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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4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아버지

아버지
구순이 지난 아버지와는 해를 더할수록  친밀함이 깊어지는 것 같다.
이제는  아들 앞에서  긴장 푸시길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뵐 때 마다  '아프다, 자신이 없다...' 어리광으로 반가움을 대신하신다. 
젊은 시절  아버지를 떠올리면 천지 개벽 만큼이나 달라진 상황이다.
 다행인 건 아버지의 '레파토리'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 만큼은 예전의 아버지를  만나는 느낌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돼도 기꺼이 아버지 말씀을  경청하게 되는 이유다.

신년 첫날, 세배를 드리러 찾아뵀을 때도 예외없이 아버지는 당신의 레파토리를 펼치셨다. 
이번에도 할아버지 함자를 둘러싼  집안내력으로 운을 떼셨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다. 
만주일대를 돌면서 독립자금을 모아야 하는 임무 때문에  '홍 재자 경자' 본명을  갖고도 이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의 사정이  다 그랬듯,  매번 다른 이름을 써야 했고  정상적인 가정생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우리 집안이 통일된  돌림자를 갖지 못하게 된  배경에  나라 잃은  통한이 서려있는 셈이다.  
식민지배 민족으로서의 고통은 아버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손톱과 발톱은 본래의 형체를 잃고 일그러져 있다. 
일제 치하에서 대나무 꼬쟁이로 당한 고문의 흔적이라고 하신다.  
언제 다시 보여줄 수 있을 지 모르겠다며 당신의 손톱과 발톱을 내미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비장함이 묻어났다. 
고문자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웠다고 당시를 술회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보니  그런 자들이  경찰이 되고  총경이 되고 서장이 되어  출세가도를 달리는 기막힌 현실이 펼쳐지더란다.
일제 잔재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었다.   

"일본은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여전히 식민지배 야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그들이다.  지금 일본이 우리  시도 지자체와 결연을 맺어 우의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아니 임진왜란과 만찬가지로 대한민국을 속속들이 연구하면서 다시 침투할 시기만 노리고 있다.
한시라도 일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고 내 나라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의 마음가짐을 흐트러뜨려서는 안된다. 
특히 아베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 말라. 아베는 확신범이다.
자기 생각을 진실이라고 믿고 실천에 옮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늘상 들어오던  아버지의 당부가  유난히 더 장엄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부쩍 연로해지신  모습에  가슴 한 켠이 쓸쓸해진다.                                                      (2015. 1.  3)

                                                                  ...홍문종 생각

2011년 8월 12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고백하라



고백하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뒤늦은 고백’이 세간의 관심을 끌던 날, 유난히 전직 대통령들과 관련된 흔적과의 조우가 많았다. 물론 내 방에만 해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병풍이나 YS의 대도무문 도자기 등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오늘처럼 한꺼번에 전직 대통령들의 자취를 접하게 되는 건 흔하지 않은 경험이다.
전에 없는 일이어서  묘한 느낌마저 일었다.

첫 번째 만남은 아버지의 정기검진 차 방문한 연대 세브란스 병원 전문의 진료실에서였다.
비뇨기과 검진을 위해 담당 의사 선생님 방을 찾았는데 그곳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이름이 적힌 빛바랜 화분용 리본이 있었다. 소중히 보관된 느낌이었다. 아마도 김대중 전 대통령 진료를 담당했던 방주인이 그 때의 인연으로 받은 것을 보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 전 대통령을 존경과 예우가 느껴지는 풍경이어서 인상적이었다.

