 작용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굳이 고독을 좌절의 끝으로 몰고가서는 안되는 정황에 다름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절한 대응이 가능하다면 고독은 고통을 주는 '가해자'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고독을 컨트롤 하는 힘이 있다면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이 입증된 바 있다. 이 시대를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나나 철학자들이 고독의 극한 상황을 뛰어넘어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걸어간 정황은 수두룩하다. 그들의 선례가 고독을 더 이상 기피 대상으로만 삼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독이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르게 돼 있다.
고독해서 너무 외로워서 우울의 늪에 빠져 죽을 것 처럼 고통스럽다는 친구에게 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달뜬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행여 해가 사라질까 봐 근심하거나 단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말해주고 고독을 매개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엄청난 힘의 배경도 설명해줘야겠다. 우리가 가진 이 내면의 보석이 얼마나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존재인지도 열심히 공들여 알려야겠다.
고독을 희망의 키워드 삼아 헤아리는 이 밤, 가슴에 들어와 박히는 총총한 기운이 새롭다.
( 2010. 6. 9)
....홍문종 생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