다음 일정인 ‘자연과 일상회’라는 아마추어 그림 동아리 전시회장에도 전직 대통령의 흔적이 있었다. 이런 일에 익숙지 않아 보였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동아리 회장님께서 본인의 작품을 봐달라고 이끌어 갔는데 거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었다. 봉하 자택 앞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활짝 웃는 모습을 표현한 도자기 작품 속에 그가 있었다.
내가 보기엔 아마추어 치고는 훌륭하다 싶은 작품이었는데 정작 작가는 노 전 대통령의 인자한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아마도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을 향한 애틋함의 발로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일파만파 번지고 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 회고록 파동을 접했다.
92년 당시 대선 후보였던 YS에게 3000억원의 비자금을 지원했다는 노 전대통령의 회고는 정가를 강타하는 핵폭탄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같은 전직 대통령의 고백이었기에 파장이 큰 건 당연할 터다.
회고록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 몰랐다, 직접 받지 않았다‘고 다양한 반응을 보이던 YS 측도 그나마 이를 입증할 수 있는 녹취록(노 전대통령과 YS의 대화가 녹음된)이 존재한다는 증언이 이어지자 힘을 잃는 형국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인간이 저마다의 삶을 함부로 하지 않는 근본 명제가 될 수도 있겠다.
세월이 지날수록 업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부각되는 인물이 있는가하면 점점 퇴락해가는 인물도 있다. 때로는 진퇴의 시점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이름’이 적지 않다. 굴곡진 삶의 과정에서 일관성을 지키지 못해 오욕의 낙인을 피하지 못한 회한의 이름도 더러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명예를 얻게 되는 이름들도 있다.
그런 걸 보면 이름을 남긴다고 저절로 예우가 따르게 돼 있는 건 아니지 싶다.  당대의 승리가 반드시 진리로 고착되지  않을 수 있다는  예증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어도  훗날 재평가의 검증을 통해  화려하게 진리로 부각되는  일도 부지기수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잠깐은 속임수가 통해도 영원히 속이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궁지에 몰린 YS를 향해 쏟아지는 여론의 향배가 아슬아슬하다.
설마 했는데 그동안 설왕설래 하던 소문들이 당사자의 고백을 통해 확인사살 되는 분위기다.
이 날벼락이 생존하고 있는 당사자에겐  얼마나 황당하고 민망한 재앙으로 작용할까  싶기도 하다. 
이번 일이 그의 말년을 어둡게 하는 신호탄이 될까 심히 우려스럽다. 필경 YS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뒷걸음질 치게 될 것 같아 착잡하기도 하다.
물론 상황과 시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목적도 수단의 불법성을 정당화할 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만고의 진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YS 본인의 적극적이고 분명한 입장 표명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 시절 증언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의 증언이 덧붙여져야겠다.  그것이 역사의 정확성을 지키고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 표시가 아닐까 싶다.  더구나 코앞에 주요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지난 날에 대해 과오가 있다면 깨끗이 털어놓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이해를 구할 부분이 있다면 설득하면 된다.   임시로 모면하려거나 거짓으로 감추려는 꼼수는 갈수록 불화를 키울 뿐이다.
 
후대에 존경받는 이름으로 남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평가는  늘 두려움의 대상으로 의식되는 것 같다.  
무엇을 하고 있건 후대에 비칠 스스로의 모습을 의식하게 된다. 무슨 행동을 하건 반드시 다시 한번 둘러보게 된다.  사소한 걸음 하나조차도 신중하고 진정성 있는 행보가 되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나의 열망이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긍정적   사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2011. 8.11)                      
                             ....홍문종 생각                           

2011년 8월 1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친구

친구
 
근래 들어 옛 친구들과의 추억을 더듬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주 뵙게 된다.
특히 옛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속절없이 지나가버린 시간을 아쉬워하는 눈치시다.
며칠 전에도 빛바랜 사진 한 장을 펼쳐놓고 오래 생각에 잠겨 계신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었다. 40여 년 전 우리 집 안마당을 배경으로 아버지를 비롯한 20여명의 친구 분들이 함께 한 순간을 담은 사진이었는데 꿈인가 싶게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모습의 아버지가 거기서 웃고 계셨다.
아버지는 사진 속 친구 분들을 하나하나 짚으시며 이름을 뇌이셨다. 같이 들여다보고 있던 내게 미국에 계신 한 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유명을 달리했다고 얘기해주시는 아버지의 표정이 더 없이 허탈해보였다.
 
우울한 아버지의 기분을 바꿔준 건 친구 분들의 병문안이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연배인 만큼 그야말로 몇 분 안 남은 친구들의 방문에 아버지는 들뜬 기색이 역력하셨다. 수 일 전, 친구들이 방문하신다는 전갈을 받으실 때부터 . 머리도 다듬고 염색도 하시고 당일 일정을 일일이 챙기는 것은 물론 점심메뉴까지 내게 직접 지시할 정도로 신경을 쓰시며 친구들과의 만남을 고대하는 기색이셨다.
더구나 폭우 때문에 일정이 며칠 연기되자 더 간절해지신 눈치셨다.

 

공자는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呼아’ (먼데서 뜻이 통하는 친구가 나를 찾아오니,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닌가!)라고 했다.  역시나,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친구의  영향력을 일찌감치 내다볼 줄 알았던  혜안이 무릎을 치게 만든다. 
실제로 친구분들의 방문으로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지신  눈치다.
 아버지를 대번에 혈기 넘치는 청년으로 만들고 열정과 카리스마 넘치던 시절로 되돌려 놓았다. 와병 중 잠시 내려놓았던 활기도 되찾게 해줬다,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 나눈 추억의 내공은 역시 간단하지 않았다.
어르신들은 대한민국 격동기의 한 때를 평정하시던  분들답게   여전히 살아있는 안광과 기품있는 외모로 주위를 압도하셨다.   내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친구들과의 대화에 몰입하시며 신명을 내는  아버지의 모습이  고마움과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아버지와 친구 분들 사이를 오가는 대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겪은 세대가 갖는 조국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것과 또 달랐다. 단순한 세대차이로 일축하기엔 선이 굵은 자극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조국의 존재는 사랑은 물론 언제든지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민족중흥을 얘기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에서는 청년 못지않은 열망과 신념이 엿볼 수 있었다.
아버지 세대가 조국에 바친 헌신의 에너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가 누리는 오늘의 안락은 맨 땅에 헤딩하듯 황무지를 개간해나갔던 그들의 신화가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노고를 필설로 다 드러낼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조국이 그들에게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순의 노구인 그들은 아직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피땀을 흘릴 수 있다는 각오를 말하고 있었다.
 
감사함과 부끄러움이 교차하는 묘한 감동이 일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현재가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어르신들이 청운의 열정을 조국에 바친 결과라는 생각에 미치자 숙연해졌다. 너나없이 늙고 병들고 세상을 하직하게 되는 게 세상 이치이고 누구나 예외없이 적용되는 운명의 수순임에도 불구하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게 되는 인간의 아둔함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기도처럼 가슴에 새겼다. 지금 누리고 있는 우리의 위상이 거저 얻어진 게 아니듯 우리의 미래 또한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하루하루가 10년 20년 뒤 우리의 현실을 결정짓는 중요한 근간이 된다는 것을.
더불어 항상  스스로를 향해 되새기곤 하는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과연 우리의  지금 모습을 묻는 후대의  날카로운질문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남긴 채 손님들은 떠나셨다.
그들을 배웅하면서 구순 노인의 뒷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들이 나누는 우정 때문에, 아직도 식지 않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소서.     (2011. 8. 2)     
                   ....홍문종 생각                            

2011년 7월 4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휴일 오후, 대학로 ‘정미소’에서 보직교수들과 부부동반으로 연극 공연을 관람 했다.
극단 ‘봉’에서 올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라는 작품이었는데 단장을 비롯해서 출연진으로 경민대 출신들이 대거 참여한 공연이라는 소리를 듣고 힘을 실어주자는 취지로 나선 나들이였다. 폭우에도 불구하고 객석이 들어찰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제자들의 성공(?)을 확인할 수 있어 뿌듯한 시간이기도 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버지를 바꾼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에서 출발한 이 연극은 가족과의 불화로 겉도는 이 시대 아버지들의 우울한 군상 등 결코 편치 않은 소재를 재미로 풀어내는 미덕을 발휘하고 있다.
극중 아버지 민신일은 지나친 가부장 사고에 젖어 가족과의 교감을 도외시하는 가장으로 ‘군림하는 아버지 대신 ’좋은 아버지‘를 빌려주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동장에 의해 퇴출된다.  이후 그는  ‘진짜 아버지 권리보장 위원회’를 만들어 맞서는 과정을 통해 어려운 가정을 이끌어가면서도 가족의 가치와 책무를 중시하는 그러나 고지식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종국에는 진짜 아버지의 진의를 깨달은 가족들이 다시 모이게 되지만 갈수록 다양해지는 자식과 사회적 요구에 치이게 되는 이 시대 아버지들의 우울함을 적나라하게 환기시키는 작품이라 하겠다. 20세기형 가부장적 사고에 찌들은 독불장군 아버지와 새로운 시대를 요구하는 아들딸들의 21세기 형 사고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형성된 세대 간 갈등이 결코 간단하지 않은 현실을 짚어준 점도 이 연극의 강점이다. (연극 동호인뿐 아니라 가족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에게도 강추하고 싶은 작품이다)
 
그렇지 않아도 세대 간 갈등이 임계점을 치달으며 심각한 걱정을 낳고 있는 현실이다.
뒤늦게 인성교육 부재에 대한 자성이 일고 있지만 딱 부러진 대안이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세대간 ‘불통’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불화를 양산해  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실제로 자식들에게 있어 부모는 단지 크레딧 카드의 기능으로만 부각될 뿐이고 부모 역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독립된 존재라기보다 자신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소유의 개념으로 자식을 받아들이는 데 더 익숙해 있다.
무엇보다 큰 불행은 불화가 방치되고 있는 현상에 있다고 본다.
관계 개선을 위한 그 어떤 노력도 없이 세대 간 갈등의 골만  깊어지는 형국이다.  ‘지하철 폭행녀’, ‘지하철 막말남’ 등으로 대변되는 사건들만 해도 소통부재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시대의 병폐를 고스란히 보여 준 유형이라 하겠다.
그런 점에서 오래전부터 효를 만행의 근본으로 가르치고 있는 우리 경민의 교육이념이 새삼  소중해진다.  경민의 효교육이야말로 세대 간 갈등을 좁히기 위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틈만 나면 학생들에게 효에 대한 관념을 구체적으로 심어주고 실질적으로 행동하게 하고 끊임없이 강조해왔던 만큼 효 교육의 메카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는 생각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유난히 부모님 생각을 많이 떠올린   하루였다.
연극의 주제도 주제였지만 예배시간 목사님 설교 내용도 ‘좋은 부모’에 대한 것이었다.
오후에 잠깐 들른 아프리카 예술박물관에서는 장대비를 불사하고 나들이에 나선 3대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목격했는데 깊은 여운을 주는 잔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저녁에 다녀온 상가(喪家)에서는 더 이상 곁에 계시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쏟아내는 통한어린 애가에 덩달아 뭉클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이 어버이 날인가 싶을 정도로 온종일 부모님과 연관된 이벤트의 연속이었다.
 
잠자리에 누우니 요즘 들어 유난히 몸피가 작아진  어머니와  주름살이 부쩍 늘어버린 병상의 아버지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속절없이 뜨거워지는 내 눈가의 변화는 내리는 비 탓만은 아니리라.
연극 공연 중 들었던 ‘어버이 사랑’을 꿈에서라도 목 놓아 불러보고 싶은 이 깊은 충동도.
                                                       (2011 .7 .4)             
                                                     ...홍문종 생각            

2011년 6월 14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아버지2

아버지 2


현지에서 살펴 본 아버지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했다.
이마를 여섯 바늘이나 꿰매 눈 한 쪽이 퉁퉁 부어올라 병상에 누워계셨다.
그런 아버지를 뵈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고 목이 메었다.
밤을 다퉈 모시러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연신 걱정을 하시면서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셨다.
내 얼굴을 보고서야 비로소 긴장을 풀고 숙면을 취하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 아픈 중에도 하와이 독립문화원과 학교 그리고 집안의 대소사까지 끊임없이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넘치는 에너지는 아버지의 천성이기도 한 것 같았다.
아버지를 통해 이런 열정들이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중경은 중국에서 몇 번째로 꼽히는 도시라는데 중국의 위상을 생각하면 많이 실망스러웠다. 도시 전체가 얼마나 더럽고 어수선한 분위기 일색이던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회귀했나 싶을 정도였다. 아버지께서 머무신 병원만 해도 중경에서 제일 좋은 곳이라는 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위생상태가 엉망이었다. 진료비는 왜 그리 비싼지 4일 입원비가 중국돈 2만원을 육박하는데 카드결제도 안된다고 해서 현금다발을 들고 있어야 했다.
귀국 절차도 순조롭지 않아 애를 태웠다.
당초 단체비자였던 아버지의 비자발급이 귀국을 지체시키는 원인이었다. 뛰고 저리 뛰었지만 결국은 예약 비행기를 놓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꿰맨 상처도 비행기 탑승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됐다.
중국 항공을 이용할까 했는데 이마를 꿰맨 환자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항공사를 바꾸고 꿰맨 상처를 가리는 북새통 끝에 비행기 트랩에 오를 수 있기는 했지만 황당한 경험이었다.
심지어 환자의 탑승을 돕는 이동수단까지도 문제였다.
중경 공항에는 미국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환자용 미니카 대신 휠체어가 준비돼 있었는데 이 또한 만만치 않은 구설거리를 제공했다. 이용 환자를 마냥 기다리게 하는 것은 기본이고 특히 무면허처럼 환자에 대한 배려 없이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끌고 다니는 난폭운전이 무시로 행해지는 행태는 목불인견이었다.
역시나 중국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음 하나 옮기는 것조차 힘겨워하시는 아버지를 부축해 드리는데 그 순간, 아버지가 전적으로 내게 몸을 싣고 의지해 오셨다. 원초적인 매달림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만큼 절박함이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의탁한 일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어린 날 장터의 서커스 공연을 보고 늦은 밤 아버지 등에 업혀 돌아오던 내 모습을 보았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아버지도 어쩌면 어린 날의 나 같은 심정으로 손을 내미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 때 나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뭔가 자꾸만 뒷덜미를 잡아채는 것 같아 두려웠다. 아버지 등에 찰싹 엎드리고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아버지와)밀착하고자 용을 썼던 이유다.
문득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아버지가 순간적으로 역할 환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인생을 반추하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갖는 의미를 헤아리고 있다.
부정적인 의미도 아니고 긍정적인 의미도 아닌 단순한 ‘죽음’의 명제로 기도하듯 생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될 것이다. 전혀 새삼스럽지 않은 사실이다.
결국 아버지 얼굴처럼 주름이 지고 아버지의 다리처럼 빈약해지고 힘을 잃게 되리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여정 자체가 선택의 여지없이 죽음을 향하고 있는,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 모호해지는 것 같다. 이 역시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다.
오고 가는 여정 속에서 완독한 최인호 작가의 ‘낯익은 타인의 도시’와의 인연도 이 같은 나의 정서 형성에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현실 안주를 거부하는 비존재의 몸짓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거나 존재의 가치를 끊임없이 되물으면서 방점이 찍힌 현실을 찾고자 하는 노력의 일단을 볼 수 있는 재미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미덕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아버지는 귀국 직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셨다.
앞으로 많은 검사를 남겨두고 있기는 하지만 대한민국에 적을 둔 병원에 입원했다는 안도감만으로도 아버지는 많이 안정된 상태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현지까지 당신을 찾아와 준 아들 얘기를 여러 번 반복하고 계신다.
그런 식으로 장남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시는 것이고 보면 참 많이 변하신 모습이다.
나 자신도 과찬에 몸 둘 바 없는 가운데 아버지께 더 효도하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쾌차를 위해 함께 걱정하고 기도해 주신 주위의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한다.


(2011. 6.13)
....홍문종 생각

2011년 6월 12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아버지

아버지


내게 있어 아버지는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산 같은 존재였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특히 더 했다.
부자지간의 다정다감한 대화는커녕 그저 어렵고 두려웠던 기억이 더 크게 각인돼 있다.
기골이 장대한 외모에서 풍기는 위화감 탓도 있었지만 감정표현이 거의 없던 아버지 특유의 무뚝뚝함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아마도 이 땅의 아들들 대부분이 한번쯤 느끼게 되는 좌절감이라는 생각이다.
조금만 더 하면 아버지를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아무리 죽어라 달려도 번번이 저만치 앞에서 뚜벅뚜벅 걷고 있는 아버지의 완강한 뒷모습을 통해 전해지는 패배감에 시달렸던 기억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장성한 이후 아버지로부터 몇 차례 인생고백을 들으면서 상당 부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는 시대적 상황의 희생양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월남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아버지 역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아버지의 기억엔 한없이 근엄하시기만 했던 어린 시절 할아버지(아버지의 아버지)가 전부일텐데 자식 사랑을 살갑게 표현하는 방법을 알 리 만무다. (부전자전인지 나 역시도 아이들에게 그다지 자상한 아버지의 본을 보여주지 못했다)

- 故김학수 화백님,  前교육인적자원부장관 안병영님, 
前연세대총장 故박대선 선생님과 함께-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다.
내 삶의 고비마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듬직하게 뒷배가 되어 주셨던 이도 아버지셨다.
특히 당신이 솔선수범하시면서 훈육하셨던 몇 가지 가르침은 지금도 내 인생에 있어 확실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창씨개명을 거부한 탓에 정식학교에 등록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자신의 품 속 깊숙이 넣어둔 아픔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새겨 주셨다.
약간의 한학 교육을 마친 아버지는 교회에서 만든 평화 중학교를 (정식인가된 학교는 아니었지만 열성적인 선생님들 덕분에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분들 중 한분은 연세대 총장을 지내신 박대선 선생님이었고, 또 다른 맨토이셨던 김학수 선생님과는 작고하신 작년까지 오래도록 교분을 이어가셨다.) 다녔는데 그나마 당시 일본 순사와의 갈등으로 도피 차 남하하느라 학업을 접어야 했다. 남한에서 경희대학교 법학과에 진학, 학업의 기회를 잡았지만 이마저도 전쟁 통에 1년 다니고 졸업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학업에 대한 열망을 채우기 위한 노력을 잊지 않으셨다.
얘기들은 하버드에서 공부 때문에 한창 방황하고 있을 때 미국까지 찾아오신 아버지께 들었다. 그 때 아버지는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당신이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며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덧붙이셨는데 내게 있어 그 어떤 교육보다 효과적인 교육이 되었다.


- 제11대 국회의원시절 워싱턴을 방문하신 아버지와 함께 -

아버지의 산교육이 빛을 발했던 또 다른 기억은 국회의원에 낙선할 때다.
아버지께서는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공천 잡음 속에서 출마여부를 고민하고 있는 나를 부르시더니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던 당신의 경험(아버지는 11,12대 국회의원을 지내셨다)을 들려주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 때 나는 출마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정치 환경이 지금보다 훨씬 위험했기 때문이다. 가장으로서 내가 잘못됐을 때 나나 내 가정을 지킬 사람이 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생각을 굴뚝 같았지만 출마를 포기했다. 그러나 너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출마해라. 왜냐하면 아버지인 내가 있으니까. 아버지는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국회의원이 됐는데 국회의원 아버지를 둔 너는 아버지보다 더 큰 꿈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 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출마를 독려하시더니 모든 준비는 물론 새벽부터 뛰어다니며 뒷바라지를 해 주셨다. 물론 새벽까지 뛰어주셨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낙선이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네가 질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 출마가 앞으로 네가 정치하는 데 있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라며 담담한 어조로 위로해 주셨는데 그 위로가 지금까지 험난한 정치일정을 버티게 해 주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아버지의 힘은 수년 전 음해세력(당시 여당 수뇌부가 움직인 정황 등으로 정치적 탄압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몇 가지 사건들)에 의해 학교 총장이었던 아버지와 이사장이었던 내가 동시에 구설수에 오르고 내가 구속된다는 기사가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때에도 어김없이 발휘됐다.
어느 날 문득 내 방을 찾으신 아버지는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 할 때도 떳떳하게 살아온 내가 치욕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비장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학교에 관한 어떤 허물이라도 너는 명목상 이사장 일 뿐이지 책임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 네가 여기서 혹여 아버지와 학교를 위한답시고 경솔하게 행동하거나 발언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불효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면서 “너는 나를 위해 죽을 수 없지만 나는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다. 아마 지구상에 유일하게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일 것이다”고 덧붙이시는 아버지를 붙들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 유고 중이시다.
헌정회에서 중국여행을 가셨다가 고령인데다 뜨거운 여름날씨 때문에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놀라서 연락을 드렸더니 아버지는 “나는 아무 일 없으니 학교 방문하는 교육부 손님들 잘 영접하고 학교나 잘 지켜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그런데 현지를 통해 알아본 상황은 달랐다.
은근히 아들을 찾으시는 눈치라는 전언이고 보니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조급함이 일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잠시 후,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현지로 출발할 예정이다.
아버지, 언제든지 손을 내미세요. 예전에 아버지가 제게 해주신 것보다는 듬직함이 덜할지 몰라도 아버지 그래도 최선을 다할게요.
아버지 오래 사세요. 불효자식이지만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세상은 생각하기도 싫다.
벌써부터 하늘이 노래진다.
지금 이 순간,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하나님, 제발 우리 아버지를 지켜주세요.

(2011.6.12)
....홍문종 생각

2010년 9월 24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風樹之嘆, 대통령의 눈물

風樹之嘆, 대통령의 눈물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 대통령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봤다.

성공해서 새 옷을 사드리겠다고 한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회한의 눈물이었다. 대통령은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게 된다며 울먹이셨다.

명절을 맞아 風樹之嘆의 비통함을 토로하는 대통령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 같다.

나 역시 추석을 이틀 앞두고 나눈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를 떠올렸다.

전화를 거신 아버지께서는 머뭇머뭇하셨다.

평상 시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걱정이 되어 “무슨 일 있으세요?”라고 묻자 그 때서야 아버지께서 밝히신 용건은 “밥이나 함께 먹을까 해서....“였다.

사전 약속된 가족 모임일은 추석 전날과 당일이었다. 가족들 대부분 스케쥴과 싸우고 있는 형편을 감안한다면 추석 전전날 아버지의 ‘번개’ 제안은 아무래도 여의치 않았다.

죄송한 마음에 이번에는 내 쪽에서 머뭇거리는 상황이 됐다.

“그럼 내일 만나지 뭐... ”

정황을 감지하신 아버지의 정리로 이야기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지만 짧은 시간을 통해 감지된 아버지의 외로움이 속울음으로 남아 지금 내 가슴을 적시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부쩍 약해지신 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쓰이던 차였다.

세월을 한꺼번에 맞이해 버리기라도 한 듯 힘이 들어 보이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교육자로, 정치인으로 일평생을 바쁘게 살아오신 아버지시다.

자식들 생일이나 졸업식 행사에 늘 ‘부재중’이셨지만 우리들에게 언제나 당당하셨다. 아마도 넉넉한 그루터기가 되어 가족 보호의 책무를 다하셨다는 가장으로서의 자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가장 믿을만한 버팀목이셨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투박하고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가 아니다.

언제 이렇게 늙어버리셨나 싶게 야단을 쳐도 옛날처럼 힘이 들어간 목소리가 아니고 걸음걸이도 많이 변하셨다.

무뚝뚝했지만 선 굵은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대통령의 눈물에서 철들어 부모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부모가 안 계시는 것처럼 서럽고 허망한 일이 없음을 알고 난 이후의 회한을 보게된다.

孝를 백가지 선한 일의 근본으로 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던 선인들의 자취를 새삼스레 돌아보면서 효의 의미도 되새겨 본다. 효도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지만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모체가 자식들의 행복임을 감안한다면 결국 효도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겠다.

노인 세대를 가장 어렵게 만드는 건 외로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곁에 계실 때 부모 공경, 특히 부모님의 외로움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명절 아침이다.

가족들이 모여 도란도란 얼굴을 마주보고 조상들의 공덕과 부모 공경의 마음을 새기던 이 놀라운 전통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를 고민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한가위 연휴 지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10.9.22)

.....홍문종 생각